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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한 물밑에서
스즈키 코지 지음, 윤덕주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본 영화지만 리뷰를 지금에서야 올리네요~


이 영화는 특히 주연 여배우 구로키 히토미(천리안에서 무척 카리스마 있게 등장한 여배우)의 살아있는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천리안때부터 제가 좋아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사실 굉장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잘하고~~ 나이가 40대인데 굉장히 어려 보이는 얼굴이며~~ 게다가 모델 출신인지 키도 엄청 크더군요~~
더불어서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거론해 보자면 딸 이쿠코 역, 귀신 미츠코 역 두 꼬마 애들 모두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이쿠코 역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꼬마 여자애였는데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좋은 연기란 튀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캐릭터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연기를 하고 있다는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연기가 정말 좋은 연기지요)
그리고 미츠코 역을 맡은 여자애 역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귀신 꼬마애 하니 생각나는데 작년에 개봉된 한국 공포영화 '폰'에서도 귀신들인 꼬마애가 한명 나오죠. 미츠코는 극중에서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합니다.(마지막에 딱 한마디 하는데 굉장히 오싹하면서도 왠지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카리스마란 굉장했습니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폰의 여자애는 굉장히 오버를 하며 나 무섭지,를 강조했었지만 조용한 미츠코가 정색을 하고 눈이라도 한번 흘기면 기겁을 하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아역들의 능력 보다는 전적으로 감독의 능력이라고 해야겠지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스즈키 코지의 동명 소설 '어두컴컴한 물밑에서'를 '링'의 명콤비 나카다 히데오 감독이 영화화 한 것이지요. 그래서 굉장히 궁합이 잘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즈키 코지의 소설을 가장 영화로 잘 옮기는 사람이 나카다 히데오 일 것입니다.

또한 히데오 감독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호러계의 대가 입니다.(이미 헐리웃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왔다지요~)

검은 물밑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괴담이야기 입니다. 식스센스처럼 기막힌 반전도, 링 처럼 기발한 스토리 전개도, 큐브 처럼 번득이는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실종된 소녀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단순한 귀신 이야기에 불과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스토리를 가지고 흥미롭게 이끌어 나가는 능력이야 말로 감독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쾅쾅 울리는 사운드는 거의 없습니다. 조용히 물 흐르듯이 흐르는 소름끼치는 배경 음악 위로 열린 문틈, 좁은 엘리베이터, 혹은 비오는 거리 등에서 슬그머니 스쳐 지나가는 유령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카다 히데오 감독은 인간이 어느 순간 진짜로 손에 땀이 나고 등골이 오싹해 지는지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듯 해보였습니다. 주변의 소리와 일상의 사건들을 조합해서 미궁같은 두려움을 서서히 뽑아냅니다. 관객들이 어느 순간 긴장감이 극대치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는 바로 그 순간에 상상 속에서 거대하게 부풀려진 공포의 실체를 단 한번 터트리며 결정타를 날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짜집기 스토리에 사운드의 기교로만 얼룩진 국내 호러물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좀 밋밋할 수도 있겠지요~

공포란 뭔가 거대하고 흉포한 인상을 풍길때 오히려 비대하게만 느껴지는 법이지요. 그래 저거 정말 공포영화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 이미 그것은 공포가 될 수 없습니다. 나 귀신이야, 하는 느낌이 팍 들게 되면 그 순간 긴장감도 팍 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누구라도 일상 속에서 경험 해 보았음직한, 이를테면 한 밤중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없을 때, 바로 그러한 때에 우리는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진정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공포도 일상의 세심한 관찰과 인간 심리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가 필수적인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외국의 거대 슬래셔 무비만을 쫓다가는(혹은 성공한 유령영화들의 모티브를 흉내내려고만 하다가는) 매니아들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요~!

이 영화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불행과 그것이 아파트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어떤 식으로 참담한 비극을 그려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이 공포는 동떨어진 세계의 악마나 살인마 따위가 아니라 조용한 아파트(너무나 조용해 인적이 거의 끊긴듯한)가 어느 순간 위령제를 치루어야 할 지옥의 온상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악몽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공포감은 우리들의 불안한 영혼 깊숙이까지 스며들수 밖에 없는 진짜 공포가 되는 것이지요~~

이쯤에서 결론 짓도록 하지요.

저는 검은 물밑에서에 별 네개 정도를 주고 싶습니다. '링' 같은 불멸의 걸작은 아니더라도 탄탄한 구성과 적절한 공포연출이 잘 조화를 이룬 꽤나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검은 물밑에서는 헐리웃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완벽한 일본 적인 공포라는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유령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식스센스'나 '디아더스'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며 귀신영화의 교과서인 '엑소시스트'를 흉내내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이는 탄탄한 원작 스토리가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지만 감독만의 독보적인 공포철학이 확고하였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겠지요. 역시 대가 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가 거의 없었지요. 있다고 한들 앞으로도 물을 소재로 이만큼 잘 만든 공포영화는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드네요. 무섭고 감동적이며 긴 여운을 주는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였습니다.

(끝으로 몇 마디 더, 영화는 원작 소설과는 다른 면이 많습니다. 그러니 소설과 영화를 모두 보시는 것이 좋을 듯싶네요~~~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쾅, 하고 물이 쏟아지는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명장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영화가 슬프면서도 암담한 느낌의 공포감 때문에 오랫동안 가슴 한 쪽이 먹먹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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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16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영화 보았는데요.
무섭기도 하면서 몹시 슬프고 그랬습니다.
심장이 깜짝 깜짝 내려 앉을 정도로 놀라는 장면은 없었습니다만...

교수님의 리스트와 서평 대단하고 멋지시네요.
전 호러물중엔 특별히 뱀파이어류 ^^; 만 좋아해서 입맛은 좀 짧은 편입니다.

또 구경 오겠습니다.
^^

살인교수 2005-08-1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멋진 영화죠~! 나카다 히데오, 참으로, 공포영화를 제대로 잘 만드는 감독 같습니다~! 구로키 히토미의 연기도 정말 좋았고, 아역 배우들도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었죠~!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착신아리 - 할인행사
미이케 다카시 감독, 시바사키 코우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착신아리

 

 

휴대폰으로 배달되는 죽음

 

 

현재 일본에서 가장 바쁜 감독이자 헐리웃이 주목하는 아시아의 감독 10인 중 한명인 미이케 다카시는 구로사와 기요시와 함께 독특한 철학적 호러로 독보적인 호러 영역을 세계적으로 넓혀나가는 실력있는 감독이다. 특히 그의 재능은 호러, 스릴러에 집중되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오디션><이치, 더 킬러><비지터 Q>등의 작품들은 마니아들의 폭발적인 호응은 물론 일반관객과 평단에서도 찬사를 얻은 작품들이다. 그런 그가 <링><주온>등으로 유명한 카도카와 필름과 조우하며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고자 했던 작품이 바로 <착신아리>다. 때문에 이 영화는 제작단계에서부터 관심이 높았으며 실제로 개봉되자마자 높은 수익을 거둔 흥행작이다.

영화의 간략 줄거리는 휴대폰을 통해 근미래의 자신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죽음의 순간을 녹음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예고된 바로 그 시각에 정확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휴대폰에 저장된 다른 사람의 폰번호로 죽음의 공포는 이동해간다. 여대생 유미는 친구들의 죽음을 근접 목격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에게 배달된 죽음의 통보에 맞서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을 풀어나가고자 하지만 데드라인은 점점 그녀의 숨통을 조여온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 하나가 떠오른다. 제작년 개봉된 국내 영화 <폰>이다. 언뜻 호러 강국의 호러 천재 미이케 다카시가 호러 약국에서 내놓은 <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착신아리>는 버젓이 원작소설이 있는 작품이다. 무라카미 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오디션>의 경우처럼 <착신아리>도 아키모토 코우의 인기 동명 호러소설을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디션>의 아우라에 미이케 다카시의 팬이된 마니아들이라면 이번 작품은 조금 밋밋할 수도 있다. 극한을 달리는 엽기적 잔혹성의 수위는 이번 영화에서 많이 완화된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이케 다카시는 미이케 다카시다! 순간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장면들은 가히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위력적이다!) 그러나 영화속에 녹아든 미이케 다카시만의 철학적 호러는 여전하다. 무섭지만 희망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처럼 이번 영화는 전작들에서 다루어진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아우르고 있으며 라스트에 이르러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모두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을 상처에 대한 기억을 보듬게 만든다.

<오디션><이치, 더 킬러><비지터 Q>등에서 다루어진 어린 시절의 학대와 비밀스런 상처의 기억, 피학과 가학, 비뚤어진 사랑관, 가족 파괴등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을 <착신아리>에서 응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거기에다 메스미디어에 대한 냉소적 고찰을 곁들여 단순 비명지르기 식의 생각없는 호러와는 수준을 달리하고 있다.

미이케 다카시 마니아로서 아쉬운 점이라면 그만의 칼날같은 섬뜩한 개성이 이번 작품에서 많이 보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겠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색깔이 카도카와에서 히트한 <링><주온>의 틀에서 주물된 듯한 느낌이 없지않아 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수도 있겠다. 미이케 다카시가 사다코적인 아우라를 소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마니아로서 아쉬운 점이었다. (물론 카도카와 측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을 터이고 다르게 얘기하자면 나카다 히데오, 시즈미 다카시에 이어 실력있는 미이케 다카시를 헐리웃에 입성시킬 대중적인 색깔을 입히고자 한 것일테다)

그러나 역시 대가는 대가다. 비슷한 시기에 <제브라맨><극도공포대극장 우두><쓰리, 몬스터>등을 연속으로 촬영하며 <착신아리>는 엄청 빠르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속결로 만들어진 작품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과연 그의 호러적 재능은 신기에 가깝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으며 호러적 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제작 수준도 다시한번 입증된 셈이다.

<착신아리>는 충분히 무서운 공포영화다. <링><주온>에 단련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다시한번 놀랄 수 밖에 없는 끔찍하고 오싹한 장치들은 감독의 탁월한 재능과 맞물려 기막히게 관객들을 압도한다. 초반에 힘을 다 써 중반부터 루즈해지다가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질질끄는 지루함만을 안겨주는 졸작들과는 달리 <착신아리>는 갈수록 힘이 붙는 영화다. 미스터리한 초반으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후 중반부의 방송국 에피소드는 압권을 이루고 음산하고 섬뜩한 라스트는 겹겹이 가중된 관객들의 공포심리를 정신없이 부추기며 압박한다. 주연을 맡은 시바사키 코우(<배틀로얄>에서 낫을 휘두르던 그 엽기 소녀)와 츠츠미 신이치(개인적으로 팬, 이유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고 늘 안정된 연기를 보이기 때문)의 호연도 좋았다.

<착신아리>를 통해 국내 호러영화에 대해 당부하고픈 것은 적어도 흥미있는 공포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기본부터 충실하기를 바란다.

p.s 전체적으로 <착신아리>는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이다. 하지만 미이케 다카시, 그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 정신없는 호러폭격 뒤에 남겨진 철학적 메시지에 대한 고찰은 언제나 관객들의 몫이다. 때문에 영화의 제일 마지막 몇 장면에 대한 해석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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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이 2 [dts] - 할인판
옥시드 팽 외 감독, 서기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디 아이 2>

 

 

또 하나의 눈은 어둠을 응시한다!

 

 

유부남을 사랑한 조이(서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버림을 받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깨어난 그녀에게 임신이라는 뜻밖의 소식과 무시무시한 현상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 사악한 기운, 죽음의 공포 등은 그녀로 하여금 뱃속의 아이를 점점 불신하게 만든다.


인간의 부덕함이 저주가 되어 악령의 씨앗을 낳고 악령은 태아의 몸을 통해 세상으로의 부상을 꿈꾼다.(기시 유스케의 호러 소설 '검은 집'을 살짝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악은 유전적으로 되물림 되고 종국엔 악으로만 넘쳐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리라)


<링>, <주온> 이후 아시아 호러의 새로운 신호탄으로 떠오른 <디 아이>는 태국과 홍콩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 지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장백지의 대타로 출연해 호연했던 여주인공 이심결은 각종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판권을 사들인 헐리웃에서 발빠르게 리메이크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헐리웃의 이러한 움직임은 아시아의 히트 호러영화 <링>의 성공적인 리메이크에 고무되어 참신한 이국의 호러에 눈을 돌리려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진행중인 작품들로 <링2>, <주온>, <검은 물밑에서> 등이 있다.


이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서기라는 막강한 배우 파워를 앞세워 대대적으로 개봉한 <디 아이 2>는 1편의 흥행에 세 배에 달하는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며 다시 한번 <디 아이> 파워를 과시했다. (물론 속편도 헐리웃에서 발빠르게 사들여 리메이크 작업을 진행중이고 감독인 팡 브라더스는 시리즈의 3편인 <디 아이 10>을 기획 중에 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공의 일등 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감독인 팡 브라더스의 놀라운 재능에 있다. 뛰어난 호러 감각을 지닌 이 천재 쌍둥이 감독은 <디 아이> 시리즈를 통해 아시아 호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매너리즘의 늪 속을 헤매는 장르 반복적 이미지에 신선한 충격을 가했다.


사실 <디 아이>를 창조해낸 팡 브라더스의 재능이란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아주 특별한 발견은 아니다. 이를테면 케빈 윌리엄스가 <스크림>에서 보여주었던 장르의 해체와 재조합이라는 뛰어난 발상의 힘 같은 것이 <디 아이>에는 없다. 오히려 <디 아이>의 중심 설정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놀라운 히트작 <식스 센스>에서의 설정인 '죽은 사람이 보인다'에서 빌려온 듯하다.(물론 팡 브러더스 감독이 진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디 아이>를 구상해 왔으며 1편의 경우는 태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디 아이>만의 특별한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링>처럼 정교한 시나리오나 위력적인 캐릭터, 텍스트의 전복 같은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디 아이>는 <주온>과 색이 닮아 있다. 팡 브라더스는 재기 넘치는 젊은 감독이며 호러 분야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마니아들임에 분명하다. 그들은 구태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기 보다 장르적 관습에 임펙트를 넣어 줌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호러 장르를 매혹적으로 빛낸다. <주온>이 그랬듯이 <디 아이>도 관객의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공격적인 공포 장치로 승부를 낸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방법이 사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 만큼이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국내 호러 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장치, 탁월한 호러 감각이 없다면 절대로 자신 할 수 없는 방법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의 차용 만으로는 아무리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효과음을 울려대도 지루하고 짜증날 뿐이다.(자, 어째서 국내 호러 물은 아직 <링>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벗어나기보다는 <주온>으로 적절히 옮겨가고 ! 있으니, 이제 더 이상 기대할 힘도 없다!)


<디 아이> 1편에서 몇 개의 장면들만 예를 들어보더라도 감독의 호러적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베이터 장면, 주인공이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장면 등은 히트한 <링> 이나 <주온>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장면이며 그러한 감각적인 부분들을 헐리웃에서 높이 평가한 것이리라.


<디 아이 2> 역시 감독의 신선한 호러 장치들로 넘쳐난다.(전체적으로 <디 아이 2>는 전편에 비해 신선함은 조금 줄어들었고 드라마는 더 탄탄해졌다. 하지만 뒤통수를 치는 듯한 섬뜩한 장치들은 여전하다) 물 속을 부유하는 듯한 혼령의 모습, 임산부의 뱃속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드는 혼령의 움직임, 낙하하는 모자의 시체 등은 극장 안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지르게 만드는 탁월한 장면들이다.


무엇보다 <디 아이> 시리즈가 좋았던 것은 주연 여배우들의 호연 때문이다. 전편의 이심결도 그랬지만 속편의 서기 역시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전편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스토리라인을 힘있게 이끌어내는 것은 서기의 놀라운 연기력이며 그것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감독의 탁월한 호러 장치들과 반응하며 관객들에게 완벽한 공포를 전이시킨다.(에로틱한 이미지로 각인된 서기는 비로소 <디 아이 2>로 재평가를 받아야 할 훌륭한 여배우라고 생각한다. 국내 호러가 안 되는 이유는 감정 이입이 될 만큼 생명력 있는 호러 연기를 펼치는 여배우가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버액션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 절실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처럼 사유하는 호러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차라리 호러 마니아들의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낼 줄 아는 재능이 필요하다. <주온>의 위력적인 공포가 그러했다. '가장 무서운 영화'라는 <주온>의 꼬리표는 아시아의 전설이 되어버렸고 태평양을 건너가 셈 레이미 감독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국내 호러가 계속 겉도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본에 충실하지가 못해서이다. 기본이 충실하지 못한 마당에 뭔가를 자꾸 사유하려고만 든다.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이고, 분석적이고자 하는 과욕으로 넘쳐난다. 그러한 어설픈 과욕들이 오히려 기본 마저 무너뜨리고 퇴행시키고, 얄팍한 흉내내기로 짜증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국내 호러의 악순환은 오래전 젊은 천재 감독 셈 레이미가 <이블 데드>로 그랬듯 정말로 제대로 된 '호러를 위한' 호러영화를 누군가가 만들어내어 신호탄을 알리기 전까지 계속 될 듯해 비관적이다.


<디 아이>를 보라! '귀신을 보는 자' 라는 간단한 명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남은 숙제는 '귀신을 보는 자'의 공포 심리를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이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그 호러적 장치에 전력을 쏟기에도 바쁘다. 억지스러운 감동, 작품성까지 두루 겸비하려고 욕심내지 말자! 그것은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애벌레가 벌써부터 날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디 아이 2>는 극장에서 제대로 된 호러를 만끽하고 싶은 마니아들을 위한 영화이며 그 이상이나 그 이하를 기대하는 사람들(특히 불법파일로 감상하는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운 영화일 수 있다. 단, 서기의 조언대로 '임산부는 관람을 삼가해야할' 영화이다.

 

살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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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올드보이

 

거울 속의 몬스터 죽이기!

 

 

<올드보이>는 필자의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울 속의 몬스터 같은 작품이다. 그래서 복수를 테마로 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전복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올드보이>가 일본의 동명 원작 만화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애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소설 '윌리엄 윌슨'과 더 닮아 있는 듯하다.

이쯤에서 미리 경고한다! 리뷰에서 반전에 관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필자도 모르게 암호나 힌트가 나갈 수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당부한다. <올드보이>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적게 알고 볼 수록 충격의 파장이 커지는 영화이므로!!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의 '윌리엄 윌슨'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소설에 대해 간략히 설명부터 하자면 윌리엄 윌슨이라는 가명(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가명을 쓴다. 이는 곧 <올드보이> 속에서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을 몬스터로 지칭하는 것과 흡사하다)의 주인공이 자신과 이름이 같고 얼굴도 거의 흡사한 인물과 조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끝없는 혼란과 자아 분열을 겪게 되다가 마침내 증오와 복수로 점철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자신의 대칭과도 같은 인물과의 조우이다.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작은 난동을 부리는 등 남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잠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거는 사이 그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이 15년 간의 감금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15년 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버텨낸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랬듯,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조롱하고 파멸시킨 자에 대한 복수의 일념 하나로 이를 갈며 버텨낸다. 15년 후 풀려난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청년 실업가 이우진의 정체를 추적하며 어째서 그가 자신을 15년 동안 가두었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영화는 바로 이 '누가', '왜'에 관한 긴박한 퍼즐게임이다. 라스트에 가서야 오대수는 자신이 그토록 복수하고자 한 이우진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대칭점 상에 놓인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전 영화의 특성상 이쯤에서 '세 치 혀'를 더 이상 놀릴 수 없겠다. 그래서 '윌리엄 윌슨'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자 한다.

'윌리엄 윌슨'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손바닥 안에 놓고 조롱하듯 간섭하고 좌지우지 하는 대칭의 인물에게 마침내 분노어린 응징을 가한다. 그 순간 그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혼란스럽게 바라보며 혼돈에 빠진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고자 했지만 사실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거울 밖의 자신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비틀린 복수의 알고리즘은 결국 자신의 목줄을 조이게 만드는 이율배반으로 전복되고 만 것이다.

<올드보이>의 라스트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거울 속의 상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누가 진짜 '윌리엄 윌슨'(혹은 몬스터) 인지를 모호하게 함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알고리즘을 허물어버린다. 또 오대수는 유리창이나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때마다 오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인생을 통째로 복습할 시간이다'라고 말한 이우진의 말처럼 그는 거울의 표면을 구석구석 면밀히 닦으며 자신의 상을 분명하게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깨뜨려 버리고자 고뇌한다. 결국 <올드보이>는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돌아보고 면밀히 살피며 대칭점에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자신의 얼굴 조차 잊고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 모두에게 감독은 작은 티끌 하나도 상세히 보이는 커다란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다. '바윗돌이건 모래알이건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이우진의 말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날카로운 비수이다. 이 영화의 엄청난 반전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입김을 불어서라도 거울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자 하게 한다.

사실 '윌리엄 윌슨'은 포우의 워낙 유명한 단편 소설 중 하나라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읽어 봤으리라 짐작한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윌리엄 윌슨'이 <올드보이>와 표면적으로 비슷한 스토리를 가졌거나 결말이 유사하다라는 것은 결코, 전혀 아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내적인 이미지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적인 닮음은 포우의 또다른 단편 소설 '아몬틸라도 술통'과도 연관이 있다. 이 소설에서 복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길, '복수는 벌로 다스린 이에게 보복이 온다면 진정한 복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벌을 저지른 자가 자신이 처벌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역시 진정한 복수라고 말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복수자는 자신이 복수한 것에 대해 어떤 응징도 받지 않아야 하며, 처벌을 받는 이는 그 자신이 지금 벌을 내리는 자로부터 복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속 최후의 복수자의 심리를 절묘하게 대변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대중성과 작가주의를 절묘하게 오가며 색다른 스타일과 박력으로 관객들의 혼을 뒤흔든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 최민식이 장도리를 들고 싸우는 복도 액션씬의 박력과 리얼함은 한국 영화사상 유례가 없을 명 액션 씬으로 꼽힐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반전은 충격적이다 못해 장도리로 심장을 후벼파는 것만큼 전율적이다. (정말 세다 못해 지독하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민식의 연기는 <파이란>에서 그가 보여준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함에 손색이 없다. 유지태와 강혜정의 연기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감독의 완벽한 연출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주 개인적인 견해 하나를 말하자면 극단을 달리는 이런 식의 설정, 이런 식의 분위기는 필자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우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올드보이>는 올해 <살인의 추억>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살인의 추억>이 그러했듯, <올드보이>도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근래 보기 드문 한국 영화 수작이다.

끝으로 계속해서 이 영화와 비교한 포우의 소설 '윌리엄 윌슨'의 도입부 문장을 올리며 리뷰를 마칠까 한다. <올드보이>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극중 오대수의 심정을 이해함에 있어 더 없이 좋은 문장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우선 내 이름을 윌리엄 윌슨이라고 해 두자. 내 앞에 놓인 이 흰 종이를 나의 본명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경멸과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분노의 폭풍이 불어 그 유례 없는 오명이 지구 끝까지 닿았다. 아, 모든 사람들이 저버린 추방자! 대지조차 너를 영원히 저버렸느냐? 대지의 명예와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꽃들과 눈부신 대기도 너를 저버렸느냐? 짙게 드리워진 끝없는 구름이 너의 희망과 천국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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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dts] - 완전 무삭제 무등급판, 비트윈 2005년 5월 할인
프랑소와 오종 감독, 샬롯트 램플링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정돈된 일상을 파고드는 모호한 균열

 

 

<스위밍 풀>은 프랑스의 젊은 천재 감독으로 연신 메스컴의 화제를 모으고 다니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최신작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이제껏 국내에 단 한 편도 소개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국내 관객들에게 프랑수아 오종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스위밍 풀>은 프랑수아 오종의 특별한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위밍 풀>은 그 자체로 국내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프랑수아 오종 이라는 매혹적인 수영장 속으로 덜컥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과대한 기대감과는 달리 영화는 시작부터 굉장히 정돈되고 편안한 느낌이다. 편집장의 권유로 프랑스에 있는 그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 50대의 인기 범죄소설 여류 작가 사라는 화려하지만 고요한 별장의 정취에 흠뻑 빠져든다. 영화의 초반은 그녀의 디테일한 일상을 조용하게 따라간다. 넓고 조용한 자신만의 공간에 만족해 하며 사라는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의 정돈된 일상에 균열이 시작되는 것은 편집장의 어린 딸 줄리가 별장을 방문하면서 부터이다. 사라만의 공간에 줄리라는 달갑지 않은 인물이 침입한 것이다. 줄리는 그 때까지 평온했던 사라의 일상을 엉망으로 망쳐놓는다. 낮에는 수영장에서 수영과 선탠을 하며 밤에는 남자들을 끌어들여 난잡한 섹스 파티를 즐긴다. 젊고 싱싱한 10대 소녀 줄리가 만들어내는 갖가지 소음들은 사라의 정돈된 일상 속을 파고들며 뒤틀린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 갈수록 점점 줄리의 도발적인 매혹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는 사라는 줄리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나간다.

영화의 마지막 30분은 이제까지의 나른하고 일상적이었던 영화의 분위기를 뒤엎어 버린다. 어느 날 줄리는 사라가 마음 속으로 흠모하고 있던 카페 주인을 별장으로 끌어들이고 그날 밤 그와 크게 다툰다. 다음 날 남자는 사라지고 수영장에는 핏자국이 가득하다. 이때부터 사라는 사라진 남자와 핏자국이 남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영화보기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 시키며 영화의 주제마저 바꾸어 놓는다.

<스위밍 풀>은 정확이 무엇이다, 라고 꼬집어서 정의내리기가 무척 힘든 영화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것은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의도적으로 계산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여러가지로 상상하며 재해석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실제로 <스위밍 풀>은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도 한참을 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사라와 줄리가 만들어간 미묘한 갈등과 심리전, 그리고 위험한 범죄 등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굉장히 모호하게 와닿는다.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음으로 관객들이 이끌어낼 수 있는 상상의 범위는 커지고 그 가지는 여러갈래로 나뉘어진다.

어쩌면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스위밍 풀>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와 줄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또다른 상상력의 샘, 즉 그들만의 수영장(Swimming Pool)을 만들어 준 셈이다. 그 속에서 영화는 각각 새롭게 재 창작 되어 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스위밍 풀>은 하나의 결론으로 단정짓기 힘든 모호한 영화이다. 장르적인 면에서도 드라마, 에로, 심리 스릴러, 서스펜스, 추리극 등을 모두 아우른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언뜻 두 여인의 심리적인 갈등과 교점을 말하는 듯 하지만 창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더 크게 아우르며 또다른 얘깃거리에 대한 공백마저 남겨둔다.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나 추리 소설적인 재미를 기대하면서 이 영화를 본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류의 영화와는 많은 부분이 틀리다. 살인과 미스터리가 등장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사라와 줄리간의 치열한 대립과 심리전에 있다. 두 여배우의 연기는 백점 만점을 다 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가 범죄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후반부에서 전개의 스피디함에도 불구하고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나 워쇼스키 형제의 <바운드>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바톤 핑크>만큼 창조적이지도 <바운드>만큼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밍 풀>이 인상적인 이유는 정돈되어진 일상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모호한 균열을 일으키는 프랑수아 오종만의 마력적인 화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모호함의 연속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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