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이장욱 외 지음 / 작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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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의 동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근래 어떠한 소설들이 출간되었는지, 이러한 출간은 어떠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까? 이 책 오늘의 소설은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근간 출간된 단편 소설 중 주목할만한 몇 편을 골라 실어두고 동시에 몇 편의 소설집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오늘의 소설' 파트에는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이장욱, 김숨, 김애란, 김중혁, 배수아, 신경숙,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낯익은 이름은 김애란, 배수아, 신경숙, 펺혜영 작가님. 아무래도 이분들의 소설에 더 호기심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나, 실제로는 전부 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의..' 시리즈는 소위 문학성만을 심각하게 따지지는 않았던 것일까? 어떤 소설을 읽더라도 재미없는 면을 찾아내는 꼬인 성격임에도, 재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소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을 꼽자면 김숨의 '간과 쓸개', 신경숙의 '세상 끝의 신발', 편혜영의 '통조림 공장'을 들고 싶다. '간과 쓸개'는 해부칼로 후벼파듯 삶의 비루함과 중력감을 헤집어내서 읽는 내내 짜릿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세상 끝의 신발'은 작가가 늘 그렇듯, 따뜻함과 섬세함을 가득 담아내서 '역시 신경숙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통조림 공장'은 일단 말초적 재미도 크고 씁쓰레한 뒷맛도 일품인 소설이었다. 

'오늘의 소설집'에는 7명의 작가가 펴낸 소설집이 소개되고 있다. 소개라기보다는 평가라는 표현이 적절할텐데 1장 내외의 분량인지라 소설접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소개된 책 중 읽어본 것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밖에 없었던지라... 

그리고 기획위원들의 소설에 대한 평가를 좌담의 형식으로 실어낸' 2010 오늘의 소설 좌담'이 책을 마무리 짓는다. 

분량의 절반 이상을 단편소설을 싣는데 할당하다보니 소설계 동향을 가늠할만한 소개글이 부족해지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단편소설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쪽이 더 반가웠던 게 사실이다. 한동안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기세를 탄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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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게 삶을 묻다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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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자필멸 (生者必滅) 

누구나 알고 있지만 보려고 하지 않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으니 '나'의 죽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운명일 수밖에 없을터..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 때 잠시 죽음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의식의 밑에 죽음을 묻어버리고는 잊고 지내는 쪽을 택한다. 사유로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당연한 원리 때문에? 그렇다곤 해도 인간이라면 죽음을 극복한다는 형이상학적 문제로써가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현실적 문제로써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피해가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명은 죽음을 은닉하는 쪽을 택했고, 그렇기에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생경하게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책, '죽음에게 삶을 묻다'는 그렇게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조언을 건네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관념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고 이 책의 제목의 이미지도 있고 해서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철학서가 아닐까 미루어 짐작했었다. 그러나 책을 들여다보면 저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죽음을 살펴보고 죽음에 대처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오히려 실용서의 느낌이라고 할까? 책의 구성상 전반부는 죽음을 보는 시각과 죽음의 정체에 대해서 논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적인 사유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부분에 그치며 전체적으로는 실용성이나 현명함이라는 영역에서 죽음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으며, 후반부의 경우에는 호스피스 제도, 죽음 후에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배려 문제, 안락사와 같은 자기 결정권 문제를 논하면서 현실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방향을 택한다. (심지어 부록으로 유언장 양식도 첨부되어있다!) 작가의 전작 '떠남 혹은 없어짐'이라는 책에서 이미 철학적 사유를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현대인에게 있어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 있다라고 판단해서가 아닐까 추측된다. 실용적인 접근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줄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보다 냉철하게 죽음을 바라보게 만들수는 있으니까, 이러한 선택은 책의 의도와 잘 부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내용상 딱딱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논문과 같은 느낌의 논리전개가 많이 쓰이고 있기도 하다. 다만 꼭지 하나하나를 짧은 분량으로 세분화하고, 중간중간 명상적인 그림 및 내용과 상응하는 시를 삽입함으로써 그러한 딱딱함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비유적 예도 많이 들고 있는데 간혹 썰렁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예가 많아서 '저자분이 유머감각은 별로 없으신가보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죽음의 문제는 결국 인류 전체가 영원에 걸쳐 끌어안고 고민해야될 실존적 문제이다. 그러한 실존적 질문에 대해 어떠한 답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십중팔구 그 대답을 듣기 전에 '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고...그런만큼 현재의 위치에서 항상 내 옆에 서있는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현실적으로 고민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이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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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 플라워 - 내 방에 작은 정원
김혜진 지음 / 살림Life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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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 플라워. 작은 꽃.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름의 책입니다. 이 책은 그 이름대로 꽃 한송이, 컵 하나를 가지고 내 방에 작은 정원을 꾸며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입니다. 얼핏 꽃꽃이를 연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제로는 꽃을 소품으로 활용하는 스타일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장을 펼처보면 그윽하고 정적인 정취가 묻어납니다. 꽃의 화려함보다는 꽃의 위안을 강조한다는 것을 책의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지요. 봄꽃,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의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다양한 꽃들의 아름다운 사진을 여백과 저자의 추억을 담아내는 짧은 글귀로 스타일링해내고 있지요. 그리고 한장을 넘기면 그 꽃을 활용하여 실제로 소품을 만드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답니다. 장미 2단 케이크, 금잔화 네임카드, 호접란 접시에 띄우기 등... 실제로 도전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만큼 간단한 방법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이런 식으로 꽃을 생활 속에 녹여낼 수 있다면 사는 것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읽다보면 마치 산사에서 다도를 하는 듯, 난초를 치는 듯,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있는 듯 운치가 넘칩니다. 수필 같기도, 사진첩 같기도, 스타일링 안내서 같기도 한,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책이네요. 소중한 사람에게 꽃바구니 대신 이 책을 선물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어떤 꽃보다 향기가 오래 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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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심리학 - 조종하고 현혹하는 심리학을 의심하다
스콧 릴리언펠드 외 지음, 문희경.유지연 옮김 / 타임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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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상식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한다. 누구나 공감하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상식이 진정한 상식이 아니라 미신이었다면? 3,4백년만 거슬러올라가도 천동설을 상식이었지만 현재 천동설을 주장하다가는 미쳤다는 소리나 듣게 될 것이다. 물론 그동안 놀라울 정도로 과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미신은 대부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가진 잘못된 '상식' 50가지를 하나하나 격파해가는 책이다. 그런데 이 상식들이 하나같이 당연하게 '믿을만한' 것이라는 게 무서울 정도다. 스스로를 상식적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먼저 아래의 보기들을 살펴보시길..
 

'아기에게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면 머리가 좋아진다' - 몇년 전 모차르트 이펙트 음반이 얼마나 팔려나갔는데..

'40대나 50대 초반에는 누구나 중년의 위기를 겪는다' - '사랑과 전쟁'이나 아침 드라마를 보라고..

'학생의 학습방식에 따라 적합한 교육방식이 따로 있다' - 전인교육까지 무시할 셈이냐?

'거짓말탐지기로 진술의 진위 여부를 알아낼 수 있다' - 예능 프로그램에서 맨날 거짓말 탐지기 쓰잖아?

'남자와 여자는 의사소통 방식이 전혀 다르다' -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베스트셀러라고..

'어릴 때 성적 학대를 당하면 성인이 된 후 성격장애를 일으킨다' - CSI 못보셨수?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증 우울증 환자들이다' - 연예인 자살에 대한 기사만 봐도 알지.

'범죄심리 분석 기법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다' - CSI 보라니까?

'전기 충격 요법은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치료법이다'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도 같이 보시길..
 

난감하지 않은가? 이쯤되면 상식과 미신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전적으로 틀렸다는 경우보다는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역시 진위라는 것이 얼마나 알기 어려운 것인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말, 책과 미디어에서 얻어지게 마련이다. 미디어는 종종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필요하면 거짓을 재생산하는데 망설임이 없으며, 유명한 저자가 쓴 책, 심지어 나의 가족이 알려준 정보일지라도 착각과 무지에 의해 오류가 담겨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보통신이 고도화되어 잘못된 지식이 정교화게 재생산 되어 고속으로 퍼져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고 말이다. 이런 부정할 수 없는 의심들에 빠져들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논거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면 순식간에 마지막 장을 읽게 될 것이다. 적절하고 흥미진진한 예가 많으며 유머러스하게 서술하는 저자의 능력도 재미에 한몫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책에도 오류가 잔뜩 담겨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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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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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라는 이름, 들어는 보았으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이 책(혹은 그의 작품 세계 전체?)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은 2년간의 프랑스 유학과 귀국이 아닌가 한다. 유학 후 '신의 세계'를 경험한 '신들의 세계'의 자식인 자신에 대해 쓴 소설이 '아덴까지'라는 작품인데 이 소설을 쓰고 6개월 후에 이 책에 실린 '백색인'을,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황색인'을 썼다고 한다. 연도는 1955년, 나이는 대략 35세 정도였을 그... 태생적으로 카톨릭 인이었던 그에게도 시대의 특이성과 문명의 이질성은 폭풍처럼 다가왔던 것일까? 이 소설은 그가 느낀 '이물감'을 거침없이 담아낸다. 

제목도 그렇고 책의 구성도 그렇고 작가의 경력으로 봐도 그렇고, 두 편의 소설이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어설프게나마 들어본 적이 있는 일신교와 다신교가 가지는 철학적 차이를 떠올려보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상당히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소설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왠걸? 이러한 기대들은 하나같이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은 싸늘하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매섭고 격렬하다.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져 있으며 스스로의 욕망과 죄책감에 휩쓸린 채로 살아간다. 백색인의 '나'는 자신의 이지러짐을 세계에 관통시키려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며 신이라는 이름의 세계로 자신의 이지러짐을 채우려하는 신부 자크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카인이 아벨을 망가뜨리듯, 그는 자크의 유일한 욕망인 마리 테레즈를 이용하여 자크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자크를 죽임으로써 세계의 무의미를 증명해냈지만 결국 황폐하고 무감동할 뿐... 황색인은 세 인물의 고백이 어우러지지만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듀랑 신부'이다. 선교사로 일본에 와서 오랜 세월 신부로 봉사해왔던 그는 기미코라는 여인과의 만나 '타락'한 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삶을 살아간다. 죄책감에 빠진 이들이 그렇듯 그는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던져놓고, 마침내 '브로우 신부'를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신'을 버린다. 신이 없기에 황색인은 평온하고 무감할 수 있다고, 그들을 닮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구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색인의 경우, 듀랑 신부의 입을 빌어 신이 지배하는 세계와 신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대조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이 그다지 중요하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듀랑 신부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신과 신들의 세계를 충돌시켰을 뿐이다. 하물며 백색인에서의 '나'는 무신론자이고, 대적자 자크 신부의 신앙 역시 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운명'이라는 세계의 무자비함이다. 자크 신부나 브로우 신부는 그것을 숙명이라 읽어냈을 뿐이고, 백색인 '나'나 기미코는 그렇게 보지 않았을 뿐... 차라리 전쟁이라는 욕망의 향연장에서 지치고 패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인간상들의 모습, 어쩌면 이 글을 쓸 때 엔도가 느꼈을 무력감이 그 모습에 비추어 보일 따름이다.  

결국 이 한 쌍의 소설은 거울을 마주본 듯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신과 신들은 구원을 주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장난처럼 운명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신의 끄트머리라도 붙들려고 하는 듀랑 신부든, 무의미를 입에 달고 다니는 백색인의 '나', 황색인의 '치바'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은 답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아직 젊은 시절,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절에 씌여졌던 작품이어서일까? 두껍지 않은 이 책 안에 작가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할 화두를 던져둔 것이 아닐지... 생을 살아가며 작가가 나름의 답을 찾는지는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 알 일이리라. 그 답을 들어보고 싶기도, 듣지 않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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