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우리나라 형법학 교과서에는 보안처분제도에 관하여 "자유사회의 이념에 반하는 것으로서 인정될 수 없다"라는 지극히 간략한 설명만이 수록되어 있었다.
1972년에 제정된 유신헌법이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보안처분을 당하지 아니한다"라는 조문을 둠으로써 이 보안처분은 처음으로 우리헌법체계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 이후 위 헌법규정에 근거하여 최초로 제정된 보안처분법이 정신장해자가아닌 반국가사범 전과자를 처분대상으로 하는 사회안전법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사회안전법의 적용대상자는 내란죄,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 반국가사범 전과자들이다.
이들에 대하여 취해질 수 있는 보안처분은 보호관찰, 주거제한, 보안감호처분 등의 세 종류이고, 이 중 감호처분이란 보안감호소에 2년간 구금하는 조치를 말하는 것인데, 매 2년마다 갱신되어서 무한정 계속될 수도 있게 되어 있다.
보안처분의 결정기관은 법원이 아니라 법무부장관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산하에 이를 심의·의결하기 위한 보안처분심의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으나 그 위원들은 모두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보안감호처분의 요건에 관한 규정은 지극히 간단하다. 즉 보안처분대상자 중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이 있거나 일정한 주거가 없는 자" 또는 보호관찰처분이나 주거제한처분에 위반한 자가 이 처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죄를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법무부장관의 권한에 사실상 일임되고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에 의하면 "권력의 분립과 인권의 보장에 대한 규정을 두고,있지 않은 나라는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근대헌법이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모두 국가권력, 특히 행정권력의 횡포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려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제퍼슨이 강조하였듯이 민주주의는 권력에대한 불신과 질서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견지에서 말한다면, 법무부장관의 결정 여하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영장 없이 구속되어 무한정 보안감호소에 구금되는 신세가 될 수 있게끔 된 보안처분대상자들은 기본권에 관한일체의 보장을 박탈당한 완벽한 무권리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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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스페인 역사와 이주 역사 모두에서 중요한 해다. 콜럼버스와 니나, 핀타, 산타 마리아 등 세척의 배가 그해 8월 세비야바로 서쪽에 있는 팔로스에서 출항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전에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여파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1492년 1월, 서유럽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인 그라나다 토후국은무슬림이 처음 스페인에 도착한 지 780년 만에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군대에 항복했다. 메디나에서 온 고대 이주민의 후손으로서방 기독교 세계에서는 최후의 무어인으로 기억되는 에미르 무함마드12세는 모로코로 망명했고, 수천 명의 무슬림이 그라나다에서 도망치거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때 스페인에서 제노바 사람들과 비슷한 특권을 가졌던 유대인들의 추방은 훨씬 더 극적이었다. 1492년 5월, 수십 년간의 박해끝에 그들은 결국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 약 15만 명의 유대인들이 도피한 것으로 보이며,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개종을 하고 남았지만 여전히 박해를 당했다고 한다. 떠난 사람들은 개인 소지품만 가지고 갈 수 있었고,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흩어졌다.
기독교 국가로 간 유대인들은 특히 더 고생이 심했다. 이웃 포르투갈로 간 유대인들은 강제로 개종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포르투갈에 있던 유대인 난민의 자녀들은 기독교로 집단개종했고, 그중 수백 명은 무인도였던 아프리카의 상투메 섬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북아프리카와 오스만 제국으로 간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무슬림이 다수이던 국가에서 번성했던 세파르디 유대인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었다. 20세기 후반, 그들 대부분은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났고, 그중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로 갔다. - P198

콜럼버스의 처음 목적은 무역과 탐사, 외국 통치자들과의 만남이었으나 곧 정착과 착취로 변질되었고, 그가 유럽으로 보내는 주요상품은 금, 면화, 유향수지와 노예였다. 그는 히스파니올라로 가던 길에 발견한 남쪽의 더 작은 섬들에서 식인 행위의 증거를 발견했고, 그 이야기는 곧 유럽으로 전해졌다.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온 의사가 ‘섬 중 최고‘라고 한 푸에르토리코에 상륙했는데 그곳 현지인들은 유럽인을 보자 도망쳤다. 그리고 히스파니올라에 다시 돌아온 콜럼버스는 나비다드 정착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섬에 남아 있던 선원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신대륙은 더이상 없었다. - P208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유럽인 한 명당 인디언 백명을 처형한다‘는 비공식적 합의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라스 카사스의 주장에 따르면 1492년 300만 명이던 히스파니올라의 ‘인디언‘
인구는 반세기 후 30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의 주장을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 같다. 히스파니올라가 그때나 지금이나 카리브 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섬이기는 하지만 원주민의인구는 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가 그 섬에 상륙한 이후 수십 년 동안에 살인과 기근, 질병 등이합쳐져 히스파니올라 타이노족이 거의 멸종당하다시피 사라지고, 언어와 문화 또한 대부분 말살된 것은 확실하다. 인구가 너무 극적으로감소하자 식민지 개척자들은 다른 섬에서 노동 인력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바하마 제도에서 많이 데려왔는데, 라스 카사스에 의하면 ‘강제 이주로 인해 그곳의 원주민 인구가 전멸했다"고 한다. 그들대부분은 히스파니올라에 와서 죽었고, 새로운 대규모 강제 이주민집단이 배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노예들이었고,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까지 타이노족이 주로 살고 있던 쿠바, 자메이카, 푸에르토리코도 모두 히스파니올라와 비슷한 방식으로 파괴되었다. 1519년부터는 중앙 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 인구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스페인 이주민들이 들여온 천연두가 아마도 가장 큰 사망원인이었을 것이다. 멕시코의 아즈텍 문명은 소수의 유럽인과 몇몇 현지 협력자들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극적인 인구 붕괴의 원인은 질병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스페인이 우월한 군사 기술과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도착하면서 페루의 잉카 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을 손에 넣었고 완전히 통제하게되었다. - P211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잔혹했다. 16세기초 아메리카에 있던 스페인 이주민들은 ‘비호감 이주민 명단‘에서 꽤 상위권에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은 일종의 정복자의 이주 방식과 행동의 틀을 규격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나라별로 편차는 있지만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 또 훨씬 더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덴마크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유럽 식민주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때까지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원시인이나 야만인이라고 부를만한, 다른 대륙이나 아주 먼 지역의 원주민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들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자기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아랍인이나 몽골인을 상대해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카리브해에서 만난 원주민들은 달랐다. 그곳에서 유럽인들은 바퀴도 없고 철도 없고 가축도 없는, 하나님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 그리고 토지 소유권과 의복에 대한 생각이 매우 다른, 아주 낯선 방식으로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콜럼버스와 일행들은 미지의 대륙으로 모험을 떠나면서 개의 머리가 달린 인간, 외눈이 이마 중앙에 박혀 있는 괴물, 아니면 온통 여자만 사는 섬 등 허무맹랑한 여행기에서 언급될 만한 괴물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런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사람이라고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지만 자신들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 원주민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들을 괴물이나 다른 동물종인 것처럼 취급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스페인 사람들의잔혹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의 글을 살펴보면 당시 또 다른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원주민을 ‘고귀한 야만인‘으로 낭만화하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P214

그러나 현대적 맥락에서 더 중요한 것은 타이노 운동을 현대 정체성 정치의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선택권은 더이상 과학자나 학자, 정부에게 있지 않으며, 당사자인 개인과 집단에게 주어지고 있다. 스스로를 누구라고 설명할지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갖게 된다는 것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자유롭게도 하지만, 자기편을 선택해야 하고 자신을 단순한 한 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개인이 자신을 타이노족, 아메리칸 인디언, 라티노, 흑인, 야간, 제노바인, 영국인 또는 유럽인이라고 밝히기를 원한다면, 때로 그 정체성이 정확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굳이 다른 것을 택하라고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복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고, 누군가의정체성이 상황이나 대화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어떨까?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때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우리의 깊은역사, 공동 혈통, 이주민으로서의 역사(고대와 현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같은 인간으로 공유한 유산과 정체성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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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잔을 들었다. 선화가 잔을 들고는 내 잔 옆에 붙였다. 김 부장과 삼척동자도 잔을 들었다. 싸부는 식혜 캔을 들었다. 우리는 여느때처럼 건배했다. 순간 슈퍼할아버지가 관에서 나와 호상도 아닌데예절도 모른다며 버럭 하실 것 같다. 상관없다. 슈퍼할아버지의 잔소리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망원동 옥탑방의 밤이 깊어갔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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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잠시 멈춰 이슬람교와 초기 기독교를 비교해보자. 이 둘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 이주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랬다. 물론 이슬람은 최초의 지상 제국을 건설하는 데 기독교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신학 체계와 실천에 있어서 이동성이 아주 높아, 거의 이주성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기에 성지나 창시자들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두 종교 모두 특정영토나 민족 집단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한 유대교나 힌두교와 달리특정 공동체나 장소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두 종교의 창시자들이 원거리 이주민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이주 이야기들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예수는 이동 중에 말구유에 태어나 베들레헴에서는 집 없는 이주민이었고 이집트에서는 난민이었다. 무함마드는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다닐 것을 권장했다.
이 두 종교의 성장은 불신자들을 개종시키려는 열망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그 신도들이 창시자들이 태어나고 죽은 거룩한 성지를 떠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유랑해야 함을 의미했다.  - P157

안달루시아에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서반구에서 가장 위대한 이주민이자 탐험가였던 전형적인 북유럽인들도 소수 볼 수 있었다. 스페인 남부에는 우리가 바이킹이라고 알고 있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기 844년에 세비야를 습격했지만 결국 안달루시아인들에게 패했다. 많은 바이킹들이죽었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개종한 바이킹들은 세비야 외곽에 정착할 수 있었고 치즈 제조업자로 일했다고 한다.
바이킹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이 있겠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남부스페인의 무슬림 치즈 제조업자를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이킹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이동하는 북유럽인, 특히 배를 타고 먼거리를 여행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을 떠올리지만, 보통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극도로 부정적인 것부터 요란스럽게 긍정적인 것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어찌되었든 바이킹에 대한 고정관념은 대개 바이킹 이주의 규모와 범위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 P160

최근 수십 년 동안 영어권 역사가들도 바이킹에 대한 기록을 바로잡아왔는데, 특히 바이킹 시대의 복잡한 이야기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바이킹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일부 바이킹 이주민들이 유럽 지배 계층 엘리트에 동화되는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바이킹의 약탈, 무역 및 이주가 지리적으로 놀라운 규모였다는 내용이었다. 바이킹들은 바다와 강을 통해고향에서 2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세 방향으로 이동했다.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캐나다 연안까지 갔으며, 남서쪽으로는 영국, 프랑스, 지중해까지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통해 흑해와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
바이킹이 이렇게 이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나 고국의 인구과잉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뛰어난 조선과 항해 기술을 갖추고 있어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다른 요인들이 있었는데,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면 부와 권력 그리고 토지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폭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깊은 호기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뒤섞여 세 방향으로 전개된 대대적인 바이킹 이주의 동기와 이주민들의 삶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고고학 및 유전학적 증거가 남아 있어 바이킹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세부사항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많은 이주민들이 그랬듯이 정작 바이킹 본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 P161

아이슬란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주 이야기에서 예외인 경우였다. 한동안 그곳은 지구상에서 영주하는 원주민이 없는 마지막 주요 대륙 중 하나였으며, 870년대에 시작된 첫 정착 이후에도 대규모이주민 유입은 없었다. 약 100년 후 바이킹이 이주해 들어왔지만 그들이 경작할 만한 농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슬란드는 고립된위치와 낮은 이민율로 인해 유럽에서는 드물게 높은 수준의 유전적•문화적 연속성이 유지되었다. - P166

어떤 면에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족보망은 의미가 거의 없으며 바이킹 유전자의 확산도 일시적인 흥미거리일 뿐이다. 우리가 야로슬라프, 보에몽,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해롤드를 정말 바이킹이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들의 DNA 중 몇 퍼센트가 스칸디나비아 혈통인지는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두 가지 중요한 이주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첫째, 바이킹과 그 후손은 이른바 중세 귀족의 중심부가 되어, 여왕이 외국인인 경우는 흔한 일이었고, 왕이 외국인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기회는 동유럽의 기독교 국가 국경 지역이나,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에 있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은 특히 둘째 아들이나 사생아들에게 큰 기회였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성지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것 같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한 이들의 사명은 곧 추악한 토지 수탈로 바뀌곤 했다. 그 당시 서유럽인들이 통치하는 십자군 왕국이 여러 개 수립되었으며, 그들은 서로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째, 이 이주 이야기는 바이킹에 관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중심에는 미개하고 잔인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북쪽의 이교도 집단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 중심의유럽에서 경멸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유럽 엘리트층에 편입되면서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이킹과 그 후손들의 군사적 능력이 성공의 주요한 이유였지만, 현지와 적극적으로 동화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현지와의 동화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이름과 언어, 관습 등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오딘과 토르 등자신들의 신들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이킹들은 그들의 역사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주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했고, 고대 북부 이교도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궁정 역사에 남겨놓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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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제도가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사례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래에 이르러 정치적 또는 사회적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사와 견해를 말이나 글로표명한 많은 사람들이 경범죄처벌법 제1조 제44호의 유언비어 날조유포라는 죄목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정치사회문제에관하여 표명된 사실적 주장이나 견해의 옳고그름이 즉결심판절차에서 판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즉심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부적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경범죄처벌법 제4조는 "이 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침해하지 아니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다른 목적을 위하여 이 법을 함부로 적용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백히 돼 있는데, 근대사회에 있어서의 개인의 자유의 중핵이자 민주정치제도의 근간이기도한 국민들의 의사표현과 여론형성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하여 전혀 그 입법목적을 달리하는 경범죄처벌법을 동원한다는 것은 위 남용금지규정의 명백한 위반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 P28

연전에 미국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이 정신이상자라고 하여 석방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근대 형법이론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즉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형벌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저질러진 범죄행위에대하여 사후적 · 회고적인 비난과 응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같은 일벌백계적 응징을 통하여 자유의지를 지닌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범죄행위를 스스로 회피하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일반예방의 목적을 위하여 발동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벌은 범죄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난 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자유의지가 결여된 이른바 책임무능력자의 행위에 대하여는 발동될 수가 없는 것이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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