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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제목 : 인간실격

쪽수 : 267

출판사 : 시공사

가격 : 9500원 

 

 

*. 책의 구성은 인간실격 외, 여러 단편들 수록집인데, 여기서는 인간실격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텍스트나 작품을 읽을 때, 나는 최대한 객관적인 마음과 비평적인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쓸데없이 과도한 감상주의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요소로 적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책을 읽어나가는데, 그게 쉽지 않은 책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책이 나에게 너무 어렵거나, 흥미가 없거나 와 같은 경우가 있고, 반대로 나도 모르게 작품에 동화되어 비판적인 사고의 끈조차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인간 실격>은 나에게 있어서 후자에 작품에 속했다. 나는 이 책을 붙들고, 꽤나 오랜 시간을 끌었다. 사실 분량만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책인데도, 계속해서 끊어서 읽다가, 3번째 수기를 접하는 순간 그 거부할 수 없었던 무언가의 필력에 사로잡혀, 단숨에 책장을 넘겼었다. 책을 다 읽고 만화책인 김전일을 보는데 만화가 집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책의 후유증은 강대했다. 결국 보던 만화책을 덮고 단숨에 2독을 속독으로 마쳤다.

 

 이 작품 역시도 전에 리뷰를 했었던 <몰락하는 자>와 너무나도 닮은 책이었다. 제목의 상징성, 그리고 부정적인 세계관, 의식의 흐름의 기법 등으로 많은 부분이 비슷한 소설이었다. 소설의 스토리도 아주 간단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소설은 구성적으로 액자식 구성을 사용하고 있다. 서두의 1인칭 화자는 독백적인 어체로 담담하게 사진 3장을 묘사한다. 어느 소년의 어릴 때의 사진- 여자들이 많은- , 그리고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의 미소년의 사진, 마지막은 백발의 머리의 무표정한 특징 없는 사람의 사진에 대해 묘사한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이 바로 주인공인 '요조'의 사진으로, 각 사진들의 상징적 의미는 요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게 만들어줬다.

 

첫 번째 수기로 넘어가면, 첫 번째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본격적인 소설이 시작된다. 이때 소설의 화자는 요조를 1인칭으로 내세우며,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 적용된다. 대체로 1장에서는 어릴 때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배경이 지방 부호의 막내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설정이다, 핵심적인 부분은 요조가 세상에 대해서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조는, 마음으론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과 의문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완벽하게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연기를 하는, 기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 소설 특유의 잔잔함과, 일상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는 시작했으므로, 거부감 없이 볼 수 있었다. 특히 1장에서는 앞으로 요조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암시하는 부분이 나오며 독자의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두 번째 수기는 역시나 두 번째 사진 시기를 설명하는데, 요조에게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자신의 집을 벗어난, 청춘기(고등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슬슬 이 수기에서부터 인간의 추악성을 조금씩 선보이기 시작하는데,  고등학교 청춘들이 겪을 만한, 이성에 대한 사랑과, 평생의 영향을 미치게 되는 우정, 그리고 시대적인 반항을 그리고 있다. 잘 생긴 외모의 요조는 여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호리키라는 친구 같지도 않은 친구와 만나게 된다. 그 뒤 사회주의 사상에 빠졌다가 운동 자체에 실망을 하고, 도피하듯 도망 나온다, 부정적인 사고관으로 방황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쓰네코라는 유부녀와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하지만, 여자만 죽고 요조는 살아남는다.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세 번째 수기는, 그동안 절제했던 작가의 인간에 대한 추악성과 부정적인 내면 심리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기가 물 풍선에 물을 넣는 작업이었다면, 세 번째 수기는 그 물 풍선을 유감없이 터트리는 장이라고 느꼈다. 만화가라는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애가 있는 여자를 알게 되고, 그 여자에게 경제적으로 의탁하기 시작하면서, 그 모녀의 생활에서 어울릴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 요조는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결국 방황하는 삶을 살고, 알코올에 중독되는 삶을 산다. 그런 요조에게 삶의 희망을 가지게 해 준 요시코라는 연하의 여자, 그녀와 요조는 결혼을 하게 되고 요조는 희망을 가지고 소시민적인,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요조는 요시코 역시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준, 절대적 순수를 상징하던 요시코가 상처를 입자, 정신적인 충격과 정신적인 방황으로 요조는, 알코올 중독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결국 그 알코올 중독을 마약으로 대체한다. 구제할 수 없는 요조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그 뒤, 큰 형의 힘으로 풀려나와서, 결국 폐가와 같은 집에 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요조는 이 때 27살을 앞둠에도 불구하고 흰머리가 늘어 마흔 대에 사람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작품의 비극성을 더욱더 심화시키고 있었다. 메인 이야기였던 액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후기로 넘어간다.

 

후기에서는, 서두의 화자가 등장하며, 이 3가지의 수기와 사진에 대한 배경 설명을 끝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은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 소설이다. 그런 성격인 만큼, 주인공인 요조는 다자이의 인생 그 자체를 축소시켜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다자이는 주인공 요조와 거의 흡사한 인생 - 대지주의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점, 사회주의 운동에 잠시 가담했다는 점, 실제로 여인과 함께 바닷가에서 동반 자살 결과 여자만 죽고 자기는 살았다는 점,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점, 그 사이에 아내가 배신한 점- 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자전적인 기록에 적절한 허구를 붙여서,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간에 대한 부조리를 한없이 내보이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몰락하는 삶>에서 비판하는 것과는 비교해볼 수 있는데, 몰락하는 삶에서 베른하르트는 크게 두 가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상은 배경적 비판으로, 그리고 그와는 별개적으로 인간의 내부적인 부분은 광기적인 질투와 경외를 비판으로, 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비판이 조율되어서 극한의 웅장하면서도 엄중한 비극적 분위기를 도출하는데, 다자이의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다자이 역시 당시 시대의 일본 사회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를 비판하면 비판할수록 인간 내부의 심리를 극한까지 파고들었다. 

 

 사회가 부정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더욱더 내면적인 인간의 부조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은 이상적인 다자이. 그러나 그 이상적인 사상 만으론 극복할 수 없었고,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부조화에 대해 다자이는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였다. 그 결과 사회주의 운동의 참여와 그 운동의 실패로 인해 길을 잃은 다자이의 모습은 소설 내에 요조를 통해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다자이는 적극적인 사회적 개입보다는, 내면의 심리의 부조화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다자이의 문학은 그런 면에서 상승 지향적인 성격(외향비판적, 출세적, 이상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하향 지향적인 성격의 문학(내면의 깊숙한 모습을 끝까지 파고드는)이라고 평하고 있다. 주인공 요조는 결국 3류 만화가의 인생을 걷고, 그 만화도 나중에는, 공허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자이 역시 <인간실격>을 쓰기 전, 여러 가지 다작을 했었다. 그는 정신병원을 다녀온 뒤, 새로운 사람이 되어 여러 가지 작품들을 발표했고, 성공했다. 시대적으로 전쟁에 패배하는 일본의 사회상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관을 정립해나간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런 다자이가 외향적 가면 내부에선 평생을 준비했던, 한 방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자전격 소설의 <인간 실격> 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연인과 함께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작 활동을 한 다자이는 독자를 위해 보여주기 위한 문학을 한다는 것에 대한 내면적 자괴감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공허함의 표현을 <인간 실격>에서 3류 만화가로 지칭한 요조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의 형식적인 면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수기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으나, 세 번째 수기로 가면 갈수록 비극의 강도는 극적으로 높아진다. 마치 <인간실격>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다자이의 집념처럼, 세 번째 수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수기를 합친 양보다도 더 많을뿐더러, 더욱더 비극적이다.

 

<몰락하는 자>와는 다르게, 이 소설에서의 배경은 특별한 비판적 상징 없이, 음울한 분위기만을 조장해주고 있다. 그리고 액자 내부의 이야기에서 요조는 극존칭과 존대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데, 이런 기법에서 나는 처음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갔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기묘하고도 괴이한 느낌과, 잔잔한 공포감마저 느꼈던 것 같았다. 비교하자면 <몰락하는 자>는 웅장함과 거창한 비판이라면, <인간 실격>은 잔잔하면서도 피를 말라 죽이듯 비판하고 있달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그런 느낌?

 

보편적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요조의 행위는 절대 용서할 수 없고, 그의 사상 자체도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다자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요조의 마음에 동화되기 시작하고 그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내면에 잠든 또 다른 이타심이란 부분이 다자이의 소설을 보는 순간 응답하고, 그 마음이 커지면서 인간 본연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소설에 공감하게 만드는 기묘한 마력. 이게 바로 다자이의 힘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인간의 내면적 부조화의 모습, 그 자체를 극한까지 폭로하며 이겨내고자 한 다자이. 그런 그가 아니면 감히 '인간실격'이란 단어를 붙일 수 없었으며, 이런 소설을 쓸 수도 없다. 단언컨대 한 평론가의 말처럼, 다자이는 '인간실격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틀림없었다.

 

이런 마력을 지닌 책이라면 독서에 취미를 잃거나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쉽게 빠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리뷰를 마치고, 책을 권해달라는 지인들에게, 조용하게.. <인간실격>을 권했다.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이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만큼 나에겐 굉장히 매력적이었던 작품이었고,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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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최근 역사서와 평전, 철학서만 줄곧 읽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왔었다. 특히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1 독한 뒤로 멘탈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문학으로의 도피를 생각했고, 추천받은 도서가 <몰락하는 자>와 <인간실격> 이였다. 오늘의 리뷰는 <몰락하는 자>에 대해서 써내려가볼까 한다.

 

 일단 이 책은 2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 번째로 배경적인 상황은 디스토피아 사상(부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술상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서사적 흐름이 아닌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내겐 이 책은 쉽게 읽혔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는 저자의 생각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읽기 시작하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배경과 여러 음울한 분위기 역시도 책을 몰입시키는데, 공헌했었다. 쉽게 읽히지 않는 법 역시도 이 소설 내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있었다. 일단 나의 경험으로는, 주말에 즐겁게 책을 일독했었는데, 개인 사정상, 토, 일요일을 친구와 약속으로 인해서, 책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월요일 책을 다시 보는데, 책에 몰두하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었고, 특히 이 책의 서술상 특징이,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한 번 집중력이 끊어지면, 다시 몰두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는 점도 있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나'와 인간의 절대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글렌 굴드' ,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메인인 인물 몰락하는 자를 상징하는 '베르트하이머' 이 셋의 이야기다. 다른 외국 소설들과 다르게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이 3명의 인물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스토리는 진행된다. 나와, 글렌, 그리고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당시의 부유층 출신이며 재산이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 설정되어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음악에 미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집안으로부터 도피적인 선택과 반항적인 선택으로 음악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은 잘츠부르크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 수업을 하는 모차르테움에서 거장 호로비츠의 수업을 같이 듣게 된다.

 

 셋 모두, 공통적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굉장한 재능을 보여줬었으나, 글렌 굴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으며, 천재적인 모습에,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경외감과 상실감이란 애증의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두 주인공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나는 철학의 길로 도피를 결심했으며, 베르트하이머 역시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 뒤, 베르트하이머는 점점 몰락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의존하던 여동생에게 버림받고, 글렌 굴드의 죽음을 접하고, 자결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베르트하이머의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사적인 소설의 구성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지만, 책의 서술은 내가 베르트하이머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현재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회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부분들을 나타내고 있다.  

 

 글렌 굴드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글렌 굴드를 작가는 적절한 허구를 뒤섞어서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극한의 노력과 완벽주의로 인해, 높은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다. 전지적인 인간으로 그리는 그였으나, 작가는 나를 통해서 글렌을 '피 나는 노력을 통해 이룩된' 재능이라며(물론 천재성 역시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타고난 인간의 절대적 완벽성을 부정해버린다. 극 중에서 그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연주를 하다 뇌졸중으로 죽는데, 포기하지 않는, 극단적인 완벽을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대비되는 베르트하이머 역시 천재적이고,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글렌을 만난 뒤로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는 인물로 묘사한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글렌의 포스가 상당함) 점점 책장을 넘길수록 존재감을 발휘하는데, 특히 극한의 의존적인 성격과 줏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팡질팡 고뇌하며, 합리화를 찾는 어쩌면, 강한 멘탈을 가지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 역시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물론 글렌보단 떨어진다), 충분히 부유한데도 전혀 만족을 못하고 모든 것에 불평을 한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연주에 충격을 먹고 진로를 바꾸는 '나'를 보고서야 자기도 따라서 정신과학으로 도피를 감행한다. 그 뒤 여동생에 광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글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지탱하는 글렌과 여동생의 상실 후에, 의존적인 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체적인 결심을 하는데, 극단적인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걷는다.

 

 작품의 나 역시도, 베르트하이머와 비슷한 부류인데, 베르트하이머가 극한의 공황과 방황, 의존으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면, 나는 체념적인 긍정을 통한 합리화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 자신은 베르트하이머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글렌의 천재성을 빨리 알아차리고 단념했다는 자위를 하며, 베르트하이머를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글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으며, 그 글 역시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도 체념적 긍정을 통해서 글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 스스로 글을 많이 남겼지만 죽기 전 모두 불태워버렸고, 나 역시 글렌에 대한 글을 예전부터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 했다. 대상만 달랐을 뿐 도피한 진로에서 그 둘은 뭐 하나 이룬 것 없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 책의 구성은 대립과 대립의 축으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축은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이며, 여기서 나아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대립적인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서 베르트하이머와 내연 관계였던 여인숙의 주인(하류층 계급)과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상류층 계급(베르트하이머를 포함한 나와 글렌 굴드까지)의 대립을 통한 계층적인 대립도 선보인다.

 

 특히 암울한 배경 묘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조국(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과감하고 파괴적인 언어로,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직설적인 돌직구를, 작품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통해 내던진다.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 스위스 등 더불어 모차르테움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여러 배경 묘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있다. 뒷부분에 베르트하이머와 관계를 나눴던 여인숙의 주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작가는 퇴폐한 오스트리아의 법제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설 자체가 인물의 행동도 그렇지만 배경의 비판을 통해서 상징하는 것들이 유난히 많았다.

 

 음울한 분위기, 인간의 고질적인 모습인 질투와 경외를 적절하게 섞어서 다룬 이 소설을 보며, 나 역시도 지난날의 뛰어났던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느꼈던 박탈감과 상실감, 그리고 경외심을 떠올리게 만들었었다. 작가의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얼마나 조국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느낌이 왔으며, 음울한 배경 묘사 속에서 던진 돌직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어쨌든, 책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시점과 서술 방식, 그리고 대립되는 상징으로 전혀 간단하지 않게 만든 작가의 표현력에도 대단한 경외심을 느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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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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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역사서와 평전, 철학서만 줄곧 읽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왔었다. 특히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1 독한 뒤로 멘탈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문학으로의 도피를 생각했고, 추천받은 도서가 <몰락하는 자>와 <인간실격> 이였다. 오늘의 리뷰는 <몰락하는 자>에 대해서 써내려가볼까 한다.

 

 일단 이 책은 2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 번째로 배경적인 상황은 디스토피아 사상(부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술상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서사적 흐름이 아닌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내겐 이 책은 쉽게 읽혔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는 저자의 생각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읽기 시작하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배경과 여러 음울한 분위기 역시도 책을 몰입시키는데, 공헌했었다. 쉽게 읽히지 않는 법 역시도 이 소설 내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있었다. 일단 나의 경험으로는, 주말에 즐겁게 책을 일독했었는데, 개인 사정상, 토, 일요일을 친구와 약속으로 인해서, 책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월요일 책을 다시 보는데, 책에 몰두하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었고, 특히 이 책의 서술상 특징이,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한 번 집중력이 끊어지면, 다시 몰두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는 점도 있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나'와 인간의 절대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글렌 굴드' ,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메인인 인물 몰락하는 자를 상징하는 '베르트하이머' 이 셋의 이야기다. 다른 외국 소설들과 다르게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이 3명의 인물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스토리는 진행된다. 나와, 글렌, 그리고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당시의 부유층 출신이며 재산이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 설정되어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음악에 미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집안으로부터 도피적인 선택과 반항적인 선택으로 음악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은 잘츠부르크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 수업을 하는 모차르테움에서 거장 호로비츠의 수업을 같이 듣게 된다.

 

 셋 모두, 공통적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굉장한 재능을 보여줬었으나, 글렌 굴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으며, 천재적인 모습에,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경외감과 상실감이란 애증의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두 주인공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나는 철학의 길로 도피를 결심했으며, 베르트하이머 역시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 뒤, 베르트하이머는 점점 몰락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의존하던 여동생에게 버림받고, 글렌 굴드의 죽음을 접하고, 자결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베르트하이머의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사적인 소설의 구성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지만, 책의 서술은 내가 베르트하이머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현재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회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부분들을 나타내고 있다.  

 

 글렌 굴드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글렌 굴드를 작가는 적절한 허구를 뒤섞어서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극한의 노력과 완벽주의로 인해, 높은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다. 전지적인 인간으로 그리는 그였으나, 작가는 나를 통해서 글렌을 '피 나는 노력을 통해 이룩된' 재능이라며(물론 천재성 역시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타고난 인간의 절대적 완벽성을 부정해버린다. 극 중에서 그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연주를 하다 뇌졸중으로 죽는데, 포기하지 않는, 극단적인 완벽을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대비되는 베르트하이머 역시 천재적이고,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글렌을 만난 뒤로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는 인물로 묘사한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글렌의 포스가 상당함) 점점 책장을 넘길수록 존재감을 발휘하는데, 특히 극한의 의존적인 성격과 줏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팡질팡 고뇌하며, 합리화를 찾는 어쩌면, 강한 멘탈을 가지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 역시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물론 글렌보단 떨어진다), 충분히 부유한데도 전혀 만족을 못하고 모든 것에 불평을 한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연주에 충격을 먹고 진로를 바꾸는 '나'를 보고서야 자기도 따라서 정신과학으로 도피를 감행한다. 그 뒤 여동생에 광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글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지탱하는 글렌과 여동생의 상실 후에, 의존적인 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체적인 결심을 하는데, 극단적인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걷는다.

 

 작품의 나 역시도, 베르트하이머와 비슷한 부류인데, 베르트하이머가 극한의 공황과 방황, 의존으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면, 나는 체념적인 긍정을 통한 합리화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 자신은 베르트하이머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글렌의 천재성을 빨리 알아차리고 단념했다는 자위를 하며, 베르트하이머를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글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으며, 그 글 역시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도 체념적 긍정을 통해서 글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 스스로 글을 많이 남겼지만 죽기 전 모두 불태워버렸고, 나 역시 글렌에 대한 글을 예전부터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 했다. 대상만 달랐을 뿐 도피한 진로에서 그 둘은 뭐 하나 이룬 것 없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 책의 구성은 대립과 대립의 축으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축은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이며, 여기서 나아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대립적인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서 베르트하이머와 내연 관계였던 여인숙의 주인(하류층 계급)과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상류층 계급(베르트하이머를 포함한 나와 글렌 굴드까지)의 대립을 통한 계층적인 대립도 선보인다.

 

 특히 암울한 배경 묘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조국(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과감하고 파괴적인 언어로,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직설적인 돌직구를, 작품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통해 내던진다.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 스위스 등 더불어 모차르테움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여러 배경 묘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있다. 뒷부분에 베르트하이머와 관계를 나눴던 여인숙의 주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작가는 퇴폐한 오스트리아의 법제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설 자체가 인물의 행동도 그렇지만 배경의 비판을 통해서 상징하는 것들이 유난히 많았다.

 

 음울한 분위기, 인간의 고질적인 모습인 질투와 경외를 적절하게 섞어서 다룬 이 소설을 보며, 나 역시도 지난날의 뛰어났던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느꼈던 박탈감과 상실감, 그리고 경외심을 떠올리게 만들었었다. 작가의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얼마나 조국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느낌이 왔으며, 음울한 배경 묘사 속에서 던진 돌직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어쨌든, 책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시점과 서술 방식, 그리고 대립되는 상징으로 전혀 간단하지 않게 만든 작가의 표현력에도 대단한 경외심을 느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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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규칙 - 손자의 투쟁철학 리링 저작선 4
리링, 임태홍 / 글항아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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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규칙 - 리링 지음, 임태홍 옮김 (리링 교수의 손자병법 해설서)

출판사 - 글항아리

쪽수 - 510 (양장본)

가격 - 28000원

 

  고전을 읽고 리뷰를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고, 피곤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곤란한 부분은 리뷰 포커스를 역자나 저자의 신선한 해석을 바탕으로 쓰는 것, 내용 중심적으로 쓰는 것, 그리고 느낀점을 중점적으로 쓰는 것 3가지 입장에 대한 조율이다. 전자를 위주로 하면 리뷰를 보고 그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큰 네타를 던져줌에 그 책을 읽을 예정인 사람의 신선함을 과하게 뺐을 수 있으며 동시에, 과한 현학적 시각 역시도 부담스럽다. 중자를 중심으로 하면, 독후감의 감자에 대한 부분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점이 있으며, 후자에 중점을 두면, 아무래도 개인 일기장과 같은 부분과 더불어 조금 가벼운 감성팔이식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독서리뷰에 이런 조율적 관점에 대한 고민이 적용되지만 유독히 고전을 리뷰할 때에는 텍스트 자체의 무게감이 이런 감정을 더 누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리뷰를 할 생각이다. 신선한 해석에 관한 내용은 간단하게 언급하고 큰 줄기만 이야기 할 것이다. 내용에 대한 부분은 구성적인 부분으로 간략하게 설명을 할 생각이고, 그 뒤에 감상평을 써 보도록 하겠다. 특히 감상평은 기존의 손자병법에 느낀 점이 아닌 리링본을 보며 느꼈던 부분과 생각들을 정리해서 써 보도록 하겠다.

 

 

 구성과 내용 

 

  서문부터 중국 현대 철학자들 중 두 거장인 후스와 펑유란의 차이부터 들어간다. 사실상 손자병법에 대해서, 별 쓸모가 없는 내용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이 둘의 보편적 시각으로부터 중국 사상사에서 병법의 위치에 대해서 이끌어내는 설명을 도출한다. 후스는 선구자적 제자학의 분류를 설정했다는 데 큰 의의를 두고 펑유란은 이에 발맞춰서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제자학의 분류법을 설정했다. 둘의 입장차와 더불어 둘의 공통점은 병가 사상에 대한 경시로 이어서 설명하는데, 저자는 이 둘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병가 역시도 중국 사상사에 중요한 철학이라는 논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확장하는 방식으로, 고대 사서에 분류된 제자학 분류법에 대한 다소 따분한 설명과 논증, 비교, 예시에 이어서 병가의 사상적인 부분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며, 마무리는 병가에 대한 총괄적인 개괄로 끝을 낸다.

 

  일단 파격적인 부분은 내용보단 구성에 따른 부분인데, 저자는 손자병법을 작게 4부작으로 나누고, 또 각각 2개씩을 묶어서, 크게 2부류로 나눈다. 일단, 1장인 계, 작전, 모공을 묶어서 '권모'라고 분류를 한다. 이 권모 부분은 전쟁을 나서기 전에 헤아려야 할 기본적인 이론에 따른 것으로 계의 해석은 전쟁 전, 묘당(정권)에서 경제적인 계산을 바탕으로 한 우의를 평가하고, 작전 편에서는 군대가 나아가 야전에 대한 총괄적인 개론을 설명한다. 모공 편은 이어서 공성에 대한 개론으로 이어지는데, 이 셋을 시간적으로는 서사적으로 묶음과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전쟁의 추상적인 흐름이라는 부분으로 엮는다. 즉 전쟁 삼부곡이라고 칭하고 있다. 2장에서는 군대의 배치에 대한 이론적인 철학 부분으로 주제를 묶었는데, 뒤따르는 형,세,허실 편이 이에 해당된다. 형편은 군대가 가지는 보편적인 모습에 대한 것이고 세는 보이지 않는 주도권과 기세에 대한 것으로, 둘 다 군대의 배치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허실 편은 세에 대한 확장 편으로 해석하는데, 이 허실 편을 설명하기에 앞서, 죽간 한간본의 <기정>편을 먼저 내보이고 허실로 이어져간다. 즉 2장의 구성은 형,세,죽간본 -기정편, 허실로 이어진다. 이렇게 1장과 2장을 크게는 이론 편으로 분류하고 나머지 부분을 실전 편으로 분류해서 해석을 하고 있다.

 

 3장은 실전 편의 첫 장으로 군쟁,구변,행군,지형,구지 5편을 포함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기존 손자의 해석은 군쟁,구변,행군,지형,구지 이렇게 분류하는데 리링은 여기서 구변 편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한다. 분량이 너무 적고 중복되는 부분이 많고, 가장 혼란스러운 내용(내용의 통일성 부분에서 가장 조잡스럽다)이라고 주장하며, 조심스럽게 후세에 붙여진 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해설을 군쟁,행군,지형,구지,구변으로 구변을 가장 뒤로 보내서 구지의 부분과 이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대체로 3장은 이론 편 2장의 군대의 형세에 대한 부분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나아가서 자세하게 전쟁에 대해서, 지리에 의거해서 설명하고 있다. 4장은 마지막 손자의 두 부분인 화공과 용간을 묶은 것으로, 리링은 이 두 편을 묶어서 '기술'편이라고 지칭하며 해설하고 있다. 당시 화공과 간첩은 전쟁의 첨단적인 기술적 부분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는 모양인데 그럭저럭 얼추 맞아떨어졌었다.

 

 리링은 책을 엄청 조리 있게 재구성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풍부한 고증학적인 지식과, 식견을 이용하여, 신선한 해석을 하고 있다. 특히 처세 학적인 관점보다는 인간의 심리적인 부분에 포커스를 두고 설명을 하고 있으며 경제 경영 사상으로의 재해석적 손자병법이 아닌 군사학과 철학적으로 손자병법을 해석하고 있다, 다른 부분보다도 <한간본> 손자병법과 통행본 손자병법에 대한 철저한 문헌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손자병법의 올바른 해석을 시도한다.

 

 특히 책의 편집이 굉장히 깔끔하며, 적절한 도표 표시와, 배경설명, 그 당시 전쟁에 대한 경제적인 규모와, 구체적인 수치를 정확하게 고증하여 설명함으로써, 고대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점이 만족이었다. 더불어, 훈고 학적 자구 풀이가

 

 좀 지루하긴 했어도, 과하지 않고 필요한 어구만 자세하게 풀이를 해 줘서 책의 무게감을 적당하게 붙여주고 있다. 약간의 통행 본과의 해석상 차이가 몇 군데 있는데, 논란의 해석 부분이나 자의적인 해석 부분에서는, 기존의 번역 부분에 대해서도 역주함과 동시에 한간본에서는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에도 알려주고 있으니, 판단하며 읽어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부분만을 수용하고 읽어주면 무난할 듯하다.

 

 

느낀 점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들 흔히 말한다. 그런데 이 명제는 사실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전쟁의 정당화의 역사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지금까지 내려온 전쟁사의 90% 이상은 승자의 입장에서 정당화된 텍스트가 대부분이다. 리링의 책의 서두에서 전쟁에 대한 총괄적인 글을 읽으며, 나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이해했을까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었다. 대답하기가 힘들었었다. 나는 병법서를 좋아한다. 15살 때부터 손자병법을 본 이래로, 무경칠서를 시작해 국내에 번역된 병법서란 병법서는 다 구해서 읽었다. 매년 손자병법을 적어도 5번은 반복해서 읽는다. 그럼에도 전쟁에 대한 무게감이나, 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했었다.

 

 책을 덮는 순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전쟁이란 것의 무게감과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를,

리링은 말했다

 

 '병법은 살인 예술이고, 군인은 직업 킬러다.'

 

 명장의 또 다른 모습은.. 전문적인 집단 학살자였다.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나는 병법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독을 했지만.. 너무 전쟁을 가벼이 본 것은 아닌가?' 마치 조괄(이론적으론 전쟁의 대가였지만, 전쟁 나가서 45만 군사와 함께 패배한 장수)이 떠올랐다. 아마 조괄이 병법에 똑바로 못 깨달은 이유는 전쟁이 주는 무게와, 전쟁의 참 면모를 몰라서였을 것이다. 나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반성의 마음이 일어났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였다. 전문을 옮겨본다.

 

'10만 명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실로 큰 문제였다. 2000대의 전차에는 8000필의 말이 있는데 여기에도 역시 엄청난 양의 먹이가 필요햇다. 여기서는 아직 소(군량을 끄는 치중거)의 먹이는 계산하지 않았다. 치중거를 끄는 소가 얼마나 되는지를 말한 <사마법> 구부 제도에 따르면, 마차 한 대에 우차 세 대가 함께 나가야 했다. 이것으로 추산하면 2000대의 마차에 6000대의 우차를 배치해야 하므로 8000필의 말과 6000마리의 소가 필요하니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2편의 작전 편의 해설 중 한 부분이다. 문제는 이 대목은, 사람의 군량이 아닌, 말과 치중거에 대한 이야기다. 8000마리의 말과 6000마리의 소, 그리고 거기다 여기에 가정해서 몇 만의 군사의 보급 식량까지 계산해보자. 하루 만 해도 엄청나다.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 말이, 실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이런 전쟁을 오랫동안 끈다는 것은 수성하는 쪽이나 전쟁하는 쪽이나 실로 막대한 피해가 뒤따른다. 예전까지만 해도, 그냥 책 한 구절에 10만 대군이 휩쓸었다는 식의 짧은 문단을 보고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는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보급품에 대한 부분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사서에 기록된 그 짧은 전쟁 문구에는 표면적인 군사의 노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재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당연히 백성이었다. 전쟁에 징용되지 않는 백성이라고 해서 노고가 없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중톈의 <삼국지강의> 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삼국지 시대에 전쟁에서 영웅만을 기억하는데, 사실은 수많은 민초들은 고생했다는 점을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는 말 역시.. 전쟁을 나가건 안 나가건 그만큼 전쟁을 자국에서 한다는 것 자체가 백성에게는 고역이였을 것이다. 

 

 왜 이런 무모한 낭비를 통해서 전쟁을 하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다. 첫 번째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고 두 번째는 죽기 싫어서 싸우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압축해보면 이렇게 나뉜다. 전자는 강자의 입장이고, 후자는 약자의 입장이다.

 

 이런 무지막지한 인적,물적 낭비를 통해 더 큰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죽기 싫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도 큰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크게 투자를 한다. 여기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논제가 발전한 것이 병법이었다. 

 

그래서 '병법은 도덕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다.'

 

 라고 리링은 말했다. 탁월했다. 우리는 누구나, 선하게 자라야 한다. 착하게 자라야 한다 등의 격언을 듣고 자란다. 고대에도 마찬가지다. 자기 개발서의 가장 원조적인 모태는 윤리 서였다. 동양에서는 유교가 발달했으며, 서양에서는 플라톤이 윤리학을 내세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동양에서는 유교가 종교화가 진행되었고, 서양 역시도 가톨릭 신앙으로 발전했었는데 이 부분에서 윤리학의 공헌이 얼마나 지대한 지 알 수 있다. 윤리학이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음에 따라, 거기에 반하는 이단적인 사상들은 배척 받기 마련이었다. 법가를 위시로 한 한비자, 상군서, 종횡가의 서적들은 이단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미묘하게도 병법서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며, 심지어는 그냥 놔뒀다.

 

사실 병법서도 법가서에 만만치 않게 잔인하다. 추상적으로 뜬구름 잡듯 묘사를 해서 그렇지, 동양 병가를 관통하는 사상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전쟁은 속임수다.라는 구절을 대놓고 쓰고 있다. 특히 기만술에 대한 부분은 가히 절정에 가까운데, 적을 속이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아군 사병들조차도 장군의 계획을 모르게 하라는 부분도 있다. 어느 문명이더라도, 거짓말은 윤리와 도덕적 관념에 비춰 볼 때 부정적이다. 병법은 인간의 도덕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포장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고 있다. 병법으로 포장된 전쟁은 굴곡된 인간의 욕망을 대변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발전한 윤리를 비웃듯이 말이다.

 

 인간은 교육받으면 누구나 착하게 잘 자란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사례는 숱하게 많았다.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도덕을 앞세워 있을 수 만은 없다. 죽지 않으려면 뭐든 해야만 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다. 병법은 그런 인간의 생존 철학과 투쟁 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더불어 인간의 가장 탐욕적인 모습 역시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탐욕에 휩싸이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병법은 잘 나타내주고 있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유교권 사람들 역시도, 모순적인 것이 왜 병가의 서적은 그대로 놔뒀냐는 것이다. 무인들은 병법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도 있겠지만, 사실은 극한적 상황에서 나라가 기댈 것은 고대에서는 군사 밖에 없었다. 힘이 있어야, 정의가 있었다. 명분도 힘으로 만들어지는 그런 시대였다.(지금도 다르지 않지만),유학자인 그들도 아마 이 부분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병가를 묵인하지 않았을까? 유가의 라이벌이었던 묵가는 수비적인 병법 지식을 경전에 발전시켰다는 부분 역시도 크게 생각해 볼 문제다. 마찬가지로 유학이 국교화되도, 법가,종횡가서는 이단화했는데, 병가 사상을 놔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였다. 

 

 특히 다른 병법가들에 비해 손자가 위대한 점은, 이런 전쟁의 무게감을 잘 알았다는 점이다. 그는 진정으로 목숨의 소중함을 알았으며, 그래서 병가에서 말하는, 최선의 승리는 부전승이다.라는 개념을 도출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손자의 말대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거의 없다. 아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손자는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리링 역시도 이 대목은 이상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대목을 보며, 손자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앞에서 말했듯 수많은 물자와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것이 전쟁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전쟁의 참혹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부전승이란 개념을 도출했으며 나아가 그는 짧은 언어로, 도덕과는 다른 인간의 또 다른 본성, 투쟁적인 모습에 기초하여 <손자병법>이란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려오는 <손자> 6000여자는 인간의 피로 이뤄진, 문서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작은 책이지만 무게감이 더해 왔다.

 

 전쟁을 합리화할 순 있어도, 미화할 순 없다. 승자와 패자로 나뉘지만 어떻게 해서든 피해는 생긴다, 전쟁은 그 자체로도 참혹한 법이다. 아무리 가벼운 전쟁이더라도, 전쟁은 전쟁이다.  리링의 말 대로 군인은 직업 킬러이고, 병법이란 사상은 살인 예술이다. 는 말이 다시 한 번 와닿았었다.

 

  여러 손자 주석서들을 보고, 심지어 블로그에는 손자병법의 번역서에 대한 포스팅까지 했는데, 조금 부끄럽고 교만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나를 깨우쳐줬다. 특수한 자구 풀이나 신선한 번역보다도, 병법을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접근한 리링의 시각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줬다. 더불어 구체적인 시대적 묘사와 생생한 표현 덕분에 추상적인 전쟁관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접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어느 정도 병법서나 병가에 지식이 있다면,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확신한다.

 

 더불어 처음으로 리링이라는 교수 책을 접했는데 책 자체의 깊이 있는 해설 역시도 많은 부분에서 영감을 받았다. 손자병법 해설서 전작인 <전쟁은 속임수다>도 가격적 압박 때문에 구매를 꺼려했는데, 기대하고 위시리스트에 넣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일본을 필두로 범세계적으로 <손자병법>을 처세학적 관점으로 경제 경영에 응용을 하고 있다. 사실 이만한 전략서도 드물며, 인간의 투쟁의 산물인 이 책은 현대의 경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과 사를 바탕으로 둔 책이다. 그걸 잊으면 안됀다. 경영에는 어느 정도의 경영윤리 라는 것이 있다.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과 암묵적 룰이라는 것이 피상적으로나마 존재한다. 하지만 전쟁은 그런게 없다. 전쟁 전에는 여러 가지의 심리전과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군대가 파병되고, 싸우는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 전쟁과 경영은 닮았지만, 차이도 존재한다. 경영에 적응을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손자병법>은 그런 전쟁을 바탕으로 쓴 책임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는 리링의 말 역시도 공감했었다.

 

 국내에서도 해석적인 번역에서 벗어나, 사상적으로 심화된 고전 역서를 많이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즐겁게 재미있게 독서한 책이었다.

 

책을 덮으며, 인간의 역사와 전쟁의 의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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