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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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더모트도 아닌데, 차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페스트가 결국 시당국에 의해 공식화되면서 도시는 폐쇄된다. 이제 도시에는 산 자와, 죽은자, 그리고 살아남을 자와 곧 죽을 자들이 남았다. 도시 밖에 있는 사람과 도시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 재회하게 될 지 모른다. 죽음의 도시가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킨다. 관이 모자르자 관을 생략하고, 묘지가 모자르자 거대한 구더기가 더 많은 주검을 담기 위해 남녀혼탕체계로 전환되고 바람이 불면 시체처리 냄새를 맡는다. 페스트는 시민들을 도시 안에 유폐시키지만, 비극의 본질은 유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된다는 거다.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고 전화 통화도 가능하지 않는 시대다. 떨어져 있는 연인에게, 가족에게 허락된 건 짧디 짧은 전보 메시지가 전부다. 그 짧은 메시지에 사람들이 담을 수 있는 말은 진부함 밖에 없다. 사랑한다. 잘있다. 보고싶다. 계속된다는 건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답보 상태의 질병이 계속해서, 이웃의 가족의 친구의 생명을 앗아하고 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민간 보건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페스트임을 확인시켜주고 격리수용시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행정적인 도움을 주는 일 뿐이다. 그 도시가 계속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삶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즐기는 모든 인간의 삶이 나름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며 계속된다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피가 철철 흐르듯이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던 그 말들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시민들은 생명력을 잃은 구절들을 가지고 우리의 고달픈 삶의 징표들을 전달하고자 애를 쓰며 편지들을 기계적으로 베끼고 있었다. 85


페스트의 발생에서부터 물러가기까지의 기간동안 도시의 모습을 서술자에 의해 객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이 소설에는 도시 풍경 외에, 네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해서, 서술자와의 대화하며 그들의 과거 삶의 궤적과 함께 현재, 그 병든 도시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후에 밝혀지는 서술자는 실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임에도 가장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주인공 베르나르 리유다. 페스트의 전조 증상인 죽은 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올 때, 그의 아내는 다른 병으로 인해 도시 밖의 어느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떠나고, 대신 어머니가 살림을 맡아주러 와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농부처럼 과묵하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따라서 떠난 아내에 대한 애틋함과 페스트에 대한 자신의 불안이 독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 때문에 페스트가 물러나고 도시가 제자리를 찾을 즈음 듣는 아내에 소식은 더욱 애닯고 마음아프다.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풀었던 기차 침대칸과 다시 볼 수 없음을 짐작하고 맺혀있던 그 아내의 눈물이 그를 그토록 한 의사를 무기력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페스트 국면에서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아이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이 슬퍼하고, 랑베르의 탈출에 행운을 빌고, 페스트가 죄지은 인간에 대한 벌이라는 신부에게 참고 참았던 감정을 폭발하고,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울 형용사들에 대해 고민하는 그랑의 말을 들어주고, 보건대를 조직한 장 타루에게서 우정을 느낀다. 


그렇다고 항상 죽음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휴가 중인 셈이었다. 타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296


우연히 취재차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자신은 오랑 시민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새로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을 받으러 다니고, 거절되고, 또다른 사람을 만나서 설명을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또 거절당하고 그렇게 매일 매일을 도시 탈출에 온 에너지를 쏟느라 막상 나가야 하는 이유였던 연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지만, 결국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몰래 빠져나갈 기회를 찾게 된다. 위험을 무릎쓰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페스트 때문에 도시 사정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고, 문지기들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비공식적 탈출 계획 역시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나가려고 했을 때만큼 번번히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뭔가 쿨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장 타루는 오랑 시민도 아니고, 호텔에서 묵고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랑베르와는 달리 도시의 자원봉사대가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보건대를 조직하여 앞장선다. 그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1/3밖에 안된다고 리유는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사실을 알려주지만 타루는 개의치 않고 민간보건대를 조직한다. 타루가 이끄는 보건대의 활약은 짐작하건데 도시의 질서 유지에 큰 도움을 주고 페스트로 마음마저 황폐해졌을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테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감상적 개입을 원치 않은 서술자는 보건대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그 의미마저 축소시킨다. 그의 과거 역시 리유에게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알게 되는데, 그의 약간은 냉소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면은 그의 어릴 때의 환경과 그것이 심어놓은 개인적인 가치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가 발견되는 모순을 통해 이해 가능하다. 


평생 말단 임시직 서기인 그랑은 자신의 건물에 함께 사는 코타루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을 구해내 의사를 불렀을 때 리유와 알게되는데, 이후 리유에게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했지만, '만사에 무심해졌고, 점점 더 과묵해진 데다,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 그랑은 떠난 아내가 남긴 편지를 끌어안고 남은 평생을 살아간다. '제 때 그녀를 붙잡아둘 말들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으나, 적합한 말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 리유에게 계속 형용사를 바꾸며 의견을 묻고, 또 바꾸고를 되풀이하지만, 편지는 완성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빈틈없는 평등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공연을 왔다가 페스트 공포에 유페된 극단은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며 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술집으로 몰려다니며 죽음을 나눈다. 재난 영화의 전형처럼 보이는 방화, 약탈, 폭동, 강탈, 반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 총격전도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짧은 뉴스 정도로 다룬다. 당연히 기회를 만난 사람도 생긴다. 바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인데,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만한 중범죄를 저질러 쫓기고 있던 그는, 모든 공권력이 페스트로 쏠린 덕에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여기저기 벌인 자잘한 투기와 불법적인 거래로 호황을 누린다. 소설에서 악인을 뽑아야 한다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코타르지만, 여기 나온 모든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그는 그들에게 그냥 이웃일 뿐이며, 랑베르에게 탈출을 주선하기도 한다.


감정을 잘 추스리고 맡은 바 임무에만 집중하는 리유가 딱 한 번 감정이 격해지는 적이 있는데,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오통 판사의 아들을 신부 파눌루와 함께 지켜본 후의 일이다. 파눌루의 열정적인 설교를 기억하는 리유는 그 어린 아이가 어째서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는지를 절규하듯 묻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파눌루는 다소 불안하고 극단에 치닫는 길고 지루한 설교를 하는데, 이후 페스트가 아닌 다른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 뭔가 심오해보인다. 


카뮈 자신은 이 소설을 2차대전때 독일에게 함락된 파리에 대한 은유이며 페스트는 나치 전제주의를 상징한다고 하고, 또한 본문 중에도 페스트는 어떤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한 내용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재난 소설로서만 보아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잘 계산된 인물의 배치와 그들의 역할은 촘촘하게 다양한 인간의 군상과 의미를 전달하고, 리유라는 인물이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과 특히 의미마저 축소시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민간보건대의 역할은 훗날 랑베르와 그랑을 모든 인물과 엮으면서 삶의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천재적인 구성이다. 랑베르의 결정이 있은 후, 잠시 숨을 고르느라 책을 덮어야 했다. 그리고 리유가 만났던, 리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이들 중 허망하게 죽은 자와 죽음에서 살아나온 자들에 대해 한명 한명 모두 감정이입이 되고 특히 리유의 이미지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읽은 책을 읽자 마자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책이 그 케이스였다. 비록 알베르의 독립을 반대했던 그의 정치관에는 그다지 찬성하지 않지만 카뮈는 진즉 읽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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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 잭슨의 The Lottery는 영문학 교과서에 자주 실리기 때문에 영미권 환경에서는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소설이라고 한다.  국내에 셜리 잭슨의 책이 3권 나와 있는데, 이 단편이 실린 책은 제비뽑기라고 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번역된 제목 제비뽑기는 무작위로 누군가를 뽑는 것이라 그런 느낌이 없는데 원제 The Lottery》는 국내에서는 복권 로또 당첨 같은 선입견이 자리 잡아서 그런지, 행운을 연상시킨다.  이 로또 맞았다고 할 때의 행운의 느낌때문에  제비뽑기라는 번역이 원제 The Lottery가 주는 반전적 충격을 희석시키는건 아닌가 싶다. 결론은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이라는 거다. 


전건우의 《밤의 이야기꾼들》에 실린 이야기 중의 하나인 《눈의여왕》을 읽으면서 셜리잭슨의 The Lottery가 생각났다. 오밤중에 캄캄한 폐가에 모여 앉아 자신들을 기묘한 이야기들을 차례로 전하는 것을 취재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건우의 《밤의 이야기꾼들》중 마지막 노인이 이야기한 《눈의 여왕》은 The Lottery에서 마을 사람들이 행했던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인간의 본질적 야만성과 악을 폭로한다. 


《The Lottery》는 지금은 사라졌다고 판단되는 관습과 주술적 믿음을 다루기도 하는데, 알 수 없는 먼 미래를 상상한 커트 보니것의 《2BR02B》와도 상통하는 데가 있다. 궁극적으로 어떤 집단의 관습은 그 집단의 믿음에 기초하는데, 그 믿음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택한 가치가 과연 무엇을 희생시키는가를 어떻게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지를 생각나게 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2BR02B》는 집단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구축한 시스템이 무엇을 파괴시키고 있는가를 다루는데, 그렇게 해서 구축된 시스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혹은 어떤 시스템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읽을 때는 단순히 충격적인 미스터리 소설이다 라고만 생각했던 스토리의 파편들이 두뇌에서 여기저기 튕겨가며 이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은유로 치환된다는 거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모호한 이 소설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마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고 약간의 축제분위기마저 감돌면서 목가적 분위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농담을 해가며 칠십칠년 이상 오래된 이 관습이 어떤 마을에서는 없어졌다며, 그런 젋고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며 쯧쯧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이런 저런 잡담이 이어진다. 약간 늦게 도착한 테시 허치슨 부인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깜빡 잊어버렸었다고 하고, 사람들은 그녀가 없는 채로 시작할 뻔 했다고 그렇게 가볍게 시작된다. 진행자는 한명씩 마을 사람들의 성을 호출하고 종이를 뽑아 들고 순서대로 한명씩 가장이 먼저 종이를 뽑아 어떤 집안이 당첨되는지가 먼저 결정되는데, 빌 허친슨이다. 


소설을 내고, 독자들의 사과하라는 압력까지 들었다는 하는데, 애초 처음에 그 독자들을 화나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설 속에 있다. 우리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는 거야? 혹은 인간을 뭘로 아는 거야? 라는 반격이 가능할만한 소설이다. 마지막 문단에 가서는 선명하게 시각적인 장면이 연상되어서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지켜져왔던 것들 남겨진 것들 중에는 희생양을 기반으로 한 것을 찾자면 못찾을 것도 없을 것이다. 당첨자가 밝혀지자, 빨리빨리 끝내고 일하러 가자는 마을 사람들의 그 무심함이 더욱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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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학의 기원이자, 방대한 규모의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읽다 보면 전차를 타고 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벽화에도 바퀴를 이용했던 기록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중세 시대를 지나오면서 서구의 전쟁터에서 전차는 쇠락했다. 고려시대까지도 바퀴를 이용한 탈 것이 존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바퀴달린 마차 대신 가마가 사람들을 날랐다. 


인류에게 바퀴의 역사는 기원전 4천년에서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바퀴를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했는데, 양옆의 두 개의 바퀴가 차축 끝에 달려있어 차체가 회전할 때 함께 회전하는 장치인 윤축, 바퀴가 차축과는 독립적으로 제각각 굴러가는 독립차륜, 그리고 쇼핑카트나 가구 옮길 때 달린 바퀴인 캐스터가 그것이다. 바퀴가 처음 생겨난 이래, 인류가 발견해온 찬란한 문화유산들과 비교해볼 때 바퀴라는 것의 기술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 바퀴의 마찰력은 주어진 동력을 훨씬 더 큰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왜 바퀴는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양권에서는 역사상의 한 때 사라졌으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용되지 않았을까. 콜럼버스 이전의 미 대륙에 수레나 우마차가 없는 이유로 자주 설명되는 의견으로는 바퀴달린 이동수단을 끌만한 큰 짐승이 없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제라드 다이아몬드가 이 관점의 지지자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불리엣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저자의 생각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와 중국 등이 역사상의 아주 긴 기간동안 바퀴달린 운송수단을 이용하지 않았던 이유와 비슷하다. 


서양에서 각광받은 기술이 현재 지구촌을 지배하는 기술이 되었다고 해서, 그 기술의 근간이 되는 어떤 생활 양식이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은 서구적인 관점이다. 바퀴는 서구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먼 고대에서부터 사용되어왔고 발전되었었다. 기원전 1200년경 상왕조 시대에 유목민의 전차 사용법을 도입했던 중국의 전장에서 기원전 300년 이후에는 기병대가 전차를 빠르게 대치하였다. 바퀴를 사용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어떤 시대에 마차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콜롬버스가 신세계에 도착했을 때 바퀴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토착민들에게 바퀴가 유용하지 않아서였지 가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바퀴달린 장난감을 만들었기 때문에 바퀴에 대해 알고 있었고 바퀴의 기술적 문제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책에 의하면 사실은 바퀴가 전 역사를 통털어 늘 한결같이 유용했고 열성적으로 이용되었던 운송 수단은 아니었다. 말이 끄는 이륜 전차 암각화가 많이 남아 있는 사하라 남부지역의 여러 목축 사회에서도 거대한 가축 떼가 있었지만 바퀴는 없었다.  도자기 물레를 사용할 줄 알았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또 일찍이 기원전 3천년부터 달구지와 전차를 사용했던 메소포타미아와 무역교류를 했던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시대가 되었을 때에는 바퀴달린 이동수단은 부재했다. 기원전 3천년즈음 이륜수레와 사륜 전투용 우마차를 사용했던 중동에서도 기원후 첫 5세기 동안 바퀴달린 운송수단은 다 사라져버렸다.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때(기원후 800년 이후 17세기 이전), 기사들에게도 마차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성들의 이동을 보호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수단으로 통하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1515-1547)의 통치 무렵까지도 파리에는 마차가 세 채 뿐이었다. 하나는 왕비의 것이었고, 하나는 왕세자의 애첩의 것이었고, 또하나는 뚱뚱해서 말에 탈수 없던 귀족 남성의 것이었다. 바퀴에 깊게 패이고 진창인 비포장 도로에서 마차는 자주 전복되고 도시의 도로는 말의 배설물로 엉망진창이 되고, 사고가 잦았다. 이러한 별다른 기술적인 진보의 부재속에서도 17세기를 전후해 갑자기 마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것은 이동수단을 바라보는 남성의 심리적 세계관의 변화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기사의 지위 기반을 향상시키고, 말탄 기사의 위상이 마차의 사용을 위축시켰다면,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협과 군사적 명성은 사륜 수레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포대로 사용하던 전법에 영향을 받아 마차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마차의 인기가 급등한 17세기 거리의 교통과 배설물, 진흙 문제, 바퀴자국 등의 문제로 영국 의회에는 마차의 남용을 제한하는 법안을 논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기원전 1200년 무렵, 강력한 전차병을 보유했던 중국은 보병과 기마궁수의 진보로 이어졌고 전차 전투가 쇠퇴한다. 전차를 타고 이동하던 관습도 13세기 이전 몽골이 침략하기 이전에 사라졌다. 마차를 버린 중국이 대안으로 채택한 바퀴는 외바퀴 수레였다. 사륜 운송수단이 18세기까지 존재했으나, 영향은 미미했다.  책에 나와 있는 중국의 전통적 외바퀴 수레에 매료되어 사진을 조금 더 찾아봤는데, 방향을 가볍고 이동이 용이하고 방향 전환도 손쉬워서 농사일과 이동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 대신 자동차가 동력을 대신하여 이제 바퀴달린 탈것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운송수단이 되어버렸지만, 동력이 없이도, 우리는 여전히 바퀴달린 새로운 것들, 근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바퀴달린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쇼핑카트, 여행용 트렁크, 휠체어, 유모차, 바퀴달린 의자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자동차와 마차 사이에는 인간의 근력을 동력으로 이용하는 인력거가 아시아 권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인력거가 서구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양에서만 보였던 이유는, 서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마차는 짐승이 끄는 것이고 따라서 인력거꾼의 지위가 짐승수준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라는 건데. 인간을 사고 팔며 채찍질을 해대던 서구 제국주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쯤 되는 미개발국가에 와서 이런 씨도 안먹히는 생각을 퍼뜨렸다는 건 개가 들어도 웃긴 일이긴 한데, 그들의 노예산업을 예외로 치더라도 인력거를 끄는 일은 공장일이나 광부일에 비해 건강에 덜 해로왔을테고, 말이 싸는 배설물과 각종 사회문제에 비교해봤을 때에도 친환경적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퀴가 그 사회를 지적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서구인의 시각은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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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사람들을 보고 느낀 결론이다. 그사람이 타고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했다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그사람의 환경이 변했고 그런 환경에 적응한 것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매일매일 조금씩 변했으면 한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싶고 뭔가 바꾸고자 이것저것 노력해 보지만 늘 제자리 거기에 서 있다. 변하고 싶다고 해서 변해지는게 아니다.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꾸어지는 게 아니다. 달라지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생일지도 모른다. 나를 내 뜻대로 내가 변하게 할 수 없는데 남이 바뀌기를 바란다는 것은 헛된 희망이다. 유전자에 화석처럼 박힌 그 어떤 본질은 인간이 유행처럼 번지는 긍정의 심리학으로 바꿀 수 있을까. 조금 달라졌다면 살기 위해 적응하고 있고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나는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할까. 나란 것이 환경에 지배를 받고, 유전자에 의해 어떤 부분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들조차 우리는 우리의 습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식단 바꾸기, 운동하기, 가족에게 상냥하게 대하기, 말 많이 하지 않기, 체통 지키고 살기, 엄마에게 전화 자주 하기, 공과금 제때 내기,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을 유지하기, 카드 사용내역 검토하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좀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위대한 계획가지만 형편없는 실행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수십년간 그렇게나 많이 쏟아져 나왔고 여전히 그리고 더욱더 거세게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해서 나올 책과 주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흐름이 출판가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건 그 책들이 사람들을 혹 하게 할만큼 매혹적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책들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는 게 된다. 왜서일까. 책은 책대로 실행은 실행대로 그 둘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책은 읽어 지식으로 쌓이지만 그 지식이 행동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죄책감이 되어버린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럭해가며 점점 더 자신을 포기하게 되고 또다른 자기계발서들을 찾아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작심삼일의 실행을 가져올 뿐이라는 걸 부정하면서 말이다.

코치 서비스라는 게 미국에서는 하나의 고급 서비수 산업으로 자리잡았나부다. 저자는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응 고객의 동료, 부하, 상사, 가족, 친구들의 다면평가를 통해 진단하고 그 실행까지도 책임진다. 그가 컨설팅 비용을 받을 때에는 코칭을 통해 고객이 확실히 변화되었는가의 결과에 따라 비용을 지급받는 듯하다.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뵨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여 그 사람이 발전할 수 있도록 코칭하는 것이 이 사람의 직업이다. 미국인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의 CEO들도 직접 코치했고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상태임에도 모자란 부분을 캐치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워준다.

인간을 변화시키기는 복잡하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이 책을 통해 마셜 골드스미스가 주장하는 내용이고, 그의 고객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알려준다. 이런 류의 책이 자기계발서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주장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설득력있어 혹한다. 더욱이 세부적인 고객의 실제 예를 다루고 있어 팔랑귀가 된다. 당장 내일부터 당장 실천하고 당장 내일부터 새로운 인간이 될 기세다.

트리거(trigger)는 총의 방아쇠로, 어떤 일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행동을 말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못하는 트리거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변화를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변화를 불러오는 트리거를 당기면 변화는 온다.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책을 읽어보면 자세히 나와있다. 좋은 말들이 많지만 책이 지금 없는 관계로(여행중)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면, 매일 스스로에게 변화하고자 하는 질문 몇가지를 만들고 그것의 성취도를 점수로 매기라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능동적 질문이라고 표현하는데, 내가 무엇을 했는가? 라고 질문하지 말고 무엇을 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라고 질문하라는 것이다. 전자는 핑계거리를 만들어주고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어쩔 수 없는 환경탓을 하도록 함으로써 변화를 막는 트리거를 제공한다.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하는 다이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실패에 대한 핑계는 수도 없이 생긴다. 회식이 있어서, 누구와 함께 먹는 자리를 피할 수 없어서, 생일이어서, 기타등등 하지만 탄수화물의 섭취를 제한하도록 노력했는가로 질문을 바꾼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 숱한 방해 를 뚫고도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덜 먹었다면 우리는 당당하게 100덤 만점의 10점이라도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매일 기록하다보면 조금씩 성취도가 올라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울 것이다.

또 한가지, 저자로서는 지나가면서 한 말이지만 내게는 퍽이나 깨달음을 준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는 매번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 고집불통인 사람도 만나고 먹을 때마다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은 눈꼽만큼도 못보고 남의 탓만하는 사람도 있다. 모임의 멤버 하나는 어디 뭐 목으러 가면 맛없다고 타박을 하는 데 난 또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너한테 맛있는 집이 어딨냐 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이런 서로간의 지적질이 서로에게 혹은 관계 속에서 좋을 일이 없다. 저자는 이에 대해 변해야 될 사람은 자기 자신이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짜증내고 스트레스받는 일은 의자가 의자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의자는 필요할 때 앉기만 하면 된다. 거기다가 대고 넌 왜 의자냐 하고 화를 버럭버럭 내봤자 의자가 침대로 변할 수 없다. 침대를 원하는데 의자밖에 없다면 침대를 원하지 말거나 침대를 새로 사거나 해야겠지. (저자는 의자 얘기만 했는데 내가 너무 멀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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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0-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공감가는 글입니다.

CREBBP 2016-10-07 14:29   좋아요 0 | URL
고양이라디오님 방문과 댓글 모두 감사합니다. ^^
 

3년전에 쓴 내용을 다시 복습 차원에서 긁어왔다. 지금은 뭔가가 조금 바뀌어졌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퍼온다. 

언제부터인가 대형 포탈 사이트의 파워블로거들의 일부 컨텐츠가 남의 글을 베껴서 잘 포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례들이 간간히 보고된다.

하루 방문객 수가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대형 파워블로거들은

자신의 파워를 상업적 목적에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요리나 수공예 등의 사이트처럼 약간의 창작적 성격이 가미된 경우 그렇다.

전에 누가 늙은 오이를 잔뜩 주어서 이걸 어케 먹을 수 있나 찾아보니

국내에서 책도 많이 내고 아주 유명한 파워블로거에 올려진 요리법과

어떤 조용한 개인 블로거에서 올린 요리법이 비슷했다.

문제는 요리법 뿐만 아니라, 어릴 때를 회상하며 밥을 비벼먹었더니 아이들이 모두 한그릇 뚝딱 해치웠다는 식의 스토리텔링과, 사진의 배치 같은 것 전체적 구조가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에(그렇지 않으면 내가 기억도 못했을 듯) 해당 블로거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즉시 탐정놀이에 돌입했다(그 때는 시간이 좀 남았다).  

이 유명한 파워블로거의 메뉴를 뒤지고 비슷한 요리들을 구글에서 찾아보았는데,

다른 곳에서 교묘하게 베껴온 듯한 사례가 많았다. 

물론 똑같이 베끼진 않았다.

전문 사진사까지 고용하고 상업적으로 활동하는 파워블로거인 만큼 사진도 훨씬 멋있고 맛깔스럽다. 

훨씬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무명의 블로거가 올린 사진은 시커멓고 뿌옇고 그리 맛없어보이지만, 후자의 파워블로거가 올린 사진은 깔끔한 식탁에 조명을 사용하여 너무나도 맛깔스러워 없는 노각이라도 사러 가고 싶게 만든다. 

같은 재료로 만드는 음식인데 비슷할 수 있고, 유사할 수 있지, 또 매일 그렇게 새로운 요리를 창조해내는데, 여기 저기서 요리법을 참고할 수도 있는 거지 라는 의견과 함께, 해당 파워블로거를 음해하는 세력으로 몰아대는 사람까지 있었다. 여러가지 의견이야 있을 수 있는 거고, 음해세력이라는 모함도(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많으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다.

이 파워블로거는 저작권을 침해한 것일까? 

블로거들이 올린 글은 저작권이 보호될까? 

있다면 누구의 소속일까? 

사이트 제공자가 저작권을 가진다는 말도 얼핏 들은 것 같고.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쓰는 글이 일단 웹상에 표시되면 옳건 그르건 완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건 맞는 거 같다. 

일단 공개된 컨텐츠이니 아무나 가져다가 어떻게 이용하여도 괜찮은걸까?


다음은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는 특정 조건에 따라 저작물 배포를 허용하는 저작권 라이선스 중 하나이다.

간단히 CCL이라고도 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는 다음 종류의 저작물 권리를 선택적으로  표시할 수 있다. 


Attribution저작자 표시 (Attribution; by)저작물을 사용할 때에 원저작자를 꼭 표기해야 한다.
Non-commercial비영리 (Noncommercial; nc)저작물을 영리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Non-derivative변경 금지 (No Derivative Works; nd)저작물을 변경할 수 없다.
Share-alike동일조건 변경 허락 (Share-alike; sa)2차 저작물을 만들 때 그 저작물에도 원저작물과 같은 라이선스를 사용해야 한다


블로그이든, 카페이든, 공개된 게시판에 글이나, 그림이나 무엇이든 올릴때,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문구와 함께 선택된 저작권리 아이콘을 표시하면 해당 저작물에 대한 라이센스를 함께 공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의 내용은 위키피디어에서 일부 인용하였다.((http://ko.wikipedia.org/) 그리고 문서의 밑에는 다음과 같은 표시가 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


이것은 내가 자유로이 위키피디어의 저 내용을 일부 인용하거나 수정 변경할 수 있지만

저작자가 위키피디아임을 표시해야 하며, 

2차 저작물인 이 저작물 역시 동일하게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의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의 라이센스를 가진다는 뜻이다. 

상업적 이용을 막고 싶다면 처음부터 비영리 를 선택하고,

저작물의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면 변경금지를 선택하면 된다.  


다음과 같은 조합이 가능하다. 


변경 금지 조항과 동일조건 변경 허락 조항은 동시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총 11가지의 라이선스를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저작자 표시를 기본 사항으로 채택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다음의 6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 저작자 표시(BY)
  • 저작자 표시-비영리(BY-NC)
  •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BY-NC-ND)
  •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 허락(BY-NC-SA)
  •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BY-ND)
  •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 허락(BY-SA)

그리고 몇몇 국가의 경우 특수한 상황에 맞게 개발된 샘플링(sampling), 셰어뮤직(sharemusic) 등의 라이선스 조건도 사용할 수 있다.


마침 알라딘 서재 관리에 가보니 다음과 같은 설정이 있었다. 



나의정보 > 정보공개/저작권설정 에 있다. 허접한 블로그 하나 운영하면서 누가 니 글을 베낀다고 그런 것까지 표시하냐 라고 한다면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책은 지식이다. 라이센스에 대한 지식도 책의 일부분이 다루는 지식이다. 책을 파는 서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라면 조금 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선구(?)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친구가 블로그와 카페에 올렸던 글을 몽땅 엮어 책을 만들었는데,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의 게시물을 카페와 블로그에서 모두 지워야 했다. 뭐 그 게시물 자체의 저작권이 해당 카페와 블로그에 있다나 하면서 모두 지울것을 출판사에서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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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9-2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잊고 있었는데 저도 알라딘 서재에 저거 설정했었어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로요. 다른 분들게도 도움이 될 정보 같아요.

CREBBP 2016-09-26 19:00   좋아요 0 | URL
전 알라딘 서재에 이 기능 있는거 글 쓰다가 알게 됐어요. 이제서야 표시하네요. 뭐 대단한 건 없지만, 그래도 변경불가, 상업적 이용불가 등등 다 설정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