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이유로 나 역시 내가 목격한 것들을 어딘가에 적어둔다. 보르헤스 식으로 말하자면 ‘무한한 우주는 사건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필요로‘ 하니까. - P90

어쩌면 나는 이 삶의 목격자가 되고 싶은 걸까. 그러니까 골목길을 걸을 때, 천변을 산책할 때, 나는 환한 낮에도 손전등을 들고 걷는 사람의 마음이 된다. 삶의 평범한 순간들에 동그랗게 빛을 비추어 여기 이런 장면이 있구나,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다른 이들도 함께 들여다보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쓰는 사람으로서 드물게 욕심이 날 때는 바로 그런 순간. - P91

평생을 산대도 비추고 싶은 장면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안도와 기대 속에서 매일 손전등을 고쳐 잡는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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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우고 싶은 삶이 이곳에 있다고. 강의실이나 도서관이나 방송국 조명 아래가 아니라 이 들판에, 산자락에, 색색의 지붕 아래에 있다고. 어떤 마음이 너무 귀해서 미안해지는 건 그 속에서 내가 잊고 살던 ‘더 나은 것‘을 보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런 셈도 없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돕는다는 자각 없이도 돕는 할머니 곁에서 나는 사람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처음 듣는 것처럼 다시 배운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돕고, 힘든 사람이 힘든 사람을 돕고, 슬픈 사람이 슬픈 사람을 돕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이미 틀렸다는 비관이나 사람에게 환멸을 느낀다는 말 같은 건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57

누군가 이미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이 희망이 될 때가 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내가 끝끝내 어떤 낙관을 향해 몸을 돌린다면 ‘믿게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란 걸 이제는 안다. 세상이 어때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보고 싶은 그 세상을 먼저 살아내면 된다는 것도. 솟아나는 말들을 나는 그대로 둔다. 희망이 생기도록 내버려 둔다. 가르친 적 없는데 배우게 하는 것, 그게 내가 아는 할머니들의 교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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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는 내가 믿고 읽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런 분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난 평생 에세이집은 못 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내게 글쓰기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당신에게도 ‘문학적 토양‘ 같은 게 있느냐고 묻는 날이 온다면, 밭두렁에서 콩알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려오던 그 얼굴들을 떠올릴 것 같다. 학자가 되었어야 했던 한 사람의 얼굴과, 잘못 산 책을 든 채로 축하 인사를 준비한 사람의 얼굴도. 손때 묻은 봉투 속 십시일반으로 모은 꼬깃꼬깃한 지폐들도. - P46

문학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장면들을 안다고. 그 앞에서 나는 항상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채 허둥거리다가 돌아서서 웃거나 울지만. 제때 하지 못한 말들이 모여서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끈다고. 여태까지 내게 흰 봉투를 건넸던 다정하고 결함 많고 고유하게 평범한 이들에게 언젠가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다. - P46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곳에 제자리처럼 깃드는 것. 그게 내가 아는 문학이라고.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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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북학파로만 알고 있었던 홍대용. 그도 한때는 친명반청주의자였고,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청나라의 실체를 직접 맞닥뜨리면서 우리가 아는 북학파 홍대용이 되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 책에서 (혹은 내가 인용한 구절을 보고)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홍대용도 한때는 누구 못지않게 강경한 존명배청주의자였다. 또한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국토를 밟으려 한다‘는 김종후의 비난을 무릅쓰고 여행에 나섰을 적에도 그는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출국할 때 지은 시에서 자객 형가처럼 비수를 품고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요동 벌판을 날아가 산해관을 열어젖히고 진시황을 한바탕 비웃는 북벌의 꿈을 꾸었노라고 했다. - P407

하지만 여행을 통해 건륭제 치하에서 번영을 구가하던 청나라의 실상을 날마다 목격하면서 홍대용의 의식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청나라의 웅장한 성곽과 예리한 무기와 능숙한 기마술 등을 관찰하고는 북벌론의 비현실성도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존명 의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청 문물을 청 왕조의 소산이 아니라 『주례』의 ‘대규모 세심법‘을 계승한 중화문물로 간주함으로써 청 문물의 논리를 개척한 것이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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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서재지수가 1만점을 돌파했네요! ^^


이러한 이론의 첫 번째 결함은 석기시대의 생활이 지극히 어려웠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고고학자들이 출토한 후기 구석기시대(기원전 3만~기원전 1만)의 유물들은 이 시기에 살았던 수렵민들이 비교적 높은 수준의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누렸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들은 갈팡질팡하는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그들은 결정질 암석을 꺠고 잘라 일정한 형태로 깎고 다듬는 공정에 완전히 통달했고 이는 그 시대 기술의 바탕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에도 ‘전무후무한 석공기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것이다. - P37

그들이 굶어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삶을 연명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구석기시대에 사냥감을 도살했던 자리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동물 뼈를 생각해봤을 때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수없이 많은 매머드, 말, 사슴, 순록, 들소 등이 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유적에서는 1,000마리가 넘는 매머드의 뼈가 출토되기도 했다. 또 프랑스의 솔튀르레 근처에서는 떼 지어 질주하다가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1만 마리가 넘는 야생말의 뼈가 세월의 간격을 두고 쌓이고 쌓인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는 구석기인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이 동물의 습성을 계획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음을 입증한다. 더 나아가 수렵민의 해골은 그들의 영양상태가 아주 좋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P38

구석기시대 우리 조상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온종일 일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은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식물이 제공하는 먹거리의 채집자로서 조상들의 능력이 결코 침팬지보다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자연의 서식지에서 수행한 현지조사는 유인원들이 먹을 것을 찾고 뒤지는 하는 일에 시간을 쓰는 만큼 몸을 돌보고 놀고 낮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냈음을 보여준다. 사냥꾼이었던 후기 구석기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적어도 사자 ― 격렬하게 활동하다가 오랫동안 느긋하게 쉬는 짐승 ― 만큼 틀림없이 사냥에 능수능란했을 것이다. - P39

오늘날의 수렵·채집민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조사한 연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실마리가 되었다. 토론토 대학의 리(Richard Lee)는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 부시먼(Bushman)이 식량을 얻는 데 시간을 얼마만큼 보내는지를 기록했다. 부시먼족은 서식지 ― 이곳은 사막지대인 칼리하리의 가장자리여서 자연이 베푸는 풍요로움의 측면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프랑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 가 매우 열악하지만 풍부한 단백질과 그 밖의 필수적인 영양소를 취득하는 데 성인 1인당 하루 세 시간밖에 쓰지 않았다. - P39

우리는 구석기시대인의 건강상태에 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발굴된 유물들이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엔젤(JOhn Angel)은 구석기시대인의 평균신장과 사망 당시의 치아결손상태 등을 지표로 지난 3만 년 동안의 개괄적인 건강표준변화표를 작성했다. 표를 보면 초기에는 성인 남자의 키가 평균 177센티미터, 성인 여자의 키가 평균 약 165 센티미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만 년 후 남자의 키는 이전 시기 여자의 키 정도밖에 자라지 못했고 여자의 키도 평균 153 센티미터에 그쳤다. 우리가 구석기시대인과 같은 체격을 다시 찾은 것은 극히 최근에 들어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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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3-24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지수 올라가면 기분이 좋지요! 축하드려요~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꾸준하게님~^^

꾸준하게 2023-03-24 11:05   좋아요 1 | URL
내일부터 주말이네요. ㅎㅎ 모나리자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