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지에 실렸던 변화 관련 논문 모음집을 번역한 것이다. 논문이지만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재미있다. 하버드 경영 대학원은 이미 오래 전에 경영학 논문들의 수준을 일반인의 눈높이로 만들어 왔다. 논문이 주는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틀을 벗어버리고 실용성을 추구한 지 오래이다. 기고한 사람들도 교수가 아닌 현업 변화경영전문가들이 많다.
8편의 논문 중에서 특히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부사장인 지니 덕이 쓴 '변화의 관리: 균형의 예술'은 압권이다. 그녀는 먼저 수 없이 많은 변화 프로그램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살아 남는 방법을 체득한 '변화 속의 생존자'들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우리는 조직의 혁신을 통해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기본 관행과 프로세스를 바꾸려한다. 그러나 결국 변화의 성패는 조직 속의 각 개인이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변화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개인적이기 때문에 감정의 관리가 필수적이다. 2만 5천명의 직원을 가지고 있다면 2만 5천 번 각 개인과 만나 설득할 각오를 해야한다.
변화의 경영은 리더십의 다른 이름이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경영과 다르다.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반복해야 겨우 구성원들의 행동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선 경영자가 변해야 한다. 행동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야한다. 스스로에게 감정을 부활시킴으로써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생각, 해결책들을 제시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전체적 균형을 강조한다. 한 분야에서의 변화는 다른 영역의 균형을 파괴한다. 마치 모빌의 균형을 잡듯, 경영자는 다양한 변화 프로그램들의 상호 영향을 고려하여, 전체를 관장할 수 있어야한다. 조각을 떼어내어 각각을 관리 할 때, 우리는 실패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여러 부위를 동시에 수술한 환자의 예를 보자. 각각의 수술은 모두 성공적이었으나 결국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변화 프로그램의 전체성과 균형의 중요함이다.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배운 것을 함으로 체득하는 데 있다. 핵심을 보존하고 동시에 변화를 일구어 냄으로써 유자신에게 적용일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은 조직 뿐 아니라 각 개인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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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혁명의 정치적 얼굴이다. 기존 권력의 붕괴와 새로운 집권세력의 등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철철 넘치는 피와 처형 - 그러나 이 책은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1998년 '혁명의 문화사'라는 강좌를 담당했던 저자들은 혁명의 또 다른 얼굴, 즉 서민의 일상과 관련된 대목 그러니까
우리가 문화라고 총칭하는 것들과 혁명의 상관 관계를 따진다.
한 예로 노동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따라가 보자. 자본주의는 노동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일을 많이 하다보니 자유시간이 너무 짧다. 스스로 대안적 삶을 추구할 여유가 없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빨리 일로 복귀하려다 보니 자연히 노동 문화는 자극적이고 소비적인 문화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화가 문화다우려면 쉽게 말해 좀 놀 수 있어야한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은 자본주의적 노동의 삶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멕시코의 사빠띠스따는 발전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자본에 의한 인류와 생태계의 파괴에 저항하고, 발전의 이름 속에
숨어있는 잔인한 실체를 고발함으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추구한다.
장시간 교육, 장시간 노동으로 생각할 줄도 모르고 놀 줄도 모르는 대중을 양산했다는 지적은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되새겨 볼 말이다. 실제로 많은 개인들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무엇을 하고 싶은 지 조차 알지 못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조직 할 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화 사회는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와 자율적인 활동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시켜서 하는 노동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일일 때, 일은 몰입할 수 있는 취미이며 문화가 된다. 개인은 일을 통해 자신을 구현하고 조직은 개인의 성과를 통해 발전한다. 이것이 지식사회에 대한 희망이며 기대이다. 혁명은 현재의 삶 속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들을 구현하려는 의지이다. 지루한 자신의 삶 속에 혁명을 한번 일으켜 내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통해 혁명의 다차원적 개념과 친숙해 질 필요가 있다.

공간과 건축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김일성 광장이나 천안문 광장은 형태상 엄격하고 대칭적인 고전적 양식이다. 권력과 지배에 대한 야망의 표현이다. 국회, KBS, 강남의 법원 역시 그렇다. 국민을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건축물에서 읽을 수 있다. 고층 아파트가 도시 주거 공간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다. 메마른 정서, 무관심, 폐쇄성들은 이런 도시 건축과 무관한 것일까 ? 처칠은 '공간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만들어 진 공간은 다시 인간을 만든다'라는 말을 하였다.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 , 미하리 칙센트미하리 / 해냄
이 책은 가볍고 만만하다. 그러나 꽉 차있다. 사람들은 보통 직장일을 고역으로 여긴다. 하나마나한 일을 하고 있다는 불만, 참신함도 없고 도전 의욕도 불러 일으키지 않는 일을 몇 년간 밥 먹 듯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은 정체와 퇴보의 불안감을 안겨 준다. 그리고 스트레스도 심하다. 특히 상사로부터 과도한 요구를 받거나, 자신이 한 일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면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올라간다.
스톡홀름에 있는 한 연구소에서 일하는 생물학자 게오르크 클라인은 자기 일을 좋아했다. 그러나 질색으로 여기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서 줄을 서는 일이고, 또 하나는 연구비 지원 신청서를 작성하여 정부의 해당 부서에 제출하는 일이었다. 두 가지 일에 정력을 소비하다 보니 연구 작업에도 불만이 쌓였다. 그는 두 가지 일을 하나로 모으기로 마음먹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연구비 지원 신청서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최고급 휴대용 녹음기를 샀다. 그리고 줄을 서 있는 동안 연구비 지원 신청서에 들어갈 내용을 구술하였다. 클라인은 이 일을 놀이의 경지로 승화 시켰다.
놀이가 곧 일이고 일이 곧 놀이인 직업처럼 좋은 것은 없다. 삶과 일이 혼연 일체가 되는 때가 즐겁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내가 한평생 일분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는 것도 맞고, 내가 단 하루도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없다는 것도 옳다" 라고 표현한다. 일과 여가가 녹아 있는 상태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다.
모든 사람이 극적인 변신에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가치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상황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삶을 바꾸는 위대한 발견으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 나는 일이 하고 싶은 환상적 일로 바뀐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 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우려라. 둘째, 자신의 방식이 유일한 업무처리 방식이라는 수동적 자세를 벗어나라. 셋째, 대안을 모색하여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계속하라.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일을 맞추어 간다. 깔려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 가면서 길을 만들어 간다. 이 책은 놀이처럼 일에 몰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사례들과 참고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한다.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난 권유와 차분한 설득력이 돋보인다.
동아일보 8편 - 의식혁명 (Power vs Force, 데이비드 호킨스 / 한문화 )
1933년 뉴욕시 32번가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빌딩은 건축가의 마음 속에서 태어났다. 마음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강철과 콘크리트로 옮겨 놓음으로써 건축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의 비전을 경험하게 해준다. 서로 다른 감각 영역의 지배를 받긴 하지만 '개념'과 '건축', 이 두 가지는 모두 다 완벽하게 존재한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마음 그 자체로 실재한다. 철근과 콘크리트만이 실재가 아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에서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몸이 아프면 이미 이와 연관된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질병은 마음에서 온다. 예를 들어 적의는 우리를 편치 않게 한다. 적의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원한의 희생자가 된다. 그것은 우리 몸에 생리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치유는 그러므로 자기 자신과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자발적 태도에 달려있다.
모든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온다. 마음이야말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힘이 머무는 장소이다. 그리고 실재한다. 그러므로 형태를 가지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세계는 물리적 세상에 못지 않게 '실재(real) 하는 세상'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높은 의식 수준으로 올라 갈수록 오래, 그리고 아주 깊게 응시할 수 있다. 진실이란 이렇게 두려울 만큼 주관적이다.
저자인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인간 정신의 진화에 관한 전문가이며 미국 정신치료협회 종신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원인과 책임이 자신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기력한 희생자로 남아 있어야한다고 경고한다. 의식의 향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꺼이 하는 태도이다. 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개인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더 나아 갈 수 없는 아주 '밑바닥' 상황에 처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가지 못한다. 위기의 장점은 보다 높은 의식 수준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인생은 배우는 것이다. 마음이 실재한다는 것,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소프트웨어가 무엇이며,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알게 된다. 20세기를 보내며 얻게되는 최소한의 핵심적 깨달음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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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사회적 성공의 거의 유일한 평가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사업가가 얼마나 돈을 벌었느냐는 말할 것도 없고 화가의 성공도 그림의 값으로 평가된다. 학자의 대중 강연도 그의 지명도에 따라 강의료가 결정된다.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값의 크기가 곧 사회적 인정의 수준이다. 돈의 위대함이다. 가치척도의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국가 역시 국부를 키우기 위해 이곳에 모든 정책의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경제적 변화는 늘 사회적 영향을 가져온다. 공공 정책의 핵심은 그러므로 어떻게 국가 전체의 부를 극대화시키되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만일 경제정책이 경제행위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없다면 잘못된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면 그 경제 정책은 존재 이유가 없다. 인플레이션을 막고, 경기를 부양하고, 자유 무역을 조장하고 세계화의 대열에 합류하는 등 일련의 행위들이 만일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정책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이 간단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한다.

어려운 2년을 겪는 동안, 기업은 많은 직원을 감원했다. 인사정책은 기본적으로 조직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사 정책이다. 지금 조직이 죽어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지난 2년 동안 벌어진 감원의 탓이라면 그 인사 정책은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피한 것은 없다. 경영은 경영자의 선택이다. 지금 물어 보아야한다. 지난 2년간 취해왔던 인사정책은 조직의 생명력을 복원시키기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는가?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한다. 답할 수 없다면 해결책도 없다.

중요한 질문들은 간단하다. 그리고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를 위하여 그 정책을 세우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국민이 정책의 목적이 될 때 그 정책은 목적에 기여한다. 그러나 국민이 정책의 대상이 되면 그 정책은 국민의 이해에 위배되는 정책이 된다. 예를 들어 세금이 국민을 위해 쓰려고 걷어 지면 국민은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국민이 세금원(稅金源)에 불과한 정책은 결국 국민을 위해 쓰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직원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은 조직의 생명력을 증진시키지만 직원을 대상으로 적용되는 정책은 그들을 불안하게 할 뿐이다. 그들의 잠재력과 정신을 경영자와 직원 모두의 공동목표에 몰입시킬 수 없다.

시장 경제의 틀 속에서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고객이다. 경영자와 직원은 고객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경영자도 고객에 대해 오만할 수 없다. 그 순간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직원을 가지지 못하고는 고객을 매료시킬 수 없다. 조직의 생명력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매출과 성장과 이익은 경영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이 목적이 될 때 고객과 시장은 외면 당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반드시 그렇다. 운동 경기에서 우승은 기록 또는 스코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선수가 점수에 집착하면 경기에 몰두할 수 없다. 결과가 목적인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돈이 목적인 화가, 돈이 목적인 학자가 그림과 지적 탐구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처럼 돈이 목적인 기업 역시 고객과 시장의 요구에 몰입하지 못함으로 결국 그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된다. 선택받지 못함으로 도태되는 것이다. 곧 그 기업의 종말을 의미한다.

수단과 목적이 도치되고, 결과와 원인이 혼동되며, 주체와 대상이 전도되는 이유는 핵심적인 질문을 놓치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그 핵심적인 질문을 자기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답은 없다. 학교에서 선생이 낸 문제처럼 정답이 존재하는 문제란 사회 어디에도 없다. 정확한 질문이 곧 해답에 이르는 유일한 과정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서로 도울 수 있고 함께 번영할 수 있는가 ? '질문을 품고 살면 언젠가 그 질문의 해답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내가 믿고 있는 인문학적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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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포천지는 '40이 되면 직장 생활은 끝'이라는 커버스토리를 다룬 적이 있다. 실제로 그 동안 미국의 최고 소득층을 이루고 있던 45세부터 54세까지의 연령층은 그 자리를 35세부터 44세까지의 젊은 층에게 넘겨주었다. 젊고 유능하고 정력적인 전문가들이 이제 경험과 경력을 가진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벌이가 좋은 소득층이 되었다.

경험과 경력 대신 전문적 지식이 풍요로움을 결정 짓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미국 보다 훨씬 더 경험과 경력이 중시되는 사회였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지식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세계의 보편적 추세 속에 섞여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 외에는 자원이 없는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이다. 새 천년의 비전이다. 문제는 우리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지식의 전달및 창조 그리고 활용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과 교육을 위한 효율적인 과정에 전념함으로써 사회가 보유한 지식의 균형과 심도 있는 기술을 축적할 수 있다면 한국은 과거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중요한 국가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급한 것이 있다. 학습이 개인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과장이라는 의견에 십분 동의하지만 개인은 전문화의 길로 들어서도록 우선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환경과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자신의 것이고,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느닷없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 갑자기 될 수는 없지만 가장 빨리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일 때 가장 독특하고 특별할 수 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강점을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강점 자체가 탁월하면 좋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자신의 강점인지를 알아내고 개발하는 것이다. 비범함에 이르는 길은 비록 작은 재능이라도 생래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늘 닦고 수련함에 있다.

경제학자 좀바르트는 경제 활동의 핵심은 '건전하고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함'에 있다고 말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생을 통해 단하나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찾아내어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투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식 사회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틈새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만의 브랜드를 부착할 수 있다. 괜찮은 일 아닌가?
강점을 찾아내기 위해 우선 자신의 업무를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업무 속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목도 있고 싫어하는 대목도 있다. 좋아하는 대목 속에 자신이 즐겨 머무를 곳이 있다. 그곳에 주목하자. 수동적 태도를 버리고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자.

그리고 비단 그 일에 머물지 말고 자신을 몰입하게 하는 공통적 속성을 공유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이 찾아지면 거기에 매일 하루의 10%인 2 시간 정도를 투입해 보자.

2 시간 정도를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빼면 약 8 시간 정도가 조정이 가능한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다. 그 중에서 먹고, 씻고, 치장하고, 출퇴근하는 데 사용하는 서너 시간의 기본적 유지 활동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 시간은 네 시간 남짓하다.

이 중에서 TV를 보거나 그저 빈둥대거나, 잡담으로 보내는 수동적 여가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여 선택한 일에 투입함으로 적극적 여가 활동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면 자신의 전문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다.

취미가 곧 일이고 일이 곧 취미인 상태에서 우리는 심취하고 몰입할 수 있다. 좋은 무용수는 늘 발톱이 깨져있거나 곪아있거나 갈라져있고, 아침엔 통증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좋아하지 않고는 훈련과 연습을 견딜 수 없다. 견딘다 한들 행복하겠는가?

시간은 위대한 힘이다. 설득력 있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전문가가 되기 위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른다.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2005년은 온다. 2010년도 온다. 지금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그 때도 자신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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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바로 진보이다. 인류가 꿈꾸어 온 것이기도 하고 개인이 일상을 살며 바라는 것이기도하다. 그것은 그러나 앞만 보고 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발전의 이데올로기 속에 숨어 있는 잔인한 실상을 발견하고, 뼈아프게 반성하는 것이 곧 진보이기도 하다.

때로는 되돌아 가야한다. '돌아갈 때가 되어 돌아가는 것'도 진보일 수 있고, 환경 문제처럼 '보존이 곧 혁명'이기도하다. 정신은 이렇게 하여 확장되는 것이며 사회적 제도 역시 이런 자성과 반성을 통해 내실화 된다.

좋은 사회적 반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보와 발전의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한 짓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씨랜드 화재 사건과 동일한 복제판이 인천에서 재발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반성이 일회적이며 전시적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 아닌 것만으로 그나마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사회는 아무런 비전이 없다. 룰렛 게임처럼 불운한 차례가 오면 당할 수밖에 없다.무기력한 수동성은 늘 사건을 얼른 해결하기만 바란다. 희생양을 만들고 단속을 강화하고 법석을 떨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느슨해져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다음 사건이 터질 때까지 어찌 어찌 견디게 된다.

제도의 진보는 반드시 적절한 피이드백 시스템(feedback system)을 필요로 한다. 체계적 개선에는 체계적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퇴근길에 자주 동네 수퍼마켓에 들린다. 빵도 사고 우유도 사고 술도 한 병 산다.
계산대에
오면 점원이 '봉지를 드릴까요?' 하고 물어 본다.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추가로 20원 씩 낼 때마다 나는 기분이 나쁘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왜 그럴까?

환경은 생존이 달린 주제이다. 먹고살기 힘들 때는 아무도 돌보지 않지만 눈 깜박할 사이에 우리를 살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갈 것이다. 20원을 받고 나중에 가져오면 돈을 환불해 주는 착상은 아마 플라스틱 봉지의
사용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일회용품 사용이 얼마나 줄었을까? 20원 씩 내어 모아진 돈은 누가 가지는 것이며, 그것은 환경의 보호를 위해 어떻게 재투자될까? 이 방법은 얼마나 유효한 방법일까? 이 제도의 영향을 받게되는 국민들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제도의 내부에 피이드백 시스템이 있다면 이런 질문들에대답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 모든 전시행정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 안에 피이드백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입은 있지만 귀는 없다.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한 제도가 만들어 질 때의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유효성을 평가하고 개선하기 위한 피이드백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제도는 기껏해야 100점 만점에 30점을 넘지 못한다.
이렇게 점수가 박한 이유는 지속적인 개선이 없는 제도는 죽은 제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효성이 떨어지게 되고 지켜지지 않는다. 법으로부터 강제력을 부여받은 제도가 실제와 다르게 되면 발목을 잡는 규제에 불과해 진다. 규제를 피해가려면 부패와 유착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또 터지고 결국 또 다른 제도를 만들어 내겠지만 피이드백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이 충분히 규정되지 못한 상태이고 근거가 계량화되어 있지도 않다.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면 이해집단 사이에서 흔들리고 절충되어

또 다른 졸속 대증요법을 만들어 내게 된다. 악순환은 그래서 반복된다.
정신병에 대한 정의 중의 하나는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 이다. 피이드백 시스템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반성하고 개선하지 못하는 사회는 바로 사회적 정신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제도의 내부에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피이드백 장치를 내장 시켜야 하는 이유이다.
피이드백 장치는 제도의 개선과 존속을 결정하는 센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상징적인 시기를 살고 있다. 극단의 시대를 살았던 20세기의 우리가 새로운 천년기에 번영하고 인류에게 기여하기 위해서는 20세기의 실패를 존중하고 그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21세기에 진정한 진보의 장을 열어 가는 자세일 것이다. 편견과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한 제도를 보고 한 사회를 볼 때, 우리는 진보에 대한 해답에 이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지기 위해 지금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진보의 또 다른 얼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서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길고 깊게 쉬어보는 것이다. 좋은 준비는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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