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매력은, 화려하진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시는 분들의 직업을 따스한 시각으로 조명해준다는 점이다. (물론 장점도 많지만) 여러 문제가 많은 우리 사회가 그래도 아직까지는 무너지지 않고, 한편에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부분도 있음은 이런 분들의 무명의 헌신 덕분이 아닐까.


이 책에 나오는 분들이 자신의 직업과 일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그저 퇴근 시간과 휴일만 기다리기에 급급했던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반성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분들이 더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 인용을 그동안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이번 책 인용은 이게 마지막이다. 책에는 더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더 상세히 나오니 꼭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조산사가 법에 명시된 것은 무려 1914년(조선총독부령 ‘산파규칙‘). 국내에 조산사 면허를 가진 이는 6000여명. 조산사는 간호사 자격을 지닌 이가 1년간 정해진 의료기관에서 조산 수습 과정을 거쳐야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공식 의료종사자이다. - P135

"사실 우리나라 병원에서 하는 자연 분만은 외국에선 고위험군 산모들에게 취하는 방식이에요. 금식하고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고. 쉽게 말해 산모가 병원 시스템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렇지만 산모는 환자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산모는 환자가 아니거든요. 환자가 아닌, 출산의 주체가 되도록 조력하고 이끄는 게 제 일이죠." - P137

그 시간 동안 산모는 몸을 움직이고 근육을 쓰며 출산에 이로운 자세를 찾아 나가야 한다. 자궁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진통의 유형과 세기, 그리고 그때마다 임신부가 취해야 할 자세나 호흡을 알려준다. 우선 북극곰 자세. 이 자세는 곰이 몸을 엎드려 웅크린 자세로 아기가 하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세라고 했다. 다음은 런지 자세. 이번에는 김수진이 시범을 보인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다른 쪽은 쭉 뻗는 이 자세를, 필라테스에서 본 것 같은데. 골반 틀어짐을 잡아줘서 이 또한 출산을 돕는다. 짐볼을 대고 엎드리거나, 배우자와 등을 맞대어 기대는 동작도 권한다. - P138

그가 해야 하는 것은 출산 과정 전반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이다. 조산사는 의료진이니까. 김수진은 산모가 의료체계 안에 갇히지 않고 출산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돕지만, 한순간도 의료진의 위치를 놓지 않는다. 출산은 매 순간 판단이 필요한 일이다. 의료적 개입의 시점을 파악하는 것 또한 조산사의 일이다. 동시에 산모를 믿는다. - P141

아기 머리가 보이는 순간부터 조산사는 산모 발치에서 쪼그러 앉아 꼼짝하지 않고 기다린다. 길면 한두 시간도 걸린다. 어깨가 굳는다. 허리도 당연히 아프다. 하지만 침대를 박박 긁으며 통증을 참는 산모를 앞에 두고 제 몸의 통증을 느낄 새가 없다. 뜨개질을 하는 산파 이야기를 했지만, 그 산파의 눈은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 P144

수업 때 김수진은 산모(와 그 가족)에게 작은 것 하나조차 꼼꼼히 일러두었는데 출산 직전 언제 병원으로 출발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이었다. ‘몇 분 간격으로 통증이 오면 자궁이 몇 센티가 열린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도 된다. 통증이 몇 분 안쪽으로 잦아졌을 때 출발을 하면 된다.‘ - P147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연락을 하라‘는 것. 통증 정도와 관계 없이, 언제든지. 이 말을 듣는 데 산모도 아닌 내가 다 든든하더라. 하지만 그때문에 그가 자면서도 귀를 열어둘 줄은 몰랐다. 잠을 깊게 들 수 없다. 개인 약속도 잡지 않는다. 한 달에 열흘 넘게 밤을 새운다. - P150

산모가 출산의 주체라는 말은 분만의 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산사는 임신부가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관리하고 출산 계획을 세우도록 조력한다.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과정에서 산모의 결정권을 존중하되, 그 판단은 의료적 지식과 임신부와의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 배움과 숙련이 쌓여간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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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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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내가 되고, 내가 일이 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는 베테랑, 좀 더 오래된 말로는 ‘장인(匠人)‘과 비슷한 뜻이려나. 이 책에서 다룬 직업들은 세공사·조리사·로프공·어부·안마사·마필관리사·식자공·세신사·수어통역사·일러스트레이터·조산사·배우로 13명의 베테랑이 나온다.

베테랑은 아무나 될 수 없다. 단순히 한 분야에서 물리적인 시간을 오래 보낸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에 배운 ‘방망이 깎는 노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방망이를 빨리 만들어달라는 주인공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예술 작품을 만들듯 노인 자신만의 기준으로 최고의 완성품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 (그게 수필이었는지 소설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노동과 직업병 문제를 다루어온 르포 작가 희정은, 베테랑들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저자는 몸의 관점에서 베테랑들의 일과 삶을 들여다보며, 책의 프롤로그에서 말한다.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해서 어떤 성과나 기술도 대가 없이 내주지 않았다고.

그것은 신체적인 고질병이다. 어떤 직업이든 직업병은 다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육체 노동인데 열악한 노동 조건 탓에 몸을 돌볼 여력이 없다 보니 그 문제는 더 심화된다. 그럼에도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성실히 살아온 베테랑들에게 저자는 귀를 기울인다.

세월히 흘러 전업이 생기고 일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서, 그때 나를 놀라게 한 자부심이 놀랍도록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회사에서 받은 부당함을 토로하다가도 "이 직업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능력이나 기술이 필요한가요?" 라고 물으면, 표정이 슬며시 밝아졌다. - P8

자신을 최고라 자칭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지키는 선이 있다. 고객 앞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게 하고 싶었다. 망망대해 어디서든 빈 그물로 오는 일이 없는 자신을 믿었다. 수십 미터 하늘 위에서 목숨은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지.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 자부심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P10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하여 무엇이건 지키고자 한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찰나의 성과도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기술도 대가 없이 내주지 않았다. 시간을 내놓은 베테랑들은 둥근 달과 함께 퇴근해야 했고, 굳은 살이 박혀야 했고, 눈물을 머금어야 했고, 살이 벗겨져야 했고,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오래 한자리에 붙박였다. - P11

"나뭇결을 헤아리며 거기에서 자기 인생을 읽는 사람이 목수이고, 철 덩어리가 어디가 아픈지 귀를 열다가 문득 거기서 세상 목소리를 찾는 사람이 엔지니어라고 생각하고 산다." 해도 티가 안 나는 그림자 노동 같은 일을 두고 "문지르고 닦다 보면 내 마음도 닦인다는 말을 좋아한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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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2023-11-19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고 보니 리뷰는 아니고 간략한 책 소개 정도 되겠네요.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대출해서 읽고 있다. 비슷한 주제들을 다룬 다른 책들과 엮어서 리뷰를 써보고 싶어서였다. 자세한 감상은 그때 써볼까 한다. 






"맞습니다! 바로 기술 덕분이지요. 제 기술로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사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거짓말하고 남 속이며 제 잇속 차리는 사람들, 참 많이 봤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제 두 손을 자랑스럽게 바라봅니다. 정직한 손! 저는 감히 제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순전히 제 기술로만 돈을 버니까요." - P68

실제로 그의 매장에 있는 구두는 대부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탐이 날 만큼 멋진 구두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유 명장은 아직도 구두에 대한 아이디어가 쉼 없이 솟아난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사람을 만나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는 기억력이 신통치 않아서 가족 전화번호니 뭐니, 외우고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번 지나가면서 슬쩍 쳐다보기만 한 구두 디자인은 기가 막히게 생생하단 말이에요!" - P73

"평생 단 한 번도 이 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구두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요. 저는 이 일을 어떤 것과도 바꾸 생각이 없습니다. 서울대 졸업장하고도 절대 안 바꾸지요!" - P80

유 명장은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윤이 나는 박달나무 망치를 들어 구두 밑창을 두드린다. 그러고는 이내 만족스러운 듯 혼자 미소를 짓는다. 두툼한 손에 박힌 굳은살,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 그리고 쉼 없는 정직한 노력이 유홍식 명장의 오늘을 만들었다.

지금도 어김없이 대한민국 성수동 한복판에서는 한 장인이 구두를 만들고 있다. 이미 오래전,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기 전부터 스스로 명장이었던 한 사람이.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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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꾸준하게 > 이슬아 작가가 돌아왔다

작년에 이슬아 작가의 소설『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쓴 리뷰다. 바라던 바대로 드라마화가 결정됐고, 원작자가 직접 극본 집필을 한다는 소식도 저번에 들었다. 언제쯤 영상으로 볼 수 있을까 해서 조금 전에 찾아보니 내년이란다. 텍스트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를 텐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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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인 공동저자 브라이언 헤어 ·버네샤 우즈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협동·협력·친화력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정함이라는 전략이 인류의 진화와 생존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두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는 사라지는 것이 자연법칙이니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라고. 오히려 자연은 친화력과 협력이 넘치는 세계라고. 물론 잔혹한 생존 경쟁도 자연계의 일면일 테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갈 능력이 있는 호모 사피엔스(인류)가, 생명체의 양면적 특성 중 어느 면을 더 강조하고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한 대답은 오래전부터 이미 명확하지 않을까.

다윈은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구성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 고 썼다. 다윈을 위시하여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 P20

협력은 아주 오래된 전략이다. 수백만 년 전 떠다니는 박테리아로 존재하던 미토콘드리아는 더 큰 단위의 세포 속으로 들어갔고, 미토콘드리아와 더 큰 세포가 힘을 합치자 동물의 몸에 힘을 공급하는 배터리가 되었다. 우리 몸의 미생물 군집은 다른 기능도 많지만, 특히 우리 몸이 음식물을 소화하고 비타민을 합성하며 장내 물질을 생성하는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하게 해주는데, 이 협력관계는 미생물군과 우리 몸에 공히 이로운 결과물이다. 개화식물은 대부분의 식물 종보다 늦게 발생했지만, 꽃가루를 옮겨주는 곤충과의 성공적 협력관계로 번성한 덕분에, 현재 우리의 정원을 지배하고 있다. - P21

사람(이 책에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를 뜻한다)은 네안데르탈인처럼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지면서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무리로 전환되었다. 뇌가 더 크지 않더라도, 협력을 잘하는 더 큰 규모의 호모 사피엔스 무리가 다른 사람 종 무리를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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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9-26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도 탄생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