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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피카소도 마찬가지로 그의 독립성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사람과 섞일 수도 있어다. 그의 상업적 성공은 그런 협력의 증거다. 또한 그가 출연한 영화, 포즈를 취해준 사진, 응한 인터뷰도 마찬가지 증거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아무리 순수했다고 해도, 그의 정력에는 매우 약삭빠른 사업가 기질이라는 얼룩이 배어 있다.
이는 피카소가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공 때문에, 그가 브란쿠시보다 덜 진지한 미술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실패는 그 자체가 도덕적이라고 보는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세속에서의 실패는 그 자체로 하나의 불행일 뿐이다. 피카소는 브란쿠시와 다른 기질을 가졌고, 그의 기질이 그의 천재성을 보존하면서도 성공하게 만들었다.
왜 그는 스스로를 이상화했는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왜 그는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인 성향을 그토록 신중히 보존하여 그것이 고상한 야만인의 수호자로 봉사할 수 있도록 했는가? 그것은 이기심이나 허영심의 결과는 아니었다 자신의 고상한 야만인을 이상화함으로써 그는 루소처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비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평생 혁명가였다는 진지한 믿음의 근거였다 또한 그 자신을 혁명가라고 믿게한 것이기도 하다 비록 동시대 유럽인 중에서 피카소만큼 현대 정치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스페인으로 돌아갔다러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달리 발전했으리라. 스페인에서라면 그는 더이상 자신을 야만인으로 의식하지 않았으리라 이러한 의식은 피카소 자신과 그를 둘러싼 낯선 환경의 차이가 낳은 결과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 차이는 피카소를 이국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어느 정도로는 그가 이것을 조장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국적이 되면 될수록 그는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상한 야만인에 더욱 가까워졌다 또한 자신을 이국적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좀더 강력히 비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공에 대한 피카소의 태도 속에 숨어 있는 역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피카소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철저히 위장되어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어려움이다 그의 조국에서 추방당한, 다른 세기에 속하는, 자신이 사는 부패한 사회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 성격을 이상화하는, 그래서 자기만조겡 빠진,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일해야 하는 미술가를 상상해보라 그의 어려움은 어떤 것일까?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외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이 그의 예술에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무엇을 그릴지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가 주제를 모두 소진했음을 뜻할 것이다. 그는 정서나 감정 또는 감흥을 소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을 담아낼 주제를 소진했다는 뜻이리라. 이것이 피카소의 어려움이었다. 자신에게 무엇을 그릴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 질문에 혼자 답해야 한다는 것.
존 버거가 피카소를 비판하는 핵심이 담긴 글들이다
간단히 말해 그는 천재라는 자기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자체를 불필요하게 느꼈고 연구를 통한 회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기 내부에 있는 고상한 야만인의 정서를 계속 키우면 그만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주제가 없다고 했다
"벨리니의 누드, 브뤼겔의 마을, 호가스의 감옥, 고야의 고문, 제리코의 정신병원, 쿠르베의 노동자들, 이 모든 것들은 미술가가 이전에는 무시되거나 버려진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결과였다"
말하자면 피카소는 이런 주제가 없었다
깊이 연구하고 천착할 주제가 없었고, 다만 자신의 천재성에서 기인한 감정이나 정서 등을 그림에 쏟아내면 그만이었다
뭐든 그리기만 하면 환호를 받았으니 더더욱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신뢰하고 유일한 믿음의 근거로 삼았을 만 하다
피카소가 스페인으로 돌아갔더라면 절대 고상한 야만인 정신을 계속 유지하지 않았을 거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프랑스는 이미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가장 발전한 사회였고 반대로 그의 고향 스페인은 봉건 제도 하에 있는 전근대적 사회였다
그러니까 스페인에서는 고상한 야만인 그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고상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려면, 반드시 현대적인 모순이 가득한 사회, 기술 발전과 진보에 따라 민주주의와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는 근대적인 사회에 살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스페인은 아직도 고상한 "야만인" 상태였으니, 현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굳이 고상한 야만인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는 야만 그 상태였다
그러니 피카소가 고상한 야만인 운운하는 것은 전혀 혁명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진보와 발전을 외쳐야만 현 사회에 대한 혁명이 가능했으리라
놀라운 것은 망명자가 어떻게 가장 현대적인 사회에서 그토록 열렬하게 완벽하게 받아들여졌나 하는 것이다
망명자라고 하면 고국에서 추방당해 이방인으로써 외국의 주류 사회 언저리를 헤매는 불쌍하고 처량한 정서를 생각하기 쉬운데, 피카소는 정반대로 이국에서 가장 열렬하게 환영받았고, 오히려 그 사회의 모순을 비판함으로서 혁명가 이미지까지 얻어서 더욱 투쟁적인 지식인으로 떠받들여졌다
그러니까 혁명가이면서도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가장 부유한 화가였으니 매우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존 버거는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도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느꼈던 근거가 바로 고상한 야만인 정서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천재성에 근거한, 내면의 본능 같은 거라고 했다
그 본능에 기대어 그림을 그리면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혁명가가 되어 더욱 많은 관중들이 환호하고 엄청난 부가 동반되는 상황이니, 그가 굳이 연구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으리라
주제가 없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존 버거는 피카소의 이중성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물론 그가 위선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존 버거가 피카소에게 진정한 혁명가의 기질이 없었고 자본주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위선자라고 말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교조적인 비난이고 예술을 논할 필요도 없는 유치하고 수준낮은 짓이리라
과학도 그렇지만 예술 역시 어떤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춰 비평이란 걸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나는 과학만큼이나 예술도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하는 게 아니겠는가?
만약 이데올로기에 의해 평판이 좌지우지 된다면 굳이 예술을 위대하다고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가 망한 것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 휴머니즘을 무시하고 예술을 이데올로기에 종속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어쨌든 이 천재 예술가의 속마음을, 혹은 정신 세계를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까발린 평론가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그림 자체가 아닌 화가의 일상 생활이 하나의 평론이 되서 돌아다닐 정도로 엄청나게 추앙받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천재 피카소의 이중성을 분석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할 것 같다
사실 나도 약간 의문이긴 했다
공산주의에 가담한 화가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토록 열렬히 숭배되고 최고의 부를 누렸을지 굉장히 궁금했고 모순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세계 대전이, 피카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에 깊히 동의한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전쟁이나 사회 변화 이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천재성에 기대어 산 사람이다
또 사회 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우리가 굳이 그를 천재로 떠받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년에 감소되는 육체적 능력을 슬퍼하면서 그린 소묘 연작들을 보면 묘한 감동이 온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누드를 그리고 그 앞에 가면을 쓴 난쟁이 노인을 마주 배치한 소묘들은, 피카소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이 화가는 확실히 솔직하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다
어쩜 난쟁이 노인과 젊은 여자라는 아주 노골적인 배치를 했을까?
더구나 그 노인은 젊은이의 가면을 쓰고 있다
정말 대단한 발상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성적으로 위축되고 늙었지만 (그래서 난쟁이로 표현한다) 여자에게는 젊은 얼굴로 대쉬하고 싶은 속마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 가면쓴 난쟁이 노인 대신 차라리 원숭이를 택하고 만다
한 달 간 그린 소묘의 마지막 그림에서 노인은 사라지고 원숭이와 여자만 남았다
오, 정말 대단한 피카소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성적 욕망이란 예술의 매우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것 같다
또 그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야만 위대한 예술이 될 것 같다
억누르고 고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가짜가 되버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