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 오브 데드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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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드 오브 데드 (Land of the Dead)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 밤에 눈을 떠서, 새벽부터 낮까지 쭉 놀던 잘 나가는 언니들의 시간표와 비슷한 좀비 시리즈. 이 영화는 만약에 좀비들이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점에서 시작한다.


  좀비들은 드디어 인간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안전한 피신처이고 좀비들이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입장을 바꿔서 좀비들의 생각에는 인간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사육하고 있는 것이다. 살이 포동포동해질 때까지 키웠다가 잡아먹는 돼지를 생각하면 될까?


  빈약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인간들은 좀비를 막았다고 하겠지만, 좀비들의 입장에서는 저 안에 먹을 것들을 담아놨다고 할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그 안에서도 계급을 나누어 살고 있다. 이른바 있는 놈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누리고, 없는 놈들은 비참하게 지내고 있다. 인간의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좀비들의 공격에 멸종할 위험에 처해있어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오프닝 부분의 빨리 지나가는 화면 속에서 좀비들은 인간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들리는 목소리. 아마 방송인 것 같은데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알던 가족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슬퍼하거나 묻어줄 여유도 없습니다. 그냥 머리를 쏴버리세요."



  가족의 해체이자 인간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말이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좀비라는 것을 약간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도 그런 존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개념은 안드로메다 뒤편으로 보내버린 채 살아가는 인간들.

  남에게 휘둘리며 자기주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

  뭔가에 중독되어 그것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아니 그냥 기계적으로 그것을 취하는 인간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폐인이나 중독자 내지는 인간쓰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런 인물이 가족 내에 있으면, 가족은 붕괴되기 쉽다.


  그들을 보는 가족의 시선은 "왜 그러고 사냐?" 또는 안타까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일부는 수치스러워하기도 하고 말이다. 심지어 같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인간이 좀비를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물론 좀비처럼 마구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면 살인이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그런 생각을 좀비와 인간의 관계가 무척이나 씁쓸하게 느껴졌다. 좀비와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사이와 별반 다르지 않는다는 점이 무서우면서 소름끼쳤다.


  인간의 정이라는 건 한없이 끈끈하고 깊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빈부 차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날 불편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있는 인간들은 멋진 건물 안에서 아늑하게 살아간다. 밖의 인간들에게 일을 시키고, 그 대가를 지불하면서 말이다. 밖의 인간들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좀비들이 설치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슈퍼나 백화점을 싹쓸이해온다. 그러면 안의 인간들은 그것들을 소비하며 풍족하게 살아간다. 밖의 인간들이 그 일을 하다가 좀비가 되든지 아니면 좀비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하든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밖의 인간들은 돈을 모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희망이라기보다는 헛된 기대 같다.


  마치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곳에 취직을 하고. 그러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뭐 어차피 그래봤자 죽음(=좀비)는 둘 다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말이다.


  시리즈를 다 보고 난 뒤에 든 생각은 이거다.


  좀비처럼 살 것이냐, 인간처럼 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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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단편집 스티븐 킹 걸작선 5
스티븐 킹 지음, 김현우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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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의 단편이다. 또한 그의 다른 작품답게 공포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그린 마일이나 쇼생크 탈출은 공포가 아닌 휴머니즘이 철철 넘치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음에 안 들게.


 

  킹의 원작이 영화된 것 치고 그 공포를 잘 드러낸 것은 없다는 업계의 관례처럼, 영화는 별로였다. 시리즈로 6편인가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매혹적인 소재였지만, 원작의 긴장감과 공포감은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말이지 아까운 일이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길을 가던 커플이 한눈을 팔다가 그만 아이를 치고 만다. 아이는 즉사. 그런데 나중에 잘 보니 아이는 차에 치이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둘은 아이의 부모에게 사정을 얘기하겠다는 일념으로 근처 마을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곳에는 아이들만이 바글거리고 있을 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커플의 시점으로, 그들이 찾아내는 힌트와 말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소설에서의 묘미는 아이들이 종교에 빠져 어른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또한 배신자는 알아서 처단하고, 자기들끼리 아이를 낳으며 옥수수 밭을 지키는 것에 있다. 그야말로 종교에 미친 집단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대상이 아이들이니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데 단순히 아이들을 광신도로 몰아붙이기는 수긍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죽인 이유는 그들이 너무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 세계를 파괴의 길로 몰아가는 것은 어른들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결한 아이들이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보면 일정 나이가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 은혜를 입는다는 멋진 이름으로 말이다.


 

  소년 십자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른들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이 세속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며, 순결한 아이들이 승리를 이끌겠다던 그 집단. 물론 세속에 물든 어른들이 그들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가장 비극으로 끝난 사건 중의 하나이다. 결국 어른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어른들을 불신하는 아이들.


 

  어렵지 않게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다. 불신하고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뭔가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너무도 많다. 일부는 기성 사회를 비판하면서 반항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일부는 어른들과 타협하면서 더 나은 결과를 내려고 하기도 한다. 또 일부는 너무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니면 사회에 대해 외면하거나.


 

  '아이들은 아이다워야지.'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아이다움이라는 것이 무얼까?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아이?

  아니면 명작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쾌활하고 말썽은 부리는 아이? 물론 그 아이들은 기본이 착해서 사고뭉치일지라도 어른들의 말은 귀담아 듣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나쁜 것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그야말로 무균실에서 배양되어 '세상은 아름다워~' 라고 생각하는 아이?

  그것도 아니면 조숙해서 혼자 알아서 하는 아이?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거울을 닦아주는 것은 어른일 것이다. 거울의 틀을 만드는 것도 어른일 테고.


 

  결국 소설에서 아이들이 그런 극단적인 것을 벌이게 된 원인은 어른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소설일 뿐인데 너무 비약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집단적으로 일어나지 않다뿐이지 비슷한 사례는 찾아볼 수 있다. 부모를 죽이는 아이들, 길가다 시비 붙은 상대를 죽이는 아이들 등등.


 

  버릇없는 아이들이 커서 버릇없는 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자기처럼 버릇없는 아이들을 생산한다. 돌고 도는 악순환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요즘 세상이 너무 무서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스티븐 킹은 세상을 멀리 보는 눈이 있는 작가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통찰력과 생각의 깊이가 무척이나 부러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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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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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타노 쇼고의 단편집이다.


 

  얼마 전에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너무 인상적으로 읽어서, 작가 이름만 보고 단번에 지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단편을 좋아하기도 하고, 추리 소설도 좋아하고, 작가도 마음에 들었으니, 3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였다.



 

 

  첫 번째 단편인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맛으로 비유하자면, 시원하면서 톡 쏘는 맛이 느껴졌다. 하얀 생크림 제일 아랫부분에 연 겨자라든지 사워크림을 바른 격? 아니면 31가지 맛을 판다는 아이스크림 체인점의 입에 넣으면 알갱이가 톡톡 터지는 아이스크림이 밑에 깔려있거나.


 

  초반에 보여준 약간의 비틀림이 막판의 반전과 잘 어우러져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처음부터 상쾌한 맛이 입 안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톡 튀어버리니, 놀랄 수밖에. 그래서 결말을 읽으면서, ‘헐’하고 놀라는 것이다.


 

  물론 범인의 트릭은 속임수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엘러리 퀸처럼 모든 힌트를 다 주는 작가는 드무니까.


 

  현실적이고 돈만 밝히는 탐정 캐릭터엔 큰소리를 내면서 웃어버렸다. 하긴, 예전처럼 탐정의 활약상을 이름만 바꿔서 책으로 내면 곤란하긴 할 거다. 요즘은 개인 정보나 사생활 보호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피해자도 보호해야하고.


 

‘아, 그렇구나!’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의 변화라는 건, 탐정의 의식에도 변화를 주나보다. 예전처럼 유산을 물려받아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건을 추리하는, 박학다식하고 예의바르며 고상한 탐정은 보기 힘든 세상이다.



 

 

  두 번째 단편인 [생존자, 1명]은 맛있다고 열심히 먹다가 결국엔 목이 메고 마는, 크림이나 잼이 발라져있지 않은 약간은 단단한 식감의 빵을 떠올렸다. 물론 달달한 맛이 나긴 하지만, 그게 좋다고 계속 허겁지겁 먹다가는 물이나 우유를 부르짖게 된다.


 

  신흥 종교에 빠져 지하철 테러 사건을 일으킨 네 명의 남녀가 외딴 섬으로 피신을 한다. 교주는 그들에게 잠시만 기다리면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교단은 그들을 버렸다. 의도치 않게 남은 한명의 입에서 나온 진실. 그들은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충격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 명씩 사라진다. 다섯 명밖에 없는 섬에서, 과연 누가 살인자인가?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면, 자동적으로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읽게 만드는 글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럼 이건 누구의?’ 이러면서 읽다가 결국은 ‘난 바보인가 봐’라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쩌면 처음 먹은 톡 튀는 생크림 케이크를 맛보았기에, 두 번째는 약간 빡빡하지만 단단해서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케이크까지 달면 맛이 다들 비슷비슷해서 별로일 테니까.



 

 

  세 번째 단편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진한 커피 향을 오랫동안 입 안에 남기는,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크림이 잔뜩 발라진 케이크였다. 그래서 마지막 케이크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추억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 불태웠던 탐정 소설에 대한 열정.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잊고 말았던 그 시절의 추억. 시간이 지나면서 소원해진 서로의 관계.


 

  이 모든 것을 되살리고 싶었던 중년의 고백이 가슴 아프면서도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커피를 마시면서 흥얼거렸던 ‘Twilight Time’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끝까지 놓을 수 없는 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어쩌면 그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찾았고, 이뤘으니까. 그리고 그 여운이 오래가는 진한 향처럼, 글을 읽는 내 눈과 기억 속에 계속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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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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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만 보고는 일본의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제목도 낭만적이면서 감수성이 팍팍 느껴지고, 옥색 바탕에 하얀 꽃 그리고 주황색의 입술이 유달리 돋보이는 우수에 찬 여인의 초상까지.


 

  작가 이름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왜 이 책이 추리소설 코너에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서점 직원의 부주의함과 태만 그리고 상식 부족에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출판사가 독자들에게 주는 페이크다. 이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다루고 있는 스릴러 소설이다. 그런데 이렇게 산뜻하고 소녀 감성의 제목이라니…….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파놓은 함정에 발을 들이밀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접하는 순간, 독자는 두 번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한번은 작가에게, 또 다른 한번은 출판사에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보면, 주로 놀라운 반전이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중간에 서너 번,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도입부의 강렬한 인상이 그 의심을 자꾸 희석시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러나 이것을 말하면 결말에 대해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두 가지 부분이 중간에 드는 의심을 상쇄시켜버렸다.


 

  종반에 다다라서야, 내가 가진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꼈다. 난 얼마나 편향되고 무지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걸까?


 

  아니, 이건 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건 불쌍하고 편견으로 가득했던 불쌍한 내 자신을 위한 토닥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방송만 봐도 그렇다. 이 세상은 10대와 20대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 위주로 흘러간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세뇌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그렇게 손쉽게 사기를 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도 노인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


 

  자식들이 사고 치면 부모님은 든든한 방패가 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부모가 사고 치면 자식들은 창피하다고 쉬쉬하려고 한다. 그게 차이인가보다.



 

  부모와 자식.

  노인과 젊은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내가 얼마나 그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왔는지. 이 책의 작가는 타인과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관심이 생기면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모르던 것도 보이게 된다. 한 가지 면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생각의 깊이도 더 깊어지고, 범위도 넓어지면서 더 풍부해질 것이다, 당연히.


 

  이 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작가의 구성력이 돋보였다. 주인공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의 적절한 배치.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도입부.


 

  아, 도입부에 넘어가서 이후 드는 모든 의혹을 다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이건 진짜 구성의 승리다.


 

  대개 이 소설을 추리로 분류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추리는 범인을 찾아가는 묘미가 있는 것인데, 이 책은 탐정도 범인도 다 드러나 있다. 탐정이 증거를 찾아나서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데, 이건 추리라기보다는 액션 스릴러가 아닐까?


 

  문득 이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으신 분은 한번 날 잡아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약간 두툼하지만, 가볍고 금방금방 책장이 넘어가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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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씨씨 스페이식 출연 / 미디어파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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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말할 캐리는 누구처럼 개그가 뛰어나지도, 또 누구처럼 섹시하지도 노래를 잘 부르지도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왕따 당하기, 노려보기 그리고 염력으로 사람 죽이기! 똑같은 캐리지만, 사람이 다 다른 것처럼 그 능력도 다르다.


  캐리는 수줍지만 꿈 많은 십대 소녀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였다.


  이유는 별거 없다. 촌스러운 외모와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어머니, 그리고 너무도 순진한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그녀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광신도인 어머니는 그녀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런 집안에서 그녀가 자신을 꾸미지 못하게 된 것도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또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순진하고 순수하게 자란 것도 그녀가 고른 게 아니다.


  오로지 선천적인 요인 때문에 그녀는 왕따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확실히 비이성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특히 여자의 순결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그녀는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한 딸을 죄악에 빠졌다고 학대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캐리는 다른 아이들처럼 멋을 내거나 누구와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반항한다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으면 뭔가 달라졌겠지만, 캐리는 엄마에게 순종하는 순해빠진 순둥이였다. 그래서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엄마의 학대와 친구들의 괴롭힘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제일 행복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괴롭힘을 받은 그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유명한 장면이 여기서 나온다. 친구들의 계획대로 파티의 퀸으로 뽑혀 좋아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진 돼지 피. 그리고 들리는 비웃음과 손가락질.


  이 모든 상황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결국 그녀는 초능력을 발휘해서 친구들을 다 죽이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의 죄를 사하겠다며 칼을 든 엄마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왜 그녀가 그런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억눌린 그녀의 정신이 내적으로 쌓이고 쌓이면서 그런 힘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사춘기 불안정한 아이가 있는 집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더 잘 일어난다는 말도 있으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옛말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캐리의 엄마가 좀 너그러워서 그녀를 풀어줬으면 어땠을까? 만약에 캐리의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려면 이해와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잘났다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분노하고 서로를 파멸시키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중간 중간에 보면 존 트라볼타랑 캐리 피셔(레이아 공주)의 젊은 시절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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