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시스터즈 키퍼 - My Sister's Kee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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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대한 안이한 해답이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그리고 삶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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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My Sister's Kee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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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에 걸린 환자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안이하게 생각하면, 너무 신파가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아니, 차라리 신파가 되어 눈물이라도 쏟게 만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보다 더 최악의 케이스는 눈물도 못 뽑아내고, 관객들을 졸게 만드는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어느 정도 눈물은 뽑아낸다. 그러나 그 눈물을 뽑아내는 방식이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점점 쇠약해지고, 기력을 잃어가는 환자의 모습에도, 조금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끝까지 그(녀)를 지켜내려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투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눈물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 이야기는 왠지 죽어가는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언니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태어난 동생 안나(아비게일 브레슬린)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듯 하다가, 그 초점이 엄마(카메론 디아즈)에게로, 다시 아빠에게로, 그리고 케이트의 오빠에게로 차례로 넘어간다. 그리고 케이트를 둘러싸고 가족들이 벌이고 있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사투가 조금씩 드러난다. 백혈병으로 고통받으며, 10대 시절을 거의 병상에 누워 보냈던 케이트의 고통은 물론이려니와, 케이트에게 여러 생체조직들을 주어야 하는 안나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했던(둘째 딸마저도 말이다) 엄마의 고통, 그리고 난독증이 있는 자신의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어야 했던 오빠의 고통. 그리고 여기에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여판사의 이야기나, 기꺼이 변호를 맡아주었으나 어딘지모르게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변호사의 이야기까지 겹치며,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변주된다.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가 조금씩 엮어들어가는 도중에 관객들은 서서히 이들의 입장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눈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 중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없다는 것, 모두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 그들 중의 누가 더 고통받고 있다고, 혹은 어떠한 것이 옳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등등 말이다. 즉 이 눈물은 어떠한 것에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딜레마의 눈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멋드러지게 출발했던 이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며 여러 문제들을 너무 쉽게 봉합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그럼으로써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는 초반부에 여러 많은 문제들- 즉 한 아이가 어떤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아이를 낳아 유전적인 도움을 받으려는 데에서 벌어지는 윤리적인 문제, 회복될 수 없는 병임에도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그리고 여기에 뒤따를 수 있는 안락사와 존엄사 같은 문제들), 자신의 몸의 권리를 찾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법률적인 문제, 환자를 둘러싼 가족 내부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 등등- 을 제시하고는 그것을 하나의 해답으로서 모두 설명하려 한다. 물론 닉 카사베츠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가족들간의 사랑의 힘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헌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의 문제들이 꽤나 멋드러졌기(혹은 흥미로웠기, 혹은 이런 이야기들에서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던, 그러나 언젠가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대답에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한부 삶을 다루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그것은 아마도 영화의 새로움이라기 보다는 원작의 새로움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서점에서 잠깐 넘겨다본 이 영화의 원작인 조디 피콜트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 별>은 각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서술하는 형식을 띠고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뭐 어쨌든 간에, 마지막 마무리의 상투성 혹은 불성실해보이는 해답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래도 기꺼이 눈물을 쏟아내 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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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2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내사랑내곁에'와 비교해볼 만한 것 같아요.

맥거핀 2009-09-29 02:34   좋아요 0 | URL
아..개인적으로 '내사랑 내곁에'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내사랑 내곁에'와 굳이 비교하자면 이 영화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네요.^^;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3주


 

추석을 앞둔 9월의 극장가는 늘상 그랬듯이 라인업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국가대표>와 <해운대>가 여전히 여러 관들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자>나 <이태원 살인사건>, 혹은 팀 버튼 감독의 입김이 미친 신작 <9> 등이 눈에 띄지만, 왠지 '이거다' 싶은 작품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가을에는 좋은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극장에 앉아있지 않고, 모두들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좋은 작품들이 개봉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속설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 있다가 추석 연휴 때 개봉을 하려는 생각 때문일까. 

<해운대>와 <이태원 살인사건>는 이미 보았고, <애자>나 <국가대표>는 괜히 눈물 뽑게 될 것 같아서 좀 그렇고, 팀 버튼 식의 애니메이션은 취향이 아니고, 그렇다고 깔려 있는 할리우드산 로맨틱 코미디들이 딱히 땡기지도 않는다. 이 와중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어제(18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80년대 일본뉴웨이브 특별전'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 감독들의 작품들이 소개되지만,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건 이름이 낯익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나 최양일 감독의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항상 하드보일드한 남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며,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혹은 꼭 일본 사회가 아니더라도 사회의 어떤 극악한 고리들을 능수능란하게 펼쳐보였던 최양일 감독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것은 1985년작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와 1989년작 <A사인 데이즈>인데, 영화에 대한 소개를 읽어보았을 때 좀 더 관심이 가는 쪽은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다. 영화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자세한 시간표는 http://www.cinematheque.seoul.kr/ 를 참고)

오키나와의 작은 항구마을. 40대 초반의 의사 신도는 옛 친구 사카구치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멀리서 찾아온다. 작은 호텔을 경영하던 사카구치는 마을을 재개발하려는 거대 건설회사의 매수에 응하지 않고 버티다가 함정에 빠져 수감된 것. 신도는 친구를 구해내기 위해 시모야마 건설의 일당과,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토쿠다 형사와 일전을 벌인다. 처절한 사투 끝에 마침내 사카구치가 석방되지만, 이들 앞에는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기타카타 겐조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최양일의 세 번째 영화. 거대자본에 매수된 경찰에 의해 체포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최대한으로 추구한 작품이다. 통념적인 도덕률로 정의되지 않는 고독한 인물 묘사와 비극적인 세계관에서는 필름누아르적인 영향 역시 엿보인다. 이후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영화들에 일종의 모델이 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80년대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 걸작.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아카이브 필름 데이터베이스) 

- 예습이 필요해 -  

 

최양일 감독의 한일합작영화이자, 어지러운 영화 <수>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최양일 감독의 영화들에 구미가 당기지 않겠지만, 꽤 많은 호평을 받았던 <개달리다>나 <피와 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장기가 복잡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서 어떤 캐릭터를 잡아내어, 그들에게 관객들이 자신의 감정을 쉽게 투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를 바라보던 색다른 시선을 제공하는 것임에 어느정도는 동의할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때로는 매우 마초적이고, 때로는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일종의 도덕적 관념으로만 그들을 판단할 수 없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삶 또한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 일그러지고 길들여졌음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간단하게 말해서 그의 영화들에는 때로 엄청난 '괴물'들이 나오지만, 그 '괴물'들은 어떤 돌연변이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불행한 존재들임을 감독은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아마도 최양일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그 캐릭터의 '흉포성'이 아니라 그 흉포한 캐릭터를 만든 이 사회의 '흉포성'일 것이다. 

<개달리다>: 신주쿠 경찰서의 생활 안전과에 근무하는 형사 나카야마는, 한국인 정보원 히데요시(수길)와 결탁하여 신주쿠를 근거로 활동하는 야쿠자 집단 '애호 조직'에 경찰 단속 정보를 흘려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지만, 범죄의 수사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 기묘한 정신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나카야마 연인이자 히데요시가 동경하는 상해 출신의 창녀 모모. 이들 세 사람은 신주쿠의 가부키쵸에서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구도 믿지 않고 돈에만 집착하는 모모는 나카야마 몰래 히데요시와 손잡고 암달러상, 매춘, 밀입국 알선, 비밀 도박장 운영하는 사실이 '애호 조직'의 두목 곤다에게 발각되어 곤궁에 처하게 된다. 한편, 마약 단속에 나선 나카야마는 외국인 마약상에게서 빼앗은 마약을 후배 경찰 사쿠마와 자신의 팔에 주사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술집 여자 삐끼를 강간, 가게를 엉망으로 파괴한다.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포주를 향해 나카야마는 냉정하게 대답한다. "강도, 사기, 공갈, 폭행, 상해죄로 전원 체포". (네이버 펌) 

<피와 뼈>: 오사카의 김.준.평. 1923년. 한 청년이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향하는 배 위에 오른다. 청년의 이름은 김준평.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새로운 삶이 그에게 풍요와 희망, 인간다운 삶을 가져다 주리란 것을... 하지만 주변 상황은 그를 ‘괴물’로 만들어 갔다. 무엇이 이 순진했던 청년을 모두가 두려워 하는 존재로 만들었는가?

 오사카에 정착해 공장에 취직한 준평은 그 앞에 나타난 여인 김영희에게 반해 그녀와 강제로 결혼하기에 이른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강인한 체력과 타고난 근성으로 어묵 공장을 성공시키는 준평. 그러나 마치 그의 왕국을 지배하는 것처럼 끝없는 착취와 폭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냉혹하기 그지없다. 이즈음 자신을 준평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나타난 청년, 다케시가 준평의 집안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겁도 없이 준평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다케시는 주변을 점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는데.. (네이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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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 The Case of Itaewon Hom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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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의 무거움이 영화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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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 The Case of Itaewon Hom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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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에 대한 여러 미리니름이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가지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나는 이 영화는 뭐가 어찌되었건, 그 내용에만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의 사건이 가진 주는 아이러니함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에 '영화적'인 다른 어떤 것에 주목할 틈이 없다. 이 영화가 사건을 어떻게 가공하고, 어떻게 전달하는가라는 방법론적인 측면을 떠나서 이 사건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 또는 무거움이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른다. 따라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영화인가, 혹은 나쁜 영화인가를 따질 틈이 없이, 사건이 가지는 본질적인 측면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 내용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은 실제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즉 ,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영화 시작부 자막에서 밝히고 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의 사건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튼 이 영화는 상당수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는 힘드리라는 생각이다. <씨네 21>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은 관객들은 어떤 명확한 결론을 선호한다. 이 영화처럼, 명확한 어떤 것도 내려주지 않은채, 관객에게 그 해답을 맡기는 결론은 아마도 어떤 좋은 소리를 듣기는 꽤나 어려울 것이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정해진 도덕률에 의해 명확한 결론이 나오는 결말을 선호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이치다. 오랜 예전부터 관객들이 선호하는 것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지, 모호한 결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다루는 이 사건이 실제로도 그렇게 결말이 났다는 사실이다. 1997년, 한 남자가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칼에 여러 군데를 찔려 죽었다. 사건 장소에는 친구 관계인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범행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은 다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러 증언 및 정황증거에 따라 알렉스는 범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피어슨은 증거은닉 및 무기소지로 1년여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짧은 징역살이 후 출국금지가 잠시 정지된 틈을 타서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다 되가는 오늘에 이르렀다. 죽은 사람이 있고, 범인도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은) 명확하나, 둘 다 풀려난 사건, 그 실제 일어난 사건이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의 사건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실제의 사건에서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의 혐의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는 채집되지 않았다. 즉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알렉스가 범인일 수도, 혹은 피어슨이 범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범인일 수도 있다. 즉 알렉스와 피어슨이 같이 범행을 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지만, 이 부분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맡은 영화 속 박대식 검사(정진영)은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라는 (즉, 누가 주범이든, 종범이든 간에) 의견을 묵살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100%의 진실을 버리고 50%의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둘 다 기소한다면, 무고한 한 사람을 범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그것이 박대식 검사가 가진 생각이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인 것일까. 두 사람이 같이 범행을 했을 가능성은 어떠한 이유에서 제거되었는가. 실제의 사건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즉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이다'라는 전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일까. 성립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

처음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영화가 미국과 우리나라 간의 수사권의 문제, 그의 어떤 부당한 측면을 강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러한 부분이 아니다. 물론 영화 중간에, 미국의 수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을 박대식 검사가 토로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당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으나 그 부분은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에서 포인트를 두고 있는 부분은, 이 사건의 어떤 아이러니한,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나, 둘 중 어느 누구도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혹은 범인이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상황. 영화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알렉스 쪽에 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했을 때 여전히 몇몇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은 남는다. 과연 그 둘 중에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답답함은 내내 박대식 검사를 짓누르며, 동시에 관객들도 짓누른다. 

그것이 관객들을 짓누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는 철저히 박대식 검사(정진영)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영화 중간중간 다른 시점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예를 들어 피어슨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 혹은 알렉스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과 같은 내용들이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박대식 검사의 시점에서 들은 재구성된 이야기이다. 즉 박대식 검사가 피어슨이나 알렉스를 심문하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해서 나열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둘 중 어느 것에 진실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박대식 검사가 가지는 이 답답함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박대식 검사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코믹해보이는 장면마저도 마냥 웃을 수 없는 장면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보기는 조금 특이해 보이는 면이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지만, 전체적으로 여러 시점을 중간에 삽입하며 관객의 이해와 영화에의 몰입을 높인다. 그러나 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박대식 검사의 시선으로만 관객을 이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어떤 정황을 마치 우리가 수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가 느낀 절망과 한계를 우리에게도 같이 느끼도록 이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이 영화가 사건의 어떤 충실한 재현에만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듣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이로써 얻는 소득도 있다. 그것은 관객을 어리둥절케 하고, 분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사실 정작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부분에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범인이 피어슨인가, 혹은 알렉스인가 라는 부분이지, 그 둘 모두가 풀려나게 된 그 결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정황에 대해서는 애써 입을 다문다. 즉 이 둘 모두 거의 무죄와 다름없는 상태에서 풀려나게 된 이 법의 허점, 혹은 커다란 구멍에 관해서는 간단한 설명으로("이길 수는 없으나, 지지는 않게 해드리죠.") 지나가고 만다. 이것은 불친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을 분노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죠?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죠? 그것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불친절해 보이는 마지막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그리고 동시에 가슴 속 어딘가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러나, 찝찝한 한 마디를 더 덧붙이자면, 이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알렉스를 향해? 혹은, 피어슨은 향해? 아니면 법원을 향해? 이 영화의 가장 무거운 점은 어쩌면 이것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제시된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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