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교실 - 여희숙 선생님의 독서.토론 길잡이
여희숙 지음 / 파란자전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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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지도"란 말도 없던 시절, 30년 전부터 교실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러다 보니 반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되고, 그렇게 20여년 교직 생활을 하다, 교직을 관두시고, 11년 전부터는 독서운동가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계시는 여희숙 선생님! 이런 분들을 아마 선각자라고 해야 되겠지. 30년 전이라 하면 나 또한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시절인데 그 때 학교에서 책은 구경도 못해 봤고, 그러니 교실에 학급문고가 있을 리 만무했고, 독서 지도를 하시는 선생님은 내 학창 시절 12년을 통들어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다. 다만 고1 담임 선생님께서 언제나 책을 끼고 다니시는 걸 보고 책을 많이 읽어야 저렇게 유식하구나! 하고 막연한 동경을 했었다. 그런 시절에 여 선생님은 어쩌면 무작정 좋은 선생님이 되어 보겠다는 그 마음 하나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묵묵히 그 길을  20년 동안 가고, 나처럼 독서 교육을 갓 시작한 후배들에게 등불 같은 역할을 해 주시는 정말 보배 같은 분이다.

 

그동안 여기 저기에 실린 단편적인 글로만 만나뵙다가 이번 독서동호회 모임과 전교직원 연수 때문에 여 선생님의 책을 한 번 정독을 해야 되겠다 마음 먹고 읽게 되었다. 일단 도서실에서 빌려 읽었는데 다 읽고 난 느낌은 책을 소장하고 널리 퍼뜨려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빌린 책이라서 마음대로 줄을 긋지 못하여 제대로 정리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내 책이 되면 공감되는 부분에 밑줄을 팍팍 긋고 인용도 팍팍 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수 때 들었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떠올리면서 읽으니 어떤 마음으로 독서 지도를 하셨는지 선생님의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 읽는 교실이 된 사연은 모든 일이 그렇듯이 별거 아니게 시작되었다.  여자 아이 두 명이 용돈을 모아 선생님께 책 한 권을 선물했단다. 그 책을 쉬는 시간에 잠시 읽었는데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책 속에 빨려 들었다고 한다. 시작종이 울리고 몇 분이 지났어도 선생님은 책에 풍덩 빠진 채 그대로였다고 한다. 시작종이 울려도 항상 소란하던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이 하도 이상해서 스스로 조용해지고, 선생님은 왁자지껄해야 할 아이들이 너무나 조용한 게 이상해 고개를 드셨고, 그제서야 시작종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난 줄 아셨다고 한다. 책에 심취한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이 신기해서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 순간,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토록 재밌게 읽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고, 선생님은 " 책 " 이라고 답해 주셨단다. 책을 구경하기 힘들던 그 시절, 그 아이들은 계속해서 궁금한 듯 선생님께 내용을 물어 봤고, 선생님은 아이들과 게임을 하듯이 아이들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아끼고 아끼면서 책을 조금씩 읽어 주셨다고 한다. 그 사건이 선생님을 지금의 선생님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 때부터 아이들에게 읽어 줄 책을 한 권 두 권씩 사기 시작하셨고, 20여 년 후에는 무려 1000여 권의 개인 소장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신다. 선생님반이 된 아이들은  처음엔 그 많은 책에 놀라서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선생님과 함께 하는 동안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로 변해 갔다고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 책 읽어라!" 가 아니라 " 책 읽어줄까?" 하는 선생님이신데.... 독서 교육이 볼모지였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많은 교사들이 독서 교육이 중요하다고 공감하고, 열정을 가지고 지도하려고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 학급문고이다. 아이들이 항상 생활하는 공간인 교실에 좋은 책들이 넘쳐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좋은 독서환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학교 도서실은 그동안 괄목한 만한 성장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학급문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자각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서 학부모의 도움을 받든지 아님 여 선생님처럼 선생님 개인이 책을 구매한다든지 아님 그냥 교실에 있는 허접한 책들로 대충 시늉만 하든지 식으로 학급문고가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2년 전에 여 선생님이 개인 소장책을 모으시고, 그걸로 학급문고를 운영하셨다는 글을 읽고 마음이 쏠깃했었다. 자비로 학급문고를 마련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기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십일조를 하듯이 선생님이 하나 하나 사 모은 책들로 학급문고를 마련하고, 그걸로 독서교육을 하시는 그 모습이 기부천사를 떠올리게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학교 차원에서 예산을 책정하여 학년 수준에 맞는 학급문고가 교실마다 비치되어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건 예전에는 각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지만 지금은 무상급식이 이뤄지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필요한 책 또한 나라에서, 교육지원청에서, 학교에서 지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부모, 어떤 교사 한 명이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복지국가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때까지 독서 교육을 안 할 수는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학급문고를 마련하기 위해 학부모 도움을 받거나 개인이 책을 구매하거나 등등의 방법이 동원되는 것일 게다. 나처럼 독서 지도를 꾸준히 지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학급문고가 필수품이다. 학급문고 없이 독서지도를 할 순 없다.  그래서 나도 작년부터 부지런히 나만의 학급문고를 모으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 여전히 학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500권 정도 모아지면 나도 여 선생님처럼 개인 도서관을 운영하도록 할 것이다. 적어도 교실에 한 아이당 20 권 정도의 책은 있어야 한다고 독서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500권 이상이 필요하다. 그것도 상, 중, 하 레벨로 골고루 섞여 있어야 한다.자비로 반 아이들을 위해 책을 사모으시는 선생님들을 보면 진짜 존경심이 생긴다. 학교 차원에서 학급문고가 지원되기 전까지는 학부모와 교사가 학급문고 마련을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게 지금의 안타까운 실정이다.

 

여 선생님의 독서 교육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 책 읽어라" 로 출발한 게 아니라 " 책 읽어줄까?" 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사와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 책 읽어라!" 라는 말은 하지만 교사와 학부모가 먼저 " 책 읽어줄까?"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예전의 나도 그랬다. 그런데 여 선생님은 30년 전에 그 일부터 하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 교육의 노하우가 쌓였고, 20년 간 아이들과 함께 해 온 독서교육의 흔적들이 이 책에 모두 담겨 있다. 읽는 내내  ' 정말 열심히 독서 교육을 하셨구나!' '어쩜 그리 여린 몸으로 이 수많은 일들을 다하셨을까!' ' 선생님은 24시간을 마치 48시간인 듯 사용하셨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열심히 사셨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책은 책이라기보다 20년 간 교직 생활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다. 여 선생님이 아이들을 사랑한 기록들 말이다. 그 기록들이 나처럼 이제 막 독서교육의 한 발을 내딛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 독서 교육까지는 그런대로 흉내 낼만한데 전혀 감이 오지 않던 토론 부분도 이 책에 들어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지금은 저학년이라서 시도를 못해 보지만- 여선생님은 저학년도 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서도- 이 다음에 중학년 이상을 맡게 되면 꼭 도전해 보리라 다짐하였다.

 

20여 년 동안 여 선생님의 학생으로 인연을 맺은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내가 여 선생님의 학생이었다면 학부모였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상상해 본다. 선생님으로 인해 책이 그렇게 흔하지 않던 시절에 책과 여러 가지 여행을 경험하였으니 그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왔을까!  주변인 중에서 평생독자인 사람들을 보면 어린 시절, 책 읽어주는 부모님이 있었거나 책 읽어 주는 선생님이 있었거나 하는 것을 자주 본다. 나는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책과 멀게 지냈었나 보다. 지난 번 시민단체 독서운동가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분은 한 교사당 1000명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며 교사 한 분 한 분의 마인드가 정말 소중하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교사가 한 해 맡은 아이들을 요즘 추세로 일 년 당 30명 잡고, 재직 기간을 33년 잡으면 대략 990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셈이다.  그러니 한 교사에게 1000명의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한 부모에게는 많아 봤자 2-3명의 자녀의 미래가 달려 있지만, 교사에게는 1000명의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하지만 학부모는 그 아이의 평생을 책임 지는 교육이기에 장기적이고, 교사는 기껏해야 1년 짜리이기에 단기적이다. 그래서 교육은 교사와 학부모가 상호 보완하면서 이뤄나가야 할 공동 책임인 듯하다. 

 

여 선생님이 말씀이 자신이 1년 동안 열심히 독서 지도하여 진급하여 보내지만 독서 외에 다른 것들을 강조하는 선생님을 만나면 그 아이들이 금방 독서를 까먹는 걸 보고 많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이건 나도 경험한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아마 독서 교육을 해 본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독서의 끈을 놓치 않는 상위 10%의 아이들은 어떤 환경에 놓이더라도 스스로 독서를 하는 습관을 잊어 버리지 않는다. 그런 아이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좋은 독서환경에서 자랐고, 유전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남편 같은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아니지. 인간은 원래 책을 좋아할 수 없는 뇌구조를 타고 났다고 한다.-나머지 50-60%는 부동층이다. 담임과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돌변하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은 교사가 공략하기가 쉬운 편이다.  가장 어려운 상대는 바로 하위 20-30%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좋은 독서환경에서 자라지 못하고, 책과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으며 그랬기에 스스로 책이 싫다고 굳게 믿고 있는 아이들이다. 교사는 바로 이런 하위그룹 아이들을 목표로 삼아 독서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아픈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하듯이 책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교사가 필요한 것이지.

 

이런 하위 그룹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만들고, 평생 독자가 될 수 있게 끊임없이 연구하고, 독서 환경을 마련하고, 그 아이에게 적당한 책들을 추천해 주는 일들을 해야하는 게 바로 교사와 부모의 몫이라는 것이다. 연구 결과 평생독자가 되냐 안 되냐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0-15세 까지의 독서 습관이라고 한다. 태아 때부터 중3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서 교육을 받았을 때 그 아이가 평생독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말이다. 무엇을 배우는 데 결정적 시기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 독서는 0-15세 15년 동안이 바로 결정적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여 선생님 말씀이 초등학교 시기야말로 유아기 때 벌어진 간극을 좁혀줄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하셨다. 이 때 간극을 줄여 주지 않으면 이 하위 그룹 아이들은 평생 책과 담을 쌓은 채로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교사가 한 아이를 15년 간 지도하는 예는 없다. 한 아이를 지속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모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 해야 할 역할이 막중하다는 것을 이 연구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학교 교육에다 사교육까지 아이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 또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생각해 보라.  먹고 사는 것이 힘든 부모가 어떻게 독서 교육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공교육에서만이라도 독서 교육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까도 말했듯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집, 부모가 알아서 독서 교육을 잘하는 집의 아이들은 상위 10% 아이들이다. 우린 하위  그룹의 아이들을 목표로 두고 독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 복지 아니겠는가! 학교에서만큼이라도, 교실에서만큼이라도 다른 아이들과 동등하게 똑같이 좋은 책을 읽을 권리를 누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아이들에게 발전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본다.  

 

 

끝으로 올해가 2012년 국민독서의 해이다.

2012! 하루에 20분씩 책을 매일 읽어 일 년에 12권의 책을 읽자라는 의미가 있다. (성인책 기준)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국민 독서의 해로 정해만 놓고, 예산도 없고, 홍보도 안 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가....

작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일 년 동안 책 한 권도 안 읽는 성인이 10명당 3-4명 꼴이라고 한다.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다. 이 수치도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EBS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작년에 쓰나미가 지나가서 폭삭 주저앉은 일본의 한 마을을 취재한 내용이었다.

그 마을 주민들이 가장 먼저 세운 가건물이 바로 서점이라고 한다.

마을과 집이 불타고, 가족을 잃은 그 슬픔 속에서도 그들이 애타게 책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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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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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작가 김려령의 신작 제목을 처음 듣고 생각난 것은 바로 이 노래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빨리 고해성사를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였다.

 

<완득이>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들은 나처럼 그녀의 신작을 고대하고 있었으리라. 이번에는 고등학교 2학년 민해일 이라는 남학생이 주인공이다. 민해일 이라는 아이를 중심축으로 그의 친구 지란, 진오, 다영, 해일의 가족, 담임 샘이 등장한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에도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는데 완득이의 동주 선생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던지는 한 마디는 의미 있다. 아울러 해일의 가시 고백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해일이의 12살 터울이 나는 형 해철- 스스로를 감정 설계사라고 한다.-이 멘토 역할을 더 많이 감당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결국 해일의 가슴 속 깊이 박힌 가시를 뽑아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바로 지란과 진오 두 친구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청소년들에게는 자신의 가시 고백을 들어 줄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일의 가시는 바로 그의 예민한 손이다. 가발을 만드는 엄마의 예민한 손을 그대로 물려 받은 해일은 그 손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데 사용한다. 그가 일곱 살 유치원 다니던 때 선생님의 지갑에 손을 댄 때부터 시작된다. 그때부터 18살이 될 때까지 해일은 그 곳에 물건이 있기에 훔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물건이 그 곳에 있기에 손이 먼저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을 소개하는 해일의 일기는 약간 섬짓하면서도 마음에 와 닿는다. 해일의 시니컬한 면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도둑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누구의 마음을 훔친거였다는 낭만적인 도둑도 아니며, 양심에는 걸리나 사정이 워낙 나빠 훔칠 수밖에 없었다는 생계형 도둑도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도둑이다. 강도가 아니라 흉기를 지녀서는 안 되며 사람을 해쳐도 안 된다.  몸에 지닌 지갑이나 가방에 손을 대는 소매치기 날치기도 아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그것을 가지고 나오는, 그런 도둑이다.

 

그 날도 옆에 앉은 지란이 새 전자수첩을 학교에 가져 와서 자랑을 하였고, 그걸 사물함에 넣었는데 해일이 그걸 가져와 중고시장에 판다. 그 돈으로 딱히 뭘 하지도 않는다. 해일이 장물애비처럼 훔친 물건을 팔아 흥청망청 써버리는 녀석이었다면 정이 안 갔을 것이다. 하지만 훔친 물건을 팔고 난 돈을 그냥 모으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해일이의 모습에서 스산함이 느껴진다. 자신도 자신의 예민한 손을 어쩌지 못하고 그것에 이끌려 다니는 슬픈 운명이라고 할까? 해일이 처음 물건을 훔쳤을 때 그것이 들통 나거나 한 번이라도 실패한 적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자신의 가시를 고백하고, 빼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의 손은 프로답게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지란의 전자 수첩과 편의점에 있는 전지를 정확히 가져 왔다. 멈추고 싶지만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해일에게서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 지낸 해일의 절절한 외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쿨하다 싶을 정도로 직업 의식이 투철하게 작업하는 해일이 가족과 대화를 하다가 얼떨결에 유정란을 부화시키는 실험을 하겠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 바람에 실제로 유정란으로 진짜 부화 실험을 하는 해일은 도둑질하는 해일과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곤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건 지란도 마찬가지이고, 담임 샘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내면에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11년간 들키기 않고 쿨하게 작업을 하였던 해일에게 점점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것도 지란이를 통해서 말이다. 해일과는 또 다른 가시를 지니고 있는 지란이가 해일과 진오에게 자신의 친아빠 집에 침입하여 물건에 낙서를 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하필이면 그 아파트가 바로 해일의 아버지가 관리소장으로 있는 아파트일 게 뭐람! 이제 해일의 정체가 들통 날 일만 남아 있는가! 정체가 탄로나면 친구들은, 가족들은, 선생님은? 해일이를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완전한 인간이란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크고 작은 가시를 가지고 있다. 해일이가 11년 동안 가시 고백을 하지 못한 것은 두렵기도 하고, 들어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백은 시기를 놓치면 더 말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우린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제라도 자신의 커다란 가시를 고백한 해일에게 박수를 보낸다. 작가의 말처럼 고백은 독백이 아니다. 독백은 혼자서 하는 말이지만 고백은 누군가를 향하여 하는 말이다. 나의 가시를 뽑아 그대로 들려 줄 누군가를 나도,어린이들도, 청소년들도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가시가 뽑히는 순간, 내 몸에 피가 날 수도 있고, 상처가 잘 아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시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그 자리가 곪아 터질 수밖에 없다. 

 

작년말부터 학교 폭력이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사회에서는 학교 폭력을 줄이기 위한 대책들을 쏟아 내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기 보다는 처벌 위주의 것들이라서 안타깝기 그지 없다. 과연 강경한 처벌만으로 학교 폭력이 줄어들 수 있을까? 청소년기에는 다른 때보다 더 뾰족한 가시들이 나와 자신과 상대방에게 상처를 내곤 한다. 그런 그들이 서로에게 가시를 고백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준다면 -마치 해일에게 진오와 지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학교폭력은 지금보다 조금 더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책에 나오는 미연처럼 남의 가시를 들춰서 마구 쑤셔대는 그런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가시를 그대로 인정해 주고, 고백을 들어 줄 그런 진정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청소년기에 존재한다면 우리 학생들이 조금 더 꿋꿋하게 힘든 시기를 견뎌 나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책에 나온 담임 샘처럼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에도 철학이 들어 있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소통이 될 수 있다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힘든 대한 민국의 학생 시절을 좀 더 씩씩하게 버텨내지 않겠나 싶다. 결국 학교 폭력은 학생과 학생, 교사와 학생의 관계 회복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생생해서 이 소설 또한 영화화되어도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러 인물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다 보니 전작 완득이에 비해 조금 산만한 구성이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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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2-16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려령 신작을 벌써 읽었군요. 리뷰로 궁금증을 해소했어요~ ^^
말하는 까만돌을 읽어야 하는데, 요즘 정신 없어서 아직 못 읽었어요.

수퍼남매맘 2012-02-16 14:30   좋아요 0 | URL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 신작을 먼저 접하게 되었어요. 벌써 1만부를 돌파하였다고 하네요. <말하는 까만돌>도 아주 좋아요. 강추입니다.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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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많은 분들에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청소년소설 <완득이>가 영화화되어 요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 영화를 보고 싶지만 먼저 원작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펴 들었다. 

첫 장 부터 똥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완득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똥주는 완득이의 담임 선생님이다. 어떤 사연이 있길래 교회도 안 다니던 완득이가 오로지 그 기도의 간절함 때문에 교회를 찾게 되었나 싶다. 똥주와 완득이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옥탑방에 살고 있는데 매일이다시피 " 야 이 씨불놈아, 햇반 하나 던져!" 이러는 조폭선생이다. 기초수급자라서 받는 물품인 햇반을 거의 강탈해 가는 수준이라니. 반 학생들에게 어미마다 욕을 붙여대는 것은 예사고, 수업 시간에 공부도 제대로 안 가르친다. 누가 봐도 이상한 선생이다. 

이런 똥주가 완득이에게 처억 달라붙어 매일밤 햇반 달라고 악을 쓰고, 친어머니의 소식을 전해 주고, 반에서 1등하는 윤하가 너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주고, 구타로 인해 경찰서에 잡혀간 완득이를 위해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라며 변론을 해 주는 등 알수 없는 행동들을 해 댄다.  그리고 급기야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똥주 선생이 구치소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렇게 죽여달라고 기도했던 완득이는 똥주 선생을 면회 간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놀라운 재미을 가진 소설이었다. 소설 읽으면서 키득키득 웃기는 처음인 듯하다. 캐릭터가 살아있어서 영화화되기에 정말 안성마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똥주 선생 역을 김윤석씨가 맡았다니 정말 딱이다!!!  완득이를 둘러싼 나머지 인물들-아버지,삼촌,어머니, 앞집 아저씨, 윤하 등등 의 캐릭터도 개성이 넘쳐서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게끔 만든다. 재미는 기본으로 깔려 있고, 감동도 있으며, 시사하는 점도 있다. 영화는 어떻게 이 재밌는 소설을 표현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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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11-2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책에 나오지 않는 인물도 등장하고~ 영화로도 괜찮은 흥행성적을 내고 있지요.^^

수퍼남매맘 2011-11-21 20:44   좋아요 0 | URL
영화도 보고 싶어요. 보게 되려나 미지수지만요. 남편과 함께 영화본 지가 언젠지... 까마득하네요. 이번에도 혼자 보기는 싫은데....
 
불량한 주스 가게 - 제9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49
유하순.강미.신지영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동화를 읽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언어 부터가 확실히 달라진다. 초딩들이 쓰는 언어와 중딩, 고딩들이 쓰는 언어는 천지차이다. 주로 초딩만  상대하는 나로서는 많이 낯설고, 어색하다. 머지 않아 울 수퍼남매도 중딩, 고딩 시절이 올 테니 이런 소설집을 통하여 예습 한다 생각하며 읽고 있다.  주변분들이 요즘 아이들이 사춘기를 장난 아니게 예민하게 보낸다고 하니 조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때는 사춘긴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었는데.... 

푸른문학상을 수상한 신인작가의 두 개의 작품과 초대 작가 두 명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집이다.  

겉표지부터 시선을 잡아 끈다. 의자에 다리를 쩌억 하니 벌리고 불량스럽게 앉아 있는 남학생의 모습에서 뭔가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무엇에 대한 불만일까? 사회, 부모, 성적, 아님 자기 자신?

표제가 된 <불량한 주스 가게>는 주스 가게의 이름이다. 수술 중에 아빠가 돌아가셔 생계를 위해 주스 가게를 하시는 엄마와 단 둘이 사는  "나" 는 얼마 전에 학교 폭력 사건으로 인하여 정학을 맞았다. 매일 절절한(?) 반성문을 써서 담임께 보내지만 학교로 복귀하라는 말은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던 중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주스 가게를 맡기며 며칠 간 여행을 다녀오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여 엉겁결에 주스 가게를 맡게 된다.  울며 겨자 먹기로 주스를 만들고 장사를 하는데 여행 갔다던 엄마가 실은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입원실까지 찾아가 보지만 알은체 하지 않고 그냥 온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각자 할 일을 한다.이게 무슨 가족인가 싶기도 하지만 가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엄마에게 아들은 " 엄마, 왜 나한테 가게를 맡겼어?"  라고 묻고 엄마는 " 널 믿고 싶었어 " 라고 대답한다. 매일 절절하게 반성문을 써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던 담임이 그 날 써 보낸 반성문을 보고는 학교에 돌아오란다.  전에 썼던 반성문들과 마지막 반성문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예전에 봤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건 프리먼이 집행유예 심사에서 매번 부적합 판정을 받다가 마지막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걸 솔직하게 적었을 때 적합 판정을 받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두번 째 작품은 정말 신선 그 자체였다.  <올빼미, 채널링을 하다 >라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 " 올빼미"란 별명을 얻게 된 "나"는 우연히 들린 편의점에서 채널링에 대한 책을 보게 되고 알바 대학생과 함께 채널링 동호회에 가게 된다. 우주인과 대화를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모임에 참석한 " 나"는 채널러가 되기 위해 복식 호흡도 하고 노력을 꾸준히 하지만 매번 허탕이다. 그런데 어느 날 교실에서 어학기가 도난당한 사건이 생기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 온다. 우주인이 아니라 어학기를 훔쳐 간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채널러가 된 나는 그 다음 지하철에서 폭탄을 가지고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회에 불만을 가진  그 자는 지하철을 폭탄으로 날려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고, 그 순간 나는 채널러가 된다는 것은 꼭 짜릿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나와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선 범인과의 대화를 시도하여 범인으로 하여금 폭탄 테러를 중지하도록 하는 길밖에 없다. 범인의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된다. 남들이 하는 말이 듣기 싫어 귀를 막아 버리는 바람에 올빼미가 되어 버린 나는 이제정반대로 폭파범의 목소리에 온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범인이 들려 주는  과거 회상은 "누군가 나의 말을 진정으로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살아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라는 희망을 전해 주는 듯하다. 

나머지 초대 작가들의 두 작품 또한 새롭고 재미 있었다. <프레임>은 지금 고딩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잘 반영해 주고 있어서 조금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답안지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마킹을 하지 않은 문제로 학부모끼리 신경전이 오가며 교무회의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스개 소리 같이 내신 때문에 친구에게 노트 필기한 것조차 빌려 주지 않은 세상이라고 하더니....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자퇴를 결심한 친구의 모습이 오히려 더 자유로워 보였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힌 채 살아가는 우리 나라 학생들이 참 불쌍하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고3때만 좀 세게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는데... 요즘 학생들은 초딩 때부터 공부에 찌들어 살아야 하니.... 가련하다. " 나" 가 앞 부분과 뒷 부분에서 급식소 아주머니들의 집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변한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 <텐텐텐>은 반전이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네 편 중에서 그나마 가장 따뜻하다고 할까? 반전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바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것이다. 읽으면서 전혀 예상지 못했는데 나중에 그런 관계였다니....세상에 수미 누나 같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다가오는 겨울이 덜 춥게 느껴질텐데..... 수미 누나가 왜 영하15도 되는 날씨에도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다니는지 궁금하다면 수미 누나와 " 나"의 사연을 들어 보길 바란다. 

그러고 보니 네 편 모두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져 있는데 주인공 모두 마음 속 깊이 박힌 옹이가 있다.  때로 그 옹이는 불량스럽게 행동하게도 만들고, 일탈마저 감행하게 만든다. 어른도 옹이가 있으면 행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하물며 청춘은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그럴 때 그들이 갖고 있는 옹이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 주고 진정으로 위로해 주는 "수미 누나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결코 자신의 삶을 밑바닥에 내던지려고 하지는 않겠지. " 널 믿고 싶었어" 라고 말하는 엄마의 마음이 그동안 얼마나 속이 숯처럼 검게 타들어 갔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청춘들을 기다리고, 믿어 줄 사람은 결국 가족 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피도 섞이지 않은 수미 누나도 가족이었기에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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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7일 전쟁 카르페디엠 27
소다 오사무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같은 반 남자 아이 22명이 한날 한시에 사라졌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사라진 아이들은 폐허가 된 공장에 그들만의 해방구를 만들고 어른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설상가상으로 유괴된 아이도 한 명 있다. 아이들은 왜 방학식 날 이런 일을 벌였을까? 아이들은 해방구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해방구에 들어간 아이들의 7일 간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현재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16년 전 그들의 부모가 젊었을 때 전공투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일본 작가가 만든 이야기이지만 지금 우리나라 현실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일본도 우리나라도, 현재도 과거도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1985년에 출간된 이 책의 상황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과 어쩜 이리 닮아 있는지....현재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렇게 해방구를 만들어 하루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 아님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끔 너무 그들의 사고를 옥죄어 버린 것은 아닐는지....

 

중1 남학생 22명이 해방구에 온 것은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도 , 이상, 포부, 하다 못해 반항심 같은 것들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처음엔 단지 재미 삼아 그렇게 모인 것이었다. 책에 나온 대로 본능적으로, 본능에 따라 거기에 모인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방구의 의미를 찾아 가고, 갖은 폭력을 일삼던 꼰대들을 혼내 주고, 유괴 당한 친구를 멋지게 구해 내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며, 정치적 비리의 순간을 포착하여 만방에 생중계로 알리는 등 그들이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마지막에는 굉장한 일들을 해 내고 만다. 순전히 그들만의 힘으로 말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각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해방구에 있는 아이들과 맞서는 사람들과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맞서는 쪽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무조건 억압하고, 무시하고, 협박하는 부류들이며 반대쪽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특히 해방구에서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던 할아버지와 아이들의 관계가 변하는 모습은 참 의미가 깊다. 아이들과 할아버지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의 어른들은 그 둘을 핍박하는데 아이들과 할아버지는 서로 연대하여 그 어른들과 맞서는 형국이다. 마지막 아이들이 진정으로 할아버지에 대해 고마운 감정을 전할 때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또 보건 교사는 어떤가! 매일 자신의 사비를 털어 아이들 간식을 마련해 주고, 아이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준다. 반면 보건 교사를 짝사랑 하는 체육 교사는 아이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 아이들을 잡기 위해 보건 교사까지 협박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해방구 아이들을 놓고 어른들은 두 편으로 대립한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편이었을까 생각하며 읽으니 더 흥미롭다.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으로 존재하고 싶냐는 결국 어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는 바로 해방구 아이들의 부모 또한 대학 시절 전공투 출신들이 꽤 여럿 있지만 그들 부모 또한 여느 부모와 같이 아이들에게 다른 부모들이 강요하는 것과 똑같은 것들을 강요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피가 뜨거웠던 젊은 시절 정의를 위해 불의와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그들 또한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적당히 속물이 되어 세상적 출세를 강조하며 살고 있었고 해방구에 들어간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 한다. 결국 그들 또한 전공투로 활동한 그들의 과거를 잊은 채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택했고, 자녀들을 제도권에서 출세하는 아이들로 키워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로 살기로 선택했다.

 

전공투 출신의 부모님과는 사뭇 대조적인 인물이 바로 할아버지다. 세계대전에 직접 참가하여 실제로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있는 할아버지는 그 가슴 아픈 전쟁으로 인해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상흔을 입었다. 집도 없이 페허 공장의 시궁창을 통해 드나들며 공장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할아버지를 인생의 패배자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가락이 잘려 나갔을망정 마음은 온전하다. 아니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다고 할까! 그래서 할아버지는 진정으로 아이들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도와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보면서 얼마 전 읽었던 <분노하라>가 자꾸 생각난다. 아이들이 해방구에 들어선 첫 발자국은 단순히 재미였지만 그곳에서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그들은 정당한 분노를 하게 된다. 분노는 인간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인성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부디 우리 아이들이 공부에 찌들어 마땅히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사건과 사회 부조리를 꼬집는 이야기들, 그리고 마지막 결말까지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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