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2004년 9월 12일 새벽은 내가 아버지 편에 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가 체포됐다는 사실도, 어머니의 죽음도,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막연하고도 어렴풋한 불안을 느꼈을 뿐이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두 시간여 숨어 있던 세령목장 축사를 나선 후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왔다.
- P6

고양이는 천둥이 치기 전에 뇌에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의 뇌 변연계에도 비슷한 감관이 하나 있다. 재앙의 전조를 감지하면 작동되는
‘불안‘ 이라는 이름의 시계, 자리에 누운 후로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변방에서 죄를 입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밤에 간혹 구부려 누웠다가 망령되이 정이 일어나면, 인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리저리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용서를 받아 풀려나면 어찌할까? 고향을 찾아 돌아가서는 어쩐다지? 길에 있을 때는 어찌하고, 문에 들어설 때는 어찌하나? 부모님과 죽은 아내의 산소를 둘러볼 때는 어찌하며, 친척 및 벗들과 둘러모여 말하고 웃을 때는 어찌하나? 채소의 씨는 어찌 뿌리며, 농사일은 어떻게할까? 하다못해 어린애들 서캐와 이를 손수 빗질하고, 서책에 곰팡이 피고 젖은 것을 마당에 내다 볕 쬐는 데 이르기까지 온갖세상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일이란 일은 전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뒤척이다 보면 창은 훤히 밝아왔다. 막상이루어진일은 하나도 없고, 변함없이 위원군(渭原郡)의 벌 받아 귀양온 밥 빌어먹는 사내일 뿐인지라, 생각을 어느 곳으로 돌려야 할 지, 문득 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하여 혼자 실소하고 말았다.
- 노긍 <생각에 대하여,想解> - P110

또 가난한 집에 종살이하면서 두 눈이 늘 피곤하여, 일찍이단 하루도 일찍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등 긁고 머리를 흔들면서맑게 노래하며 환하게 즐거워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이를 부그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배를 가른다면 반드시 붉은 것이 있어 마치 불처럼 땅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니, 평생 주인을향한 마음이 담긴 피인 줄을 알 것이다.
네가 이제 땅속에 들어가면 네 아비와 어미, 네 형과 너의 안주인과 작은 주인이 마땅히 네가 온 것을 보고 놀라 다투어 내가어찌 지내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근년 이래로 온몸이 좋지 않아 이빨과 터럭은 시어져서 몹시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말하여다오. 그러면 장차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낯빛이 변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 노궁<죽은 종 막돌이의 제문, 祭亡奴莫石文> - P117

 천지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물러나 사노라니 사람들은 누추한 집이라고, 누추해 살 수가 없다고 말들 하지만, 내 보매는 신선 사는 땅이 따로 없다. 마음이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니 누가 이곳을 누추하다 말하리, 내가 정작 누추하게 여기는 것은 몸과 이름이 함께 썩는 것이다. 집이사 쑥대로 얽어두었다지만,
도연명도 겨우 담만 둘러치고 살았다. 군자가 여기에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허균<누추한 나의 집> 중에서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동안 잘 지냈어요, 마르탱?"
마르탱은 조심스레 베르트랑드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는 베르트랑드를 밝은 빛 아래서 좀 더 잘 보려고 고개를 갸웃이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내 아내가 이렇게 예뻤나요….…베르트랑드는 마르탱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르탱은 베르트랑드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로 되돌아왔다.
- P66

"저는 아르노의 눈을 바라보았어요."
베르트랑드는 코라스에게 말했다.
"저는 그의 눈 속에서 희망이 사라졌음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가 뭘 원하는지를 알아차렸어요."
정적이 잠깐 흘렀고 다시 말이 이어졌다.
"그는 저와 제 자식들을 위해 적어도 제가 목숨을 보전하기를 바랐어요."
그 말을 하면서 베르트랑드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처음으로 흐느껴 울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저는 그를 위해 그렇게 했어요." - P231

마을 사람들과 게르 집안 사람들은 화염에 휩싸여 벌게진 교수대 주변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조종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태양이 광장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 P2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꽃이 휘날리는 그 대문 앞에 서서 우다왕은 문 안쪽을 바라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창백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외투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싼 팻말을 꺼내들었다. 두께가 반치쯤 되고 너비는 세 치, 길이는 한 자 두 치쯤 되는 것이 마치 특별히 제조된 선물용 담배상자 같았다. 그는 그 팻말을 초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류롄 누님에게 좀 전해주게."
- P2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공증인이 늦게 도착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마을에서 13킬로미터쯤 떨어진 포사라는 곳에서 왔다. 그의 불쌍한 노새는 오는 내내 분명 무수히 발질을 받았을 것이다. 항상 검정 옷을 입고 있던 이 공증인의 턱은 헌 나막신 같았고, 손가락은 온통 잉크투성이였다.
마을에 올 때면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걸 알리려는 듯 늘 우리를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고 술자리를 마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회가 찾아들면 그는 많이 마셨다. 집에 되돌아갈 때 노새가 길을 아는 게 무척 다행일 정도였다.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