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알맞춤한 때

 


  때가 되면 책이 찾아옵니다. 섣불리 먼저 읽는 책이 없고, 뒤늦게 알아채는 책이 없습니다. 먼저 챙겨 읽으려 한대서 이 책에 깃든 넋을 알알이 받아먹지 못합니다. 나중에 알아보고서야 천천히 읽는대서 이 책에 서린 얼을 못 받아먹지 않습니다.


  오늘 살아가는 내 몸가짐과 매무새에 따라 나한테 알맞춤한 책이 찾아옵니다. 오늘은 이만큼 읽으며 이만큼 자랍니다. 이듬날에는 저만큼 읽으며 저만큼 큽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받아들이며 새롭게 살아갑니다. 날마다 즐겁게 맞아들이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이 사람이 이 책들 읽었기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저 책들 안 읽거나 못 읽었기에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이 책들 알뜰살뜰 즐기면서 누렸기에 아름답습니다. 저 사람이 저 책들 샅샅이 훑고 되새겼다 하지만 막상 이녁 삶으로 즐기거나 누리지 못한 탓에 바보스럽습니다.


  어느 책이든, 책을 읽는 가장 알맞춤한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나는 오늘 나한테 가장 알맞춤하구나 싶은 책을 챙겨서 차근차근 웃으면서 읽습니다. 폴 힐 님과 토마스 쿠퍼 님이 엮은 《사진가와의 대화 1》(눈빛,1991)를 오늘 읽으면서 뿌듯합니다. 보람을 누립니다. 열 몇 해 앞서 읽었으면 그때에는 그때대로 얻은 알맹이 있었을 테고, 오늘은 오늘대로 이 책을 읽으니 오늘 나름대로 새롭게 눈뜨며 헤아리는 실마리 있어요. 4346.3.1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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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눈

 


  옛 어른은 젊은이더러 ‘눈 밝을 적에 좋은 책 많이 읽어 두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면 제아무리 좋다 하는 책이라 하더라도 읽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눈 어둡다 해서 책을 못 읽지 않습니다. 젊은 날부터 책읽기가 익숙한 사람이라면 눈 어둡다 하더라도 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많이 읽지는 못하더라도 한 줄 읽는 즐거움 누립니다. 오래 읽지는 못하더라도 두 줄 새기는 기쁨 누려요.


  젊은 날에 책읽기를 버릇으로 들이지 않은 사람은, 나이 들어 책을 가까이하려 하면 어렵습니다. 오래도록 눈길이 책하고 동떨어진 나머지, 커다랗고 굵은 글씨조차 읽어내지 못해요. 어지러울 뿐 아니라, 글월마다 깃든 삶자락을 헤아리지 못해요. 글씨 훑기에 바빠 책 하나 감도는 사랑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책을 읽는 눈이란 삶을 읽는 눈입니다. 삶을 읽는 눈이란 사람을 읽는 눈입니다. 사람을 읽는 눈이란 사랑을 읽는 눈입니다. 사랑을 읽는 눈이란 숲을 읽는 눈입니다. 숲을 읽는 눈이란 숨결을 읽는 눈입니다. 숨결을 읽는 눈이란 넋을 읽는 눈입니다. 넋을 읽는 눈이란 지구별을 읽는 눈, 곧 보금자리를 읽고 흙과 해와 물과 바람을 읽는 눈입니다. 책 하나 징검다리 되어 내가 삶을 돌아보고 사람을 살피며 사랑을 느끼는 눈길이 한결 짙고 푸르게 거듭납니다. 4346.3.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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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책을 새로 읽기

 


  책은 종이책만 책이 아니기에 언제나 책을 읽습니다. 연필을 쥐어야만 쓰는 글이 아니고, 글로 써야만 남는 이야기가 아니며, 책으로 담아야만 삶이 아닙니다. 삶은 모두 책이고, 이야기는 모두 글이며, 글은 모두 생각입니다.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하루란 육아책 수십 수백 권 읽는 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들하고 놀거나 노래부르는 삶이란 교육책 수백 수천 권 읽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어느 분께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고 말씀했습니다만, 종이책을 하루라도 안 읽으면 가시가 돋치지 않아요. 삶을 슬기롭게 깨닫거나 깨우치면서 사랑을 따사롭게 보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삶이 삶이라는 뜻입니다.


  봄에 봄을 느끼지 못하면 ‘봄을 다루는 책’을 수십 권 읽는들 덧없습니다. 겨울에 겨울을 누리지 못하면 ‘겨울을 보여주는 책’을 수백 권 읽는들 부질없습니다.


  내 코앞에 있는 작은 꽃그릇 풀잎을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숲속 나무와 풀밭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늘 마시는 바람을 살갗으로 느끼며 아낄 수 있을 때에, 정갈한 시골숲 들바람을 느끼며 아낄 수 있습니다.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를 좋아하며 보살필 수 있을 때에, 낯선 사람이나 낯모르는 이웃과 멀디먼 나라 누군가를 좋아하며 보살필 수 있어요.


  밥 한 그릇 먹으며 배부르는 기쁨을 알기에, 배고픈 이웃한테 밥 한 그릇 내밀 수 있어요. 아픈 내 몸이 얼마나 아픈가를 알기에, 아픈 이웃한테 맑은 눈빛으로 밝은 이야기 건넬 수 있어요.


  종이로 빚은 책만 읽을 적에는, 국회의사당 테두리에서 안 벗어나는 정치꾼하고 똑같이 됩니다. 종이로 묶은 책에만 빠질 적에는, 서울 테두리에서 안 벗어나는 신문쟁이 잡지쟁이 방송쟁이하고 똑같이 됩니다. 종이로 엮은 책으로만 온누리를 바라볼 적에는, 쇠밥그릇 두들기는 바보와 똑같이 됩니다. 내 삶이 어떤 빛깔이고 무늬이며 결인가를 느낄 때에 책을 읽습니다. 내 삶빛을 나누고 싶기에 책을 읽습니다. 내 삶무늬를 보듬고 싶기에 책을 읽습니다. 내 삶결을 빛내고 싶기에 책을 읽습니다.


  누구나 날마다 책을 새로 읽습니다. 누구나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합니다. 누구나 날마다 책을 새로 사귑니다. 누구나 날마다 새로운 마음 되어 새로운 이야기 길어올립니다. 4346.3.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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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 어느 분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고 싶었으나, 댓글을 쓸 수 없어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나서, 문득 이것저것 떠올라, 그 방명록에 남긴 글에 살을 입혀 글 하나를 적어 보았습니다. 책과 삶과 사랑과 이야기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

 

‘종이책’을 넘어서는 책

 


  종이책을 넘어서려는 전자책이 춤을 춥니다. 책과 얽힌 일을 다루는 중앙정부에서는 앞으로 ‘전자책’을 더 크게 북돋우려고 애씁니다. 중앙정부가 아니더라도, 종이책을 내려놓고 ‘책이야기잔치(북콘서트)’라든지 ‘책방송’을 꾀하는 이들이 있어요. 한 사람 두 사람 저마다 손에 쥐고 읽을 때에는 종이책이라지만, 라디오에서 누군가 책을 읽어 주어도 ‘소리책’이에요. 누군가 종이책을 읽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때에도 ‘말책(이야기책)’이 돼요.


  우리 삶 어느 자리에나 책이 있어요.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책만 책일 수 없어요. 문화학자는 어려운 한자말 써서 ‘구비문학’이라고 하지만, 옛사람은 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물려주었어요. 종이에 담기는 옛이야기는 모두 입에서 입으로 대물림한 ‘문학’이에요. 곧, 종이책으로 앉히지 않아도 늘 ‘책’이던 이야기요, 이 이야기는 고스란히 삶이에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즐거워요. 구름 흐르는 빛을 올려다보며 마음이 트여요. 냇물 소리 듣고 냇물 한 줌 떠 마시면서 온몸이 시원해요. 유채잎 뜯어먹으니 배가 불러요.


  온누리에는 얼마나 많은 ‘책’이 있을까요. 누군가 개구리를 사진으로 찍고, 개구리 한살이를 들여다보고서 글과 사진으로 갈무리해야 책이 되지 않아요. 개구리를 늘 들여다보고, 개구리 노랫소리 즐기며, 개구리하고 논밭에서 뛰놀면 신나는 ‘개구리 책읽기 놀이와 삶’이 돼요. 불교를 다룬 책, 철학을 다룬 책, 인문학자가 주고받은 말 담은 책, 이런 책 저런 책을 읽어야 책이지 않아요. 할머니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치 담그고 반찬 빚는 솜씨 익힐 때에도 책읽기예요. 아이들과 뒹굴며 함께 놀 때에도 책읽기예요. 한편으로는 책쓰기가 되기도 해요. 밥 한 그릇 지어 식구들과 함께 먹을 때에도 책쓰기가 되고, 아이들한테 자장노래 불러 줄 적에도 책쓰기가 돼요.


  삶이 즐거울 때에 책이 즐겁고, 책이 즐거우면서 삶 또한 즐거웁구나 싶어요.


  여섯 살 된 큰아이한테 오늘 처음으로 ‘외발 샛자전거’를 제 자전거와 자전거수레 사이에 붙이고 면소재지 우체국에 다녀왔어요.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다니다가, 이제 큰아이가 많이 커서 20킬로그램 넘다 보니, 두 아이를 나란히 수레에 못 태우겠더군요.


  일찍 장가간 동무들은 아이들이 어느새 대학생인데, 우리 아이는 큰아이가 여섯 살이랍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늘 들여다보고 함께 복닥이면서, 저 스스로 새롭게 배우고 나눌 수 있어 즐거워요.


  책이라 하면, 나무를 베어 빚은 종이책만 책일 수 없다고 느껴요. 종이책 10만 권을 읽는다 하더라도, 사람책은 거의 안 읽는다면, 사랑스러운 벗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푸른 나무와 풀과 꽃으로 이루어진 책 또한 못 읽는다거나, 하늘책 별책 달책 구름책 바람책 흙책 물책 …… 온갖 책들을 골고루 사랑하지 못하면, 얼마나 따분하고 아쉬운 나날이 될까요. 온누리 온갖 책 찬찬히 즐기면서 하루하루 누릴 때에 비로소 오롯이 한 사람 되는구나 싶어요.


  눈이 어두워지면서 글을 읽기 어렵다면, 아름다운 노래 들려주는 소리책이 있어요. 이를테면, 제비라든지 귀뚜라미라든지 풀무치라든지 참새라든지. 참새도 노랫소리 참 곱잖아요.


  즐거운 삶책으로 하루하루 아름다운 이야기 여밀 수 있어요. 고운 봄날 천천히 저물어 저녁 다가옵니다. 밥 맛나게 먹어요. 서로서로 기쁘게 노래하고, 살가운 노래 들으며 밥 맛있게 나눠요. 4346.3.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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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책

 


  저녁에 아이들 콩콩 뛰며 놀고,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시집 두 권 후루룩 읽습니다. 국수를 마시듯 시집 두 권 쉽게 읽습니다. 이 시를 쓴 두 사람은 시를 쉽게 썼을까 헤아려 봅니다. 쉽게 쓴 시라 쉽게 읽을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 시집이건 저 시집이건 모두 그분들 삶입니다. 내가 쉽게 읽건 어렵게 읽건, 시를 쓴 분들은 당신 나름대로 아름다우며 즐거운 나날을 누리다가 시가 샘솟아 글을 쓰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내 삶을 내 깜냥껏 아름답고 즐겁게 누리다가 이 시집들 만나 방바닥에 엎드려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으며 읽겠지요.


  아이들은 엎드린 아버지 등에 올라탑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아이들 놀잇감이 됩니다. 아이들은 조그마한 방조차 너른 운동장 삼아 달립니다. 이 놀라운 힘은 어디에서 솟아날까 하고 생각하다가, 조그마한 땅뙈기에서도 씩씩하게 뿌리내려 새싹 올리는 들풀을 떠올립니다. 들풀과 아이들이란, 나무와 사람들이란, 멧새와 목숨들이란, 서로 한동아리요 함께 고운 숨결이리라 느낍니다.


  참말, 시인 두 분이 시를 쉽게 썼으니, 나도 시를 쉽게 읽겠지요. 참말, 시인 두 분이 시를 곱게 썼다면, 나도 시를 곱게 읽겠지요. 참말, 시인 두 분이 시를 노래하며 썼다면, 나도 시를 노래하며 읽겠지요. 글을 쓰는 이들 마음이 내 마음으로 고스란히 옮겨듭니다. 4346.3.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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