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인간사랑 중국사 3
쑨리췬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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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인문정신이 살아있는 출판사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눈여겨 보고 있는 출판사들이 꽤 있는데, 몇몇 예를 들자면, '글항아리', '한길사', '나남', 그리고 '인간사랑' 출판사 등등을 선호한다. '인간사랑' 출판사는 신동준 씨의 고전들이 대부분 출판되고 있는데, 나는 신동준 씨의 번역이 꽤나 마음에 들기 때문에 몇몇 저서들을 구매했고, 그 출판사인 '인간사랑'을 좋아하는 편이다. (기존 학계와 상반된 주장의 번역을 하시는데, 가끔 자의적인 해석도 보이시지만, 개인적으로 학문의 획일성을 자극하는 좋은 예라고 느껴진다.)

그런 인간사랑에서 교양서로 '중국 선비'들을 고찰한 책을 번역했다.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올바른 선비정신'인데, 그런 내 관심에 부합되기도 했고, 우리의 문화라고 생각할 법한 선비정신을 중국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적용되고 있는지 궁금증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 원류로 따지자면 중국이 선비정신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의 선비정신은 중국의 문화를 많이 받은 가운데 독자적으로 발전한 사상인 것 같다.) 책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책은 두툼했다. 648페이지에 걸쳐 중국의 선비들에 대한 모든 것을 고찰하고 있었다. 선비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서, 과거, 의식주, 유람, 사회활동, 모임, 취미, 여자 등등을 고찰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저자가 가르치는 과목이 '위진남북조사'가 있어서인지 따로 위진 남북조의 선비 생활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었었다.

일단 좀 비판하고 싶은 것이, 책을 폈을 때, 놀란 점이 머리말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역자 후기가 있긴 하지만, 책을 펴자마자 튀어나오는 목차와 바로 책의 본문이 나오는 것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책을 볼 때 머리말을 항상 먼저 보는 편인데, 인쇄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머리말을 편집하지 않은 탓인지 (설마 저자가 머리말을 안 썼을 리가...) 아무튼 이 부분이 굉장히 아쉽다. 머리말이 없는 책이라면 역자 서문이라도 앞에 배치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부분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책의 제목에서 풍기듯, 고대의 선비뿐만이 아니라, 중세와 근세의 선비들까지, 춘추시대 이래로 청나라 시절까지 다양한 중국 선비의 모습들을 밝히고 있었다. 따라서 책 제목을 그냥 '중국 선비들의 생활사'라고 이야기하거나 시대성을 표시하자면 굳이 고대라고 칭하기보단 '중국 옛 선비들의 생활사' 였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고대라는 구분이 지어진 단어보다는 옛날이라는 모호성이 있는 단어(고대 중세 근세를 포함하는 부분이기 때문에...)가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 제목에서의 '고대'는 시대적 분류의 고대라기보다는, 내가 의미한 옛날이라는 그런 의미로 써진 것 같지만.)

책의 부분들이 워낙 소상하고, 시대별로 선비들의 다양하고 엽기적인 (몇 가지 예로 들면, 친구를 만나고 싶어 멀리서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문 앞에서 마음이 바뀌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부분) 모습들이 나타나져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다소 꼿꼿하고 격식 있는, 고루한 유학적 사고 관념에 입각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이 책에 나온 중국의 선비들은 그런 모습도 있긴 했지만, 다소 자유분방한 모습들도 있었다.(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의 선비들) 나는 다소 선비라는 이미지와 유학적 이미지를 연결하여 생각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도가에서 말하는 선비의 이미지도 제시하고 있으며 비단 유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상에서 강조하는 선비 정신들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종국에 가서는 유학적인 모습의 선비들이 많이 설명되긴 했지만 말이다.

특히 마지막 장, 위진남북조의 격동의 시대의 선비들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며, 파격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양한 시대의 선비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자의 논의에서 강조 받는 시대는 아무래도 '위진남북조'의 선비들이었다.

'위진남북조' 선비상을 읽으며 생각했던 것은 위진남북조의 영웅인 '조조'가 떠올랐다. 조조는 유학을 존중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도가의 학문도 익혔었다. 그의 치적에서 볼 수 있듯, 파격적이고 격식 없는 통치의 방침도 어쩌면 그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중국의 선비들은 그 땅덩이만큼이나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지녔으며, 많은 왕조를 거쳐왔듯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의 선비들은 다소 네임밸류가 있는 선인들만 기억했는데, 이 책에는 그런 네임밸류가 강한 선비들은 물론, 다소 생소한 선비들의 행적까지도 소상하게 밝히고 있었다.

내가 가장 유념해서 본 부분은 독서 부분과, 과거시험 부분, 그리고 음식에 대한 부분과(술 포함), 여자에 대한 부분이었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음식에 대한 부분이었다. 특히 중국의 여러 선비들의 음식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놀라웠던 점은

음식을 연구했던 선비들이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하고 과식보다는 소식을 선호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건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들을 읽으며, 지금 현재에도 통용되는 지혜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더불어 가장 흥미 있었던 부분은 선비와 기생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었다. 예로부터 남녀 간의 로맨스만큼 풍부한 관심거리가 없듯, 중국 대륙에서의 선비와 기생의 이야기들도 풍부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중국의 기녀들 역시 높은 교양 수준을 갖췄으며, 선비들에게 육체적인 쾌락을 넘어선 정신적인 안정을 주려고 노력했었다. 뛰어난 선비들 역시도 색욕을 밝히기보단, 정신적 교제를 우위에 두고 기녀들과 시나 글을 주고받았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문예에 뛰어난 선비들의 시나 부가 기녀들의 가요로 전해져 유행가처럼 불렀다는 부분에서, 요즘 시대의 가요 열풍과 여중고생들의 팬클럽을 연상하기도 했었다.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선비와 아내, 선비와 첩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는데 반해 선비와 기녀에 대한 부분만을 다룬다는 점. 이 부분이 아쉬웠으나, 한편으로는 수긍한 부분이, 그 시절 선비의 결혼은 어쨌든 자신의 의지보다 타율적인 정략적인 결합이 많았고, 기녀와의 만남은 아무래도 자의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선비의 여성을 다룬다면 기녀를 다루는 것이 맞겠구나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아내에 대한 부분이나 가정생활 육아나 그런 소상한 부분도 밝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기녀와 다룬 부분이 또 재미있던 것은 기녀들과 선비의 시가 인용되고 있는데, 그 시들이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님을 위한 애절한 마음을 절절하게 노래한 기녀들, 그리고 점잔 빼는 이미지인 선비들이 솔직하게 애정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고하를 막론하고 뜨겁구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이 챕터의 시들은 뜨거웠고 생기가 있었으며, 애절했었다. 다른 과거나 독서 취미 등등은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아쉬웠었었다.

책은 대체적으로 중국의 선비들을 시대별로, 다양한 모습들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그런 다양한 모습의 선비들을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부분들도 다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면, 기녀와 선비를 다룬 부분에서, 선비와 기녀가 아름다운 로맨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을 통하고 새로운 여인을 찾고, 이전의 기녀에게 이별을 고하는 매몰찬 선비들의 모습도 있었다.

책의 주된 서술 방식은 인용과 설명이었다. 설명은 다소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인용은 풍부하게 하여서, 솔직하게 말해서 좀 지루한 전개 부분도 있었다. 선비정신이나 선비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비교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전의 인용도 엿보였고(생소한 시도 많았다), 더불어 국내에서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한 중국 선비들의 모습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선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양의 계급에서 선비는 최상위를 담당하고 있는 계층이다. 士라는 계급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대체적으로 문인에 속하였고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무인의 계급에 속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국의 선비정신만을 연구했으며, 자국의 선비상에서만 교훈을 얻으려 노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중국의 선비에 대한 연구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의 선비를 다룬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생소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책을 계기로, 중국의 선비정신에 대해서도 대중에게 활발하게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어쨌든 다양한 중국의 선비의 모습 속에서, 버려야 할 부분도 있었으며, 엽기적이고 기괴한 부분도 있었으며, 본받아야 할 부분도 있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대륙의 선비'의 모습을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굉장히 유익하게 독서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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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물에서 한눈 팔기 - 서로 다른 생각들의 향연, 창의융합 콘서트
강신주 외 지음 / 베가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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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의 책을 싫어한다. 여러 저자가 챕터를 맡아서 쓴 것들을 편집한 책, 그리고 무슨 무슨 강연록을 책으로 엮은 것, 등등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 많이 들어간 책이라서 책을 손에 잡았을 때는 유쾌한 마음은 아니었음을 솔직하게 밝힌다. 사실 이런 류의 책은 뻔하지 않겠는가, 인문과 과학 기술의 융합,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소 원론적인 통합과 융합을 이야기한 강연을 옮겨놓은 책이겠구나... 그런 편견으로 책을 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책을 본 순간, 나는 내 생각과는 책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의 주제나 이 책의 내용적인 부분보다, 우선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책의 편집에 대해서 굉장히 칭찬을 하고 싶었다. 일단 책은 굉장히 알록달록한 사진들이 많았고, 그 챕터에 맞는 사진들이 풍부하게 있어서 시각적으로 책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뭐랄까 마치 인문과 과학 두 속성은 다소 일반인들에게,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가 강한데, 전체적으로 책의 편집, 특히 시각적인 부분에서 굉장히 공을 들인 티가 났었던 책이었다. 아무리 인문학이나 과학 기술이 가벼움을 지향하여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학문의 무거움을 벗어내기란 쉽지 않다. 대중이 인문과 과학 기술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본질적 무거움 때문이기도 하다. 책의 편집 구성, 특히 시각적 측면에서 살펴봤을 때, 이런 알록달록하고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편집에서 호감을 느꼈었고 학술적인 인문서나, 전문적인 과학서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효과를 느꼈다. 마치 인문 과학서를 읽는 느낌보다 잡지를 읽는 기분이었었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시각적인 효과 이상으로 '청각'과 '영상'을 곁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인 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시각 매체나 청각 매체의 구체성에서 다소 취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 읽는데 훈련이 잘 된 독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이라는 텍스트보다 더욱더 구체적인 '영상' 매체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런 영상 매체를 책에다가 담았다.

 기존의 책에서도 영상 매체를 담거나 음성 매체를 담은 적이 있다. 부록으로 테이프를 주거나 CD에 영상을 포함하는 등의 방식으로, 영상과 음성을 책에 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편의성이 아닐까, 책을 보다가 바로, 영상이나 음성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켜서 확인을 해야 되고 그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 책은 '영상'과 '음악'을 내포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을 이용한 바코드 형식으로 첨부를 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굉장히 놀라웠다. 보통 책을 볼 때 우리는 스마트폰을 항상 곁에 두고 책을 본다. 그러다 책에서 강연자가 '영상 하나 보고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대목을 발견했다. 예전 책들 같으면 그런 영상들을 CD에 담거나, 글로 풀어서 주석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과감하게도 스마트폰이 인식할 수 있는 바코드가 있다. 곁에 있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이 바코드를 인식하면, 스마트폰에 바로 책에서 언급하는 영상이 나온다. 굉장한 편의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책은 '창의융합콘서트'라는 강연록을 엮은 책이다. 강연록을 책으로 옮길 때 가장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강연의 그 감동과 강연의 그 생생함을 책에 최대한 반영을 해야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책들은 강연에 비해서, 책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만큼 고정되고 정적인 텍스트에 강연이라는 동적인 리얼리티를 담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결국 시각적으로 화사한 이미지 자료를 통해, 그리고 영상을 통해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을 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숱한 강연록의 편집책 보다, 이 책은 구성적으로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내용적으로 책의 리뷰를 해 보자면, 책의 리뷰를 하기 전에 이 책의 모태인 '창의융합콘서트'가 무엇인지부터 언급을 해야겠다. 나도 사실 책을 통해 처음 안 지식콘서트였는데, 각 방면의 혁신적인 인재들이 나와, 창의력과 융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지식 토크라고 정의하면 될 듯싶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항간에 인기를 끌고 있는 철학자 '강신주'를 필두로,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음식 인문학자 '주영하', 로보티스 수석연구원 '한재권', 제일기획의 '김홍탁' , 다음소프트 부회장 '송길영' 등등을 포함한 13명의 창의적이고 융합형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나와서 강연을 하고, 챕터가 끝날 때 방청객의 질의를 받은 것과 강연자들끼리의 대담을 싣고 있는 구성이었다.   


 책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는 여러 가지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 번째, 전문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전문성보다는 융합형 인재가 크게 주목받는다는 것, 두 번째는 그런 융합적 사고력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전개하는 논리가 기존의 강연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함으로 융합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즉 그들의 창의력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인문학자,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 음식문화학자, 기업인 등등 그들이 만나서, 그들만의 창의적인 언어로 인문과 기술에 대한 융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 아니 굳이 인문과 자연과학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 과학, 등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융합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실태는 인문사회에 나온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 간의 행보가 뚜렷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이공계에 대해서 더 높이 치고 더 높이 인정해주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너도 나도 이공계를 진학하려고 노력한다. 국가는 6차 교육과정에서 통합형 인재를 추구하였다면, 7차부터는 전문형 인재를 추구하며, 인문계 학생에게는 과학을 가르치지 않고, 이공계 학생에게는 사회와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이공계에 진학한 학생들은 인문계 학생들을 바라보며 '현실성 없이 뜬구름 잡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폄하한다. 인문계 학생들은 자연계 학생들을 바라보며 '교양 없는 속물 현실주의자' 들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은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인문이란 학문은 결국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과 기술은 원천적으로 인간을 좀 더 풍요롭게 살기 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다. 고대에는 이런 인문과 과학기술을 나누지 않았었다. 플라톤은 철학자로 잘 알려졌지만 사실 플라톤은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대학 아카데미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에 들어오지도 말라.' 서양 사회의 발전 내부에는 인문(철학)과 자연(수학)이 공존하고 있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를 들어보면, 얼마 전 드라마에서 방영된, 정도전, 그리고 명량의 이순신,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대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도전은 고루한 유학(인문학)만을 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군사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한양을 축성할 정도로(기술) 기술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진 다방면적인 인재였었다. 세종대왕 역시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경학(인문학)에도 밝았으며, 경학을 바탕으로 한 수학 교육에도 중점을 뒀고, 기술의 발달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군주였다. 그 결과 장영실을 필두로 한 세종의 기술자들은 조선의 기술을 드높였고, 세종의 인문학자들과 세종은 한글이라는 문화유산을 만들 수 있었다. 인문과 자연의 두 치적이 만나서, 세종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궈냈었다. 그것은 세종이 생각하고 있던, 인문과 과학 기술에 대한 융합의 힘이었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 역시도 다방면적인 저술에서 인문학적인 소양을, 그리고 화성 축조를 비롯한 다리 건설 등에서 기술적인 면모를 보여준 융합형 인재였었다.

 이순신 역시도 마찬가지다. 다들 이순신을 무인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이순신은 무인이기 이전에 문인이다. 그는 문과를 준비하던 선비였었으며, 무인이 돼서도, 선비 때 학습하던 유교의 사상을 버리지 않고 활용하였다. 당시의 무관들이 책을 가까이하지 않고, 문을 가까이하지 않을 때,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인문정신으로 스스로를 무장했으며, 자신의 기술력을 응용하여 거북선을 강화했고, 그 결과 임진전쟁에서 혁혁한 성과를 보일 수 있었다. 그것 역시도 문과 무의 결합, 그리고 인문과 기술의 결합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온 명사들의 이야기를 잘 보면,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점이 바로 융합적인 관점이었다. 그들이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의 가장 원동력은 고정된 관점이 아닌 지식과 지식 간의 유연한 관점, 관념과 관념을 넘나드는 그런 융합적인 관점이었다.

 교훈적인 내용을 떠나서, 내가 흥미 있게 봤던 점은 역시나 내가 가장 부족한 분야인 과학 기술자들의 연설이었다. 나는 특히 로봇 시대에 대한 말씀을 하신 '한재권 로보티스 수석디자인'의 강연이 재미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명공학과 윤리에 대해 말씀하신 '박태현 교수'님의 말씀도 의미 있게 들었었다.

 특히 놀랐던 점은 다음 소프트의 부사장인 '송길영'씨의 강의 챕터에서, 설명 방법이나 마인드가, 굉장히 참신하다는 점을 느꼈다. 일례로, 한 청중객이 구글과의 비교를 이야기하자, 구글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며, 구글은 구글이고 다음은 다음이니, 인간 중심적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대답에서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인문 분야 쪽의 강연으로는 '윤경로' 님의 글로벌 인재에 대한 이야기가 귀감이 됐다. 듀폰이라는 글로벌 기업에서 아시아 인사팀을 담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인재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질은 좋은데 획일적인 교육과 주입식 교육 때문에 창의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특히 이분께서 이스라엘 영재교육센터 이사장이자, 세계 영재 국제 네트워크 설립자인 '헤츠키 아리엘리'에게 유대인의 잠재력에 대해 자문을 했는데, 그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치열했고(유대인은 독립된 나라가 없다.), 두 번째는 남다른 교육열이며, 세 번째는 그들이 행하는 탈무드 교육법에 있다고 했다. 특히 우리나라와 대조를 이룬 것이 바로 저 세 번째였다. 우리나라 역시도 교육열이라면 어느 국가에 뒤지지 않으니까,

 그들은 어릴 적부터 탈무드라는 인문고전을 읽고, 자유스럽게 토의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이것을 '하브두타'라고 한다. 즉 어린 시절에는 부모와 자식이, 커서는 친구와 친구끼리, 그렇게 토의와 토론을 거친 인문고전 교육은 그들의 창의적 사고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것이 헤츠키의 논지였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열풍을 맞고 있는 인문고전을 어떻게 소화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지식 습득형 교육에 대해서 안타까움이 일어났었다.

 책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과학 기술 영역의 저자들의 논지를 읽다 보면 융합과 통합을 이야기하지만 다소 그들의 영역을 주로 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결론 부에서 황급하게 인문과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데, 그런 부분에서 약간의 부조화성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와는 반대로 음식 인문학자 주영하씨는 자신의 영역인 인문의 영역으로 음식을 고찰하기보단 상반되는 기술적 영역, 김치냉장고를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전개방법으로 봤을 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쪽이 더 융합적 취지에 옳지 않을까 싶었다.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강신주씨의 청중 토크를 읽고 싶었는데,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다른 분들은 청중 토크를 다 기록했는데, 강신주씨의 것만 없어서 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책에 나오는 강연자들은 하나같이 보통의 평범한 마인드를 지닌 사람들과는 구별됐었다. 그 점이 그들의 강연을 담은 이 책에서 생생히 느껴졌었다. 책의 구성과 책의 내용, 모두가 상당히 내실 있다고 생각됐었다. 그냥 일반적인 짜집기 강연록들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공을 들인 부분이 보인 책이었다.


 여러 저자들의 다양한 관점, 그리고 인문학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인가에서부터, 차별화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가 갖춰야 할 조건들, 기업을 경영하는 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여러 경험담이 이 강연에 녹아 있었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 아닐까 싶었다. 더구나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거나 독서에 이제 막 취미를 붙이려는 사람에게 시각적, 구성적 효과가 뛰어난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나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런 종류의 짜집기 책을 극도로 싫어하고, 한 저자가 같은 논지로 주제를 전개하는 책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보다, 내가 느낀 것들이 많았었고, 나의 그런 강연집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본 리뷰는 베가북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리뷰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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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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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이었다. '치킨'이라는 먹거리는 요즘 대한민국의 국가공인 마약이라고까지 알려진 먹거리다. 식욕이 없거나, 밥 먹기 귀찮을 때,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 1순위로 생각나는 것이 '치킨'이다. 여기에 맥주까지 곁들인다면, 흔히 말하는 환상의 '치맥'이 완성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러 사람의 기호를 만족시킬 수 있는데다, 아이들에겐 콜라를, 어른들에게는 맥주만 있다면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바로 우리나라의 '치킨'이다. 저자는 이런 치킨에 대하여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책은 평이하게 잘 읽혀나갔다. 음식을 주제로 한 인문서는 내 개인적인 느낌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분야의 인문서들보다도 진입 장벽이 친숙하고 부담이 없는 느낌이다. 이 책도 그랬다. 평이한 서술과 그러면서도 조곤조곤하게, 치킨과 치킨을 둘러싼 모든 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책에는 치킨에 대한 유래와 치킨에 대한 역사를 시작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치킨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나라에서의 치킨의 역사,(백숙 - 전기구이- KFC를 시작으로 후라이드의 전성시대 - 양념치킨 - 그리고 다시 후라이드), 후라이드치킨의 종류(크리스피 치킨, 엠보 치킨, 민무늬 치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치킨과 맥주의 그 필연적인 만남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시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롯데 마트의 통큰 치킨'과 '대구 치맥 페스티벌', '조류 독감'에 대한 치킨 업계의 실태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장의 '치킨집 사장으로 사는 것은'이라는 대목과 마지막 소챕터의 '양계유감' 즉 하림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싶다.

 

책은 치킨이라는 문화적 콘텐츠를 가지고 통시적으로는 치킨의 역사와 유래, 그리고 한국의 치킨의 발자취를 고찰하고 있었고, 공시적으로는 현대 치킨의 현황을 살피며, 프랜차이즈화, 기업화된 치킨의 현 실태와 그에 따른 부분들을 고찰하고 있었다. 즉 전자는 정보제공이라고 할 수 있겠고 후자는 치킨으로 알아볼 수 있는 현재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의 최종적인 칼날은 '자본주의화' 된 프랜차이즈 치킨의 부작용을 향해 겨누고 있었었다.


내가 성인이 된 시점에는 이미 치킨이라는 존재가 사회에 '보편적으로' 들어왔던 문화였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책에서 말하는, 명동의 전기구이 치킨도 생소하며, 사실 KFC도 친숙하지 않다. 내가 친숙한 브랜드는, 교촌, 네네치킨, BBQ 등의 상업주의의 끝판왕을 달리는 프랜차이즈 치킨들만 각인되고 있었다. 그래서 치킨의 역사를 읽을 때, 공감을 하기보단, 내 이전 세대가 이런 치킨들을 먹어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있어 치킨이란 '크리스피 치킨' 만이 유일한 후라이드치킨이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엠보 치킨', '민무늬 치킨'을 보며, 후라이드치킨이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런 '엠보 치킨'이나 '민무늬 치킨'의 존재를 알더라도 쉽게 먹을 수 있지 않다. 이미 시장은 '크리스피 치킨'에 장악당했으니까,

 

치킨과 맥주에 대한 고찰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치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맛은 원재료인 닭의 맛보다는 '튀김'의 맛이다. 뜨겁고 바삭한 맛의 치킨에 원재료의 닭 맛은 중요하지 않는다. 그저 닭은 냉장육, 국내산 닭이면 오케이인 것이 치킨의 현주소다. 맥주 역시도 특유의 보리 식감을 느끼기보단, 과한 탄산과 차가운 맛으로 원 재료의 맥주 맛을 느끼지 못한다. 닭의 느끼함, 그리고 튀김의 느끼함을 강한 탄산을 가진 차가운 맥주가 잡아주는 시스템, 그것이 바로 치맥의 탄생 비결이었다. 그 맛의 비결 앞에 너 나 우리 할 것 없이 중독되어 갔다고 책은 설명한다. 맥주를 못 먹는 어린아이는 맥주 대신 콜라를 먹는다.

 

 책을 읽으며 정리해 보건대, 치맥의 본질적인 맛은 닭의 맛과, 음료의 풍미 짙은 맛이 아닌, 뜨겁고 바삭한 기름 맛과 그것을 중화시키는 차가운 탄산의 맛, 그것이 본질이었다. KFC가 우리나라에서 기를 못 편 것도 치킨에 짝꿍인 맥주를 판매하지 못해서라고 분석하는데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비평을 담고 있는 2장, 2장의 주제는 프랜차이즈 치킨점 사장들의 고뇌와 일상을 담고 있었다.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도 숱하게 술자리에서 지껄이는 말이 이것이다. '임원이 되지 못하면 퇴직금 두둑하게 받아서 닭이나 튀기며 살아야지.' 그 녀석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기업을 위해 평생 '을'의 입장으로 일했으나 '갑'의 입장인 임원이 되지 못했으니, 말년엔 자신만의 가게를 차려서 '갑'이 되겠다는 심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말년에는 뭐... 치킨이나 피자집을 해야겠지...

 

 

 그러나 이 책을 보는 순간 그런 기분이 싹 사라졌다. '갑'의 희망을 걸고, 자영업을 시작한 치킨 업주들의 한 맺힌 이야기, 프랜차이즈의 이름을 따내기까지의 '어마어마한' 자본의 필요성, 그리고 성사되는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노예 계약'과 같은 불공정한 대우 등등을 저자는 잘 밝혀놨다.

 

 고객에 치이고, 지사에 치이고, 본사에 치이고, 가뜩이나 많은 동종 업체들과의 전쟁에서 치이고, '갑'을 꿈꾸며 창업을  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울며 겨자 먹기로 창업을 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치이면서 좌절한다. '사장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사연'이 있었다. '갑'이 아닌 어쩌면 '병'과 '정'의 위치가 바로 대한민국의 곳곳에 있는 치킨 업주들의 실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이 부분은 치킨 업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프랜차이즈 업체나, 편의점 업주들의 입장이겠다. 본사는 이윤을 극대화하고, 오로지 하나의 깃발 '이윤창출'이라는 목표 아래에 대부분의 짐을 가맹점에게 떠맡기고 있었다.

 

 그것은 뒤 장에 나오는 닭의 유통과정, 육계 사업에서도 분분했다. 우리에게 신뢰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하림'은 그렇게 육계 공장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책에서 나오는 양계농민과의 인터뷰, 그리고 치킨 사장 업주와의 인터뷰는 보여주고 있었다. 기업의 극대화된 이윤 창출에 억눌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업을 해야 하는 그들의 고뇌, 인터뷰에서는 그 고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갑'의 횡포가 두려워서 자신들의 이름을 인터뷰 글에서 떳떳하게 밝히지 못 했다. 구구절절하고 자세한 인터뷰 내용보다도 자신의 불편사항을 본사가 알까봐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부분,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힘든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가볍게 먹는 '치킨'은 그렇게 기업에겐 가볍게, 누군가에겐 무겁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책을 보며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책을 보며 행했던 의문 '그래서 어떻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자주 먹는 치킨에 대한 실태를 소상하게 자세하게 밝혀놓은 것은 높이 사야겠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를 해 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저자의 생각으로는 치킨을 통한 현 상황의 고찰만을 다루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평서들이 가지는 고질적인 문제는 이것이라고 본다. '비평에만 그치는 것' 다소 좀 부족하더라도 비평에 그치지 말고 자신의 해결책이나 방안 등등을 밝혔으면 어땠으면 싶다. 해답이 아니더라도, 그런 모범 답안들이 여럿 모이고 토의와 토론을 거쳐, 부조리한 사회현상의 해결책으로 귀결되는 법이니까

 

 

두 번째로는 내가 알기로, 프랜차이즈 치킨에 유통되는 닭에는 많은 약품을 첨가한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밝혔으면 어떨까 싶었다. 닭의 유통과정과 대리점들의 아픔 등은 소상하게 잘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프랜차이즈 치킨의 영양이나 약품 등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으니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 그리고 닭의 영양에 대한 이야기도 없으니, 이 부분도 아쉽다. 치킨전이라고 이야기를 붙였으면, 치킨의 외부적인 사정과 역사, 그리고 현재의 치킨 그 자체의 분석도 이뤄져야 하는데, 역사성과 외부적 사정에는 소상하게 밝혔지만 정작 치킨의 영양이나 치킨에 첨가되는 약물 등등에는 소홀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어쨌든 그런 단점이 보이긴 했어도, 재미있게 읽은 책임에는 부인할 수 없겠다. 치킨이라는 음식을 통해 우리나라의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사회 현상 등을 살펴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렇게 생활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로 사회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주제의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음식으로 예를 들면 '라면'도 꽤나 재미있을 텐데...


오타 부분 지적(1쇄 기준)

94쪽 7번째 줄 닭도리탕 -> 닭볶음탕
120쪽 주석 첫째 줄 가겨 -> 가격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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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구성체를 이루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정치학>의 명언언 중 하나다. 이 구절을 국내 번역가들 대부분은 정치적인 동물로 해석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은 이렇게 번역하셨다. 

 

어쨌든 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 속에는 인간 군집성의 긍정을 뜻하며 국가 구성체라는 말속에는 국가조직의 존재를 긍정하며 그 안에는 필연적인 조직의 우열을 긍정하고 있다. 조직의 우열이라는 말속에는 결국 권력의 불가피성이 숨어있다. 

 

가끔 이 말을 보면서 부조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럼 모든 인간은 정치적인 행위의 핵심인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저 격언이 부조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 나의 저 생각에는 정치와 권력 추구를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력 추구는 어쩌면 정치의 범주로 보자면 중심 범주이기보단 하위 범주에 달할 수 있겠다. 정치적인 행위는 권력 추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린 나의 관념에서조차 권력과 정치를 하나로 보고 있었고 정치의 생활성보단 정치에서의 권력 추구의 시선만 너무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권력 추구에 입각한 정치 해석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무분별한 비판만 있었다. 

 

정치와 권력 추구를 따로 갈라놓고 생각을 해 보니 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었다. 내 결론은 세간에 잘 못 번역된 격언인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가 옳은 명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큰 범주의 틀 안에는 권력 추구도, 그리고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리고 생활 속의 정치 모든 면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최종적으로 저 잘못 번역된 명제를 긍정하고 싶었다. 

 

축구 비판서 리뷰에 웬 쓸데없는 말을 하냐고 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왜 내가 이런 정치와 권력에 대한 말을 구구절절 쓰는지 이해가 갈 것이라고 본다. 

 

이 책을 보고 나서 나는 오역한 명언, 내가 스스로 긍정한 명언에 또다시 회의감이 들었다. 피파라는 조직은 인간의 가장 큰 즐거움 스포츠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 피파 역시 집단을 이루면서 조직과 위계 권력이 당연히 생겨났다. 여기까진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이 맞다. 그러나 공공성이 강한 피파 내부가 이렇게 썩어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피파의 부패. 그것은 정치라는 요소를 권력과 권력욕으로부터 떨어트려 정치의 생활적 요소,긍정성을 상기시켜서 결론지었던 나 자신의 결정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결국 정치의 중심은 밑을 향하는 것이 아닌 위를 올라가려는 권력욕이 전부인 것이란 말인가...라는 회의적 시각이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이 책은 피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운영됐는지에 대해 소상하고 자세하게 밝힌 르포르타주다. 솔직하게 말해 책을 봤을 때 느낀 점은 흥미는 있고 재미있는 주제긴 했으나 그렇게 썩 잘 읽히진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그 썩 잘 읽히지 않는 이유에는 일단 책에서 말하는 방대한 인물들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없다는 점이 크다. 저자와 역자는 책의 주석을 통해 방대한 인물들에 대해서 간결하게 설명했으나 사실 내가 이쪽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다소 많은 사람과 많은 단체들을 기억해가며 독서를 하진 못 했다. 

 

그러나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야망인 권력, 그 권력을 사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추구하는 것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고찰하고 있었다. 피파 마피아 책에서 본격적으로 까고 있는 사람은 피파 왕국의 절대군주 제프 블라터다. 블라터는 피파의 공공성을 방패로 사용해 자신의 탐욕을 극한으로 추구한다. 

 

책은 그런 블라터를 고찰하기 위해 블라터 위의 주앙 아벨란제를 파고들었으며 아벨란제의 스승이자 국제스포츠를 이윤추구의 도구로 만들어버린 전 아디다스 창업자 호르스트 다슬러까지 책에서 다루고 있다. 

 

다슬러를 시작으로 국제 스포츠계와 피파는 극심한 상업주의로 물들었다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벨란제였으며 아벨란제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블라터였다. 그들의 그라운드 뒤의 협작은 스포츠계를 더럽히고 있었다. 

 

책의 본문은 지독히도 역겨운 케케묵은 돈 냄새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사욕과 돈에 대한 욕심이 자행할 수 있는 모든 부정부패를 다 다루고 있었다. 배신, 로비, 협작, 굴복, 매수, 금권선거,돈 세탁 스폰, 막무가내 개최지 선정, 심지어 스포츠 내에 편파적 심판 동원 등등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있는 피파의 내부 사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스포츠 정신. 스포츠에 대해 우리는 공정성을 당위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제 스포츠 대회는 그런 공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이번 축구 대회에서도 의혹은 많았으며, 축구뿐만 아니라 피겨 스케이팅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경기장 위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플레이에 정신이 몰두될 때 

 

그라운드 밖에서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선수들의 노력 그 이상으로 협작정치 뒷거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스포츠 업계를 이런 시각으로 바라볼 순 없겠지만 이 책에 의하면 "적어도 피파"는 그랬다. 

 

피파의 부정 피파의 부패 그 중심에 블라터와 그의 충견들이 자행했던 일들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얼마나 부정부패가 심각한지 소상하게 압축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은 구린내가 진동했다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이런 피파를 비판하기보단 피파가 가진 축구라는 주제의 대중성을 파악하고 오히려 피파를 옹호해주고 그렇게 자신의 평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축구와 피파를 이용하려 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3s 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만 봐도 그렇고, 얼마 전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의 발언(월드컵을 이야기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블라터도 마찬가지다. 대중성이 강한 축구를 감성적으로 이용했다. "축구는 우리를 하나로 만듭니다."라는 다소 감정적인 말로 자신들의 비판세력들을 누그러트렸다. 책에 묘사된 대로라면 피파라는 조직은 공공성을 앞세운 공익 기업이지만 사실은 회장 블라터에 블라터에 의한, 블라터를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었고 그 밑의 사람들은 그의 충견들이었다. 

 

스포츠는 현대인이 즐길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오락 거리다.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물론 국가주의 민족주의적인 면도 있지만, 스포츠라는 것은 적어도 공정하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정정당당하고 공정한 경기를 보며 어쩌면 사람들은 부조리하게 느꼈던 세상에 생각에 대한 조금의 보상(공정한 룰의 경기에서 오는 승패)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대리만족을 선사하여서, 그렇게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봤다. 

 

블라터 역시 그랬다. 스포츠는 공정해야하며 독립적으로 정치와는 구분되야 한다고 지껄였으나, 그라운드 밖에서의 그의 행동은 음험한 정치인을 넘어섰고 경기는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2002년 우리나라가 붉은빛으로 물들 때, 경기에서 우리가 환호성을 지를 때의 그 열정 그 내면에는 블라터의 치를 떠는 부정선거가 있었다. 더불어 이 책에서는 2002년 우리나라에 유리했던 편파적 판정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그 외 정몽준의 로비 활동 의혹 등등도 기록하고 있다. 

 

나는 솔직히 저자의 논의나 비판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준의 지식은 갖추지 않았다. 책에서 나오는 그 방대한 인물들에 대해 선행 지식도 없고 그래서 저자의 이 방대한 르포가 올바른 비판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보며 경의를 표하고 싶다. 첫 번째로 블라터라는 인간이 자행한 부정에 대해서 조롱의 경의를 표하고 싶고, 이걸 밝혀내기 위해 노력한 저자의 집념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역시 사물이나 현상의 겉과 속을 다 보는 것이 참 어렵구나 싶다. 누가 알았겠나, 공정과 공평의 아이콘인 스포츠 그 스포츠 대회를 주관하는 공익단체가 이리도 부패했는지... 사람들은 그라운드 안만 주목할 뿐 저자와 같이 그라운드 밖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우리나라는 지금 피아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관피아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군대 문제가 불거져 군피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책은 피파라는 "마피아"조직이 행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집요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독을 권해본다. 

 

사실 이런 비평서를 보고 나면 마음속이 허하며 세상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블라터의 블라터에 의한 블라터를 위한 피파 제국을 보며 인간 존재의 염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치밀하게 밝혀 낸 저자의 집념 피파 제국을 상대로 싸우는 저자와 같은 사람을 생각하니, 그래도 염증을 해소할 빛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초독을 할 때는 내 지식이 이 책을 비판할만한 그릇이 못 되어서, 논의를 따라가고 읽어나가는데 만족했지만, 나중에 꼭 한 번 다시 읽고 싶다. 이 책에 논거 된 인물들에 대해 자세하고 소상하게 알아 본 뒤에 이 책을 다시 재독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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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보내주는 책들이 참 재미있다. 그중 이 달에 보내준 도서는 다소, 이전까지에 비해서 '부담이 없는' 책으로 보내줬는데, 그중 가장 독특한 책이 바로 <독신의 오후>라는 책이다. 책을 보며, 생각했던 것이, 아 신간평가단 형(?)님들께서 독신이신 분들이 많으시거나, 독신을 지향하고 계신 분들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독신을 다룬 책들은 많이 나왔지만, 이 책만의 독특한 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의 시각으로 저술된 '남성을 위한 독신 책이라는 점.' 남성 독신자들이 쓴 독신에 대한 책이 있을지 몰라도 이 책은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독신에 대한 책이다. 따라서, 남성 독신주의자들도 간과하고 지나칠 법한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어 준다는 점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미리 말하겠지만, 나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한 여성과 함께 일가를 이루고 싶고, 책에서 말하는 육아라는 거룩한(?) 대업을 함께 이루고 늙어가고 싶은 '평범'한 남자다. 따라서 이 책이 배송 왔을 때,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본 순간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다.

 


이 책은 독신 남성을 위한 책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기혼 대상자나, 늙어가는 남성 전체를 위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책의 체계는 단순하다. 글 자체가 명료했고, 저자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책이었다. 남자의 독신에 대한 의의와 배경을 설명하며, 독신의 유형에 대해 분류를 한다. 가장 핵심은 2장과 3장,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기술,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챕터들이었다. 4,5장은 요양과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아무튼 핵심은 2장과 3장에 집중됐었다.

 


독신은 비혼(결혼하지 않은), 이별 싱글(이혼을 한 싱글), 사별 싱글(아내가 먼저 죽은 경우)로 나뉘는데, 대체적으로 연령대로 보면, 사별 싱글이 가장 연령대가 높으며(당연하겠지만), 이별 싱글이 중장년 층, 그리고 비혼 싱글들은 20~30대 세대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비혼 싱글의 추세가 높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이혼 싱글 세대와는 다른 육아정책과 불균형적인 성비, 때문에 비혼 싱글이 굉장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것은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다.

 


싱글에 대해서 사실 자신의 신념으로 싱글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비혼 싱글의 대부분은 '경제적 능력' 때문에 못 하는 이유도 있다. 이 부분은 부모의 육아 정책의 실패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자식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독립을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에 대해서 '부모 노릇의 정년'이라고 하는데, 이것에 실패한 자식들은 부모의 정년에는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사실 이 육아 정책의 실패는 크게 보면 사회 구조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다. 극심한 취업난과 취직의 어려움 등등의 사회구조, 아무튼 비혼 싱글은 완벽한 싱글이 아니라고 저자는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로, 싱글이더라도 완벽한 독립적인 싱글이 아닌 부모의 돌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자유롭지 못 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뒤에 바람직한 싱글의 전제조건을 제시했는데, 일 순위가 의식주의 자립은 기본 중 기본이라고 확고하게 정의한다.) 이별 싱글과 사별 싱글에 비해서 비혼 싱글 부분이 크게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마도 나와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것이 비혼 싱글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하긴 그렇다 하더라도, 결혼을 전제해 둔 나로서도, 이별과 사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게 될 순 없다. 내가 독신이 아닌 결혼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어디 내가 이별을 안 한다는 확신도 없고, 혹여나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두에 둬야 하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의 책은 상당히 현실론적인 부분을 고찰하고 있다. 다른 남성 저자들이 쓴 독신의 기술에 대한 책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간과하고 있는 부분들을 꼬집어내며 집어내고 있다.

 


하긴 사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것이, 우리나라 남성들은 너무 무사 안일주의가 심하다. 이건 일본과 마찬가지다. 대체적으로, 부부 중 먼저 죽는 것은 남성이 일반적이지만... 그래서 남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대비책'을 차려놓지 않는다. '난 그저 노년에는 편하게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다가 편하게 죽어야지.' 이게 우리 할아버지 세대,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사회는 변하고 있고, 혹시 아나, 그렇게 안전하게 생각했다 아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가부장적인 남편으로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무관심과 당연함으로 생각하던 아내의 빈자리를 외롭게, 고독하게 바라보며 애처로워하겠지,

 


저자의 독신의 처세술은 이럴 때도 유용할 것 같다. 법륜 스님의 저서 <스님의 주례사>에 온쪽과 반쪽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다. '서로에게 반쪽이 되기보다, 온쪽과 온쪽이 만나서 동그라미가 합치되어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아내가 죽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인생이 아닐까 싶다. 남자 역시도 온 쪽이 돼야 한다. 그것은 남성 역시도 여성이 없더라도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장을 잘 볼 수 있으며, 혼자가 되어도 온쪽처럼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말하는 독신의 처세술은 기혼 남성에게도 의의가 있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죽고 아무것도 못하며, 울며불며 처량하게 히키코모리적 삶을 사는 것보단, 아내가 죽으면 담담하게, 아내의 부분까지도 스스로 잘 처리하며, 여생을 정리하고, 나아가 아내의 삶까지 돌아보며 정리하며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남자가 해야 하는 도리 남자의 결혼의 종착지가 아닐까 싶다.

 


책을 보며 요리를 가르쳐 준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서 나에게 요리를 가르쳤었다. 그리고 오랜 자취 경험 때문에,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는 물론, 심지어는 김치까지도 혼자서 담근 경험이 있다. 이런 부분은 아마도 홀로 남겨지게 될(???)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배려가 아닌가 싶다. 요즘 세상에 아내에게 밥 얻어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이고, 맞벌이를 하는 이상 가정 역시도 같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며, 극단적으로 짝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나 혼자의 생존의 기술에도 도움이 되니까, 남자에게 있어서, 독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식 - 먹거리'니까,

 


책의 여러 부분들이 공감이 갔지만, 특히나 공감이 갔던 부분은, 남자의 독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자들은 올라가는 법은 알지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기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남자라는 동물은 권위적이고,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 등등을 과시하는데 익숙한 동물이다. 여성과 가장 극명하게 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런 '허세'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런 허세가 늙어가고 약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특히나 대인관계에 대해서 저자는 강조하여 말하는데 이 부분은 독신 남자뿐만 아니라, 늙어가는 모든 남자에게 해당된다. 어느 모임에 가서 자신의 무용담을 구구절절 이야기하거나, 학식이나 자신의 지식, 사상 등을 이야기하며 은근히 강요하는 부분, 그리고 비공식적인 모임에서조차 남성들은 그들만의 권력 다툼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잘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 늙은 남성의 공통적인 현상 같았다. 지금의 나의 아버지도 등산 모임을 가서도 리더가 되려고 저렇게 '분발'하시는 모습이 떠올랐고, 그토록 겸손하게 살아가셨던 '할아버지' 역시도 나에게 6.25 참전 경험의 '무용담'을 1시간 내외로 무한적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하셨다.

 


가족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용납이 가지만, 타인들에게 이런 행위는 심히 거북스러움을 유발한다고 저자는 말했다. 옳다. 자고로 남자라는 동물은 허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과의 모임 속에서는 어떻게든 지식적으로 타인을 누르려는, 부분이 유독 '남성'에게는 집중되어 있음은, 나 역시도 경험을 해 봐서 알고 있다.

 


저자는 여성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다소 잘 원만하게 유지한다고 하지만 남성은 3명 이상 모이면 권력게임과 파워게임이 적용된다고 했다. 비약이 좀 심한 것 같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부분에서 저자는 남성들이 '독신력'의 선배인 여성들에게 좀 배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허세를 벗어나는 것은 배워야 하지 않나 싶다. 다 늙어가고 다 약해지는데 뭐 그리 무용담과 파워게임에 골몰하는지... 때론 약점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늙어가는 관계에 도움을 준다는 저자의 말. 이것은 독신 남자의 교제법뿐만 아니라, 기혼 남성의 교제법과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늙어가며 허세를 떨고 싶으면, 자신의 개인 블로그나, 일기장에 해도 충분할 테니까,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경제적 활동의 최전선에서는 때론 이런 '허세'와 '파워게임'이 더 좋은 자리와 위치를 주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 욕망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적용한 것임에는 맞다. 그러나 늙어가는 시기에는, 이러한 허세와 파워게임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다 같이 늙어가며 교제를 하는데 권력이 무슨 소용이고, 잘난 시기는 무슨 소용일까, 

 


 또 공감이 갔던 것은, 세부적인 부분이지만, 남자가 여성을 간병을 하게 될 때 자세에 대해서다. 보통 남성이 먼저 죽고 여성이 뒤따라 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까 말했듯, 그 반대의 상황이 됐을 때, 남편은 아내의 병을 돌 볼 때, 지극히 '간병인의 입장에서의 돌봄'을 한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남편들은 아내의 수발을 평생 받아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간병을 한다 선 치더라도, 나름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불편한 점이 많고 미숙한 점이 많다.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불편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해주는 간병이라, 쉽게 불편한 점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환자가 중심이 된 간병'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은 혹시 모르겠지만 남성들이 항상 마음에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아플 때, 어떻게 아픈지, 자신의 간병에 대해서 돌아보고, 이야기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남편도 고쳐주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어쨌든, 최종적으로 남자 싱글의 덕목을 10가지로 추려서 설명하고 있고, 남성 교우의 관계에 대해서도 7가지를 조언하고 있다. 구구절절 다 밝히고 싶지 않고,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경제력을 갖춘 진정한 의식주 독신주의자가 돼야 한다.'라는 점과 '남자 특유의 그 허세를 다 버려라.'라고 압축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책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저자의 성 관념에 대해서 꼬집고 싶다.

 

 

 

남편만 따라오지 않는다면 우정보다는 가깝지만 사랑은 아닌 교제도 싹틀지 모르는데 모처럼의 찬스를 눈뜨고 놓치기는 아깝다.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다. 너무 싱글의 입장에서 부부를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싱글이 가장 큰 장점이 성으로부터 자유분방하다는 점은 백번 수용하겠지만 부부간에 부부가 됐다면 이런 부분은 서로 조심해야 한다. 뭐 사실 이 문구는 넘어가더라도,

 

 

 

 

이 대목은 아내를 간병하는 지극정성인 남편의 예를 들며, 아내에 대한 사랑과 성욕은 별개라는 논의를 주장하고 있다. 맞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과 성욕은 별개의 문제다. 남자라는 동물은 여자와 다르게, 평생을 생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성욕도 왕성하고 실제로 '사랑 없이도 성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별개라고 하더라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는 법이다.

 


 아내를 간병하는 지극정성인 남편의 정부가 되어 그 남자의 성욕을 해소시켜줘서 '당.신.덕.분.에.나.는.아.내.간.병.에.전.념.할.수.있.어.고.마.워.' 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한다. 싱글은 이럴 때 자유롭지만 상대인 남편은 결혼한 존재라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다. 너무 싱글의 입장에서 부부의 모습을 해석한 것은 아닐까? 남성 편만 들고 여성에게는 적이 될 심보일까? 글쎄 당신의 이런 생각은 '남성'인 나에게도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싱글로 살아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저자의 관점에 태클 걸고 싶진 않다. 그러나 위의 예시, 간병을 하는 남편의 성욕을 해소시켜주는 애인이라... 그럼 그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서 성적인 부분을 해소하고 힘을 얻어(?) 자신의 아내의 간병을 충실하게 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크게 어긋났다. 부부라는 것은 어쨌든 연을 맺으면, 좋으나 싫으나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 성욕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의 성욕이 아무리 무한하더라도, 한 남자의 아내라면, 다른 곳에서 분출하기보단 미우나 고우나 아내와 상의하고 협의를 찾아야 한다. 저런 상황이 오면 차라리 야동을 보며 혼자서 해소할지언정, 아내가 상처받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말로, 아내 몸을 간병해서 몸을 치료할 순 있겠지만, 어떻게보면 아내가 알면 '마음'을 다칠 행위 아니겠는가? 아내의 몸을 고치면서, 아내의 마음을 다치게 할 행위를 몰래 한다? 이게 과연 맞는 이치인가?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남성 싱글의 먹을 것을 이야기하면서 '도시락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레토르트 식품이나, 편의점 식품, 그리고 나아가, 도시락 가게가 아무리 뛰어난다고 하더라도, 결국 방부제라는 화학 약품이 첨가된 식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부분은 같은 일본에서 나온 책 아베 쓰카사가 쓴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즉석식품>이란 두 책에서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혼자 사는 남성에게 편의점 음식은 단연코 굉장한 유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편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베 쓰카사의 책을 본다면, 그런 일본의 도시락 문화의 단면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하물며 도시락 문화가 발전된 일본의 사례도 저런데, '도시락 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한국'은 어떨까?

 


남자가 '건강하게' 독신을 하려면 스스로 요리를 해 먹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한계와 아쉬운 부분(극단적 페미니즘)도 있고, 너무 자유분방한 성관념과 저 음식에 대한 생각을 제외하고는 아주 훌륭한 책이 아닌가 싶다. 특히 독신남 뿐만 아니라 늙어가는 모든 남성이 어떻게 처세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남성이 아닌 여성이 말해주고 있는데,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굳이 독신주의자 남자들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둔 남성들도 읽었으면 싶은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항상 서재에다가 꽃아 두고 정기적으로 볼 생각이다.

 


미래 아내가 될 사람은 아마 내 서재에 이런 책이 꽂혀 있다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게'지만, 나에겐 '혹시 모를' 미래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화낼 수도 있는 미래의 아내에게 조용히 이야기하련다.

 


"막말로 '당신'이 죽으면 난 혼자라고 이 사람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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