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인간은 한때 모든 신비로운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존재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신비하지 않다는확신으로 이 책을 썼다. (왜냐하면 그 비밀이 풀렸기 때문이다.) 다윈과 월리스가 그 비밀을 풀었다. 비록 당분간은 우리가 그들의 설명에 각주를다는 작업을 계속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가장 심오한 문제를 해명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설명에 대해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믿기지 않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초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쓰게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 문제란 바로 복잡한 설계이다. - P9
자크 모노가 잘 꿰뚫어 보았듯이, 다윈주의와 관련된 고충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다윈주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다윈주의는 너무나 단순한 이론이어서, 어떤 사람은 물리학과 수학에 비교하면유치할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약하면 ‘유전적인 변이를 수반한계획적인 번식은, 축적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다윈주의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윈주의가단순하다는 믿음이 거짓이라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발표된 지 300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 지 2,000년이 지나 19세기 중엽에 다윈과 윌리스가그 이론을 생각해 낼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떻게 그처럼 단순한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 홉,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사상가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발견하지 못했을까? 왜 빅토리아 시대의 두 박물학자가 등장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을까? 그것을 간과한 수학자와 철학자 들은 무엇이 ‘잘못‘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그런 강력한 이론이 아직까지 대중들의 의식 속에 흡수되지 못했을까? 인간의 두뇌는 마치 다윈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게, 그리고 믿지 못하게끔 특별히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종종 ‘맹목적인‘이라는수식어가 붙어 과장되는 우연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다윈주의를 공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윈주의는 무작위적인 우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으로 다윈주의를 반박하려는 어처구니없는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생물이 지닌 복잡성은 우연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다윈주의를 우연과 동격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반박하기란 분명 쉬울 것이다. 나의 임무 중 한 가지는 다윈주의가 ‘우연‘의 이론이라는이 열광적인 미신을 깨부수는 것이다. 우리가 다윈주의를 믿지 못하는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뇌가 진화가 일어날 만큼 긴 ‘시간 척도‘ 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초, 몇 분, 몇 년, 기껏해야 몇십 년 만에 완결되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윈주의는 사건 진행 속도가 너무나 느려서 완결되려면 몇만 년, 몇백만 년이 걸리는 작은 과정들의 누적에 관한 이론이다. - P12
시계는 제작자가 있어야 한다. 즉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선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제작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것을 만들었다. 그는 시계의 제작법을 알고 있으며 그것의 용도에 맞게 설계했다.
페일리는 이 결론에 대해서는 아무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못한다고주장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이 자연의 작품에 대해 생각할 때에도 동일한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계 속에 존재하는 설계의 증거, 그것이 설계되었다는 모든 증거는자연의 작품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차이점은 자연의 작품 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페일리는 후일 다윈이 즐겨 사용했고 이 책에서도 다룰 인간의 눈(目)을찬미하면서 그의 주장을 확고하게 펼쳐 나갔다. 페일리는 망원경 같은인간이 고안해 낸 기구와 비교하면서 눈은 어떤 것을 본다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으며, 망원경은 그것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망원경이 인간의 설계를 통해 만들어졌듯이 눈도 반드시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성적이고 성실한 페일리의 주장은 당대 최고 수준의 생물학 지식에 의거하였지만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틀린 주장이었다. 망원경과 눈을 비교하는 것, 그리고 시계와 생물을 비교하는 것은 오류이다. 비록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그 과정을 전개하였지만 모든 자연현상을 창조한 유일한 ‘시계공‘은 맹목적인 물리학적 힘이다. 실제의 시계공은 앞을 내다볼 수 있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미래의 결과를 내다보면서 톱니바퀴와 용수철을 설계하고 그것들의 조립 방법을 생각한다.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지 않는다. 전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통찰력도 없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 P27
그렇다면 생물은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은아니다. 생물 안에서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생물에 초자연적인 무엇이나, 물리학의 기본 법칙에 반(反)하는 ‘생명력‘ 따위란 결코 없다. 단지 어떤 생물 ‘전체의‘ 행동을 이해할때, 물리학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하면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신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복잡한 물건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체의 행동을 이해하려 할 때, 물리학의 법칙은 전체가 아닌 각 구성 부분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전체로서의 신체의 행동은 각 구성 부분이상호 작용한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운동의 법칙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죽은 새를 공중에 던진다면 그것은 물리 교과서에 적힌 대로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 땅에 떨어진 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질량을 가진 단단한 물체처럼 움직이고, 운동 과정에는 공기의 저항이 작용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새를 집어던지면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지도 않을 것이고 땅에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날아가 버리고 그 근처에서는다시 땅에 내려앉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새가 중력에 저항할 수 있는 근육을 갖고 있고, 몸 전체로 본다면 다른 물리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근육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는 물리 법칙에 따른다. 새는 그 근육으로 날개를 움직여서 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새는 중력의 법칙을 위반하지 않는다. 새는 항상 중력에 의해 아래로 잡아 당겨지고 있으나, 날개가(날개의 근육은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면서) 중력의 힘에도 불구하고 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능동적인 작업을 수행하고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를 아무런 내부 구조도 없고 일정한 질량과 공기저항 계수만을 갖는 물체로 간주할 만큼 무지하다면, 새가 물리학의 법칙에 도전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가 복잡한 내부 기관을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내부 기관들 모두가 나름대로의 수준에서는 물리학의 법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새의 몸 전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생물의 특수성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모든 기계와, 복잡하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모든 물체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 P36
여기서 바로 내가 논의하고자 했던 마지막 주제, 즉 설명이 의미하는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도달한다. 우리는 지금껏 복잡한 물건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가 복잡한 기계, 또는 생물이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해 의문을 갖는다면 과연 어떤 종류의 설명이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앞 문단까지 서술한 내용에 이미 나와 있다. 기계나 생물이 작동하는 방법을 이해하고자 한다면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성 성분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고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만약 이해하지 못한 복잡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더 단순한 것의 차원으로 환원시킬 때에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내가 기술자에게 증기 기관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물으면, 그는 나를 만족시킬 만한 일반적인 대답을 해 줄 것이다. 만약 기술자가 증기기관은 ‘스스로 움직이려는 힘 (force locomotif)‘에 따라 움직인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줄리언 헉슬리처럼 분명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분의 총합보다 큰 전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거기에 관해서는 신경쓰지 말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해 주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설명은 엔진의 각 부분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여 전체 엔진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엔 꽤 큰 부품들(그 큰 부품들의 내부 구조와 동작 또한 복잡하고, 거기에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할 테지만)의 상호 작용에 의한 설명을 기대할 것이다. 처음에 기대하는 설명에서 거론될 단어들은 화실(火室), 보일러, 실린더, 피스톤, 조속기調速機)일 것이다. 그런 다음 기술자는 다시 이것들 각각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처음에는 각각의 기능들을 묻지 않은 채, 그 설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각각의 단위들이 맡은 일을 수행한다고 가정하고‘ 그것들이 상호 작용하여 전체 엔진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 P37
"무슨 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내 설명 방식에 가장 적합한 이름은 아마 ‘단계적 환원주의段階的 還元主義‘가 될 것이다. •••••• (모든 사람이 반대하지만 상상 속에만 있는) 존재하지도 않는 환원주의는 복잡한 물건을 ‘무턱대고 가장 작은‘ 부분의입장에서,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그 작은 부분들의 ‘총합‘으로 설명한다. 반면에 단계적 환원주의자는 복잡한 전체를 설명할 때, 처음 단계에서 단지 한 단계 낮은 부품들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그 부품들은 다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더 작은 부품들의 단계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사람을 잡아먹는 환원주의자들은 결코 긍정하지 않을 테지만, 높은 단계에 걸맞은 설명은 낮은 단계에 맞는 설명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이 자동차 작동 원리를 설명할 때 소립자보다는 카뷰레터(기화기)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단계적 환원주의자는 기화기의 작동 원리를 더 작은 부품의 동작으로 설명할 수 있고그것들은 다시 더 작은 부품으로, 또 그것들은 더 작은 부품으로, 궁극적으로는 가장 작은 소립자의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환원주의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고 싶은 솔직한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의문은최초에 어떻게 복잡한 물건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이 책 앞부분에서 다루게 될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작정이다. 나는 단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똑같은일반적인 원칙이 적용된다는 사실만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복잡한 물건이란 그것이 너무나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물건을 말한다. 그것은 일회적인 우연으로는 생겨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의 생성 과정을, 우연히 생겨날 정도로충분히 단순한 최초의 물체가 점차적으로, 누적적으로, 단계적으로 더복잡한 물건으로 변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단계 환원주의‘로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고, 양파 껍질 벗기기 식의작은 단계로 나누어진 설명만이 그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물건이 단 한 번의 단계를 거쳐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시간순으로 배열된 일련의 작은 단계들로 설명해야 한다. - P41
박쥐와 같은 기계를 만들고자 하는 기술자가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여기에 있다. 만약 마이크나 귀가 극도로 민감하다면 스스로 내는 커다란 소리에 손상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소리를 작게 만드는 것은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더욱 작아지기 때문에 좋은 해결책이 못 된다. 또한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크(귀)를 더욱 민감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럴 경우 전보다 작아진 소리에도 더 쉽게 손상될 것이기때문이다! 이것은 냉혹한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기는 내보내는 소리의 크기와 되돌아오는 메아리의 크기 사이에 생긴 급격한차이에서 비롯된 딜레마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레이더를설계한 기술자들도 이와 유사한 문제에 부딪혔는데, 그들은 우연히 ‘송신·수신‘ 레이더라는 해결책을 발견했다. 들릴까 말까 한 메아리를 기다리고 있는 극도로 민감한 안테나가 있고, 레이더의 신호는 그것을 손상시킬 만큼 매우 강력한 파동을 내보낸다. ‘송신·수신‘ 장치는 파동이 방출되기 바로 직전에 수신 안테나의 회로를 차단한다. 그런 다음 메아리가 되돌아올 때를 맞춰 다시 안테나의 회로를 연결한다. 박쥐들은 오래전에, 아마도 우리 조상들이 나무에서 내려오기 수백만년 전에, 이 ‘송신·수신‘ 전환 기술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박쥐의 귀에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막의 진동이 마이크와 같은 청세포에 전달될 때 3개의 작은 뼈, 즉 그 모양에서이름이 유래된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를 거치게 된다. 그런데 이 3개의뼈의 결합은 고음질의 오디오 제작자가 설계했음 직한 ‘임피던스 정합기구(impedance-matching function, 입력단과 출력단의 저항 차이를 줄여 주는기구 옮긴이)‘와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고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박쥐들은 등자뼈와 망치뼈에 잘 발달된 근육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근육들이 수축하면 그 뼈들은 소리를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마치 떨고 있는 진동판에 손가락을 대서 소리를 죽이는 것과 같다. 박쥐는 이 근육을 사용하여 귀가 잠깐씩안 들리게 할 수 있다. 각각의 파동을 내보내기 바로 직전에 근육을 수축시켜 시끄러운 파동에 귀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수축되었던 근육은 다시 이완되어, 메아리가 돌아올 때쯤이면 본래 가진 고도의 민감성이 회복된다. 이 송신 · 수신 전환 체계는 1초를 몇 번에걸쳐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을 유지할 때에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큰귀박쥐라 불리는 박쥐는 기관총 같은 초음파 파동에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어 근육을 초당 50회씩 수축시키고 이완시킬 수 있다.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기관총을 장착한 전투기에 사용된 기술과비견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타이밍 기술이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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