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만 보는 바보

 

  한동안 밀렸던 여행기 쓰느라 책 글을 못 썼다. 읽은 책은 좀 되는데, 연말이고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책 글 포스팅을 못한 듯싶어, 주말을 맞이하여 정리할 겸, 끄적여본다. 오늘 소개할 책은 <책만 보는 바보>라는 책이다. 이름부터가 독서가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데, 조선 말기에 애독서 가로 살아간 이덕무와 그의 지인들에 대한 책이다. 책의 콘셉트는 아동용 도서다. 그러나 솔직히 이 책을 아동용 도서로 볼 수는 없는 듯싶다. 내용이 그렇게 유아틱하게 각색되지 않은 점도 있고, 생각 외로 부담 없이 이덕무의 삶에 대해서 읽어내기는 충분하지 않나 싶다. 거기다 책의 두께도 288쪽인데, 이 정도면 보통 장편 소설에 해당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유아용 책이라 글씨는 좀 크다.)

 

  책의 주인공은 이덕무로, 조선 정조 때의 문인이다. 이 책은 이덕무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하여 서술하는 책인데, 소설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기존의 이덕무가 남겼던 저서들과 기록들을 섬세하게 참고하여 복원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 글이다. 특별하게 어려운 부분도 없고 특별하게 배경 지식도 필요가 없어서 무난하게 독서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더구나 책 중간중간마다 나오는 예쁜 일러스트 들은 지루할법한 내용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는 영향도 있는 듯싶다.

 

 

(활자가 좀 큰 편이다. 그리고 옆 부분처럼 그림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독서할 수 있었다.)

 

 주인공 이덕무는 한 마디로 책덕후라고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책이란 책은 가리지 않고 다 읽어왔다. 서자 출신으로 태어나서, 신분적 차별을 받은 그에게 한 가지 애환을 달래는 것이라곤 책뿐이었다. 그에겐 처음부터 스승도 없었으며, 오로지 책만을 보며 세상을 바라봤다. 병약하고 소심한 성품을 지닌 그에게 있어서 독서란 힘들이 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는 취미이자 전부가 아닌가도 싶었다.

 

 신분적 차별 때문에, 군주에게 임용되지도 못했고, 서자 출신이라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 했다. 거기다가 힘써 글을 읽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또 온전한 양반의 신분에 끼워주지 않으면서,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 놓고 장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 다른 핏줄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 역시도 세상은 비웃으며 허락되지 않은 그에게 있어, 책이란 돌파구이자 애환을 달래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다. 날이 추워서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여 <논어>를 병풍으로 쓰고, 이불이 없어서 <한서>를 이불로 덮고 자는 그의 행색에서 딱한 마음과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서 진귀한 고서를 받으면 뛸 듯 기뻐하며 빌려 읽고, 필사를 할 때에도 종이를 아껴 쓰려고 글씨를 굉장히 작게 쓰면서도 정자 그대로 또박또박 썼다는 대목에서는 그가 얼마나 독서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었다. 마치 지금에서 말하면 절판본 도서를 찾아서 제본을 하거나 하는 기분과 비견되지 않을까?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답답했던 부분도 있었다. 나 같았으면 처자식이 그렇게 굶어 죽는데, 세상의 평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소작농으로라도 일을 해서 밥을 먹여 살렸을 것 같다. 그러나 이덕무는 끝내 그러지 않고(심지어 자식이 밥을 못 먹어서 죽기도 했다..), 세월을 책으로 달래기만 한 부분에서, 그 역시도 기존 사회의 선비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가 가지고 있는 독서에 대한 생각인데, 그는 특히나 소설이나 잡기류 책들을 경멸했다. 유학이나 경전류의 책을 최고로 올리며, 그다음이 주자학 그다음이 제자서 등 이렇게 그 시대의 보편적인 관념을 벗어나지 못 했던 점도 보였다. 이런 보편적인 생각의 부분은 이덕무의 친구들인 박제가와 유득공과는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박제가는 이덕무와는 전혀 반대의 다혈질적인 스타일이고 돌출적인 사상가였다. 유득공 역시 이덕무보다는 조금 자주적인 면이 돋보였다. 그리고 이덕무의 처남이자 드라마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백동수와의 이야기도 나온다. 더불어 북학파를 이루고 있는 홍대용, 박지원 그리고 이서구 등은 명문가 출신으로 어느 정도 신분적인 부분이 보장됐지만,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은 서자 출신으로 관직에 임용되기까지 엄청난 인고의 시간을 버텨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끊어지지 않는 우정에 대해서도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하루는 이덕무가 배가 너무 고파서 <맹자> 한 질을 팔아서 쌀과 음식을 사서 처자식들과 먹었다. 그러나 책을 아끼는 그로는 굉장히 괴로웠으리라, 그래서 유득공에게 하소연을 한다.  '맹자께서 양식을 잔뜩 갖다 주시더군, 그동안 내가 당신의 글을 수도 없이 읽어 주어 고마웠던 모양일세'라고 하자 유득공이 바로 집에 가서 <춘추좌전>을 뽑아 들고 팔아서 술을 사 온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그럼 나도 좌씨에게 술이나 한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 그래도 허물 없이 그의 글을 꽤 읽었지요.'라며 이덕무와 술을 마신다. 술기운이 돈 그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일 년 내내 맹씨와 좌씨의 책을 읽어 봐야 우리가 대체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제 식솔의 굶주림 하나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이라며 자조하는 이덕무. '그렇지요 다장에 팔아 한때의 굶주림을 면한 우리가 차라리 현명하지요. 맹씨와 좌씨도 잘 했다고 할 것입니다.'라며 대답하는 유득공. 그러나 그들은 그 위안이 비겁한 위안이란 것을 알고 있었었다. 실제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비판의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런 날카로운 감정보다도 책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마음을 동정하는 마음 역시도 생겼던 대목이었다.

 

 이랬건 저랬건, 이덕무가 죽고 박지원은 그의 문집 <청장관전서> 서문에 이렇게 쓴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2만 권이나 된다.'

이 말은 내게 있어서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나의 게으른 독서력을 뒤돌아보게 만든 부분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이덕무는, 결국 정조의 명에 의해서 원하던 벼슬을 하게 된다. 박제가와 유득공 역시도 낮은 벼슬이지만 벼슬을 하게 되고, 중국 청나라까지 여행을 같이 떠나기도 한다. 이덕무가 청에 대해 비판적이고 중화주의적 시각을 가졌다면 박제가는 청국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내놔서 그의 독자적인 생각을 정리한다. 유득공 역시도 역사 쪽의 불멸의 고전인 <발해고>를 남긴다. 이덕무는 작은 벼슬이지만 불평하지 않고 매사에 성실하게 공무에 임해서, 중앙에서 지방 공무원들의 감사를 볼 때 항상 최고점을 기록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 부분도 인상 깊었다. 애환을 책으로 달랜 그들이 사회에서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리뷰중인 책은 <책만 보는 바보> 이다. <책에 미친 바보>는 이덕무가 쓴 산문선이다. 제목에 혼동이 올 수 있으니 조심하자. 참고로 책에 미친 바보는 개정판이 나와서 표지가 지금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책을 보며, 그의 독서에 대한 집념과, 인내심, 그리고 성실성에 대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이 책을 보고 이덕무라는 사람에 관심이 더 생겨서 그가 쓴 저서들을 검색해봤고 구매했었다. 책 제목이 비슷한데, <책만 보는 바보>는 지금 리뷰하는 책이고, < 책에 미친 바보>는 이덕무가 쓴 산문선들을 골라내서 편역한 책이다. 제목이 많이 혼동이 될 텐데 잘 보고 구분을 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전집을 사 본 경험이 없다. 주로 대표작들만은 사곤 했는데, 처음으로 이덕무의 저서 전집을 구매했다. 이덕무의 전집은 <청장관전서>로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총 13권으로 돼있는데, 이덕무를 알았을 당시, 나는 이덕무에게 많은 감명을 받고, 또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의 생각과 사유를 읽고 싶어서 구매한 책인데 다 읽진 못 했다. (생각보다 지루하기도 했고) 보통 사람이라면 이덕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책에 미친 바보>만 구매해도 될 듯싶다.

 

 책을 좋아하는 청아한 선비의 일대기를 부담 없이 봤다. 어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도서가 아닌가 싶다. 나도 이덕무의 다독력을 본받아서 내년에는 더 많은 책들을 읽어나가겠다는 공허한(?) 다짐도 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고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유효했으나, 대중화되진 못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언어의 장벽과, 기존 학자들의 태도, 그리고 대중 역시도 무심했으니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잊혀왔고, 전공자 외에는 사실 크게 관심 있지 않는 이상 인문 고전은 가치에 비해 낮게 대우받았음이 사실이다. 학계에서는 어려운 말들과 그들만의 언어로 인문학의 진입장벽을 높여와서 대중이 다가가기 힘들게 만들었던 게 사실이고, 올바른 번역보다는 일본어 이중 번역본이 나돌아다니곤 했다. 다른 선진국들이 완역한 고전의 숫자를 보더라도 아직까지 플라톤 전집이 없고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모두 완역이 안 나온 것은 소정 학자들의 탓이며 더불어, 국가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이 책이 발간되고 난 후와 전으로 나눠보면, 솔직히 이 책이 나온 후, 사람들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더 인식을 한 것 같다. 감성적인 언어와 비약적인 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대중에게서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더불어 범국가적으로 인문학 열풍을 불러일으키는데 공헌을 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이 책의 작가의 필력은 그런 면에서 보면 호소력을 지니고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실이건 아니 건을 떠나서, 아무튼 이 책이 대한민국의 제2의 인문학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는 솔직히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 지금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발맞춰 저가형 고전 시리즈인 '올재'를 비롯한 책과 더불어, 여러 가지 개론서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소정 학자들 역시도 탈 권위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강연과 개론서 등을 써내기 시작했다. 다만 지금도 아쉬운 부분은, 개론서나 눈높이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적 중요성을 대중에게 전하는 만큼, 그에 맞는 콘텐츠(좋은 완역본 등등)를 갖추는 것 역시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저런 영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논조는 너무나도 모 아니면 도 같은, 맹신주의적인 고전의 열망이 보였다. 확실히 고전은 중요하다. 그 말은 맞다. 세상을 바꾼 위인들 중에는 사실 고전을 읽지 않은 사람(칭기즈 칸과 같은)보다는 고전에 의해 영감을 받고 업적을 이룬 사람이 월등하게 많다. 저자의 말은 진실이긴 하지만 일반화하긴 상당히 위험하다. 그렇게 고전을 맹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은 중요하다. 살아남은 책이니깐, 시대를 이끌어왔다는 책임에서 중요한 텍스트임에는 맞다. 하지만, 맹신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저자의 말은 반쪽짜리가 아닌가 싶다. 시대를 이끌어온 사상가나 위인은 고전에 힘을 받은 것이 90% 이상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논제를 뒤집어서 항상 고전의 힘이 사람에게 위인의 포텐을 각성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고전을 읽고 어떻게 감동을 받아서 적용시키기에는 결국 본인에게 달려있다. 인문 고전이 사람을 각성시키는 힘은 가지고 있지만, 절대적이진 않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사견을 붙이자면, 고전은 인간에게 있어서 큰 추상적인 방향을 제시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럴 땐 이렇게라고 말해주진 않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려운 형이상학이나 복잡한 이론을 담은 고전이 있다. 그러한 고전은 인류의 삶에 있어서, 발전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맞지만, 그 책이 모든 인간의 구체적인 힘든 점 등을 해소시켜주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내가 봉착한 역경 속에서 그 고전의 복잡한 논리가 오히려 독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추상적으로는 옳은 것일지 몰라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기란 쉽지 않다 고전이란 작품은,

 

 저자의 말 대로라면 인문고전을 무조건 읽은 사람들은 만화에서나 보는 신 인류와 같이 각성을 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가능할 수도 있고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 대로 무조건적을 두뇌가 확 바뀌고 그러진 않다고 생각한다.

 

리링 교수의 저작 중에서 이런 비슷한 말이 있다. 고전이라 함은 박물관에서 보는 유물과도 같다. 역사적인 가치가 있으니깐 박물관에 전시될 자격이 있고 누군가는 그런 유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지만, 누군가는 그냥 아 그렇구나라고 지나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나친다고 해서 그 유물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 나는 고전을 바라볼 때 이런 자세가 좋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맞는 것이 있을까? 종교 교리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전은 가치가 있고 존중은 해야 함은 맞지만, 무조건적인 맹신 역시도 안 좋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옛날과는 다르다. 큰 인간의 보편적 가치는 동일하게 내려올지 몰라도 세부적인 부분이나, 기술적인 부분, 더불어 지식의 다양화와, 지식의 양, 이런 부분에서 고대와 중세 근세와는 다르다. 예전 고전이 힘을 발휘했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고려나 조선으로 예를 잡아보자. 그 시절에는 지금 말하는 인문학이 실제적인 공부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공이나 다름없었고, 출세를 하고 사회를 살아가려면 한문을 익혀야 했고 인문 고전 <논어>를 비롯한 사서 삼경 등을 읽어야만 했다. 왜냐? 사회적인 추세가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현실에서 관직을 얻으려면 그렇게 해야 했으니깐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는 한자나 라틴어를 어릴 때부터 배우는가? 아니다. 우린 실용학문인 수학이나 국어 영어 이런 부분을 주 교재로 배우지 <논어>나 한자 한문 등을 '정규 과정'에서 배우지 않는다.

 

 우리가 만약 고대나 고려 조선 시대, 아니면 서구의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절에는 인문학과 철학이 실용학문이었고, 고전을 읽는 것이 공부의 주 경험이고 연장선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동양고전만 파고들면 끝이었고 서구에서는 그리스 로마 라틴 고전들만 접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동서 고전을 모두 접할 수 있다. 지식을 많이 습득할 수는 있지만 그만큼 볼 수 있는 지식의 양은 많고 우리의 시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환경에 처해 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처럼 고전에 목 매달고 그렇게 생활할 수도 없을뿐더러, 고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의 가치가 폄하되진 않는다. 고전은 중요하고 케바케로 인생의 중요한 부분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만... 사실 고전이 주는 메시지는 추상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확실히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책임은 분명하다. 이 책 한 권으로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인문학이 진입장벽을 낮춘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인문학을 종교적으로 맹신하는 저자의 태도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어 (양장) - 세상의 모든 인생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4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5시, 나가기 전의 적막한 시간을 마음껏 느끼면서,

일찍 일어난 김에 생각해 둔 리뷰를 써 내려가보자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듣기 싫어도 듣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의미 있는 문학 고전이나 철학서들 등, 대체로 고전들이 그런 부류가 아닌가 싶다. <논어> 역시도 그런 책이다. 살아가면서 <논어>를 읽진 않더라도, 많이 들리는 책임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내게 있어 논어는 애증의 책이었다.  어린 시절같이 보냈던 외 할아버지께선 동양학에 조예가 깊으셨다. 난 어릴 때, 특별한 과외나 학원 교육을 받지 않았다. 대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짜증 나던 시간이 있었으니 외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동양고전 독서 시간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께선 나를 <천자문>부터 교육하려고 했었으나, 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타협을 했다. 즉 한자본 대신 한글 번역본으로 된 고전을 읽는 선에서 합의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명심보감>, <소학>, <동몽선습>, <예기> 등을 배웠다. 고백하건대 예기를 배울 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예기 책도 엄청 두꺼운데다 지루했으니깐,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자 할아버지께선 본격적으로 사서 삼경(주역을 빼고 예기 넣음)을 가르치셨다. 진짜 다시 한번 강조하며, 고백하건대 그 시간은 나에게 따분하고 의미 없고,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졸기도 많이 졸았었는데, 할아버지께선 끈기를 가지시고 나를 가르쳤다. 솔직히 초등학생이 뭘 알겠는가, 인성론에 대한 부분, 이상적인 도덕군자의 모습, 왕도정치, 군자... 그래도 그나마 편안하게 봤던 책이 <논어>였었다. 중학생 때까지 나와 함께 사셨던 외 할아버지는 중학생 때까지 나를 가르쳤다. 뭐 계속해서 듣다 보니, 괜찮았던 부분도 있었었다.

 

자왈,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 위정 편 중 -

 

중1 때는 나도 저 문구를 본 받아 공자를 본 받아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작심삼일이지만.. 아무튼 할아버지께서는 중 2 때까지 유가 경전만을 고집스럽게 가르쳤다. 중3 때는 내가 스스로 다른 제자서(보통 법가나, 종횡가, 병가와 같은 현실학적 사상)를 봤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정도로 할아버지께선 동양학을 고집하셨는데, 특히나 논어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셨다. (지금 고백하건대 그것은 정말 집착이셨다.)

 

 그래서 논어를 의도하지 않게 많이 읽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지 않아서, 사실 머리 안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었다. 오히려 중2 이후는,  병가 사상에 푹 빠져서 <손자병법>에 열독을 올리고 있었었으니.. 유가 경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리에 쓸리듯, 고리타분한 유가의 사상은 정말이지 역겨웠었다.

 

고등학교를 기숙사 학교에 배정을 받고, 할아버지께서 강원도에 집으로 내려가셨을 무렵, 나는 조용하게 나를 괴롭힌(?) 중학교 교과서와 논어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불에 태워버렸다. 특히나 논어가 타는 불꽃 속에서 나는 알지 못하는 희열감과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원래는 사서삼경을 다 태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까웠다. 그래서 나를 가장 괴롭힌 논어를 태웠었다. 그렇게 나와 논어는 작별했었다.

 

여느 20대 초반의 청춘과 같이 나 역시도 잉여의 시간을 보냈다. 공황적인 방황, 그리고 쓸데없는 반동 기질, 그러나 어느 것이더라도 행할 수 없는 무력감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고 있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리라, 그럴 때, 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 사건은 내게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할아버지께선 내 정신적인 지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내게 마지막까지 힘줘서 한 말은 <논어>를 본받으라고 하셨다. 그 일이 있던 뒤, 나는 논어와 화해를 했고, 가끔 읽어주고 있다. 

 

 나는 책에 대해서는 체계성을 가장 중요시한다. 특히 철학 사상 같은 책들은 체계가 잡히고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논어는 꽝이다. 논어는 체계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이다. 중구난방식의 구성, 이 주제를 말했다가 저 주제를 말하는 등, 전혀 체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볼 수 없는 마치 물과 기름이 뒤섞인 그런 책. 철학이란 학문이 그렇지 않은가? 물론 복잡한 형이상학적인 논리도 있지만, 궁극적으론 자신의 논리와 사상을 논리 정연하게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뭐랄까 마치, 마스터피스와 같은 그 깔끔한 논리성,

 

논어에겐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논어를 싫어한다. 하긴 그러고 보니 서양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의 대화편 역시도 중구난방이다. 한 대화 편에서도 이 주제 저 주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플라톤 대화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동양 철학도 마찬가지다, <관자>, <논어> 심지어는 <노자> 죽간본 조차도 중구난방이다. 선구자적인 위인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랄까... 내가 생각하는 논리 정연한 철학은 후대에 완성된 관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논어에 비해 맹자가 더 논리 정연하고 유가를 아예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은 송대 이후니깐, 서양에서는 플라톤 이후 학문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적으로 학문을 분류하니깐, 

 

 하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해서 나쁜 책은 아니다. 체계성이 없다는 뜻은, 그나마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것을 뜻한다. 유가 경전을 두루 봐왔지만 논어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책은 보지 못 했다.(또 떠오르는 책이 <효경>이 있긴 하다.) 물론 논어에게도 복잡한 부분은 있다. 제사 형식에 대한 부분과, 가장 문제 되는 것이 공자와 그 주변 인물, 제자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제사 형식에 대한 부분은 지금에 와선 별 의미가 와 닿지 않아서 그냥 대충 읽어도 될 듯싶고, 주변 인물 역시도 솔직하게 말해서 몰라도 된다. 그냥 텍스트에 집중해서 논의만 따라가도 논어 독법은 성공이 아닌가 싶다.

 

서양과 비교를 해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논어>에 비견되지 않나 싶다. 근데 솔직하게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좀 논의 전개 방식이 좀 어려운 편이다. 그에 반해 공자의 <논어>는 뭐랄까 그냥 읽어도 읽을만하다. 이것이 논어의 큰 장점이 아닐까,

 

 내가 볼 때 공자는 성현임엔 틀림없지만, 뭔가 모순적이고 불쌍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특히 모순적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점은, 확실히 논어 어디를 봐도 말 잘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말을 잘 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동양의 명언들은 죄다 공자가 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공자는 말을 엄청 잘 하는 달변가다. 그런 공자가 <논어>에 남겼듯, 언어를 잘 하는 것보단 행동을 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공자는 <논어>를 남기지 말았어야 했단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리뷰에서 봤던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러셀,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 물론 게으름이라는 뜻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게으름이 아닌, 산업 사회에서 의미 없이 부품처럼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유를 가지라는 뜻으로 게으름을 찬양했었기 했지만, 나는 그 제목에서 나타나는 느낌으로는,  참 모순적이라 느꼈다. 러셀 자신은 엄청 노력파였고, 열심 파였으니까,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공자의 언어에 대한 관점이 모순적이듯, 유가 사상 역시도 모순적이다. 확실히 유가사상은 동양 사상의 뿌리를 만든다. 실제로 우리는 유가사상을 이상적인 사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초기 유가는 현실론적 사상이다. 대체로 중국의 사상사는 남방 계통의 도가 사상과 북방 계통의 유가와 묵가 사상이 주류를 이뤘다. 남방은 아무래도 북방에 비해 평화롭고 기후도 덜 추우며,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이상적인 도가 사상이 발전했다, 북방에서는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략과, 전쟁이 주류를 이뤘고, 기후적으로 추웠으며, 엄격한 분위기와 엄숙한 분위기가 요구됐다. 거기서 체계적인 위계질서와 도덕을 강조하는 현실론적인, 유가사상이 발전했다. 그리고 여기에 반발하는 사상이 묵가 사상이었다. 도가는 이 때까지만 해도 사이드 사상이었으며, 공묵의 시대에서 결국 이긴 것은 유가였다. 통치자가 보기에도 보수적이고, 위계를 강조하는 유가가, 반골의 기질이 다분한 묵가 사상보단 더 유용했으니깐,

 

 그런 현실론적인 입장에서 출발한 유가는 세대가 거듭할수록, 형이상학적으로 바뀐다. 도덕군자에 대해 너무 이상론적인 관념을 제시하고 따르라는 종용은 내가 볼 때, 거의 종교적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나온 사상이었으나, 속을 보면 인생의 실패자인 공자의 정신승리적 이상론이 바로 유교였다. 그리고 그 모순의 중심에 선 것이 <논어>다.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죽어서 성현이 된 그는 어찌 보면 참 불쌍한 인생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플라톤도 마찬가지고... 선구자적인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아닐까...

 

나는 고전을 추천할 때, <논어>, <군주론>, <손자병법>을 추천한다. 내가 생각하는 고전은 너무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비교적, 현실론적이여야 하며, 대체로 언어가 간결해야 하며, 배경지식이 없이도 이해가 가능해야 하며, 비교적 분량도 짧아야 한다. 그랬을 때는 위의 3개로 좁혀졌다.(노자도 넣고 싶은데 솔직히 노자는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뺀다) 물론 위의 3가지 책이 내가 요구하는 조건을 다 만족시키진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근접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손자병법>은 대체로 군사에 대한 책이지만, 심리학적, 경영적, 철학적으로 여러 시각으로 책을 볼 수 있다. 책 자체도 분량이 얼마 되지 않으며, 언어적 표현 역시도 아름답다. <군주론>의 경우 인간의 악적인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책이다. <한비자> 역시 훌륭한 책이나, 분량 면에서 봤을 때 <군주론>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것에 반대되는 인간의 이상론적인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낸 책은 <논어> 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읽겠다면 추천은 하되,

굳이 <논어>를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읽을 가치는 있는 듯싶다. 어쨌든 <논어>는 동양 사상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동양에서 발간된 '가장 오래된 자기 계발서' 란 점도 있으니깐,

이 책을 덮고 나니, 이젠 기억에서 흐릿흐릿했던 할아버지의 육성이 선명하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논어>에 있는대로만 살아도 어긋나지 않을거다.'

 

다만 그게 힘들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 / 어드북스(한솜)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 :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저자 : 황윤

쪽수 : 461쪽

출판사 : 어드북스

가격 : 18000

 

 한국사의 전쟁영웅 중, 가장 대표적인 장군은 이순신이다. 우리는 국가적인 성웅으로 이순신을 추앙하고 있으며, 이순신을 다룬 강연이나, 책, 자기계발에 응용 등, 여러 가지 범위로 확장해서 이해를 하고 있다. 확실히 이순신은 임진전쟁 때 국가적인 성웅이였었다. 그런 이순신과 함께 거론되는 장군이 김유신이다. 이름 말미에 신자가 같아서 묶어 외우기도 편하다. 그러나 이순신과는 다르게 김유신은 덜 유명하달까? 김유신을 주제로 한 강의나 책들은 전무하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만 보던, 김유신은 크면서 점점 잊히는 장군이었다. 최근 고구려 사관이 열풍을 불어, 신라는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특히 그 중심에서 비판받는 사람은 무열왕도 문무왕도 아닌 김유신이었다. 물론 이순신 역시 국가적 성웅으로 너무 추앙시켜 국가주의의 표본으로 삼기도 했었지만, 김유신은 전혀 다른 입장이다. 대체로 이순신이 너무 추앙을 받았다면 김유신은 양날의 검과 같이, 극단적인 추종과, 극단적인 비판을 가진 영웅이었다. 어릴 때에 항상 위인전집에 같이 있었던 이순신과 김유신, 그러나 그런 김유신의 삶을 조명하는 책은 만나보기가 힘들었었다.

 

이 책은 그런 김유신에 대해서 조명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오프라인 교보에서 만났다. 신간 코너에 있어서 눈에 들어와서 별 기대 없이 책을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흥미롭게 내용을 풀고 있었다. 이 책은 크게 이런 장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유신을 다룬 역사서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가 있다. 여기서 <화랑세기>는 솔직히 학계 간 논쟁이 치열하여 아직까지는 사료적으로 쓰기엔 조금 조심스러운 감이 있다. 하지만 기존에 출판된 김유신에 관한 책들은 하나같이 다들 <화랑세기>에 입각한 서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재 김유신에 관한 평전은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까치에서 나온 <김유신 시대와 영웅> 이란 책이며 두 번째가 조선일보에서 나온 <김유신 무덤에서 뛰쳐나오다> 라는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책이 이 책인데, 나는 3권의 책을 다 가지고 있고 다 봤었다. 개인적인 비평을 해보자면 <김유신 시대와 영웅>은 출판사가 까치라서 굉장히 기대를 하고 샀었으나 엄청 실망을 했다. 저자는 언론계 출신이었다. 내용 면에서는 <화랑세기>를 진서로 규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특히 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발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저자는 발해가 우리나라 민족이 아닐 수도 있고, 남북국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대목을 보며, 나는 저자의 사관 의식이 의심되기 마련이었고, 결국 이 책을 덮어버렸다.

 

두 번째 책인 <김유신 무덤에서 뛰쳐나오다>는, 사기에서 인용문이 나왔는데,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사실인 것 마냥 기록했던 부분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사기 열전과 본기까지 뒤져 가며 그 인용문이 맞는가를 확인했는데, 저자가 틀렸었다. 여기서 신뢰성을 잃었으며, 더불어 더 실망했던 점은 점점 읽으면 읽을수록 정치적인 색깔이 다분하게 드러나는 대목들이 거슬렸다. 물론 평전과 역사서는,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쓴이의 주관적인 입장이 당연하게 포함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래도 가치 중립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인물에 대한 행적 등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 공유할 순 있어도, 그걸 넘어선 오늘날의 사회 비판을 적나라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도가 지나쳤다. 그건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역시도 덮어버렸다.

 

두 권의 책은 이제 구하려야 해도 구할 수도 없다. 절판된 책이니까. 기존의 김유신 평전들에게서 실망감을 얻은 나에겐, 김유신이란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잊히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찰나 이 책을 발견했다. 일단 이 책의 저자는 무명의 작가다. 황윤이라는 분이 썼는데, 책에 약력이 없다. 다소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는데, (워낙 김유신 평전에 당한 게 많으니깐) 예상 외로 보물을 건진 기분이었다. 저자는 <화랑세기>의 기록은 저술하지 않으며 오로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정사들을 기준으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학계에서 검증이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편향되지 않는 시선으로 그 시절 김유신에 대한 소상하고도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 시절에 대해서 배경 설명과 국가적인 입장 등을 고려하며, 조곤조곤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김유신에 생애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으며, 그의 내면의 생각까지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보통 신인 작가들이나, 재야 사학자들의 경우는 감정적인 국수주의에 의거하여,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고, 담담하게 공인된 사서들로만 김유신의 생애를 풀어낸다. 이 책은 앞의 두 책들의 아쉬움을 일거에 날려버린 책이었고, 신인이자 무명작가가 객관적 관점을 가지고 썼다. 신인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역사적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저자에 객관적 태도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더구나 내용 역시도 허접스럽거나 허술하지 않아서, 이 책의 가치가 빛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은, 아름다운!! 편집적 구성이다.

 

평전과 역사서를 자주 읽어와서 아는데, 사실 평전의 가장 큰 적은 지루함이다. 대체로 평전의 구성은 글이 압박적으로 많다. 거기다 쪽수도 거의 400쪽은 기본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기존 평전류의 단조로움을 탈피하려고 애를 썼다. 책에는 간간 삽화가 있는데, 저자의 친구인 만화가가 이 삽화를 정성스럽게 그려냈다. 책과도 썩 잘 어울리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글을 읽다가 그림을 보는 재미도 선사한다. 더불어 저자 역시도, 한 챕터가 시작되는 부분에 흥미를 유발시키려고, (이 책은 초년기, 중년기, 원숙기, 말년기로 구성됐다.)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보여준다. 과도하게 길지 않고 3~4장으로 도입부만 장식을 한다. 과하지 않을 정도로, 애피타이저와 같은 깨알 같은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하고 배려하는 부분은 기존의 무거웠던 평전에서 보기 힘든 신선한 시도였다.

 

또 하나의 장점을 굳이 말하자면, 독자가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이 책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는 점이다.

 

그냥 보통, 삼국시대에 신라가 통일했고 김유신이 앞장서서 통일했다. 이 정도의 무난한 지식만 가지고 있더라도, 이 책은 상세하게 배경 설명과 필요한 지식들을 조곤조곤 알려준다. 기존의 국내에서 사학자들이 쓰는 평전들은 대부분 이런 난이도 조절에 실패를 한다. 너무 학구적인 범위와 대중적인 범위의 설정을 잘 못 하여서 일어나는 일인데, 저자는 탁월하게, 그 둘 사이를 친근하게 잘 풀어낸다. 무거운 역사 책이나 평전에 흥미가 없었던 사람들도, 편안하게 책을 독서할 수 있는 데다, 깊이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점도 존재하는데, 가장 큰 아쉬운 점은 지도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유신이 진격을 할 때나 여러 가지 군사들이 이동하고 공격하는 부분을 서술상으로만 나타내는데, 지도를 활용해서 설명한다면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참 아쉽게 느껴졌다. (이 책에는 지도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특히나 김유신이 처했던 현실적인 상황들, 서라벌 출신이 아닌 변방 출신, 거기다 가야계와 신라 왕족의 피가 섞인 모순적인 존재, 보이지 않는 차별 등을 조곤조곤 분석하며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베타적인 신라 사회의 귀족주의에 안타까움을 느꼈으며 (어느 고대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러한 차별들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고 정면승부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오류는, 김유신이 왕가의 핏줄이라서 출세가 빨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김유신이 낭비성 전투에서 앞장서서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을 때가 35살이다. 이때 군의 사령관도 아닌 아버지를 수행하는 역할로 출전하는데, 고대의 나이로 본다면 출세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더불어 이 전투를 끝으로 김유신은 48살에 압량주(경산) 군주가 되기 전까지의 세월은 사서에 기록조차 없다. 이 10년에 걸친 시간 동안 김유신이 공적을 세웠다면 사서에 기록이 분명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에서는 낭비성의 영웅을 중용하지 않은 듯싶다.

 

 김유신은 언제나 스스로 앞장서서 싸웠다. 첫 전투인 낭비성 전투에서 스스로 옷깃과 벼리를 칭하며 자살특공대로 돌격을 하여, 사기를 끓어올린다. 그래서 당시 최강인 고구려군을 무찌른다. 그 뒤 김유신은 자신의 경험했던 것처럼, 전투에서는 항상 사기를 세우기 위해 부하의 희생을 종용했다. 특히 황산벌에서는 자신의 조카인 반굴과 김품일의 자식인 관창을 희생시키며 진군했다. 적장 계백도 가족을 다 죽이고 전장에 나섰다. 극도로 비정한 처사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부른 비극적 선택이 아닐까.. 전장에 나서서 장군은 패배할 수 없으니까, 쓸데없는 인도주의에 휩싸이는 것만큼 장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김유신은 병법을 잘 알고 있었고, 희생을 통한 사기진작의 심리전에도 능한 장군의 면모가 보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선택임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을 하는 김유신 역시도 개인적으론 마음이 아팠으리라,

 

사회적인 차별과, 무시에 능숙하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잘 알았던 김유신은, 나당 연합군에서도 무시를 당한다. 나 역시도 김유신에 대해서 극단적인 권력지향적 모습의 편견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유신을 당나라의 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김유신은 나당 연합군에 불평등한 부분에서 항거한다. 그는 당나라의 은밀한 회유에도 신라에 대한 지조를 지켰으며, 당나라의 불평등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대놓고 분개했다. 당시 중국은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런 당나라에 꿋꿋하게 항거하는 김유신의 모습을 보며, 세간의 평가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을 쓴 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앞으로 저자의 저작 역시도 기대된다. (무명인 저자를 격려하고자 했던 의도도 있었다.)아마도 이 책의 저자 역시도 글을 써가면서, 김유신의 길었던 무명시절을 본받았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고, 차별이 있고 성공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고대의 차별보다는 더 개방적 사회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꿈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에 책 보호지를 씌웠다. 책이 그 만큼 마음에 들었고, 나 역시 김유신을 본 받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을 통해 김유신 평전에 대한 두 번의 실패와, 긴 기다림을 한 번에 보상받는 쾌감을 느꼈다, 더불어 이 책을 일독하면서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고 ,깊이 있고 ,유익한 영웅을 만났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 : <상실의 시대> - 원제 <노르웨이의 숲>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 민음사

쪽수 : 495

 

*. <상실의 시대>라고 썼지만, 사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한국에선 <상실의 시대>가 익숙하여 올렸습니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때다. 당시 나는 기숙사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밤마다 내 룸메이트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누워서 뭔가를 봤다. 궁금하던 차, 룸메가 보는 책을 보니 <상실의 시대>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었다. 그 친구에게 어떤 책이냐고 물어보자, 완전 광신도처럼, 청춘의 상징, 방황하는 영혼의 어쩌고 하며 추켜세웠다. 당시 내 좁은 안목으로는 그저 여자들이나 관심 가질 만한 시시한 연애 이야기로 치부하고 그 친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세월은 지나 20대 초반, 짝사랑하던 여자가 자취를 하기로 했고, 이사를 한다고 도와달라고 했었다. 어장관리 호갱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짝사랑을 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사를 도와줬다. 짐을 다 옮기고, 정리가 끝나고, 청소가 끝나고, 그 아이와 나는 점심을 중국집에서 시켰다. 그 배달 오는 시간 동안 초조하고 뭔가 말을 리드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안절부절 못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마침 <상실의 시대>가 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나는 하루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난 이때까지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고딩때와는 다르게,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인지하고, 대충 내용 정도는 알았다. 그 친구도 가장 좋아하는 책이 <상실의 시대>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식사가 올 때까지 계속됐고, 나의 어색한 초조함을 한 번에 제거했었다.

 

  두 번의 하루키와의 만남이 썩 유쾌하지 않아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점도 있다. 아무래도 하루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뭔가 방황하는 청년이라면 하루키를 읽어야 할 것만 같은, 강요받는 압박이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가 참 싫었다. 뭔가 하루키를 들고 다니거나 알지 않으면, 방황하는 성년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 거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그 당시 문학보단, 사회나 철학서적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나의 방황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은 철학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렵고 사변적인 철학책을 붙잡고 답을 갈구했었다.

 

  그런 하루키를 이제야, 만나게 됐다. 참으로 오래 끌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영화도 봤었기 때문에 대체적인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대체적으로 인물 간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다. 스토리는 정말 간단했다. 어느 누구나 겪을 법 했던 대학생들의 방황 이야기를 현실적인 시대적 묘사와, 조금은 과장적인 인간관계들의 조화, 두 가지 측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포커스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배경 묘사에 대해서 정말 공감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머무는 기숙사의 환경은 마치, 평범했던 남자아이들의 기숙사 생활을 떠올리게 했고, 심지어 자취했던 추억마저도 떠올렸다. 거기다 어느 대학에서나 있는 기득권과 운동권의 대립적인 이야기, 알코올에 취한 주말의 거리 등등..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기즈키라는 절친이 있다. 둘은 고등학교에서 만났으며,기즈키의 여자친구인 나오코와 셋이서 그렇게 추억을 쌓아왔다. 그러니 기즈키는 자살을 하게 되고,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상실감에 휩싸인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도쿄로 대학을 가게 되고, 기숙사를 가게 되고, 그리고 나오코를 다시 만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을 확인할 무렵, 나오코는 병의 치료를 위해 와타나베를 떠난다. 와타나베는 나가사와라는 선배와 함께, 채워지지 않는 방황감을 여자들과의 미팅과 원나잇으로 풀고 다닌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와타나베에게는 미도리라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치료받는 곳으로 가서 나오코와 나오코의 지인인 레이코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와타나베는 갈등한다.연애의 밀당을 주고 받는 미도리와의 관계와 순애보적인 나오코와의 관계를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모호하지만 분명한 주제를 나타내며 마무리 짓는다.

 

  책을 읽으며 와타나베에 공감했던 부분이 있다. 첫 번째로, 외동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외로움에 대해, 어느 정도 내성을 지닌 그의 내면에서 나와 비슷한 면을 봤었다. 두 번째로, 스스로 평범하다는 설정과, 튀지 않고, 순응적인 부분, 그리고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그의 정신관을 보며 깊은 공감을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의 외골수적인 부분이다. 나도 그와 같이 한 곳에 빠지면 깊이 있게 알아나가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은 아예 신경을 꺼버린다. 이 부분은 와타나베가 사회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그가 좋아하는 취미마저도 닮았다. 수영, 독서, 음악 듣기...

 

  그러나 이게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의 설정을,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끌 수 있는 인물로 설정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설정은 이 소설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대중이 깊이 빠져드는 이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범한 주인공이지만 역시 소설은 소설이다. 그의 인생은 그의 성격과는 다르게 평범하지 않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 그리고 첫사랑인 여자와의 떨어진 정신적인 사랑,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은 적극적이고 음란한 이야기를 하며, 대시를 하는 미도리와의 우연스러운 만남,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판타지적으로 열광할만한 매력을 지닌 나가사와 무려, 헌팅률 99%에 달하는!! 그의 능력(나도 이런 선배 좀 있었으면 했다.)... 주인공의 모습과 배경이 현실적이고 친숙하게 다가갔다면, 작가는 인물 간의 설정과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절묘하게 잘 섞어놨다. 이 절묘함이 한 쪽으로 지나치면 위화감이 조성되고 싸구려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하루키는 적절하게, 그리고 아름다운 언어로 잘 조화시켰다.    

 

 기즈키와 나가사와는 주인공의 남자 인연의 두 축을 이룬다. 둘 다 뛰어난 인물이지만,

기즈키는 그 뛰어난 역량을 와타나베와 나오코와의 관계에서만 발산한다. 나가사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매력을 한 쪽으로 집중시키지 않고 확산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소 거만하고 무례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거기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의 기본적인 시각 차이도 나타나고 특히나 가장 돋보였던 부분은 나오코를 둘러싸고, 죽은 기즈키와 와타나베의 대립이 눈에 들어왔다. 대답 없는 기즈키에게 와타나베는 책임지지 못한 그를 원망하면서도 자신은 삶을 선택했고 나오코와 같이 살아가겠다는 책임을 역설하는 부분에서, 남자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여자들과의 인연도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가장 중심이 되는 나오코와 미도리, 둘은 성격도 다르고, 발산하는 매력도 다르다.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사랑은 죽음을 상징하듯, 어둡고 암울한 암시를 계속해서 나타나는 반면, 미도리와의 사랑은 생명을 상징하듯, 발랄하고 현세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나오코의 회상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소설의 끝은 미도리의 전화로 끝이 난다. 이것은 결국 처음에는 슬프고 방황하는 인간이더라도, 삶을 선택한 자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인생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 만 같았다.

 

  인물들이 다양하고 개성 있게 나오는데 가장 큰 공통점은, 정상적인 인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등장인물이 다 부정확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보일 법한, 아무 부러움이 없을 것만 같은 엄친아 나가사와조차도, 그 자신의 무례함과 오만함, 뒤틀려버린 힘의 논리에 굴복한 모습, 광적인 일그러짐 등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상인이 아닌 나오코와 어울리는 정상적인(겉으로 보기엔) 와타나베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 역시 청춘의 시기에 들어서면 불완전한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청춘의 방황엔 어떠한 모습도 어떠한 해답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숙명론적인 관점도 보이는 듯했다.

 

  이 책의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음악인 노르웨이의 숲을 땄다. 극중 나오코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레이코가 기타로 치던 음악. 네이버 지식인에 알아보니 이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은 1960년대에 극도로 발전된 산업사회에 부산물인 프리섹스, 마약, 알코올 등으로 점친 그 시대의 덧없는 사랑을 노르웨이의 쓸쓸한 겨울 숲에 비유해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처럼, 혼란스러운 학생 운동 시기와 더불어, 방황하는 청춘, 그리고 방황하는 사랑 관념 등의 부분들과 얼추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노래 가사에서도 나오듯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나는 혼자였어.')

 

 라는 이 대목은,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상실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굉장히 즐겁고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일본 소설 특유의 가벼움, 그러면서도 잔잔한 분위기, 거기다 평범한 주인공과 현실 속에서의 기묘한 만남이 주는 조화, 등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다분히 많았다. 특히 어떻게 묘사하면 굉장히 외설적이고 상스러운 부분까지도 하루키는 그 특유의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예전 모습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물론 내 청춘의 모습은 , 미도리와 같은 그런 자극스러운 말을 하며 적극적이게!! 다가오는 여자도 없었고, 엄친아 나가사와와 같은 구세주(?) 도 없었지만... 아마 와타나베와 같이 방황하고 길을 잃은 모습만큼은 일치했었다. 그리고 이런 방황의 모습은 정도가 다르겠지만 어느 청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춘들은 이 소설에서 자신의 방황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 편의 수채화를 본 느낌이다.

가볍게, 하지만 즐겁게, 부담 없이,

그러면서도 회상에 잠길 수 있게,

 

다만, 작가가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죽음이라는 부분에서, 뭐랄까, 과한 부조화를 느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즐거웠던 독서인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숙사에서 동창이 생각난다.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틀며, 그 친구의 페이스북에 가서 오랜만에 글을 남겼다.

 

'이제야, 나도 <상실의 시대>를 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