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편집을 하다가 소위 '새내기형 사고'를 하나 쳐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책은 예쁘게 잘 나오겠지만 그런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원인엔 분명 내가 있었다는 것이 찝찝했다. (아침드라마 같은 조미료맛 나는 표현이지만 양해를 구하자면) 밥맛도 없었고 눈밑에 걸린 어둠은 내 입술까지 내려온 느낌이었다.  

원인은 나의 독서 습관에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책으로 나오기 이전 '원고'를 보는 습관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원고를 받아들고서 한 번만에 집중해서 읽는 사람 혹은 한 번은 그냥 살짝살짝 간만 보면서 그래 대충 이런 내용이구나, 다음 번에 자세하게 읽도록 아껴두자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난 후자에 속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지구력 혹은 집중력을 어느 정도 믿고 있다는 약간의 자만심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떻게 출판일을 정식으로 하기 이전엔 그 자만심이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숙이고 림보를 탈출하는 것 같았지만, '진짜 세계'는 내 허리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림보의 높이가 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에디터 가이드북의 형태를 띤 책들이 늘 말하는 원고 보는 요령엔 나같은 스타일이 또 정석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고를 시독한 이후에 다음 번에 내가 이 원고를 정말 읽기 좋게 만들어야겠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선한 다짐을 뒷받침할 어떤 끈끈함과 예리함이 조금은 만들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다시 책을 읽는다는 것으로 돌아가서 나는 요즘 독서 스타일의 '농도'를 스스로 점검하는 중이다.  어제 읽었던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는 좋은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정녕 책을 어떻게 대하는가, 제법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녕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번 필사적이고 싶은 이 느낌을 담아) 내게 '단 한 번의 독서'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서 그냥 끝까지 읽었다는 '어떤 포만감'에 굴복하여 내가 소홀하게 여긴 글자는 없었는가 점검하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글자를 향한 자만은 곧 글자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다가 한 챕터씩 넘겼다. 그건 책이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였지만 어떻게 보면 이 책을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못 볼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책이 거울이 된 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난 여드름을 냅다 짠 후 남아버린 불그스름한 딱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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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책이 나오기 전에 실수가 발견되어 다행이네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어차피 책은 같이 만들고 같이 보는 거니까요. 첫 책이라면 그것 때문에라도 잊을 수 없겠네요. 애쓰셨어요^^

얼그레이효과 2011-10-26 15:46   좋아요 0 | URL
후와님 답변이 넘 늦었네요. 위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글자'를 많이 두려워하고 있어요.ㅜ.ㅜ '글자울렁증'이라고 할까요. 이 상태를 얼른 탈출하고 싶네요.^^

2011-10-16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6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11-10-1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실수는 새내기도 하고, 경력자도 하고 뭐 그렇죠. 새내기는 몰라서 하고 경력자는 익숙하게 지나쳐서 하고. 누구나 다 실수합니다. 저도 뭐,

얼그레이효과 2011-10-26 15:47   좋아요 0 | URL
위로 고맙습니다.^^ 하 빨리 이 교정교열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하는디. 크크. 언젠가 즐길 날이 오겠죠? 그날을 기다립니다.(먼 산~~)
 
쾌락 - House of Pleasu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보는 느낌.하지만 영화의 문장은 카메라라고 말하는 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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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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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의미를 손으로 살포시 잡되, 언젠가 놓아주려는 데서 오는 담백함과 소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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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10-1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코 흘린 시선 같지만 다 챙겨보게 만드는 그 치밀함을 티나지 않게 배치한 김혜리의 글쓰기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너저분한 접속사의 향연 없이도 그녀의 문장은 흐르고 만난다. 그것 참 어려운데 그녀는 해낸다.
 
무미 예찬 -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담백한' 중국 문화와 사상의 매혹 산책자 에쎄 시리즈 5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최애리 옮김 / 산책자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담백함'의 미를, 추상의 공간에서 놀게 하지 않되, 그 야심이 매혹적으로 스며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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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9-2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본 글쓰기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무미 예찬 -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담백한' 중국 문화와 사상의 매혹 산책자 에쎄 시리즈 5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최애리 옮김 / 산책자 / 2010년 1월
절판


"서로 다른 맛들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중심'(또는 도)의 싱거움이야말로 "가장 음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음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10쪽

(...)중국 문화에서는, 무미가 하나의 가치로 인정된다. 그것도, 가운데요 바탕을 이루는 가치로 말이다. 이러한 발상은 이미 고대 사상에서부터 중요한 것으로, 현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서건 도를 논하는 일에서(12)건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중국인들의 미학적 전통을 풍부하게 만들어왔으니, 중국에서 발전한 예술들은 그러한 직관의 소산인 동시에 그 근본적 맛없음을 한층 더 감지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예술의 사명은 바로 그 무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음률과 시가와 회화를 통해, 무미는 체험이 된다. -11쪽

스승은 자신을 지혜나 학식을 가진 자로 묘사하지 않으며, 이미 성취한 것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겸손에서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갱신과 지속의 반복 속에 있는 긴장이기 때문이다 - 이 부단한 향상심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목표(그의 '행복)를 발견하며, 삶을 젊음 가운데, 정진 가운데 유지한다.-18쪽

맛은 대립시키고 분리시키지만, 맛없음은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을 연결시키고 서로 열어주며 소통하게 해준다. 그것은 다양한 양상들의 공통점을, 그리고 그 근본적인 성격을 보여준다.-45쪽

덧없는 인상,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속성, 순수성, 정신적 차원, 그리고 '황량한 잿빛 분위기'-이 모든 것이 예술 작품 가운데 자리 잡기 시작하는 담백함이라는 기호의 보완적 면모들이다. -59쪽

담의 '아득함'은 모종의 내적 여정을 통해서만 도달 가능하며, 동시에 담은 그 여정을 용이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담의 기호는 기호의 '본연의' 소명, 즉 재현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탈재현의 기능을 한다. 그 '너머'는 상징적이지 않다. -129쪽

담담함은 일종의 선동이 된다.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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