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세상을 뜬 고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암 투병 환자에게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병상의 환자들은 '내 생애 단 한 번: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같은 그의 글을 읽으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냈다.
생을 놓고 투병 중인 암 환자들의 머리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을까.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암 센터를 찾아 5월 도서 대출 목록을 살펴봤다. 수양서(修養書)나 삶에 대한 예찬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지 않겠냐고 예상했다. 이 예상은 딱 절반만 맞았다.
◆희망·사랑 전하는 수필류 강세
'괜찮아, 살아있으니까'의 대출 빈도가 눈에 띄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스승들이 전하는 따뜻한 위로'라는 부제(副題)처럼 박완서·이해인·정호승·최일도 목사·조류연구가 윤무부 경희대 명예교수·산악인 엄홍길 등 25명이 힘든 시기를 사는 이들에게 전한 따뜻한 메시지들이다.
이 책에는 장 교수의 글 '내 뜰의 나무'도 있다. "하트 같은 예쁜 모양의 잎새들, 100일간 피는 꽃, 바다 냄새 같은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 '영희나무'의 겨울은 아주 길 것이다. 겨우내 생명을 향한 몸부림으로, 더욱 환한 세상을 향한 그리움으로(…) 아름다운 그 탄생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 ▲ 삼성서울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효은·이은아·박소라(왼쪽부터)씨가 암 센터 환자들에게 전달할 병실 이동문고를 정리하고 있다. /채성진 기자
31개의 일화(逸話)를 수록한 '서른한 개의 선물',
이문세·
손미나 등 방송인 24명이 전하는 '괜찮아, 웃을 수 있으니까', 제주 바닷가 마을에서 김민수 목사가 전하는 '희망 우체통',
성석제의 소설집 '지금 행복해'도 환자들의 '즐겨찾기' 목록에 있었다.
자원봉사자 박미혜씨는 "뇌성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조지 메이슨대 연구교수로 활동하는 정유선 박사의 자서전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를 읽은 암 환자들이 새로이 '투병 의지'를 얻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맑고 향기롭게', '산에는 꽃이 피네' 같은 법정 스님의 산문집은 책 표지가 다 해져 테이프로 붙여 놓아야 할 정도로 환자들이 읽고 또 읽었다. 박씨는 "바깥 나들이를 못하는 환자들이라서 그런지 해외 관광 도서나 곽재구의 '포구 기행' 같은 여행 에세이도 즐겨 찾는다"고 했다.
배희진 의료정보센터 의학정보팀 주임은 "입원 환자용 도서는 5000여권 정도"라며 "노인과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6월 중 오디오 북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했다. 전신 화상을 딛고 일어선 이지선씨의 '지선아 사랑해' '오늘도 행복합니다' 같은 에세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같은 소설과 어린이 명작 시리즈를 담은 mp3 플레이어가 제공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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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삼매'로 병상 고통을 잊는다
만화책에 대한 환자들의 수요는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이 병원에서 5년째 자원봉사를 하는 박경자씨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부담 없이 웃게 만드는 만화책을 적잖이 선택한다"고 했다. 암 센터 도서 대여 순위의 최상위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食客)'이 차지했다.
"투병 기간 동안 못하는 별식(別食)·별미(別味)에 대한 욕구를 대리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요."(박경자) 배희진 주임은 "베스트셀러와 에세이 위주로 선정했는데 만화 수요가 높아 깜짝 놀랐다"며 "식객은 20세트가 있는데도 빌리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도 인기다.
알콩달콩한 만화를 찾는 환자도 많았다. 만화 스토리 작가인 철수와 14살 연하의 나이 어린 신부 영희, 딸 지우가 나오는 허영만·
김세영의 '사랑해' 연작이 그것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일상이 감동을 자아낸 듯 책장 곳곳이 얼룩져 있었다. 과학 학습만화 'Why? 시리즈'와 '마법 천자문', 그리스·로마 신화를 빌려 책 표지가 닳도록 몇 번씩 읽는 어린이도 있다고 했다.
박경자씨는 "개인적으로는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 간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권하고 싶지만 책 제목의 '마지막'이란 단어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고 했다. 책 내용과는 상관 없이 제목에 나온 '죽음'이나 '최후' 같은 단어가 환자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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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돼야 해!' 메시지 선물도
암 센터 지하 1층의 암 교육센터에는 암에 대한 일반 도서, 환자 투병기, 호스피스 관련서가 꽂혀 있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이병욱 박사의 '암을 손님처럼 대접하라', 한만청 박사의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 같은 책들이다.
대한 암 협회가 펴낸 책 '암은 이렇게 이겨낸다… 희망 21인의 이야기'는 '암은 난치병이긴 하지만 불치병은 아니다. 여기 모인 암 극복 수기가 그 희망의 증거'라며 '암(癌)중 모색' 중인 환자를 격려하고 있었다.
한 암 환자는
독일의 전문 사진작가와 저널리스트가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 23명의 모습을 기록한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읽고 있었다. 그는 말기 암 투병 환자들이 수줍게 찍은 사진과 몇 년 혹은 몇 개월 뒤 사망한 뒤의 사진이 있는 책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위암 투병 중인 친구의 병문안을 왔다는 한 30대 남자는 음료수 박스 대신 암 교육센터 옆 선물의 집에서 '365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을 선물로 골랐다. '소소한 일에 초연해지자'(1월 1일)는 글귀로 시작해 '삶은 계속되어야 해!'(12월 31일)라는 글귀로 끝나는 희망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