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26일에 타 서점 블로그에 (나름 리뷰라고) 올린 글. 유일하게 딱 하나 쓴 글(하기는 그 때는 뭔가를 쓸 만한 때가 아니었다). 오늘 오랜만에 서점에 가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 <언더그라운드>가 마침 새로 출판되어 있길래, 생각나서 올려본다. 자투리 글을 모으려는 목적도 있고. 제목은 그 때 올린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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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옴진리교 사건 '길고 긴 10년'  

1994년 도쿄(東京)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사건을 저질렀던 종말론 종교단체‘옴 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ㆍ48ㆍ사진) 피고인에 대한 1심 판결이 2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내려진다. 

일본 검찰은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등 13건의 테러ㆍ살인 사건으로 모두 27명이 숨진 일련의 옴 진리교 범죄를 모두 아사하라가 주모ㆍ지시했다고 보고 지난해 4월의 논고 때 "일본 역사상 가장 흉악한 범죄자”라며 살인을 구형했다. 범행에 가담했던 그의 제자들 중 11명에게 이미 사형판결이 나왔고 아사하라의 지시 사실이 인정됐기 때문에 그에게도 사형판결은 확실해 보인다. 무차별 동시다발 테러의 원형으로 꼽히는 지하철 사린 테러는 ‘안전신화’를 자랑하던 일본의 치안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중략)

유족들은 “아사하라의 입에서 범행의 이유와 반성ㆍ사죄의 말을 듣지 못하는 한 사형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경찰은 아직도 남아 있는 신자들이 소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해 27일 법원주변에 기동대 400여명을 배치해 경계를 할 예정이다.

- 2004년 2월 26일자 신문기사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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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권두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악령》의 한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주인공 스타브르긴이 그의 미친 아내를 살해케 한 후, 그날 밤 미모의 여자 리자와 육체관계를 갖고, 다음날 아침 차갑게 헤어지는 대목에 나오는 바로 그 리자와의 대화이다. 리자에게 "어제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하고 물은 데 대해서, 그저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하는 대답을 듣고, "그건 가혹하다. 그건 너무나도 잔혹하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장 뤽 고달의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라디오 뉴스의 한 토막이 인용되어 있다. "게릴라가 115명이 전사했다"는 투의 뉴스가 의미하는 너무도 단순화되고 무의미한 폭력적인 표상을《악령》의 한 구절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폭력적인 표상의 위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투관계 보도나 재해보도에 있어, 엄청난 수의 다양한 희생자들의 다양한 죽음과 비참한 죽음을, 무미건조하고 지극히 단순하게 '5000명이 전사했다'든가 '3000명이 사망했다'고 표상하는 것처럼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단순화에 대한.....(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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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은적이 있다. 소설은 아니고, 사린가스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은 일종의 르포다.

그들의 대다수는 우연히 그날 아침 지하철을 같이 타게 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날의 사건 이후로 다들 무엇인가 조금씩 달라져버렸다.

한 사람의 친구로써, 누군가의 어머니로써, 혹은 누군가의 선생님으로써 맺었던 관계의 틀 속에서 존재하던 누군가는 지하철 테러 사건의 대상물 중의 어느 하나로써 그저 큰 사건이라는 틀 속에서 묻혀져 버리고 말았다.

"있었던 일이 있었지 뭐"라는 체념 속에서 객체화되는 우리들의 삶은, 어떤 큰 대상물 속의 하나로서의 부속물적인 우리들의 삶은...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게 아닌 것이다. 조금 달라져 버리긴 했지만, 아직도 사건의 이면에는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누군가는 또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군가인 것이다.

그것을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는 보여준다.

ps. 갑자기 신문을 읽다가 한 3-4년 전에 읽은 그 책이 떠올랐다. 사린 가스 테러 사건에 대한 수백 페이지의 분석 보고서보다 이 책 몇 페이지가 이 사건의 심각성을 더 잘 말해준다. 우리나라 대구 지하철 사건도 별로 다르지는 않다. 대구 지하철 사건 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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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29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엉망. "너무도 단순화되고 무의미한 폭력적인 표상을《악령》의 한 구절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폭력적인 표상의 위기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cyrus 2010-11-2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나온 책의 내용이랑 차이가 없나요?
저는 예전에 나온걸로 읽고 싶어지네요. 제가 사는 곳이
기억하기 싫은 참사가 일어난 것도 있고, 하루키가 쓴 르포라는 점에서
끌리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0-12-01 12:14   좋아요 0 | URL
답글이 좀 늦었습니다.^^;
서점에서 내용을 살짝만 보았는데, 크게 내용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단지, 이번에는 이 <언더그라운드>와 더불어 2편격인 <약속된 장소에서>도 같이 출간된 것이 조금 달라진 점이랄까요.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르포라기 보다는 인터뷰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만, 사건의 정황을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르포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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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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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의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 본다. 지젝의 책 <시차적 관점>과 다른 지젝의 책 몇 권, 그리고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책(혹은 그를 다룬 책) 사이로,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는 제목과 함께, 이현우라는 이름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북리뷰어, 혹은 '인터넷 서평꾼' 아니면 '서평가' 로쟈의 본명. 한 그루의 사과나무? 출판된 책 같지는 않고, 혹시 기약없는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책인지, 아니면 그의 그저 노트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사진은 서평가의 숙명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평가의 숙명이란, 결국 언젠가 출판될 자신의 책을 기다리는 것. 그 책의 서평을 써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다른 경우에도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수없는 영화를 본 영화평론가들은 언젠가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정성일이나 김정 등 여러 평론가들의 영화를 우리는 접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요리를 맛본 미식가는, 자신만의 완벽한 요리를 언젠가 만들어낼 것을 꿈 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써온 서평가는....누군가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는 것을 고대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문제다. 재능이 없어도 꿈 꾸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숙명과도 같다.

아마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로쟈의('이현우의'라고 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 이 책 <책을 읽을 자유>에는 아직 탄생하지 않은 여러 복잡하고도,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를 가진, 미래의 책들이 등장한다. 로쟈가 앞으로 쓰게 되거나, 혹은 결국 쓰지 못하게 될 몇 권의 책들. 언젠가 그 책들이 써질 수 있을까? 글쎄. 뒤의 발문에서 신형철이 그를 '기계'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고, 로쟈 자신의 약간은 자조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앞에는 그가 읽는 속도의 몇 배나 될 정도의, 그가 아직 읽지 않은, 그러나 그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대고야 말, 수많은 책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는 그 책을 읽고는 무언가 몇 개의 짧은 코멘트들, 혹은 긴 논의들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명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쓰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가진 책들의 출판 시기는 조금씩 유예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책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모든 서평가에게는 또다른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서평가의 일단을 밝힌 바대로, 어쩌면 대다수의 서평가들은 서평을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며, 최대한 그것을 마감이 다가올 때까지 미뤄두려고 하고, 또한 그 책들의 상당수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좋다, 나쁘다의 기준을 내린 후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작업을 재빠르게 해내는 족속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고 해도, 적어도 확실해 보이는 한 가지는, 서평가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한 권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은 정말 쓰레기군. 이제 다시는 책 같은 것은 읽지 않겠어."라고 결심한다해도, 그의 흥미를 자극할 다른 책은 그가 말하는 그 순간에 어디선가 출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위대한 저작이 말이다.

그럼 서평가의 숙명을 생각해 보았으니, 그런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의 숙명을 생각해보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두 가지 부류일 것이다. 소개된 그 책들을 읽을 마음이 있는 사람과 그 책을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 누군가는 읽지 않고서도, 그것을 읽었다는 지식을 내세우려, 혹은 읽었다는 충만감을 느끼려 이러한 서평모음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면 다른 누군가는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길잡이로 생각하고 이러한 책들을 볼 것이다. 즉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맛보기로. 아무튼 확실한 것은, 전자이든 후자이든 간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머리 속이 꽤나 복잡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가 별로 관심없던 주제들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머리 속에 단편적으로나마 집어넣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앞으로 그가 사게 될 책들의 목록을 생각하고, 그 가격을 어림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자의 사람이나, 후자의 사람이나 이 책 <책을 읽을 자유>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교양에다, 지젝, 데리다, 라캉, 고진 등 주요 현대철학자들의 간단한 이론적 개괄까지 머리 속에 넣게 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은 전자의 사람들보다는 후자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신형철이 얘기한 바대로, 로쟈 서평들의 강점은 두 권 이상의 책을 무리없이 연결하는 것이다. 즉 로쟈는 어떤 주제에 대한 개괄적인 책들에서부터 심화된 책들까지 부드럽게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리고는 그 주제에 있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들도 은근슬쩍 끼워넣는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부터 번역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각 책들을 짚어 나간다(이 책의 또다른 강점은 로쟈의 번역에 대한 지적이다. 로쟈만큼의 인문학적 내공을 갖춘 번역가들이 많지 않은 탓이다 -). 그것은 아마도 로쟈의 오랜 독서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누구나 쉽게 흉내내기란 어려운 것이다.

글쎄.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기에 약간 주저되는 부분은 있다. 전체적으로 주제별로 서평들이 잘 분류되어 있으나, 철학이나 문학비평 등 일부의 주제들로 편중된 경향이 있고, 일부의 글들은 너무 깊게 파고 들기도 하고, 혹은 너무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표되는 지면들이 달랐던 탓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앞 부분에서, 서평꾼과 서평가, 서평자와 그들이 쓰는 리뷰를 구분하고 있는데, 지면의 성격에 따라 요구되는 리뷰의 급도 다르며, 내용적인 밀도도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주간지, 문학비평지, 신문, 인터넷 공간 등 여기에 실린 글들이 다양한 매체에 수록된 것이었던 것 만큼, 약간은 산만한 경향이 있고, 중첩되는 내용의 글들도 있다. 즉 그만큼 책의 전체적인 구성의 밀도는 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괜한 트집잡기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로쟈의 책읽기 2000-2010'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이것은 그저 지난 10여 년간 로쟈가 성실하게 써 온 독서일기들을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요구하는 대로, 다양하게 써온 것이 아마도 로쟈의 잘못은 아닐 터. 그저 독자는 취사선택하여 잘 읽으면 될 일이다.

어쩌면 나의 이 볼멘소리는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보다도 로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리송해 보인다는 물음이다. 신형철은 "예나 지금이나 로쟈는 "회색인"이다"라고 썼고, 또 "그러나 나는 인간 이현우가 아니라 필자 로쟈에 대해서밖에 모른다. 인간 김해경이 필자 이상李箱으로 변신한 뒤 김해경을 거울 속에 가둬버린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로쟈의 글에서도 이현우의 모습은 흐릿하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로쟈는 자신의 여러 글들에서 모호한 입장들을 내비친다. 그것도 아주 군데군데에서만. 그것은 분명 이 서평집이라는 책의 속성에서 기인된 문제일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영화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음악평론가들이 객석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처럼, 서평가들은 책 뒤에 숨어서 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신을 아주 조금씩만 내비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로쟈의, 아니 이현우의 책들을 어서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그가 자신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에 어서 굴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책을 읽을 자유'가 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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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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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1903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죽었다. 1903년에서부터 1950년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유럽에 있어서는 격동의 시대였고, 구체제가 몰락하는 시기였으며, 일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책 뒤의 조지 오웰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가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서 얼마나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했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였고, 유럽의 밑바닥 생활을 스스로 자원하여 체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였다가 적과 내통하는 자로 몰리기도 하였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BBC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다양한 경험들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에세이에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그 일부인 29편의 에세이를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나는 왜 쓰는가>인데, 이 에세이집은 그간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만 널리 알려졌던 조지 오웰의 여러 다른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및 '정치와 영어', '작가와 리바이어던' 등에서 보이는 엄정한 작가로서의 면모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의 글을 쓰는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의 4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본인이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중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정치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비추어 보듯, 그가 정치적 사유와 그에 따른 태도를 글쓰기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놓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들이 어떤 정치적 팜플렛이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글들이 정치적인 팜플렛의 지위를 벗어나는 순간은 그것이 하나의 예술이 될 때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짧은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적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와 영어'를 보면, 그의 작가로서의 언어를 다루는 태도,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의 예술가인 작가로서, 좋은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번의 붓터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단 한마디의 글에도 가장 최적의 표현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작가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다른 면모는 그의 정치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가로서의 면모이다. 그의 정치적인 에세이들을 읽어보면, 사실 그의 정치적인 소견이 상당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는 생애 내내 전체주의에 맞서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지만,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으며, '간디에 대한 소견'에서 밝히는 것처럼. 맹목적 평화주의에도 그것의 비현실성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숙청 등을 예로 들며, 공산주의에도 내내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애국주의에 찬성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2차 세계대전 중 국가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실 그가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것도, 이에 비추어 보면 조금은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견해의 의미보다도, 이러한 견해들의 원천이 된 그의 경험이다. 즉 그의 이러한 일견 복잡해 보이는 정치적인 스탠스는 그의 철저한 경험의 산물이다. 이 말은 역으로 그가 그저 앉아서 사색과 글쓰기에 몰두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소위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고,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글들은 그가 휘두르는 일종의 무기였다. 그는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가 글쓰기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꽤나 강력한 무기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페인 내전에 달려가 직접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였고, 전쟁 기간 중 국가의 선전물로 이용되는 BBC에 기꺼이 군에 복무하는 심정으로 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전생애에 걸쳐 글과 그의 온몸으로 일종의 정치적인 투쟁을 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그럴싸한 철학 이론을 내뱉다가, 스위치 하나를 바꿔다는 것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그와 가장 극에 있던 이론을 내뱉는 '앉아서 말만 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동시에 이 에세이집의 많은 글들에서 그의 통찰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통찰에서부터 미래 세계의 세상에 대한 통찰, 우리 일상 생활에 대한 통찰에까지 미쳐있다. '당신과 원자탄' 같은 글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통찰이 소름을 돋게 하며, 일부의 글들은 지금 시대에도 어떤 미래 리포트의 일부로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다. '코끼리를 쏘다', '행락지'와 같은 글들은 우리 미래의 생활에 대한 일종의 예언으로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숙한 통찰로서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며, '"물속의 달"'을 통해 일종의 자기반영적 예언이 된다. 

   
  (전략)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락지' 中, p. 247-248.
 
   

 

한편으로, 그는 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냉소적이었다. 그의 어떤 냉소들은 그가 쓴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미래 사회의 끝을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고, 동시에 현 시대의 세상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막연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그의 그런 깨달음은 분명히 막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막연한 깨달음이나마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그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를 괴롭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가 이튼 졸업생으로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찰 생활을 택하고, 그 이후에 빈민의 삶에 스스로 뛰어든 것은 천재적인 통찰가들이 흔히 보여주는 일종의 '부조리함에 스스로 처하기' 혹은 '운명에 맞서기'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많은 글들은 그가 밝힌대로, 전체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지만, 동시에 어떤 불안한 예감 같은 것들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냉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1984>와 같은 소설을 구상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그는 우리의 세계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분명히 1984년에는 그와 같은 전체주의의 세계가 거대한 권력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글로서, 그리고 온 몸으로서 끊임없는 투쟁은 나에게는 어떤 두 가지의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 하나는 일종의 연민이다. 이미 끝을 아는 사람들, 혹은 전체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깃든 자기방어. 그리고 현실주의자들이 가지게 되는 냉소들과 그것이 자아내는 일종의 자기 혐오들이 일으키는 연민 말이다(물론 이것은 조지 오웰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귀함이다. 패배가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병약한 몸의 뼛가루를 재료 삼아 글을 쓰며, 계속 맞설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고귀함 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현실의 통찰을 통해 인간이 결코 선한 동기로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선함을 믿으려고 애썼다.

오웰의 예상과는 달리 1984년에 우리는 조금은 다른 세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은 다른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1984년도 세계의 상당수는 전체주의의 세계였으며, 전체주의의 세계는 아직도 여기저기 곳곳에 그 기운이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오웰만큼의 통찰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거의 확실해보이는 것은 이 전체주의의 기운은 영원히 어딘가에는 남아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나간 역사를 바꾸려 들 것이고, 단어의 의미를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오웰들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오웰들에게 깊은 연민을. 그리고 고귀함을.   

   
 

스코티 말고는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압수당해 혼자만 담배 없이 있는 그를 보기가 너무 딱해서 나는 담배 말아 피울 재료를 그에게 좀 주었다. 우리는 부랑자 감독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학생들처럼 숨겨가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묵인해주되 공식적으론 금지였던 것이다. (중략)
그 때 뒤에서 서둘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누가 내 팔을 두드렸다. 키 작은 스코티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우릴 쫓아온 것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깡통 갑 하나를 꺼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 진 걸 갚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자 이거,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담배를 좀 빚졌잖아. 어제 나한테 선심을 썼지.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감독이 내 담배꽁초 갑을 돌려주더라구. 친절은 베풀면 돌아온다니까. 자 여깄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에 눅눅하고, 다 썩어빠지고, 구질구질한 담배꽁초 4개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스파이크' 中, p. 1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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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13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다 쓰고 나니 조지 오웰이 가장 쓰지 말라는 식의 글이 되어 버렸음..허허허;
 
부당거래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쩔 수 없는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제목에서 말하는 '부당거래'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어떤 거래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문제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커넥션'들은 불법과 범죄와 폭력과 비리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아울러야만 그 거대한 부당거래의 끄트머리라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차가운 관객이 되어 이들을 들여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부당거래를 하는 자들은,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건설회사 사장의 손에서 검사의 손에서 넘어간 시계가, 다시 기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의 역방향으로 검사는 사장을 위해 적당히 누군가를 '손봐주고', 기자는 검사를 위해 기사를 써준다. 그들은 그저 어떤 것을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를 한다. 단,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그로 인해 쓰러지게 되는 스크린에서 밀려나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크린 외곽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에서 밀려난 자들(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위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이것은 부당거래가 된다.

아니, 여기서 다시 복잡한 스토리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보다는 그저 다른 얘기 몇 가지를 하고 싶다. 먼저 이 영화의 뚜렷한 장점들. 스토리를 죽 써내려가는 것으로 200자 원고지를 몇 장이나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꽤나 복잡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복잡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묘한 마법을 부린다. 그 마법은 몇 가지로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한 가지는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스토리를 캐릭터들의 관계 중심으로 구축함으로써 스토리를 최대한 캐릭터에 밀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각 캐릭터를 정지 화면으로 잡고, 간단한 캐릭터 설명을 자막으로 붙이는 것은 이 영화를 캐릭터 중심으로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부연설명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그 캐릭터들의 특징을 잡는 것이나, 각 캐릭터들의 관계를 한 가지의 아주 인상적인 숏이나, 대사로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팜플렛에 나온 다음의 대사들. 주양 검사(류승범)의 "한번 까드려야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아시겄어?!!" 나, 장석구(유해진)의 "절대 나 혼자 못 죽는거 알죠?"같은 것들을 보면, 그 캐릭터의 어떤 특징이나, 관계 같은 것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즉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도나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다. 이건 절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영화는 초반에 상당한 리듬감도 덤으로 얻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여러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초반에 만들어놓은 캐릭터들의 힘이고, 처음에 구축한 리듬의 덕이다. 즉 이 영화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들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힘을 부여하지만, 그것이 너절하게 이어져있다거나, 혹은 뭔가 불안하게 엮어져 있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상당히 '웰메이드'하다는 느낌을 준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껏 어떤 불균질하게 넘쳐나는 에너지로 승부하는 것들이었지, 이 영화처럼 매끄러움으로 승부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예를 들어 최동훈 감독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매끄러운 세공술사 같은 느낌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 감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시나리오를 쓴 박훈정 작가의 공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내에는 관객이 어느 캐릭터도 좋아할 수 없도록, 혹은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몇몇 캐릭터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은 관객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끼워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객이 온전하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 에필로그와 같은 영화의 마지막 씬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류승완 감독이 <무비위크>와 한 인터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이 대호 형사(마동석)가 죽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분명히 관객들에게는 덜 환영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와 같은 캐릭터들의 집합이라면, 마지막의 친절하게 정리하는 장면들은 대중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마지막의 몇몇 씬들은 대중적인 결점에 발라주는 일종의 호랑이 연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은 과잉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금은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도 관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류승완 감독이 전작들에 보여줬던 어떤 여러 단점 중의 하나는 작위적인 구성이 자꾸 엿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란 (어느 정도는) 작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작위성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기어나와보려고 버둥대는 것이 영화의 숙명이고, 이것을 어떤 핍진성이라고 부른다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핍진성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하는 자들에게 에라 엿먹어라 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인 것이 한편으로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아니었겠는가.) 이번에는 그러한 것들이 최대한 자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질문들. 살인범 이동석의 아내는 왜 그런 캐릭터로 설정되었는가(물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 최철기(황정민)는 왜 그런 이동석을 '찜'하는가), 대호 형사의 장례식 장에서 다운 증후군 아이는 왜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가, 황정민이 마지막에 울부짖는 씬에서 굳이 그런 음악을 깔아야만 했을까....등등. 이 첨가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아무튼 이것은 <PD수첩>도 아니고, <시사매거진 2580>도 아니고, <뉴스 후>도 아니다. 그저 잘짜인 대중영화이다. 아니, 그저 이 모든 내용이 단지 영화에 불과하다는 닭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대중영화에는 대중영화에 맞는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잉이 가져다주는 효과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럴까. 그러한 과잉은 다른 어떤 것을 약간은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어떤 묘한 패배의식이나 냉소주의 같은 것들과 연관된 부분이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결말은 사실 친절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냉소적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깃털들만 다 부러지고, 몸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말에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나의 대답은 그저 위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PD수첩>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우리 모두는 공범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몇몇 선택들이 있다. 처음 장면의 지하철 역과 쏟아지는 뉴스와 신문들의 조합. 살인범 이동석을 다시 비틀어버리기. 주양 검사와 장인과의 마지막 대화 같은 것들.  

꼭 이것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나는 류승완 감독의 능력이 여전히 의심스럽다. 사실 박훈정 작가라는 시나리오 블루칩에(이 매끄러움은 분명히 류승완의 공이라기 보다는 박훈정의 공이다), 주연배우들로 한 연기하기로 소문난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의 쓰리 콤보 조합에, 요즘 충무로에 연기 좀 한다 싶은 명품 조연들은 거의 모아놓은(한국영화들을 좀 보아온 분들이라면 얼굴들 찾기가 재미가 쏠쏠할 거다. 심지어 안길강은 대사 한 마디 없다) 이 영화이고 보면, 거의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오랜만에 평론가도 관객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이 영화가 구리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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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작년 이랑 2년전에 비해 좋은 영화(?)가 상대적으로 조금 모자라지 않았나

싶어요. 방화에만 한정지어서 말이죠~

어쩌면 올해의 한국영화로 꼽아도 무리는 없을것 같아요. 아직 황해를 안봐서 장담은 ㅎ

맥거핀 2010-12-15 14:31   좋아요 0 | URL
<황해>가 올해 안에 개봉된다해도, 관례상(?) <황해>는 2011년도 후보작으로 올려야할 듯..^^;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연기의 앙상블이 이보다 더 맞아떨어지는 영화는 찾기 힘들죠.

다이조부 2010-12-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서 다시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더군요~ 이 영화에 관하여

반론성격의 글 그러니까 금태섭변호사 가 전직검사 출신인데, 영화의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제기를 한 글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더군요.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아..그런 글이 있었나요. 재미있겠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뭐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 영화의 가치가 그로 인해 훼손되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며칠 동안 예비군 훈련을 갔다왔다. 언뜻 보면 예비군 훈련이란 건 책과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예비군 훈련만큼 책이 어울리는 시간 및 장소도 없다. 앞에서 열심히 강의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말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실외 학과를 제외한) 강의들이 거의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데다가, 훈련의 특성상 여러 자투리 시간이 많이 생긴다. 그리고 폰도 강의 중에는 허용되지 않고, 음악을 대놓고 듣기에는 너무 눈치 보이고, 다른 전자기기의 반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책은 가능하며, 그래서 책은 (어떠한 내용이든) 여전히 그곳에서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간 중 손에 책 한 권 씩을 들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알라딘 서평단으로 받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였다. 자투리 시간 중 읽기 좋도록 글들이 짤막하게 나뉘어져 있는 데다가, 상당수가 전쟁 기간에 쓰여졌으며, 전체주의에 끊임없이 항거하는 조지 오웰의 이 에세이들은 예비군 훈련과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뭐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는 이것으로 대신.

그리고 이달의 추천하는 (사실은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들. 다시 보관리스트에서 건져본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 다우어 드라이스마 / 에코리브르

인지심리학 시간에 들은 몇 개의 이야기들은 나를 실망하게 했다. 우리가 가진 기억의 신비로운 부분,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반복하는 망각의 그 아련함이 그저 뇌 속의 정신 작용의 일부분이라니. 그것이 그저 우리의 뇌의 몇 개의 뉴런들과 호르몬들과의 복잡한 신경 작용이 불러 일으키는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었다니. 우리의 놀라운 반응과 기억의 메커니즘이란 실상은 많은 혼란과 오인의 산물로서 구성된 것이라니. 그러나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나이들수록 시간은 왜 빨리 흐르는가>는 일상과 밀착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단순한 어떤 물리적인 작용만이 아님을, 그것에는 아직 많은 신비로움이 남아 있음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그런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신작.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 폴 슈메이커 / 후마니타스

세상의 여느 곳이나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우리나라만큼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 있을까. '100분 토론'을 즐겨보곤 하는데, 가끔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의외로 상당히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의외로 매우 보수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방송의 영향인지, 일종의 미봉책인지, 아니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보수와 진보의 개념들이 잘못된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하기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이 나라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것의 의미는 그저 상대방과 나와 구별짓고, 상대방에게 낙인을 찍으려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그리 놀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기본적인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될까. 



당신이 모르는 줄도 모르는 100가지 수학 이야기 / 존 배로 / 이미지박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수학은 밀착되어 있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들이 나중에 사회나가면 다 써먹을 때가 있다고 할 때 속으로는 비웃었지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수학이란 게 이렇게나 많은 부분과 사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종종 깨닫고 한다. (예를 들어 예비군 짐 쌀 때도 말이다!) 그리고 수학에 연관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의외로 수학의 세계는 재미있는 부분이 너무 많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점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이 책도 한 재미 할 듯. 



위스트르앙 부두 / 플로랑스 오브나스 / 현실문화

이 책에는 '우리 시대 '투명인간'에 대한 180일간의 르포르타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실업자에서 시급 8유로의 청소부가 되기까지의 몇 개월의 경험을 적은 르포. 얼마전에 <한겨레21>에서 몇 개월의 노숙 체험을 바탕으로 노숙인의 생활실태를 분석한 논문을 발췌해 놓은 것을 읽었다. 그것을 읽고 조금 충격이랄까, 놀라움이랄까, 혹은 찜찜함이랄까 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애써 내가 외면하려고 했던 마음 한 구석의 불길함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투명해졌고, 또 동시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투명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창백한 얼굴을 늘 거울에 비춰보며,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선제공격 / 앨런 M. 더쇼비츠 / 바이북스

약간은 위험해 보이는 책이다. '국가 간의 전쟁에서 선제공격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먼저 이같은 일들이 실제로 매번 반복되고 있음을, 따라서 그것에 대한 어떤 고찰과 국제법적인 논의가 필요함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의 (어떤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에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지금은 지나간 논의가 되었지만, 한국전쟁을 둘러싼 선제공격 논란도 있었다.) 원혜욱 교수의 반론도 같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꽤 흥미로운,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볼 만한 논쟁거리들이 들어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 이상 어렵게 5권을 골랐다. 움베르트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도 넣고 싶었으나, 왠지 마음에 걸려서.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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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05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써놓고 다른 분들 리스트를 보니 겹치는 게 거의 없넹..;;

cyrus 2010-11-0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슈메이커, 존 배로,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책이 끌리네요.
특히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책 내용이 조지 오웰의 르포와도 흡사하고요.
그리고 지금 신간도서 후보 중 대세가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군요^^;;
이 좋은 책을 19분의 신간평가단원분이 읽으면 참 좋을텐데,,
가격이 세다보니 출판사가 선뜻 알라딘 신간도서로 제공해줄지 모르겠네요.

맥거핀 2010-11-05 22:52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위에 올린 책 중에 폴 슈메이커의 책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거든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선정해 봤어요. 사실 800쪽이 넘어가는 책이라 선정되어도 문제지만..^^; <궁극의 리스트>는 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소장 욕구에 더 가깝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