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않게 피클병 실험은 단순한 이산화탄소 사냥 이상의 경험이 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 나는 빠른 변화의 시기에 유기체가 맞닥뜨릴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았다. 온도 실험을 한 번 더 하려고 피클병을 열었지만, 피클 특유의 톡 쏘는 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성냥을 켜보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산화탄소가 거의 축적되지 않았다. 냉장고의 냉기와 보온등의 열기를 오가는 일이 소금물 속 미생물에게 버거웠던 모양이다. 이는 모든 생물이, 심지어 염분에 강한 세균조차 불안정한 기후에서는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열파, 한파, 그 밖의 극한 날씨는 이미 현대 기후변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사건들이 광범위한 스트레스는 물론이고 기회로도 작용하고 있다. 여기야말로 기후변화 생물학의 완벽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 P55

"유연성이 관건입니다." 월든 호수 연구의 핵심 결론을 요약하며 프리맥이 말했다. 일부 종에게는 기온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내장되어 있어 날씨가 더워지면 정해진 날짜에 상관없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가 안정적일 때는 어차피 모두 똑같은 일정에 따라 움직이므로 이런 형질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융통성 있는 식물이 유리해진다. 보수적인 종보다 다만 얼마라도 먼저 자라 꽃을 피우고 에너지를 저장하기 때문이다. 느림보들은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하고 결국 재빨리 대처한 이웃에게 자리를 내준다. 어떤 경우에는 군집 전체가 곤경에 처한다. 예를 들어 활엽수 아래에 피는 야생화는 제 머리 위로 나뭇잎이 그늘을 드리우기 전에 싹을 틔워 몇 주 동안 온전히 태양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날씨가 일찌감치 따뜻해지고, 융통성이 뛰어난 나무가 재빨리 잎을 내 하늘을 가려버리면 초봄의 광합성 기회를 빼앗긴 풀들은 정상적인 생장과 개화 일정을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일부는 종자를 맺을 힘조차 잃는다. 이로써 소로의 숲에서 생존은 점차 제 이웃의 일정을 쫓아가는 데 달려 있게 되었다. 프리맥의 말처럼 "일찍 잎을 피울 수 없는 식물은 경쟁에서 뒤처진다." 그렇다면 기후변화가 바꾸는 것은 기온에 그치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관계를 바꾼다. - P67

봄철의 새소리를 자연이 내는 가장 웅장한 목소리‘라고 불렀던소로는 월든 호수의 모든 새 울음소리를 기억했으므로, 매년 남쪽에서 건너온 새들이 도착한 시간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가 새에 관해기록한 자료는 이름과 날짜를 적은 긴 목록이라 얼핏 보면 식물 관찰 기록과 유사하다. 그러나 유사점은 거기까지다. 이제 봄은 식물의 입장에서 평소보다 훨씬 일찍 찾아오지만, 새들은 여전히 소로의 시대와 같은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에서 이주했든 옆 동네에서 왔든 새는 온도가 아닌 빛의 신호를 따른다. 봄이되어 낮이 길어지는 때를 기다렸다가 이동한다는 뜻이다. 한편 기후변화는 적어도 낮의 길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 차이가 바로 생물학자들이 타이밍 불일치라고 부르는 현상의 배경이다. 벌새가 도착하기도 전에 꽃꿀이 잔뜩 든 꽃을 피우는 식물이나, 늘 먹던 곤층의 부화 시기를 놓쳐 굶주리게 된 제비떼 등이 그 희생자다. 달라진 속도에 반응하든, 달라진 자극에 반응하든, 서로 오래 길든 좋은어느덧 자신이 길은 제대로 찾아왔으나 때를 잘못 맞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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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이미 현실이 된 세계

형님, 일전에 읽은 예언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c.1606)

어두운 밤, 퍼붓는 빗속에 텐트를 쳤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높이 올라왔기를 작동 중인 세탁기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폴대가 세차게 흔들리는 텐트에 몸을 구겨 넣었다. 거센 바람이 텐트의 젖은 입구를 후려치며 얼굴에 물보라를 뿌려댔다. 폭풍은 밤늦도록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젖어드는 침낭에 누워있다 보니 괜한 짓을 했다 싶어 후회막급이었다. - P12

복잡한 개념이라도 서사가 덧입혀지는 순간 공감대가 형성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중심으로 철학적 담론의 틀을 짜고, 칼 세이건이 상상 속 우주선의 빛나는 갑판에서 천체물리학을 가르친 데는 이유가 있다.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만으로는 건들 수 없는 뇌의 구역에 파고들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방식을 바꾸는 화학물질의 분비를 자극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학습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은 결국 이야기로 전달하고 이야기로 듣는 것에 달려 있다. 연구자로 살아가는 동안 처음에는 무관심에 가까웠던 기후변화에 대한 내 태도도 이야기를 통해 완벽하게 달라졌다. 그러나 내 마음가짐을 바꾼 이야기는신문의 머리기사나 치열한 정책 논쟁에 있지 않았다. 내가 연구하는 동물과 식물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진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나를 바꿔놓았다. - P16

 지난 30년간 우리 인간이 대처의 필요성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이에 지구의 다른 종들은 이미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연의 대응을 살펴보면, 아무리 복잡하고 해석이 달라도 결국 미래 기후 시나리오의 결과는 변화에 직면한 개별 동물과 식물의 반응과 행동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어떤 환경에서든 개의치 않고 살 수 있다면 날씨가 달라지는 것쯤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필요조건은 결코 일반화할 수 없다. 세상에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는것도 모두 세분화한 환경조건 때문이다. 지구상의 수백만 좋은 각자자기가 사는 곳의 특수한 생태적 상황에 적응해 변해왔다. 환경이 달라지면 대응이 불가피하고, 변화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어지면 결국 생태계 전체의 틀이 통째로 새로 짜이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현재의 기후변화가 심각한 위기로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가 속도인 것도 그래서다.  - P17

1971년 두 명의 새내기 고생물학자가 미국지질학회 연례 회의에 ‘단속평형설斷續平衡說‘이란 이론을 들고나왔다. 대학원 시절부터 친구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나일스 엘드리지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오랫동안 고생물학 분야의 골칫거리였던 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고리는 어디에 있는가?" 만약 진화가 정말로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라면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바뀌는 전이 과정이 화석 기록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화석 속 종들은 수백, 수천만년 전 지층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되는 경향이 있었다. 다윈도 이 문제를 아주 잘 인지했던 터라 "내 이론을반박할 가장 명백하고 심각한 이의 제기"라고 불렀고, 《종의 기원》에서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함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9장을통째로 할애할 만큼 신경 썼다. 암석이란 특정한 조건에서만 생성되고 게다가 극히 일부 암석에만 화석이 남아 있으므로, 대부분의 종과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 다윈은 "자연이 남긴 지질 기록은 세계 역사의 불완전한 보존이다. ••• 곳곳에 짧은 장만 남아 있고, 그마저도 몇 줄씩 흩어져 있는게 고작이다"라는 훌륭한 비유를 남겼다. 엘드리지와 굴드도 지질기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은 중간단계의 화석이 귀한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바로 빠른 진화다. 만일새로운 종이 긴 시간 동안 천천히 발생하지 않고 (지질학적 관점에서)하루아침에 생성되었다면, 그 변신 과정은 흔적을 남길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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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자>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비롯해 무슬림과 멕시코인, 라티노에 대한 인종주의적 발언들로 상심한미국인들의 폭넓은 계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유럽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방식과 결코 차이가 없다. 유럽에서 먹히는 것이 미국이라고 해서 왜 먹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비선거 동안 그는 백인 노동자들과 교육받은 백인 계층의 좌절과 환멸을 이용해서 성차별적인 발언과 인종주의적 구호들로 표를 얻었다. 그와 함께 갑자기 미국 내의 소수 집단들에 대한 폄하가 곳곳에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사회적인 계급 투쟁이 아니라 이미 미국의 백인 주민들이 자유주의 시대의 성취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내려는하나의 문화 투쟁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에 대한 관용 및여성과 동성애자들의 권리,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다시 거부되었고, 거부되고 있다. 문제는 사회적 연대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 P249

브룬힐데 폼젤은 히틀러의 집권이 무엇을 뜻하고 또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오늘날처럼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넘치고 대중 매체가 발달한 시대에는 원칙적으로 그런 무지가 별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모든 이상 발달 상황, 거의 모든 발언, 한계를 넘은 행위들은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순식간에 퍼지고, 지속적으로 저장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무한정 증폭된다. 인터넷의 거인 페이스북은 지금껏 증오의 포스팅과 선전의 확산에 대한 자신들의책임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플랫폼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생각의 확산과 인력 동원의 핵심 도구가 된 것은 이미오래된 일이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관심 영역에 따라, 그리고 진실과 무관하게 극단적인 인간들이 열망하는 모든것을 제공한다. 그 결과 알고리즘을 통해 주어진 내용들은 선입견을 강화하고, 기존의 세계상을 공고히 한다. 그사이 소셜 미디어들은 어두운 쪽으로 사용될 잠재력을 한껏 키우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의 선구자들이 인터넷 망을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으로, 투명성과 민주주의, 자유 운동의 수단으로 환호했던 그 열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인터넷 망은 증오를 배출하고 확산하는 장으로 타락해 버렸다. 사회각 영역에 존재하는 불만들은 과거보다 더 쉽게 하나로 뭉쳐져 확산되기 때문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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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터키에서 보고 있는 것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이 나라의 경우는 <민주주의>라는 공통 가치를 지향하는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겠다고 애쓰는 국가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터키를 지나 유럽으로 오고자 하는 난민들에 대한 공포는 유럽 민주주의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유럽 연합은 난민 정책에서 각국의 국가 이기주의로 인해 터키와거래에 나설 수밖에 없고, 에르도안 정권은 이 인간 경멸적거래를 이용해 터키 내부 문제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고 있다. 전쟁 지역 시리아의 난민들은 국제 정치의 놀이공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난민들에게 다시 국경을 개방하겠다는 터키 당국의 위협은 유럽 국가들에 패닉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또다시 난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심각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랬다가는 우익 포퓰리즘이재차 활개 칠 거라는 공포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공포는 난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난민들을 처리하는제반 문제와는 별개로 이미 유럽 사회를 인간의 권리와 존엄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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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 듯 다시 도하고 소리 낸 뒤 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벽 사이론 오후의 볕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 - P9

만두 집을 했던 엄마가 어떻게 피아노를 가르칠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욕심이거나 뭔가 강요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배움이 짧았고, 자신의 교육적 선택에 늘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다만 그때 엄마는 어떤 ‘보통‘의 기준들을 따라가고 있었으리라. 놀이공원에 가고, 엑스포에 가는 것처럼,
어느 시기에는 어떠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풍문들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어릴때 엑스포에 가고 박물관에 간 것이 그렇게 재밌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엑스포에 보내주고, 놀이공원에 함께 가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누구나 겪는, 평범한 유년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무지한 눈으로 시대의 풍문들에 고개 끄덕였을, 김밥을 싸고관광버스에 올랐을 엄마의 피로한 얼굴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이따금 내가 회전목마 위에서 비명을 지르는 동안, 한 손으로얼굴을 가린 채 벤치에 누워 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 P13

그녀는 후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유세를 떠는 것 같고, 그런검열과 의식적인 배려를 해야 하는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녀는 지각한 탓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쁜 배역을 억지로 맡아버린 학생처럼 연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내뱉는다. 이제 그만 후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예감에서부터 체념까지 사람과 헤어지는 과정을 순간 끝내버리는 듯한 훈련된 눈빛이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다. 후배는 궁둥이에 커다란 얼룩을 단 채, 화장실에 가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 그녀가 후배를 달랜다. 언니가 몸도 안 좋고 요즘 신경이 예민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생각해온 문제다. 서로를 위해 더 이상 함께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이번 달까지 여유를 갖고 정리하자.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후배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알았어요. 그녀가 후배를 바라본다. 후배가 말한다.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언니. 그녀는 아무 말도 않는다.
‘저 아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자기가 먼저 괜찮다고 해버리는 걸까?‘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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