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ewfind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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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이 영화는 제목 <경>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치의 경景, 경계의 경境, 거울의 경鏡,... 그리고 세상이란 창을 통해, 타인이란 거울을 통해, 마침내 자신을 찾게 되는 우리, 주인공의 이름이다'라고. 영화 <경>의 영문 제목인 'Viewfinder'는 카메라를 통해서 피사체를 내다보는 작은 창을 말한다. 용어 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상 이 Viewfinder라는 말은 위의 세 가지 한자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카메라의 작은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경치, 그러나 한편으로 그 경치는 한정되고 가공된, 즉 경계를 가진 경치다. 어떤 성능좋은 카메라라도 모든 경치를 다 담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프레임 안의 경치와 프레임 밖의 경치로 나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치에 대한 가공 및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카메라를 든 주체의 의지가 그 한정된 Viewfinder에  반드시 반영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주체의 거울상이다. 즉 이 작은 네모창은 동시에 경치가 되고, 어떤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경은 주인공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집을 나가버린 동생 후경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그 '검색'은 남강휴게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녀는 그 와중에 남자 혹은 인간 검색엔진인 창을 만나기도 하고, 온아라는 휴게소에서 일하는 직원이자, 유명 파워블로거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아니 더 이상의 스토리를 쓰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씨네 21> 리뷰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어느 순간, 그저 죽 따라서 보게된다. 어떤 전체적인 줄거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한장면 한장면 조용하고 차분하게 관조하게 된다. 어떤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나, 작가의 이력, 또는 미술 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작품의 순수한 미美에 빠져들어 보게 되는 순간, 그것이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온다. 영상의 형식으로 된, 디지털 시대의 미술작품을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본다. 그러고보니 이 스크린 역시 어떤 하나의 Viewfinder. 

이야기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다른 의미로 다가갈 것 같다. 어쩌면, 자매를 둔 여성이라면, 조금은 더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경과 후경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 사이버 추도 페이지에서 경이 되뇌는 독백같은 것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중간중간에 놓인 영화들의 상징에 더욱 마음이 갔다. 물론 이 영화에는 수많은 상징들이 있다. 중간중간에 살짝 삽입되는 에니메이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정경, 후경, 창, 온아....그러나 그 중에서도 디지털 시대의 어떤 은유들에 대해서 관심 간다. 단지 그것은 작품 곳곳에서 카메라, 네비게이션, 노트북, 휴대폰, PMP 등 디지털 기기들이 출몰하고, 그들이 그것을 켜고, 동영상을 띄우고, 찍고, 바라보고, 충전하고, 로드하고, 끄고 하는 장면들이 반복되어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전체는 어떤 사이버 세계, 디지털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영화들이 가지는 음울한 디스토피아들은 묘하게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묘하게 제거된 디스토피아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불안을 야기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기이한 장면은 사진기자 김박이 창을 카메라로 찍는 장면일 것이다. 현실에 창은 존재하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서 보면 창은 보이지 않는다. 김박은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이럴 때 무엇을 믿어야 할까. 옛날 사람들은 카메라를 믿는 대신, 자신의 눈을 믿었을 것이고, 카메라를 가리키며 귀신들린 기계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눈보다는 카메라를 믿는다. 예를 들어, TV나 영화에서 활용하는 몇 가지 장면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해 놓는 것, 또는 귀신의 형체가 찍혔다고 하는 몇몇의 사진들. 그러므로 현대적인 디지털 시대의 눈으로 보면, 사진기자 김박은 카메라를 들고 날쌔게 도망가거나,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보여요...' 그러나 사진기자 김박은 약간 갸우뚱거리다가 태연하게 창에게 다가간다. 왜냐하면 그는 검색엔진이니까. 검색엔진은 귀신 따위가 아니니까. 자신의 눈보다 디지털 기기를 더 믿는 거의 디지털화된 인간이 검색엔진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남자 창은 검색엔진일수도, 아닐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군대를 통해서 남자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디지털과 하나가 된, 그저 현재의 젊은 세대들을 상징하는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장면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내뱉는 여러 독백들은 마치 어떤 연관성이 없는, 혹은 논리가 없는 검색결과들을 줄줄이 내뱉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상한 모양의 파형들. 그것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물론 창(window)이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어쩌면 이 남강휴게소는 거대한 어떤 포털사이트와 같은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상주하는 검색엔진 창. 경은 말한다. 이 남강휴게소는 하나의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이라고. 후경이라는 정보를 찾아 고속도로를 끊임없이 내달리는, 아니 검색하는 여자 경도 휴식을 취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을 끊임없이 검색하며 내달리는 많은 디지털 유목민들에게도 휴식을 취할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른바 블로그 혹은 홈페이지 혹은 트위터 같은 것들. 현실 세계에서 인간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평생을 헤메이는 것처럼, 현실의 반영인 사이버 세계에서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를 끊임없이 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수많은 블로그와 홈페이지와 트위터들은 모여서 다시 어떤 거대한 네트워크, 혹은 포털사이트를 구축한다. 영화에는 그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가 또 하나 나온다. 여자 온아(On-我).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은 이름이 알려진 블로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디지털 분신 새아와 끊임없이 소통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일하는 곳은 휴게소 정보센터. 고속도로의 지도들을 가지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정보의 중심이자 검색엔진이 충전을 하는 곳. 사이버 세계는 현실을 반영하고, 동시에 현실은 사이버 세계를 반영한다.
................................

그러나, 검색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검색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이버 세계에서는 동시에 누군가의 존재를 알기(찾아내기) 위해서는 아이디가 필요하다. 아이디를 모르고서는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다. 경은 그녀의 동생 후경을 찾기 위해 아이디를 말한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이버 세계 어디에서도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그녀는 실종된 것일까. 창은 말한다. '실종자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그들을 실종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가버린 것이지 실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들은 단지 가버린 것이지 실종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말은, 왠지 사이버 상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에 사이버 상에서 친절하게 댓글을 달고, 방명록을 남기고,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좋은 사람들은 다 실종된 것일까. 아니 단지 그들은 가버린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뿐이다. 아이디를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혹여 아이디를 안다해도, 그들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수 있다. 경과 후경의 경우를 창이 검색했을 때처럼, 어떤 검색결과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검색 결과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네티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네티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검색 결과도 찾지 못한 경 역시 사이버 추모 페이지에 엄마를 그리며 쓴다. 엄마가 죽은 후, 정말 모르겠다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도 아마도 자신들의 블로그에 이런 말들을 적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어떤 것을 검색하여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유영하는 인간들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 서정적인 디스토피아.

어떤 검색결과도 찾아내지 못하고,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망연하게 서 있는 경의 반대편에 후경이 있다. 그녀는 이제 온아가 있던 그 자리, 즉 남강휴게소의 정보센터 혹은 포털사이트의 정보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정보의 중심에서, 온아와 비슷하게 어디론가로 떠날 꿈을 꾸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나는 마지막에 궁금해질 뿐이다. 지금 후경이 있는 그곳에 있던, 꿈을 찾아 어디론가로 떠나기를 원하던, 온아와 그녀의 아바타 새아는 어디로갔을까. 그녀는 정말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갔을까. 그녀는 갑자기 어디로 실종되어 버린 것일까. 아니,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 시사회의 좋은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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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차가운희망보다뜨거운욕망이고싶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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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짦은 문구이긴 하지만, 책 표지의 소개는 꽤나 강렬하다.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닌다. 사람들은 나를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  
   

그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 우리의 몸,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되는가. (p.7)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책은 보통의 에세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골형성부전증에 걸려, 휠체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저자. 그가 갇혀 있던 조그만 세상에서 벗어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모습. 이 몇 가지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의 가슴아픈, 그러나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생승리의 이야기로구나. 장애인도 저렇게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어. 우리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라는 긍정적이지만, 조금은 지루한 추측.

그러나 저자는 선언한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고. 그리고 저자의 그 도발적인 선언답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저자가 시작하게 된 것은 분명, 자신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가 어떤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지면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할애한다. 그것은 저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떤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토로도 아니고, 어떤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아니며, 그 성취가 '희망의 증거'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는 도리어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책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그것도 아주 불투명한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보통의 장애인들의 인간승리 에세이나 혹은 젊은 친구들이 수능 만점을 받고, 혹은 미국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쓰는 에세이와는 거의 반대의 지점에 와 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내었다는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뜨거운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야한 장애인'이 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적인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장애인을 일단 사회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장애인들은 사회에 의해, 애써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시설을 통해서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호'라고 부르지만, 보호는 결국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을 사회와 분리시켜 가두는 것이다. 즉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장애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서 줄곧 주장하는 것은 장애의 사회적 관점,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자립 생활 운동(Independence Living Movement)'이다. 즉 더 이상 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나 학교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장애인을 위한 보조인력을 두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단순한 예를 들어 장애인이 지하철에 타려고 할 때, 아무리 보조 인력이 있다해도, 여전히 주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장애인에 대한 시혜없이, 이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연대'이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연대라니, 여기서 연대라는 용어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연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서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와 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장애인과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마찬가지로 연대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낮은 사람들과는 연대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하고만 못 하겠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사람과도 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우리와 연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대에는 여전히 어떤 벽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장애인으로서 결코,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자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있는 다른 장애인들(저자는 지적장애가 없는 것, 그리고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비교적 나은' 몸,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행운 등등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가 다른 장애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과 비장애인들과의 사회적 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들(장애인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사회의 물질적 계급과의 어떤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잘 사는 장애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일 수도 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저 그 벽은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자각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위에서도 잠깐 썼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생각이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았다는 점, 즉 그는 여전히 길 앞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일 뿐이라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결국 이 책은 해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 대답이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이 책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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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 곳곳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은 일어나고, 거의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세상 곳곳의 소식들을 전하는 뉴스들은 거의 '폭력의 메신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수많은, 아주 다양한 형태의 폭력들을 전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것을 '폭력의 세기'라 불렀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과 같은 악의 모습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부르며, 인간들의 폭력성은 개개인의 어떤 도덕적인 타락이나,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악으로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이 폭력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무자비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폭력사회>의 저자 볼프강 조프스키(Volfgang Sofsky)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은 왜 폭력을 행하게 되는가? 조프스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질서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가 사람들을 어떤 질서로서 억압할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폭력이 되살아나는 것. 이 폭력은 물론 단순하게 반질서, 혹은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질서 그 자체 역시 폭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질서가 더욱 공고화되면 공고화될수록 응축된 폭력의 강도는 조금씩 세진다.  

   
  폭력은 인류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지배했다. 폭력은 혼돈을 만들고, (혼돈을 어렵사리 극복하고 만들어낸) 질서는 폭력을 만든다. 이런 딜레마는 풀어낼 길이 없다. 질서는 폭력에 대한 불안에 기초하여 스스로 새로운 불안과 폭력을 만든다. (p.13)  
   

그러므로, 폭력의 근원은 단순히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의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다시 한 번 홉스로 돌아가 보자면, 인간이 사회를 구축한 것은 안전에 대한 갈망이었다. 즉 누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종의 규율을 가진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신체상의 안전을 희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사회를 만든 목적이다..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고, 조프스키도 여기에 동의한다. 신체의 고통에 대한 불안,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안전에 대한 희구이고, 그 안전에 대한 희구가 극대화된 것이 질서를 제일의 우선으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질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불안한 연결고리로서 이루어진, 그 안에 폭력적인 요소를 담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가 고통을 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그 어떤 것, 즉 타인에게 먼저 폭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서는 이처럼 내부를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자라난다. 질서는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화에서 보듯 유한한 생명을 가진 신도 자기 이외에는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질서는 타당성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것에, 즉 적이건 친구이건 간에 모든 세상에 적용되어야 한다. 질서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려는 사명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제국주의는 단일 원칙의 보편주의에서 두드러진다. 다르다는 것, 타자는 공격을 유발한다. 타자야말로 상대화, 불확실성, 위험의 지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초토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p. 30)
 
   

 ................................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된 폭력의 여러 양상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들만 나열하여 보아도 분명할 것이다. 질서와 폭력, 무기, 폭력과 격정, 폭력 불안 그리고 고통,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문화와 폭력.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폭력의 양상과 그 작동방식을 이 책은 철저하게 해부하고 있다. 특히 1장 이후부터는 각각의 폭력적인 테마들을 하나하나 밀도 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의 치밀함으로 인해, 때로는 욕지기가 밀려올라올 정도이다. 폭력사회의 여러 양태들, 그리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역겨우면서도, 흥미로운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이란, 목차에서 드러나듯이, 육체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가 정신적인 폭력을 간과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저자는 정신적인 폭력은 결국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다 근원적인 의문으로서,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즉 이 사회에서 폭력의 요소는 이곳저곳에 너무 많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 그런 폭력의 요소들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 그래, 그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물론 모든 책이 어떤 해답을 던져줄 필요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문학은 어떠한 것이라도 말할 수 있고, 굳이 그것에 대한 어떤 전망을 던져주지 않아도 된다.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는 것인가라는 답을 내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왠지 저자는 그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가 알았던 어떠한 것들과 꽤나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력이 문화적인 연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유는 자연적인 충동의 힘 때문이 아니라 인간 특유의 잠재력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혹 행위는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략) 문화적 형식들이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그것을 박살 내려고 한다.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갑자기 인간애나 도덕적 절제가 솟아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p.325-326)
 
   

인간의 폭력이란 그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 인간이 종종 파괴와 살인을 중단하는 것은 인간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 뿐, 문화라는 것 역시 그런 폭력에 일조하는 것일 뿐. 그렇다면, 저자가 지향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의 폭력성을 말끔히 제거해 줄 사회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문화마저 그것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면-.

여기 역자 후기에 몇몇의 힌트가 있다. 조프스키의 전 저서 <안전의 원칙>의 큰 주제는 '자유냐 안전이냐'였다고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3대 구호 중 하나인 자유를 안전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안전에 위협이 된다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이 책 <폭력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인다. 아니 역자의 말마따나 논의의 폭이나 깊이는 <안전의 원칙>을 훨씬 능가한다. 자유에 관한 일정한 유보나 제약에 동의해야 한다...그리고 반문화, 다중(multitudo)에 의해 이루어지는 혁명에 대한 알러지, 폭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더 잘 조직된 폭력 뿐이라는 것...우리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던 몇몇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들도.

ps.

그리고 마지막 뱀다리를 하나 붙여두자면, 이 책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는 역자 역시 심상치 않다. '<폭력사회>를 엄밀하게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프스키는 우리 같은 좌나 우의 이분법으로 파악하기 힘든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이다 (중략) 진영화되고 내용은 고갈되어버린 한국 지식인 사회가 새로운 고민과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 조프스키의 문제 제기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저자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그저 쓴웃음만 날뿐이다. 진영화되고 내용은 고갈되어 버렸다...라. 그 진영화의 백척간두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기자인(더더구나 최장집 교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역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쓰는 집단의 일원인 역자가 '우리 같은 좌나 우의 이분법'이라니...이 무슨 뜬금없는 자기반성아닌 자기반성인지.  

글쎄. 어렵게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그냥 간단하게 말씀해주시길. 이 책을 굳이 번역하신 고매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 책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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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 Bob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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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미리니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치 영화다. 글쎄. 정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노골적인 정치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여러 리뷰들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영화의 제작을 둘러싼 몇 가지 이야기들. 이 영화는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마지막 날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에 출연한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 마틴 쉰, 안소니 홉킨스, 로렌스 피쉬번, 헬렌 헌트, 샤론 스톤, 데미 무어, 크리스찬 슬레이터, 샤이어 라보프, 린제이 로한, 애쉬튼 커처, 헤더 그레이엄, 프레디 로드리게스 등 -역시 대부분 민주당 지지자들로서 거의 개런티를 받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제작되고 개봉한 시기는 2006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참고 견뎌야 했던 시기였던 부시의 시대였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영화 주변의 이야기들을 끌어모으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의 정치색은 거의 명백해진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는 모사되지 않는다는 점. 즉 이 영화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당시의 자료화면과 실제 연설목소리로 대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속 로버트 케네디의 연기가 필요한 시점에서도 연기자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카메라는 교묘하게 그의 얼굴을 피해서 지나간다. 이 이유는 명백하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결국 관객들에게 이 사건이 가짜의 사건이 아님을, 즉 만들어내거나 모사한 어떠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건임을, 그가 행하는 모든 말들이나, 행동이 각색된 것이 아니라, 그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마지막에 이어지는 총격 사건에서 계속 울려퍼지는 그의 육성 연설문. 명 연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이 연설은 영화 속 마지막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마도 상업영화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정치인의 연설을 십여분 이상 직접적으로 들려주며 영화를 끝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 영화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노골적인 정치영화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영화가 영화 자체로서의 어떤 울림을 주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조금은 산만하고도,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영화의 타이틀 롤인 바비, 즉 로버트 케네디가 아니라,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던 그날, 앰배서더 호텔에 있던 여러 인간 군상들이다. 그 인간 군상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돈 드라이스데일의 6경기 연속 완봉 투구를 보러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멕시코인 호텔 직원, 호텔의 지배인으로서 다른 여직원과 불륜 관계에 빠져 있는 남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나이든 여가수, 옛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늙은 호텔 직원, 마약에 빠져 할 일을 제쳐두고 마는 철없는 선거운동본부의 운동원들, 고압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호텔의 또다른 직원,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자, 항상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상류층 여자, 스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여자,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는 흑인 조리장, 베트남에 남자를 가지 않게 하려고 그다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여자, 로버트 케네디의 인터뷰를 어떻게든 따내려고 하는 체코인 여기자....이 모든 인간 군상들은 여러가지 관계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모두 별개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개로서 작동한다는 것은, 이런 얘기다. 즉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조금은 얽혀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말하고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들 각각의 생활은 분명히 서로서로 그다지 직접적이고 큰 관계는 없고, 직업적 관계로 얽혀있는 않는 한 대부분 앞으로 특별히 만날 일이 없이 서로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직접적인 방식. 즉 마지막 총격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총격 세례를 받고 쓰러져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별개처럼 보였던 삶이 사실은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공동의 재난에 같이 빠져 있는 모습으로 이들 삶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많은 재난 영화들이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메시지인 재난에 빠져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성의 회복을 묻고 있는 것과 유사한 방식. 그러나 이 방식은 엄밀히 따져 볼 때 여기에서는 가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그 총격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의, 즉 총격 이후의 그 재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여기에서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총격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여러 다양한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들은 그저 시각화된 상징에 불과한 것. 

그보다 궁극적인 것은 로버트 케네디가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 결국 정치란 우리 삶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의외로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그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케네디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케네디의 연설을 오버랩시킨다. 그러나 하나 아이러니컬한 점은 그 연설의 주된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제 폭력을 중단시키자는 것, 미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적인 폭력, 베트남에서의 폭력,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이제는 중단시키고, 이제 평화의 메시지를 서로서로에게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그 연설에서의 주된 메시지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던 주체는 이제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사라진다.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킹 목사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일어난 또하나의 비슷한 죽음. 이 죽음은 어떤 절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이 절망은 분명히 당 시대의 인간 군상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이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굳이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이들의 일상은 이 이후에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인 듯 하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 삶들이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말하는 불륜이니, 직장동료니 하는 관계로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당대의 시대분위기, 시대흐름이라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정치라는 것에 의해서 결국 얽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라고. 당신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자신이 양쪽에 있어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한 쪽 편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시대흐름을 긍정하는 것, 혹은 조금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구조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까. 만약 그것이 당신 삶의 어떤 부분에서 심각한 불편함을 야기한다면, 그래도 당신은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사족)

1968년 로버트 케네디는 총격을 받았고, 그 해 공화당의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글쎄. 그 때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예를 들어서 그 이후에 이라크전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튼 2006년에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했고, 그 이후에 2009년에 오바마는 처음으로 흑인으로서 미국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2010년 한국에서 이 영화는 개봉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대통령은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MB 정부는 아직도 3년이나 남았다. 글쎄.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되었으면 미국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다른 어떤 것은 몰라도 적어도 던지는 메시지 하나는 천지차이라는 점.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와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메시지.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나라면 후자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당신'을 잘 살게 해주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당연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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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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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는 재미있다. 그것도 무척, 꽤나 재미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애써 <아바타>가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느니, 기대한 것보다 별로였다느니, 너무 볼거리에만 치중했다거니, 등등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인지 수긍이 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그러니까 주인공의 성장, 가슴 아픈 멜로, 대규모의 전투씬, 약간의, 아주 약간의(절대 무거워서는 안되는) 메시지, 멋진 볼거리, 그리고 악당과의 최종의 일대일 결투까지...거의 모든 것이 이 영화에는 담겨져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추운 겨울 절절한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도,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주인공을 보러갔던 관객들도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스러운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는 몇몇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점들이 있다. <주라기 공원>(괴수에게 쫓기는 주인공들), <브레이브 하트>(전투를 이끄는 영웅적인 주인공)나 <반지의 제왕>(대규모의 전투씬), 혹은 감독의 전작 <터미네이터>(더럽게 안죽는 악당)나 <타이타닉>(신분이 다른, 혹은 처해있는 위치가 다른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같은 것들을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장점들만을 가져온, 거의 그 모든 것들을 집대성한 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씨네 21>의 이동진 평론가의 20자평대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조금은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위의 표현대로 이를 어떤 '새 이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새 이정표'에 거의 가까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자꾸 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의 세계라는 점을 잊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간 가상의 창조된 세계를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uncanny valley)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거의 잊어버린다. 즉 관객은 이것이 마치 실제의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인식해버린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부분에까지 영화가 도달해냈다는 점, 그러한 점에서 이를 하나의 어떤 '새 이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어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이 영화가 어떤 새로운 이야기, 혹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어떤 새로움에 방점을 찍은 부분이 있던가. 글쎄.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간 존재해왔던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측면에서 보면, '새 이정표'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새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의 '총 완결편' 혹은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글쎄.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저 여러 이야기들을 '요령껏' 집대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인줄 아느냐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대단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집대성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야기의 전체 궤도 속에서 매끄럽게 연결해내는 것은 확실히 대가의 솜씨이며, 천의무봉의 경지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씨네 21>의 평론가들의 쏟아지는 별점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등의 20자평을 보면서 말이다. 나는 <아바타>가 뭔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지 않았다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이야기적인 안일함, 혹은 그 이야기의 어떤 19세기적인, 20세기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찬사들이 조금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북부 지역에서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종교의 자유를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영국 청교도들- 옮긴이)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해 있었다. 제임스타운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디언의 땅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는 피쿼트족(Pequots)이 살고 있었다. 그 땅을 원한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과 피쿼트족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쪽 모두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영국인들은 예전에 멕시코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전투 방법을 사용했다.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오는 인디언들을 가차없이 칼로 베었다. 

                                        -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살아있는 미국역사, p.28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바타>에서 보아온 그 이야기다. 원주민인 나비 족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하여 원주민들의 신성한 나무를 공격하는 지구인들. 원주민들의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수많은 자원들을 획득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침략자들. 영화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가지다. 역사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원주민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인 인디언은 거의 종족적인 멸종 상태에 이르렀고,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갖혀 살아야하는 운명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야기가 다르다.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가 '토루크 막토'로 거듭나고, 그의 지휘로 원주민은 최종의 승리를 거두고, 지구인들을 몰아낸다. 짝짝짝.

사실 이 이야기가 안이하다 못해, 20세기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 19세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다.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사실은 외부에서 온 침략자의 일원? 사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이상해진다. 살고 있던 보금자리가 무너진 후 나비 족은 거의 대책이 없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그저 모여앉아, 미스테리한 의식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네이티리의 어머니), 용맹스러운 쯔테이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 여기에 '아바타'를 입은 제이크 설리가 나타나, 이들을 구원한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의 상태로 이들에게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지구인들을 배신하고, 이들을 이끌며 지구인들에 대항한다. 즉, 거의 무력한 나비 족을 구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온, 사실은 이들의 적인 제이크 설리라는 이 아이러니.

실제로,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키트 카슨. ‘노래하는 풀’이라는 인디언 처녀에게 반해 그들의 언어도 배우고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낳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디언들과 친하고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영화 속 제이크처럼 지형을 꿰뚫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부 정복의 주역이었던 프리몬트 원정대의 안내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을 초토화하는 작전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씨네 21> 부분 발췌) 그러나 영화의 제이크 설리는, 이 키트 카슨의 전혀 반대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 개척 시대의 자신들의 역사에 제이크 설리라는 당의정을 입힌, 혹은 면죄부를 주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아메리카에서만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다. 원주민들과 가깝게, 혹은 거의 원주민들의 편이라고 여겨졌던 대부분의 백인들은 사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였고, 그들의 제국주의 식민 정책에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결국 위대한 추장도, 신비의 성녀도, 용맹한 여전사 네이티리도 아니다. '하늘에서 온'(물론 표면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대리자를 일컫는다. 원주민들이 지구인들을 이렇게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제이크 설리는 토루크를 타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사실 이 부분도 조금은 이상하다. 왠지 이 장면에서의 제이크는 원주민들을 상당히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게 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추장을 뛰어넘는 이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유유히 거의 쯔테이의 여자인 것처럼 보였던 네이티리를 차지하고, 이들을 이끈다. 이게 무슨 20세기적인, 아니 19세기적인 선민의식이고, 교화의식이란 말인가. 도대체 원주민들의 주체성이란, 그들의 위대한 힘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아바타'라는 것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는 나비족이지만, 정신은, 아니 영혼은 지구인의 것. 즉 원주민들의 육체란 처음부터 지구인에게 종속적인 것. 원주민들에게 주체적인 사고란, 아바타 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그 육체의 현시만이 가능한 것.

물론 몇 가지 부분에서 작은 위안거리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다. 그 하나는, 최후의 전투에서 거의 궤멸할 것으로 보였던 원주민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괴수들의 도움, 즉 기도에 응답한 신의 대답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후의 악당과의 대결에서 악당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은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야말로 작은 위안거리밖에 안된다.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이미 제이크 설리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즉 전체 구조에서 원주민들은 그저 조연에 불과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21세기 신 블록버스터가 어딘지모르게 석연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이 전쟁에서 나비 족은 승리하였는가.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어떤 극한의 판타지를 제공해주면 되는 것. 그것이 행복한 판타지이건, 혹은 공포의 판타지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극찬과 무수히 쏟아진 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2시가 4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극한의 판타지 속으로, 그 행성 안 숲 속의 어딘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 판타지를 스스로 거부하는 중생은 자꾸만 이 석연치 않음이 마음에 걸린다. 이 판타지 불감증에 걸린 중생을 인도할 새로운 판타지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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