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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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영화의 중요 내용과 원작 웹툰의 중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끼>는 재미있는 스릴러다. 그러나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몇몇 석연치 않은 장면들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몇몇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그렇고, 인물들간의 관계나 캐릭터들의 모습도 그렇다. 먼저 몇 가지 사소한 장면들. 전석만(김상호)은 왜 갑자기 유해국(박해일)을 습격하는가. 그리고 그는 그날 유해국이 찾아올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하성규(김준배)는 죽어가면서 왜 그렇게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에 집착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해국은 왜 맨 처음에 이영지(유선)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박해일 정도의 캐릭터라면, 이영지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그 사실부터 충분히 의심해보아야만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가 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소한 장면들보다는 조금은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캐릭터의 어떤 일관성이나, 그로 야기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이 유해국이라는 캐릭터. 그의 전사(前事)는 영화 속에 매우 짤막하게 처리되며, 그와 박민욱 검사(유준상)와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뉘앙스로만 짐작할 뿐인데, 이것만을 놓고보면, 사실 이야기의 중심 흐름은 약간은 의아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유해국은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그렇게까지 돕는가.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이끼>는 이야기의 힘이 캐릭터를 끌고간다기 보다는, 캐릭터의 힘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구조이기 떄문에 캐릭터의 어떤 비일관성, 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은 이야기의 흐름을 심하게 어지럽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제일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유해국의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이다. 영화만을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거의 유목형의 '실패의 기록'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유목형은 결국 아무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사실 그다지 강해보이는 캐릭터는 아니다. 극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유목형에게 감화되지만, 그 감화의 이유마저도 사실 모호하다. 그리고 유목형은 결국 천용덕 이장(정재영),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유해진) 그 누구도 교화시키지 못했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거의 '유약한 선인(善人)'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뒷방 늙은이 신세는 사실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용덕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천용덕 이장에게 그는 과연 가치가 있었을까. 영지에게 유목형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지켜낼(혹은 현혹될) 가치가 있었을까.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그것에 대한 어떤 불충분한 해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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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이 기어코 원작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들을 어렴풋하게 알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강우석 감독이 이 좋은 원작에 무리한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원작에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만으로, 감독을 비판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화에서 원작에 대한 메스질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원작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뒤에 나온 이야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는 뒤에 나온 이야기는 어떤 새로운 창작을 거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 내부의 것만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원작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모호한 원형같은 것만이 이 영화에는 남아 있으며, 그 남아 있는 원형과 새로운 것들이 이질적으로 섞여 영화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원작과 이 영화를 그저 단순하게 두 개의 이야기로만 놓고 비교해보아도, 원작의 이야기에 손을 들어줄 여지는 충분히 많다. 

먼저 사소한 것들은 패스. 앞에서 제시한 사소한 의문들은 사실 원작을 보면, 거의 해소가 된다. 그래서 나머지 굵직한 것 몇 가지. 먼저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의 앞의 이야기들을 대폭 들어내 버린 것. 이것이 야기한 문제는, 뒤의 문제들과도 연관되지만, 이 두 캐릭터의 행동에 어떤 단순함만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원작의 훌륭한 점 중의 하나는, 이 앞의 이야기가 계속 뒤의 이야기, 즉 유해국이 아버지 죽음의 미스테리를 캐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어떤 힘의 원천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원작에 존재하는 이 앞의 이야기와 유해국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은 유해국의 계속된 행동에 어떤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며, 동시에 박민욱 검사의 캐릭터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원작 웹툰의 주된 메시지에 강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즉, 마을 사람들과 유해국은 종내에는 매우 비슷해진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유목형을 강하게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박민욱 검사와 유해국의 관계는 느슨하게 천용덕 이장과 유목형의 관계를 다시 연상시키며, 따라서 박민욱 검사가 유해국과 연대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두 사람의 전사를 아예 들어내버렸기 때문에, 유해국은 마을에 들어와 쓸데없이 의심만 하고 사고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이자 좌충우돌 돌진하는 활기찬 인물이 되어 버렸고, 박민욱 검사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멋진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박민욱 검사의 몇몇 씬들에서 감독의 전작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란 유목형이 원작과 달리 유약하지만, 너무 착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원작과의 차이. 원작과 영화와 가장 달라지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유목형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유목형은 원작 웹툰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상당히 강력해지고, 선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영화의 몇몇 설명되지 않은 점들이 이해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유목형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도 하필이면 왜 그 구절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유목형의 감화력. 웹툰에서 유목형의 감화력은 어떤 두려움과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때로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대상이 두려움을 주면, 그 대상을 분석하여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도리어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 이른바 <미스트>의 세계. 그리고 유목형의 칼질. 영화에서는 이것은 약간은 느닷없어 보이고, 도리어 유약한 자의 어떤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웹툰에서는  이는 충분히 설명이 된다. 유목형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용덕 이장과의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볼 때에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사실 명확해진다. 강우석 감독의 행위는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것이다. 즉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여, 관객들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명확하게 가려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이 이 영화의 캐릭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의 스릴러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 아무래도 강력한 악이 있을 때에 스릴러는 더욱 강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직히 강우석 감독의 오판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원작의 눅진한 공기에서 오는 어떤 끈끈한 긴장감과 불길한 메시지에서 오는 묵직한 뒷맛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원작의 가장 큰 긴장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그것은 유해국을 다시 뒤집어 보았을 때에 생긴다. 유해국은 유목형의 모든 행위들을 다시 비슷하게 반복하였으며, 결국 천용덕 이장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상쾌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독자들에게 어떤 불길한 뒷이야기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연상시킨다. 니콜라이가 세미온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에 그 묵직하고도 불길한 끝맺음. 그러나 강우석은 유해국에게 상큼한 승리를 전달해주고는 느닷없이 이영지에게 그 마지막 자리를 맡긴다. 이 이탈이 가져다주는 어리둥절함.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끼>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원작 웹툰에서는 그 제목 '이끼'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끼는 음지에서 자라고, 조금씩 조금씩 바위를 침식해들어가며, 종내에는 그 바위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끼는 아무리 씻어내려고 해도 잘 씻겨내지지 않는다. 다 씻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틈에 다시 그 바위를 조금씩 침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끼낀 바위와 그렇지 않은 바위를 쉽게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아니, 이끼가 하나도 끼지 않은 바위가 있을까. 이끼는 항상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끼는 누구도, 심지어 바위 그 자신마저도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하여, 어느 틈에 그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이는 영화 속에서는 박민욱 검사의 말을 통해 그 의미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축소된다. 이끼처럼 달라붙어서 살라고, 하찮게. 그러나 이끼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끼는 어느 바위에나 존재하며, 결국 바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끼가 완전히 달라붙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이끼의 확산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작 웹툰의 여러 팬들이 지적한 바대로,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강우석 감독이 맡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원작의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있는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팬들의 지적대로(무리한 바람이겠지만), 이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이 메스를 들이댔으면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는 원작의 공기를 간직하면서도, 그 내면에 더욱 묵직하고도 눅진한 이야기들을 담아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의 실패한 수술. 수술실에 들어간 복잡한 인간 머피는 단순하고 명쾌한 로보캅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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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주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감상. 늘상 그렇듯이, 기대하고 본 영화는 기대감에 못 미치는 것 같고, 별 기대감 없이 본 영화는 꽤나 의외의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본 영화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퍼머넌트 노바라>. 묘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마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명 있기는 한데, 모두들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술 퍼마시고, 여자를 때리거나, 도박에 미쳐 살거나, 그도 아니라면, 전신주에 도끼질을 해댄다. 사실 여자들도 조금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람만 피우는 남편을 응징하는 마사코도 그렇고,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여러 남자들을 계속 만나오는 토모도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져 보인다.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주인공 나오코뿐. 일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지고 보면) 제일 이상했던 것은 여왕도, 토끼도, 쌍둥이도 아닌, 앨리스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이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면, 거의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코믹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감독은 다시 숨겨진 이야기를 슬며시 드러내보이며, 영화에 또다른 색채를 덧씌운다. 묘한 분위기와 재치있는 대사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능숙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 단점이라면,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은 모호하다는 것. (부천시청)



두 번째 본 영화는 도미닉 제임스 감독의 <다이>. 글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해주기는 힘들다. 정신과 병동에서 깨어난 6명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범인에 맞서서 생사를 건 게임을 해야한다는 설정인데, 생각만큼 훌륭하지 못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참신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만듦새가) 매끄럽거나.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채 낯선 곳에 갇히는 사람들이 어떤 범인 또는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은 이미 <쏘우>, <큐브> 등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인 데다가, 그것에 참신함을 부여해야 할 범인 캐릭터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하다. 거기다가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는 왜 그렇게 구멍이 많은지. 예를 들어, 주인공이 각 사람들에게 죽이는 방법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계속 헛웃음이 난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런 방식의 지겨운 설명으로 밖에 처리할 수 없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게임 규칙의 치밀함이나 죽음의 스릴 강도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는 해도(그래서 어쩌면 <쏘우>가 단지 그 죽음의 스케일만을 키우는 속편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내세우는 메시지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인 '죽음을 어떤 우연에 맡긴다'는 것. 글쎄. 완벽한 우연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한가지로, 왜 주사위는 꼭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쓰인 것만을 사용해야 하지? 2부터 7이 쓰이면 안되는 건가? 아니, 차라리 12면체 주사위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주사위를 '선택'했다는 그 아주 작은 한 가지의 사실도 '우연'이라는 것의 존재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연'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감독으로서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예 <쏘우>처럼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던가, 끝까지 그 '우연'에 대해 항변하는 건 뭥미? (프리머스 시네마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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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7-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 상품으로 두 영화를 넣으려고 했는데, <퍼머넌트 노바라>는 검색되지 않고, <다이>를 검색하니 무려 718개의 영화가 나와서 포기.
 
환상의 빛 - Mabor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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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았다.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부터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계'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이란, 어쩔 수 없이 떠나간 사람들과 이별하여야 하며, 남은 자들이 되어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떠나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죽음일 것이지만, 죽음만이 떠나감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의 부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영화란 '모든 남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그 영화들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특별한 위치의 일부분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어떤 특유의 세계관이 한 몫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도 왠지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주인공 유미코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남편이 거의 자살과 같은 죽음으로 떠나간 이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에는 한편으로는 단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막연한 답답함도 있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즉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도 있는 듯 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생을 스스로 마감함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미코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관련되어 있다. 집을 떠나는 할머니를 끝까지 막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길로 어디론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 유미코는 여전히 자책하고 있다. 내가 그 때 할머니를 필사적으로 막았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새로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된 그 후의 어느날, 그가 죽던 날처럼 어디선가 자전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해녀 할머니는 궂은 날씨에도 물질을 하러 가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날씨는 급격히 나빠지고, 할머니는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 할머니도 남편과 어린 시절의 할머니처럼, 자신이 막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오고, 남편은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그 할머니, 불사신이라니까. 이 장면에는 묘한 감흥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남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책감을 느끼거나, 그것 때문에 남은 삶을 괴로워한다고 해도, 그것과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거의 별개의 문제와 같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유미코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았어도, 할머니는 기어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남편도 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유미코가 아무리 어떤 저주를 내렸어도, 그 할머니는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기적이나, 미신이나, 노력의 부족이나, 불사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이 그런 것이다. 삶은 그런 불가해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고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아픈 기억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기억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픈 기억을 떼어내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유미코는 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자전거 열쇠에서 방울만 떼어내려고 하지만, 그 방울만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도 방울을 떼어내어도 그 자전거 열쇠에서는 방울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숭고하다. 우리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들을 따라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숭고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는 모두들 어떤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들을 품어 내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의 후속작 <원더풀 라이프>에서와 같이,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기억만이 남으면 남은 삶은 과연 행복할까. 혹여 행복할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것은 숭고한 삶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혹 우리가 원한다 해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 장터의 할머니는 유미코에게 넌지시 말한다. 남은 아들은 아주 어릴 때에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 나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아들은 아버지의 애초의 부재(不在)는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죽음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즉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유미코가 남편의 기억을 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를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새 남편이 내놓은 답이 그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가 괴로워하자, 남편은 유미코에게 말한다. 환상의 빛이 있다고. 죽은 사람들은 가끔 그 환상의 빛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간다고 말이다. 어쩌면, 아마도 어쩌면, 그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내고, 그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을 가슴 속 어딘가에 담고,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유미코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환상의 빛은 아마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떠나간 사람들을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 보내는 하나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제의들은 떠나간(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든 우리 삶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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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감독은 이 담담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감독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독특한 화면 구성을 통해, 이 이야기들이 관객의 마음 속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도록 한다. 그러나 이 화면 구성들은 단지 어떤 스크린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빛이 쏟아지는 외부와 어두운 실내를 분리하고, 창이나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주인공을 어두운 실내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동진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설명한 대로 고레에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구도이기는 하지만,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갖혀 있는 주인공의 심정을 그대로 표상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주인공은 관객의 마음마저도 괴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이들이 어두운 터널 안에 있다가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빛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또한 한편으로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유미코는 처음에는 계속 어두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옷들만 입고 나오다가, 중간에 새 남편과의 안정을 통해 조금은 옷의 톤이 밝아지다가, 다시 괴로움에 빠진 후, 옷이 검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움을 느끼고 미친 듯이 따라가는 누군가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녀의 옷의 괴기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나중 작품들의 원형과 같은 장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미코의 친정 엄마는 왠지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머니들이란 사실 어찌나 그렇게 무섭고, 강인할 수 있는지. 사위의 죽음을 맞고도, 태연하게 딸의 곁에서 딸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그 태평스럽고도, 무심하게 보이는 말투. 그것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소소한 솔직함과 따뜻함, 그러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무섭고 강인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왠지 쉽게 갖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숭고함의 다른 형태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미코도 아마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미코의 엄마도, 언젠가 그렇게 남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유미코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나 보내면서 그녀는 가슴 속에 아마도 굳은 살들을 조금씩 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버텨내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앞날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텨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우리는 다른 이름의 '환상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상의 빛은, 떠나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환각의 빛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어떻게든 그곳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그 곳에 있는 그 환상의 빛, 유미코가 앉아있던 어두운 방 바깥에 있던 그 환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시사회를 보게 해주신 시사회 주관 출판사와 알라딘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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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 The White Ribb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글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의 모든 예측을 뒤집어 놓을 최고의 걸작!'이라는 이 영화의 카피 문구가 조금은 의아하게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의아함은 그 카피 문구의 '걸작'이라는 말보다는 나머지의 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예측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관객의 예상을 뒤집는 어떤 반전에 가까운가? 영화를 보고 나면, 반전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도리어, 영화는 약간 의아하게도, 그 결말 이면의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약간은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을 학교 선생의 술회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마을 학교 선생은 시작부에 의미심장한 말들을 한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풀리지 않은 비밀을 담고 있으나, 마을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이 나라(독일)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연이은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을 의사는 누군가가 몰래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고, 마을 지주(남작)의 아들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오며, 또 누군가는 사고로 죽고, 누군가는 불을 지른다. 그리고 급기야는 한 장애 소년의 눈이 도려내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주민들은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끼고, 남작은 마을 주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며, 범인을 찾으려 애쓴다. 즉 이 영화는 한편으로 추리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 일련의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화자인 선생은 마침내 범인을 밝혀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체 틀이다.

그러나 왠지 이 영화는 그 전체적인 구조를 스스로가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유사 추리물에서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하나의 예. 영화의 초반 시퀀스에 사건을 보여준 후, 감독은 마을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화자에 의해 그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클라라의 옆에 모여서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고 화자는 술회한다. 이것이 범인 찾기라면, 이 시퀀스야 말로 의심스러운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화자에 의해 지목되는 범인은 범인이 아니며 이러한 시퀀스는 관객의 의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또 하나의 이상함.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마을 선생에 의해 서술되는 1인칭 화자의 시점(視點)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이 영화에는 마을 선생이 결코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자꾸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끝까지 이 1인칭 시점의 구성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짐짓 아이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화자의 입으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즉 영화는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의 장면들을 꾸준히 보여주면서도, 화자의 1인칭 시점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믿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 1인칭 시점을 의심하게 한다. 그 시점 구성의 기이함.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추리물이라면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화자에 대해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우리는 그가 내놓은 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아니,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화자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감독은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당신이 답을 못찾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이 모두 일을 벌였다라고 생각한다면, 답은 도리어 간단하고, 간명하다. 그러나 영화를 그것으로만 단정짓고 영화관을 나서는 것은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 안에서 제시된 사실로만 보자면, 아이들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을 선생의 의심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추리, 혹은 불충분한 추리 쪽에 가깝다. 아이들이 그곳에 나타났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도리어, 몇몇 씬들이 더욱 모호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에바는 왜 그토록 호수로 가는 것을 꺼렸던가. 산파와 의사는 왜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는가...등등.



...................................

그러므로 가장 올바른 길은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것 보다는, 아마도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곱씹어 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노린 점처럼 보인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해보이는 이 마을은 이중의 지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남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지배와 목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지배. 그러나 이 지배 구조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다. 남작은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 의한 지배를 공고히 만들려고 한다. 목사는 종교적인 엄숙주의에 빠진 나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마을에 역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낙마했던 의사는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그보다 더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이중적인 위선은 폭력의 지배에 의해, 그 하위로 조금씩 번져나간다. 물론 그 지배 구조의 가장 하위에 있는 인물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지배가 불안하고 기이한 틈새를 펼쳐 보일 때, 오스트리아에서 황태자는 살해당했다. 이제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파시즘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일까. 글쎄. 다른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인다고 해도, 적어도 파시즘이 일반 대중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동요를 그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폭력적인 지배가 공고한 이러한 구조에서 불만이 극도로 응축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불신들이 커져간다. 이때에, 그 폭력적인 지배의 정점들이 갑자기 해체되고 나면, 사람들은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을 걸러내고, 허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론 사실 파시즘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이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 여기에 결합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 영화는 질문을 하고 있다. 왜 파시즘이 하필이면, 이곳 독일에서 출현하여,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것의 뿌리의 일부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이 묵직한 질문들을 추리극의 외피를 두른 후, 조금씩 조금씩 슬며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차곡차곡 쌓인 질문들은 종내에는 관객을 어디에도, 그 어느 인물에도 마음을 둘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화자인 마을 선생마저도, 관객이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다. 추리극의 구성으로 보자면, 그가 내놓은 해답을 관객이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그가 불충분한 추리를 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영화의 구조도 한 몫을 한다), 한편으로 보자면, 그 역시 모자란, 혹은 사려깊지 못한 어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꿈을 꾸었다고 항변하는 제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선생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 역시 목사와 남작의 이중의 지배구조에 갇힌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이야기를 더욱 묵직하게 하는 것은 음악 없이 진행되는 이 이야기의 서술 방식과 흑백의 하얀 화면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그 소년과 소녀에게 하얀 리본을 둘렀을 뿐만 아니라, 흑백의 화면을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하얀 리본을 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거운 어조로 덧붙인다. 그 하얀 리본은 순수를 상징한다고. 파시즘의 광풍에 섰던 자들이 순수한 혈통을 그토록 부르짖은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어느 곳에서도 순수함을 그 주무기로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


덧.
제6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인데, 글쎄, 좋은 영화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황금종려상 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유럽 애들의 파시즘에 대한 어떤 공포, 그것에 대한 일종의 위약효과가 작용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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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7-15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5개를 줘야 하나, 4개를 줘야 하나 다시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어떤 부분이 있다. 그래서, 다시 4개로 수정.
 
나잇 & 데이 - Knight & D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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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스토리를 논하는 건 부질없지만, 하하 웃기도 민망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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