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숙제대행학원’ 건당 5만원…전화통 ‘불’
“지금 당장 최대한 빨리 오세요. 바로 일거리 드립니다.”
서울 강남의 ㄱ 과외학원 사무실에서 ‘이선생’으로 불리는 30대 남성이 지난 18일 PC를 이용해 중·고교생들이 의뢰한 방학숙제의 자료를 찾고 있다. /장관순기자
경향신문이 지난 18일 오전 서울 강남의 ㄱ ‘과외학원’에 구직을 문의하자 원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독후감, 글짓기, 탐구보고서 등 방학수행평가(방학숙제)를 건당 5만원에 대행해주고 있다.
이 학원은 방학을 맞아 서울 강남·서초구 일대 아파트에 ‘서울권 대학 내신 50% 반영. 수행평가 전담반에 맡기라’는 내용의 광고전단을 무차별적으로 뿌렸다. 전단에는 “수행평가할 시간에 영어단어 하나 더 외워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한 학부모의 글도 곁들여져 있다.
수행평가는 시험 성적만이 아니라 학생의 과제 수행과정을 평가해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취지로 1999년 도입됐다. 학생들은 이를 ‘점수 매겨지는 숙제’로 인식한다. 수행평가의 내신반영 비율은 서울지역 초·중·고교의 경우 당초 15%였으나 2004년부터 30%로 확대됐다. 여기에 각 대학이 고교 내신반영 비율을 높이면서 학생들로서는 수행평가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됐다.
-“숙제할 시간에 과외집중”-
ㄱ학원 외에 서울 강남 일대 여러 학원에서 학생들의 과제를 대행하고 있다. 포털사이트에도 개개인이 ‘수행평가 대신 해드린다’는 글로 ‘숙제 장사’를 벌이는 판이다. ‘수업 과정을 중시하겠다’던 당초 취지를 무색케 한 채 또다른 사교육 시장이 형성됐다.
아르바이트생을 가장, 잠입 취재키 위해 이날 점심시간쯤 4평 남짓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가 아닌 신사동 주택가에 있는 사무실에는 PC 2대와 각종 중·고교 참고서가 널려 있었다. 공작 숙제용 ‘집 만들기’ 재료 등도 눈에 띄었다. 벽에는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를 권역별로 나눈 지도와 ‘과거 유능했던 선생님’ 명단도 붙어 있었다.
40대 중반의 원장은 “개학이 코앞이라 일거리가 몰려 한창 바쁘다”며 반겼다. 원장과 면접하는 동안 30대 중반의 ‘이선생’이 컴퓨터 앞에 앉아 과제물을 작성 중이었다. ‘과학선생’으로 통하는 30대 여성은 실험 숙제의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갔다. 광고 전단에 명기된 ‘수행평가 전담반’은 원장까지 4명이 전부였다.
원장에게 과제물 주문과 재촉 전화가 잇따라 걸려와 면접은 자주 중단됐다. “실험숙제 월요일까지요. 이 일 12년째입니다. 선생님들과 의논해서 다른 아이 것과 겹치지 않도록 해드리니까 걱정 마세요.”
원장은 “과제물 건당 2만5천원씩 합산해 다음달 17일 월급을 주겠다”고 밝혔다. 사무실 운영비와 광고비 등을 감안해 수입을 반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원장은 일을 맡긴 뒤 ‘출장’을 나갔다. 출장은 사진을 찍거나 숙제를 배달해주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일컫는다. A4용지 20장짜리 영작 논술, A4용지 10장 분량의 직업탐구 보고서 등 4건이 할당됐다. 사무실 안의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해 원장의 e메일로 전송하는 식이다. 원장은 “반드시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작성하라”고 당부했다.
이선생에게는 A4 5장짜리 독후감 등 5건의 숙제가 할당됐다. 과학선생에게 맡긴 숙제 4~5건을 포함하면 이날 하루 주문량은 10건이 넘는다. 단순히 계산해 하루 50만원 이상의 매출인 셈이다.
-일거리 몰려서 구인난도-
이선생의 경력은 불과 이틀이었다. 그는 “지난해까지 1년여 사업하면서 돈은 좀 모았지만, 나이 들어 취직이 어려워서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일이 웬만한 대학과제만큼 어려워 오래는 못하겠다”고 실토했다. 그가 시사했듯 학원은 ‘선생’ 구인난을 겪고 있다. 인터넷 구직사이트에 게재한 구인광고는 이달만 두차례다.
오후 8시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과학선생은 피곤한 기색이었다. 서울 강북지역에 산다는 3년 경력의 과학선생은 “우리 동네 애들은 그냥 점수를 안 받고 말지 이렇게까지는 안 할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선생도 “강남 학부모와 애들이 극성”이라며 “5만원만 주면 숙제 같은 것은 남한테 맡길 수 있으니, 그 시간에 자기 공부나 하겠다는 것 아니겠냐”라고 맞받았다.
원장은 이날 밤늦게 돌아와서도 ‘한밤 출장’을 몇차례 반복했다. ‘선생들’의 야근은 이튿날 새벽에야 끝났지만, 그 순간까지도 원장은 학부모들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장관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