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았다. 참 좋은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읽고 원작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침 주부들이 참여하는 고전읽기모임에서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로 토론할 때였는데, 이 영화를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에 따라 극장으로 간 것이다. 순전히 리차드 파커라는 영화 속 뱅골 호랑이의 이름과 그 시튜에이션이,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음에도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센델의 책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다가 다시 펼치면서 아래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미뇨네트 호는 폭풍에 떠내려갔고, 구명보트에는 달랑 순무 통조림 캔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선장(더들리), 일등항해사(스티븐슨), 일반 선원(브룩스)이 살아남는데, 신문은 이들이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보도한다.
그런데 그 구명보트에는 네 번째 승무원이 있었다. 집무를 보던 열일곱 살 남자아이 리처드 파커, 고아인 그에게 긴 항해는 처음이었다. 그도 구명보트에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 무슨 일이 있었을까? 표류 사흘째까지 그들은 순무를 정해놓은 양만큼 조금씩 먹었다. 나흘째 되던 날은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았다. 이들은 며칠을 더 연명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던 날, 음식이 바닥났다. 이때 파커는 구명보트 구석에 누워 있었다.

선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바닷물을 마셔 병이 난 것. 고통스런 하루하루가 가고 19일째 되던 날, 선장 더들리는 제비뽑기를 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자고 했다. 그러나 브룩스가 거부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다음 날, 선장 더들리는 브룩스에게 고개를 돌리리고 말하고는 스티븐슨에게 파커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전했다. 선장은 기도를 올리고,  파커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뒤 주머니칼로 파커의 경정맥 급소를 띨렀다. 양심상 섬뜩한 하사품을 거절하던 브룩스도 나중에는 자기 몫을 받았다. 나흘간 세 남자는 아이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그리고 24일째 되던 날 이들은 구조되었다.

2010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상 소개된 예화를 기억할 것이다. 실화라는 얘기다. 그리고 살아 남은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브룩스는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했고, 더들리와 스티븐슨은 피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파커를 죽여 그를 먹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피고측은 한 사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약하고 병에 걸렸으며 무엇보다 부양가족이 없는 파커가 적절한 후보였다고. 마이클 샌델은 2장 '최대행복 원칙_공리주의' 초반에 이 얘기를 소개하며, 제러미 반담의 공리주의 소개와 함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흥미롭지 않은가. 항해중 조난과 표류, 구명보트.. 라는 단어와 더불어 17세 소년인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등장하는 뱅갈 호랑이의 이름도 리처드 파커이다. 1월초에 개봉된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브 오브 파이>의 원작소설은 <파이 이야기>(얀 마텔 저/공경희 역, 작가정신 , 원제 Life of Pi)다. 2001년 출간 후 이듬해 부커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주요 언론으로부터 ‘『로빈슨 크루소』『걸리버 여행기』『백경』을 잇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소설’ 등의 극찬을 받았다.

부커상(The Booker Prize)은 '부커 맥코넬상'의 약어로, 해마다 지난 1년간 영국 연방 국가에서 영어로 씌어진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된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소설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데,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고 한다.

문학성은 물론 대중적 즐거움까지 갖춘 이 작품의 황홀한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여러 영화감독이 시도했지만, 그 타이틀은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이 거머쥐게 되었고 그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중인 것이다. 소설은

1부 토론토와 폰디체리

2부 태평양

3부 멕시코 토마틀란의 베니토 후아레스 병원

와 같이 3부이다. 영화에서 다루는 비중은 2부>1부>3부 순이다. 2부는 소년 파이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227일간 태평양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무섭고도 기묘한 생존기록이다. 3부는 호랑이와 공존하며, 살아돌아온 이야기를 도무지 믿지 않은 인간들(일본인 선주 관계자)에게 병원에서 회복 중이던 파이가, 구명보트 위에서의 동물들을 선박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대체하여 인간들의 이성에 부합하는 식으로 들려주는 꾸민 이야기다. 3부의 이 대목은 영화의 러닝타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이지만 반전이 이뤄지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장황하게 보여준, 2부의 탐험기가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그들의 원하는 식으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파이는 말한다. 내 엄마를 죽인 주방장을 자신이 직접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앞서 소개한 1884년 여름 대서양에서 생긴 일을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발상에 도움을 준 실제 사건이 이 소설 3부에서 믿거나말거나 식으로 임기응변으로 꾸며대는 얘기처럼 문제를 던지니 하는 소리다.

 

파이가 들려주는 얘기는 궤변이지만 진실이다. 무엇을 믿을까? 눈에 보이는 것, 상식에 가깝고 사실적인 것, 인간들끼리 생존을 위해 살육을 했으므로 판사가 판결해야 하는 것, 판사는 진실을 찾아야 하지만 그 진실은 신앙(신념)의 문제와 맞선다. 어쨌거나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 속 뱅골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라는 사실이다. 소설 1,2부에서 리처드 파커는 호랑이의 이름이지만 3부에서 리처드 파커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된다. 1884년 대서양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인도에서 캐나다로 향하는 화물선에서의 조난이라는 배경으로 바뀐 소설의 모티브를 추정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공리주의를 논의하기 위한 예화였고, 그러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법정에서 유죄여부를 가리는 사건이 되었다. 이쯤에서 고민해볼 문제는 위 소설의 경우, 생존을 위해 동물이 희생된 경우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람이 희생된 경우는 1884년의 사건처럼 법으로 죄과를 판단해야할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주방장이 파이의 엄마를 죽였고, 복수 차원에서 파이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 결국 살아남은 사람은 파이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파이에게는 죄가 없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의 차이 운운하는 것은 비약인 듯 하나, 마이클 샌델은 위의 책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여러 차례 인용하는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나왔다.

샌델은 정치학의 아주 일부를 예화로 들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데, 독자들에게 <정치학>이라는 녹록치 않은 책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정치학을 비롯하여 몇몇 주요저작들의 리뷰를 담은, 책을 다룬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음에도. 암튼, 독자들은 힘들더라도, 소개받은 저작들을 충실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암튼, 앞선 명제는 '인간은 동물이다'를 기본 전제로 한다. 그리고 정치학의 저자는 국가공동체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이와 같은 명제를 제시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20면)이라는 대목이다.

"인간이 벌이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단순한 목소리는 다른 동물도 갖고 있으며, 고통과 쾌감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다른 동물들도 본성상 고통과 쾌감을 감지하고 이런 감정을 서로에게 알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21면)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형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얘기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된 능력을 가졌음에도 어떤 인간들은 동물보다 더 사악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소설)에서 소년 파이와 교감을 나누고, 생존을 위한 공동운명체임을 인정하게 되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 대해, 단지 소년에 의해 조련된 결과라고만 할 수 있을까? 3부에서 동물들을 인간들로 대체하는 건 납득을 하면서도, 뱅갈 호랑이 리처드 파크와 동시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라야 하므로, 동물은 이러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게 되는 것,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nomos)과 정의(dike)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정치학)

무장한 불의는 다루기 어렵다. 생존을 위해 소년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인간은 지혜와 탁월함을 위해 쓰도록 무기(대표적으로 언어)를 갖고 태어나지만, 이런 무기들은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 쓰일 수 있다. 그래서 탁월함(arete)이 없으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이며, 색욕과 식욕을 가장 밝히는 존재가 된다.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주고, 정의감은 무엇이 옳은지를 판별해주기 때문이란다. 언어를 가진 인간들은 소통하고, 공동체를 이뤄 공공의 목표를 이뤄간다. 인간에게는 있으나 동물에게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학을(원전번역으로) 국내 최초 완역한 옮긴이(천병희 교수)는 주석에서 그리스어 arete(아레테)라는 단어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또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 여기서는 '탈월함'으로 번역했으나, 미덕, 덕, 자질로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한 경우가 많다는 것, 어쨌거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도,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도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을 통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하고 있다. '동물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교훈을 전하는 숱한 우화들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하고 그 존재감을 유지한다.

 

우화의 일종이라고 할 플루타르코스의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그리스로마 에세이>와 <수다에 관하여>에 수록)에는 이안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담긴 철학이 뭔가, 곱씹어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데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도 소년 파이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227일간 태평양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가는 무섭고도 기묘한 생존기록이다."
소년과 뱅골 호랑이의 공존, 그들의 교감, 다른 말로는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판타치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에는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이다. 나를 사랑하듯이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우정이다, 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들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점은 하늘에 사는 것이든 물속에 사는 것이든 뭍에 사는 것이든, 또 길들여진 것이든 야생의 것이든 짐승들도 마찬가지라네. 우선 짐승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하네. 이런 감정은 모든 생물이 똑같이 타고났기 때문이네. 그다음 짐승들은 자신과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들을 끊임없이 찾는다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짐승들을 부추키는 충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사랑과 닮았다네. 사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지. 인간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들도 둘이 거의 하나가 될 만큼 정신적으로 서로 완전히 결합될 수 있는 짝을 찾기 때문일세"(<우정에 관하여> 81절 전문)

 

'동물'이라고 하면 인간도 포함되니까 '짐승'이란 단어로 번역함으로써 변별성을 둔 것인데, 이것은 <동물들도 이성이 있는지에 관하여>에도 적용이 된다. 어쨌거나 인간과 동물은 자연의 일부로, 그 자체가 자연인데, 이 영화의 리뷰에서 '철학적인 뭔가가 있다'라고 하는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약간의 탐사를 해본 글이다. (아래는 영화의 스킬컷, 소년과 호랑이, 호랑이와 소년)

 파이가 바라보는 뱅골 호랑이 리터드 파커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바라보는 파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뮤지컬 블라블라블라 -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
박돈규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동차 타이어를 갈았다. 마모가 심한 상태였다. 정비사는 리프트로 차체를 들어 올리고 헌 타이어 4개를 뺐다. 3~4년을 길에서 곧추선 채 하중을 견디며 달려온 바퀴가 처음으로 땅에 드러누웠다."

평범한 일상 에세이와도 같은 구절로 글은 시작된다. 그러나 사태를 담아낸 문장을 촘촘히 뜯어보면 예사롭지 않다. 3~4년을 줄곧 서 있던 바퀴가 비로소 누워 휴식을 취하게 된다는 대목이 특히 그러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눈보라가 되거나/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올해 참 오랜 만에 발간된 시집 <와온바다>에 수록된 곽재구의 <나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이다. 나무는 평생을 서서 살아왔으니 얼마나 고단했을까? 죽어서 통나무가 되어야 비로소 안식의 시간을 갖는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 그러므로 당신도 만사를 잊고 나무처럼 나무 곁에 누워보라고 시인은 권유한다.


"잘려나간 발톱처럼 낯설고 측은했다. 매끈한 새 타이어를 끼우고 정비소를 돌아 나오는데 산더미로 쌓인 폐타이어들이 보였다. 길의 끝이 무덤이다."

첫 인용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수만 킬로미터를 달렸을 타이어들의 길 위에서의 시간들, 그 길의 끝이 무덤이란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뮤지컬 캣츠는 정반대다. 무덤에서 길을 낸다."라고 받아침으로써, 그가 사랑한 뮤지컬 20편 가운데 하나인 <캣츠_왕의 익살, 광대의 기품>이라는 공연리뷰가 시작된다. 폐타이어는 뮤지컬 <캣츠>의 무대의 중요한 소품이면서 고양이들의 광장의 중심에 있다.


지은이 박돈규는 한 편의 뮤지컬을 소개하기 위해, 그 작품으로부터 선사받은 감동의 시간들을 스케치하기 위해 소소한 일상에서 소스를 끄집어낸다. 자나깨나 뮤지컬 생각을 하고 뮤지컬 공연에 빠져들고, 그럼에도 일간지 공연전문기자로서 매체가 요구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고(苦)을 달게 받아들이는 필자, 스스로가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나를 중독시킨 뮤지컬에 대한 고백이다."라고 털어놓았는데, 그의 중독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를 무심코 뽑아낸 인용부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서문에서 그가 '사랑한 뮤지컬'에 대한 이야기, 곧 러브스토리를 엮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뮤지컬 담당 기자는 직업적으로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취향을 드러낼 수도 없고 완전히 숨길 수도 없다. 기사와 나 사이의 긴장이다."

밥(노동)을 위해 써야 하므로 쓰고, 보아야 하므로 보는 공연은 때론 고역일 수 있다. 노동이 그 자체로 즐거움을 수 없는 것은 신문기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시시푸스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삶, 해서 삶에 질리고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인간은 노동이 밥벌이 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필자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을 때, 편견을 내려놓을 때, 감상이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뮤지컬'은 어쩌면 꼭 봐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알고보면 뮤지컬 담당기자(직업)는 늘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일하고 있다.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있고 있어야 한다. 뮤지컬이라는 문화상품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관객 사이에 있어야 한다. 다만 예를 들어 영화와 비교하자면 뮤지컬은 작품소개(기사)시에 '스포일러성' 기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뮤지컬의 스토리를 자세히 기사에서 다룬다고 해서, 사전에 읽은 관객들이 받는 감동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좋은 작품은 설렁 그것이 영화라고 해도 '스토리가 사전에 알려진다고 해서 감동이 반감되는 경우는 아니어야 할 것이다. 무엇과 무엇 사이 또는 경계에 선 그는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중독된 애호가기에 괴롭다. 생각과 느낌 모두를 자신의 기사에 담아내지 못하는 것, 형식(틀, 프레임)에 갇힌 내용은 갑갑하였으리라.


앞서 소개한 시집에서 또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이 없는 날>에서 시인은 무엇과 무엇 사이에 있는 아픔을 노래한다. "생각한다/봄과 겨울 사이에/무슨 계절의 숨소리가 스며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과/싫어하는 것 사이에",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걱정한다. "또 무슨/ 병은 깊은지" 짠한 마음을 토로한다.  

이처럼 이 책 지은이는 뮤지컬 전문기자와 뮤지컬 애호가 사이에서 병이 깊어지는 것을 감지하면서 살아야 했다. 급기야 '형식'(기사)에게 반기를 든 그는 그간 일로써 썼고 쌓인 뮤지컬의 리뷰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리모델링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이 <뮤지컬 블라블라블라>다.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아버지로서 딸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꺼내고, 국내외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급기야 그가 사랑하는 뮤지컬과 뮤지컬을 만나는 일련의 과정은 기행수필로 질적 변화를 꾀하고, 그것은 성공적이다. 하여 <박돈규의 뮤지컬 오뒷세이아>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기행수필집이 되고, 독자들은 부담없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는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이란 부제에서 '사랑한'은 '사랑하는'이 되어야 한다.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질리기는 커녕 앞선 관람 때에는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들리는데도 들을 수 없었던 것들이 들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좋은 뮤지컬이고, 중독은 바로 이 대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철저하게 계산되고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감동을 끌어내는 보편적인 법칙에 충실하면서 무대장치로, 노래로, 소소한 화제를 만들어내는 등 관객들을 현혹하는 일을 다반사로 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투자된 비용이 적지 않다. 해서 뮤지컬은 철저하게 '쇼 비지니스'이면서 '공연예술의 꽃'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신일 때라야 그들의 꿈꾸는 지속가능한 공연이 가능하다. 


한 편의 시집에서 참 마음에 드는 시 한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9년 만인가, 오랜 만에 나온 곽재구의 시집에서, <사랑이 없는 날>이 내게는 그런 시였다. 특히,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도, 남과 북 사이도 아니고,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 세탁소 사이에"라는 구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경험했다. 이에 비하면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는 꽃잔치에 불과한 사족일 뿐이었다. 피아노학원과 세탁소 사이까지는 그렇고 그럴지만, 구체적인 상호(商號)에서 우리네 삶의 일상이 묻어있어서는 아니겠는가. 20개의 뮤지컬을 만나 사랑한 이야기에는 상자 기사 형식으로 뮤지컬 공연을 둘러싼 소중한 정보들이 양념처럼 겯들어져 있다. 역시 뮤지컬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그가 만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니아로서의 궁금증을 풀어헤친 결과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2-12-2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재적소에, 한 편의 뮤지컬마다 국내 시인들의 시를 적절하게 인용하여 감칠맛이 나게하는데, 나의 리뷰도 그와 같이 써보려, 했다.
 
뮤지컬 블라블라블라 - 내가 사랑한 뮤지컬 20
박돈규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잘 짜인 뮤지컬이 주는 감동은 때론 섬짓하기까지 하다. 공연전문기자보다는 뮤지컬에 중독된 관객이고 싶은 이가 고르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그 뮤지컬만큼이나 잘 뽑아낸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그러나 그들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아르테미시온으로 보낸 사자들에게서 레오니다스(스파르테 왕으로, 페르시아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수 테크로퓔라이 고갯길을 지키다가 3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옥쇄했다.)가 전사하고 크세르크세스가 고갯길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의 헬라스 내륙으로 철수했다. 이 때 전쟁에서 크게 용맹을 떨치고 고무되어 있던 아테나이인들이 후미를 맡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플루타르코스영웅전> '테미스토클레스 전', 143면, 9장)
[2]헤로도토스는 <역사> 후반부인 제7~9권에 이르러서야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마라톤에서 좌초한 다레이오스의 원정에 이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전쟁 결의, 군대의 사열,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진 테르모퓔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전투에 이어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뮈칼레에서 거둔 그리스의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역사』는 절정을 이룬다. (헤로도토스 책소개)

[3]<역사>의 해당부분으로 가보자. "테르모퓔라이에서 페르시아 왕을 기다리는 헬라스인들은 다음과 같다. ..."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7권 202절부터 239절, 제7권의 끝부분까지 테르모퓔라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몇 년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300>은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거니와 <역사>의 이 부분이 영화의 배경이면서 소재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므로, 영화에 대한 얘기도 <역사>에서의 이 부분에 대한 얘기도 생략하거나 아주 간단하게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이 협곡을 지키는 군의 지휘자는 가장 경탄할 인물은 아낙산드리데스의 아들 레오니다스라는 라케다이몬인(스파르테)이다. 그는 자신에게 배정된 300명의 전사들-슬하에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 선발해-을 데리고 테르모퓔라이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은 비교가 되지 않은 페르시아군을 무찌르며 결사항전으로 막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진영에서 이 협곡으로 산을 넘어 접근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곳은 포키스인들이 산 위에 올라 지키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 에피알데스라는 멜리스인이 나타나 테로모퓔라이에 이르는 산속 오솔길을 알려주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오솔길을 따라가도록 군대를 파견했다. 페르시아 인들은 밤새 행군하여 동틀무렵 산 정상에 도착한다. 그곳은 1000여 명의 포키스 중부장보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자국을 방어하고 오솔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온산이 참나무로 덮여 있어 포키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올라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결국 이 길을 뚫림으로써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이 길을 열리고 만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침략 때인 기원전 480년 8월의 이야기다.
[4]'대 카토'로 불리는 마르쿠스 카토는 기원전 234년에 태어나 149년 85세에 사망했다. 그는 로마의 웅변가, 정치가로 유명한데 그의 수명으로 볼 때 절반쯤에 해당하는 40대 초반 때의 일이다. [기원전 194년 카토는 집정관 티투스 샘프로니우스의 사정로 활동하며 트라케 지방(그리스 북동지방)과 히르테르(도나우강의 하류) 유역을 정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또 마니우스 아킬라우스 휘하 참모장교로 안티오코스 대왕(3세-재위 기원전 223~194년에는 세레우카이아 왕조의 세력을 부활하고 동지중해 지방에서 로마의 세력에 대항하려 했다.)에 대항하여 싸웠다.
안티오코스는 헬라스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헬라스를 침공했다(기원전 192년). 이때 동요하는 코린토스인들과 파르라이인들과 아이가이인들, 코린토스 만에 있는 도시들을 달랜 것은 카토였다. 안타오코스는 테르모퓔라이의 고갯길을 군대로 막고 그곳의 자연적 요새에 울짱과 방벽을 덧붙인 다음, 헬라스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믿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정면 공격으로 그곳을 통과하기를 포기했다. 바로 이때 카토는 페르시안둔이 헬라스군의 방어망을 우회하여 포위했던 유명한 작전을 떠올리고는 약간의 군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적진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얼마쯤 갔을 때 길이 끊어지며 발아래 낭떠러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또다시 겁이 나고 낙담했으니, 사실은 자신들이 찾던 적군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플루타로코스 영웅전)

어느새 날이 새고 실제로 낭떠러지 아래도 헬라스식의 울짱과 전초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카토는 부하 몇몇에게 지시하여 적군 파수병들 가운데 한 명을 생포하게 하고, 그를 심문하여 적군의 주력부대는 왕과 함께 고갯길에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낸다. 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고 경계가 소홀하다는 것을 알고 카토의 군사는 낭떠러지를 내려가 공격한다. 그 사이 평지에 있던 마니우스(집정관)가 고갯길로 전군을 투입하여 적의 방벽을 공격했다. 안티오코스는 돌에 입을 맞아 이가 부러지자 괴로워 말머리를 돌렸고, 그의 군대는 도처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 뒤로 물러섰다. 도망갈 길이라야 지나기 어려운 험로뿐이고, 깊은 늪이나 가파른 절벽은 통과해보았자 미끄러지고 떨어질 게 뻔했지만, 안티오코스의 군대는 고갯길을 지나 그렇듯 위험한 길들로 뛰어들었고 로마인들의 칼에 맞을까 두려워 서로 밀치고 짓밟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이상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마르쿠스 카토 전' 13장과 14장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카토는 자화자찬에 어색해하는 사람이 아닌 데다 공공연한 자랑도 위대한 공적의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고 전형 주저하지 않았지만, 이때의 공적에 관해서는" 특히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군사적 업적을 본 사람들은 "그가 로마 국민에게 신세진 것보다 로마 국민이 그에게 신세진 것이 더 크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대표적인 '자랑질'의 사례다. 집정관 마니우스가 그를 껴안으며 "자기도 로마의 모든 국민도 그의 선행에 적절히 보답할 길이 없을 것"이라며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카토는 자신의 승보를 몸소 전하려고 로마로 출발했다. 좀 낯 뜨거운 일이긴 한데, 기원전 191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279년에도 그리스인들은 침입해오는  켈트족을 바로 이곳 테르모퓔라이에서 지연시켰다.]
[5]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 기원전484?∼BC425?)와 마르쿠스 카토(기원전 234년~149년)의 생몰연대를 비교해보라. 단지 책 형식이 아니라도-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아니라도- 앞선 시대의 전쟁사는 장군들에게 반드시 익히고 기억해야할 커리륨럼이었으리라. 어쨌거나 "기원전 191년에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군을 막기 위해 이 길을 요새화했"던 것을 역발상으로 무너뜨린 사례는 당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마르쿠스 카토가 특히 테모퓔라이에서의 자신의 승리에 쾌재를 부르고, 끊임없이 '깔대기를 들이댔던' 것은 테모퓔라이에서 벌어진 앞선 전쟁의 사례를 적절히 활용했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렇다면 안타오코스는 이곳에서 벌어진 레오디다스 왕과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사이의 전투사례를 몰랐을 것인가!
[6]테모퓔라이 협곡은 아테네 북서쪽 약 136㎞ 지점이다. 고대에는 이 길의 절벽이 바다에 가까이 있었으나 물에 의해 운반된 침니 때문에 그 거리가 1.6㎞ 이상으로 넓어졌다. '뜨거운 통로'라는 뜻의 이곳 지명은 유황 온천수가 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길이 7.2㎞의 이 고개는 수많은 침략으로 인해 유명해졌으나, 이제는 협곡이라고 할 수 없으니,

[7]역사(전쟁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유사한 케이스의 승리나 방어벽을 구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만약 카토가 이 토론에서 여느 때 자신의 작품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 유식해 보인다면 그것은 그리스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하게나. 그가 노년에 그리스 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말일세"(키케로가 <노년에 관하여>에서 주 대담자로 나선 마루쿠스 카토에 대해 소개하는 대목)
"나는 노인이 되어서야 그리스어를 배웠으니 말일세, 나는 마치 오랜 갈증을 식히려는 것처럼 열심히 그리스어를 배운 까닭5에 자네들도 들었다시피 방문 인용한 문장들을 알게 된 거라네..아무튼 그르시어만큼은 나는 열심히 배웠다네."(<노년에 관하여 8장 후반부, 마르쿠스 카토가 하는 말)
마르쿠스 카토가 테모퓔라이에서 승리를 거둔 때의 나이는 43세 무렵이다. 아마도 노년에 이른 마르쿠스 카토가 그리스어를 더욱 열심히 배운 동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힙입은 전공을 회상하는 즐거움과 겹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 중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베개속에 넣어 베고 잤을 정도로 애독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만큼 <역사>의 한 페이지와 이어진 전쟁사. 한 장소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이야기는 흥미롭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우 2012-11-2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영화 300으로 설명하는 상황이 아쉽지요. 완독을 해야 하는데 하는 숙제.. 재밌습니다. 험준한 그 고개에서 역사는 되풀이되는군요.

timeroad 2012-12-0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영화제작을 위해서는 별도의 장소를 물색해야 했겠지요. 물론 CG의존도가 높으니 하나마다한 소리지만. 감사`

oren 2013-11-05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 <300>이 나오기 전에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레오니다스 왕에 관한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된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timeroad님의 이 글을 읽으니 테르모필레 협곡에선 또다른 흥미진진한 역사가 또한번 멋지게 펼쳐진 적이 있었군요. timeroad님의 해박한 지식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라틴어를 제대로 배운 몽테뉴 또한 레오니다스와 그의 딸의 훌륭한 인품을 격찬해 마지 않던데 그 대목이라도 덧붙여 봅니다.

* * *

레오니다스의 경우

가장 용감한 자는 때로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 그러므로 개선 못지않은 패배도 있는 것이다. 태양이 그의 눈으로 보아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 살라미스·플라타에아·미칼라·시칠리아 등 4대 승리의 영광 전부를 뭉쳐 보아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의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들이 전멸당한 영광에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 * * * *

레오니다스의 딸

나는 스파르타 왕의 아내이며 딸인 켈로니스의 아름다운 마음을 얼마나 존경하고 싶은지. 그의 남편 클레옴브로토스가 혼란의 틈에 부친 레오니다스에게 대항해서 우세하던 동안, 그녀는 착한 딸 노릇을 하며 추방당한 부친의 어려움 속에 그의 편을 들며 승리자에게 반대했다. 그런데 운이 뒤집힌 다음 이 여자는 행운의 편을 들려고 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기 남편의 편을 들며 그가 패하여 달아나는 뒤를 따라간다. 그녀는 자기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며 자기가 가련하게 보아 주는 편으로 투신하는 것밖에 선택의 길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세도가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거만하게 굴던 피로스보다는 당연히 플라미니우스의 본을 더 좇고 싶다. 그는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빌려 주었다.

oren 2013-11-0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imeroad 님께서는 테르모필레 협곡의 실제 사진을 당연히 보셨겠지요? 저도 3년 전쯤 '레오니다스의 경우'라는 짤막한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우연히 테르모필레 협곡의 실제 사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그렇게 유명한 협곡이 그렇게 허무하게 변했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http://blog.aladin.co.kr/oren/4297944
 

필자는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리뷰(알라딘)에서 용병에 가까운 크세노폰의 참전을 '원군' 나아가 '원정'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변론'을 진행하였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 당시 아테나이와 더불어 그리스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스파르테의 왕 아게실라우스도 이집트 용병으로 나아가 조국의 다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벌어야 했던 사례를 꺼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을 1:1 형식으로 비교하고 있어 '비교열전'으로도 불린다. 영웅전에서 아게실라오스(그리스)의 파트너는 폼페이우스(로마)였다. 비교열전이 그렇듯 비교 대상은 두 사람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닮아있고, 그렇게 비교하고 나니까 또 다른 점(대조점)들이 있더라, 해서 비교하는 글이 이어진다. 두 영웅들을 비교하는 글 말미에 플루타르크는 두 사람이 이집트에 간 이유를 언급한다. 폼페이우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쩔수없이 이집트로 항로를 정했다. 그리고 아게실라오스는 보수를 받기 위해(어쩔수없이) 야만족의 장군에게 고용되어 이집트에 갔다. 그리고 용병으로의 소임을 다하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입장에서 동족인 그리스인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84세에 생을 마감하는 아게실라오스 왕이 죽음을 몇 해 앞두지 않은 노년에 벌인 일이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비교열전')에서 그를 폼페이우스와 비교했지만, 필자는 용병으로 나서면서까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던 아게실라오스의 모습에서 로마의 영웅, 대 카토(마루쿠스 카토)의 노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은 노년의 대 카토(로마) 대 아게실라오스(그리스) 에 대한 비교열전이다. 더불어 이 글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의 배경을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마르쿠스 카토는 키케로가 지은 <노년에 관하여>에서 주 대담자로 등장한다. 대담에 참석했을 때 그의 나이는 84세. 불과 1년 후면 죽게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노년에 대한 오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불식시키는) 대 카토의 삶에 대한 성찰이 깃든 견해에 따르면 1년후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1년이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대 카토가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조국 로마의 안위를 위하여 쏟아낸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윤시내의 '열애') 애국심이다.

그렇다면 간명하게 마르쿠스 카토(일명 大 카토)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마르쿠스 카토(기원전234~149). 그는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다. 본래 성은 프리스쿠스였지만 재능이 뛰어나 '카토'라는 성을 얻었으며, 붉은 얼굴에 회색 눈을 하고 있었다.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정관, 감찰관 등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에스파냐 전쟁에 출정했으며 그리스에서 아시아 군을 몰아냈다.(동서문화사 플루타르크 영웅전) 이제 인물 됨됨이를 조명해보자. "(대 카토는) 사치에 물들기 전 옛 로마의 ‘도덕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 단련, 불굴의 정신력, 적극적인 정치활동에 힘입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재정관, 조영관, 집정관을 거쳐 기원전 184년에는 감찰관으로 선출되었으며, 최초의 라틴어 산문 작가로서 라틴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막대하다."(숲출판사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소개) 대 카토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의 마지막 정치적 업적은 카르타고의 파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카르타고와 누마니아(지금의 동알레지와 튀니지 지방) 왕 맛시닛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카토는 분쟁원인 조사차 사절로 파견된다. 카토가 죽기 4년 전인 기원전 153년의 일이다. 마시닛사는 로마에 우호적이지만 페니키아의 식민시인 카르타고는 로마의 대 스키피오에게 패한 뒤(제2차 포이니 전쟁에서) 로마와 우호조약을 맺고 제국을 잃었으며 무거운 배상금을 물어야했다.
그런데 대 카토는 그들이 비참하게 몰락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전사가 득실대로 엄청난 부가 넘치고 각종 무기와 군수품이 가득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며 저들이 곧 로마를 위협하겠구나 경각심을 갖게 된다. 서둘러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카르타고의 누미디아인들과 분쟁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며 그들의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해서 화제가 다른 질문에 대답할 때에도 대 카토는 "내 생각에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앞세우고는 답변했을 정도라고 한다. 카르타고가 로마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는 못해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강하다고 판단한 것. 이렇게 대 카토는 카르타고에 대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을 부추켰다.
이쯤에서 대목에서 포이니 전쟁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에 걸쳐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시(植民市)이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불렀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썼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1)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 23년 동안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였고,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고 막대한 전후 배상금을 부과한다. 제1차 전쟁 이후 6년간 로마는 팽창을 거듭하여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한다.

(2)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리는데,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다. 기원전 218년에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에스파이나)의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때에 상당수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하나,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당시 한니발은 그 이름만으로도 로마인들을 공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할 정도였다.(범죄영화의 완벽한 구성을 갖추고 있는 걸작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양들의 침묵, 1991>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Dr. Hannibal 'The Cannibal' Lecter: 안소니 홉킨스 분)의 이름도 이 전쟁의 주역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한니발 렉터는 일명 ‘카니발-식인종- 한니발’이라고 알려진 흉악범으로 죽인 사람의 살을 뜯어먹는 흉측한 수법으로 자기 환자 9명을 살해하고 정신 이상 범죄자 수감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플루타르크 영웅전 소개된다)의 지연 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한다. 양(兩) 군은 이탈리아 말고도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한다. 특히,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가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일명 '대 스키피오'로 불리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기원전 236~183년)는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전쟁사에서 다시 보기 힘든 명장끼리의 대결로 유명한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찔러 승리를 거둠으로써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한다. 바로 이 때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의미에서 그 유명한 별칭인 '아프리카누스'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는 적지에서 제2차 포이니 전쟁을 치르며 아프리카, 그리스, 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혀 지리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창시자'로. 문화적으로는 '로마문명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또한 로마 외교술의 근본원칙인 '패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쳐, 세계 공동체의 실현을 추구하는 세계정치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커다란 성취를 이룬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의 정치적 파벌과 질투의 희생양이 된다. 그는 결국 탄핵을 당해 망명과 같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조국이며, 그대는 내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삶을 마감했다.
플루타르크는 영웅전에서 바로 이 스키피오도 다뤘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B.H.리델하트 지음, 사이 펴냄)라는 번역서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홉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국을 등진 뒤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36년 만에 조국 카르타고로 돌아와 자신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한니발의 인생이 너무도 극적이었기에 사람들은 스키피오의 승리를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이는 끈질긴 성취보다는 극적인 패망을 미화시키는 인간의 성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키피오를 평가하는 <역사의 천칭>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 마루쿠스 카토 얘기를 하다가 대 스키피오 얘기를 하고 있지만, 둘은 정적 관계였다(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어쨌거나 대 카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찰한 결과 카르타고가 다시금 도발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전쟁준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그리스로마에세이>,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를 노년에 이른 대 카토(가 주로 얘기하고)와 두 젊은이가 말씀을 듣는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젊은이 가운데 하나가 일명 소 스키피오(기원전 185년경~129년)인데, 앞서 2차포이니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이다. 그런데 소 스피피오는 대 스키피오의 친 손자는 아니고,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파울루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대 스키피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입양된 상태였다. 그리고 소 스키피오의 친누이는 대 카토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니까 사돈 관계인 이들이 등장하는 바로 '노년' 대담에서 대  카토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다. 우선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를.
"나는 병사로서, 연대장으로서, 장군으로서, 사령관으로서 온갖 전쟁을 수행했지만 지금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으니 자네들에게는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 하지만 지금도 나는 어떤 전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원로원에 조언을 해주고 있다네. 오래전부터 음모를 꾸미고 있는 카르타고에 나는 미리 앞질러 선전포고를 해주고 있다네. 그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나는 그 도시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을걸세."(18절) 그리고 소 스키피오에게 할어버지의 유지를 받들라는 예언을 한다. "스키피오여, 자네가 조부님의 위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불사의 신들께서는 승리를 유보해두시기를!"(18절) 실제로 카토가 죽기 직전인 149년에 시작된 제3차 포이니 전쟁에서 소 스키피오는 과연 카르타고 시를 함락하고 파괴한다. 바로 이 대담에서의 희망사항이 실제로 이뤄진 것. 대 카토는 전쟁의 위험성을 진단하고 대비하도록 하였고, 소 스키피오는 실제 그 전쟁에 출정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므로, 노회한 대 카토의 안목이 훌륭하다. 율곡 이이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던 예지와 비교해볼만한 것이리라.

 

물론 제3차 포이니전쟁은 앞서 언급했듯이 새로 집권한 카르타고의 군사세력이 많은 로마인에게 불안을 조성하자, 급기야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한다. 싹을 밟아버리기 위해, 로마는 전쟁을 유도한 것. 카르타고는 이 요구를 묵살하여 세 번째 전쟁에 돌입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할만큼 거세게 저항했으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소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2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폐허로 만들었다.
마르쿠스 카토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는 순간까지 조국 로마의 평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한 나라의 진정한 원로의 모습을 보여준 대 카토에 비교될만한 그리스인을 꼽으라면 단연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우스(기원전 444무렵~360년)이리라. 그는 "당시 그리스 최고의 인물로서 뛰어난 왕이자 장군이었다.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전의 그가 거둔 화려한 전력은 생략하자. 바야흐로 팔십 세가 넘은 이 양반은 말년에 '메세네라는 작은 땅덩어리라도 손에 넣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전쟁 경비가 모자라 시민과 친구들에게 경비를 빌린다. 쉽지 않다. 급기야 이집트의 왕 타코스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전쟁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용병으로 출전한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당시의 숱한 반대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장군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위대한 그가, 이집트의 한 야만인 우두머리에게 고용되었다는 것은 추태다. 세상의 평가가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타코스가 보낸 돈을 받아 용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그 병력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페르시아 원정 때처럼 30명의 스파르테 장군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집트로 출항했다.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늙은 장군(왕)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그의 속마음(믿음)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읽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명예가 아나라 나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집 안에 틀어박혀 죽는 날만 기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앞서 <노년에 관하여>의 주 대담자인 대 카토 주장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대 카토는 잘 나가는 로마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아게실라오스는 꺼져가는 국운에 불씨라도 되기 위해, 갖은 반대와 수모를 견뎌내는 노년의 왕이었다. 누가 더 위대하다고 해야할까, 80대 중반까지는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장수한 경우인데, 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으로 애틋하고 눈시울이 젖게 한다.
18대 대통령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야권 후보단일화를 '압박하시던' 원로들 어르신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노인들 대다수는 여권지지"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가슴이 아프다. 지난 삶의 굴곡 너무 컸으리라. 그 얼룩은 트마우마가 되어 무너뜨릴 수 없는 벽으로 우쭉 서 있는 것이리라. 미래로 가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상당수라고 선거전 얘기는 씁쓸하다. 그런 노년들을 비판하는 지금의 젊은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을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행에 옮기는, 대 카토와 아게실리우스 왕 같은 노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우 2012-11-2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원로들의 역할이 정말 아쉽고 안타깝고 목마를 뿐이네여, 오늘 아침에 보니 타는 목마름의 시인이 여성대통령을 지지한다네여, 죽음의 굿판 운운하던 때의 울분을 다시 느끼면, 가끔은 주목받는 삶이고 싶다, 이건가요 김지하!

timeroad 2012-12-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 힘든 걸까요? 그들은 이미 본 세계를 아직은 젊어서 못 보는 것일까요? 그렇게 지역주의 벗어나야 한다던 이들이 이 판에서 지역발전을 핑계로 참 안타까운 모습들.. 과거는 흘러갔다! 버릴 것 버리고 새로움을 찾으면 좋을 텐데.. 고전읽기좀 해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