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 책읽기, 도서정가제

 


  책을 삽니다. 읽으려고 책을 삽니다. 나는 내가 읽을 책을 사려고 돈을 씁니다. 책은 책방에서 삽니다. 책방은 새책방이 있고, 헌책방이 있습니다. 새로 나온 책은 새책방에서 사고, 새책방에서 사라진 책이라든지 처음부터 새책방에 들어가지 않는 책은 헌책방에서 삽니다. 비매품이나 관공서 자료나 동인문학지나 자비출판물 들은 헌책방에 들어오기에 아주 고맙게 살 수 있습니다. 따끈따끈하게 새로 나오는 책들은 새책방에 정갈하게 꽂히기에 늘 고맙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인천이나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던 때에는 걸어서 찾아갈 가까운 책방이 많았고, 때로는 자전거를 몰아 찾아갈 조금 먼 책방이 많았습니다. 인천이나 서울에서 살던 때에는 언제나 매장책방을 들락거립니다. 도시를 떠나 식구들 함께 시골에서 살아가니, 매장책방 찾아갈 길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는 책방이 없기도 하고, 도서관이 없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 내가 도서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읽고픈 책은 내 살림집에 서재를 꾸려 건사해야 하고, 언제라도 돌아볼 자료와 묵은 책은 나 스스로 도서관처럼 꾸며 알뜰히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 식구처럼 두멧시골에서 살아간다든지, 또는 섬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매장책방을 쓸 수 없으니 인터넷책방을 써야 합니다. 택배값을 들이더라도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장만합니다. 시골에서 읍내나 도시로 찾아가느라 들이는 품과 겨를을 헤아리면,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살펴 장만할 수 있는 일은 참 고맙습니다. 두멧시골에서는 읍내를 다녀오는 데에도 하루를 써야 해요. 집에서 인터넷을 켜서 책을 주문하고는 택배로 받을 수 있으니 품과 겨를을 얼마나 줄이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헌책방마실을 할 적에는 ‘나라밖 예쁜 책’을 헌책방에서 값싸게 사들일 수 있는 대목도 참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일본도 미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나들이하지 못합니다. 비행기삯도 없고 여권도 없으며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헌책방마실만 하면, 나라밖 온갖 사진책을 여러모로 만날 수 있어요. 바라는 모든 ‘나라밖 멋진 사진책’을 만나지 못하지만,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다니고 보니, 재미나며 아기자기한 나라밖 책을 참 많이 만납니다.


  내가 사고 싶은 책을 갖추어 주니 고마운 책방입니다. 내가 사고 싶다 생각하던 책이 아니지만, 문득 코앞에서 마주쳤을 때에 ‘어, 이런 책이 있었네.’ 하고 깨닫게 해 주니 고마운 책방입니다. 나는 내 머릿속에 담긴 지식으로만 책을 살필 수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 안 담긴 책을 꾸준히 만나면서 내 마음밭을 일굽니다. 생각을 틔우고 마음을 열고 싶어 새로운 책을 꾸준히 만나려 합니다. 사랑을 살찌우고 꿈을 북돋우고 싶어 새로 나오는 ‘새책과 헌책’을 꾸준히 돌아보려 합니다.


  삶을 읽도록 부추기는 책을 손에 쥐면서 흐뭇하게 웃습니다. 내가 책 한 권 장만하면서 치르는 값이란, 내 웃음값입니다. 내가 책 두 권 장만하면서 내는 값이란, 내 기쁨값입니다.


  책을 한 푼이라도 에누리해서 장만했다고 기쁜 적은 없습니다. 내가 읽을 책을 살 적에 기쁠 뿐입니다. 내가 읽지 않고 책꽂이에 모시기만 하는 책을 값싸게 장만한들 조금도 기쁠 일이 없습니다. 읽지 않고 모시는 책은 으레 짐덩이입니다. 읽을 때에 책이고, 읽지 않고 모실 때에는 짐이면서 겉치레입니다. 4346.1.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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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22 11:35   좋아요 0 | URL
저도 어릴때 시골에서 살아봐서 '책 한 권'이 얼마만큼 귀한 줄을 체험해 봤어요.

초등학교에 다닐 땐 '군립도서관'에 그득한 '세계명작동화'를 읽기 위해 우리 마을에서 읍내까지 왕복 30리길을 혼자서 곧잘 다녀왔어요. 검정고무신을 신고 자갈 투성이의 신작로길을 걸어다녔지요. 여름방학땐 그나마 나았지만 추운 겨울방학땐 몹시도 추웠어요. 그렇지만 군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올 때의 그 뿌듯함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죠.

중1때는 국어선생님이 여름방학을 맞아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주셨는데, 읽어야할 책들이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이었어요.

저희 동네엔 그런 책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몰라 마침 제 짝궁한테 물어보니 자기네 친척집엔 그런 책들이 아마도 있을 꺼라고 하더라구요.(그 친구가 사는 동네는 조지훈 시인의 고향으로 유명한 '주실마을'이었고, 마침 제 짝궁도 '주실조씨'였어요. ㅎㅎ) 그래서 여름방학 중 어느날 우리 동네의 제 친구와 함께 '제 짝궁이 사는 동네'까지 신작로를 걸어서 다녀온 적이 있었어요. 편도로는 30리, 왕복으로 60리길이었는데 아침 일찍 나섰다가 제 짝궁을 만나 <근대문학전집>이라는 두꺼운 책들을 빌린 뒤에 오후 늦게 우리 마을로 되돌아왔어요. ㅎㅎ

그렇게 힘들게 구해온 책들이었기 때문에 그걸 펼쳐 읽는 기쁨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죠. 그래도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책 한 권 읽기 위해 직접 책을 '필사'했던 노고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셈이라 느껴요.

숲노래 2013-01-22 12:29   좋아요 0 | URL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간직하시네요.

어릴 적 다닌 '책마실' 이야기는
찬찬히 적바림해 보시면
'책 한 권'이 될 만하겠는걸요?

그때 그렇게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시골과 숲과 마을과 사람
이야기 솔솔 풀어내시면서
하루하루 누리시면,
아이들한테도 다른 여러 사람들한테도
참으로 아름다운 삶과 사랑이 되리라 믿어요!

페크pek0501 2013-01-22 14:31   좋아요 0 | URL
" 내가 책 한 권 장만하면서 치르는 값이란, 내 웃음값입니다. 내가 책 두 권 장만하면서 내는 값이란, 내 기쁨값입니다." "읽을 때에 책이고, 읽지 않고 모실 때에는 짐이면서 겉치레입니다."
- 좋은 글입니다.

숲노래 2013-01-22 18:30   좋아요 0 | URL
도서정가제 문제는
누가 옳고 그르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을 마주하는 우리 마음을 돌아보는 길을
새로 찾는 데에서 찾아야지 싶어요.

transient-guest 2013-01-23 02: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중학교 다닐때 읽고싶은 책을 사려고 일주일 동안 점심값을 아껴서, 토요일에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려 한 권씩 사들인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서는 주머니가 텅텅 비어서, 집까지 4-5정거장을 걸어왔었죠. 지금도 책을 구입하는 기분은 좋지만, 그때처럼 설레이거나 하지는 않네요.

숲노래 2013-01-23 02:17   좋아요 0 | URL
오...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면, 저도 버스삯을 아껴 늘 걸어다니면서,
버스삯 아껴 모은 돈으로
책도 사고 우표도 사고 편지종이도 사고 하면서
책이랑 편지쓰기를 즐기던 어린이요 푸름이로 살았던 일이 떠오르네요 @.@

설레는 마음이란 참 중요하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문득, 이 말은 살짝 적어야겠다 싶어 살짝 적는다. 좀 '센' 말을 적어 보았지만, 알라딘서재에는 올리고 싶지 않다. '내 자유'가 있기에 '다른 사람 자유'를 건드린다든지, '내 권리'가 있대서 '다른 사람 권리'를 밟는 일은 무엇이 될까. 알라딘책방이 도서정가제를 이야기하는 일은 자유요 권리일 테지. 그래, 자유이면서 권리이다.

 

..

 

책값, 글밥

 


  책값 만 원 붙은 책이 있으면, 이 책을 쓴 사람은 으레 글삯으로 10퍼센트인 천 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책을 쓴 사람이 글삯으로 10퍼센트를 받으려면, 이 책은 ‘책에 붙은 값’인 만 원 그대로 팔려야 합니다. 인터넷책방에서 10퍼센트 에누리를 하는데다가 10퍼센트 적립금까지 준다면, 책을 쓴 사람은 글삯 10퍼센트 받기 만만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책이 처음 나온 지 한 해 지났대서 인터넷책방에서 20퍼센트 에누리를 한다든지, 책이 처음 나온 지 여러 해 지났대서 인터넷책방에서 30퍼센트 에누리를 하거나, 때로는 50% 에누리까지 한다면, 책을 쓴 사람은 무슨 글밥을 먹을 수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매장책방이든 인터넷책방이든, 글밥 먹는 글꾼을 애틋하게 사랑한다고 밝히려 한다면, 갓 나온 책이든 열 해나 스무 해쯤 지난 책이든, 출판사에서 책에 붙인 값 그대로 사람들이 사서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올바르고 아름답습니다. 나온 지 여러 해 지났다고 책값을 마구 후려치는 일을 버젓이 하면서 ‘글밥 먹는 글꾼’ 권리를 지켜 준다는 말을 함부로 읊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지요.

 .. (......) ..

 

  도서정가제 이야기에 앞서, 아니 도서정가제 이야기를 하자면,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 스스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으려 하는가 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 이야기부터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책을 책 그대로 마주하면서 삶을 살찌우는 사랑스러운 마음밥으로 아로새기지 못한다면,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못합니다. 글밥 먹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지 않고 책값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곧, 흙밥 먹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지 않고 쌀값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기름밥 먹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지 않고 사회·정치·경제·노동·환경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4346.1.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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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1-21 10:5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원도 부담스러운 저 같은 학생으로서는....

도서관을 애용하면 될 텐데요.
아무래도 도서관에 책이 없다는 건 변명이겠지요.

숲노래 2013-01-21 10:59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책 없어요 ㅋㅋㅋ
그래서 도서관에 없는 책을 종이에 적어 신청해야지요.
언제 그 책이 들어올는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옛날과 견줘 많이 나아졌어요.

도서관에 책이 없기에,
저는 스스로 '서재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

oren 2013-01-21 11:34   좋아요 0 | URL
이번 일을 계기로 책값의 본질을 건드리는 얘기들이 좀 더 많이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어요. 함께살기님의 글들을 읽으면서 저도 그런 면에서 공감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숲노래 2013-01-21 14:18   좋아요 0 | URL
무엇이 옳으느니 그르느니 하고 말다툼 하는 일은 누구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책을 읽는 삶, 책을 마주하는 사랑, 책을 나누는 즐거움, 이런저런 샘물 같은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어야지 싶어요.

책은 즐겁게 '선물'할 수 있고, 책은 고맙게 '선물받을' 수 있어요. 책값이란 참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그러나, 이를 어떤 정략이나 책략으로 삼아 무언가 꿍꿍이를 벌인다면... 참 딱한 노릇이지요.

양철나무꾼 2013-01-21 12:46   좋아요 0 | URL
저도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도서정가제 라는 것이, 책을 사 읽는 독자들을 위한 정가제가 아니지요.

책 표지에 적정가격을 정하여 기록하지 않게 하고,
인터넷 서점에서 그 책에 합당한 가격을 자기네들 마음대로 정한다는 의미의 '도서 정가제 프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책값이 얼마, 책에 들어가는 종이값이 얼마, 작가나 역자에게 얼마...가 들어가고 그 남은 금액에서 몇 퍼센트의 이익을 인터넷서점과 출판사가 나눠 먹는다는 의미의 정가제 프리가 아니지요.

'정가제 프리'가 그냥 인터넷에서 책값 10%를 싸게 받는 그것만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책을 사읽는 독자나, 책을 사읽을 수도 있는 잠재의 독자들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가격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서 정해져야 하는 것이지,
그냥 사실은 두루뭉술, 수박겉핥기식으로 호도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숲노래 2013-01-21 14:22   좋아요 0 | URL
값은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붙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이번에 9만 원 넘는 번역책 나왔어요.
이러한 책은 굳이 '시장경제 원리'를 따지지 않아요.

<윤길수 책>이라고 있고, '포노'라는 출판사에서
어느 음악가 전집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들 책값은 시장원리하고는 살짝 떨어져요.
저도 1인잡지를 내는데,
이런 책에 붙이는 값은
읽을 사람, 글을 쓴 사람, 책을 엮는 사람,
모든 품을 살피면서, 나중에는 책을 파는 일꾼한테까지
즐거운 땀을 베풀어 주어요.

아무튼, 하늘 무서운 줄 모르면서
어떤 권력을 내세우려 하면
다들 스스로 무너지는 줄 참말 모르는구나 싶어요...

북극곰 2013-01-22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상황 파악이 잘 안되어서 관련 서재글들을 읽으러 다니고 있습니다.
얼핏 구간에까지 정가를 왜 적용해야 할까 생각했는데,
내가 읽고 싶은 책이라면 구간이라도 제 값을 주고 살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구간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이유로 가격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가 힘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3-01-22 09:51   좋아요 0 | URL
신간이든 구간이든 '똑같은 책'이니까요.

<태백산맥>이나 <난 쏘 공>처럼 이름난 작품뿐 아니라,
모든 책들이 '구간'이 되어도 언제나 똑같은 '책'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제도가 도서정가제예요.

책은 책이어야 할 뿐이니까요.
구간이라 하면서 할인율을 왕창 적용하면
작가도 출판사도...
말 그대로 손가락만 빨면서 굶어야 해요...
구간 할인율을 왕창 적용하도록 하자는
인터넷책방 주장은
작가와 출판사를 다 굶겨죽이자는 소리일 뿐이에요.

사실, 구간은 '새로 찍지' 않으면
처음 붙인 책값이라서,
오래도록 천천히 팔리는 책은
몇 해 뒤에는 물건값 오름세와 견주면
퍽 싼값이 된답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인터넷책방이 구간 책값을 마구 후려치기 하는 바람에,
출판사에서는 '구간 절판'을 시키고
'개정 신판'으로 다시 내놓기도 해요.
 

책값, 도서정가제

 


  피카소 그림을 바라보면서 참 즐겁네, 하고 느낀 사람 가운데 누군가 피카소 그림 한 닢 갖고 싶다 꿈을 꿉니다. 그래서 피카소 그림 한 닢을 장만하는 데에 들 돈을 푼푼이 모읍니다. 이윽고, 한 해 뒤일는지 열 해 뒤일는지, 또는 아이들한테까지 이어지며 백 해나 이백 해 뒤일는지, 스스로 꿈꾸던 즐거움을 빛내는 그림 한 닢이기에, 에누리 없이 제값을 치르면서 피카소 그림을 장만합니다.


  숲이 춤을 추고 새들이 노래하는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식구들과 늘 예쁜 웃음을 꽃피우면서 아이들이 앞으로도 예쁜 이야기 길어올릴 보금자리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땅 장만할 돈을 모읍니다. 한 해 뒤일는지 열 해 뒤일는지, 또는 아이들한테까지 이어지며 백 해나 이백 해 뒤일는지, 식구들 모두 꿈꾸던 즐거움을 빛내는 숲자락 깃든 시골땅을 장만합니다.


  책방마실을 하다가 눈을 번쩍 뜹니다. 마음이 환하게 열립니다. 아, 책이로구나. 참다운 슬기와 착한 꿈과 고운 이야기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책이로구나. 책방에 서서 기쁘게 읽습니다. 어느새 책 한 권 훌쩍 읽고는, 셈대로 들고 가서 값을 치릅니다. 이 책 한 권 쓴 사람 넋과 이 책 한 권 엮은 사람 손길을 생각합니다. 이 책 하나 꽂히기에 책방이 눈부시게 밝은 무지개로구나 싶습니다.


  그림값은 꿈값입니다. 땅값은 삶값입니다. 책값은 사랑값입니다. 꿈은 값으로 매기지 못합니다. 삶은 값으로 사고팔지 못합니다. 사랑은 값으로 따지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이야기 있을 때에, 그림이요 땅이며 책입니다.


  책방마실을 하다가 책 하나 읽으려 하는데, 책값이 비싸다고 느낀다면, 그 책은 아직 내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은 책입니다. 또는, 그 아름다운 책을 맞이할 내 마음그릇이 무르익지 않아, 애써 이 책을 장만해 본들 내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책값을 에누리할 수 없습니다. 더 싸게도 더 비싸게도 장만할 수 없습니다. 책마다 붙은 제값에 장만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기에, 책에 어린 이야기가 사랑스럽다면,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 값을 치릅니다. 땅을 일구며 품을 들이듯, 책을 장만하며 값을 들입니다. 냇물 마시고 바람 들이켜면서 내 숨결 얼크러지듯, 내 보배로운 겨를을 들여 책을 읽습니다.


  흥정하는 맛에 물건을 사고파는 저잣거리라 하니까, 책방이 저잣거리와 같다면, 이야기 한 자락 사고파는 값을 흥정할 만하겠지요. 이 책은 얼마 저 책은 얼마, 하는 투로 흥정을 할 만하겠지요. 갓 나온 책이니 얼마, 조금 묵은 책이니 얼마, 하는 양으로 흥정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꼭 장만해야 하는 산삼이라든지 연장이라든지 집살림이라면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흥정하지 못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숲에서 나무를 벨 적에 나무값 흥정하는 사람 없습니다. 나무를 만지는 나무장이한테 품삯을 흥정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빗물값을 흥정하는 흙일꾼 없습니다. 하늘을 섬기며 햇볕값을 흥정하는 흙일꾼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이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값을 흥정하려 한다면, 그이는 ‘굳이 안 읽어도 될 책’을 ‘내 것이라는 물건으로 가지고’ 싶기 때문이로구나 싶습니다. ‘물건 소유욕’이 아니고서야, 책값을 흥정할 일이 없습니다.


  삶을 빛내고 사랑을 살찌우는 책 하나라 한다면, 책값을 즐겁게 치를 수 있도록 푼푼이 돈을 모아 장만해야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살아갈 사람입니다. 우리는 ‘물건 소유욕’을 키울 장사꾼이 아닙니다. 장사꾼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무언가 가지고 싶으면 가질 노릇입니다. 그러나, ‘물건 소유욕’을 앞세우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책읽기’를 가로막거나 그르치지 않기를 빕니다.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은 ‘책이 나오고 한 해 지나고 나면 10% 더 에누리해도 될 만한 값어치’인 글을 쓰지 않습니다.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백 해 뒤이든, 또 아이들 뒤를 잇고 잇는 먼먼 뒷날까지, 온누리 환하게 밝힐 글을 씁니다.


  글을 책으로 엮는 사람은 ‘책을 펴내고 한 해 지나고 나면 10% 더 에누리해서 팔 만한 값어치’인 책을 엮지 않습니다. 책을 펴내는 사람은 누구나,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백 해 뒤이든, 또 아이들 뒤를 잇고 잇는 먼먼 앞날까지, 온누리 눈부시게 빛낼 책을 펴냅니다.


  글을 쓰는 사람, 책을 엮는 사람, 책을 사고파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이들 모두 아름다운 꿈과 사랑과 이야기를 따사롭게 보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6.1.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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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이야기이다

 


  모든 책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책은 나한테 반가운 이야기일 테고, 어느 책은 나한테 낯선 이야기일 테며, 어느 책은 나한테 새로운 이야기일 테지요. 어느 책은 나한테 싫은 이야기일 테고, 어느 책은 나한테 놀라운 이야기일 테며, 어느 책은 나한테 동떨어진 이야기일 테지요.


  모든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없이 사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야기 있을 때에 비로소 사진입니다. 모든 글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없이 쓸 수 있는 글은 없습니다. 이야기 있기에 글맛이 살고 글멋이 납니다.


  그러니까, 모든 노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려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모든 춤은 이야기요, 모든 그림은 이야기입니다. 춤사위에 이야기 한 자락 담고, 그림 한 칸에 이야기 두 자락 담아요.


  이야기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이야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야기를 빚는 사람입니다. 내가 엮어 나누려는 이야기가 책 하나를 징검돌 삼아 천천히 퍼집니다. 내가 일구어 북돋우고픈 이야기가 책 하나에 사랑씨앗으로 담겨 찬찬히 자랍니다.


  이야기를 읽으려고 책을 읽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려고 책을 씁니다. 이야기를 누리려고 책을 장만합니다. 이야기 꽃잔치 열고 싶어 책방을 꾸리고 도서관을 세우며 책마실을 다닙니다. 4346.1.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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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

 


  무언가를 알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오늘 하루 누리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어떤 지식을 쌓으며 내 머리를 차곡차곡 채우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웃을 바라보고 숲을 껴안는 따스한 넋을 북돋우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한 권 열 권 백 권 천 권 만 권, 이렇게 숫자를 늘리려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사랑하는 기쁨을 듬뿍 나누고 싶어 책을 읽습니다. 삶을 빛내는 책이고, 생각을 살찌우는 책이며, 이야기를 일구는 책입니다. 4346.1.1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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