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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평점 :
한 남자가 작은 마을로 흘러든다. 서툰 그림 그리기가 취미인 조용한 남자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결혼한다.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러나 3년 9개월의 짧은 그 시간을 뒤로하고 남자는 사고로 죽는다. 그 후 남자의 본가에 사망 소식이 알려지고 남자의 형이 찾아온다. 형은 죽은 남자의 영정 사진에 분향을 하려다 말고 문득 놀랐다. '뭐죠? 이자는 내 동생이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데뷔작 '일식'으로 최연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의 스타로 떠오른 히라노 게이치로. '한 남자'는 파격적인 소재와 실험적인 글쓰기로 출간작마다 화제를 낳은 그의 데뷔 20주년 기념작이자,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작이다. 한 남자,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에는 사실 다의적 주제를 명징하게 함축하고 있다. 소설은 꽤 변화무쌍한 장르적 특성을 보인다. 한 남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또 다른 남자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레이먼드 챈들러부터 마쓰모토 세이초, 코넬 울리치의 감성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다. 결코 지루하고 딱딱한 소설이 아니라는 얘기다. 서사 곳곳에 심리적 사색으로 빠지는 구간이 꽤 많지만, 가독성은 뛰어나서 쉼 없이 페이지가 넘어간다. 이는 작가의 필력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장르적 특성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며 독자를 이야기 중심으로 확 끌어들인 후 인간과 삶에 관한 새로운 방식의 고찰로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문학적 깊이와 소설적 재미 모두를 놓치지 않은 작가의 내공이 확실히 수준급이다.
앞서 말했듯 꽤 무거운 주제지만 소설은 무척 잘 읽힌다. 한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서 마지막까지 책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추적이라는 단선적인 플롯 위에 작가는 어마어마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이 '생각할 거리'에 이 소설만의 또 다른 매력이 풍성하게 넘쳐난다. 작가는 느와르적인 설정을 가져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풀어낸다. 이름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는 자아를 잃은 현대인의 삶으로 대치되고, 그것은 다시 차별과 정체성의 문제로 가지를 뻗고, 더 나아가 창조와 모방,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과 예술의 근원적인 물음에까지 도달하고야 만다. 무척 심오한 내용 같지만, 소설은 이 모든 것을 독자가 하나하나 밟아 나갈 수 있도록 유연하게 끌고 간다. 그래서 많은 것을 곱씹게 만들고 읽고 나서가 아니라, 읽는 순간순간 깊은 여운의 강 속으로 끊임없이 가라앉게 만든다.
사랑에 과거란 필요한 것일까? 결국 이 소설의 테마는 사랑이다. 소설은 내내 '한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소설 속에도 많이 언급되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학살을 벌였다. 그것은 오늘날 혐한 정서로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차별이라는 선 긋기- 그것이 '나'라는 인간을 정의하는 아이덴티티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신분'이라는 것은 어떨까? 호적, 주민등록번호, 직업, 직분- 이런 것이 '나'라는 인간을 정의하는 근본적 잣대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사실 이런 증명 서류들, 인간관계, 집단이라는 울타리에 '자아'를 기댄다. 그걸로 안심한다.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삶이든, 인간이든, 사랑이든 존재하는 거라고 자맥질한다. 지금의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래서 그 자가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 속하는 '과거'를 지녔는가, 아닌가에 판가름된다. 만약, 그가 '울타리' 밖에서 겉돈 과거를 지녔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그는 '한 사람'으로서 부정되어야 하는 걸까? 간토 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들처럼.
아아, 언젠가 그날의 언젠가 그 한때! 소설 속에서 인상적인 구절이다. 가지이 모토지로의 소설 속 한 구절을 가져온 것인데, 작가가 툭 던진 이 한 구절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내내 이어지던 정체성의 모호함과 인간 재창조에 관한 심층적인 문제들의 끝이 얼른얼른 보이는 듯했다. 이를테면 '달콤하고 눈부신 한때'라고 한다면- 그 행복한 감각에는 과거도, 신분도, 선으로 그은 울타리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사랑에 과거가 필요한 것일까?'라는 질문도 무의미해진다. 인간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은 서류나 과거의 시간 같은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 순간 '어떠한 사람'으로 비치는 존재다. 매 순간 재창조되는 것이다. 사랑은 그 순간에 기인한다. 사랑은 모든 '속박'을 훌쩍 초월한 순간의 지점에서 인간을 따스하게 맞아들인다.(물론 이것은 어려운 문제다. 손을 뻗는다고 쉽게 잡을 수 있는 영역은 아닐테다. 그래서 삶도, 이 소설도 결국 씁쓸해지는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면 뭐랄까, 이것은 소설이라는 창작물이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창작물이기도 하다-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분명 '메타소설'적인 측면까지 아우르고 있다고 봐야겠다. 히라노 게이치로답다. 그는 이번에도 가차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가 거부 못 하고 빠져들게끔, 또 한 번 실험을 한 것이다. 쓸쓸하면서도 매혹적인 실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