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주미힌 > 책 보는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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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5-1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워요..저 쪽에서 이거 어제 보구..혼자 웃었었는데..바람님도 너무 귀여워서 퍼왔나 봐요..ㅋㅋ
토끼 보는 토끼....@@...후후~!

하늘바람 2006-05-18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귀여워서 퍼왔답니다
 

 

 

 

 

 

마음에 기억의 불빛이 켜질 때


한국 신세대작가가 말하는 자신의 역사와 풍경

 

일본국제교류기금에서는「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과「한일 우정의 해 2005」를 기념하여, 가이코 다케시 기념 아시아작가 강연회에 한국을 대표하는 신세대작가인 김연수씨를 초빙하였다. 방일을 기회로 일본의 작가 노나카 히이라기씨와 서로의 소설관, 작가관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노나카 이번에 김연수씨의 세 작품을 읽어보았는데, 작품 모두 너무 재미있어서 만나뵙기를 기대하고 있었어요. 특히 <뉴욕제과점>이란 작품에 매우 흥미를 가졌는데요, 일본에서는 사소설(私小説)이라고 하는 장르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서, 사소설이란 단어의 정의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은 금욕적이랄 만큼 자전적인 방법으로 쓰여져있네요. 어찌되었든 <뉴욕제과점>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세 작품을 읽어보면 버라이어티한 작풍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겠더라구요. 문체를 몇 개라도 가지고 있다고 할까, 그런게 <뉴욕제과점>에서는 별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매우 스트레이트하게 순수하고 소박하게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더라구요. 작가로서의 캐리어를 몇 년이나 지나고서도 이러한 글쓰기 방법을 한다는 데에 저는 흥미를 가졌습니다. “나는 이 소설만은 연필로 쓰려고 한다”라는 이 첫번째 문장부터 정말 매료당했습니다. 그래서 묻고싶은 것이 있는데, 정말 연필로 쓰셨나요? 사실은 컴퓨터로 썼는데도 “연필로 쓰려고 한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모처럼 만나게 되었으니 진실을 알고 싶어서... 좀 흔한 질문 입니다만... (웃음)
김연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실제로 연필로 썼습니다. 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평론가 사이에서도 정말 손으로 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요즘에 손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없는데 일부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연필로 썼느냐, 손으로 썼다는 문장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내용 전부가 픽션으로 만든 이야기냐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작품을 집필하고 있을 때 저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근무하면서 많은 작품을 쓴다는 일이 시간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카페 등에서 조금씩 한 단락 한 단락 손으로 써 나갔습니다. “연필로 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 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장시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실제로 조금씩 밖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연필로 쓸 수밖에 없었지요.
노나카 어머. 그럼 정말 연필로 쓰셨네요. 그랬군요... 보통 때에도 손으로 쓰시나요? 아니면 컴퓨터로 하시나요.
김연수 대학 1, 2학년 때에는 손으로 썼어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집필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쭉 컴퓨터로 치고 있습니다. 손으로 쓴다는 건 매우 흔하지않은 케이스죠. 그러나 이 <뉴욕제과점>이란 소설의 성격상 생각나는 대로 적어두려고 했기 때문에 손으로 쓰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94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요, 97년부터 2002년까지는 회사에 근무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마지막 2년간은 집필활동도 같이 하고 있었지요. 그 후 실은 월드컵을 관전하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그 후 복직을 안한 채로 있지요. (웃음)

 

뉴욕제과점의 막내아들로서

 

노나카 지방도시의 빵집이라는 설정이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전적 소설이라 정말 빵집이 생가이긴 하지만, 그것이 상징적인 기능을 하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세탁소 같은데는 역시 안된다는 느낌입니다.
음식점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이 아닌 서구에서 들어온 음식으로, 한국식으로 바뀌거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빵이겠지요. 그것이 경제성장기를 지나면서 주위의 변화에 맞추어 쫓아가려고 하지만, 바게트 같은 건 만들 수 없이 시대에 남겨져 간다, 그럭저럭 아이들을 다 키웠을 때 어머니가 가게를 정리하는 결의를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면서도 시대, 국가를 표현하고 있고, 크게 말하자면 세계적인 상황도 표현하고 있어요. 정말로 다양한 미니멈한 세계 속에서 글로벌한 사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도 막 펼쳐진 풍경 속에 모두 그려져 있다는 점에 아주 감동했습니다.
실제로 가게명이 뉴욕제과점이지만, 조금 지나치지 않냐고 말하고싶을 정도에요. 역시 한국에서도 강대국인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발과 동경심이 있겠지요? 이 가게명, 더 나아가서는 소설의 타이틀에서도 그걸 헤아릴 수 있겠더라구요. 소설 내용 중 신문기사에 연수씨 프로필을 뉴욕제과점의 막내아들이라고 소개했다는 부분이 있잖아요, 저는 그걸보고 작가성이 있구나 느꼈습니다. 뭐라 해도 뉴욕제과점의 아들이잖아요? (웃음)
김연수 전에 뉴욕제과점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약력에 쓰여진걸 본 40대 여성운동가에게 제과점에서 태어난 게 너무 부럽다고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빵집출신 작가는 한국에서 저 이외에 없구요, (웃음)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빵집을 소재로 한 소설을 다른 작가들이 쓰고싶어도 쓸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노나카 그것도 뉴욕제과점으로는요. 뉴욕이 붙어있어요. (웃음)
김연수 저는 어렸을 때 왜 하필이면 빵집 아들로 태어났을까 하고 주눅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에서는 빵집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정말 소재가 바닥이 나서, 쓸 게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때「장편소설 <뉴욕제과점>」이라는 걸 써 보고 싶어요.
노나카 당연히 쓰셔야지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절망감 속에서 자전적 소설을 쓰다

 

▲ 김연수 씨 작품들
노나카 다른 두 작품을 읽었을 때는 작가로서 매우 샤프하게 지어내는 방법, 픽션을 만드는 방법, 고민한 심경 등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뉴욕제과점>에는 만들고자 한 부분이 없이 소박한 맛이 있어 다른 작품과는 느낌이 틀리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것을 쓰게 된 것이 작품 속에도 나와 있듯이 자녀를 두게 되어선가요?
김연수 쓰기 시작한 것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던 때라서 아직 아이가 없었을 때 입니다. 30대로 들어섰기에 그 이상 재미있는 일은 없을거라는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 였지요. 물론 아이가 태어나면서 열심히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 살아가면 안되겠다는 무력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당시에는 양친의 건강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었고, 그 시기에 아는 분들이 계속 돌아가셨어요. 이제부터는 제가 아는 사람들, 저를 귀하게 생각해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시는구나라는 생각과, 뉴욕제과점의 따뜻한 기억마저도 모두 지워져 버리는구나라는 절망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한 절망감속에서 자전적 소설을 쓰는 계기를 마련했어요. 물론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면 저는 빵집 이야기 외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쓸 때에는 우선 정확하게 그 기억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세한 일까지 세밀하게, 소설적으로 묘사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처음에, 연필로 쓰지않으면 안되겠다는 문장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충격적인 결말을 다 써나갔을 때 갖게 되었지요. 그 당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죽을 때까지 내가 계속 돌보지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실제로 이 아이는 제가 죽은 후에도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뉴욕제과점은 없어졌지만 제가 글을 씀으로 인해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아이도 제가 죽고 모두가 없어져버려도 혼자서 살아갑니다. 그 점을 느꼈을 때에 저는 매우 충격을 받았어요. 30대 전반에 느낀 무력감은, 지금 생각해봐도, 무엇에 의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걸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찾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속에서 뉴욕제과점의 불빛이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나카 지금 이야기를 듣고, 이 작품이 쓰여진 배경이나 심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러한 때야말로 절실한 작품이 태어나는군요. 그렇지만 도무지 쓰지않고는 배길 수 없는 작품, 인생의 절목을 반영하는 작품은 언제라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네요. 10년에 한번 정도일까요.

 

글을 씀으로써 혼이 연마된다

 

김연수 최근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한데요, 예를들면 인물이나 사건, 소설의 주제 등 특히 관심을 갖고 잇는 게 있으세요?
노나카 글쎄요... 혼(魂)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할까요? 저는 한평생 소설을 계속 쓰고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인생에서 여러 경험을 하고 아주 괴로운 기분이 들거나, 정말로 질렸다고 생각했을 때에 소설을 쓰면 엄청 많이 마음이 구제되거든요.
작가는 불행해야 좋은 작품이 써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사고방식은 괴로울 때에는 싫었었어요. 실제로 행복한 상태에서 훌륭한 작품을 쓰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궁지에 몰리면 힘을 발휘하는 작가가 확실히 많아서, 정말로 인과관계의 상업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거의 부당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몰려서 자기 인생이나 운명 등에 대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도 소설을 쓰면 이상하게도 사물이 뚜렷하게 보여집니다. 앞으로도 담담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요. 글을 씀으로써 혼이 연마되는 것 같이...
그렇지만 그건 작가라는 특권이 있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구요, 소설을 쓰지않았던 소녀시대에도 좋아하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혼이 단련되어진다던가, 무언가 확실하게 보여진다거나, 그런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를들어 이 <뉴욕제과점>에서도 한 사람의 작가가 결코 허구가 아닌 사실을 쓰려고 했을 때에 더 상징적으로 창작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쓰는 사람의 혼과 읽는 사람의 혼의 공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콘트롤할 수 없는 일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김연수 지금 혼이 통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네요. (웃음) 작가는 계속 변하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저는「영매(靈媒)」라는 어려운 단어로 얘기하고자 합니다. 작가는 영매 경험을 통하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명을 기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등장인물이 공포를 느끼는 장면을 묘사할 때에는 저도 실제로 공포를 느끼기 위해 여러가지 해 보거나, 또 매우 무서웠을 때의 일을 떠올려, 그 공포감을 자기가 대신 느끼면서 기술해나가는 노력을 하지요.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이전의 자신과는 또 다른 자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뀌어져 있다는 게 어느 정도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나카 연수씨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건...
김연수 제가 지금 굉장히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예를들어 꼬불꼬불 구부러진 좁은 길입니다. 향하고 있는 쪽에 무엇이 있을까 전혀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구부러진 길. 저쪽에 무엇이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매우 두근두근 거립니다.
소설을 쓰면서 우리들은 항상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관심을 계속 가지지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아픔이나 기쁨, 경험일수도 있어 다양하지만,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영매」, 즉 대신 느끼는 것을 기술하지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대단한 생각을 하고 소설을 쓰지않으면 안되겠다고 자주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더 대단한 생각을 하고 더 좋은 것을 써 나가자고 자신을 또 타이릅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하신 혼을 연마한다는 것과 일맥하지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노나카 그래요. 알겠어요.
김연수 그런데 혼만 점점 닦아져서, 단련되어가면 대체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네요.
노나카 아마도 너는 너, 나는 내가 되는 거겠지요. 오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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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카 히이라기(野中 柊)
미국에서 결혼생활을 보내는 일본인 여성의 일상을 그린 <요모기 아이스>로 데뷔.
1992년 <앤더슨가의 며느리>는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선출. 주요 저서로 <초콜릿 오르가즘>, <그린 크리스마스>, <다리아>, <점핑☆베이비> 등이 있다.

 

遠近(wochi kochi) 제5호(June / July 2005)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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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17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5시에 일어났다가 다시 잤어요
 

내가 맘을 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일단 사람을 만나면 오해부터 하고본다

저 사람은 나랑 같은 마음일거야.

그렇게 만난 사람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지금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하는데서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보고 파서 나는 언제나 달려갔으니

지금 잘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마음이 통하고 편하고

서로 위하고, 그렇다고 생각했다.

난 좀 욕심이 과해서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었나 보다

난 바빴고 그 친구는 내 가 바쁜 사이 많은 다른 아이들과 친해졌고 난 원든 원치 않든 함께 어울려야 했다

착각이란 나같은 사람에게는 일상이다.

첨 그친구가 함께하는 한 이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잠시 방송작가 일도 했었는데

난 셋이 엄청 친하다고 생각했었다.

나이는 내가 한살 어렸지만 그렇다고 난  다르다 생각치 않았고 우린 마음을 주고 받는다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집이 방송국과 가까워 방송작가 친구에게 전화거니

OO와 같이 오라고 했다.

우리집은 방송국과 20분 차이. OO의 집은 한시간 반

그때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떼내지 못해 합석한 사람 이란 걸.

그것도 모르고 나를 그렇게 만든 OO를 위해 나는 있는 돈을 다 털어 그의 외모와 닮은 캐릭터 상품을 사다주고 , 그가 기뻐하는 모습이 너무 기뻐서 그와 닮은 캐릭터 상품을 사기 위해 점심을 굶기도 했다.

나는 하기 싫지만 그가 하고 픈 일이라면 기꺼이 같이 했고

내가 하고 싶지만 그가 원해서 기꺼이 양보했다.

다음해 또 한명의 뉴 페이스

물론 나는 바빠서 못사귄 틈을 타 친해진 것이고 둘이 앉아서 수다를  떨던 카페에는 다시 셋이 된다.

난 역시 믿는다.

셋이 너무 친하다고

아니 셋이 친하던 둘이 친하던과 상관 없이 OO와 나는 친하다고

그러나 문제는 그 둘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고 나서 부터였다.

어느 순간 내가 나타나면 안 좋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OO의 남친이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나

차마 내게 말 못하는 OO의 심정을 다른 이를 통해 들었다

"언니만 없으면 모든게 편하고 즐거워요."

그말이 잊을 수가 없다.

그 뒤 난 갈 곳을 잃었다.

당시 그 상황이 내게 전부였다.

결국 OO와 남친은 헤어진다.

그 뒤 술자리서 나는 울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고? 내가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술기운이었지만 난 잊지 못한다.

"그래 그래서 너랑 안 놀라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거야."

세상에 맞아본 비수 중에 내가 맞은 가장 아픈 비수였다. 가장 첫번째 아픈 비수.

여태 내가 털어놓았던 속상함과 믿음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뒤 마음을 접었다.

연락을 하고 지내고 간간 만나기도 하지만 서로 결혼도 했지만 시간도 십년이 지났지만

치유될 수 없다. 이젠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을 거란 걸 안다.

모든 건 나의 오해와 착각에서 시작되었다,

내곁에 있는 이가 나는 사람을 볼 줄 모른다 했다.

그냥 내맘이겠건 하고 믿다보면 아니라서

어느 날 우편함에 꽃힌 편지가 그 지난 일을 상기시킨다.

아 참 옹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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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5-1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졸한거 아니예요.
뜻하지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하고... 그래서 관계는 어려운거라고 봐요.
.... 상처받기 두려워 혼자 갇혀 있는 것보다 마음을 열고 상처를 받는 것이 훨씬 낫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저는요. (물론 쉽지 않지만)
하늘바람님께 하늘처럼 좋은 친구가 나타나리라 믿어요. ^^

하늘바람 2006-05-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치카치카 뿡뿡!!님 아이디 길군요^^

Mephistopheles 2006-05-1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 많다...라고 생각되는 걸요..??

하늘바람 2006-05-1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메피님 , 근데 지금 뜬금없이 지금 비빔국수 먹고 파서 두리번 거리고 있어요. ^^

프레이야 2006-05-1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이런 문제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상처 받았을 님의 마음에 호오~~~

2006-05-16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6-05-16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정말 감사해요. 속삭여주신님 님도 여리시군요. 네 상처받지 말자고요

2006-05-16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6-05-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 주신님 ^^
 

<우리 동화 깊이 들여다보기>
아이가 가족을 키운다 김서정
나와 동화 공부를 같이 하는 학생의 습작 한 편이 최근 내게 한 화두를 다시 던져 주었다. 동화에 나오는 아이의 가장 중요한 환경을 만드는 가족의 모습이 그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나 조부모, 경쟁자이기도 하고 조력자이기도 한 형제자매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성격이 굳어지고, 인간관과 인생관을 세우게 되고, 인격이 형성된다. 아이들이 어떤 인간으로 자라는가는 어떤 환경 아래 어떤 가족들 틈에서 사는가에 거의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다. 작가들이 그리는 가족의 모습은 그들이, 혹은 더 나아가 그 시대가 아이들을 어떤 인간으로 간주하는지, 어떻게 키우고 싶어하는지, 어떤 인간으로 만들고 싶어하는지를 부지중에 말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 동화는 지금 어떤 가족, 어떤 아이들을 그리고 있을까. 나는 몇 권의 책을 찾아 보았다.

가출, 별거, 이혼, 죽음, 실종 등등으로 가정이 무너지는 세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부쩍 가속화되었지만, 이런 가정 문제가 동화의 주요한 소재로 떠오르게 된 것은 그 뒤 몇 년이 지난 21세기 들어서부터였다. 가정의 해체로 가장 힘들어지는 게 아이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화가 아이들의 변하는 현실을 발 빠르게 포착하여 함께 호흡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못했다는 혐의가 그다지 근거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별로 다양하지도, 심도 깊지도 않았던 듯하다. 가족 해체 후 아이가 겪는 의문, 혼란, 슬픔, 방황이 그만그만하게 그려지고, 결론은 해체된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려고 애쓴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면서 의식주를 비롯한 사랑, 결혼, 직업, 죽음, 탄생 등 인생의 온갖 범주에 이전과 아주 다른 틀이 세워지는데, 유독 가족이라는 범주는 옛날 틀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을 완전한 가족으로 간주하여 그 이외의 가정에 모자라고 불완전하다는 뜻으로 붙이는 ‘결손 가정’이라는 용어가 그렇고, 재혼 가정 아이들이 성(姓)이 서로 다른 경우 놀림 받는다며 호적법을 고쳐 같은 성을 쓰게 해 달라는 요구가 그렇다. 재혼 가정의 성 다른 형제들이 차별 대우를 받거나 따돌림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한두 아이의 성을 바꿔서 같은 아버지 소생인 척하는 방법은 한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만약에 또다시 이혼하고 재혼해서 또 다른 성을 가진 아버지를 맞게 된다면, 그 때도 아이들 성을 또다시 바꿀 것인가. 그럴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성이 서로 달라도 그들은 당당한 하나의 가족임을, 그것을 가지고 놀리고 괴롭히는 태도가 옳지 않음을, 그런 편견과 부당한 대접에는 의연히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고 험한 인생길에서 필요한 것은 새 호적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삶에 대한 자세, 자기 확신일 것이다.

최근 만난 동화 몇 권은 그런 면에서 예전의 동화와 조금은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족의 해체 과정이 꼼꼼하게 파헤쳐지거나, ‘결손 가정’의 아이가 상실감에 시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주거나, 한쪽 부모의 부재로 괴로워하던 아이가 그 괴로움을 넘어서 새로운 ‘가족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 등을 밀도 있게 그려 내는 그 책들은 확실히 지금까지의 가족 체제를 점검하고 거기에 다른 시각,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걱정쟁이 열세 살』 『엄마 따로 아빠 따로』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이 그것들이다.

이 책들은 가족 해체의 원인, 그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자세, 주위 어른들의 태도를 각각 다양하게 그린다. 가장 무난(?)한 아빠의 죽음이 원인으로 나오는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의 주인공 비읍이는 “그럭저럭 아빠 없는 생활을 잘하고 있다. 문제는 엄마다.”라고 단언한다. 아빠의 죽음을 차마 알리지 못해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고 둘러대는 데에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믿는 척한다. 속아 주는 게 엄마에게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빠가 없는 것 때문에 비읍이가 슬퍼하는 대목이 두어 군데 있기는 하지만, 크게 상처받는 것 같지는 않다. “아빠가 없어서 나한테 나쁘다는 생각만 했다. (……) 하지만 영감의 죽음을 보니 아빠가 불쌍하다.”고 적을 정도로 아빠라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볼 줄도 안다. 자기 연민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대신 비읍이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내어 실행한다. ‘문제는 엄마’라고 진단하면서.

정말이지, 어른들은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닐까? 없는 것과 힘든 일이 없을 수 있는 인생은 없는데, 아이들의 인생이라고 다를 바 없는데,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아이들 앞에서 털어놓기를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털어놓아 봤자 아이들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 나갈 능력이 없을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닐까? 둘 다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아닌 듯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이들의 슬픔을 안쓰러워하고 적응력 없음을 걱정하는 일은, 사실은 어른 자신들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현실을 헤쳐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태도로 보인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표지
정작 아이들에게 절실한 관심사는 지금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충족시켜 나가는가이다. 아빠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 비읍이에게 가장 결정적인 삶의 조건은 엄마이니, 자기 정립의 기반, 세상과의 통로로서 엄마의 역할은 ‘정상 가정’에서의 엄마의 역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은, 린드그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이 책이 “엄마는 삐삐의 팬이었지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로 시작해서 “혹시 여든한 살이 되면 엄마도 졸지 않고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로 끝나는 것을 보라. 린드그렌이라는 표면적 모티프 밑에는 엄마가 숨어 있다. 린드그렌은 비읍이가 ‘다시 태어나도 엄마랑 한 가족이 되고 싶지만, 그 때는 엄마가 아니라 동생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처음부터 버릇을 잘 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하고 생각할 정도인 ‘문제 엄마’를 비판하고, 염려하고, 애틋해 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요긴한 도구이자 통로인 것이다. 린드그렌을 통해 비읍이는 결국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무연히 바라보기만 하던 세상 속 여기저기로 제 발자국을 또박또박 남기며 다닌다. 첫 문장, 부정의 의미가 담긴 ‘모른다’는 단어에는 딸에게 무심하고 무력한 엄마에 대한 비읍이의 불만과 안타까움이 숨어 있는 듯하지만, 마지막 문장의 ‘모른다’는 엄마가 달라질 거라는 비읍이의 희망과 기대, 엄마의 그 변화에 자신이 큰 몫을 했다는 기쁨과 자부심을 보여 준다.

『걱정쟁이 열세 살』 표지
비읍이처럼 아빠가 없기는 하지만, 『걱정쟁이 열세 살』 정상우는 경우가 아주 다르다. 아빠가 떳떳하게(?) 죽은 대신, 엄마와 싸우던 끝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설명 한 마디 없이 집을 나간 아빠, 그 때부터 지겹도록 울기만 하는 엄마, 몸져누운 엄마에게 너 때문에 내 아들, 동생이 집을 나갔으니 찾아 내라 다그치던 할머니와 고모들, 가족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없이 사는 듯한 누나. 그 사이에서 상우는 가엾게도 안절부절못한다. 그런데 상우의 괴로움은 아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가장 큰 걱정은 자기가 ‘비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아빠를 기다리는 까닭은 딱 하나다. 아빠가 돌아와야 우리 가족은 완전히 정상적일 수 있다는 것.”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 우리 집에서는 버젓이 일어나는 것이다.” 도처에 깔려 있는 ‘정상적인 가정’에 대한 강박 섞인 독백까지 굳이 들출 것 없이, 정상은, 정상우라는 아이들 이름에서부터 이 이야기의 중심 테마는 가차 없이 드러난다. 그것은 부모 중 한 쪽이 없으면 결손, 비정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가족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상우처럼 심약한 아이는 단짝 친구에게도 자기 정황을 숨기고, 아빠와의 체험 학습기를 지어서 써 내고,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해 가며 야영 행사를 피해 간다. “동정 받는다면, 그건 정말 참을 수 없”기 때문이고, “남들이 우리 집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학부모 회의에 부모님이 참석 못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그 이유를 대게” 하는 학교, 엄마나 아빠가 돌아가셨다거나 이혼했다거나 별거 중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 아이들 심정이 어떨까. 더구나 ‘아빠가 집 나가서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이유를 대야 하는 상우 같은 아이는! 아무도 제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상우는 위축되고,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아빠가 없다는 상실감보다는, 그 때문에 일어나는 가족 사이의 갈등, 학교라는 사회가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가족 제도에 대한 견해가 상우를 더 힘들게 한다. ‘결손 가정’ 아이 문제를 사회가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여 풀어 나가고 싶어한다면, 아이들이 자기 가정을 ‘비정상, 결손’ 가정으로 여기며 상처받고 위축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엄마 따로 아빠 따로』 표지
이번에는 엄마의 부재. 『엄마 따로 아빠 따로』는 부모가 이혼한 뒤 아빠를 따라 시골 마을로 이사와 살아가는 미라와 건희 남매 이야기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아이들은 참 힘들”다고 중얼거리는 건희가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시시콜콜 펼쳐 놓는 이 책은, 그러나 안쓰러움보다는 오히려 재미를 준다. 비록 부모가 이혼했을지라도 아이들은 힘든 일조차 재미로 여기고, 슬픔은 행복으로 바꿔 가기를 바라는 작가의 응원의 마음이 읽힌다. 그 재미는, 이야기에 부력과 속도감을 주면서도 아이의 심리묘사는 밀도 있게 이뤄 내는 짧고 경쾌한 문장이 만들어 가는데, 이런 문체는 특별히 웃음을 주는 에피소드가 없는 이야기에서 어떤 유머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부모가 이혼한 아이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 내는 태도는, 그 상황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나 괴로움에 압도당하지 말고 가볍게 넘어서라는 격려의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 문체 덕분에 건희는 정말 귀엽게 그려진다. “어른이면 다야?” “이게 뭐야.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아빠가 엄마랑 이혼한 거지, 내가 엄마랑 이혼한 건 아니라고요.” 이야기 전반부에서 심통을 부릴 때는 귀여우면서 미안하고, 후반부로 가면서 “난 이제 4학년인데요. 이제 나도 아빠를 보살펴 줄 수 있어요.” “난 어른이 되면 절대 안 그럴 거야. (……) 대답하는 사람이 힘들 거 같은 건 절대 안 물어 볼 거야.” 같은 속 깊은 소리를 할 때는 귀여우면서 고마워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건희가 그저 속 깊은 아이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아빠랑 있으면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랑 있으면 아빠가 보고 싶어. 이것도 병인가 봐. 어쩌지? 난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는 건희는, 세상은 그저 한 방향으로 곧장 달려가는 곳이 아니라 양쪽을 왔다갔다, 뒤뚱거리며 사는 곳임을 어렴풋이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아주 빠르게. 멀리도 가”는 트럭을 타고 엄마에게 멀어져 새 집으로 달려가던 때의 분노는 가라앉지만, “엄마를 만나면 아빠를 놓치는 것 같고, 아빠와 살 때는 엄마가 멀어지는 것 같”은 불안이 새로 생긴다. 이 혼란과 불안은 아이가 앞으로도 계속 겪으면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는, 때에 따라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는 부모의 뒷받침이 힘이 돼야 한다. “넓게 보고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아빠, “아빠가 너희 정성스럽게 돌본 거”를 알아 주는 엄마 밑에서 건희는 균형을 잡아가며 자기 말마따나 “엄마 아빠 다 같이 사는 애들보다 빨리 철이 들”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표지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은 또 다른 무게로 마음에 얹힌다. 이혼이나 가출을 유발하는 부부 갈등의 원인이 유독 상세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부부 갈등이 아이의 상태보다 더 비중 있게 묘사되어, 이 책은 동화라기보다는 페미니즘 소설 쪽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치매에 걸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한탄하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자기 인생을 찾겠다고 나서는 엄마가 이야기의 초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린 주인공의 심리와 인식 지평에 대한 관심은 자칫 뒤로 물러서기 쉽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자극했던 인물도 아이들보다는 아빠였다. 이 책 전체를 붙드는 주제어는 아마도 ‘이기심’과 ‘소통 부재’일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시어머니와 자신을 강력히 비난하는 남편과 불만에 찬 아이들을 떠나 자기 인생을 찾겠다며 그림을 그리는 엄마,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에게 소홀하다며 아내만 닦달하는 아빠, 어른 싸움을 걱정하는 동생에게 “그건 엄마 아빠의 문제야. 둘이서 해결해야지. 너나 나는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 것 없다구.”를 내뱉는 가희, “아픈 할머니나 예전과 너무 다르게 구는 엄마, 자기밖에 모르는 언니도 다 지겨웠다.”며 넌더리를 내는 가영. 네 사람은 모두 각각 이기적이다. 그러나 이 가족들에게 이기심보다 더 큰 문제는 소통 부재이다. 누구도 자기를 이해시키려 입을 열지 않고 상대를 이해하려 귀를 열지 않는다. 소리만 지르는 아빠, ‘아빠가 묻지 않았으니 엄마가 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 아니다’는 궤변을 펼치며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얘기해도 별로 심각하게 듣지 않”는 엄마, ‘짜증 나’를 입에 달고 다니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는 가희, 대화를 한 번 시도해 보고 “우리 엄마지만, 정말 정이 떨어질 정도로 싫다”며 “앞으로 벌어질 일은 순전히 엄마 책임”으로 떠넘기는 가영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이 가족은 왜 이럴까? 나는 그 실마리를, 엄마가 집을 나가고 할머니가 죽은 뒤 술취한 아빠가 딸들을 껴안고 울먹이며 하는 말에서 찾았다.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너희 둘밖에 없어.” 아빠‘가’가 아니라 아빠‘를’이라니. 할머니의 죽음과 엄마의 가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한꺼번에 겪은 어린 두 딸에게 아빠가 하는 말이, 아빠‘를’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밖에 없다는 푸념이라니. 자신이 주어, 주체가 되어야 할 상황에 오히려 목적어, 객체로 밀어 넣는 이 어른 남자를 보면서 나는 착잡해졌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가족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만이 모든 사태의 핵심인 아빠에게 어떻게 ‘정상적’인 가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식구들이 모두 이기적인 것도, 산산이 흩어지는 마음들을 부드러우면서 끈질긴 대화를 통해 모아 보려는 노력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 아빠 앞에서는 엄마의 자아 찾기 노력의 적절성 여부를 묻는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에서 가장 조심스레 배려하고 성장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인물은 아이들이 아니라 아빠인 듯하다. 자신과 어머니에게 무조건 희생적 사랑을 베풀지 않는 아내에 대한 유아적 분노로,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는 그녀를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다 필요 없어! 당장 나가!” 하고 고함치며 끌어내는 남자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린 딸은 생리를 시작하고부터 비난하던 엄마를 여자로서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인생의 전환기적 사건을 맞고서도 인식의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아빠. 깨어진 가정에서 아빠는 아마 그 어느 누구보다 불행할 것이다. “남들이 우리 집에 대해 어떻게 말하건 나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엄마랑 아빠랑 행복하게 살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불행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은 가영이가 이제 아빠의 불행을 덜어 주게 되지 않을까.

단 네 권을 상대로 한 분석이지만 흥미로웠던 결과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 주는 것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 쪽이었다는 점, 아이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어른들까지 변화시킨다는 점이었다. 비읍이는 주도적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나가면서 책을 통 안 읽는 엄마가 책을 읽게 하는 데 성공한다. “아빠가 떠난 것도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아빠는 아빠대로 행복한 게 좋잖아.” 하는 ‘쿨’한 상은이는 무기력하고 체념적이던 엄마가 딸 때문에 불려간 학교에서 “선생님, 우리 너무 좁게 생각하지 말자구요.” 하고 튕기는 배짱을 부리도록 만든다. “아빠? 아빠 좋지. 하지만 네 행복을 왜 아빠가 만들어 줘? 너희 아빠가 집을 안 나가셨으며 넌 행복했을까? 결코 아닐 걸.” 하면서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오폭별은, 상우의 인식 지평에 큰 변화가 생기게 한 결정적인 변수이다. 이모와 단 둘이 살면서도 “어른들도 실수를 하지. 우리가 봐 줘야지 어쩌겠니. 우리까지 어른들을 안 믿어 주면 어른들은 너무 슬플 거야.”라고 의젓하게 말하는 다진이도 건희의 성장에 한몫한다, 아마 가영이도 아빠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해진 이야기, 주체적인 아이들, 솔직해진 어른들을 보여 주는 최근의 가족 동화가 믿음직하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삶을 아프게 나누며, 울고 웃으며 삶의 힘겨운 계단을 하나씩하나씩 함께 밟아 올라가면서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보여 주는 그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글쓴이
김서정 / 동화를 읽고, 쓰고, 옮기고, 가르치고, 평론하는 일로 몹시 바쁜 (척하는) 아줌마입니다. 지은 책으로 『용감한 꼬마 생쥐』 『나의 사직동』 『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 평론집 『어린이문학 만세』 『멋진 판타지』 『동화가 재미있는 이유』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어린이문학의 즐거움』 『용의 아이들』 『일주일 내내 토요일』 『미오 나의 미오』 등이 있습니다. 숙명여대 겸임교수이고, ‘김서정동화아카데미’에서 동화를 가르칩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 유은실 장편동화, 권사우 그림 / 창비
엄마 따로 아빠 따로 / 임정진 글, 허구 그림 / 시공사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 최나미 지음, 정용연 그림 / 청년사
걱정쟁이 열세 살 / 최나미 지음, 정문주 그림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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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06-05-1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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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있는 풍경>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작가 박상률
초등학교 담장에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봄인 것이다. 수업이 끝나 재잘거리며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 모습이 환히 핀 개나리 같다. 운동장은 뛰고 뒹구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가던 길 멈추고 한참을 서서 이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뚱맞게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저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 왜 부아가 치밀었을까?

최근 몇 달 동안 쏟아진 아이들 관련 뉴스는 아이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뉴스는 아이들의 영혼을 멍들게 하거나 육체를 괴롭히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뺏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 냈다. 한 동네 사는 아저씨한테 성추행 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아이, 부모 대신 조카를 맡은 삼촌 부부라는 사람들의 인면수심 때문에 멍든 아이, 부모의 폭행에 몸이 망가지고 얼이 빠진 아이, 심지어는 친부모에 의해 죽임까지 당한 아이.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런 세상이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 일이 터질 때마다 방송이나 신문은 며칠 동안 세상이 다 끝장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정부는 뭐 하냐, 대책을 세워라, 캠페인을 벌이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처럼 군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다른 대형 사건이나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수그러들고 만다. 뉴스를 보며 혀를 찼던 어른들 역시 며칠 지나면 일상의 삶에 함몰되어 잊고 산다.

그럼, 아이들을 주 독자층으로 삼는 문학인 동화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아직까지는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많지 않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폭력 이나 죽음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는 게 최고라는 동화 작가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문제를 다룬 작품이 나오면 동화 작가는 물론 평론가들조차 애써 외면한다. 아이들 정서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느니, 소재주의에 빠졌느니 어쩌느니 하는 명분 하나 그럴싸하게 붙이면서.

그런데 아이들이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어른들과 나뉘어져 있나? 아이들만 따로 모아 살게 함으로써 사회의 악이나 폭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 놓고 있나? 그렇지 않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차피 사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러니 어른들 문제는 어른들 문제로 끝나지 않고 아이들 문제로 곧장 이어지고, 아이들 문제 역시 아이들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고 어른들 문제로 곧바로 이어진다.

문학은 바로 문제적 인물, 문제적 사회를 다룬다. 사람살이에, 하나하나의 사람에 문제가 없으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밤낮 예쁜 꽃이 어쩌고 멋진 구름이 어쩌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꽃 자체만을, 구름 자체만을 다루는 게 문학이 아니다. 꽃을 대하는 사람, 구름을 쳐다보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게 문학이다. 그러한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편안하지만은 않다. 눈은 예쁜 꽃을 들여다보고 머리는 멋진 구름을 이고 있을지라도, 마음과 현실은 복잡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그 동안 아이들이 읽은 동화는 어떠했나? 그들이 발 딛고 숨 쉬며 사는 현실은 어지럽고 숨 막히는데, 그들이 읽는 동화 속 현실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그야말로 ‘환타지’ 세계였다. 환타지 세계가 별 건가? 현실하고 동떨어진 세계 아닌가? 아무리 우리가 사는 현실을 배경으로 했다 하더라도 다루는 얘기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채 꽃 타령 구름 놀음만 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환타지 아닌가?

그러나 진정한 환타지는 현실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지 현실 세계를 낯설게 하여 보여 줄 뿐이다. 낯설게 하는 이유도 사실은 현실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이상한 괴물이 나온다고, 아니 아예 기계 인간이 나온다고 해서 그게 현실 속 문제를 떠나 따로 존재하는 문제를 다루나? 아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체가 어떠하든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동화는 환타지 작품은 놔두고라도, 현실 세계를 다룬 이른바 사실주의 동화에서조차도 현실을 외면했다. 어른들의 폭력과 사회의 냉대 속에 더할 수 없이 망가져 가는 아이들의 문제보다는, 누가 보아도 편안하고 따스한 이야기를 다루기 좋아했다. 그건 작가들이 동화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를 반쪽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 내린 들녘 풍경을 보거나 강변 같은 곳을 곡선으로 멋지게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야, 동화 같은 풍경이다.’라며 탄성을 내지른다. 사람들에게 동화는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엔 폭설에 깔려 망가진 농사 시설물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농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위험한 지점에 철길을 놓을 때 다치거나 죽은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물과 대상의 겉만 보지 속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문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독자가 잘 볼 수 있게 뒤집어 보여 주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더라도, 작가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현상의 뒷모습과 사물의 속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글로 써야 한다. 말하자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것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은 반쪽 작가일 뿐이다. 이 점 동화라고 다르지 않다.

곰브리치라는 미술학자가 말하기를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화가 자신이 아는 것만을 그린다.’고 했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만을 쓰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작가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자신이 아는 영역을 넓혀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이, 아름다움과 추함이 한데 섞여 있다. 그러기에 눈에 잘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이요, 잘 보이지 않는 추한 풍경에 대해서도 잘 알아 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결국은 아는 만큼 쓰게 될 테니까.
글쓴이
박상률 /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녔습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 「진도아리랑」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다양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집 『진도아리랑』 『배고픈 웃음』 등과 소설 『봄바람』 『나는 아름답다』 『밥이 끓는 시간』, 동화 『바람으로 남은 엄마』 『미리 쓰는 방학 일기』 『까치학교』 『개밥상과 시인 아저씨』 등을 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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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1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그게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된다니까요. ㅋㅋ. 가져가요.

하늘바람 2006-05-1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고민입니다 스텔라님

물만두 2006-05-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면 못쓰겠군요 ㅠ.ㅠ

하늘바람 2006-05-1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은 탄탄하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