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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현대 화가들 -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다카시나 슈지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정말 오래 전부터 읽으려고 찜해 놓은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됐다.
원글은 1969년에 일본의 미술 잡지에 1년간 연재된 아주 오래된 글이고, 책은 2005년에 출간됐으니 신간은 아니다.
희망도서로 구입해 준 도서관에 감사드린다.
다카시나 슈지의 책은, <명화를 보는 눈> 과 <예술가와 패트런> 을 읽은 바 있다.
이 책까지 포함해 세 권 모두 평이하고 쉬운 언어로 미술사에 대해 잘 조망해 주고 있다.
그야말로 미술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쉬운 입문서 역할을 한다.
일본의 국립 서양 미술관 관장이었다는데 지나치게 어렵거나 전문적이지 않고 글을 비교적 쉽게 쓰기 때문에 읽기 편하다.
또 번역자의 말대로 책에 나온 그림을 가능하면 다 실어주려고 애쓴 출판사의 공로도 책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아쉬운 점은 작품의 원어 병기가 없어 인터넷에서 찾으려고 할 때 애를 먹었다.
사실 전부 유럽 작가들이라 영어 표기 역시 원어는 아니겠지만 하여튼 일관된 명칭 표기가 없어 다른 곳에서 같은 작품을 찾기가 어려웠다.
현대 미술은 언제나 어렵고 다소 괴상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자주 접하면서 조금씩 그 편견이 깨지는 느낌을 받는다.
뭔가 느낌이 온다고 해야 할까?
지난 번 칸딘스키전 때 직접 그 화려하고 역동적인 색체의 미학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했을 때 작품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브란쿠시의 그 유명한 <공간 속의 새> 역시 처음 볼 때는 대체 이게 왜 새냐, 이런 식의 추상 조각이면 아무거나 만들어 놓고 이름만 붙이면 되겠다, 이런 반발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책을 보면서 그의 조각 철학을 이해하게 됐다.
저자의 설명대로, 브란쿠시는 정지해 있는 새를 표현하고 싶은 게 아니라, 움직이는 새, 날아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고기를 조각할 때 사람들은 생생한 비늘까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물살을 가르고 헤엄쳐 가는 그 역동적인 모습을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브란쿠시는 죽은 물고기를 똑같이 조각하는 대신,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그 느낌을 추상적으로 조각한다.
또 그는 바라보고 감탄하는 조각품 대신, 만지면서 기뻐할 수 있는 촉각적인 느낌도 중요시 한다.
나중에는 맹인을 위한 조각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고 한다.
촉감으로 감상하는 조각이라, 정말 멋진 발상이지 않은가?
굉장히 잘 생긴, 정말 예술가처럼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생긴 그의 사진을 보면서 루마니아의 농민 출신이라는, 그래서 언제나 혼자 작업하고 혼자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해 낸다는 투박하고 건실한 이미지가 맞아 떨어져 더욱 관심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매끈한 그 조각상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에밀 놀데나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도 책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놀데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네모난 가면을 쓴 남자를 그린다는 화가로 잘못 알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의미한다는 아웃벡에 가면 그 그림이 있는데 대체 누구와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놀데의 <트리오>도 색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빨강, 노랑, 파랑의 강렬한 원색 대비가 정말 형태는 아무 의미도 없구나, 색체만으로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이런 감탄을 유발하게 만든다.
키리코의 그 기묘한 광장의 조각상 그림도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된다.
단단한 형태로 분명하게 사물을 표현하면서도 정작 전체적인 분위기는 기묘하고 몽환적으로 표현한 키리코는, 마치 물주머니 모양으로 흐느적 거리는 달리의 초현실주의와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그가 즐겨 그리던 이탈리아의 궁전에 아드리아네의 조각상도 있고 바나나도 있고 놀이 지는 어두운 풍경도 있다.
기차도 달린다.
그 노란색의 색체가 어울어지면서 뭔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저녁놀이 질 무렵, 아직 어둠이 깔리기 전 오후 햇살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을 때 기묘해지는 그런 느낌처럼 말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될 결심을 했다는 이브 탕기나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등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는 바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현대 화가로는 콜라주 작품으로 대표되는 다다이스트 슈비터스와, 오르피즘으로 대표되는 피카비아가 있다.
둘 다 생전 처음 듣는 화가다.
사실 콜라주는 이미 회화라고 하기엔 어떤 선을 넘어버린 기분이 들어 크게 관심이 없다.
더더군다나 파괴를 위한 파괴라는 수식어에 딱 들어맞는 다다이스트라니!
음악과 색의 조화를 꾀한 피카비아는 이번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화가다.
말 붙이기 좋아하는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조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음악의 명수 오르헤우스에서 비롯됐다는데 정말 그 느낌을 잘 표현한다.
나는 라파엘로나 다비드처럼 대상을 명확하게 그린 고전주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칸딘스키 그림을 보면서 내 취향이 형태보다는 오히려 색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흐를 좋아하는 것도 그 강렬한 노랑과 녹색의 원색이 주는 포스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색으로 느낌을 표현한 오르피즘의 화가 피카비아가 무척 마음에 든다.
실제로 보면 더욱 감동할 것 같다.
특히 3m에 달하는 <우드니>는 더욱 그렇다.
뉴욕으로 가는 배 안에서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퐁피두 센터에 있다는데, 대체 나는 거기 가서 뭘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기억에 전혀 없다.
넝마같은 옷 전시해 놓은 작품 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오르피슴의 다른 화가인 들로네의 그림도 무척 마음에 든다.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화가들을 열 두 명으로 국한시키고 특히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덕분에 짜임새 있는 책이 된 것 같다.
그림 소개도 훌륭하고 현대 회화에 문을 연 화가들의 예술관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