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가 다소 길어서 세 부분으로 나눴다. 먼저 허영덩어리 히틀러를 바라보며 느낀 점과, 히틀러의 주변 사람들을(히틀러에 찬동한, 반동한) 읽으며 우리 역사, 시대적인 부분과 비교를 하며 생각을 해 봤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결론에 담아봤다.

 

 

 

1. 히틀러의 삶을 보며, 나의 허영을 반성하다.

 

사실 뻔한 주제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재미가 있는 책이다. 오래간만에 서평을 맛깔지게 쓸 책을 발견한 것 같다.

 

책은 한 허영심이 많고,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야심가가, 얼마나 무모하게 '철학'을 이용하는지를 다룬 책이고, 그 야심가의 허영의 철학에 동조한 철학자와, 반동한 철학자들의 행보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사실 철학이라는 분야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속성이 있다. 바로 형이상학적이고 궤변적이고 사변적, 관념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철학이다. 답도 없고,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는 난해한 학문, 그러나 이 난해한 학문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인식은 대체적으로 깊이 있는 학문이지만 '어렵다'라는 것이 대다수다.

 

특히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철학에 대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 철학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든다.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기도 싫고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을 배울 가치도 못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소수의, 집념 어린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철학을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단'으로 이용한다. 난해한 철학은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쉽지 않을 부분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적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들도 철학은 어렵다는 생각을 주로 하는 것이 대다수인데, 영리한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자들은, 이를 간파하고, 그 접근성이 용의하지 않은 어려운 철학의 단면으로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덮어버리는 것을 시도한다.

 

즉 어려운 철학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하는 행위가 나타난다. 이들은 철학자의 저서들을 깊이 숙독하지 않으면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철학자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은 철학자의 '명언'등을 아전인수 격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논고에 그대로 복사하기를 시도한다. 똑바로 그 사상을 이해하지 않으며, 그 격언을 이용하는 것은 명언을 내린 철학자를 죽이는 일이다.

 

철학에 겸손하고 정통한 자들은 본질적으로 그런 행위를 간파하지만, 대중들은 그렇지 않다. 만약 이 지적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이 정치가이거나 야심가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히틀러였다.

 

나치는 그렇게 사상적으로 완성됐다. 독일의 거장, 칸트를 비롯한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의 사상들은 모두 히틀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히틀러는 이들의 철학을 깊이 있게 숙독했다고 우기며, 그들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뒤틀린 사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는 무력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상 속, 철학 속에서도 거장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했던 허영덩어리였다.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진보와 발전을 가져줬지만, 때론 이렇게 오용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숱하게 볼 수 있다. 인문학을 좀 만져봤다면서 아는 척하는 허깨비들에게 철학은 이용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철학뿐만이 아니다. 내가 볼 땐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적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의 몇몇 부류는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를 독서로 덮으려고 한다. 독서로 발전을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독서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덮어버리는데, 더 열중을 하는 순간, 배움의 길을 멀어진다.

 

물론 허영이 발전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허영에 집착하다 보면, 배움의 본질보다 허영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자체에 집중을 하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과 철학은 배우는 자에게 지식과, 발전 가능성을 선사하지만, 알게 모르게 인간 내면에 보이지 않는 자만심과 오만의 시각을 키워준다. 이에 굴복해버린다면, 진정한 배움으로의 길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교양 있는 지식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독서와 철학은 깨달음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지식을 추구로 하는 독서와 철학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은, 중고등학교의 학습으로 끝내야 한다고 본다.

 

 <논어> 위정 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는 사람의 태도'라고,

 

모르는 것을 거짓된 지식으로 덮어 버리고, 똑바로 알지 못한 지식을 아집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것, 그 마음에는 알량한 소영웅주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지식의 나열, 인정을 구걸하는, 그렇게 자신을 칭찬하며 자신을 철학이나 여타 다른 권위로부터 포장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이 사회에는 꽤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노자> 20항의 격언이 생각난다.

 

'지식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나는 노자의 저 말에 대해 사실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지적 허영에 가득 찬 인간들에게는 꼭 들려주고 싶은 격언이다.

 

사실 나의 20대 초반은 이런 지적 허영심에 들떠 있었다. 다소 어린 나이에 동양 고전을 조부로부터 배웠다는 자만과, 서양 철학을 껄떡이면서,  이 서양 철학만 내 손에 넣으면, 완벽한 동서의 지식을 가진다는 망상.

 

그러나 나는 가졌다고 생각했던 동양 철학도 구멍 투성이였으며, 허영으로 시작한 서양 철학 역시도 똑바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 동 서양의 고전을 겸손하게 다시 공부하듯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허영이 없다라고는 부정하진 못하겠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시 꿈틀거리는 나의 허영을

서랍 안으로 밀어 처넣으며 나오지 못하도록

반성을 했던 것 같다.

 

내 안에도 '히틀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정도는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에

'히틀러'가 살아 숨 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라는 책.

그 책의 이름을 빌려오자면,

 

내 마음속의 허영덩어리(히틀러)와 나의 자아는 싸울 것이며

이 싸움은 나의 내면에서 평생 갈 것이다. 나는 오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이고,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나만의 히틀러와 싸울 것이다.

그것은 '나의 투쟁'이다. 내 마음의 히틀러를 겸손의 자아로 눌러버릴 것이다. 히틀러가 자행했던 철학의 자의적 인용. 나 역시 그의 저서의 이름을 따서, 내 멋대로 이렇게 붙여봤다.  

 

 

 지식은 양날의 검이다. 올바르게 사용될 경우, 대체적으로 인간에 성장을 가져다주지만,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인간을 몰락으로 몰고 간다.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은 인간이 개인에 국한된다면 그 개인만이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만약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해 버린다면, 공동체의 비극으로 귀결된다. 지식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도 마찬가지고, 독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본보기가 바로 '히틀러'였다.

 

아무튼, 가장 아름다운 철학의 배움과, 가장 아름다운 독서는,

'깨달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적인 탑 쌓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히틀러의 허영으로 덮이고, 뒤틀린 삶은, 나에게 그런 반성을 불러일으켰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히틀러에게 배울 점은 있다. 바로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승화시킨 그 추진력 그것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다만 그 행동력의 바탕에는 뒤틀린 철학이 있었으며, 그로 인한 결과는 인류 최악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드도 쳐주고 싶지 않다.

 

 

 

2. 히틀러의 주변 철학자들(찬동한, 반동한)을 우리 역사와 대비하여 읽다.

 

이들 내용을 보며, 생각한 것들은, 우리나라의 역사다. 특히 조선 중기와, 일제 치하 시대가 생각났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의 이념화된 성리학이 발전하고 있었다. 중국을 존중하고 중국을 따르는 데에, 대해서 누구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철학, 성리학이라는 체제에 대해서 우리나라 학자들은 벗어나지 못했고, 그 가치관 내에서 철학을 발전시켰다.

 

조선에게는 성리학에 물음을 던질 만한 조선만의 '발터 벤야민'도 없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도 없었고, '한나 아렌트', '쿠르트 후버'도 없었다. 사회에 통용되는 철학, 체제가 용인한 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을 해 봄 직한데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까지도,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실학이라는 철학이 발전하면서 주체성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자학'의 권위는 대단했었다.

 

일본과 비교하기는 나도 싫은데, 여기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스승으로 불리는 사토 잇사이 어록 <언지사록>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언지사록><언지록>의 131절이다.

 

하늘은 차별하지 않는다. -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문명국인 중화의 나라가 있고 또 야만스러운 나라가 있다. 하늘은 정말로 어떤 곳에는 후하고 어떤 사람에는 박할까?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며 차별을 할까? 그렇지 않다. 단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을 말한 중국의 옛 성인이 다른 곳보다 특별히 더 빨리 또한 특별히 자세하게 그것을 밝혔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도는 중국의 문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유학자인 사토 잇사이 역시도, 유학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맹목적인 중화 추존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유연스럽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진을 일궈냈던 것 같고, 우리보다 더 빨리 발전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시대, 그리고 권력이 용인한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발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히틀러와 철학자들> 책은 히틀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송강 정철이 참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둘 다 세계적으로, 그리고 조선 내에서 시대의 최고 철학자로 존중받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시대가 규정한 철학, 권력이 규정한 철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두 사람은 분명 뛰어난 자질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로부터의 굴복이 그 명석함에 오점을 남겼다.

 

동시대에는 칭찬과 추존을 받을지 몰라도, 결국은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다.

 

시대를 거슬러, 일제 치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생존과 진리 중, 생존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일제 치하에도 변절자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의 교조화된 성리학 추존 사상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일제 치하의 시대에서서는 기존의 시대가 규정한 굴욕의 철학으로부터 거부한 '독립 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발터 벤야민'이었고, '테오도어 아도르노'였으며, '한나 아렌트'였고, '쿠르트 후버'였다.

 

독립을 위해 일으킨 의병 그 한 명 한 명의 병사들의 마음, 조국을 되찾기 위해 거병한 그들만의 철학, 그들은 비록 히틀러에 반항한 소위 세계적인 네임드 철학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마 더 뜨겁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독립을 위한 의지, 그들의 뜨거운 피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현세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그리고 내가 살아갈 내일들의 무게가 더욱더 무겁게 느껴졌다.

 

 

 

 

3. 결론

 

책은 참 매력적이다. 매력적인 구성, 히틀러를 비롯해, 히틀러에 동조한 자들과, 히틀러에 반대한 자들을 나눠서 잘 대비하여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제지간이었고,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대비되는 것이 루쉰과, 쉬광핑 부부가 생각났다. 하이데거는 결국 권력의 힘에 굴복하여 한나 아렌트와 거리감을 뒀지만, 루쉰과 쉬광핑은 사제지간으로 만났지만, 종국에는 함께 했다. 사상적으로도, 그리고 결혼생활도, 그래서인가? 루쉰의 위대함이 더 부각되는 느낌도 받았다.

 

철학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역사서에 가깝다. 대립되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 묘사가 소설처럼 잘 묘사된 책이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모르는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결론은 사실 뻔한 책이지만,

 

히틀러의 모습에서, 나의 내면의 오만, 히틀러의 모습을 반성했고, 히틀러에 복종한 철학자와, 히틀러에 대항한 철학자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역사와 연계하여 봤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현재 마르틴 하이데거를 비롯한, 슈미트와 프레게가 미국과 유럽 교육과정에 중심에 있다고 한다. 이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학생들은 무비판적으로 배워나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독일의 지적 유산에서 어두운 요소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에필로그에서 나치 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읽어야 한다고, 다만 저자들이 어떤 만행을 했는지,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가르치고 읽어야 한다고,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읽기보단,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인류 지성에 이룩한 철학적 업적은 인정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릇된 관점 등은 비판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나치 사상에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다 걸러낼 것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역사적 거울로 이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악용될 수 있을 여지는 많고 제2의 나치의 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히틀러가 자행했듯, 철학이라는 칼과 지식이라는 칼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에게 저주를 가져올 수 있다. 

 

과거 독일 선현들의 철학들을 히틀러가 '독이 든 성배'로 조합하여 사용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 태어난 철학들도, 바른 가치관의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옳은 가치로 사용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물론 바른 가치관을 전제로 했을 때 이야기고, 우리는 여기서 그 바른 가치관을 어떻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볍고, 편안하게 읽었으며, 고요한 분위기였으나, 강렬했다.'
 

이 책을 간단하게 논평하면 그렇다. 제목 <철학자와 하녀>가 상징하는 것은, 탈레스의 일화로 설명한다.


 '어느 날 철학자 탈레스는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본 트라케의 하녀가 깔깔대며 이렇게 말했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중략)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 재치 만점의 하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그녀를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무지한 대중의 상징으로 삼았다.'

 
양자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의미하는 것 같았다. 하녀로 상징되는 것은 우리 일반의 대중이고, 탈레스는 지금의 철학자들을 이야기하는 것, 철학이라는 학문의 난해성으로 인해, 대중은 철학을 오해하고 배우려 하지 않고, 대중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할 철학자들은, 그런 대중을 무지하다고 이야기하는 현실. 그런 철학자들의 태도 속에는 자신들만의 '학자를 위한 학문'을 꼬집고 있었다.
 

책은 '현대의 하녀(어감이 좀 그런데... 아무튼)'들에게 올바른 철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철학의 가치와 철학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친근하고, 편안하고 쉽고, 다정하게 다가고 있었다.
 

인문학의 여러 분야 중 가장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분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철학'이다. 그런 철학을 배우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과거 블로그 습작에 나 역시 지식의 축척을 위해 철학을 배웠지만 한계가 있었다는 주제를 썼던 것이 기억났다. 책에 나온 올바른 철학에 대한 부분. 철학이라는 것은 앎의 '지식'적 측면보다는 삶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 그 말이 참 매력적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조부로부터 동양학 고전을 배웠었다. 동양 철학을 나름 체계적으로 배운 탓에, 철학과의 만남은 오래된 인연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철학'이라는 것에 삶의 물음도 구해봤고, 삶의 정신적인 방황을 할 때, 서양 철학에 심취도 해 봤었지만, 모두 다 실패했다. 나의 의식 관념 속에는 '철학'이라는 주제, 그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었다. 해답을 찾고, 방황을 빙자하여 철학을 끼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철학을 진지하게 학습하지 않고, 피상적 지식의 획득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피상적 지식이 탑처럼 높아질 때마다, 나의 자아의 허영은 높아만 갔었고, 나는 오만해져 있었다.
 

허깨비 같은 나의 오만을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얻었던 피상적 지식의 철학은 모두가 허사였다는 사실도 느꼈다. 철학은 이렇듯,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배워야 하는가라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세워야 하는 학문이었다. 나는 그 부분이 없었다.
 

책은 이런 철학의 올바른 이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저자는 철학이라는 것은 천국에는 필요 없고 지옥에서만 있는 것이라고 한다. 천국은 모든 것이 갖춰진 행복한 시대지만, 지옥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더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더욱 철학을 배워야 하고, 약자일수록 더더욱 선현들의 사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런 뉘앙스의 책은 많이 발간되고 있다. 약자를 위한 책들. 유난히 올해에는 이런 부류의 책들이 많이 발간되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자기 계발의 유명한 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 그리고 사회학으로 보자면 노명우 교수의 <세상물정의 사회학>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문학으로 보자면 공원국 씨의 <오자서병법> 이 책 역시도, 고전이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항거하는 해석으로 책을 냈다. 그리고 철학적인 부분에서도 고병권의 <철학자와 하녀>.
 

이런 약자를 위한 해석의 책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척박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었다. 하나하나 비교를 해 보긴 뭣하다만, 사회학의 노명우 교수의 책 <세상물정의 사회학>의 경우는 사회학자라는 전문가가, 비전문인인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좀 더 대중적이고, 평이한 글쓰기를 지향하여, 썼던 책이다. 다소 어조가 경쾌하고 힘이 있고, 똑 부러진 학자의 문체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고병권의 책은 그와는 다르다. 어체는 여성스럽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느낌마저도 들었다. 더불어, 노명우의 책은 대중을 위해 눈높이를 낮췄다고 하지만 그래도, 학자라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슬며시 현학적 글쓰기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고병권은 그런 부분이 없었다. 깔끔했다. 내려놓고,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감성을 자극하는, 그러나 강력한 주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서술법이 특징이었다. 두 작가 모두, 필력의 개성이 대비적이지만, 두 작가 모두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철학에 대한 필요성과, 올바른 철학이 가져야 할 이야기 등을 작가의 관점으로 대중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참지 말고, 분노할 때 분노하고, 싸워라.' 이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 책의 뒷부분은, 그런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 현대판 하녀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예시를 보여준다. 사회적인 부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장 의미 있게 봤던 것은 원자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책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나 의견 등등을 이야기하며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예술, 그림 등의 예시도 있었다.
 

다 좋지만 몇 가지 책을 보며 들었던 문제점을 지적해보겠다. 일단 이 책의 주제는 철학이라는 부분이다. 학문의 특성상, 인문학 분야는 특히 간학문적인 속성이 있다. 따라서, 학문 간의 관계가 대체로 전문적이라기보단 모호한 속성이 있다. 이 부분은 자연과학과 비교했을 때, 인문학이 더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처음 이 책의 도입부는 참 매력적이다. 철학과 인생, 철학과 약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조용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잘 이끌어나간다. 그러나, 책이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철학' 이야기보다는, '사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앞서 말한 대로 인문학의 간학문적 속성에 의거해, 사회 사태 역시도, 철학에 속한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책의 제목과 책의 주제와는 거리가 좀 있는 내용들까지도 보였다. 고병권이 주장하고 있는 의견 자체는 일리 있는 말이고, 숙고를 해 봐야 할 주제들이지만, 책의 전체적인 주제, '철학'이라는 주제에 봤을 때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초기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며 순수 철학의 주제를 더 끌어와서 설명을 했으면 어떨까라는 아쉬움도 있었다.
 

 또한 이 책을 볼 때에는 세심하게 잘 생각을 해 보며 봐야 한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에서 어떤 '사실'에 대한 부분보다는 '해석'적인 부분에 더 관심을 둔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이 책 역시 저자가 '철학'을 생각하는 '해석'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공감을 하고 저자가 '해석'한 책을 보며 '답안'으로 생각할 여지가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모범답안'이 될 순 있어도, '답안'은 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잘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저자의 '해석'에 근거한 것이니까, 해석이라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책들은 저자의 논의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며 독서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을 해 나가며 판단을 해 나가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가벼워 보이고, 옳은 이야기, 감성을 자극하는 책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저자의 논의는 다소 강력한 느낌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견문이 좁고, 덜 여물어서 저자의 논지에 대해 아직은 많이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철학을 대하는 기본 정신에는 공감했고, 많은 울림을 받았다.
 

특히 방황에 대한 저자의 논의가 좋았다. 방황에 대해서, 저자는 '기꺼이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글에서 전율을 느꼈다. 굳이 답을 얻지 않아도 좋다. 방황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이런 위로 어린 말은 생각하며 방황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퇴폐와 타락, 그리고 쾌락을 위해 방황하는 생각 없는 방황자들에게는, 어쩌면 그들이 내뱉는 숱한 '변명1'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더불어 길이 없는 방황에 대해서, 인용한 루쉰의 편지, 그 초반부의 루쉰의 편지. 길이 없는 상황에서의 '편지'는 내가 전문을 다 타이핑하여, 보관하며 두고두고 보고 있다.
 

다소 가볍고 쉬운 책이지만, 역시 철학을 다룬 책이기 때문에, 가벼운 에세이더라도, 사색을 많이 하면서 봤던 책이다. 따라서 쪽수에 비해 시간을 좀 끌면서, 여유를 부리며 독서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 더불어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책에 보이는 그림 삽화들이 참 좋았다. 글과 아주 매치가 잘 되는 그림들이라서, 좋았던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고, 영감도 받은 책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앞서 말한, 고병권이라는 사람의 글 쓰는 방식. 조용하고 고요하고, 여성적이고, 섬세한 필력임에도 불구하고 돌직구적인 강렬함이 느껴지는 뒷맛. 그것이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짧고 깊은 철학 50 - 세계의 지성 50인의 대표작을 한 권으로 만나다
톰 버틀러 보던 지음, 이시은 옮김, 김형철 감수 / 흐름출판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출판사 측의 배려로, 신간인 철학 개론서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제목은 다소 도발적인 <짧고 깊은 철학 50>, 기본적인 개론서 볼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처음에 철학 책들을 볼 때 느낀 점은, 접근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었다. 그래서, 좋은 안내자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개론서나 안내서를 보는 것을 싫어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생각해서,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어쨌든, 개론서라는 것은 그 분야를 입문할 때 가장 탁월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좋은 개론서의 요건은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짧아야 하고, 나름 중심 논제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주제에 관해서는 되도록이면 깊이 있게 다뤄야 한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인문 교양서들은 이런 좋은 조건을 갖춘 책을 만나기란 드물다. 그저 상업적인 인문학 붐에 이끌려, 영혼 없는 말들을 보기 좋게 포장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좋은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겠다. 철학이란 학문, 특히나 여러 사상가들의 논의를 짧은 글로 표현하기란 솔직히 내공이 필요하다. 나 역시도 여기에 나온 저자 중, 이마누엘 칸트, 헤겔, 하이데거의 책을 생각 없이 봤다가 멘탈이 급격하게 붕괴된 경험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볼 때, 내가 과문해서 이해하지 못한 사상가들을 중점으로 봤었다.
 
일단 이 책은 부담감이 없어서 좋다. 철학이라는 아주 난해한 학문을, 부담 없이 서술하려는 저자의 노고가 엿보였었다. 서술 자체에서 최소한의 전문 용어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부득이한 철학 용어들은 맨 뒤에 단어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보완했다.
 
책의 구성은 50명의 철학자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 철학자들의 저서 중 1권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대체적으로 철학자의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저서들을 소개하곤 했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또 다른 철학의 명저'라고 하여, 지면상 다루지 못한 다른 철학자들의 이름과 저서를 짤막하게 다뤄준다. 50명의 철학자와 그 철학자들의 저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고, 나머지 50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는, 짧게 다루고 있다. 즉 토털 100명의 사상가를 다루고 있다고 봐야겠다.
 
 내가 봤을 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의 철학자들까지도 포함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놈 촘스키,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검은 백조 이론으로 예외성에 대한 주장을 제기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그리고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 등등의 현세를 살아가는 철학자들까지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나 역시도 사실 철학이라 하면, 고대와 근세를 가장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 다룬 여러 근대와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파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고, 특히나 내가 알지 못 했던 근현대의 사상가들에 대해서 흥미 유도와, 몰랐던 현대 철학자들의 저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을 보면서, A.J에이어, 대니얼 카너먼 등의 저서를 위시리스트에 넣어 뒀다. (사견을 달자면 카너먼의 명작 <생각에 관한 생각>에 경우, 번역이 아주 발 번역이라고 한다. 원서를 볼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책의 구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이 함께 읽을 책이라는 부분, 각 테마별로 철학자의 저서 이야기가 끝나고, 함께 읽을 책이 나오는데, 그 추천 책들 역시도, 이 개론서에 소개된 책들로만 구성됐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는 것도 좋겠지만, 함께 읽을 책을 따라가면서 필요한 주제, 테마를 정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통 추천 독서나 같이 읽을 책들의 경우, 너무 많은 책들을 열거해서, 같이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추천 도서 목록인데,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의 제시 방법은 아주 합리적인 구성이라고 느껴졌다.
 
좋은 점을 굳이 더 꼽자면, 이 책의 맨 첫 부분, 감수의 글의 내용이 아주 좋다. 철학이란 학문은 그냥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배우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하는 학문인데, 특히 이 감수의 말은 철학을 배우려는 초학자들에게 아주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김형철 교수가 쓴 감수의 글인데, 왜 철학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으니, 굳이 꼭 따를 필요는 없더라도 참고하길 권해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로 단점을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철학의 계보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런 계보에 대한 부분은 초학자가 보기엔 다소 흥미를 잃을 부분이긴 하겠지만, 무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편을 보고, 느낌이 와서 <순수이성비판>을 무턱대고 사서 보면 사실... 이 개론서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어렵다. (물론 칸트의 저서는 전문인이 봐도 내용 자체가 어려운 책이지만... 일단은 철학의 계보에 관해서 예시를 들고자 하니 이 부분에만 집중해주길 바란다.) 왜냐면 칸트의 저서를 보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저서를 데카르트의 저서를 보기 위해서는 중세는 건너뛰더라도 플라톤의 대표 저서를 봐야 한다. 특히 서양 철학은 이런 '계보' 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소 이런 부분에서 일반 독자들이 어려움을 느끼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계보는 알려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다. 헤겔을 읽으려면 칸트를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고, 쇼펜하우어 역시도 칸트를 알아야 함은 마찬가지다. 잘 요약되고, 잘 설명하고 압축한 것은 좋지만, 세부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철학의 숲을 조감을 한 번 해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님 적어도 책의 뒷부분에, 최소한의 철학의 계보를 좀 알려줬으면, 어땠을까?라는 부분, 물론 이런 부분은 철학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마치 가지만 깊고 짧게 알려주려고 노력했지, 나무에 대한 조감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두 번째, 책 제목을 서양 철학이라고 명명하면 어땠을까 한다. 저자는 동 서양의 사상을 밝혔다곤 하나, 동양의 철학자와 철학서가 소개된 것은 공자와 <논어> 뿐이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아쉬움을 느꼈다. 서양인의 입장에서 저술된 개론서라서, 서구의 저서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이 부분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의 철학이 물론 오늘날에 공헌한 것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양 철학이 서양 철학보다 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부분에서 이 책은 기존의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든 책 뒷면을 보니 저자는 이와 비슷한 류의 개론서를 테마별로 많이 출간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 , '내 인생의 탐나는 자기계발 50' , '내 인생에 탐나는 영혼의 책 50' 등등... 그 광고 문구들을 읽어보니, 철학 고전들이 영혼에 책에 속하는 것도 많았고... 분류에 대한 모호함이랄까, 아무튼 그런 느낌도 들었다. 이 책은 제목을 달리해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상 '내 인생의 탐나는 철학 50'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래도 예전에 가지고 있다가 되팔아버린 <절대지식 ~ > 시리즈 개론서보단 훨씬 좋다. 비교해보자면 절대지식 시리즈는 무슨 백과사전과 같은, 딱딱함이 느껴졌는데, 이 책은 그런 딱딱함은 없었고, 가볍다는 점 역시도 돋보였다.
 
아무튼 나름의 한계가 있더라도, 괜찮은 철학의 안내 서적이 나온 것 같다. 부담 없이 선현들의 사상을 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본 리뷰는 흐름출판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리뷰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
천쓰이 지음, 김동민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특정 출판사를 개인이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령, 비슷한 시리즈의 문학 전집을 모으고 있다는 이유라거나,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책의 표지를 만들어 낸다거나, 좋은 내용의 양서를 많이 낸다거나 등의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 나 역시 사람이라서, 편향된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내가 주목하는 출판사는 다름 아닌 '글항아리' 출판사다.

 

글항아리 출판사는 인문과 고전, 역사에 대한 출판사로 문학동네의 하위 출판사다. 다소 높은 가격 때문에 사실 대중화되진 않은 출판사지만, 이 출판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출판사의 이름으로 달고 나오는 책들이 하나같이 다,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좋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출판사이니 어느 정도의 상업적인 부분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호에만 편향된 책을 펴내지 않고, 정말로, 좋은 양서들을 펴 내려고 노력하는 출판사기 때문이다.

 

그런 출판사의 책이라서 더욱 믿음이 갔던 책이다. 이 책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 역시도 아주 좋은 내용과, 흠잡을 곳 없는 논의 전개 등이 돋보였던 책이다. 책이 나온 지 한 달이 다 돼가는데도, 이 책에 대한 짤막한 서평이 없다는 부분이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과문하지만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느낀 점을 몇 자로 추려내볼까 한다.

 

책의 주제는 고전과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 천쓰이의 관점이 담긴 책이다. 저자의 책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서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죽도록 책만 읽거나, 죽은 책을 읽거나, 책만 읽다가 죽지 마라'

 

말장난 같은 경구로 시작되는 서문이지만, 깊이 음미를 해 볼 만했고, 나 역시도 여러 가지를 돌아 볼 수 있었다. 이 간단한 경구를 통해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서문부터 비판적 독법에 대한 개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이유, 근본적으로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가 생각하는 것은 '책을 읽는 이유란, 생활과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 읽는다.'라는 다소 의도적인 관점. 그 관점을 통해 독서에 대해서 설명한다.

 

딴죽 걸 마음은 없다만, 모든 책을 삶과 인생의 변화를 목적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것에게서 교훈을 얻는다는 것만 주 목적으로 생각하고, 의미를 둔다면, 그것은 독서의 방향의 획일화라고 생각한다. 그럼 문학이 표현하는 모든 미사여구와, 아름다운 수식어는, 결국 어떻게 보면, 그런 통일된 획일적 가치관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성을 띄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본연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독자의 입장에서도, 책이라는 것을 교훈적 가치에 입각하여 볼 수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독서 = 좋은 것이라고 인식된 것에는 어쩌면 이런 의도적인 교훈성만을 내포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중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의도적인 교훈을 얻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서의 독법에는 그런 부분이 크겠지만 그것 외에도 재미적인 부분이나 단순한 흥미를 위해 책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저자의 독서 논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아무튼 저자의 논의는 서문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이런 교훈적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고전과 역사서를 비판적으로 봐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가장 표현이 좋았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책 읽기와 사람 읽기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고, 역사 읽기와 현재 읽기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부분.'

 

책만 보다 보면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책의 지식들만 머리에 가득 차서, 현재와 현재를 살아가는 세속을 보는 눈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책의 담론과, 세속의 속성을 비교해보자면, 책이라는 부분이 훨씬 더 이상적인 논의가 많다. 이것은 아무리 현실론적인 책이더라도, 실제 현실과 현실성이 높은 책, 두 가치를 놓고 비교했을 때는 누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론적인 책이더라도, 실제 세속보다 더 현실적일 순 없다. 그러나 많은 독서가들은 이를 묵과한다.

 

천쓰이는 말한다. 독서 (교훈을 얻기 위한)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이론화된 책의 내용을 어떻게 현실에서 잘 구현을 하느냐, 그것이 바로 올바른 독서라고 설명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볼 필요성도 있지만, 세상과 세속을, 인간 읽기가 수반되지 않은 독서는 죽은 독서이고, 세상을 통한 독서가 아닌 독서를 위한 독서가 되어버린다면, 그 독서는 결국 생명력을 잃는다는 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깊이 있게 공감을 했다.

 

깊은 논의의 고전들을 읽었을 때, 우리는 감동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전 독서는 그 감동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 차례 습작에서 이야기를 했듯,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좋은 책을 읽었다는 것, 그 이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좋은 내용을 어떻게 내가 현실화를 시켜서, 어떻게 '나만의' 지식으로 숙성을 시켜야 하는가, 사실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사색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특히 고전이나 역사서를 읽을 때는 이런 사색의 시간이 좋은 책일수록 길어질 수밖에 없다.

 

책 제목인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예시로 들고 있는 주제들이 동양 역사와 고전에 대한 것일 뿐, 본질적으로 동양 고전이나 서양 고전을 읽는 방법에는 차이가 없다. 그래서 책은 동서양의 고전과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독서 비평서'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 특유의 비판적 감성으로 독서에 대한 담론을 이어나가며, 기존 역사에 대한 부분들에서 진실이라는 과정을 어떻게, 캐내고 비판하며 볼 수 있는가, 역사라는 텍스트를 통해 어떻게 현세의 부분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 그 내용이 바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3 부분으로 나뉜다. 1부 고전 진리의 해체적 독법, 2부 역사 진실의 재구성 독법, 3부 역사 현장에서 발견한 작은 비밀, 이렇게 3가지로 이뤄졌는데, 그냥 제목으로 보면 1부는 고전을 읽는 방법, 2부는 역사를 읽는 방법, 3부는 작은 비밀이라는 떡밥으로 독자의 관심을 야기하는 구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책을 조감하고 읽어본 결과, 책의 모든 핵심은 1부에 다 담겨있다. 즉 이 책을 읽을 때는 처음 부분인 1부를 읽을 때 가장 집중을 하고 봐야 한다. 1부에서 천쓰이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고,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심지어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이론을 다 말한다.

 

뒤이어지는 2부와 3부의 경우는, 앞서 말한 1부의 생각에 입각한 천쓰이 만의 비판적 독법에 대한 담론을 담은 것으로 특히 2부 역사 진실의 재구성 독법에서는 <사고전서>에 대한 내용과, 죽림칠현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비판적 독법을 수행하는가를 저자의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소 실망을 했었다. 독서법이나 비판적 독법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을 기대하고 책을 샀는데, 책의 앞부분만 그 내용이 담겨있고, 2,3장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을 보며 비판적 독법을 한 독서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2,3장을 찬찬히 살펴보며, 저자 천쓰이라는 사람이 앞에서 말한 비평적 읽기의 원론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서 역사가 감춘 진실 들을 캐내는 것인지에 대한 사고 과정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며, 특히 3장에서는 독서를 통해 썩은 현실에 대해서 조감하는 독법, 그 사유의 흐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었다.

 

즉 말하자면 1장이 <원론>이라고 보면 되고 2,3장이 저자의 비판적 독법의 <예시>라고 보면 되겠다. 수학으로 말하면 1장이 공식이 담긴 부분 2,3장이 연습문제 응용문제를 선생님이 풀어 놓은 모범 답안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천쓰이의 모범 답안지 독법이 독서의 궁극적인 답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책 곳곳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견해, 작은 것도 지나가지 않는 부분 등을 볼 수 있었고, 그런 부분에서 나는 저자의 비판적 독서법에서 많은 부분을 배웠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고전서>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정말로 탁월했다. <사고전서>라는 문화적 사업 뒤에 숨겨진 사상적 탄압이라는 해석, 정말로 신선했다. 이 부분은 내가 지식이 없는 부분이라 올바른 판단은 할 순 없었지만, 저자의 사고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자의 칼날 어린 비평적 주장에 대해 어쩌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만큼 흥미 있었던 챕터였다.

 

수능 언어영역에서 비문학 독해 읽기 능력의 측정은 여러 부분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사실적 독해와, 비판적 독해 부분이다. 비판적 독해의 전제조건은 사실적 독해에 있다. 책이 전달하는 것들을 왜곡 없이 사실적으로 읽어 내는 것이 바로 사실적 독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적 독해가 잘 이뤄져야지 그것을 토대로 비판적 독해를 할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본다면 이 책은 독서 초보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다만 어느 정도 독서가 익숙하고, 자신의 독서를 뒤돌아보며, 발전을 갈구할 때, 이 책은 많은 통찰을 주는 것 같다. 비단 동양 고전뿐만이 아니라, 서양 고전이나 여러 논설문 문장들을 볼 때, 비판적으로 봐야 할 때,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책의 예시가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가까워하긴 힘든 '중국'의 예시들, 따라서 사실 책 자체가 대중성이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이 책의 아쉬운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예시가 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예시의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많은 것을 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저자 천쓰이 선생은 이 책으로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굉장히 겸손한 분이신 것 같았다. 그가 쓴 책의 서문은 '한국어판 서문'이라고 나와 있었고, 자신의 이 작은 책이 한국에 소개돼서 더없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책 역시도 개인의 저작이고 볼품없는 책에 지나지 않지만 관심 갖는 사람이 설령 없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희망을 고민한 서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여한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의 서문에서, 나는 겸손함을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를 느낀 책 중 한 권이고, 어느 정도 고전과 역사에 내공이 있다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좋은 양서를 만났을 때 느끼던 기분, 기분 좋은 만남이 주는 즐거움, 그런 즐거움을 물씬 느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내라 브론토 사우루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한 마디로 압도당했다. 한 인간의 지성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내면이 흔들린 적은 정말 오래간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대상은 바로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 책은 굴드가 썼던 자연학 에세이에서 35편을 모아 책으로 엮어 낸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다소 에세이라는 장르가 주는 가벼움과, 과학이라는 장르가 주는 무거움이 상호 작용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지만, 굴드는 이 두 미묘한 관계를 적절한 글 솜씨로 풀어나가며 전개하고 있다.

 

일단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사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것은 전반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과학 이론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문 사회 철학 쪽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런 자연학이나 과학 등이 쥐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저자가 주장하고 풀어 내고 있는 다양한 이론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부분적으로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그런 과학에 대한 무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사실을 떠나, 과학적 이론을 떠나서, 글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매력을 느꼈으며, 두 번째 이유는 그의 박학다식한 모습에서 큰 놀라움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이 쓴 글을 많이 보진 않더라도, 사실 여러 작품은 아니더라도 몇몇 유명한 작품들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가령 <코스모스> 라던가 <이기적 유전자> 등등의 책들을 봤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다른 책들을 찾아봤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장벽이 너무 컸었다. 그래서 사실 과학이라는 주제는 내 독서 생활에서 아킬레스건이었음을 솔직하게 밝힌다.

 

이따금 나는, 여러 인문 편향적인 독서가들의 글들을 봤는데, 항간에 논란이 된 고승덕을 비롯한, 홍정욱 등의 저명한 인사들이 쓴 글에서 '저도 과학이라는 주제에 대한 글을 피합니다.'라는 구절을 발견했었다. 그때의 안도감이란, 나만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에 지금까지 과학을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과학에 대한 무지에 반성을 들게 해 준 책이었으며, 그 옛날 어린 초등학교 시절, 과학 전집을 처음 받았을 때, 흥미롭게 봤던 그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책이었었다. 통속적인 과학 저술들이 주는 어려움 속에서, 과학을 멀리하게 됐는데, 굴드는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대중 저술에 대한 긍정성을 이야기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설령 대다수가 형편없고 자기 잇속을 차리는 서적들이라 하더라도, 대중 저술이라는 장르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싸구려 연애' 소설이 범람했어도, 위대한 소설가들이 다룬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배척된 적이 있었는가."

 

캬~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 지금까지 과학이 대중에게 어렵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너무 어려운 개념을 현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중 저술을 내세운 이 책은 쉬운 책일까 과연? 굴드의 이 책은 보통 독자들이 보기에 버겁지 않을까? 솔직히 이 책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중의 무서운 책들에 비해 굴드의 글은 친절하다. 책을 읽으면서 과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됐다.

 

굴드의 과학 에세이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서술 방식에 있었다. 가령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작은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며 에세이는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는 관심과 함께 굴드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맨 처음 시작했던 작은 이야기는 잊히기 마련, 그런 찰나에 굴드는 중심적인 논제를 주장하면서 작은 이야기와 이어왔던 이야기들, 그리고 중심 논제에서 공통된 속성을 뽑아내며, 왜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했는가를 설명한다.

 

정말이지, 과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보이는 그 딱딱함이 굴드의 글에는 없었다. 그래서 거부감 없이 몰입할 수 있었었다.

 

또 한 가지는, 아까 말했듯 그의 글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다양하다. 자신의 전공인 과학(진화론)을 비롯한 문학, 신학, 스포츠, 사회현상, 교육, 음악, 예술,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언어학에 대한 지식. 과학자라는 직업은 편견상 자신의 전문 분야에만 몰두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굴드는 그런 과학자라는 모습을 여김 없이 깨버린다. 다양하고 박식한 지식, 내가 알고 있는 개념들, 인문학 지식들을 이용해 논의를 전개해갈 때, 그의 글을 읽어나가며 정말이지 지적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신기한 생물들의 이야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이야기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동물 이야기였다. 특히 20번째 에세이 - 어쩌지, 잘 못 해낼 것 같아 - 의 주인공, 새끼를 위 안에서 키우는 개구리, 이야기에서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곤충이 변태 되는 과정을 담은 그림책을 보던 동심의 어린아이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굴드가 스스로 가장 잘 썼다는, 21번째 에세이도 흥미로웠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부분, 두 부분을 상징하는 과학자들의 엇갈린 운명이 흥미진진하게 서술됐다. 비전공자가 봐도 이해하기 되도록 쉽게 쓰려고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어렵긴 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첫 번째  에세이가 재미있었다. 내가 아는 역사적 지식을 통해, 진화론에 대한 설명, 그리고 나아가 우연이라는 요소의 중요성으로 확장하는 그의 글쓰기에서, 박학다식함과 매력적인 전개에 그야말로 감동했었다. 일전 <정약용 평전>을 리뷰하면서 때론 역사가 배출하는 인간 중에서 필요 이상으로 다방면에 박식한 사람을 낸다고 했고, 그런 사람이 정약용이라고 했는데, 굴드 역시도 그런 사람임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제목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역시 공룡의 명칭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로, 공룡을 좋아했던 나(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역시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그다음 에세이인 공룡 광풍을 보면서 굴드는 공룡 광풍에 빗대어 미국의 과학 교육 과정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놀라운 점은, 그는 이상적인 과학 교육에 대한 나라로 한국을 예로 든다.

 

'한국은 교육, 특히 수학과 물리과학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뉴욕타임즈>>는 한국의 과학 교육을 다룬 기사에서 9세 소녀를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개인적인 영웅이 누구냐고 물었다.'

 

등등 한국의 과학 교육에 대해 굉장한 칭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시기는 1991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2014 년이다. 그 사이 과연 우리의 과학 교육은 발전했는가? 나는 이런 의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저주의 (나는 이렇게 명명하고 싶다.) 7차 교육과정의 시작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종례의 6차 교육과정에서는 수능 시험에 계열을 불문하고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를 모두 시험을 봤었다. 국사와 공통과학은 필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7차 교육과정에 오면서, 문과 학생들은 사회 탐구만 시험을 보고, 이과 학생들은 과학만을 시험에 본다. 즉 전문화를 이루겠다는 국가의 방침인데, 이런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대학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7차 이래로 우리나라의 학구열을 나날이 높아지지만 우리는 그만큼 더 무식해졌다. 자연계는 국사 공부를 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됐고, 인문계 학생들은 과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다. 나 역시 이런 7차 교육과정 이후 세대라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기초적인 지식에 대해 균형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분화와 전문화가 이뤄지는 것은 대학에서 추구를 해야 할 일이지, 그 결과로 국민은 더더욱 무식해진 게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 수능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해서, 이과 학생들도 사회탐구를 시험 봐야 하고, 문과 학생들 역시도 과학탐구를 시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렇게 글 쓰면 지금 수능 준비하는 엄청난 학생들에게 몰매를 맞겠지만...)

 

굴드가 과연 지금의 우리나라 과학 교육을 보고도, 저런 칭찬을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다. 아무튼 에세이를 보면서 이런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에 대한 생각도 해 봤었다. 하긴 중고등학교 시절에, 과학 시험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과학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된 건지... 그게 교육과정 탓만 있는 건 아니겠지, 나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겠지

 

어쨌든 이 책은 나에게 있어, 반성의 마음을 들게 한 책이다. 편향된 독서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말로만 항상 다짐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과학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앞으로 편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어서, 글을 읽어나가며, 스마트폰을 검색해가며 읽어서 뭐라 말은 못 하겠다. 어느 정도 과학 지식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비판적 독서를 해 보고 싶은 책이다. 

 

아무튼 다소 버거운 책이고 무려 800여 쪽에 가까운 과학 책이지만, 과학에 대한 흥미와 더불어,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인물의 박식함을 유감 없이 경험한 기분 좋은 독서였었다. 이런 친절한 과학의 안내자를 만나다니!! 책을 다 읽고, 굴드의 다른 자연학 에세이들도 검색해서 위시리스트에 올려놨다. (그의 자연학 에세이를 모두 구매할 예정이다.)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역시도, 매일 밤 자기 전 다시 에세이들을 차근차근 재독해봐야겠다. 저자의 말로는 자기는 글을 쓰면 쓸수록 필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하니 (이 책은 지금까지 써 온 글들 중 건방지게 보이겠지만, 가장 잘 쓴 글들만 추렸다고 한다.) 이 책 이후의 에세이들도 꼭 봐야겠다. 글에서 풍기는 마성 같은 매력. 정말 추천하는 책이고,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지적인 쾌감을 유감 없이 느꼈던 독서, 더불어 나의 좁은 세계관의 시야가 좀 더 넓어졌음을, 느꼈던 독서였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3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 짝짝짝 ~~

리군 2014-06-13 17:23   좋아요 0 | URL
오옷 반갑습니다, 저도 발님의 신선한 서평 항상 꼼꼼하게 잘 챙겨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4 23: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굴드 책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게 굴드 참 글을 맛깔나게 쓴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저 비유와 그가 설명하려는 과학적 사실이 어떻게 연결이 되지 ? 전혀 다른데... 하다가 결국 기가 막히게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굴드 찬양을 하게 됩니다. 풀하우스'라는 책도 좋고, 무엇보다 사회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니 < 인간에 대한 오해 > 를 추천해드립니다. 과학과 사회가 이렇게 만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리군 2014-06-15 21:11   좋아요 0 | URL
오옷... 좋은 양서 추천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제목 꼭 기억해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

누룽지 2014-08-0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때문에 책이 이렇게 끌리기도 쉽지 않은데...
확! 끌리는데요 ^^*

리군 2014-08-10 16:03   좋아요 0 | URL
앗 ^^;; 개인적인 사견이 들어간 리뷰이니 참고만 해 주세요 ^^ 끌려서 구매하신다면 적극 추천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