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6일 토요일 저녁, 오펜하이머는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모금 행사에 참석했다. 그가 나중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다음 날 진주만에 대한 일본의 기습 소식을 듣고 난 후 "스페인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세상에는 다른 더 급박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라고 마음먹었다. - P285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미국 곳곳의 수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르면1939년 2월부터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문제에 아직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 1939년 9월 1일), 레오 질라르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질라르드가 작성한) 편지에 서명하게 했다. 질라르드는 이 편지에서 대통령에게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폭탄 단 1개를 배로 실어 와 항구에서 폭발시키면 항구 전체는 물론이고 주변 지역까지 파괴할 수 있을것"이라고 지적했다. 불길하게도 그는 독일이 이미 그와 같은 폭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후 그곳의 광산에서 채굴된 우라늄의 수출을 금지했던 것이다. - P287

시간이 지나자 오펜하이머의 "명사들"은 토론을 유도하고 토론 내용을 정리하는 그의 재능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텔러는 나중에 "오펜하이머는 좌장으로서 세련되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격식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어떻게 습득했는지 모른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라고 기록했다. 베테도 텔러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즉시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첫 번째 문장만 듣고 곧바로 문제 전체에 대해 이해하는 경우도있었지요.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있었던 인공 폭발을 살펴보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들은 1917년에 노바스코샤 핼리팩스(Halifax)에서 탄약을 가득 실은배가 폭발한 것을 사례로 삼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는 약 5,000톤의 TNT로 인해 핼리팩스 시내의 6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고 약 4,000명이 사망하였다. 그들은 핵분열 무기가 핼리팩스 폭발의 약 두세 배의 파괴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어서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핵분열 장치의 기본 설계법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들은 지름 20센티미터 정도의 금속제 구에 우라늄 중핵을 넣으면 연쇄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계산했다. 다른 설계상의 세부적인 내용은 대단히 정밀한 계산을 요구했다. 베테는 "우리는 항상 새로운 기법을 생각해 내고, 계산을 해 봐서,
그 계산 결과에 따라 그때까지 생각했던 대부분의 기법들을 폐기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우리 그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던오펜하이머의 엄청난 지적 능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지적 경험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 P291

7월 들어 텔러가 자신이 수소 또는 "슈퍼" 폭탄의 가능성에 대한 계산을 마쳤다고 밝혀 논의가 잠시 중단되었다. 텔러는 그해 여름 핵분열폭탄은 확실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버클리에 왔다. 하지만 핵분열 무기에 대한 논의에 지루해진 그는 1년 전쯤 엔리코 페르미가 점심을 같이 먹으며 제안했던 또 다른 문제를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페르미는 핵분열 무기로 상당량의 중수소(deuterium)에 불을 붙이면 훨씬 강력한 핵융합 폭발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텔러는 - P292

12킬로그램의 액체 중수소에 핵분열 무기로 불을 붙이면 100만 톤 분량의 TNT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 결과를 발표해 세미나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텔러는 이 정도 크기의 폭발이라면 핵분열 폭탄만으로도 90퍼센트 이상이 수소인 지구의 대기에불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베테는 나중에 "나는 그것을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슈퍼 폭탄과 텔러의 종말론적 계산 결과에 대해 콤프턴에게 개인적으로 보고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시건 북부 호수가에 위치한 여름 별장에 있던 콤프턴을 찾아갔다.
콤프턴은 나중에 "나는 그날 아침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기차역에서 태우고 평화로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자폭탄이 대기 중의 질소나 바다물의 수소 폭발을 유발할 가능성이 정말있는가? •••••• 인류의 생존을 걸고 도박을 하느니 나치스 치하의 노예로 사는 편이 낫지 않은가."
결국 베테가 대기에 불이 붙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계산 결과로 텔러와 오펜하이머를 설득했다.  - P293

낼수1942년 9월 무렵이면 오펜하이머의 이름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극비 군사 연구소를 이끌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부시와 코넌트는 확실히 오펜하이머가 적절한 인물이라고생각했다. 오펜하이머가 여름 동안 했던 일은 부시와 코넌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육군이여전히 오펜하이머에게 비밀 취급 인가를 내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 역시 자신의 수많은 공산주의자 친구들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콤프턴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는 공산당과의모든 관계를 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6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나를이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테니까요. 내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8월에콤프턴은 전쟁부가 "(오펜하이머)에 반대한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펜하이머의 보안 파일에는 그의 "공산주의적" 활동을 비롯한 여러 "수상한" 행적들에 대한 보고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피는 1942년 초 스스로 보안 설문지를 작성했는데, 이때 그가 가입했다고 밝힌 많은조직들 중에는 FBI가 공산당 위장 단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P294

이 무렵 부시와 코넌트는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군부를 개입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부시는 육군 병참 업무를 총괄하던 브레혼 소머벨(Brehon B. Somervell) 장군을 만났다. S-1 프로젝트에 대해 이미 잘 알고있던 소머벨은 부시에게 자신이 이미 S-1을 감독할 사람을 뽑아 두었다.
고 말했다. 1942년 9월 17일에 소머벨은 의회 청문회장 밖의 복도에서46세의 육군 장교 레슬리 그로브스 중령을 만났다. 그로브스는 미옥군 공병감실(Army Corps of Engineers) 소속으로, 최근 완공된 펜타곤의건설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해외 전투 보직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소머벨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로브스는 워싱턴에서 다른 일을 맡게 될 것이었다.
그로브스는 차분하게 "나는 워싱턴에 머무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말했다.
소머벨은 "이번 일을 잘 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기게 될 거야."라고대답했다.
S-1에 대해 알고 있던 그로브스는 "아, 그 일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20 그는 시큰둥했다. 그는 이미 S-1에 배정된 1억 달러의 예산의 몇배나 되는 자금을 육군의 각종 건설 프로젝트에서 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머벨은 결심을 굳혔고, 그로브스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없었다. 그는 곧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로브스는 남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데 익숙해 있었는데, 이는오펜하이머와 닮은 점이었다. 그 한 가지 유사점을 제외하면 두 남자는정반대였다. 그로브스는 183센티미터에 가까운 장신에 113킬로그램의육중한 몸의 소유자였다. 그는 무뚝뚝했고 직설적이었으며 미묘한 외교적 수완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아 그래, 그로브스는 빌어먹을 놈이지만 적어도 솔직하기는 해!"라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뉴딜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지 못하는 보수주의자였다. - P295

그로브스가 보기에 오펜하이머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해답들을 신속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원자 폭탄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시카고, 버클리 등지에서 고속 중성자 핵분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여러 그룹들이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 과학자들을 한 곳으로 모아 공동 연구를 해야만 했다. 이 역시 엔지니어 출신인 그로브스의 입맛에 맞았고, 오펜하이머가 중앙 연구소의개념을 주장했을 때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오펜하이머는 새로운연구소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고찰해 보지 않았던 화학, 금속학, 공학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5그로부터 1주일 후,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를 시카고로 불러서 뉴욕으로 향하는 특급 열차에 함께 올랐다. 26 그들은 기차 위에서 논의를계속했다. 이 무렵 그로브스는 이미 오펜하이머를 제안된 중앙 연구소의 책임자 후보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는 세 가지결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이 물리학자는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었는데, 그로브스는 이것이 그가 노벨상을 받은 수많은 동료들의 연구 활동을 지도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그에게는 행정 경험이 전무했다. 그리고 셋째, "(그의 정치적) 배경에는 우리의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요소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베테는 "오펜하이머가 총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큰 집단을 지도해 본 경험이 전혀없었으니까요." 그로브스의 낙점에 다른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로브스는 나중에 "나는 당시 과학계의 지도자들이었던사람들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반대의 목소리가 드높았다."라고 썼다. 29 그중 한 가지 이유는 오펜하이머는 이론가였고,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험가와 엔지니어의 재능이 필요하는 것이다.
로런스는 오펜하이머를 존경했지만, 그로브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소식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30 또 다른 친구이자 오펜하이머의 추종자인 이지도어 라비 역시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매우 비실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 닳아빠진 신발에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어요. 게다가 그는 실험 장비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 버클리 과학자는 "그는 햄버거 장사도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P297

오펜하이머가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넬슨은 이제 조를 통해 소련에게 유용할지도 모르는 정보를 빼내려고 노력했다.
불법 도청으로 만들어진 FBI의 27쪽짜리 녹취록에는 이어서 조가조심스럽게, 하지만 기꺼이 미국의 연합국(소련)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했다고 나와 있다. 넬슨은 그와 같은 무기가 언제쯤 완성되겠냐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는 폭발 실험을 하기에 충분한 물질을 분리하는 데 적어도 1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예측했다. 조는 "예를 들어 오피는 이것이 1년 반이나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넬슨은 "그러면 정보를 넘겨주는문제에 대해서 말이야. 그(오펜하이머)가 협조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매일 설득하려고 시도할 거야."라고 말했다. 녹취록을 분석하는 임무를맡은 FBI 또는 육군 방첩대 요원은 이 대목에서 "오펜하이머가 스티브에게 정보가 새 나갈까 봐 과도하게 조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발언"이라고 쓰고 있다.
이 녹취록은 조가 넬슨에게 정보를 건네주었음을 암시하는 것과 함께, 오펜하이머가 보안 문제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넬슨이•오펜하이머가 비협조적이고 과도하게 신중하다고 결론 내렸다는 것을보여 주는 것이었다. - P303

14장슈발리에 사건

슈발리에를 통해서 오펜하이머에게 이야기했는데,
오펜하이머는 이 일에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조지 엘텐튼

한 사람의 인생은 조그만 일로도 뒤바뀔 수 있다. 오펜하이머에게는 그러한 일이 1942~1943년 겨울, 그의 이글 힐 집의 부엌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친구와의 짧은 대화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대화의 내용과 그에 대한 오피의 대응 방식은 고전 그리스와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비교하는것이 적절할 정도로 그의 여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슈발리에 사건‘
으로 세간에 알려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되어 흡사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년)감독의 1951년작 「라쇼몬(羅生門)」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버클리를 떠나기 얼마 전, 오펜하이머 부부는 슈발리에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했다. 그들은 하콘과 바버라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으며, 떠나기 전에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한 송별회를 하려던 것이었다. 슈발리에 부부가 도착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마티니를 준비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를 따라 들어와 그들 공통의 지인이자 케임브리지 출신의 영국인이고 당시 셸 개발 회사에서 일하고있던 조지 엘텐튼과 최근에 나눈 대화를 전했다.
둘 다 그 대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슈발리에가 전한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둘 다 중요한 대화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엘텐튼은 오펜하이머가 그의 과학적 작업에 대한 정보를 자신이 아는 샌프란시스코 소련 대사관의 외교관에게 넘길 수 있느냐고 슈발리에에게 물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슈발리에에게 "반역죄"를 범하라는 것이냐고 화를 내며 말했고, 당신도 엘텐튼의 계획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것에대해서는 슈발리에, 오펜하이머, 그리고 엘텐튼의 증언이 일치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동맹인 소련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와중에, 워싱턴의 반동 세력들이 소련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는, 당시 버클리 좌익 서클에서 유행하던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슈발리에는 항상 자신이 단지 엘텐튼의 제안을 오펜하이머에게 알려주었을 뿐이지, 엘텐튼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오펜하이머 역시 친구의 전언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사건을 소련의 생존에 대한 슈발리에의 과도한 관심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즉시 관계 당국에 연락을 취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그의 인생은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가 보기에 과도한 이상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친구를 고발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마티니가 준비되었고, 대화는 끝났고, 두 친구는 다시거실로 돌아와 부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 P309

엘텐튼이 어느 날 슈발리에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슈발리에는 며칠 후 차를 타고 버클리 크래그몬트 가 986번지에 있는엘텐튼의 집으로 찾아갔다. 엘텐튼은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소련이 나치스 공격의 주력을 막아 내고있으며(독일군의 5분의 4는 동부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는 미국이 얼마나 연합국 러시아에 무기와 신기술을 제공해 주는가에 달려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소련과 미국 과학자들 사이에 긴밀한 협조가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엘텐튼은 자신이 샌프란시스코 소련 영사관의 서기인 페테르 이바노프(Peter Ivanov)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말했다(사실 이바노프는 소련 정보 요원이었다.). 이바노프는 "소련 정부는 많은 부분에서 충분한 과학 기술적협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엘텐튼에게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1946년에 FBI는 슈발리에 사건에 대해 엘텐튼을 심문했고, 그는 이바노프와의 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그(이바노프)에게개인적으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로런스교수, 오펜하이머 박사, 기억이 안 나는 또 다른 한 명을 아느냐고 물었다. (엘텐튼은 나중에 이바노프가 언급한 세 번째 과학자가 루이스 앨버레즈라고 생각했다.) 엘텐튼은 자신이 오펜하이머밖에 모르며, 그 역시도 이 문•제를 의논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바노프는 계•속해서 오펜하이머에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밀어붙였다. "생각해 보니 하콘 슈발리에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바노프는) 내가 (슈발리에와) 이 문제를 의논해 볼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바노프는 그와 같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공식 통로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현 상황은 하콘 슈발리에에게 접근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정도로 중대한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 후, 슈발리에에게 연락을 해 보기로 했다."
엘텐튼에 따르면, 그와 슈발리에는 "상당히 마지못해" 오펜하이머에게 접근해 보기로 동의했다. 엘텐튼은 만약 오펜하이머가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이바노프가 그것을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슈발리에를 안심시켰다. 엘텐튼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과 슈발리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이바노프는 보상 문제를제기했지만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내가하는 일의 대가로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엘텐튼은 1946년 FBI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며칠 후 슈발리에는자신이 오펜하이머를 만나 보았는데, "자료를 구할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오펜하이머 박사는 그와 같은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다."라고 엘텐튼에게 통지했다. 얼마 후 엘텐튼의 집으로 찾아온 이바노프 역시 오펜하이머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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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녀는 좁다란 철제 간이침대에 묶여 있었다. 온몸을 옭아맨 가죽끈들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마구처럼 생긴 굵직한 벨트가 흉곽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는 그녀의 두 손목은 가느다란 가죽끈으로 침대 양쪽 강철봉에 묶여 있었다.
벗어나보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정신은 깨어 있었지만 눈은 감은 채였다. 눈을 떠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보이는 건 시커먼 어둠에 문틈으로 가느다랗게 새어드는 빛줄기가 전부였다. 입에서는 고약한 맛이 느껴졌다. 지금처럼 이를 닦고 싶은 욕구가 맹렬한 적도 없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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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후, 오펜하이머와 키티는 슈발리에 부부에게 대단히 어려운 부탁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키티와 함께 페로 칼리엔테로 한 달간 휴가를 가 있는 동안 슈발리에 부부가 태어난 지 두 달된 피터와 그의 독일인 보모를 맡아 줄수 있을까 하는 부탁이었다. 슈발리에는 이 부탁을 오펜하이머가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증으로 받아들였다." 슈발리에 부부는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피터를 한 달이 아니라 두 달동안 맡아 주었다. 이로써 키티와 오펜하이머는 가을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떠나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키티는 피터와 제대로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후에도, 친구들을 아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랑하는 것은 항상 오펜하이머였다. 한 옛 친구는 "키티는 무관심한 듯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P265

1939년 1월 29일 일요일, 어니스트 로런스와 가깝게 일하던 전도유망한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Luis Walter Alvarez, 1911~1988년)는<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읽으며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독일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 1902~1980년)이 우라늄 원자핵을 2개 이상으로 쪼갤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 통신사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가장 무거운 원소 중하나인 우라늄을 중성자로 때림으로써 핵분열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소식에 놀란 앨버레즈는 "이발이 끝나기도 전에 한달음에 방사선 연구소까지 뛰어가 소식을 전했다.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그의 대답은 "그건 불가능해."였다. 오펜하이머는 칠판으로 가서 핵분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누군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앨버레즈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그 실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불러서 매우 작은 자연 상태의 알파입자의 파동과 25배나 큰 핵분열 파동이 나타나는 것을 오실로스코프를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곧 이 반응이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중성자를 이용해 더 많은 우라늄 원자를 쪼갤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거나 폭탄을 난들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전개되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지요." - P267

이기오펜하이머는 1941년 가을에 노조 문제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방사선 연구소의 과학자들을 노조로 결성한다는 계획 자체가 폐기된 것은아니었다. 약 1년이 지난 1943년 초, 로시 로마니츠, 어빙 데이비드 폭스(Irving David Fox), 데이비드 봄, 버나드 피터스, 그리고 막스 프리드먼은노조(FAECT 25호 지부)에 가입했다. 이들은 모두 오펜하이머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노조를 결성할 이유가 없었다. 예를 들어 로마니츠는 방사선 연구소에서 150달러의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예전에 받던 봉급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노동 조건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모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일할 용의가 있었다.
로마니츠는 "그것은 뭔가 극적인 일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해 볼만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노조를 결성하는 이유로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프리드먼은 로마니츠와 와인버그의 설득에 넘어가 방사선 연구소의 조직책이 되었다. 그는 "이름만 그렇지 나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원칙적으로는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원자 폭탄이 무엇에 사용될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노력이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상황에서는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P281

오펜하이머는 10월 21일에 스케넥터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고,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우라늄 235의 양에 대한 그의 계산 결과는 워싱턴으로 보내는 최종 보고서의 핵심 부분이 되었다. 그의계산에 따르면 폭발적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100킬로그램 정도의 우라늄만 있으면 충분했다. 코넌트, 콤프턴, 로런스 등 몇 명만이참석한 이 회의는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스 군대가이미 모스크바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낙담한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전쟁 준비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는 레이더를 연구하던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그는 나중에 "하지만 기초적인 원자력 에너지 연구를 하는것을 직접 보고 나서야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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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사라진 정복자

칭기스 칸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워싱턴 포스트 (1989)

1937년 몽골 중부의 거무스름한 샹크 산맥 아래를 흐르는 ‘달의 강‘ 가 어느 절에서, 칭기스 칸의 영혼이 사라졌다. 충성스런 라마승들이 수백년 동안 보호하고 경배해오던 영혼이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심복들은 여러 차례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공격하여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약 3만 명의 몽골인을 처형했다. 군대는 사원을 차례차례 짓밟았다. 승려를 사살하고, 여승을 폭행하고, 종교 유물을 부수고, 도서관을 약탈하고, 경전을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누군가 샹크 사원에서 칭기스 칸의 영혼의 상징물을 몰래 빼냈고, 수도 울란바토르의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으나, 결국 그곳에서도 사라졌다고한다. - P11

몽골군은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펼쳐진 다수의 전선에서 벌이는 대륙간 사업으로 바꾸어놓았다. 칭기스 칸의 혁신적인 전투 기술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는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전체에 통합된 단위를 이루어 움직이는 규율 잡힌 기병이 전면에 나섰다. 칭기스칸이 방어용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기습을 기발하게 활용하고 공성전을 완벽하게 다듬어 운용하자, 성벽을 두른 도시의 시대도 끝이 났다. 칭기스 칸은 오랜 기간 원정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민족에게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세 세대가 넘게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칸은 아들, 손자들과 함께13세기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그가 굴복시킨 사람들 숫자로 보나, 합병한 나라들의 숫자로 보나, 정복한 땅의 면적으로보나 칭기스칸은 역사상 다른 어떤 정복자보다 두 배 이상을 정복했다.
몽골 전사들의 말발굽은 태평양부터 지중해까지 모든 강과 호수의 물을밟아보았다. 전성기 몽골 제국은 연속되는 면적으로 2800만 내지 3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대략 아프리카 대륙만한 넓이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섬들을 합친 면적보다도 훨씬 넓다. 몽골 제국은 눈 덮인 시베리아 툰드라부터 인도의 뜨거운 평원까지, 베트남의 논에서부터 헝가리의 밀밭까지, 고려에서부터 발칸 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 P14

칭기스 칸의 기병대가 13세기를 가로질러 돌격하자 세계의 경계가다시 그려졌다. 칭기스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칭기스칸은 다수의 작은 왕국들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작은 나라들을 합쳐서큰 나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슬라브족의 공국과 도시 여남은 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주르첸(여진을 가리킨다),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구르의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은 통치 영역을 확대하면서 인도도 통치했다. 인도는 대체로 몽골 정복자들이 세운 경계 안에서 현대까지 생존해왔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과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P16

칭기스 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를 건설했다. 그는
‘비단길‘ 주변에 고립되어 있는 굼뜬 교역도시들을 점령하여 비단길을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해놓았다. 칭기스 칸은 전체적으로세금을 내렸으며, 의사, 교사, 사제, 교육기관에는 완전히 면제해주었다. 정기적으로 통계조사를 했고, 처음으로 국제적인 역전(傳) 제도를확립했다.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칭기스 칸은 국제법을 만들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법을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 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자유를 허용했다. 법의 지배를 내세우고 고문을 철폐했지만, 양민을 습격하는 도적떼나 테러리스트 암살자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한 대규모 원정에는 서슴없이 나섰다. 그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행을 없애고, 대신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관행을 수립했다. 전쟁 중인 적대국가의 사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기스 칸은 제국을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제국은 그 뒤에도 150년 동안 더 팽창해나갔다. 제국이 붕괴한뒤에도 수백 년 동안 그의 후손은 러시아, 터키, 인도에서 중국과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작은 제국과 큰 나라를 다스렸다. 이 통치자들은 칸, 황제,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 다양한 절충적 칭호를 사용했다.  - P17

그들은 칭기스 칸을 고향 땅에 비밀리에 묻은 뒤 그 주변 수백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폐쇄했다. 특별히 훈련받은 전사들이 침입자를 죽이는임무를 부여받고 그 땅을 지켰으며, 칭기스 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시아 심장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후 호리그, 즉 대금구(區)‘는 거의 800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칭기스 칸제국의 모든 비밀이 그의 신비한 고향에 모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몽골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외국 군대가 몽골의 여러 지역을 침입하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조상의 성지에는 아무도 발을들여놓지 못하게 끝까지 막았다. 몽골인이 불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많은 사건이 발생했지만, 칭기스 칸의 후계자들은 성직자가 그의 매장지를 표시할 사당이나 절이나 기념물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세기에는 소련 통치자들이 칭기스 칸의 탄생지나 매장지가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지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지켰다. 소련 사람들은 이곳이 칭기스 칸과 관련이 있다는 암시를 줄까봐 대금기라는 말이나 다른 역사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접근 금지구역‘ 이라는 관료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행정 체제에서도 이곳을 주변 지역과 분리하여 중앙정부의 직접 관할 지구로 돌렸다. 물론 몽골 중앙정부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소련은 접근 금지구역 주변의 100만헥타르를 ‘접근 제한구역‘으로 설정하여 봉쇄했다. 공산주의자들이지배하던 시기에 정부는 이 지역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아예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지 않았다. 소련은 제한구역과 몽골의 수도울란바토르 사이에 요새화된 미그기용 공군기지를 건설했다. 아마 핵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커다란 소련 탱크 기지까지 생겨 일반인이 금지구역으로 들어가기란 실제로 불가능했으며, 러시아 군부는 이 지역을 포병과 탱크 훈련장으로 이용했다. - P19

칭기스 칸의 진실은 이런 수많은 정치적 수사(修辭), 사이비 과학, 학자의 상상 속에 묻혀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린것 같았다.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고향과 그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던 지역을 폐쇄해버렸다. 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곳을 지켜온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땅을 물샐 틈 없이 봉쇄했다. 이른바 「몽골 비사元朝秘史.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라는 이름의 몽골 문건은 비밀인 것만으로 모자랐는지 아예 사라져버렸다. 칭기스칸의 무덤보다더 신비하게 역사의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몽골 비사와 함께 부활하다]
20세기 들어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지면서 칭기스 칸의 수수께끼 가운데일부를 해결하고 기록도 정정할 예기치 않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우선 칭기스칸의 사라진 역사가 포함된 귀중한 원고를 판독하게 되었다. 몽골인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는 칭기스 칸의 삶을 기록한 전설적인 몽골 텍스트를 본 적이 있다는이야기가 가끔 흘러나왔다. 멸종되었다고 여겨지는 희귀동물이나 귀중한 새의 경우처럼 그 텍스트를 보았다는 소문은 학문적 열의보다는 오히려 회의적 태도를 자극했다. 그러다 마침내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몽골에서 「몽골비사」의 판독은 목숨을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인이나 학자들이 이책을 손에 넣지 못하게 막았다. 이 텍스트의 낡고, 비과학적이고, 비사회주의적인 관점이 부적절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비사」를 둘러싸고 지하 학술 운동이 전개되었다.  - P27

 소련은 위성국가가 독립적인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나아가 예전에는 동맹자였지만 이제는 소련의 적이 된 몽골의 다른 이웃인 중국 편을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자 화를 내며 비합리적으로 대응했다. 몽골 공산주의자들은 우표의 발매를 금지하고 학자들을 탄압했다. 당 간부들은 투무르-오치르가 "칭기스 칸의 역할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반역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를 공직에서 쫓아내고 외딴 곳으로 추방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끝내는도끼로 찍어 죽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정당(공식 명칭은 인민혁명당이다) 내부 인사들을 숙청한 뒤 몽골 학자들의 작업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은 그들에게 "반당분자, 중국의 첩자, 방해공작을 벌인 자들, 해충) 등의 낙인을 찍었다. 그 뒤의 반민족주의 캠페인 과정에서 당국은고고학자 페를레를 감옥에 보냈다. 페를레는 투무르-오치르의 스승이라는 이유, 몰래 몽골 제국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엄혹한 조건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교사, 역사학자, 화가, 시인, 가수들 역시 칭기스칸 시대의 역사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만 있으면 험한 꼴을 당했다. 실제로 당국은 몇 사람을 비밀리에 처형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일자리를 잃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한데서 몽골의 가혹한 날씨와 마주해야 했다. 이들은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대한 몽골 땅 여러 곳에 흩어진 추방지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 숙청 기간에 칭기스 칸의 영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면 소련이 몽골인을 응징한다며 파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탄압 때문에 수많은 몽골 학자들이 독립적으로 『몽골 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방과 왜곡에 시달리던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 P29

몽골군은 역사상 다른 모든 대군과는 달리 보급품 수송대 없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들은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가장 추운 달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는 사람이나 말이나 물 소비도 적었다. 이 철에 맺히는 이슬 때문에 잘 자라는 풀이 있었는데, 이것은 말의 먹이가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사냥감들도 끌어들였다. 몽골인은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공성(城) 무기나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다니는대신 기동성이 좋은 공병대를 구성하였으며, 이들은 현장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필요한 시설을 만들었다. 광대한 키질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나무들이 처음 눈에 띄자 그것을 잘라 사다리, 공성무기를 비롯하여 공격에 사용되는 여러 장비를 만들었다. - P42

 칭기스 칸은 어떤 도시를 상대로 심리전을 준비할 때 주민의 앞일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부터 제시했다. 그는 외진 마을에 관대한 항복 조건을 내걸었으며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몽골군에합세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주베이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에게 항복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하게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있었으며, 수치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는 사람은 매우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몽골군은 그들을 앞장세워 다음 공격의 방어벽으로 이용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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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르크는 좀 달랐다. 리스베트를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면서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 리스베트! 이렇게 보게 되어 정말 반갑네. 그렇잖아도 신세를지고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해 마음이 안 좋았는데. 지난번 겨울에도 그랬고, 이번 일도 그렇고......"
리스베트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단지 보수를 받고 일했을 뿐인데요."
"아, 그런 말이 아니야! 처음 봤을 때 자네를 잘못 판단했었다고. 그걸 사과하고 싶은 거라네."
디르크는 문신과 피어싱을 잔뜩 한 스물다섯 살짜리 젊은 친구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일로 매우 정중하게 사과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사뭇 놀랐다. 갑자기 그가 훨씬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 P498

다시 페이지를 넘긴 순간, 미카엘은 또 한번 목덜미 털이 쭈뼛 일어섰다.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한줄기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하리에트에 대한 수색 작업이 시작된 그다음날의 사진들이었다. 젊은 형사 구스타프 모렐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과 수색을 돕기 위해 장화 차림으로 집합한 십여 명의 남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있었다. 헨리크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레인코트에 챙이 넓은 영국식 모자를 썼다.
그리고 사진 왼쪽 끝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약간 통통한 체격에 더부룩한 금발머리였고 어깨 부분에 붉은 색이 들어간 어두운 퀼트재킷을 입고 있었다. 사진은 지극히 선명했으며 미카엘은 그를 즉시 알아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사진을 꺼내 아래층으로 내려가 안나에게 이 사람을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알다마다요! 마르틴 회장님 아니에요? 이때가 아마 열여덟 살쯤이겠죠" - P504

협곡을 빠져나오니 보다 완만한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총성이 들렸다. 이어 곳곳에 뒹구는 양들의 시체와 커다란 화톳불들과 목장 일꾼으로 보이는 사내 여남은 명이 보였다. 모두 손에엽총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양들을 도축하는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희생번제를 위해 도살당하는 성경 속 양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여인을 보았다. 청바지에 흰색과 빨간색이 들어간 체크무늬 셔츠를 걸쳤고 머리는 짧은 금발이었다. 제프는 그녀에게서 몇걸음 떨어진 곳에 지프를 세웠다.
"하이, 보스! 관광객이 한 명 찾아왔어요."
미카엘이 지프에서 내려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의혹에 찬 눈으로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하리에트! 정말 오랜만이군요." 미카엘이 스웨덴어로인사했다. - P569

미카엘은 일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하리에트를 찾으러 갔다. 그런데 순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전날 아를란다 공항에서 헤어지고 난 후 그녀가 머리색을 원래대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은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 우아한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미카엘은 몸을 굽혀 그녀의 볼에격려의 키스를 남겼다.
미카엘이 그녀를 들여보내려고 병실 문을 열자 헨리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리에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안녕, 헨리크 할아버지!" 그녀가 들어가며 인사했다.
노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녀를 살폈다. 미카엘이 디르크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내 두 사람만 남겨놓고 나와 문을 닫았다. - P587

"좋아, 그만두자고 그런데 왜 돌아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리스베트, 넌 ‘우정‘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말하겠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뭘 의미할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정의했어. 우정의 토대를 이루는 건 두 가지, 존경과신뢰라고 생각해. 이 두 요소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해. 누군가를 존경한다 해도 신뢰가 없다면 우정은 갈수록 약해질 뿐이야."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내가 생각하기엔 넌 스스로에 대해 나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나를 신뢰해야할지 말지.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서는 친구가 될수 없는 노릇이야."
"당신과 같이 자는 게 좋을 뿐이에요."
"섹스는 우정과 아무 상관이 없어. 물론 친구 사이에도 잠은 잘 수있지. 하지만 리스베트, 만일 너를 두고 우정과 섹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뭘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어."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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