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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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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봤을 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문학'이라는 다소 익숙한 단어와, '아토포스'라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자아내는 미묘함. 그런 미묘함이 있는 책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그런 제목. 그리고 쉬울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았던 책의 내용. 책의 모든 속성이 이 미묘한 제목에 나타나져 있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이 달은 굉장히 바빴던 날이었다. 지방으로 여러 번 나가기도 했었고, 여유도 없었었던 한 달이었다. 그래서 책을 볼 시간이 없었고, 신간 평가단 리뷰 기한이 끝날 때 즈음에서야 나는 책을 펴 볼 수 있었다. 미묘한 제목의 책을 집어 들고 펼쳤을 때, 나는 당혹했다. 서문부터 책은 굉장히 불친절한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진은영은 이 책에서 '문학, 아니 나아가 예술과 정치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제로 보면 굉장히 흥미롭고 관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런 주제와는 다르게 책은 상당히 난해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범주다. 일단 다루고 있는 부분이 문학, 그리고 문학을 넘어선 예술, 철학 그리고 사회현상인 윤리, 커뮤니케이션(소통), 그리고 정치 등등의 굉장히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이 책은 문학과 정치 두 축의 올바른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물론 맞다. 주 주제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주제를 다루면서 여러 분야를 언급하여 종횡무진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일단 범주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이 다소 나에겐 버겁게 느껴졌다. 원래 학문은 간 학문적인 고찰을 해야 함이 옳은데, 이 책은 한정된 지면에 비해 상당히 많은 범주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로 책의 서술 방식이다. 저자는 시인이며, 철학자다. 시인과 철학의 공통점은 상징과 추상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책의 서술은 그런 상징과 추상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표현은 나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졌으며, 그녀의 논의보다도 더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녀가 인용을 했던 무수한 철학자들의 통찰이었다. 사실 글을 읽다가,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는 것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문체 서술이 나에겐 어렵게 다가왔었다.


세 번째로는 책의 불친절한 편집이다. 이 책에는 무수한 미학 용어들이 나온다.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정도야 애교라고 할 만 하지만, 아나크로니즘, 스노비즘 등등의 용어 앞에서 나는 무던히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을 해야만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썼을 때, 독자는 이 정도는 지극히 알 것이라고 썼을지 모르겠지만, 대중 저술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최소한 출판사에서 각주나 미주로 용어 풀이를 해 줬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끊어서 읽어야만 했던 나는, 책이 전개하는 관념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 해서, 같은 구절을 몇 번을 재독하기도 했으며, 때론 피곤한 몸으로 책을 펴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졸아, 지하철 몇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책은 상당히 난해했다.


그러나 나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런 불편함을 떠나서, 책은 상당히 심도 있고 진지했고, 열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저자의 고민과 사색,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름의 논쟁과 해답을 담고 있는 저자의 열정이 담겨 있는 책이다. 2008년을 기점으로 저자가 생각한 문학과(예술) 정치에 대한 고민, 기존 사회 통념에서의 문학과 정치의 관점, 자신의 문학관과의 지향해야 할 반향과 현실참여에 대한 생각, 기존 문학계의 흑백논리에서부터 새로운 인식,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그녀의 땀방울. 그것들의 최종 결실이 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녀의 응축된 사색을 한 번에 이해하기란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고민하던 그녀에게서 선물 상자가 떨어졌다.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였다. 그의 저서를 본 그녀는 비로소 문학이 어떻게 정치와 연애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랑시에르가 추구하는 정치와 예술


'그(랑시에르)에게 정치는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 26쪽


'랑시에르는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함으로써 낡은 분배 형태와 불일치하고 그와 맞서 싸우는 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 27쪽


핵심은 감성적 혁명, 즉 예술은 대중에게 감성적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며, 기존의 규정한 감성적 조직을 교란시키고, 낡은 분배를 타파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목적이고, 예술 역시도 그렇게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며, 대중에게 기존의 형성된 가치를 뒤흔들어 생각할 수 있도록의 감성을 심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술은 한없이 정치적일 수 있다. 양자의 동일 속성(감성적 혁명)이 공명할 때 미학의 정치가 추구된다는 설명.


궁극적으로 정치와 예술은 감성적 혁명을 통해 '미학의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이 결론을 도출하며 기존의 정치관과 기존의 문학관 그리고 문학과 정치를 둘러싼 시선들에 대해 저자는 조용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저자는 랑시에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학계와 정치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인상적인 문제는 바로 '윤리'를 꼽고 나선다. 랑시에르(그리고 저자인 진은영)는 문학과 정치를 규제하는 것에는 윤리라는 가치가 있으며, 그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에 입각한 가치판단은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눠버리고 규정해버리는 부분을 통해, 문학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견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윤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윤리를 대체할 모럴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윤리는 평가하고 선택하는 행동 원리를 이미 존재하는 삶의 양식(에토스)에 용해시켜 버리는 체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 133쪽


'모럴이란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 내는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 - 134쪽


이렇게 윤리의 한계를 넘어선 모럴이라는 관념을 문학과 예술은 추구해야 한다고 저자와 랑시에르는 말했다. 이것을 책에서는 '침입의 모럴'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추구하면서 모럴이 윤리화로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모럴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책의 제목이라 할 수 있는 '문학의 아토포스' 이 기묘한 단어도, 문학과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토포스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서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서 고정될 수 없어서 그 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 -179쪽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곤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을 또 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 이렇게 떠도는 공간성. 그리하여 결코 확장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파괴하여 휘발시키는 일에 예술가들이 매혹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간의 연인'이라 부른다. 이 연인- 작가들에 의해 작동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는 우리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 다른 이름이다. '


긴 문장이지만 사실 두 번째 인용 구절에 이 책의 주제가 나와있다. 규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문학이 흘러들어 문학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책에서 나온 대로, 공간적인 부분 뿐만이 아니라 작품의 기록에 대해서도 유효했다. 텍스트에 기록된 글을 넘어선, 구두 문학에 대한 인식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 문학적이지 않은 곳을 바꾸고 기존의 감각적 공간을 감성적 혁명을 통해 새로운 감각적 공간으로 바꾸는 일말의 모든 것을 문학의 아토포스라고 정의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아름다울 것 같다. 예를 들어 문학이 아닌 공간인 다른 일상의 공간에서 문학과 예술이 스며드는 것, 예를 들면 벽화마을이라던지 이런 부분은 굉장히 아름다운 예이다. 더불어, 예에서 들었듯, 논쟁이나 투쟁의 공간에서도 과격한 이미지의 투쟁적인 모습보다는, 문학적인 시 낭송을 통한 부분이라던가, 조용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의 문학이 곁든 투쟁은 생각만으로는 아름다울 것 같다.


즉 이 책의 제목 문학의 아토포스라는 것은, 미시적으로는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을 응축시켰고, 마지막 단락에서 볼 수 있듯, 문학의 아토포스는 결국 거시적으론 궁극적인 예술과 문학 정치가 추구하는 '미학의 정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과 특히 랑시에르의 논의를 인용하며 '문학'이 어떻게 '정치'와 밀애를 해야 하는가를 고찰하고 생각했었다. 그 사색의 흐름을 책은 나타내고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결론과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문제점 그리고, 바람직한 길까지도 제시하고 있었다.


책이 전달하는 핵심은 결국, 문학(예술)과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저자의 문학관에 의거하면 이 저술을 통해 대중들의 통념에 있는 정치와 문학 인식을 깨부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분명 그래서 대중 저술로 책을 냈을 것이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그녀의 고민에 해답을 준 랑시에르라는 철학자를 소개하는 입장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은 두 목적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문제 제기 자체는 옳고 설사 랑시에르라는 철학자의 논의가 참고할 만 하고 기존의 통념을 깰 대안이라 하더라도, 이 책은 너무 불친절하다. 대중이 이 책을 이해하기에 굉장히 난해하며, 대중이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으면 어쨌든 대중의 감성적 혁명을 일으키기엔 무리가 있다. 랑시에르라는 해답을 이렇게 불친절하게 설명해놓는다면 감성적 혁명은 고사하고 싸늘한 시선을 부르지 않을까? 저자의 깊은 숙고와 저자의 깊은 논의, 사색을 좀 더 친절하게 설명을 했으면 어떨까 현학을 조금 덜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줬으면 싶은 '깊은'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대중 저술로 출판된 책이 아닌가? 이 불친절한 논의 덕분에 기존 사회에 주목받을  법한 '랑시에르'의 이론마저도, 결국은 학계 내부에서만 머물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대중과 함께 하는 감성적 혁명과 궁극적으로 저자가 추구하는 '미학의 정치'와도 떨어지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다소 급하게 읽고 시간에 치여 읽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다시 읽은 나의 과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난해했었다. 원래 나는 철학적인 주제의 책을 읽을 때 두꺼운 철학 책이 아니면, 쉬는 날 쉬지 않고 책을 쭉쭉 읽어가서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는 독서를 선호하는데 이 책은 그렇게 읽지 못 했다. 책은 솔직하게 말해서 미와 정치를 규정한 하나의 철학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의 알라딘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 예술에 대한 책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런 핵 폭탄급의 예술 책을 만나게 돼서, 한 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즐겁기도 했었다. 책의 난해함을 떠나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이러한 시도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학과 예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며, 어쨌든 저자의 글을 보며, 저자가 굉장히 문학의 길에 대해 노력하고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는 문인이라는 점도 알았다.



어쨌든 한 줄로 요약하자면 '불친절하지만 의의는 있는 책'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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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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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매력 있는 책이었다. 내가 가장 관심이 없는 분야는 과학과 종교, 그리고 미술을 들 수 있겠는데, 이 책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거기다 어느 한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설명하고 있으니, 나와 같은 종교에 대한 문외한들에게는 좋은 책이 아닐까도 싶었다.


책이 가장 돋보였던 부분은 바로 종교적인 교리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가기보단, 역사적인 고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고찰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우르라는 도시를 이야기하기 앞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즉 수메르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고 있었다.(우르는 수메르 문명의 도시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전개가 괜찮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은 적절한 깊이로 수메르 -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의 역사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었으며, 각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끝나지 않는 현대의 종교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사실 종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이야기할 줄 알고 긴장하며 책을 봤었는데, 생각보다 편안했으며, 한 편의 역사책을 보는 느낌이라, 부담 없이 세 종교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기원전 신석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청동기의 수메르 문화를 시작으로 고대와 중세 현대를 적절하게 고찰하며, 인류의 발자취를 종교의 발전에 따라서 설명하고 있는데, 설명이 자세하고 잘 돼있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 역사를 돌아본 것 같았었다. 생각 외로 책은 어렵지 않았으며, 다소 복잡한 인물 구도가 나오긴 했지만, 비종교인이 보기에도 적절한 수준의 설명이라 만족하며 읽었었다.


 야훼의 선택을 받은 민족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유대교', 유대인에게만 적용됐던 야훼의 축복을 더 많은 대중들에게 확장했던 '기독교' 그리고 유대인 아브라함의 또 다른 자손에게서 파생된 '이슬람교' 그 3개의 종교 역사를 보며 느꼈던 것은, 극단적 교조주의가 만연했을 때에는 항상 분쟁이 뒤따르고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이 교조주의가 지금 팔레스타인에게 그대로 분출되고 있다. 극단적인 시오니즘에 입각하여 팔레스타인을 억압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같은 경우도 그들이 성전이란 이름으로 자행했던, 십자군 전쟁. 그것은 어쨌든 교조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슬람 역시도 멀리 볼 필요 없이 최근 핫이슈의 수니파 근본주의 사상에 움직이는 ISIS 사태를 꼽을 수 있겠다. 


종교가 태어나게 된 본질은, 인간의 풍요와 인간의 내적 성숙을 위해 생겨났다. 인간 스스로의 존재의 자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극한의 시련 앞에서의 대처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지. 그리고 나와 타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의 염원. 이 모든 고민들의 결론을 제시한 것이 종교다. 특히나 위의 3가지 종교는 뿌리가 같았다. 역사적인 고찰로 봤을 때, 한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책에서 나온 세 종교들의 역사를 보면, 항상 그랬다. 극단적 교조주의와 편가르기, 나와 너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순간 종말과 재앙이 왔다. 그리고 그 피의 대가는 엄청났다. 항상 종교적 분쟁이 불러온 희생은 상상을 초월했다. 극단적 종교인들은 그러한 교조주의를 신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런 부분은 대중에게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굉장한 이기주의, 베타 주의적 태도라고도 나는 생각했다.   


그럼 사실 또 문제인 것이, 그럼 온건주의적 태도로 종교 간 상호 인정을 하게 될 때 그때는 과연 좋은 세상이 도래할까?라는 물음이 일어날 수 있겠다. 책에서는 그 해답을 역사적인 예시로 들어줬다. 바로 이슬람 - 유대교 - 기독교가 공존했던 이베리아 반도 예로 말이다.


책의 342쪽에서 345쪽,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우마이야 왕조의 사례다. 책을 조금 인용해보자면,


'그 무렵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내에서 무슬림과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공통의 관습과 문화를 오랫동안 형성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3대 종교와 문명이 이곳에서 용광로처럼 융합하면서 암흑기였던 중세 유럽의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아랍 학자와 유대인 학자들이 코르도바(수도)에서 연구한 그리스 철학, 천문학, 의학, 수학이 기독교 세계(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다양한 문화들이 혼합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을 정복한 우마이야 왕조가 온건한 형태의 이슬람교를 실천했던 결과였다. 그로부터 2세기 동안 문화와 정치발전, 번영과 세력이 절정을 이루었다. '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시대를 제외하고는 세 종교가 뭉치는 일은 없었다. 한 뿌리의 세 종교는 항상 반목했었고, 그렇게 지금도 반목이 진행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책의 불만사항은, 책 제목 <세 종교 이야기>와 같이, 세 종교의 이야기라기보단, 유대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고, 보조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야기를 다룬 느낌이 든다. 역사적인 사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챕터인 '반목과 갈등의 역사'라는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유대인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그 덕에 유대인이 겪었던 아픔과 희생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게 됐고,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 그들의 생활을 총칭)에 대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인종 말살 특히 유대인) 정책과 같은 부분도 잘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독립과 팔레스타인 내전 등 극단적 시오니즘에 입각한 유대인들의 모습도 잘 고찰하고 있다. 다만 이슬람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줬으면 어떨까 싶었다. 이슬람의 과격단체나 그들의 테러 등을 다루는 것도 사실 기대했는데, 끝까지 시종일관 유대인 중심으로 현대사를 풀어나가서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물론 뭐 이 한 권에 그 방대한 현대사들을 다 다룰 순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가 아쉽다.


그래도 유대인에 대한 역사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봤었다. 핍박받은 그들이 왜 역사적으로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를,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그들이 왜 자꾸 팔레스타인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는 했지만, 피는 피를 부른다고, 그들의 피해 의식을 교조주의로 승화하여 정당화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실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사실 책을 보며, 유대인들에게 배울 점도 많지만, 나쁜 점도 되게 많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핍박받은 데에는 그들 자신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일단 너와 나를 가른 것은 유대인이 먼저 시작했었다. 책을 읽으며 유대인에게 가장 싫은 부분이, 바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극단적 민족주의 의식이다.


어쩌면 국가를 잃은 유대인들을 살린 것은 그 정신적 우월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부심을 잠시 거두고, 포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들의 학살과, 현 이스라엘이 자행한 가자 지구 하마스의 수많은 민간인 살상. 사람의 수를 따지지 않고 행위의 본질을 보자면, 두 행위는 똑같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미 국제 사회에서도 이스라엘을 보이지 않게 두둔하고 있다.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 국민들도 이제는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독립했을 때, 예루살렘에 이렇게 기록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독일이 유대인에게 자행했던 것을 용서는 하되 잊지 않는다는 취지로 썼다고 한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문구를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자국이 하는 짓은 과연 팔레스타인에게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어쩌면 팔레스타인에겐 이스라엘 자체가 나치로 인식되는 것처럼 비치진 않을까?


피는 피를 부르고, 보복은 보복을 부를 뿐이다. 그것은 책에서 나온 역사적 사례로도 충분히 증명되며, 역사를 떠나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 종파들은 이런 일을 자행하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이 국제적 분쟁들의 핵심은 종교적인 부분에 있다. 인간의 평화화 행복을 위해 태어난 종교가, 지금은 인간 현세에서 가장 큰 분쟁거리를 선사하고 있는 이 기막힌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좀 더 온건하고 관용적인 태도로 서로를 틀리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 다르다고 인정하는 자세,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가 갖춰질 때, 인류의 화약고인 중동과 이스라엘 지역은 분쟁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비단 중동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한국 종교단체들도 이러한 부분을 숙고하는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전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는 제2의 우마이야 왕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서평을 작성하고 나니 이웃님의 포스팅에서 봤던 한 편의 시가 생각난다. 부디 종교가, 다른 종교에게도, 그리고 궁극적인 인류의 사회에도 이런 모습으로 다가와 주길 기원하며 남겨본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

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

똑같은 해와 달 아래

똑같은 주름을 만들고 사는 것이라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의 강가에서 똑같이

시간의 돌멩이를 던지며 운다는 것이라네

 

바람에 나뒹굴다가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나뭇잎이나 쇠똥구리 같은 것으로

똑같이 흩어지는 것이라네 

 

문정희 시인의 시 <사랑해야 하는 이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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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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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느낌이었다. 책을 덮었을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알랭은 이 신간에서 프롤로그에서 시작으로 '언론'을 고찰하고 들어간다.


'이 작은 매뉴얼은, 오늘날 좀 지나치다 싶게 당연하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된 어떤 습관을 우리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복잡하게 비틀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지금의 언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언론에 기대고 있다. 우리는 뉴스와 신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쨌든 문제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이 세상을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뉴스기 때문에, 뉴스를 멀리하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실제적으로 보이는 것이 제약적이다. 그런 시력을 좀 더 선명하게 그리고 더 멀리 보이도록 도와주는 것은 '안경'이다. 뉴스는 바로 이 안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뉴스에 권위를 부여했었다. 안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그 근본적 이유만으로 말이다. 알랭은 권위를 부여한 뉴스를 어쩔 수 없이 보는 시각을 앞서 이렇게 정의했다. '지나치다 싶게 당연하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된 어떤 습관'이라고 이야기하며, 당연하다시피 받아들이는 일상의 뉴스를 우리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복잡하게 비튼다고 정의하며 뉴스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며 비평하고 있다.

 
이 서두를 끝으로, 그는 뉴스를 분야별로 세분화하여 비틀기 시작했고, '그만의 바람직한' 뉴스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정치, 해외, 경제, 셀러브리티, 재난, 소비자 정보 등등으로 세분화하여 각 뉴스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추구해야 할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각각의 뉴스 설명으로부터 알랭은 뉴스 텍스트를 그의 시각으로 뉴스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 뉴스의 텍스트의 한계를 지적하며, 동시에 그가 뉴스 내면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가치'를 이야기함으로써, 기존 뉴스 텍스트의 부재된 부분 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랭의 글을 보며 느낀 점은 세분화된 뉴스에서 결여된 속성, 그것들은 가지각색이지만, 한 가지로 모아서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지금의 뉴스에는 '긍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휴머니즘'의 결여라고 확대해서 해석했었다. 뉴스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식욕의 충족과 인간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뉴스, 발전 가능성을 위해 만들어진 정보 전달의 매개체인 뉴스에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없다는 이 사태를 알랭은 강하게 지적했다.


 뉴스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사실성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다 해서 사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뉴스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과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상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 뉴스는 현상과 사실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치 개입이 이뤄지며, 어떤 사실을 어떻게 보도할까, 어떻게 중요성을 가져야 할까에 대한 가치판단의 개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뉴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이더라도, 그것을 어디에 편집했고, 사태의 어느 부분을 부각하여 의도적으로 더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부분에서 '가치 개입'이 들어가 있다.


알랭 식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 51쪽 첫 단락 끝 부분


 알랭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뉴스가 '가치 개입'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보통 우리는 그러한 가치 개입적 사고를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여 편가르기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알랭은 그러한 논의를 넘어서, '근본적인 언론'의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뉴스라는 매체는 지극히 사실성을 바탕으로 보도하는데 집중하여서, 정작 뉴스가 추구해야 하는 부분을 망각한다고 꼬집고 있었다. 뉴스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현상에 대한 비판성과 더불어 긍정성 역시도 제공해야 한다고 알랭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뉴스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항상 비판적 사고만을 견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비판에 익숙해지고, 점점 더 뉴스를 볼수록 시니컬해져갔다. 알랭은 여기서 뉴스의 맹점이 있다고 봤다. 비판과 더불어 긍정성과 휴머니즘을 뉴스는 제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비평서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첫 번째 현상을 고찰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 두 번째 현상을 고찰하고 이상을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는 책, 세 번째는 현상을 고찰하고 실현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궁극적인 이상을 제시하는 책, 여기서 알랭의 책은 두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뉴스의 문제점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뉴스가 추구해야 하는 사상을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의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다. 알랭은 정치 뉴스 챕터에서 이런 논지로 말했다. 한 가지 문제 현상에 대해서 뉴스는 단기간에 해결될 것처럼 해결방안을 제시하지만, 모든 현상을 그렇게 쉽게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뉴스의 바람직한 (알랭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상적인 언론) 이상을 추구하려면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게 간단하게 제시될 부분이 아니라고 알랭은 주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의 논의를 떠나서 어쨌든 책은 참 매력적이다. 보통 비평서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굉장히 날카롭다거나, 때론 책의 냉소적 풍자적 논조에 차가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비평을 날카롭게, 자극적으로 표현하는데 힘을 들인다. 톡 쏘듯, 자신의 비평을 대중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며, 독자는 비평서를 볼 때 어쩌면 그런 톡 쏘는 비평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공감력을 형성한다.


그러나 알랭의 비평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조곤하고, 조용하면서, 때론 추상성이 보이기도 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용하면서 섬세하고 여성적인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비평이 아닌, 따뜻한 비평을 가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언어의 신중함이 돋보이고 있었다. 무미건조할 법도 한 논지를 특유의 비유와, 일상의 추상화적 글쓰기를 통해 날카롭고 자극적인 선선함과 대조적인 신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언론의 방향을 고찰하며, 언론에게 망각된 긍정성과, 따스함 휴머니티를 강조하며, 알랭 역시도 그것을 표현하는데 따뜻함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볼 때 기분이 좋았었다.


사실 비판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여러 부분이 있지만 한 가지 꼽자면, 세계 뉴스를 다룰 때 좀 더 '예술적'으로 다뤄달라는 말, <줄리어스 시저>의 극과 그와 비슷한 뉴스를 대조하며, 특히 뉴스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큼, 좀 더 문학적이고 흥미롭게, 그리고 세계의 현상만 고찰할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그 사회(예를 들면 그 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함) 문화적 부분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어쨌든 기사가 너무 길어진다. 뉴스가 문학적 기법이나 예술적 기법을 도입한다면 물론 대중의 시선을 더 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뉴스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다소 뉴스를 볼 때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랭은 대중이 무관심하고 우리가 뉴스에 멀어지게 된 것이 뉴스의 간결성과 현상만을 전달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모든 뉴스가 문학적, 예술적 기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물론 사람들이 이전보다는 뉴스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그럼 전달량이 많아진 뉴스의 양을 어떻게 분별하고 감당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극도로 단편화되고 간결한 뉴스, 그 뉴스들이 쏟아지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 간결화된 뉴스조차도 똑바로 선별하지 못하는데, 개개의 뉴스가 문학예술적 기법을 쓰는 세상에서, 그 분량이 많아진(기법이 추가된) 뉴스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데에는 더 힘들지 않을까?


사실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는 알랭의 논의인 뉴스에 문학적 예술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시각에 찬성한다. 사실 뉴스는 다른 텍스트나 영상에 비해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예술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부분도 수긍하기는 조심스럽다.


또 한 가지는 이 책의 결론은 '알랭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상적 언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개개인 만다 생각이 다르듯, 어쨌든 알랭이라는 한 개인이 바라본 언론의 문제점과 언론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책의 원저 이름인 "The News : A User's Manual"에서 유저 매뉴얼이라 표현하는 부분에서 좀 거부감이 들었다. 매뉴얼은 공인된 설명서에 붙일 수 있는 안내서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내용의 한계가 있더라도, 나는 이 책이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의 내용을 동조하거나 비판하거나를 떠나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우리는 어쨌든 '언론'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열풍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윤리 속에 정의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최근 열풍을 불러오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경제,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부의 불평등에 대한 시각을 더욱더 강하게 인식하게 됐다. 비단 저 책들을 읽지 않더라도, 책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앞선 블로그의 글에서 나는 밝혔듯, '명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내용을 넘어선 시대의 모순이나 일상화된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여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이야말로 명저'라고 이야기했다. 알랭의 이 책 역시 내가 알기론 베스트셀러에 머물러 있으며, 두 책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리 시대의 언론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책을 보다가 덮은 경우도 많았고(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빨리 읽어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거나 배송 온 <21세기 자본>을 읽느라 자꾸 미뤄서 봤던 경우도 있다. 따뜻한 비평서이고, 알랭을 좋아하는 나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자꾸 덮어지는 책이 이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여름 막바지에 다시 읽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글귀가 생각났다.


'자꾸 덮어지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다.'라는 스님의 말씀. 그 말씀이 유난히 생각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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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중용>은 유학의 경전 사서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책이며, 그런 사서의 마지막에 위치한 만큼 다른 경전들보다 가장 스케일이 큰 느낌을 항상 받았다. <중용> 역시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의 한 편명이었는데, 주희에 의해 '선택'받아진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중용>을 보면서 느꼈던 점은 첫 번째로, 굉장히 형이상학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고, 두 번째는 앞서 말한 대로 스케일이 굉장히 크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대학>과 <중용>은 고대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사상을 대변하는 선택받아진 책이었었다. 따라서 사서의 체계로 봤을 때, <논어>와 <맹자>는 기존의 제자서이고 시대적으로 존중받아온 책이었지만, 이 <대학>과 <중용>이 주목받았던 것은 결국 주희에 의한 선택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단히 <대학>과 <중용>을 읽으며, 내용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라, 왜 주희는 이 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나름 결론을 내려보자면,

<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짐작건대, 앞서 <대학>리뷰에서 말한 대로, 유학의 구체적인 학습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서라고 밝혔다. 사실 <대학>의 내용면으로 봤을 때는, 다른 <논어>나 <맹자>에 비해 크게 이질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유학의 핵심 이념과 체계를 간결하고 짧게 제시한다는 것에서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었었다.

<중용>을 봤을 때 나는 주희가 왜 신유학의 이념으로 <중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었다. 사실 <중용>이라는 굉장히 추상적인 내용이 많다. 읽다 보면 사실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을 유난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대학>을 읽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나마 대학은 <중용>에 비해서는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단순하고 명료한 구절들로 강령을 제시하고 있었다.

<중용>은 일단 한 번 보고 이해하기가 굉장히 난해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중용의 도'에 대한 논의가 책의 주된 주제였다. 도(道)라는 것의 논의는 사실 동양철학에서 굉장히 추상적인 철학 논의다. <중용>의 주제는 이 중용의 도(나아가 유학의 도)라는 부분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있고, 그것을 쪼개서, 도에 이르는 자격과(지혜, 인자, 용맹), 도를 발현하려면 궁극적으로 성실함을 가지고 지극하게 수양해야 한다는 논의와 더불어, 하늘의 도(이미 나면서 깨달은 사람)와 인간의 도(선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발분해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를 번갈아며 설명한다. 쪼개서 설명하는 도의 논의를 마지막에 이르러 시경의 인용으로 하나로 마무리하여 <중용>의 요체를 설명하면서, 경전을 끝맺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中이라는 것은 치우침이나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庸이라는 것은 본분(中의 마음)의 의거하여 특출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희는 정의했다. 즉 어떠한 것으로부터 중의 마음을 지키며, 그것을 발현하는 행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용>은 하늘(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기질(선한 기질과 중용의 요체인 도)를 밝혀서 발분하여 지극한 도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한 핵심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면 되겠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깨우친 사람(대표적으로 순임금)과 두 번째는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기질은 있지만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후세(<중용>이 나왔던 시절의 사람)들은 전자의 인간이기보단 후자의 인간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후세 사람들은 그런 중용의 도를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중용>이라는 책은 몽매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저술의도도 옅보였으며 그럼 어떻게 하여야만 중용의 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심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천적인 도를 깨우친 사람과 후천적 학습으로 도를 습득한 사람은 처음에 자질의 차이는 있으나, 결과론적으로 후자가 학습을 통해 도를 습득한다면, 선천적인 도를 깨우친 사람과 동일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중용>은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유학 사상에서 지극하게 강조하는 '인간의 배움은 기질을 바꿀 수 있고 본성을 바꿀 수 있다.'라는 긍정과 희망의 철학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중용>의 큰 도에 대한 설명을 한 뒤, 세부적으로 쪼개어 어떻게 <중용>의 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 자격에 대해서 책은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 세 가지 자격이란 지혜와 인자함과 용맹을 들고 있으며, 각각 이상적인 인물들을 제시하는데 지혜에는 타고난 지혜를 갖춘 순임금을, 인자함에는 선천적으로 깨닫지 못했지만 발분하여 깨달음에 달하게 되는 안회를, 용맹에는 용맹만을 갖춘 한계가 있는 자로를 설정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각 인물들은 지혜와 인자함 그리고 용맹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바라본다면 배움에 있어서, 순임금은 이미 갖추고 태어난 자를 상징하고 있었고, 안회는 갖추지 못했지만 발분하여 이상적으로 갖춘 사람을, 자로 역시 갖추지 못했지만 발분했음에도 치우친 갖춤(용맹에 특화)에 그친 사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중용의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혜의 앎과 인자함의 실천, 그리고 앎과 실천을 실행할 수 있는 용맹의 덕목 세 가지를 고르게 찾추라고(中)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치우침이 없다는 관점에서 볼 때 역시 중용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그리고 다시 도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진행되지만 사실 솔직히 굉장히 추상적으로 도를 묘사하고 있어서, 와 닿는 구절들은 없었었다. 가까운 부분에서 도를 실천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도, 도의 발현 등등에 대한 논의, 그리고 제사의식에 대한 부분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런 부분을 넘어서면 한 가지 '중요한 대목'에 이르게 된다.


도의 추구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성실함'에 대한 논의가 이야기되고 있다. <중용>에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성실함'이다. 이 챕터에서는 특이하게 치국에 대한 논의와 사회생활에 대한 논의가 주요를 이루는데, 지금까지의 개인 마음 수양과 형이상학적인 도에 대한 설명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정치와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대학>에서 봤던 수신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며, 유명한 오륜(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에 대한 이야기, 앞서 말했던 도에 이르는 3가지 덕목 (지혜, 인자, 용맹)은 결국 수신의 요체이며, 이것은 제가와 치국평천하에도 확장된다는 부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큰 것으로 나아가는 부분)

그리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아홉 가지 요체 (몸을 닦음, 현자를 높임, 친족을 사랑함, 훌륭한 신하를 공경, 여러 신하를 내 몸과 같이 아낌, 일반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생각함, 많은 기술자들을 자신의 나라로 오게 함,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회유함, 제후를 포용함 등 9가지)를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은 '성실함'에 있다고 이야기하며,

'성실함'이야말로 인간이 지극하게 발전하거나 도를 추구할 때 항상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이 성실함의 정의와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도를 번갈아가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에서도 군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함이었다. 이 챕터에서도 성실함을 기준으로 도의 본체를 접근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중용>의 요체를 <시경>의 인용으로 끝을 맺었다.

<중용>을 보면서 많은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첫 번째로 경전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인 부분이 많았고, 사실 실체가 없는 도라는 것에 대한 정의라 그런지 많이 본 책임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음을 느꼈었다. 다른 유가 경전들과 비교를 해 보자면 <논어>의 경우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공자의 모습을 통해 유학이 추구하는 바를 알 수 있으며, <맹자>에서는 <논어>보다 더 복잡해지고 문체와 논의는 더 정교해졌으며, 인간의 심성론적 부분의 고찰(사단)과 더불어 정치철학에 대한 주된 이상의 논의가 있는 책이었다. <대학>은 앞서 말한 대로 간결하면서도 유학의 강령을 잘 제시하고 있는 책이었고, 마지막으로 <중용>은 세 경전들과는 다소 스케일이 다른, 뭔가 웅장한 유학의 도를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았으며, 거대하고 울림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대학>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대학>이 다소 간결하고 핵심적이며, 체계성이 있고, 명료하며, 특히 지도자에 대한 논의가 많이 담겨있다면, <중용>은 간결하되 형이상학적이며, 사변적이며, 추상성이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대학>과 반대로, 개인의 수양과 마음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뤘다. 성행했던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의식해서인지, <중용>에서 볼 수 있었던 점은 의도적인 유학의 형이상항적 모습이 보였었고, 아마 그것은 주희가 <중용>을 통해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주희는 이 새로운 <대학> <중용>을 통해 이단을 배척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유학 사상에 걸맞은 이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삼봉집>에서 정도전은 유학에 깊이가 있는 정몽주에게 학문의 물음을 구했고, 정몽주는 학문의 지극함을 알기 위해서는 <대학> <중용> 두 책만 한 것이 없다고 일러준다는 대목이 있다. 그로 인해서 정도전은 <대학> <중용>을 읽으며, 학문의 요체를 파악한다. 중요한 점은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권한 책이 고대 유학을 상징하는 <맹자>나 <논어>가 아닌 신유학(주자학)이라 할 수 있는 <대학> 과 <중용>이라는 점이다.

정몽주는 성리학에 능통한 학자였었고, 그런 그가 권한 두 책은 주희가 세심하게 의도적으로 격상시킨 사서의 두 책 <대학> 과 <중용>이라는 점을 통해, 주자학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유학 이념을 담은 책은 특히 <대학>과 <중용>이라는 점이라고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일단 기존 유학 학파가 존중하고 있는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여, 모든 인간에게는 착하고 어진 마음이 있다는 부분과 그 부분을 발분시켜서 노력한다면, 태어나서 깨닫지 못하더라도 지극한 본성을 깨닫고 나서부터 깨달은 존재들과 같아진다는 부분, 그 모든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인류에 대한 강한 긍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존재에 대한 긍정과 나아질 수 있는 긍정, 그런 긍정이 유난히 <중용>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선설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교육을 통해 기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이런 유학의 이념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싶은 입장이고, 어쩌면 그 입장은 나 자신의 기질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난 사람이 아니라서(과연 난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긴 하지만... 세상에는 내 관념보다 더 뛰어난 인간들이 많기에...), 부족한 사람이라서, 발분하며 노력하게 된다면 난 사람의 기질에 필적할 수 있다는 부분 역시도 나의 부족함에 희망과 긍정을 가져주는 것 같아서, 의미 있게 다가왔었다.  

솔직히 나는 <중용>이 너무 추상적이고 도에 대한 논의도 너무 와 닿지 않아서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은 아니다. 뭔가 웅장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랄까 그 웅장함 속에 감동이 일어나기보단 뭔가 웅장함에만 그치고 허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마 내가 어쩌면 아직도 <중용>에 대한 도에 도달하지 않아서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도에 대한 논의는 제외하더라도, 앞서 말한 인간 발전에 대한 긍정성과 더불어, 인자함과 용맹함 그리고 지혜를 조화롭게 갖추는 부분과, 모든 도의 추구에서는 '성실함'을 필요로 한다는 사상은 울림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성실함'은 기본이니까,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중용>은 고대에서부터 밝혀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회독에서 책을 덮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엄숙함과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중용>의 진정한 울림에 한층 더 가까이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은 지금까지의 <중용>으로부터 느끼지 못한 기분이어서 개운함을 느꼈었다. 그 개운함에 나는 이제야, 20년 만에 <중용>의 서평을 조용히 써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중용>에서 감명깊었던 구절 몇 가지만 써 본다.


6장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임금은 매우 지혜롭도다! 순임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아주 일상적인 말도 그냥 넘기지 않고 잘 생각해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나쁜 점은 묻어 주고 좋은 점은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양극단을 파악하여 그 가운데를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점이 순임금다운 점이다.'


7장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똑똑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물이나 덫,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똑똑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용을 선택하고는 한 달 동안 제대로 그 상태를 지켜낼 수 없다.


20장
 
배우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배울 바엔 능숙해지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는다. 질문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질문할 바엔 알게 될 때까지 질문을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생각할 바엔 파악할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변별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변별할 바엔 분명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할 바엔 독실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은 한 번에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백번이라도 하고, 다른 사람은 열번에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천 번이라도 한다.

과감히 이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명철해질 것이며, 유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강인해질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배움은 더 나은 존재로 각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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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이란 텍스트는 나에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 텍스트다.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 했을 때나 의식적으로 나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다잡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항상 봤던 책이 <대학> 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대학>을 계속해서 봤었다. 유가의 많은 경전들 중 내가 <대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린 시절 내가 사서 중 가장 싫어했던 책은 <맹자>였고, 가장 좋아했던 책은 <대학>이었다. <맹자>는 가장 분량이 많고 다소 복잡한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면, <대학>은 분량이 가장 짧았고, 문체도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량이 가장 적었기 때문에 빠르게 본다면 한 시간 내에 전문을 다 독파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나거나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이르렀을 때 의식적으로 <대학>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분노했을 때는 글이 주는 뜻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으로 글에 머물기만 했었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주기적으로, 읽다가 보면 나의 노기는 눈 녹듯 사라지곤 했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대학>의 힘이었다. 글을 차분하게 읽다 보면, 마음의 중심을 잡게 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반복해서 읽다, 내 마음의 파도가 사라졌을 때 책을 덮고 잠을 청하곤 했다. 그것이 나의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한동안 <대학연의> 독서에 열중이었다. <대학연의>를 볼 때 나는 항상 <대학>을 가까이 두고 같이 읽어나갔다. 오늘도 따로 <대학>을 읽었다. 분노한 나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대학>을 읽었다.

<대학>이라는 책은 유가 경전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한다. 주희는 이 책을 엮으면서, 왕을 비롯한 사대부의 자제, 그리고 성인이 된 남자들, 배움에 탁월한 이들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사서'라는 체계를 집대성한 주희. 그 주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편찬을 한 것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이라는 경전은 독립된 책이 아니라 원래 <예기>의 한 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대학>을 독립적으로 한 책으로 엮어서 유학의 도통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주희였다.

책을 읽으며 왜? 주희가 이 책을 유학 가르침의 첫 번째 교과서로 선택했을까라는 물음이 일어났다. 그 해답은 <대학>이라는 책은 유학이 추구하는 공부 방법론과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유학의 핵심 이념과 더불어, 어떻게 그 핵심 이념을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었었다. 더불어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선 유학의 경전들 중 <대학>은 지극히 짧고 간결하다. 문체가 간결하며, 부피도 적다. 

그러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깊다. 독립된 격언들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좋은 구절들이 많지만, 그 독립된 격언들이 모여서 한 챕터를 이루고, 그 챕터들은 의미군을 형성하고 그 의미군들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커다란 유학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대학>이다. 더불어 이런 체계성의 장점과 간결함이 합쳐져서 처음 유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가장 제격의 입문서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뭐 일반론적으로 유학의 중심 이념은 '인'이며 등등의 그런 일반화된 사상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유학 서적을 읽으며 느낀 것은 세 가지다.

1.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큰 것으로 나아간다.
2. 우선 나를 돌아본다. 
3. 선함을 추구한다.

<대학>은 이런 유학의 정신을 가장 간결하게 핵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고전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모든 유학의 핵심적인 사상이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가정을 돌보고, 그리고 치국을 행하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이런 유학의 이념을 잘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논어>와 <맹자>, <중용> 역시 이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수신 이전에 인간이 행해야 하는 부분들까지도 고찰하고 있다. (격물치지, 성의정심) 그래서 대학은 선택받았다. 유학의 이념을 한층 더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 <예기>라는 경전의 한 편이, 사서의 첫 경전으로 격상되었다. 그것이 <대학>이었다.

<대학>을 한 구절로 압축해보면 '삼강령을 팔조목으로 실천하라'라고 할 수 있다. 삼강령은 유학에서 추구하는 정신의 3가지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를 말해보자면, 나 자신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교화하며, 사회를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이 우선 나부터 덕을 밝힌다는 부분, 즉 작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행하고, 나 자신이 그렇게 행하고 나서야 남을 교화하며, 그것은 결국 사회를 선한 곳에 머물게 한다. 이것은 내가 앞서 말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선 나를 돌아본다, 선함을 추구한다.라는 세 명제를 만족하고 있다.

그럼 이 삼강령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대학은 친절하게 구체적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사물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앎을 확장해나간다. 앎을 알아가며 나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마음의 방향을 올바르게 만든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다진 후에야 내 몸을 닦고, 가정을 바르게 하여, 나아가 사회생활에서 발분하며, 평천하를 이룬다. 이것을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 치국 -평천하) 8가지 조목으로 나눠서 설명했다. 이것이 팔조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본 이 역본은 주희가 해석한 <대학>의 번역을 존중하여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학의 관점이었다. 훗날 명나라의 왕수인은 이런 주희의 <대학> 해설에 반발하는데, 여러 가지 부분들의 해석상 차이가 있지만 팔조목 부분의 비판을 보면, 주희가 말하는 격물치지 이후에 성의정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비판하였다. 왕수인은 굳이 격물치지(사물을 탐구하여 앎을 넓힌다.)와 성의정심(나의 의지를 성실히 하고 마음의 방향을 올바로 잡는 것)을 단계별로 볼 것이 아니라 통합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장으로는 성의정심을 이룩하게 되면 굳이 격물치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사물 탐구(어떠한 대상)로부터 마음을 다지는 주희의 사상을 비판하며, 마음공부의 우위성을 주장했었다. 즉 그의 사상으로는 격물치지는 마음 외부의 대상의 탐구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면 올바른 마음 수양으로 가는 것에 번거로울 수 있다며 격물치지보단 성의정심의 우위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왕수인은 훗날 주자학과는 다른 양명학 학파를 일궈낸다.

개인적으로 나는 주자학의 관점도 양명학의 관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주자학의 관점으로 팔조목을 지금 시대에 발맞춰 해석해본다면, 어린아이가 태어나 탐구를 시작한다. 그 탐구라는 것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고(격물), 직간접적인 관찰과 지식의 탐구는 결국 아이의 뇌에 앎을 확장하게 만든다. (치지) 그러한 앎과 지식이 축적됐을 때 아이는 성장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의지의 다지게 되며(성의), 그러한 의지로부터 나의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게 된다. 이 마음의 방향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한 사상, 관념 등이 어느 정도 고착화된 것을 의미한다. (정심) 이렇게 한 개인이 마음이 체계가 잡히게 되면 스스로의 스펙을 쌓고 (수신), 가정을 일궈 아이를 낳게 되고 가정을 잘 꾸리며 (제가), 사회생활에서 원활하게 활동을 하며(치국), 자신이 맡은 바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는 것(평천하)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왕수인의 관점을 존중해본다면, 사물(어떠한 물체)의 탐구와 앎을 확장하는 것에 너무 지나치게 되고 그로 인한 그 앎의 지식이 체계가 잡히지 못하고 방향을 잃는다면, 나의 의지를 다지는 것과 내 관념의 방향을 잡는 것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모든 수신의 중심은 결국 나의 의지를 바로하고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며, 격물치지 역시도 큰 관점으로 본다면 성의정심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이 체계화한 학문의 방향 방법, 팔조목을 지금 시대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생각은 나도 없다. 하지만, 대학의 이 팔조목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둘러보게 됐다. 격물과 치지에 너무 힘써서, 지식이 충만한데도 마음의 방향이 없는 사람, 애초에 격물과 치지(공부)에 힘쓰지 않는 사람, 잘 배운 교육 덕분에 격물과 치지가 충만하나, 성의정심이 이뤄지지 않는 사람, 등등 현대 사회의 각박한 사람들의 자화상을 이 팔조목에 대입하여 생각해 봤었다. 그리고 그 자화상들이 내는 결론은 결국, 우리 사회 사람들은 '마음공부'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대학>이라는 텍스트는 사실 지극히 짧은 글이지만, 풍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대학>을 보며 진덕수는 <대학연의>라는 방대한 저작을 탄생시키기도 했으며, 역대 사상가들은 <대학>의 해석을 두고 찬반양론이 있었었다. 

책을 보며, 주희의 고민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했다. 같은 사서라도 <논어>와 <맹자>와 <대학> <중용>은 달랐다. <논어>는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맨얼굴을 내 보인 경전이고, <맹자>는 유학이 추구하는 정치철학이 담긴 책이다. 수당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위기를 맞았다. 성행하는 불교와 도교의 이론 앞에서 주희는 고민했다. 유학 역시도 이대로는 안된다. 기존의 <논어> <맹자>와 6경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불교와 도교를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이론서가 유학에서도 필요했다.

<대학>은 그런 유학의 이론에 체계를 제시하고 있어서 선택받았고, <중용>은 그런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발견할 수 있어 선택받았다. 그리고 주희는 이 두 가지 책과 <맹자>와 <논어>를 '사서'라는 체계로 완성하였다. 그렇게 <대학>과 <중용>은 유교를 더욱더 깊이 있게 심화하였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사물에 대한 탐구는 진지하지 못 했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앎은 깊지 못하다.'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의지는 굳건하게 다져지지 못한 것을'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의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한 것을'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마음을 다지지 못하여 수신을 하지 못한 나의 몸뚱어리를'

그랬다. 그래서 분노에 감정에 이를 때, 나는 <대학>을 부단히 읽었다. 나 자신이 반성을 해야 할 때 부단히 <대학>을 읽었다. 그리고 평정을 하고자 노력했다. 사물 탐구를 좀 더 진지하게, 앎을 좀 더 지극하고 깊게, 의지를 더욱더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나의 마음의 관점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렇게 수신하기 위해, 앞으로 제가를 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사회에서 좀 더 충실한 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내가 맡은 곳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그런 나를 꿈꾸며 반성하며 책을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모두가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특히 10장 치국평천하 장에서, 재물에 대한 관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지도자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점은 경제적인 이익이다. 국익을 내 대수의 국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해야 하고 그 방법에는 경제적인 이익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이런 경제적 이익 추구에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부분은 수용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대학>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면,  재물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며 명문을 우선시(대학의 관점) 하지 말며, 이익을 추구하되 명분과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어쨌든 현대 사회의 무조건적인 성과주의와 이익 추구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유학에서 말하는 부분도 부분적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됐었다.

확실히 유학이라는 관점은 치국으로 나아가면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맹점이 많이 보인다.(무조건적인 선의 추구,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명분론 등등) 그것을 <대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수신의 영역으로 바라볼 때는 굉장히 좋은 격언들이 많다. 유학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 있지 않으며, 또 무조건적으로 배격할 사상은 아니라는 부분도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불만점은 <시경>의 인용문이었다. <대학>에서도 다른 고전들의 인용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시경> 인용이 가장 많다.  각 장의 마지막 부분들을 <시경> 인용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시의 인용으로 가져오는 서술상 특징이라면 함축적이며, 경구문으로 완결할 때 보다 좀 더 많은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은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공을 들이고 그런 해석상의 여운의 의도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용과 구성이 의미하려는 주제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냥 돌려 시로 표현하지 말고, 짧고 간결한 경구문으로 표현했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도 있었다.

 
 자질구레한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에겐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고전이며, 최근 <대학연의>를 읽으면서 <대학>의 체계와 <대학>의 내용에 대해 더욱더 심취했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와 닿은 구절 한 구절을 끝으로 리뷰를 마칠까 한다. <논어>는 이미 작성했고, <중용>과 <맹자>는 다음 기회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대학> 전 10장 治國平天下 中

 자신이 아랫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윗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 뒷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앞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뒷사람에게 먼저 하도록 시키지 말며 자신이 앞사람의 위치에 있을 때 뒷사람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앞사람을 따르지 말라. 또 자신이 왼쪽에 있을 때 오른쪽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왼쪽과 사귀지 말며 자신이 오른쪽에 있을 때 왼쪽에게서 본 싫어하는 모습으로 오른쪽과 사귀지 말라 이것이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는 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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