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즉심과 보안처분
사법부와 독립성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의 시는 우리에게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쓰라린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는 아픔을 준다. "성한 사람들인 우리는 그동안 우리와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버림받은 천형 (天刑)의 사람들의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우리가 그같은 부류에 속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에만 안도한 채 "성한 사람들 저희들끼리의"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입술로는 기억하나 가슴으로는 잊어버리는 「성서」의 숱한 구절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예는 아마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수량화 • 추상화하려 드는 오늘날의 세태에서는 더욱그러하다. 그 한 마리의 양은 잊혀지고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가. 한 인간의 자유와 생명의 값어치는 다른 99명의 인간의 그것의 99분의 1로 계산되어야 하는가.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한다면, 지극히 작은 한 인간의 생명이 우주 전체와도 맞바꿀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잊혀진사람들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몽키차‘라고 불리는 호송차에 실려즉결심판소로 끌려가는 사람들, 한번 찍히면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 반국가사범이라는 낙인 때문에 언제라도 영장 없이 구속되어 재판 없이 무한정 수감될 수있는 거의 완벽한 무(無) 권리상태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불우했던 과거의 범죄생활 경력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범법행위로도 본형 (本刑)에덧붙여 10년 또는 7년의 보호감호처분을 덤으로 선고받게 될 위험에 놓인 사람들. 우리가 늘상 우리와 무연(無)한 타인이라는 착각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그들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심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는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22

즉결심판제도의 존재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어차피 경미하게 처벌될 사건에 대하여서라면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절차적 엄격성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간이. 신속한 처리를 도모하여 재판절차 자체에서 오는 번잡과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국가는 물론이요 피고인 본인을 위하여서도 도리어 이익이 된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편의주의에 일면의 진실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바로 그 편의가 피고인의 권리에 대한 소홀한 취급이라는 희생을 대가로 하여 추구되어야한다는 게 문제다. 뿐만 아니라 이 제도의 운용 여하에 따라서는 이같은 인권의 희생이 절차적 편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값비싸고 심각한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 이같은 함정에 대하여 특별한 주목과 경계가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현행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에 규정된 즉결심판절차가 정식재판절차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자. 우선 재판청구권자가 검사가 아닌 경찰서장인데, 이것은 수사절차에 있어서의 적법성의 보장이 그만큼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피고인의 진술서와 기타 경찰서장이 제출하는 서류나 증거물만 있으면 개정(開廷) 없이도 심판할 수 있으며, 벌금 또는 과료를 선고하는 경우에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는 때에는 피고인의 진술을 듣지 아니하고 형을 선고할 수 있게되어 있다. 이같은 경우에는 피고인의 유·무죄와 그 정상(情狀)에 관한 판단이 사실상 경찰 조사과정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꼴이 된다고 해도과언이 아닐 것이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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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정착시키고 인구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 반대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주시키라. 그리고 가장 큰 대륙을 통혼과 친족 관계를 통해 화합과 우의로 이끌라

알렉산더는 아주 거대한 대륙 규모의 사회적 통합을 꿈꾸었던것 같다. 그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또 제국의 다른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다른 대륙의 사람들 간의 대대적인 양방향 국가 주도 이주와 통혼을 제안했다. 또한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동등하며, 이주와 혼인을 통해 양측의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친 갈등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군인들이 새로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에 정착할 수있도록 장려했고, 그들이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게 함으로써 그는 그 과정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그쳤고, 양방향이 아닌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한 방향의 이주일 뿐이었다. 그가자신의 계획들을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었는지, 여성의 이주도 계획했는지, 그리스 도시국가에도 페르시아인들을 정착시킬 예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후계자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이 그리스 혈통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자랑스러워했으며, 그의 이념을 실행할 의도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거대한 이주 계획은 그와 함께 사라졌다. - P96

18세기 들어 여러 학자들이 산스크리트어와 서양의 고전 언어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언어들이 단일 어원에서 유래했으며, 인도 북부, 이란 및 유럽 대부분의 언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상상의고대 민족이 탄생했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통과해 이주했으며, 그들의 유산은 서쪽의 아이슬란드어에서 동쪽의 벵골어에 이르기까지 서로 관련된 매우 광범위한 현대 언어로 이어졌다. 그러나인도-유럽인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모르고, 그들의 대규모 이주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도 없었으며,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언어가 확산됐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일부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이 답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아리아인에 대해 언급한 고대 자료에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는데,
그들은 매우 허술한 서면 증거를 바탕으로 초기 산스크리트어 문헌중 리그베다 Rigveda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경전- 역자 주)에 나오는 아리아인들은 서쪽에서 온 이주민이거나 침략자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에 따라 아리아인의 조국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지역들이제시됐는데, 그곳에는 독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주장들은 훨씬 더허술하고 인종차별로 가득 차 있었지만 여러 나라의 많은 학자들이아리아인이 원래는 금발에 파란 눈과 하얀 피부를 가진 독일인이고,
그들이 북유럽에 있는 조국을 떠나 멀리 이주하여 통혼함에 따라 신체적 특성들이 희석됐다는 개념을 수용했다.
영국 태생으로 독일에 살고 있던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이라는 작가가 1920년대에 이러한 개념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알려준 핵심 인물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치는 독일인이 원조 아리아인이며 지배 인종이라는 이념을 채택했다. 그들은 심지어 고대 인도의 스와스티카 swastika 문양을 당의 상징으로 차용했다. 히틀러가 패배한 이후로 서방에서는 신나치 집단을 제외하고는 아리안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인도 이외 지역에서는 스와스티카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 P101

인도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알지도 못하는고대 이주에 대한 논쟁이 그 정도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카스트 제도, 성별, 언어, 종교, 피부색 그리고 이주 같은 현대 인도의 정체성을 놓고 벌이는 투쟁의 일부다. 그 정체성에 대해 깊은 의견 충돌이 있으며, 이 문제 하나 하나에 깊은 분열이 담겨 있다. 아리안 논쟁은 그 모든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렇게 빈약한 한 단락이 아니라 별도의 책으로 다뤄져야 할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다. 그러나 인도의 권력이 대체로 아직도 피부가 더 희고, 카스트 계급이 높고,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북부 남자들의 손에 놓여 있다는 점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유전학자들의 증거와 주장을 믿는다면 그들은 약 4천 년 전에 인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유럽어 사용자의 기원을 찾는 데 있어서 해결해야 할 더광범위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 대초원이든 다른 곳이든 조상의 모국이 존재한다는 개념 그 자체다. 우리에게 그런 근원이 있다는 전제하에 모든 논쟁이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에 더 가깝다. DNA, 고고학, 언어 분석 또는 문화적 전통 등을 통해 우리의 근원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 지역들은 기껏해야 고대 조•상들이 통과한, 깊은 역사 속의 임시 거주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 P106

그리고 그들이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파시족이 배를 타고 구자라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서로 언어가 달라 그곳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왕은 자신의 영토에는 이주민을 받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찰랑찰랑할 정도로 가득 찬 우유 항아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주민들의 지도자였던 조로아스터교 사제는 그 항아리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었고 우유는 넘쳐흐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달고 맛이 좋아졌다. 그의 지혜 덕분에 파시족은 구자라트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 P109

로마는 로마 공화국을 종식시키고 제국으로 탄생했다. 이때쯤 ‘로마‘라는 단어에 문제가 생겼다. 물론 로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로마가 오지 너머까지 정복하여 세력이 커지면서 로마는 도시 이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로마는 더 이상 일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수도, 문명의 본보기, 군사적·종교적 권세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제 한 도시가 아니라 그들에게 정복당한 모든도시 국가를 통합하는 이름이 되었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온전한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국경 안에 사는 모든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인이었다.
로마라는 개념은 점점 더 성장하여 도시로서의 로마 없이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로마가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굴러가 정복할수 있는 것 같았다. 오비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로마는 북해에서 사하라까지, 대서양에서 흑해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 시에 한 발짝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시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시민권을 샀을 수도 일을 통해 얻었을 수도, 또는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한 군인일 수도 아니면 그냥 로마 시민의 자녀일 수도 있었다. - P121

야만인 barbarian이란 개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복잡한 개념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다른 용어 집단을 파생시킨다. 대부분은 ‘야만스러운‘, ‘야만성‘과 같이 경멸감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지만 때로는 베르베르족 Berbers, 바르바리 해안 Barbary Coast처럼 그냥 서술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로마인들의 변화하는 세계관, 좀 더 구체적으로 로마인들이 국경 근처에 사는 외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다. 원래 ‘야만인‘은 그리스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를 묘사하는 의성어였으며, 헤로도토스 같은 초기 그리스 작가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중립적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기 그리스에서는 이 말이 야만성과 어리석음을 함축하는 부정적인 용어가되었고, 주로 라틴어에서 그랬다. 하지만 ‘로마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국 성장에 따라 달라진 것처럼 ‘야만인‘의 의미도 달라졌다. 그리고 ‘야만인‘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로마인‘의 반대말이되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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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병마로 조영래를 잃고 난 후 선후배 동지들과 친구들이 모여 그의 문집 하나 엮어보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제 그를 보낸 지 1주기를맞으며 한권 책으로 펴내게 되었지마는 지금 책을 펼쳐들고 그의 글을 다시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작은 성취감이나 보람보다는 다시 한번 가슴속을 찌르르하게 저려오는 분함과 아쉬움이다.
무엇이 그토록 빨리 조영래를 우리에게서 앗아갔는가. 그가 불치의 병으로쓰러졌으니 어떤 이는 그 병마의 안정사정 두지 않는 비정함을 원망하기도 하고또 어떤 이는 그토록 자기 건강을 돌볼 줄 모르고 밤새워 글 쓰며 줄담배를 피워대던 본인의 무심함을 탓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가 그저 병마의 장난으로 쓰러진 것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저 멀리 3공하에서 3선개헌 반대, 반유신투쟁의 앞장에 섰던 그에게 가해진 짧지 않은 옥고는 그의 몸에 얼마나 끈끈한 피로의 찌꺼기를 쌓아놓았으며, 장장 5년여에 걸친 도피생활 속에서의 암담한 강박감은 그의 심령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겨놓았을까. 그리고 우렁찬 민주화의 새날을 눈앞에 두고 야당이 분열함으로써 정권교체 실패의 한을남긴 저 87년 대선 이후의 실의에 빠진 나날들, 그 좌절과 허무의 세월 속에서그가 참아내야 했던 아픔 같은 것들이 모두 모이고 쌓여서 그의 육신을 쓰러뜨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 5.16 군사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군부독재의 우악스런 박해, 그 독재세력에 빌붙어서 역사를 왜곡시키고 눈앞의 영달만을 탐하던 무리들의 온갖 음모, 그리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정신못 차리고 분열과 파쟁으로 대사를 그르쳐버린 한심한 정치인들의 어리석음 같은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서 우리의 희망이었던 청년 조영래를 음해한 것이다. -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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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야간족은 수천 명의 후손들을 남겼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과의 혼인을 통해 얻은 자손들로 크리스티나 칼데론처럼 ‘순수 혈통‘이거나 야간어를 쓰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중 많은 이들이 서로에게, 또 인구조사원과 방문객들에게 스스로를 야간족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그들을 통해 야간족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은 사실 애매하기도 할 뿐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적이기도 하다. 특히 그 말이 유구한 인류의 역사와 비교하면 아주짧은 기간 동안 동족끼리 섞인 소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경우에는더욱 더 그렇다.
실제로 모든 야간족들은 나, 티에라 델 푸에고의 유럽인 정착민,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공통 유산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모두 네안데르탈인과 약 1억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난 현대 인류의 후손들이다. 우리의 혈족관계는 순수 혈통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야간족의 혈통을 잃는 것이 아니라 야간족의 문화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 P40

메소포타미아의 마을 중 일부는 지방 도시가 되었고, 시골에서이주민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계속 농사를 지었지만 도기, 직조, 금속 가공 등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그 기술과 제조품을 식량과 물물교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 도시들은 흔히 관청이나 종교 건축물 같은 것들을 갖고 있었고, 일부 거주자들은 사제나 통치자가 됐고 겸직을 하기도 했다. 재산과 신분은 상속할 수 있었고 소수의 사람들은 법을 만들고 세금을 부과했다. 도시 중 일부는 성장해 부유하고 강력해졌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쯤에는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축적된 부, 식량과 농지를 방어하기 위해 장벽이 세워지고 경계가 표시되었으며 군사들이 양성되었다. 그들은 다른 도시 국가들의 공격보다는 약탈자들, 즉 자기 소유의 땅이 없고 도시의 주민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유목민들을 더겁냈던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수렵채집인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농부 그리고 도시의 주민으로 인류가 처음으로 정착한 장소였고 사유 재산 개념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새로운이주민들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이기 때문이다.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이주 이주민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현존하는 서면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때 나왔다는 점이다.
••••••
따라서 이 이야기는 유목민을 배척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화합과 혼혈교배를 권장하는 것으로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유목민들이 도시인들과 다른 삶을 살 수는 있지만 야만적이거나 완전히 다른 종족은 아닌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유목민들이 도시 사람들과 다르지만, 그들도 ‘문명화‘되어 도시 생활에 정착할 수 있으며, 도시 처녀와 혼인까지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르투를 강하고, 관대하고, 결단력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있는 이면에는 사실 유목민을 깔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도시 국가에 다문화를 수용하는 태도가 있음을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고대의 다른 이야기에는 한때 우리 모두가 유목민이었다는 희미한 인식이 깔려 있기도 하다. - P50

중국이나 인도, 이집트 등에서 발굴된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이주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그들은 노예나 죄수, 국경 너머에서 온 수상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사람들, 야만인으로 묘사된 지나가는 유목민, 혹은 선사시대 전설에 나오는 인물 등 일반적이지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그려졌다. 또한 그들은 대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목소리 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리고 성벽에서 환호하고 바빌론 강가에서 울부짖었던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고대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에서는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대홍수 이후 인구 재건에 나서고, 홍해를 건너 도피하는 등 성경 어디에나 이주민들을 찾아볼 수 있기때문이다. 성경을 이주 지침서로 읽어도 될 정도다. 게다가 대부분의 이주 관련 기록들과는 달리 성경은 이주민들에 의해 이주민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와 관계가 없기는 하지만, 약 2,500년 전 구약이 처음 쓰여질 당시 사람들이 이주를 보는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 P55

영국 이스라엘주의 운동은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중 한 명은 1981년 사망할 때까지 영국-이스라엘 세계 연맹 BIWF, British-Israel-World Federation의 후원자였다. BIWF는 아직도 존재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축소되었고 더 이상 버킹엄 궁 안이 아닌 잉글랜드 북부 비숍 오크랜드 Bishop Auckland에 본부를 두고 있다. 이들은우익 기독교 압력단체가 됐으며, 영국인이 단 부족의 후예라는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중동에서 오는 이민자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BIWF는 브렉시트의 열렬한 지지 단체였는데 "어려운 협상이 진행 중이니주님께서 바빌론 같은 EU에서 영국을 완전히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며 추종자들에게 영국의 EU 탈퇴를 지원하기 위해 하루동안 금식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브렉시트를 논할 때조차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이주 이야기를 잊지 않은 것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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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짧고 특별한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전쟁과 지중해를건너는 힘겨운 여정에서 살아남아 유럽에서 새 삶을 시작한 한 이주민의 이야기다.

AT는 30대 남자로 아시아 지역 국가의 좋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내전에서 패배한 진영에 속해 있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한 전사였으므로, 자신이 곧 밀려들어올 승리한 적군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AT와 언어와 종교가 같은 그들은 이미 AT의 장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 - P5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으로, 그가 경험하는 두번째 문화는 첫 번째 문화와 크게 다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도전 과정을 겪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머문다.

내가 이 정의를 선호하는 이유는 국적이나 민족, 국경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현대와 고대 이주민,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또 이주민들이 이동한 거리나 통과한 국경보다는 그들의 경험을 강조하고있다. 이는 또 자유롭게 선택해 이동하는 이들과 강제로 이주당하는 이들을 양극으로 나누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다양한 경우들을 다 포함한다.
이것은 ‘이주민‘이라는 단어가 노예와 배우자, 난민과 은퇴생활자, 방랑자와 주재원, 정복자와 구직자 등 다양한 경험을 한 이들을아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본인이 의도해 이주한 사람, (나처럼)단기 체류 목적으로 어딘가 갔다가 주저앉은 사람, 추방되거나 원치않는 망명 등으로 강제로 밀려 이주한 사람 등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다. 또한 겨우 몇 킬로미터 이동해 국경을 넘은 사람이나 같은 나라안에서 먼 거리를 이동한 사람도 해당된다. - P10

이와 관련된 언어들은 폭발력 있고 혼란스러우며 최근에는국가와 국경 개념, 인종과 인종차별주의와 연관된다. 이민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은 보는 시각만 다를 뿐같은 이주민인데도 그들에 대한 태도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이주방향에 따라 함축된 의미가 매우 다른 것이다. 부유한 나라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은 보통 대담한 모험가로 여겨지는 반면 그곳으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기생충처럼 묘사되곤 한다. 이민자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 거주민들과 동화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들의 다른 점을 지키라고 주문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문화유산을 지키라고 한다. 이러한 편견 속에서 이민자들은 인간 이하가 되었다가 초인이 되었다가 하며, 낭만적으로그려지다가 뭇매를 맞기도 하고, 찬사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P11

그 중 가장 긴 여행은 남아메리카 남단에 위치해 지금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지역인 티에라 델 푸에고 Tierra del Fuego 군도로 가는 여정이었을 것이었다. 인류가 그곳에 처음 도착한 것은 약 만 년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주민들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시아를 지나 알래스카,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해 내려가 남극에 가장 근접한 인간 정착지인 남위 54도 이남에 도달했다. 최근까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의 초기 이주민들이 대평원에서 어슬렁대는 큰 사냥감들을 따라 내륙으로 온 수렵민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켈프 하이웨이 가설 Kelp Highway Hypothesis로 초기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사냥꾼들이 아니라 해안선으로 이동한 어부들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물 뷔페‘라고 부를 정도로 온갖 식용 바다 생물로 가득한 해양계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해초 숲을 따라 이동했다는 것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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