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2084 라임 틴틴 스쿨 1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박종대 옮김 / 라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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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작가의 책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문득 생각한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냥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겠거니 했다. 대개의 책에서 그리는 미래가 디스토피아라는 점이 이제는 새삼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당연한 것처렴 여겨진다. 다만 어떤 새로운 기계가 그려지는가가 관심거리라고나 할까. 헌데 책을 조금 읽다 보니 무언가가 떠오른다. 바로 조지 오웰의 <1984>다. 그때보다 정확히 100년 후의 더 황폐화되고 자연이 파괴된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데 지금까지 보아왔던 동화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최첨단 기술에 의지해 나약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초첨을 자연에 맞췄다. 솔직히 다른 책들의 내용은 그냥 이런 기술이 있구나 내지는 이렇게 발전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이 책은 그리 낯설지 않게 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 세대는 못 만나는 시대지만 자식 세대는 바로 직면하게 될 미래인데, 아주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2013년에 16살과 17살의 경계에 살고 있는 노라가 2084년 자신의 증손녀인 노바로 살고 있는 꿈을 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되는 것인지 헷갈려서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냥 미래와 현재가 교차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원래 그런 식의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노라가 꿈을 꾸는 것들이 너무 생생해서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급기야 심리 상담사에게 치료를 받기로 한다. 노라는 자꾸 다른 세계에서 수신한 듯한 느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가면 왜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알고 보니 우마라고 불리는 미래의 노라가 자신들의 잘못을 되돌리기 위하여 마지막 반지의 소원을 빌었던 것.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 이야기를 처음부터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하나씩 맞춰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도 누구나 생각하는 문제인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노라와 같은 청소년이 있다면 아마도 2084년의 지구는 훨씬 괜찮을 것이다. 노라와 요나스가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사실은 현재 각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총량제를 제안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또한 돈이 있으면 다른 나라의 배출량을 사서 그만큼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권리를 얻는다는 문제도 있어 결국 별다른 의미가 없는 제도가 되어 버렸고 그나마도 유야무야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나도 엄청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미래를 너무 낙관한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으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금방 알 텐데.

 

노라와 요나스의 이야기나 벤야민 박사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벤야민 박사의 딸과 노라가 통화하는 내용도 그렇고. 글쎄, 동화적인 요소로 따진다면 그다지 훌륭한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그보다는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철학적 신념이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점이 더 끌린다. 솔직히 이 작가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작가소개를 읽다 보니 <소피의 세계>를 어찌나 칭찬하던지 내친 김에 그 책을 샀다. 만약 작가가 이야기로 철학을 들려주는 책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 책을 엄청 재미없게 읽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조지 오웰의 작품을 생각하며 한 작품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고 인문학을 대중화시켰다는 극찬을 받는 <소피의 세계>를 읽어볼 기회를 만들어줬다는 것만으로도 독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소피의 세계>는 어떻게 다가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번 여름방학 독서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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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의 탄생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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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만나는 유은실 작가의 책인데 읽고 나서도 참 오랜만에 글을 남긴다.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고민하느라 선뜻 쓸 생각을 못하기도 했다. 유은실 작가의 글은 아주 웃긴 이야기를 시침 뚝 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게 매력이었는데 이 책은 그런 매력이, 없다. 대신 다른 매력이 있다. 간결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여전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이 아니다. 만약 일수 씨(이처럼 3인칭으로 부름으로써 독자가 주인공에게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한다. 이 또한 동화책에서 만나는 새로운 시도가 아닐까 싶다.)와 일석 씨가 그냥 각자의 가게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평범한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서른이 넘어서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난다는 마지막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동화지만 그 주인공이 어른이 되기까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부분에 다다랐을 때는 동화 같은 느낌이 안든다.

 

  사람은 언젠가는 사춘기를 겪는다고 한다. 부모가 모든 것을 정해주는 평탄한 삶을 살더라도 결혼을 하고 나서든, 아이가 다 큰 후에든 한 번씩은 앓고 지나가는 홍역 같은 것이라고 한다. 간혹 주변에서 자녀의 삶을 설계해 주고, 자녀가 그 길을 착실하게 따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진 않지만 일수 씨의 삶을 보면 그들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나 평범해서 완벽하게 보통인 아이라고 여겨지는 일수지만, 부모에게는 언젠가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해서 크게 될 귀한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혹시 늦되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일수의 성장기를 지켜보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평범이 지나쳐 비루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그저 초등학생처럼 쓴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붓글씨를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 버는 일수 씨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자기의 생각과 의지는 하나도 없이 사는 삶을 아무런 의심 없이 살던 일수 씨는 동네의 명필에게서 쓸 모는 누가 정하느냐는 말을 듣고 그 말이 계기가 되어 결국 자신의 쓸모를 찾기 위해 떠나고 만다. 적어도 일수 씨와 일석 씨의 돌아왔을 때의 삶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의 많은 어른들이 문제겠지.

 

  처음에 읽을 때는 일수가 어린 시절을 너무 빨리 지나 청소년 시기에 이야기를 집중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청소년기를 지나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까지 나간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대개의 동화에서 주인공은 동화를 읽는 아이들 나이에 머무는 것에 비해 이 책은 한 사람의 일대기(비록 삼심대까지만이지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엔 이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동화도 아닌 것이 청소년 소설도 아닌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다시 한번 들춰 보니 은근 매력있다. 일수 씨의 행동을 따라가는 것도 그렇고 결국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서술 방식도 그렇다. 작가가 꼭 써야만 했던 이야기라는 건 결국 주제가 아니라 소재가 중요했던 것일 게다. 작가는 일수 씨의 삶을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일수 씨의 삶에 그와 비슷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던 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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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전쟁 마음이 자라는 나무 37
로이스 페터슨 지음, 고수미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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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폰을 주머니나 가방에 집어 넣고 한참을 잊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거나 툭 하면 집에 두고 나오기 일쑤인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휴대폰 중독. 그러나 요즘 어디를 가더라도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사람을 더 많이 보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등산을 갔는데 바위 위에 서너 명이 쉬고 있는데 그들 모두 각자의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과연 함께 등산을 가는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 책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휴대폰 중독 문제의 위험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책이지만 비단 어린이나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다만 청소년들은 중독에서 벗어나기가 더 힘들고 그들의 앞날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뿐이다. 흔히 휴대폰 중독이라고 하면 휴대폰으로 하는 게임을 생각하겠지만 여기서는 그야말로 휴대폰의 순수한 기능인 문자나 전화에 대한 의존을 이야기한다.

 

  새로 전학을 왔지만 이전 학교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현재 학교 친구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다리아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멀리 있는 친구보다 가까이 있는 친구가 더 중요할 테지만 다리아는 휴대폰만 있으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다리아는 문자를 보내서 답이 바로 안 오면 초조해 하거나 마찬가지로 바로 답장을 할 상황이 안되면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결국 큰 사건이 터지고서야 자신이 휴대폰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다리아가 무엇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친구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일 것이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 때문에. 그나마 다리아에게도 새 친구인 클리오가 생기면서 그 상황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아무리 인터넷 상으로 친하다고 해도 직접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눈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다리아가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을 텐데. 그나마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알았으니 다행이다. 아직은 휴대폰 중독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 조만간 문제시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중독 상태에 빠졌다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겠지만 아직 그 정도가 아니라면 이런 책을 읽고 휴대폰 중독의 위험성을 깨달아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지나친 기대일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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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람이다 1 - 빨간 수염 사나이 하멜 일공일삼 85
김남중 지음, 강전희 그림 / 비룡소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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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바다다. 책을 본 순간 작가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보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역시나, 작가 소개를 보니 선상에서 뭔가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나도 여행을 정말 좋아하고 많이 다니려고 하는 편이지만, 과연 여행을 하고 나면 내게 무엇이 남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일반인에게는 추억으로 남는 여행이 작가에게는 작품으로 남으니 하는 얘기다.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를 여행하다가 이 책을 쓰기로 했다니 작가란 고달픈 직업이기도 하지만 생각한 것을 이룰 수 있는 뿌듯한 직업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하멜에 대해 <하멜 표류기>를 쓴 네덜란드인으로만 알고 있을 뿐 거기서 더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서로 새로운 대륙을 찾는다며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일어난 일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화에 대한 비판적인시각을 갖고 본 적은 있어도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생활했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맨날 뒷북만 치고 있으니 일반인의 수준을 못 넘나 보다.

 

  하멜이 표류하다 제주도에 발을 디딘 후 한양과 강진에서 살았지만 흉년 때문에 다시 여수, 순천, 남원으로 흩어져 살게 되는데 그 중 하멜 일행이 해풍이네 마을에 살면서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한다. 당시 마을에 외국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신기하면서도 두려웠을 것이다. 해풍이도 그런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통의 소년이었으나 아버지가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고 배를 사면서 진 빚 때문에 누나가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가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큰 결심을 한다. 백성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고프고 힘들던 시절이었으니 해풍이네도 마찬가지다.

 

  비록 해풍이는 하멜 일행이 탈출하는 배에 몰래 숨어들어 일본으로 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긴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책이 이제부터가 시작임을 말해준다. 처음에 읽을 때는 해풍이가 하멜에게 돌맹이를 집어 던지고 누나인 해순이가 작은 대수를 좋아하게 되는 부분이 한참 뒤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훑어 보니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불과했다. 처음 읽을 때는 초반부터 워낙 긴박한 상황이 펼쳐져서 중반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외국으로 나가는 일이 공적인 업무 외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시절에 일본으로 갔으니 해풍이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 물론 본인의 의지였다고는 하지만 그처럼 힘들고 위험한 줄 알았다면 애초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민초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으니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해풍이는 일본으로 건나가 다행히 가는 곳마다 좋은 사람을 만나 무사히 일본에서도 하멜을 따라 네덜란드로 떠난다. 이것은 2권에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도예촌에서 만난 박 노인과 연수는 같은 조선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기무라 같은 사람까지도 해풍이에게 큰 도움을 주고 보살펴 주는 걸 보면 주인공은 역시 어딜 가든 혼자가 아니라는 평범한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분명 두 권이 전부인데도 마지막에 해풍이가 아버지가 있을지도 모르는 바타비아나 홀란드로 떠나는 이후의 이야기가 3권에서 펼쳐질 것만 같다. 문득 홀란드 때문에 벌어졌던 딸과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독일에 있는 딸이 수학여행을 폴란드로 간다기에 좀 멀리 가나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네덜란드였다. 친구들이 홀란드라고 했는데 그걸 폴란드로 알아들었다나. 이 책이 진작 나와서 딸이 읽었다면 바로 알아들었을 텐데.

 

  '김남중의 첫 해양 동화'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던데 굳이 그렇게까지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바다를 항해하고 외국에서 모험을 하는 동화는 (내가 아직 못 읽었을 수도 있지만)처음 만났다. 그만큼 새로운 소재와 굵은 필치로 모험을 그려내는 덕분에 다양한 동화를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사실 초반에 만났던 <주먹곰>(처음에는 다른 제목이었으나 개정되면서 이렇게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을 읽고 작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드러나서 다소 거부감이 일었는데 그 후에 만난 작품은 모두 재미있었고 '역시 김남중'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동화판에서 남자 작가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남자 아이들의 역할모델을 할 만한 남자 주인공이 많지 않은 환경에서 만나는 소중한 작가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래도 여자 작가가 남자 주인공을 그리는 것과 남자 작가가 남자 주인공을 그리는 것은 차이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근거 없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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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여동생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1
펑슈에쥔 지음, 펑팅 그림, 유소영 옮김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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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아동문학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듯이 중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중일 3국 중 그나마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 사실 우리의 아동문학을 이야기할 때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 안 그렇겠나. 1930년대의 작품속 아이들이 지금의 아이들 모습과 다른 것은 자명한 것을. 특히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굴곡이 질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의 잣대로 당시의 작품을 평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가 많이 변했듯이 중국도 문화혁명을 겪으며 많이 변한 것으로 안다.

 

  여하튼 중국의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에 따라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동화를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당시 중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도 일정 부분 노동에 동원되고 '간부 댁 따님'이라도 그런 노동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돈을 벌기 위해 어린이들도 돌 깨는 일을 하는 것과 묘족의 장례풍습을 볼 수 있는 것 등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네 일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위 공무원인 엄마와 아빠가 묘족마을로 잠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이름이 기억 안 난다.)과 랴오벤의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묘족이라면 흔히 몽족이라고 하는 그 민족이다. 우리 학교 원어민 선생님도 몽족이던데. <총, 균, 쇠>에 의하면 어떤 이유 때문에 상당히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라지.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읽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묘족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사실 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일 뿐 특별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아타오네보다 훨씬 여유있고 지식인층인 주인공의 서술 방식은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동화다. 그러나 자전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읽는 동안 주인공 자매의 생활에 동화되기 보다는 아타오네와 동네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더 눈이 갔다.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아슈 할머니나 동생을 미워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싼타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랴오벤을 귀찮은 동생쯤으로 생각하다 아타오의 막내 동생을 보며 자신의 동생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변화 과정을 보며 가슴 뭉클해진다. 그럴 때는 대개 우리 아이들도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겠지만. 여하튼 이런 책은 문학작품을 통해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마치 <압록강은 흐른다>나 <지로 이야기>를 읽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문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그저 느낌만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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