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조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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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의 신작 <시라노;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를 보았다. 김현석 감독은 야구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만든 감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늘 야구는 일종의 가림막에 불과했고,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의 어떤 사랑이야기, 혹은 일종의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 입은 남자들의 성장기'라고 부르고 싶다(물론 거의 모든 로맨틱코미디는 성장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김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더 강조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YMCA 야구단>의 선비 호창(송강호)은 유일한 꿈이었던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삶의 목표를 잃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러던 그가, 야구를 만나고 신여성 민정림(김혜수)을 만나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YMCA 야구단>의 중심축이다. 비교적 최근 영화 <스카우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혹은 '인간에 대해 예의를 지켰던'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 스카우터 호창(임창정)이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그저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거의 무의식 속에서 잊어버렸던, 혹은 애써 잊고자 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호창이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이며,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는 없었지만, 호창은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대신 얻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이 영화 <시라노>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상처입은 남자의 역할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대표 병훈(엄태웅)이 맡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상처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프랑스 희곡 <시라노>의 '시라노'는 추한 남자라는 것이 가장 큰 상처였지만, 이 영화의 병훈은 그보다는 어떤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 마음의 문제 때문에 오래전 여자 희중(이민정)을 놓쳐 버렸다. 그런 그에게 남자 상용(최다니엘)이 그 여자 희중과의 연애를 이루게 해달라고 찾아온다. 병훈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그 여자 희중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영화는 짐짓 묻는 척을 한다. 글쎄. 김현석 감독의 전작 <스카우트>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도 호창은 선동렬을 스카우트하지 못하는 대신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얻었다. 아무튼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라노>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진심을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진심이라는 녀석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이다. 그것을 극의 후반 상용의 말들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 아니라고, 사랑하니까 믿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이들이 하고 있는 '시라노 에이전시'의 활동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영화의 제목은 <시라노;연애조작단>이지만, 이들의 연애조작 사업은 사실 번번이 실패한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연애조작은 결국 실패가 되어 그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그리고 그 덕분에 어떤 이름모를 커플의 연애조작 역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상용은 그들의 연애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박작가(박철민)가 그토록 싫어하던 애드립을 현란하게 구사한 덕분에 연애에 성공한다. 즉 이 영화에 의하면, 이들의 연애조작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 진심이라는 녀석은 그런 방식으로는 조금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병훈의 축이다. 젊은 병훈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고, 자신의 진심을 대면하는 법도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나이든 병훈은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마음이라는 녀석을, 혹은 진심이라는 녀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러나 때로 그 마음은, 그 진심은 아마 무척이나 두루뭉술할 것이며,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기도 할 것이다. 하나, 그것을 다른 형태로 애써 바꾸려 들지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것. 그리고 계속 들여다 볼 것.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도, 극 중의 병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지막 연애조작이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영화는 결국 병훈에게 이루어지는, 혹은 그것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루어지는 거대한 연애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른 연애조작들과는 달리, 이 연애조작은 성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야기의 곁가지가 조금은 많아 보이기도 하고, 그 덕분에 러닝타임이 필요이상으로 긴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감독이 몇몇 장면들은 마지막까지 잘라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기도 하다. 송새벽, 권해효, 박철민 등의 명품조연들이 벌이는 장면들은 거의 모두 잘라내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특히 권해효의 '후자'씬은 흐름상 거의 필요없는 장면이지만, 살려낼만 하다), 조금은 산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하고 있으며, 매끄럽고 무리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것이 감독의 능력이었다. 오버하지 않으면서, 생뚱맞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흐름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감독의 내공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김현석 감독은 꾸준히 안타를 생산해내는 타자다. 단, 장타력이 떨어지고, 개중에는 빚맞은 안타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2루타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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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9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15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도 올해의 한국영화 후보로 손색이 없지요 ㅋ

최다니엘 보러 갔다가 박신혜한테 푹 빠졌어요 ㅎ

맥거핀 2010-12-15 14:27   좋아요 0 | URL
저도 올해의 한국영화 후보로 올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현석 감독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이조부 2010-12-1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라노도 좋지만, 스카우트도 곱씹을만한 매력이 있어요

맥거핀 2010-12-16 12:55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스카우트>도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탈주 - Break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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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뚜렷한 몇 가지의 단점들이 있다. 이야기의 리듬이 일정치 않은 것도 그렇고, 주인공들이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 영화 중간에 갑자기 서정적인 장면들이 빈번하고, 약간은 느닷없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도, 좋게 보면 이송희일 감독 특유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보면 조금은 잉여의 장면들로 보인다. 인물들을 뒤에서 잡는 빈번한 시점숏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장점들도 있지만, 조금은 촌스러운 구석도 있다. 글쎄.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몇 개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건드린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어떤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정말 어떤 영화들은 아주 촌스러운 화면들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의 흐름에서도 뚜렷한 단점들이 엿보이지만, 기어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군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글쎄. 내가 군대에 대해 감사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쁜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어떤 개인적인 인성의 문제 때문일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조직의 어떤 문제일까. 글쎄.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가끔 군대를 둘러싼 어이없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광경을 본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 주장들을 펼치는 상당수의 남자들을 비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싹튼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철저하게 타의에 의해 군대라는 아주 어이없는, 비정상적인 조직을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들의 정신이 군대에 의해 망가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군대라는 것은 우리 한국 사회에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강제로 행해지는 아주 비이성적인, 잔인한 경험들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군대를 어떤 편법을 이용하여 가지 않는 연예인들에게 쏟아지는 지나치다 싶은 잔인한 비난들조차 때로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 이면에는 권력이나 금력의 문제, 이 사회의 계층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만만하고 간편하게 비난을 할 수 있는 계층이 연예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탈영을 감행한 세 청년도 그러하다. 이병 동민과 일병 재훈(이영훈), 그리고 상병 민재(진이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일면에도 아마 그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동민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재훈과 민재는 모두 가난한 청년들이다. 재훈은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다가 군대에 왔고, 민재는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겠다는 일념으로 힘겹게 기름밥을 먹다가 군대에 왔다. 그들의 탈영에는 각자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지만, 그들이 탈영한 이후 보여주는 분노들은 그 사연만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일면에는 그러한 가난한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송희일 감독은 이 문제를 조금 더 확장해 보고 싶은 것 같다. 다시 한 번 제목을 생각해보자. '탈영'이 아닌 '탈주', 그리고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박혀 있다.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아'. 그들이 말하는 여기란 단지 군대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동민은 탈영하여 산 속을 맴돌면서 어차피 여기를 나가도 자신에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집에 계시는 아버지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가정에 있는 아버지와 군대라는 곳에 있는 다른 아버지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최대한의 땅끝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너른 바다를 만나고, 힘없이 되뇌인다. 한국이 좁긴 좁네.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한민국은 거대한 병영 사회에 불과하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지옥이 되는 작은 병영 사회. 어디로 나갈 수 없이 3면이 바다로 막혀진, 숨막히고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 거대한 감옥. 가난한 젊음들에게 출구란 있을까.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 세 청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을 돕는 소영(소유진)의 도움 없이는 아주 좁은 공간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돕는 소영 역시 비정규직인 가난한 또다른 청년에 불과할 뿐이다. 그 연대는 아주 작은 것으로도 쉽게 깨질 수 있는 아주 불안한 연대이다. 소영의 또다른 (비정규직) 친구가 도움을 거절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군대와 경찰은 그들에게 소리친다. 영창 좀 갔다오면 끝날 일을 크게 만들지마,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마지막 기회를 줄께. 그러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없는 것은 소리치는 군대도, 그 소리를 듣는 그들도, 관객들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던 처음부터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강력하다는 것. 그들이 죽어도 며칠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강력함은 어쩌면 그들 목에서 빛나는 군번줄이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작 부분에 조금 이상했던 것은 그들이 도망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면서도 그 군번줄을 계속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그만큼 이 국가에 길들여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곳에 어떤 희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재훈은 도망치다 어느 한 순간 군번줄을 던져 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이 재훈이 이곳에 대한 희망을 버린 순간일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잔혹하다.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잔혹한 결말이 상징한다. 최근에 이보다 더한 잔혹한 결말을 본 적이 없다. (잔혹하게 피를 뿌려대는 것이 잔혹한 것만은 아니다!) 이송희일 감독은 아마도 작심하고 이러한 결말을 만든 것 같다. 감독은 그만큼 이 사회에 대해 뿌리깊은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아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잔혹한 결말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텅빈 극장 안에서 엔딩크레딧을 지키며 앉아있을 수 있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다. 어디로도 탈주할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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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날, 지나치게 서늘한 극장에서 두 편의 더 서늘해지는 영화를 보았다. 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CINDI FILM FESTIVAL)에서 본 두 편의 한국 독립영화. 박수민 감독의 <간증>과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이 두 편의 영화는 몇 개의 우연이 겹쳐서 선택되었지만, 왠지 이 두 개의 영화는 조금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들이 반영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단락들이다. 2009년에 만들어진 <애니멀 타운>과 2010년에 만들어진 <간증>. 글쎄. 아마도 이 영화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이 영화들이 최근의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일군의 무리들이 만들어낸 실용적이고 날카로운, 그래서 잔혹한 세계, 그 이면의 바탕에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또다른 단면들을 펼쳐보인 것으로 말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다. 그 다른 한가지는 이 영화들은 우리 인간 사회의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왠지 그 인간 사회를 자꾸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민 감독의 영화 <간증>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조금씩 그 이상(以上)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으로서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하거나, 인간 이상의 어떠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전규환 감독의 영화 <애니멀 타운>은 그 제목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전규환 감독이 보는 우리 사회는 인간 이하의 '애니멀 타운'이다. 즉, 이 두편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평행한 시선으로서 보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혹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방법은 인간을 보는 방법에서는 유효할까. 



먼저 박수민 감독의 <간증>. 이 영화는 몇 개의 것들이 내용상으로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충돌. 참회하며 계속 고문하는 자와 참회하지 않으면서도 고문을 멈춘 자의 충돌. 과거의 고문 경찰 박덕준은 예전의 기억에 괴로워하지만, 여전히 청부 고문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상관 임광한은 교회의 장로가 되어 간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가져다 주는 어떤 기이한 역설. 그리고 두 번째 충돌. 믿음이 부족한 자와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의 충돌. 너무 지나친 믿음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믿음이 부족한 자는 그 살인자를 고문하며,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밝히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충돌.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진 어떤 두 개의 상이한 시각 끼리의 충돌이다. 즉 '믿어야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봐야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사이의 충돌. 우리는 그 두 개의 질문 중 어느 것에 손을 들고 답할 것인가. (물론 손을 들지 않고, 답도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인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Confession'이다. confession? '고백' 또는 '자백'.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고해성사'. 이 영어 단어가 '간증'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지 궁금해서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간증은 'testimony'이다. 감독의 이 혼용은 아마도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confession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나는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리고 고문하는 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 그러나 이 고백들은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간증' 역시 진실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고해'와 '간증'의 진실함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그것을 가려낼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가려내려고 애쓰는 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여전히 일단 가려내는 그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 고문이건, 혹은 종교적인 형태이건,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건 말이다. 그들에게는 그 고백이, 혹은 간증이 그것을 행한 그 인간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간증 그 자체, 고백을 행하였다는 그 자체만이 고백을 끌어내려는 자에게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영화 그 자체만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 <간증>은 몇 가지 단점도 엿보인다. 박덕준의 상관 임광한은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지나친 도식화로 캐릭터는 조금 빛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저 국가라는 절대자를 신이라는 절대자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거기에는 조금 더 다른 함의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임광한과 박덕준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분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두 개의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붙인듯한 느낌도 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도식화와 상징은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힘을 떨어뜨리고 있다. 감독은 도리어 명확한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대치하고 만다. 이 영화는 묵직한 주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형상화를 해내야 하는지 명확한 중심이 서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다음은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마지막에 이 영화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촬영되었다는 엔딩 크레딧의 내용을 보며, 살짝 웃음이 나왔다(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서울의 몇몇 랜드마크들이 약간은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글쎄. 내가 철저하게 공무원 정신에 입각한 공무원의 입장이라면 이 영화에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곳 서울이 그저 하나의 '애니멀 타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영화이니까 말이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 결국 그저 '동물들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그 자조감.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는 동물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르겠다. 그 한가지 단적인 예로, 동물 중에 소아성애적인 성향을 가진 동물이 있던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에는 유독 인물들의 육체가 자주 전시된다. 아니 육체라고 말하기 보다는 거대한 고기덩어리에 가깝다. 그 고기덩어리는 땀을 흘리고, 밥을 먹고, 다른 고기 덩어리를 때리고, 교미한다. 그 육체를 불편할 정도로 스크린에 들이대는 것, 그것은 분명히 감독의 의도된 연출일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아성애자의 육체가 유독 자주 전시되는 것은 어쩌면 감독의 영화적인 복수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범죄자를 보는 어떤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 범죄자는 영화 내내 상당히 측은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너무나도 불쌍해 보여, 그가 옆에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도와주고 싶을 정도이다. 그는 그저 우리 사회에서 가깝게 볼 수 있는 불쌍한 보통 사람이며, 이 절박한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가련한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와 보통 사람을 가르는 구분은 오로지 그의 발에 감겨진 전자 발찌밖에 없다. 그 전자 발찌를 제외하고는 그저 그는 우리의 측은한 보통 이웃처럼 보인다. 이것은 최근 우리나라의 어떤 상업영화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최근 <악마를 보았다>를 필두로 몇몇 영화들은 범죄자들을 거의 악마 혹은 괴물과 같이 그리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그저 악마 그 자체로만 보인다. 즉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니, 나는 이 영화 <애니멀 타운>이 다른 영화와 달리 범죄자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나는 그 가련해보이는 인간이 더 무섭다. 괴물은 그 다름이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에 잡아내면 되지만, 그 '인간'들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그가 소녀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곳에 갔는지, 진짜 오줌이 마려워 그 곳에 갔는지 알 수 없다. 뛰어 다니는 멧돼지는 피하면 되지만, 안 뛰어 다니는 인간들은 진짜 피할 수 없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우리 자신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몇몇 아이들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여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곳은 '애니멀 타운'일까. 하지만, 적어도 '애니멀'들은 무리를 보호하는 데에는 필사적이다.

이 영화에는 뚜렷한 리듬감이 존재한다. 감독은 영화의 중반까지 관객들을 몰아붙인다. 영화 속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자리에 앉아있기가 심하게 불편할 정도다. 그러다가 일순간 휘몰아치며, 관객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든다. 글쎄. 이를 좋은 리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상업 영화라는 관점에서는 이를 조금 조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관객들도 숨을 쉴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 스트레이트함을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리듬, 그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다른 생각들이 필요할 것 같다.



덧. <간증>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돌아온 여배우 '이화시'씨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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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 South B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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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으로 말랑말랑해진 우에하라 이치로, 그래도 남쪽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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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지난 763호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에서는 평론가들끼리의 대화를 담고 있다. 한국의 영화 비평의 최일선에 서 있고, 또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평론가들과의 대화. 거기에 정성일 평론가의 말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한국 영화비평에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가 그런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을 느낀다. 먼저 비평이라는 것. 즉 단순한 리뷰나 외부를 돌면서 말하는 것과 비평과의 어떤 차이. 비평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할 수 있겠지만, 눈에 가까이 띄는 것부터 가져와 보자. 진중권은 <서양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비평'이 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언급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다고 저절로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p.273)"

이를 영화라는 것으로 그대로 가져와 생각해 본다면, 영화비평의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어떤지, 즉 예술적으로 보았을 때 왜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지, 혹은 뒤떨어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다른 보통의 리뷰나 영화 외곽을 둘러싼 글들과 갈라지는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영화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를 밝힐 필요는 없다. 즉 영화 리뷰는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것에는 그저 나는 <인셉션>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다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인셉션>이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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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인셉션>은 흥미를 주는 요소들이 있으나,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못한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듀나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셉션은 여러 많은 규칙들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들을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영화다. 즉 일부의 영화들은 어떤 규칙을 애써 세워놓고는, 그 규칙들을 나중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즉 과잉이 되거나, 혹은 함량 미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의 규칙들을 구축하고는, 그 규칙들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놀란 감독은 그 규칙들 모두를 친절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몇 개의 규칙들은 영화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가며, 또 몇 개의 규칙들은 쉽게 제시되지 않고,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슬그머니 제시되며, 또한 일부만 보여지기도 한다. 마치 이는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도 역시 어떤 정확한 규칙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예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규칙은 너무나도 쉽게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트릭을 건다. 즉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트릭. 그 트릭은 성공했고, <메멘토>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인셉션>에도 그런 몇 개의 트릭들이 존재하며, 그 트릭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 외부에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세계가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 혹은 규칙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행해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많은 '완벽 분석'의 시도들이 그 영화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축된 세계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마도 영원히 '완벽 분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트릭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나는 관객들이 트릭에 속아넘어가서 멍청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트릭의 승자는 언제까지나 설계자인 놀란 감독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런 세계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만들어진 세계를, 몇 가지 불충분한 정보만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해 나가야 하는 것 말이다. 그보다는 다른 세계가 더욱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세계.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뭉툭한 원형질의 세계.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아름다움과 비참함과 안타까움과 괴기스러움과 기묘한 열락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 사이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해야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친 후 남는 것은 그저 어떤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잘 짜인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스며들 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그저 영화 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과 감정을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놓는 영화들이 좋다. 물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의문들이 더욱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인셉션'은 가능한가. 영화 속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인셉션'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코끼리를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대답되지 않았다. 그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충분한 반박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글쎄. 나도 아서와 같은 의문이 든다.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리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다음의 행동으로 연결되는가.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냉면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음날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할까. 즉 꿈은 그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래서 사실 영화 <인셉션>의 가장 허술해(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그 인셉션의 내용이다. 즉 너무나도 직접적인 인셉션.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 속에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못 먹게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를 가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역설이 반영되지 않은 그 인셉션. 이것은 아마도 최면이나 암시의 메커니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솔직히 최면이나 암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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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간에 이 이야기는 (내게는)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 철학, 문학, 인류학, 신화, 뇌과학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까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의 몇몇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조금씩 착란상태에 빠져들어갈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해석에 조금씩 도취되는 일종의 정신착란. 그리고 정신착란의 제1의 요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이 느껴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일그러진 세계. 그리고 영화 리뷰에 있어서도 일종의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별점과 몇몇 담론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독한 찬반의 세계.

물론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착란상태는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평론가는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찬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는 아마도 그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그것을 해석하려고만 드는 일종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경향이다. 영화 외부를 둘러싼 담론들을 자꾸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해석하려는 태도. 많은 담론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찔러 죽이는 일종의 칼이 되는 그런 경향들. 어떤 영화들이건 간에 어떤 담론에 완전히 들어맞는 영화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도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영화들이건 담론에 넓고 느슨하게 걸쳐져 있고, 조금씩 그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담론을 너무 광범위하고 무리하게 어떤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에 그 영화는 조금씩 평론가의 머리 속에서 정신착란의 길로 나아간다. 

즉 담론은 영화를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 내부적인 것들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글쎄.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들은 몇몇 장점이 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쉬운 글쓰기다. 그는 한 영화를 놓고 차분하게 앞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지점으로 푹 찌르고 들어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이 책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리고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펼쳐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현학적인 문장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쉬운 말들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틈에 관객들은 조금은 색다른 지점에 도착해 있다. 그 색다른 지점에 그대로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의 몫이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한다. 즉 어떤 외부의 담론이나 방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제기된 질문을 영화 내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영화의 정합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몇몇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그의 어떤 의문들을 통해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만이 보이는 그 영화에 대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영화에 어떤 의문을 제기한다. 즉 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담론들을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그와 함께 같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아주 주의깊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은 영화와 분리되어서도 그 나름의 어떤 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적당한 착란도를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의 글은 아마도 그와는 약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의 좋은 글들은 영화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시 그 영화를 보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론가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 중의 하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게 만들고, 보았다면, 다시 보게 만든다. 평론가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그것을 이 책에 실린 수십개의 한국영화, 그리고 외국영화 평론들이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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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리뷰를 쓰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뭔가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들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리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틈이 없다. 난데없이 정성일 평론가의 두 권의 비평집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난데없이 받은 적립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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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1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