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잊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워서 혹은 선연한 상처 자국이 아직도 시큰거려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뛰는 심장의 뒤편으로 차고 흰 버섯들이 돋는 것 같다.
- P9

 일하고 기도하라, 라는 것이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본분이라고 한다면 그는 죽는 날까지 베네딕도회의 충실한 일원이었다. 그때 그렇게 긴 대걸레를 밀면서 오던 그의 모습은 내게 참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서향으로 난 유리창에 걸러진 석양빛이 복도에 고인 어둠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는 그 안을 천천히 헤엄쳐 오는 성스러운 물고기 같았다.
- P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치 연인의 매력에 흠뻑 빠진 어린 소녀처럼 그들 모두 마음이 약해졌던 것이다. 애정, 부드러움, 어린아이의 맹목적 애착심 등이 강력하게 모든사람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그건 그 작은 살인마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들은 그 사랑에 저항할 수 없었고, 저항하고 싶지도않았다. 그것은 마치 억제할 수 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것과 같았다.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눈물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놀랍게도 저항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을녹여 쓸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순수한액체 상태였다. 그들의 정신과 영혼은 완전히 용해되어 형태가없는 액체가 되어 버렸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들의 내면에서 불안정하게 동요하고 있는 심장뿐이었다. 좋건나쁘건 이제 모든 것은 푸른 옷을 입은 그 작은 남자의 손에달려 있었다. 모든 여자,  모든 남자가 다 그를 사랑했다.
- P336

뱃속이 약간 더부룩하긴 했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자신들의 음울했던 영혼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그들의 얼굴에 수줍은 아가씨 같은 달콤한 행복의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눈을 들어 서로의눈을 들여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은밀히, 잠시 후에는 공공연하게 다른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 P3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란츠 황제가 산업화와 증기기관차 철도에 반대한 것은 근대 경제발달에 수반되는 창조적 파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체제를 유지해주던 착취적 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기존 엘리트층의 이권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력을 끌어들일 것이기 때문에 산업화로부터 얻을게 없었을 뿐 아니라 대대적인 경제적 변화가 자신의 정치권력에 위협을 가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프란츠 황제는산업 및 경제의 성장을 막아 경제적 낙후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그런 의도는 여러모로 드러났다. 가령 오랜 세월이 흘러 전체 철 생산량의 90퍼센트를 석탄으로 뽑아내던 1883년까지도 합스부르크 영토에서는 철생산의 절반 이상을 효율성이 한참 떨어지는 목탄에 의존했다.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제국이 몰락한 제1차 세계대전까지도 직물 직조가 완전히 기계화되지 못해 여전히 수작업이 필요했다.
- P329

노예무역은 두 가지 부정적인 정치 과정을 촉발했다. 첫째, 초반에는 한층 더 절대주의적으로 변모하는 정권이 많았다. 오로지 남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유럽인에 팔아넘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첫 번째 과정의 결과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전쟁과 노예무역은 궁극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노예 획득 수단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납치하거나 소규모 공격을 통해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노예를 만들기 위해 법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어떤 죄를 짓든 노예로 전락시켜 징벌했다.  - P365

여전히 여러 사회과학자가 저개발 국가의 경제 문제를 고려할 때 1955년 아서 루이스가 처음 제기한 ‘이중 경제dual economy‘ 패러다임을적용한다. 루이스는 많은 후진국 또는 저개발 국가의 경제가 근대 부문과 전통 부문으로 나뉜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비교적 발전한 경제 분야인 근대 부문은 도시 생활, 근대 산업, 선진 기술 사용 등과 연관된다. 반면 전통 부문은 농촌 생활, 농업, 낙후된 제도 및 기술과 연관성이 있다. 낙후된 농경제도에는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 부재를 암시하는 공동체의 토지 소유도 포함된다.
•••••
개발경제학자 development economist에게 ‘개발의 문제‘는 농업 및 농촌으로 대변되는 전통 부문에서 노동력과 자원을 끌어다가 산업과 도시로 대변되는 근대 부문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 P372

 학술적 기반이 마련되고 아서 루이스의 이론이 확산되던 1950년대와 1960년대 남아프리카를 방문한 개발경제학자의 눈에는 원주민 자치지구와 번성하는 근대 유럽 경제시구 사이의 대조가 이중 경제 이론과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유럽인의 경제지구는 도시적이고 교육수준이 높았으며 근대 기술을 사용했다. 원주민 자치지구는 가난한 시골인 데다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노동 생산성도 굉장히 부진했고 주민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간을 초월한 아프리카 낙후성의 진수로 비쳤을 것이다. 이중 경제는 자연 발생적인 것도, 불가피한 필연도 아닌 유럽 식민 지배 정책의 산물이었다. 원주민 자치지구가 가난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되었으며, 주민의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아프리카 경제성장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유럽인이 장악한 광산이나 토지에 값싸고 무지한 아프리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정책의 소산이다.
- P3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그르누이의 그런 뻔뻔한 생각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리말의 집에 남아 있는 옷을 가져오기 위해서 딱 한 번 이 집을 떠날 뿐, 자신이 더 이상은 여기서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르누이는 감지하고 있었다. 진드기가 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수년 동안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려 왔다. 좋든 싫든 그는 일단 나무에서 떨어졌다.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그의 확신은 더욱 강했다.
-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1832년 정부는 ‘제1차 선거법 개정안 First Reform Act‘을 통과시켰다. 버밍엄, 리즈, 맨체스터, 셰필드 등에 선거권을 부여했고 의회에서 수공업자의 뜻이 반영될 수 있도록 유권자 기반도 확대했다. 이에 따른 정치권력의 변화로 정부 정책은 신흥 정치 이익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846년에는 그토록 증오하던 곡물법을 철폐시켜 창조적파괴가 단순히 소득만이 아닌 정치권력마저 재분배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당연히 정치권력의 재분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득의 재분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 P301

 산업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터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것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물론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사유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강화하고, 금융시장을 개선했으며,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한 독점을 와해시키고 산업 확장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을 제거해주었다.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준 것도 명예혁명이었다.
- P302

연합세력이 광범위했다는 것은 다원주의적 정치제도 창설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어떤 식으로든 다원주의가 뿌리내리지않으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나머지를 물리치고 권력을 찬탈할 위험이 상존했다.  - P306

에스파냐에 착취적 경제제도가 자리 잡은 것은 절대왕정이 수립되고 정치제도가 잉글랜드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카스티야왕국과 아라곤왕국은 서마다 서로 다른 집단 또는 ‘신분‘을 대표하는 의회인 코르테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의회처럼 카스티야왕국에서도 새롭게 세금을 걷으려면 코르테스를 소집해야 했다. 하지만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코르테스는 잉글랜드 의회와 달리 주로 도시 외곽이나 농촌 지역이 아닌 주요 도시만 대변했다. 15세기에는 고작 18개 도시만 대변했으며 각 도시는 두 명의 대의원을 파견했다. 따라서 코르테스는 잉글랜드 의회처럼 광범위한 시회집단을 대변하지 못했고 절대왕정에 제동을걸기 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이해집단의 결합제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입법 활동도 불가능했고 과세와 관련한 권한 역시 제한적이었다. 에스파냐 왕실이 절대왕정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코르테스를 배제하기가 한결 쉬웠다는 뜻이다.
•••••
잉글랜드 정부가 근대적이고 효율적인 조세 관료제를 수립하고 있을 때 에스파냐 정부는 이번에도 반대의 길을 걸었다. 왕실은 기업가의 사유재산권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하고 무역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관직과세금징수권을 매매해 세습시키기 일쑤였고, 한술 더 떠 면책특권까지사고팔았다.
- P3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