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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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마을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마을에서 보면 그냥 민둥산이었지만, 도로 쪽에서 보면 포클레인과 중장비들이 언덕을 깎고 있는 절벽이었다. 절벽 위에서 채석장 밑을 바라보면 커다란 포클레인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 아득한 높이였다. 마을에서 큰 도로로 나가기 위해서는 채석장을 한참 돌아야 했다. 채석장의 절벽 위로 지나가는 짧은 길이 있기는 했지만, 위험해서 어른들이 절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는 길이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채석장 절벽 위의 작은 길을 책가방을 메고 아무런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한쪽은 언덕이었지만, 다른 한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었다. 다행히 언덕 쪽으로 넘어졌기에 손바닥만 찢기는 정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는 몰랐던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아득한 절벽 속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을 살면서 그때와 비슷한 감정을 몇 번이나 느껴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걷고 있지만 내 삶의 한 쪽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그 절벽으로 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삶이 송두리째 절벽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과 상실감을 몇 번이나 경험한 후에야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절망감과 상실감을 표시 내지 않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 절벽에 떨어졌을 뻔했던 그날도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걸어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학교에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손홍규 작가의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라는 산문집을 읽으며 그렇게 절벽 속으로 떨어지는 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되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살아왔던 그의 삶에서 느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과 상실감을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어떤 때는 그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책장을 덮고 한참을 멍하게 있어야 했다.

 

 

책에서는 작가가 느꼈던 그 감정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다. 그의 어린 시절 집에는 소가 한 마리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생각하듯 그도 소와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소가 무례한 인공수정사에게 억지로 인공수정을 당하고, 송아지를 낳고, 또 팔려가는 과정 속에 그는 커다란 상실감을 경험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른들이 겪었을 절망감을 떠올린다.

 

 

“우시장 초입의 국밥집에서 호기롭게 거간꾼에게 한턱을 낸 뒤 잔뜩 취해 돌아오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취하지 않고서는 갔던 길을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 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뒤 소머리 국밥집에 앉아 방금 떠나보낸 소를 생각하며 소주를 마시지 않고서는 길눈조차 어두워지고 마는. 생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허둥대는 그들처럼 아버지 역시 취해야 돌아올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P 19)

 

 

그는 이런 절망감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에서도 발견한다. 아버지가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하던 날,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는 순간도, 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순간도, 그리고 예정보다 몇 시간이 지나서 생사를 오가는 순간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분노로 바뀌어가는 순간, 그는 건물 구석 벤치에서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혼자 두려움과 절망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잘리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어른에게 아버지가 탈곡을 하다가 손가락이 탈곡기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린 손에 붕대를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터로 나갔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작가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느꼈던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이토록 진부하게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손가락을 잃은 뒤로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절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 (P 75)

 

 

그가 타인의 눈에서 느꼈던 그 절망감은 단순히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서 만이 아니다. 그는 절망감에서 버티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손가락이 잘린 후 논을 팔고 트럭을 사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말주변이 없었던 아버지는 매번 실패를 했고, 그때마다 절망 속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아버지의 장사를 따랐다가 아버지에 무능력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썩인 감정으로 돌아왔던 저녁을 떠올린다.

 

 

“고창 읍내에서 고향 집까지 가면서 내가 보았던 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전조등이 비친 만큼만이 열려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면 그 공간 역시 어둠에 잠겼다. 끝도 없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가면서 아버지의 삶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기분이었다. 차갑고 드문 어느 골목 초입에 결코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을 늘어놓은 노점상 앞을 지날 때거나 퇴직금으로 장사를 시작한 게 분명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가 자신들의 가게 구석에 시름에 잠겨 멍하니 앉은 걸 보게 되면 그이들이 서 있는 경계, 그이들이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 없지만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그날 선 자리에 발바닥을 베이지 않고 부디 오래오래 서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P 205-6)

 

 

한 해를 마감하며 다들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단지 뉴스에서만 듣는 소식이 아니다. 주변의 사업을 하는 친척이나 장사를 하는 지인들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빛으로 모든 것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때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저히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말하는 그 절망감과 상실감이 바로 그 눈빛이었으면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책에서의 작가처럼 바래 본다. 절망에서 빠진 이들이 삶의 경계에서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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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산다는 것 - 불필요한 감정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양창순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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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점점 자극적인 음식보다 담백한 음식이 좋아진다. 예전에는 무언가 얼큰하고 톡 쏘는 맛을 좋아했다면, 점점 깔끔하고 편안한 맛을 좋아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만났을 때 '저 사람 참 좋다!' '저 사람 참 재미있고 성격이 유쾌하다!'라는 느낌보다, 조금 무뚝뚝하고 어색해도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가는 깊이 있는 관계에 끌린다. 그러려면 나 자신이 담백해져야 한다. 우선 나에 대해 한결 더 너그러워지고, 타인에 대해서도 한결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담백하게 산다는 것]이란 책은 이런 담백한 삶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통해 유명한 저자는 담백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요즘은 물건을 봐도 포장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포장지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모아두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식당에 가보면 음식에 화려한 장식을 하는 곳이 참 많은데, 처음에는 감탄하다가도 먹고 난 후에는 오히려 그 화려함이 부담스러운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그처럼 화려한 음식을 먹고 집에 돌아온 날에는 오히려 물에 찬밥을 말아 김치 하나, 짠지 하나를 얹어 먹고 나서야 '아, 시원해! 이 맛이야!'라고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상대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화려하게 포장된, 부자연스러운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일단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하면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된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면서도,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고 떠날까 봐 두려워서이다. 그런 모순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이는 임상에서 내가 늘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P 41-2)"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분노하고 미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상대에게 실망한다고 말한다. 이런 넘치는 인간관계에서 사람들은 지치고 힘들어한다. 저자는 이런 넘치는 인간관계가 아닌, 한 발자국 떨어져 거리를 두면서 나와 남을 볼 수 있는 담백한 인간관계를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변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도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의 변화이다. 자신 안에 있는 병든 감정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마음, 자신 안에 있는 불안한 마음, 자신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욕심과 분노나 열등감 같은 마음들, 이런 마음들을 들여다보고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마음이 아닌, 유연성 있는 마음, 내려놓는 마음을 가지기를 권한다.

"실제로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사람일수록 관계 속에서 바라는 것이 많다. 즉 기대치가, 높다는 뜻이다. 언제나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하고, 내가 모임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나를 최고로 좋아 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인간관계에 대해 느끼는 환상에 가까운 기대치를 들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 마음이 일으키는 병폐도 크다.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내려면 거기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돈도 커지기 때문이다. (P 77)"

"우리는 흔히 '나는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안다. 내가 나를 들볶고 못살게 꿀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너무 자주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과거에 한 일로 스스로를 비난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미래를 살아갈 자신이 없어 세상과 단절하고, 끊임없이 '난 자신이 없어. 나 같은 건 살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힌다. 반대로 지나친 욕망과 욕심으로 자신을 파괴시키는 것도 나 자신이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P 115-6)"

'나는 어떡해야 한다!'라고 스스로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신에게 학대하는 경우가 많다. 또 상대가 이러해야 한다고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실망하고, 비판하는 경우도 많다. 저자는 담백한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마음들을 내로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고, 상대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고, 현재의 인간관계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낙엽이 떨어지고,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기가 되면 조용히 한 해를 돌아보고 싶어지는 욕구가 생긴다. 이 책을 읽으면 한 해 동안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상처 입었던 마음이나,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었던 완벽주의적인 감정 등을 생각해 보게 된다. 복잡한 삶에서 잠시의 여유로움을 통해 인간관계와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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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소설가 - 대충 쓴 척했지만 실은 정성껏 한 답
최민석 지음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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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 고민에 대한 진지한 답을 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가끔 타인의 고민을 들어주어야 할 때가 있다. 가벼운 고민이라면 잘 들어주고 나름 해결책도 제시하지만, 무거운 고민일 때는 경우가 다르다. 자신의 일생에 중대한 선택의 문제나,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두운 문제를 이야기할 때면, 과연 내가 상대의 고민과 인생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지에 회의를 느낀다.  그럼에도 나를 믿고 신뢰해서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무언가는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나 자신이 고민에 빠질 때도 있다.

[고민과 소설가]는 40대 소설가인 최민석 작가가 20대 대학생들의 고민을 상담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모까지 섞어 가면서 그들의 고민에 성실하게 답을 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20대 청춘들과 메일로 나눈 고민들을 질문과 답 형식으로 편집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20대 청춘들의 고민을 읽고 내가 작가라면 어떤 대답을 해 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나름 작가와 비슷한 대답을 제시한 부분도 있고, 영 반대 방향의 대답을 제시한 부분도 있었다.

이 책에는 20대 청춘 남녀들의 고민답게 사랑에 대한 고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조언처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사랑에 대한 조언에서는 저자의 대답이 매우 자유로우면서도 생각이 깊어서 읽는 내내 감탄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연인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서로를 위해 선(線)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대답은 영 반대였다. 그는 전 세계 인구가 74억인데 그중 37억이 남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중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 결국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말이 되는 논리 같기도 하고, 되지 않는 논리 같기도 하지만, 분명한 건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상황을 고려치 않고 다짜고짜 받아달라며 떼쓰는 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물러서려고 수차례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간직해왔고, 끙끙 앓아왔던 마음을 표시하는 게 낫습니다. - 중략 - 그분에게 질문자님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그걸로 마음이 차분해진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것이고, 그걸로 둘의 관계가 친밀해진다면 그 역시 좋은 것입니다. 반드시 연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연인이 반드시 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P 102)"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공감했던 저자의 글이 이어진다.

"20대에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연애 상대와 함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안 딘다면 반드시 해피엔딩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내 청춘이, 내 삶이, 아름다운 추억과 역사로 새겨질 것 같죠. 하지만 세상살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는다면 모두 헤어지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대의 미래를 위해 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몹시 사소한 이유로 헤어집니다. 그러면 남녀 간에 한때 철석같이 믿고 지켜왔던 가치가 실은 산들바람에도 날아가 버리는 것이란 걸 시간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남녀관계라는 게 이런 겁니다. 아쉽게도, 이게 현실입니다. 매우 사소한 말다툼, 보잘것없는 의견 차이가 쌓여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생채기가 쌓여, 결국은 헤어집니다... 그러니 여유롭게 생각하세요. (P 103)

또 20대 답게 진로에 대한 고민들도 많다. 가장 인상 깊은 질문은 역시 전공에 대한 질문이다. 자신의 전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려 하는데, 늦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는 자신의 여러 가지 경험을 거치며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나요? 질문자님은 아닐 수 있으나 저는 이토록 쉽게 흔들렸습니다. 대개 사람은 변할 수 없다지만, 제 생각에는 변합니다. 제가 양보해서 사람은 변할 수 없다 쳐도, 사람의 꿈은 변할 수 있습니다. 체 게바라는 의사가 되려다가, 혁명가가 됐습니다. 베드로는 어부가 됐지만, 결국 예수의 제자가 되어 순교까지 했습니다. 노무현은 변호사가 되었다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와 동료와 많은 선배들이 삶에서 일어난 항로의 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P 205)"

흔히 인생 상담이나 고민 상담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흔히 뻔한 대답에 조금 실망하기도 한다. 또는 상대방의 사정이나 상황을 배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잣대로 상대를 가르치려는 말투에 괜히 화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접하면 선입관으로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역시 이런 선입관이 있었다. 그러나 읽으면서 저자의 타인과 인생에 대한 진진한 태도와 경험에서 나오는 깊이 있는 대답에 많은 공감을 느끼면서 읽었다. 사랑이나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20대 청춘이나, 20대에게 인생의 조언을 해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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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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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보면 헤어진 연인을 향한 치졸하고도 잔인한 보복에 대한 소식이 자주 들린다. 헤어진 여자에게 계속 협박성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헤어진 남자에게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일들도 생긴다. 이 정도에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상대에게 직접적인 신체적 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만남도 중요하지만 헤어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라는 책은 이런 헤어짐을 위한 책이다. 저자인 디제이 아오이는 일본의 유명한 상담가로서 주로 SNS를 통해 상담을 한다. 우리가 아는 뻔한 상담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실질적으로 도움이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기에 어떤 때는 조금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이런 저자의 상담 내용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는 연인과 헤어져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상담과 조언이 언급되어 있다. 그중에서 저자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내용은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별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상담을 많이 받는데요, 그럼 어떤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겠어요? 애인이 나와 사귀기 전 만났던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서 이별을 고대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겠어요? 받아들이지 못할걸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는 수긍할 수 있겠어요? 이해할 수 없겠죠. 만약 당신이 싫어졌다는 말을 들어도 순순히 상대를 놓아주기는 어려울 거예요. -중략- 헤어지자는데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따위 없는 게 당연해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헤어지는 일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 중략 - 이유 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헤어졌다는 사실만 정확히 바라보세요. 헤어졌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P 81)"

"좋은 이별이 둘이 만나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동의 아래 아무 원한도 없이 '바이바이'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환상이에요. 헤어진다는 건 잔혹한 일이에요. 사귈 때는 서로 동의가 필요지만 이별에는 필요 없거든요. 어느 한쪽이 '더 이상 안 되겠어'라고 말하면 거기서 끝인 겁니다.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이별이에요. (P 119)

이렇게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저자가 조언하는 것을 아파할 수 있는 만큼 아파하고 울 수 있을 만큼 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컷 아파하고 울어야 이별의 후유증에서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성장한다고 말한다.

"헤어진 후에 두 사람 모두 상처 없이 지낼 수는 없어요. 이별하고도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해요. 이별을 먼저 말한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나 아파하는 건 잘못된 만남이 아니었다는 의미예요. 사랑이 끝났을 때는 괴로운 게 당연하니 마음 편히 아파하세요. (P 61)"

"사람은 아픈 기억을 겪으면서 변해가는 존재예요. 사랑에 진심이 담길수록 이별은 아픈 법입니다. 때문에 실연은 우리를 한껏 성장시킵니다. (P 127)"

그래도 이 책에서는 이별하는 상대를 향한 최소한의 배려의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친구로 남자고 말한다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든지, 조금 거리를 두 자는 등의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나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를 배려한다면 과감히 상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과 이별의 감정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열고, 다시 그 열었던 감정을 닫아서 정리하는 과정이 사랑과 이별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일수록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정리하고,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이별은 가슴 아픈 시기지만,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자신의 감정을 성숙시킬 수 있는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별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과 자신의 감정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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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노는 정원 - 딱 일 년만 그곳에 살기로 했다
미야시타 나츠 지음, 권남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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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읽기 위해 커피숍이라는 곳을 간다. 항상 조용한 구석자리를 앉지만, 어느새 아줌마 군단에 포위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면 아무리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그녀들의 수다를 듣게 된다. 주제는 딱 두 가지이다. 어떻게 그 많은 대화 내용 중에 주제가 두 가지로 압축되는지 신기할 때도 있다. 하나는 부동산 이야기이고, 하나는 교육 이야기이다. '어디 가 얼마가 올랐고, 앞으로 어디 가 오른다더라' 또는 '성적이 얼마나 올랐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올릴 작정이다'라는 이야기이다.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인데, 매번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답답함을 느낀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모든 걸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지는 못해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여유롭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기에 여유로운 여행기나 자연과 벗하는 삶을 다룬 책들을 보면 저절로 호감이 간다. [신들이 노는 정원]이란 책을 보자마자 이런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부제가 더 마음에 끌렸다. '딱 일 년만 그곳에 살기로 했다' 저자는 [양과 강철의 숲]이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미야시타 나츠이다. 이 책은 저자가 [양과 강철의 숲]이란 작품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일본 북단 후카이도의 산골마을인 '도무라우시'에서 보낸 1년을 일기 형식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도무라우시는 '가무이민타라'라고도 불리는데 이 말은 아이누 말로 '신들이 노는 정원'이라고 한다.

"도무라우시. 아이누 말로 '꽃이 많은 곳'이란 뜻이다. 한자는 없고, 일본 100대 명산 중 유일하게 가타카나 이름을 쓰는 산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홋카이도 한복판, 즉 홋카이도에서 가장 중심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다이세쓰산 국립공원 안의 해발 2141미터, 홋카이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여름 저체온증으로 등산객이 잇따라 쓰러졌다는 무시무시한 조난사고. 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가무이민타라는 아이누 말로 '신들이 노는 정원'. 그렇게 불릴 정도로 풍경이 멋진 곳이라고 한다. (P 9)"

비록 1년을 사는 것이지만, 떠날 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막대한 지출과 이사비용, 살던 집의 대출 문제, 그리고 가장 심한 것은 주변의 반대이다. 우리처럼 교육열이 높은 일본에서 3자녀를 키우고, 특히 장남이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으니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뚫고 산속 생활을 시작한다. 저자는 망설이지만, 남편이 강력히 원하고 자녀들도 좋아한다. 입학을 위해 학교에 들은 자녀가 학교 운동장에서 사슴을 발견하고 흥분해서 엄마에게 이렇게 전화한다.

"전화 너머에서 차남이 기쁜 듯이 말하고 장남이 전화를 바꾸었다. 그 한 마디 '풍경이 신이야'라고 했다. 신이라, 신이라나니 어쩔 수 없군. 그러나 그렇게 말해주는 어린 남자아이의 존재가 무척 기뻤다. 두 아 들은 홀딱 반했다. 물론 남편도. 다음 날 귀가한 남편은 홋카이도 수사슴의 뿔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끝없이 얘기해 주었다. 산촌 유학생용 주택도 보여주었다고 한다. 내 마음은 그 집 얘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은 쪽으로 기울었다. (P 20)"

그리고 1년의 산속 생활이 시작된다. 자녀들은 10명 안팎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시키고, 자연과 벗하며 살아간다. 온갖 동물을 만나고, 식물을 접하고,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살아간다.  저자 역시 어쩔 수 없는 어머니이기에 자녀들의 학교생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된다. 자녀들이 시골학교에서 학생회장도 하고, 배드민턴 경기도 나가고, 그곳에서 어울리며 산다. 과연 그들에게 그 1년은 어떤 의미였을까. 미래의 삶을 살아가는 영양소를 공급하는 저장소와 같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시간표를 보고 놀란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야외 수업이 많다. 삼림 교실, 골프, 수영. 어떤 날은 평일인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낚시였다. 중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산속 계류로 나갔다. 이런 곳을 정말로 가요? 묻고 싶은, 불안해 보이는 조릿대 나무숲을 헤치고 도착한 계류에서, 흐르는 물이 다리를 당길 것 같은 가운데, 중학생 다섯 명과 선생님과 강사인 베테랑 낚시꾼이 종일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고 한다. 옥새 송어, 산천어, 곤들매기 등을 잡아서 돌아왔다. 게다가 손질까지 다 해서 왔다. 물고기를 손질하는 법까지 가르쳐주다니 멋지다. (P 110)"

최근에 심리학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안전지대'라는 단어가 기억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부모와 보낸 시간과 장소가 하나의 안전지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다가 지치고 피곤하면 다시금 마음속에서 다시금 그곳으로 돌아와 휴식을 누리고 다시금 힘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자녀들은 산속에서 보낸 1년이 든든한 안전지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가는 삶 속에서 막상 성공을 하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대이다. 조금 더 길게 보고,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다면 사는 게 조금은 여유로울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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