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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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었다. 그중에서는 너무 큰 좌절을 맛보아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주변의 비난이 너무 심해서 사람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나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이 너무 후회가 돼서 스스로 자책감에 빠지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를 찾게 되었다. 낙심하고 지친 모습으로 찾아간 나를 어머니는 그때마다 반겨 주셨다. 그리고 '괜찮다!' '다시 하며 된다!'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 이런 위로와 용기를 주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품에서 쉬고 나고, 어머니의 위로의 말을 듣고 나면, 다시금 힘이 나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영원한 내 편이었고, 내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존재였다.

마야 안젤루는 무용가이자 가수이며,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그녀는 또한 흑인과 여성 인권운동에 헌신한 미국 흑인들의 정신적인 스승이기도 하다. '오프라 윈프리'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멘토로 꼽기도하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에 한 명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너무나 불우했다. 그녀는 어려서 이혼한 부모님 품을 떠나 세 살부터 13살까지 아칸소에 있는 친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중간에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어머니에게 간 적이 있지만, 그곳에서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16살에는 미혼모로 아이를 낳고, 그 후에도 여러 풍파를 겪으며 이 아이를 키웠다.

사실 그녀가 유명한 예술가이자 문학가, 그리고 세계적인 인권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 책의 초반에 자신이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어머니'라는 존재에서 찾는다.

나는 종종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백인의 나라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는데, 돈이라면 다들 사족을 못 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가 되려 하는 사회에서 가난뱅이로 태어났는데, 겨우 대형 선박과 몇몇 기관차에 여성형 대명사를 쓰면서 생색내는 환경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마야 안젤루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나오는 흑인 소녀 톱시의 말을 따라 하고 싶어진다. "몰라요, 그냥 이렇게 컸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내가 단 한 번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십 대 초반에 그 책을 읽고 무식한 그 아이를 보며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런 여자로 성장한 것은 사랑하는 할머니와 흠모하게 된 어머니 덕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9)

사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레이디'로 부르고, 장성한 후에 주로 '비비안 여사'로 부르는 마야 안젤루의 어머니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기에 그렇게 훌륭한 어머니는 아니다. 그녀는 거친 흑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남성들과 함께 주먹다짐을 하며 자랐다. 어린 마야와 오빠를 어린 나이에 할머니에게 보냈고, 5살부터 청소년 시기까지 중요한 시기를 어머니와 떨어져 보낸 오빠는 끝내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을 마약 중독자로 살았다. 마야와 함께 살면서도 마야의 잘못된 행동에 손이 먼저 나가기도 했고, 도박장과 당구장, 술장사를 하며 거친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야의 어머니는 항상 마야에게는 커다란 그늘이고 우상이었다. 그녀는 흑인이 무시당하고, 여성이 차별받는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자신의 것의 권리를 찾는 삶을 살았고, 딸에게도 그런 삶을 살 것을 조언했다. 어느 날 마야의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갓 흑인의 입장이 허락된 호텔을 찾아간다. 직원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당당히 호텔 로비로 들어가 자신신이 예약한 객실로 딸과 함께 들어간다. 객실에서 마야는 어머니의 가방에 38구경 리볼버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의아해하는 딸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조언한다.

"호텔측에서 인종 통합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본때는 보여줄 참이었다. 얘야, 맞닥뜨리게 될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자세를 길러야 해.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마.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고, 거기에 네 목숨을 걸 태세를 갖춰라. 네 입으로 한 이야기는 뭐든 다시 한번 반복할 수 있어야 해. 그러니까 한 번은 네 방 벽장 안에서, 또 한 번은 시청 앞 계단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이십 분 동안 모은 청중 앞에서 말이다. 뉴스감이 되려고 그래선 안 된다. 너와 네 이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언제나 네 이름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려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해. 안 좋은 상황이 닥칠 때마다 폭력을 쓰겠다는 협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네 머리로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그런 다음 용감하게 그 해결책을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P184)

무엇보다도 마야의 어머니는 이 자신의 딸을 믿고 응원해 주었다. 마야가 17살에 미혼모로서 아들을 낳고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에도 마야의 어머니는 그녀를 믿고, 그녀에게 힘을 준다.

한 블로 반쯤 지났을 대 필모어 스트리트와 풀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의 피클 공장에서 풍겨오는 시큼한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나는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얘"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어머니 옆으로 걸어갔다.
"얘,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제 분명히 알겠구나. 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대단해."
나는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걸고 은색 여우털 목도리를 두른 그 아담하고 아리따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샌프란시스코 흑인 사회의 대다수가 우러러보고, 심지어 백인들까지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여인이었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는 마음씨가 아주 착하면서도 아주 똑똑하잖니.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메리 맥리오드 배순 박사 그리고 내 어머니, 그래. 넌 그런 사람이야. 자, 키스해주렴."
-중략-
입안에서 아직도 빨간 쌀밥 맛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욕을 하는 나쁜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술과 담배는 몇 년이 흐른 뒤에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욕은 그 즉시 고쳤다.
생각해봐. 내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잖아. 언젠간 말이지.(P111-2)

마야 안젤루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세상과 맞서 싸운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그럼에도 그 싸움이 너무 지치고 용기가 나지 않을 때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비행기 값을 보낼 테니 당장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딸이 오면 항상 딸을 반기고, 딸에게 힘을 준다. 후에 마야 안젤루가 성공을 해서 스웨덴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할 때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무 심한 반대를 당해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비행기 표를 사드릴 테니 당장 내일 이곳으로 와 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렇게 딸에게 달려간다. 어머니가 주는 위로와 용기로 마야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고 마친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주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한 명만 있다면, 누구나 어떤 진흙 구덩이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젠 나도 그런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버이의 날이 포함되어 있는 5월에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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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와후와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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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대부분의 삽화를 담당한 안자이 미즈마루가 쓴 고양이에 관한 책이다. 하루키의 고양이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의 공간은 대부분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현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가혹하고 냉철하며, 인간성을 말살해 가는 세계이다. 또 하나는 상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잃어버린 세계이다. 그러나 후자의 세계는 항상 하루티의 소설 속에서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진하게 그 세계를 그리워한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는 이런 현실의 세계와 상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해 주는 것이 고양이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태엽갑는 새]라는 작품이다.


그만큼 하루키의 소설에서 고양이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책을 읽다보며 하루키의 고양이에 대한 추억을 읽을 수가 있다.



"나는 온 세상의 고양이를 다 좋아하지만,

지상에 사는 모든 종류의 고양이 중에서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 - [후와 후와] 중에서



"고양이털은 이미 해의 온기를 잔뜩

머금은 채, 생명이란 것의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관해

내게 가르쳐준다." - [후와후와] 중에서



"그 고양이는 폭신폭신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털을 가졌다. 그 털은 아주 옛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온기를 한껏 빨아들이고,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후와후와] 중에서

 


 


예전의 하루키의 에세이집처럼 글이 많거나 그림이 많은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어린이 동화책과 같은 분위기를 내는 책이다. 마치 한 편의 긴 시와 함께 그림이 곁들인 책과 같은 분위기도 낸다.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조합은 그동안 계속 되어 왔었다. 무언가 초등학생 분위기가 나면서도 심오함이 담겨있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들을 좋아한다. 우리 나라 '이말년 작가'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래는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조합이 담김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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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사 - 고대 로마에서 G2 시대까지 제국은 어떻게 세계를 상상해왔는가
제인 버뱅크.프레더릭 쿠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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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들을 발견됩니다. 우리가 이 진리들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제국들의 역사를 이 책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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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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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읽은 단편소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한 문예지에 김훈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다.

노량진 입시촌을 배경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담담한 필치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벼랑끝에 몰린 젊은이들의 삶과 내면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읽는내내 더 마음이 아프게 공감이 갔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너무나 먹먹해서 한 참을 그 소설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작가는 나름 꽤나 성공하고 유명세를 누리고 있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젊은이의 아픔에 대해서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연말이 되어서 작가가 새로 출간한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저자 역시 처절한 시절을 살았고, 비록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 처절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과 타인의 삶, 그리고 주변의 것들에 대해 소설처럼 담담한 필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돈과 그 돈으로 오는 처절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돈을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돈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모두 돈을 벌어야 한다.

저자는 그 돈벌이에서 오는 아픔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돈벌이를 인간의 숙명으로 여긴다.

마치 성경에서 에덴 동산에 쫓겨난 아담에게 하나님이 내린 숙명처럼......

 

죽변항의 낡은 어선을 바라보면서 나는 수 천년 전 이 항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신석기 사내들과 그들의 고기잡이 도구를 생각했다. 그들의 돌도끼와 돌칼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박물관에서 본 신석기의 돌도끼는 그 손잡이 부분이 인간의 손바닥에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그 돌도끼를 쥐고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이던 사내들의 고난과 희망, 사냥에 실패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저녁의 슬픔, 비 오는 날 그 신석기 사내들의 몸의 비린내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그 사내들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P54)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P178)

 

 

저자는 단지 돈벌이만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애잔하게 바라본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딸을 바라본다.

특히 [광야를 달리는 말]이란 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애잔한 글을 보고, 나 역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했다.

어찌보면 시대의 흐름에 밀려서 야인처럼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는 글이었다.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P37)

 

내가 중고교를 다닐 무렵에, 아버지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다가 다음날 또 어디론지 나갔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어디로 다니시는지를 묻지 않았고, 엄마는 아예 아버지를 상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미워했찌만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오면, 나는 아버지가 누운 건넛방 아이에 장작을 때서 방을 덥혀드렸고 아버지 방에 들어가 요 밑에 손을 넣어서 바닥이 따스해졌는지 확인했다. 아침에 냄비를 들고 돈암동 시장에 가서 선지해장국을 사와서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사온 해장국에 목이 메는지 잘 드시지 못했고, 엄마는 내가 하는 짓을 보면서 "사내놈들은 다 똑같다. 다 한통속이다. 저 놈도 자라면 제 아버지처럼 될 놈이다."라면서 울었다.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싸우면, 나는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엄마한테 대들었는데, 엄마는 더 크게 울었다. 가난은 그 끝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가난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P39)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 애잔하다.

 

딸아이는 어렸을 때 침을 많이 흘렸고, 늘 젖을 토했다. 두 돌이 지나도록 턱밑에 수건을 매달았다. 안아주면 늘 삭은 젖냄새가 났다. 나는 그 젖냄새에 늘 눈물겨워했다. 이것이 내 혈육이고 내가 길러야 할 내 어린 자식의 냄새로구나, 내가 배반할 수 없는 인류의 냄새로구나......(P139)

 

술취하고 피곤한 저녁에, 잠든 아이의 머리에 코를 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때때로 슬펐다. 내 슬픔은 결국 여자의 태에서 태어나서 다시 여자의 태 속에 자식을 만드는 포유류의 슬픔이었다. 여자의 태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생명을 빚어내는 슬픔의 요람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자라서 또 여자가 되었다. 결혼해도 좋을 만큼 자란 여자 성인이 된 것이다.(P140)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부대끼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살다가 자신의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재능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운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그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부대끼는 삶에서 벗어나 남보다 조금 더 위에 서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부대끼던 삶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그 위에 군림한다.

같이 아파할 수는 없는 걸까?

같이 부대끼고 같이 힘들어하지는 않아도 같이 아파할 수는 없는 걸까?

마음만이라도 같이 아파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걸까?

이 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뛰어난 다른 작품들을 제쳐놓고도 아픈 사람들과 같이 아파하는 이 글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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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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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좋아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과 사람 안에 감춰있는 다른 세계를 보는 그의 예리한 시각에 항상 공감하며 감탄을 해 왔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좋아해서 많이 읽어봤지만 그의 여행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리포트와 오스트렐리아 여행기가 믹스된 하루키만의 감성을 잘 녹아져 있는 여행기이다.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태엽갑는 새]에서 주인공 '오카다'는 아내가 사라진 이후부터 점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1Q84]의 '아오마메'는 막히는 고가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비상용 사다리로 내려오다가 현실의 세계와는 다른 1Q84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최근에 한국에서 발간된 [애프터다크]라는 소설에서는 '에리'는 텔레비젼 속 이상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하루키에게 오스트렐리아와 시드니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시베리아 툰드라 풍경이라든가, 아바리바 사막 풍경에도 꽤 거칠고 초현실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 주의 깊게 보다 보면 나름대로 이해가 갔다. '이곳은 이런 풍포여서 이렇게 됐구나' 하고.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풍경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기묘하다. 한눈에 봐도 기묘하다. 그런데도 기묘하다는 것의 개연성을 찾기가 힘들다.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내가 점점 다른(잘못된) 차원으로 이끌려가는 듯한 기묘하고 초라한 느낌이 든다. 팀 버튼의 영화의 한 장면처럼. (P38)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루키의 시각은 단순히 기묘한 호주의 풍경뿐만이 아니다.

하루키는 그의 소설에서 항상 거대하고 조직화된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조직화된 것이 점점 세계와 개인을 삼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시드니 올림픽을 보는 하루키의 시각도 마찬가지 이다.

그는 남들은 모두들 못봐서 안달인 10만엔 짜리 올림픽 개막식을 출판사의 후원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지루한 것들은 꽤 많지만, 단언컨대 올림픽 개막식은 그 중 톱3에 들 것이다' 라는 것이 나의 명확한 견해다. 지루한 데다 무의미하다.(P95)"

그리고 10만엔이면 차라리 아이맥을 사겠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개막식 중간에 나와 버린다.

그가 이렇게 개막식을 싫어하는 것은 올림픽의 화려함과 상업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생각때문일 것이다.

시드니 올림픽에 후원한 코카콜라는 올림픽 관람객들이 팹시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요청하는 헤프닝까지 벌인다.

하루키는 노트북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냐는 보안직원의 말에 '이건 페시야!'라고 대답하며 올림픽의 상업주의를 비웃는다.

그는 화려한 경기장이나 이것을 유지하기 위한 후원보다는 차라리 그가 항상 즐겨찾는 일본의 고시엔 야구장처럼 아테네에 모여 소박하게 경기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육상경기에서도 치열한 기록단축과 신식장비 보다는 소박하게 뛰면서 경쟁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 항상 잊혀진 예전 것을 그리워하는 하루키의 감성이 올림픽 관전에서 은연 중에 나타났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히 올림픽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키하면 떠오른 것이 야구, 맥주, 재즈, 그리고 달리기이다.

그의 [예스터데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도쿄 출신의 남자가 간사이의 한신타이거즈를 응원하기 위해 간사이 사투리를 치열하게 배우는 장면이 나올 정도이다.

하루키 역시 한신타이거즈의 펜이며, 일본 야구의 성지라는 고시엔 구장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의 달리기 사랑은 유별나서 전 날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아침에는 꼭 조깅을 한다고 한다.

그런 그의 육상과 야구에 대한 사랑이 이 책에도 등장한다.

시드니 올림픽의 육상경기, 특히 남녀 마라톤 경기에 관심이 많으며, 야구 경기를 꼭 찾아서 본다.

 

특히 마라톤 경기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이 책의 초반부터 아리모도 유코나 이노부시 다카유키에 대한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듯이 마라톤과 선수들에 대한 관심을 특별나다.

특히 그는 메달을 따지 않았지만 자신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들을 응원한다.

이노부시 선수의 경우 올림픽 메달 유망주로 기대를 받고 있었지만, 지나친 부담감으로 인해 중도에 경기를 포기한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이 선수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지만 이 책에서 하루키는 따스한 시선으로 이노부시를 위로한다.

 

야구에 대한 감상은 더욱 흥미롭다.

특히 한국과의 두 번이나 대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대성'선수도 언급하고 있다.

이 두 번 경기에서 일본은 모두 한국에게 패했고, 특히 마지막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너무 아쉽게 패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팀에 대한 조롱이나, 자신의 팀에 대한 비난이 없다.

그냥 야구팬으로서 야구를 즐길뿐이다.

그러 그의 여유롭고도 담담한 스포츠 사랑이 부럽다.

 

이 책에는 시드니 올림픽 관전기뿐만 아니라, 오스트렐리아의 문화나 환경, 동물들에 대한 묘사도 많이 등장한다.

특히 하루키 나름대로 오스트렐리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한 부분을 할애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챕터 제목도 '정신병리학적으로 본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오스트렐리아 역사를 생각해 보고, 현재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이해하게 해 주는 글이다.

하루키만의 시각과 감성으로 오스트렐리아를 여행하고, 시드니 올림픽을 다시 관전하고 싶다면 꼭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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