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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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아 말하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 고전들을 읽는 소회는 이와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웠던 지난 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다시 맞이한 여름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삼 세 판이다.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세 차례는 해야 지는 쪽의 아쉬움이 덜할 수 없다. 이기는 쪽에도 단지 운(運)만으로 이긴 건 아니라는 뿌듯함을 선사한다. 얼마 전에 고전번역가 천병희의 『일리아스』 개정판이 나왔다. 세 번째 수정판이다. 간명한 ‘옮긴이 서문’에서 3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전 하나를 우리말로 다듬고 또 다듬은 노장의 소회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의 『일리아스』 첫 우리말 원전번역은 1982년에 이뤄졌다. 1996년에 1차 수정판이 나왔고, 정년퇴임 직후인 2006년 2차 수정판부터 도서출판 숲에서 펴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한 권이라도 더 옮기고자 하는 선생의 바람과 일상생활의 거의 전부가 된 꾸준한 번역작업, 덕분에 지금 우리 독자들은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쉬운 우리말로 그리스 라틴 고전들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새로운 원전 텍스트를 한 권이라도 더 내고자 몸과 마음이 바쁜 와중에도 고전 중의 고전, 고전들의 고전 우리말 『일리아스』를 틈틈이 다듬은 결과가 이번 3차 수정판(2015년 6월)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설전에 이어 알렉산드로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 하이라이트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에 이르기까지 『일리아스』에는 인류 최초의 전쟁 서사시답게, 유명한 전투들이 등장하는데, 이번 개정판 출간 또한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스』 속 세기의 대결이 그러하듯

개정판 출간도 의미 있는 ‘삼 세 판’의 결실
무엇보다 이번 수정판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후주 체제에서 각주 체제로의 전환이다. 선생의 뜻을 출판사가 받아들여 거의 새로 펴내는 공정을 마다하지 않은 결과다. 후주가 더 나은지 각주가 더 알맞은지는 책의 성격에 따라(주석들이 본문 텍스트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무엇이 무엇보다 더 나을지 1차 판단은 저자와 출판사의 몫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好)/불호(不好)가 엇갈리는 주문이 이어졌으리라. 일반적으로 책이라는 물품을 공급하는 입장에서는 깨알 같은 주석들이 독자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에 후주 체제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특히 고전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구매한 데서 그치지 않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하나까지 가급적 이른 시간에 완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고전이며, 잘된 번역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무엇보다 그럴 때라야 지속적인 출간과 업그레이드, 곧 사후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번역은 이미 그 진가가 입증된 다른 문화권의 다른 언어로 된 이야기를 우리 문화권에 우리말로 접목한다는 점에서 ‘창조’에 가깝다.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의 새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결국은 주석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라야 한다. 한 차례 읽고 지나치는 소품이 아니라 소장하면서 읽고 또 읽는 걸작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후주 체제를 각주 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이었으리라.

 

주석 하나하나까지 알차게 읽어야 소화가능한 고전, 

후주체제에서 각주체제로의 전환은 예견된 일
흔히 시(詩)는 문학예술의 꽃이라고 하는데, 24권 분량의 『일리아스』는 시 중에서도 서사시(敍事詩)에 해당한다. 창작은 말할 것도 없고, 운문이기에 시 번역은 흔히 반역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나름의 애로사항이 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라는 까다로운 장르로 그리스인들에게 처음 복잡한 신(神)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두 사람은 헬라스 인들(그리스인들)에게 신을 선물해주었다고 말한다.

나보다 기껏해야 4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헬라스 인들을 위해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신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신들 사이에 직책과 활동 영역을 배분하고, 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제2권 53장)”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서사시의 두 거장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 신화를 체계화하면서 경쟁했다. 그런데 신들과 영웅들의 세계가 처음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인류사의 사건인데, 서사시라는 형식에 담았으니 우리말 번역은 오랫동안 무거운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시 장르라는 점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가중(加重)되었다. 또한 희랍어 문장구성은 곧잘 한문 문장의 구성과 비교되는데, 번역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번역을 할 수 있어 매번 난해한 공정일 수밖에 없다고. 내용을 오롯이 전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시를 시로 번역해야 하니 더욱 어렵다. 더구나 구술 형식으로 전달되던 것들이 글자로 고정된 것이라, 구어체로 다듬어진 유려함을 재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천병희 선생이 한 한 인터뷰에서 “다른 고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 라틴 고전들도 원전으로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작가 또는 저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정확히 알아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고 했겠는가.

 

시라는 장르로 펼친 복잡다단한 신(神)들의 세계,

구술로 다듬어진 유려함 재현 결코 쉽지 않아
세월이 흘러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의 시기를 살아가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계속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다.” 고전을 최초로 쓰인 그 언어로 읽을 수 없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천병희를 이을 ‘청출어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다. 이런 까닭에 한 작품이라도 더 기왕이면 번역이 쉽지 않은 작품을 선택하여 우리말로 옮기고자 하는 천병희 선생의 초조(焦燥)를 읽을 수 있다. 천병희는 번역이 잘 되었다는 영역이나 독역으로 『일리아스』를 읽어도(지난한 번역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알쏭달쏭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우리말 번역을 읽는 것은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리아스』를 다듬고 또 다듬어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에 이르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뜻이다.

 

“외국어 번역을 읽는 것이 달밤에 밤길 걷기라면,

우리말 번역 읽기는 대낮에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또한 3차 수정판 발행은, 그동안 ‘높은 문턱’으로만 알았던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꾸준한 독서가 바탕이 되어 가능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서양 철학의 삼태성으로 불리는 세 사람도 평생 동안 호메로스의 독자로 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말과 글을 남겼다. 어렵다는 플라톤의 대화편 거의 대부분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는 고전번역가 천병희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누이의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다듬어낸 『일리아스』 개정판을 만나는 마음은 각별하다. 더 이상 책 후반부의 후주 등을 떼어내 별도로 제본하여 『일리아스』를 읽지 않아도 된다. 양장본의 책을 휴대하면서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주지만, 무엇보다 무거워서 분책(分冊)하여 읽기도 하였다. 읽고 또 읽을수록 숱하게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과 배경이 익숙해질수록 새로운 맛을 주는 『일리아스』 거듭 읽기는 명품 뮤지컬을 '보고 또 보아도' 그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아니 거듭 읽어도 매번 새로운 감동을 주는 『일리아스』 읽는 즐거움이 명품 뮤지컬에서도 발견된다고 해야겠다. 흔히 ’처음 읽었다‘고 하지 않고 ’다시 읽었다‘라고 하는 책들이 고전(古典)이라고 비꼬는데, 천병희 표 원전고전을 읽는 소회는 예외라야 하지 않을까, ”다시 『일리아스』를 읽으니 참 좋다! 문득 뜨거운 지난여름 청량감을 선사한 영화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먹을 수 있어 좋구나!“ 새로운 마음으로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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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신화집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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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이나 문자를 수단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또는 체계가 언어(言語)다. 언어는 그 수단에 따라 음성과 문자로 나뉘는데, 음성언어가 말이고 문자언어가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글 한 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은 팔십 평생을 살았는데 현존하는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서양 대학의 시초인 아카데메이아를 설립, 운영한 이가 어찌 글에만 의지했겠는가? 다만, 본인 저작이 분명한 26~28편의 대화편이 고스란히 전해짐으로써, 교수나 총장 플라톤보다는 저자 혹은 작가 플라톤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글에 생전의 소크라테스 님 '말씀'을 오롯이 살려놓고 있다. 최후 저작인 『법률』과 후기 대화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하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대화편들의 주인공이시다. 어느 드라마 작가의 작품(드라마)에는 어느 어느 배우가 반드시 등장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제자 플라톤의 글에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들

‘플라톤 신화집’이란 제호를 보고 첫 번째로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호의 단어들을 인수분해하면 ‘플라톤 + 신화 + 집[모음]'이다.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남긴 업적이 위대하여 그야말로 ‘신화적’이란 건가? 그렇다면 ‘플라톤의 신화’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플라톤이 창조한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라는 것인데, 플라톤의 수집한 신화라는 의미와 플라톤이 지은 신화, 두 의미 모두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두 종류의 플라톤의 신화들을 모은 책이 플라톤 신화집이란다. 신화(神話)를 신(神)들의 이야기(話)라고만 한정할 것은 아니지만, 신화가 창작이 가능한 그런 대상임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단히 불경(不敬)스런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니 로마 신화니 단군신화니 하는 것도 맨 처음에 그 이야기를 지은 사람이 있으리라. 신화를 한 사람의 창작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다수가 그렇게 믿음으로써 ‘신적인’ 존재의 존재성을 부여하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확신-확고의 단계를 거쳐 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겠나. 다만, 그러한 신들의 이야기를 지은 작가가 분명하지 않기에 지음(作)의 결과라는 생각마저 하지 않게 된 것이리라.

 

신화(神話)를 창작한다고? 신화적인 작가 플라톤?

그러므로,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신화는, 신령(神靈)스럽고 신기(神技)한 그리고 신묘(神妙)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인데, 거기에는 흔히 신화는 곧 신들의 이야기라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그러한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이 처음 쓰일 때부터 myth의 번역어 신화는 순정한 의미의 '신들의 이야기'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 신화집에는 9개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가려 뽑은 11개의 신화가 (에피소드 모음 형식으로) 모여 있다. 1)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2)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그러나 중대한) 진리, 3)비가시적인 세계를 다룬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경험으로 터득할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야기들의 진실성은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오리지널’ 신화에서 답변을 위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신화’(myth)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 처음부터 넓은 의미의 신화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일명 ‘신통기’)를 참고하면, 그리스 창조 신화에는 주목해야 할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서사 조직의 논리가 억압, 반역, 거세(去勢)의 반복이라는 것.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와 충돌하고 반역을 일으켜 선행 세대를 거세한다. ‘낮’과 ‘빛’은 ‘밤’과 ‘어둠’을 반역하고 그들을 거세하거나 추방한다. 어둠을 몰아내야 빛이 들어설 수 있고 밤을 몰아내야 낮이 올 수 있다. ‘카오스’(‘혼돈’으로 명명하기 이전의 그냥 카오스)가 땅, 어둠, 밤을 낳고 땅이 하늘을 낳는 태초의 사건들, 이들을 살피면 “어둠과 밤의 관계(유사성)는 그 다음 세대인 빛과 낮의 관계(유사성)와 같고, 어둠/밤 빛/낮의 두 쌍은 서로 반대쌍의 관계에 있다. … 거세와 추방은 후속 세대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의 확보이고 기회의 쟁취이다”(도정일, <문학동네> 1998년 봄호 중) 곧 가시적인 있음을 근거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상정할 수 있다. 이 말을 플라톤의 신화(설정)에 도입하자. 가시적인 세계의 가능한 이야기가 있으므로, 비가시적인 세계의 불가능(해 보이는)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된다. 가지(可知)적인 것이 ‘있음’으로 불가지(不可知)적인 ‘없음(있을 수 없는)’의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가시의 가능한 세계 있어, 비가시의 불가능 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어

어쨌거나 플라톤은 기존 신화들을 수집하고, 약간씩 이야기를 뒤틀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화(myth)’의 개념을 넓게 잡음으로써 불경(不敬)의 부담을 조금 덜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봐도 될까? 그렇다면 몇몇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말에 취해서 신적인,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인간의 눈으로 얘기했노라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하필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스승의 죄목 가운데 하나가 불경죄(不敬)다. 좀 가혹하지 않나? 당시 아테네에서의 불경죄란 우리의 국가보안법처럼 ‘걸면 걸리는’ 그런 죄였다고는 하나…….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플라톤은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함으로써,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이었음을 ‘변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신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더라도 고지식한 이들에게는 그런 말들을 시쳇말로 ‘구라’로, 그를 구라에 능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인데, 작가 플라톤이 주인공 소크라테스에게 부여한 역할로는 '쫌' 그렇다.  

 

‘신화’를 분명히 정의(定意), 스승의 불경죄가 무리한 법 적용임을 ‘변호’

'플라톤 신화집'의 신화에는 우화(寓話), 전설(傳說), 신탁(神託) 등의 설정을 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쏙 빠져들게 하는 유형들이 있다. 하나하나 살피는 재미가 어렵지만 쏠쏠하다. 다만, 신화의 첫 대목에서 비록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지만 신뢰도 향상을 위해, 출처를 언급하는 대목들은 이들 신화의 성격만이 아니라, 이런 신화들을 수집하고, 뒤틀고, 창작했는지 그 목적을 가늠할 수 있다. <고르기아스>(523a-527a)에서 가져온 ‘혼의 심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사람들 말마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자네는 아마 이 이야기를 설화[mythos]로 여기겠지만, 나는 실화[logos]로 여긴다네. 나는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향연> 201d-212c ‘에로스의 탄생’ 중)
‘이제는 사람들 말마따나’, '옛날 옛적에'처럼 옛날이야기를 시작할 때와 같은 관행적인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전에 마티네이아 여신 디오티마한테서 들은 에로스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그녀는 사랑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도 해박했는데, 한번은 아테나이인들로 하여금 미리 제물을 바치게 하여 역병(疫病)의 내습을 10년 동안이나 늦출 수 있었지. 바로 그녀가 나에게도 사랑에 관해 가르쳐 주었다네."
주석에 따르면 ‘디오티마’는 실재했다기보다는 플라톤의 작명이다. ‘만티네이아(mantineia)’는 동(東) 아르카디아 지방의 도시로, 'mantis'('예언자' '예언녀')와 발음이 비슷하다. 신의 권위를 빌릴 뿐만 아니라, 가공의 이름을 실제 지명까지 참고하여 끼워 넣는다?!

 

<파이드로스>(258e-259d)에서 들려주는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당대에 플라톤이 집필할 무렵에 이솝 우화가 널리 읽히고 있었다. 초반부의 한 대목이다.
"무사 여신들이 태어나면서 노래가 나타나자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노래의 즐거움에 미쳐서 먹고 마시고는 일도 잊어버리고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대. 훗날 이들에게서 매미 족속이 생겨났다, 무사 여신들은 매미들이 일단 태어나면 먹을 필요 없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노래만 하게 해주었대. 이게 무사 여신들이 매미에게 준 선물일세."

 

 ‘매미 신화’의 초반부는 다분히 우화적, 플라톤 다른 대화편에서 이솝우화 언급해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님,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내 이야기가 몹시 이상하게 들릴는지 몰라도, 일찍이 일곱 현인 중에서 가장 현명한 솔론이 말했듯이 틀림없는 실화예요.” (<아틀란티스 섬과 고대 아테나이> 중 <티마이오스> 20d-c)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외종숙으로 훗날 ‘30인 독재’를 주도하지만 8개월가량의 집권 후 처형되된다. 플라톤이 정치 입문의 뜻을 접는 계기 가운데 하나다. 또한 플라톤의 가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아테나이의 ‘전설적인’(추앙의 의미다) 입법가 솔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있는 크리티아스., (플라톤은) 신뢰도 제고를 위해 역사적 인물인 조상까지 동원한다. 이어지는 <크리티아스>(의 다음 대목도 흥미롭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들 바깥쪽에 살던 사람들과 안쪽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 이후로 기록에 따라면 9천 년쯤 경과했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 전쟁을 소상히 언급하려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 한쪽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테나이가 지휘했고, 다른 쪽 군대는 아틀란티스 섬의 왕들이 지휘했대요."(<크리티아스>108e)

 

대화편 <크리티아스>에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추구한 ‘이상국가론’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는 아틀라티스 섬 관련 전설의 출처다. 아쉽게도 미완성 상태라, 아틀란티스에 대해 더 알려면, <티마이오스>도 읽어야 한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1,2/김석희 옮김)에는 물 속에 가라않은 아틀란티스 섬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해저 2만리』의 시간적 배경은 1866년쯤이다. 플라톤 신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이어지는 다음 “옛날 옛적에 신들은 대지 전체를 추첨을 통해 자기들끼리 영역별로 나누어 가졌고, 그 때문에 다투지는 않았어요.(<티마이오스>109b)에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역시 신화이지만, 이런 이야기와는 달리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에서는 포세이돈과 아테나 여신이 앗티케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신들이, 설마 신들이 그럴 리 없다.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몰랐겠느냐, 다툼으로 차지하려고 했겠느냐, 신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의심하는 이야기까지 대화편에 담는다. 이렇듯 플라톤은 자신이 빚어내는 작품(신화)의 완성도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흔들기도 한다.

 

자신이 빚어내는 신화를 위해 전통적인 신화의 일부를 뒤틀기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는 전설 속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을 모은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이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 거기에는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로 포함된다 하니 기대된다. 플라톤 신화집에서의 쬐끔 맛보는 것이 아쉬웠다면, 신간에서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이렇게 창조한 이야기(신화)들을 무엇에 썼을까? 문답에서 대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 곧 교육 효과를 극대화를 위한 장치인 건 분명한데, 이렇게만 얘기하는 것은 좀 매정하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문학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이야기들을 가려서 모아놓은 ‘플라톤 신화집’ 덕분에 확보되는 것은 아닐까? 희랍어로 쓰인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읽은 로마인 오비디우스는 신화를 일종의 ‘변신’으로 해석하여 책를 다룬 책,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집 『변신 이야기』를 라틴어로 썼다. 플라톤 대화편들의 문학성을 재조명하고, 플라톤을 작가로 읽는 단초가 역시 책을 다룬 책인 『플라톤 신화집』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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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5-05-22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적인 명시(名詩)의 9할은 30세 미만의 시인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절반이 25세 미만의 시인인 것이다.˝ -H.L.멩컨 <偏見>
˝얼마간의 광기가 엇으면 시인이 되지 못한다.˝ -M.T.키케로
 

"연대 의식은 기쁨이 아닌 고통에서 생긴다. 누구나 즐거운 일을 함께 한 사람보다 고통의 순간을 함께 나눈 사람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다. 불행한 시기에 사람들은 연대의식을 느끼며 단결하지만, 행복한 시기엔 분열한다. 왜 그럴까? 힘을 합해 승리하는 순간, 각자 자기 공적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318면, <연대의식> 중)


당연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지. 아무렴, 그럴 거야. 우리 마음도 항아리와 같아서 밑바닥이란 것이 있다면, 그 마음의 밑바닥을 채운 뭔가가, 힘겨운 시절을 함께 보내며 쌓은 연대 의식이란 것이 조금은 남아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그들은 왜 이럴까? 여기서 ‘그들’은 우리나라의 제1야당 새정지민주연합의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이해관계자들 혹은 이해당사자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2015년 5월 16일이다. 몇 분이나 지금 이 글을 읽을지, 읽는다 해도 그 때가 언제쯤일지 알 수 없다. 4.29 국회의원 보궐선거 패배의 책임론을 앞세우며  당 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는 같은 당의 국회의원들, 그리고 원로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실망스럽다. 누군가 이 글을 읽는 때가 이러한 현 상황, 사태가 분명한 현 국면이 수습된 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꼭 이번 사태에만 맞춤한 제언이 아닐 것이 확실하므로 쓴다.


어쨌거나 지금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선거에서 이겨 공(功)을 다투는 것도 아니고, 왜 졌는가? 실패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다가오는 본선(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패배의 사슬을 끊기 위해 고육책을 내야 하는 때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반성의 과정은 이하생략하고 당 대표 사퇴만이 그 해결책이란 결론을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뽕나무에 올라 든든한 가지를 밟고서 오디 열매를 털듯 당 대표를 흔들고 있다. 이러이러하므로 당 대표가 사퇴해야 한다, 귀납법의 논증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나. 당 대표 사퇴 말고는 길이 없다! 결론을 앞세운 연역의 논증을 하고 있는 듯한데, 내세우는 그 논거라는 것이 빈약하기가 거지 같다. 설득력이란 거의 없다. 이현령비현령이다. 돌아보면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 등 시급하고 절실한 국정 현안들을 미루고 전국 주요도시를 도는 ‘흥행’ 효과까지 거두며 뽑은 당대표가 아니었던가? 그 과정이 그렇고 그런 퍼포먼스일 뿐이었던가? 또한 이른바 당심(당원 투표)과 국민여론을 반영한 후보 경선을 통해 해당 지역구 선거에 나설 네 명의 국회의원 후보자를 뽑지 않았던가. 전략 공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년의 본선(총선)에도 적용될 경선 원칙에 따라 후보를 선출했다. 호재도 있고 예상치 못한 악재도 있었다. 결국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렇다면 먼저 그러한 성적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원인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규명해보시라, 그런 말씀이다. 원칙만 앞세워 유연하지 못하였던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인 듯싶다. 그러나 예외를 인정하는 원칙이란 없다. 다가올 총선에서도 국민 여론도 반영하는 경선을 후보자를 결정할 것인데, 그때에도 원칙을 고수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훨씬 유리할 것인데, 의정활동은 물론이고 지역구 살림을 잘 챙기고 민심을 제대로 다독거렸다면 경선 걱정은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경선 과정이 총선 승리 가도에서 차질을 줄 것으로 예견되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가졌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토론을 통해 중지(衆智)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지만, 깃발만 꼽으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인 지역구들의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깃발만 꼽으면 '따 놓은 당상'인 지역구들의 공천권을 행사하고 싶다고요?

'호남민심'이 어떻고 '광주정신'이 어떻고 하는 정치인들의 말을 듣노라면 저마다 아전인수 해석이라 씁쓸함을 느낀다. 언제까지 잡은 물고기 타령을 할 것인가? 내일모레면 5.18 광주민중항쟁 35주기다. 국가보훈처는 올해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수 없다느니, 합창 정도가 알맞다느니 깨알 <보도자료>까지 내며 주장을 일삼는데 그런 억지가 따로 없다. 현행 헌법에는 5월 광주와 6월 항쟁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5월에서 6월로 가는 길 위에서 목청껏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비록 제창할 노래까지는 아니라도, 그 의미를 폄하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 여야 국회의원 대다수가 이 노래의 기념곡 지정에 찬성표를 던진 이유이지 않겠나! 내일 모레 5.18추모일에 제1야당의 깃발 아래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격동의 현장들을 떠올리시기를. 베르베르의 말처럼 힘든 시기에 힘없는 우리를 묶어주는 노래가 아니었던가! 제1야당의 강령에도 5월 광주와 6월 항쟁의 연대정신이 깃들어있지 않겠는가? ‘제창(齊唱)’도 여러 사람이 부르는 노래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제창(諸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모두 제(諸)가 아니라 가지런할 제(齊)의 제창이다. 합창(合唱)과 달리 동일한 선율을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같은 음으로 노래하니까 ‘가지런하게 부른다’는 의미의 제창이다(권승호 선생의 <한자어휘사전>을 참고했다).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곡이라면 모를까 제창곡은 될 수 없다고 한 진의가 무엇인지는 따지고 싶지 않다. 최소한 호남정신 운운하는 제1야당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깃든 본래의 의미를 되새기는 제창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나마 잘 맞지도 않은 화음으로 합창(合唱)하면서, 그것이 제창((齊唱)인 듯 호도하는 야당의 불협화음을 보고 싶지 않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는 제창(齊唱)을 하세요!

지금이 ‘자기 공적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면서 당과 당의 대표를 흔들어야 하는 때인가?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는데, 보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 연대할 때가 아니겠는가? 2500년도 더 된 오래된 고전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지만, 지금 소개하는 고전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들 모습을 비춰보는 말 그대로의 자숙(自肅)을 하시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에게 국가는 없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는 있다. 이 대화편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지금 이 나라가 입헌군주국인 줄 아시는 분이 계시는데, 혹여라도 난독으로 철학자가 통치하는 왕도정치일 뿐이라고, 먼 나라의 옛날 옛적의 이야기라고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으면 싶다. 철인(哲人)이란 철학자다. 통치 철학을 갖춘 국가의 지도자쯤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야당만이 아니라 여야를 통틀어 다음 대선 국면이 되면, 우리나라를 제대로 이끌 통치철학을 갖춘 후보자가 나타나 이 나라를 좋은 나라로 이끄는 말 그대로 행복의 나라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가 누구인지는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국가는 없다. 하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살아 있다.
『국가』 6권 초반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철인 또는 철학자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에 더하여 실무 경험을 쌓는다면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용기, 정의 같은 미덕(arete)을 구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고 이해가 빠르고 기억력이 좋고 성실하고 절제 있고 도량이 넓고 우아하고 세련되어야 한다.[6권 485a] 이런 자질을 갖춘 대통령 후보를 우리는 맞이할 수 있을까? (필자는 결코 그가 누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꼬박 꼬박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어느 정당에도 가입해있지 않으며, 가입해본 일조차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고,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자격을 갖춘 철학자(=통치자)가 있다고 치자.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얘기한다. “그러나 이런 자질을 갖춘 철학자를 국민들은 알아보지 못한다.”고. 뿐만 아니라, 우수한 자질을 갖춘 철학자들은 국가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여러 척의 배나 한 척의 배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비유하여, 국가의 지도자를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저마다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는 어지러운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배는 한 나라(국가), 조타술을 가진 진정한 키잡이는 자격을 갖춘 국가 지도자(혹은 한 조직의 리더), 그리고 배의 주인인 선주(船主)는 국민 혹은 한 조직의 구성원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국회의원은 선출직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이란다. 이때에 해당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선주’가 될 것이다.

 

”(여러 척의 배나 한 척의 배 위에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게.) 선주는 배를 타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키가 크고 힘이 세지만, 귀가 조금 멀고 시력도 약한 편이며 항해술에 관한 지식도 비슷한 형편이네. 또한 선원들은 키 잡는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기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의 이름을 댈 수도 없으며, 언제 배웠는지 배운 시기조차 밝힐 수 없으면서도 저마다 자기가 키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키 잡는 일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있네. 게다가 그들은 이 기술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하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선주를 둘러싸고는 키를 자기들에게 맡겨달라고 별의별 짓을 다 하며 간청하고 있네. 선주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면 이들은 죽여 없애버리든가 배 밖으로 내동댕이쳐버리고, 마음씨 좋은 선주를 약을 먹이거나 술에 취하게 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묶은 다음 배를 장악하고는 배 안의 물건들을 제 마음대로 써버리네. 그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그런 자들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항해를 계속하네. 게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선주를 설득하거나 강제하여 지배권을 장악할 때 능수능란하게 도와준 사람을 항해에 능한 사람이니, 키를 잡을 만한 사람이니, 배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네. 그들은 진정한 키잡이가 진실로 배 한 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면, 해[年], 계절, 하늘, 별, 바람은 물론이요 그 밖에도 이 기술에 속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네. 그가 키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은 그가 키를 잡는 것을 사람들이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그들은 이런 기술과 수련, 즉 조타술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 일이 배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자네는 이런 상태에 놓인 배의 선원들은 진정한 키잡이를 실제로 점성가라든가, 수다꾼이라든가, 무용지물이라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천병희 옮김, 『국가』 6권 448b~489a)

 

이상의 인용이면 충분하다. 베르베르는 앞의 글(<연대 의식>)에서 친한 사람들을 갈라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공동의 성공을 안겨주는 것이라며 묻는다.(괄호 안은...)
(1)얼마나 많은 가족이 상속을 둘러싸고 사이가 벌어지는가?(명절 때의 가족모임을 생각해 보라, 모든 가족들의 만남이 화기애애한 것은 아니다.) (2)성공을 한 다음에 로큰롤 그룹이 함께 남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얼마 전에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내한공연을 마치고 갔다) (3)얼마나 많은 정치단체들이 권력을 잡은 후 분열하는가?(참여정부 시절의 당신들의 모습은 이해할 수 있다) 베르베르는 “벗들과의 우정을 간직하려면, 자기들이 성공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실망한 일, 실패한 일을 자꾸 들먹이는 편이 낫다”고 한다. 지금 아베의 일본을 보면 어느 때보다도 속이 뒤틀리지만,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그들의 책을 읽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하다. 4.29 재보선에서 제1야당은 왜 실패하였는가? 비공개라도 좋으니 끝장토론을 하고, 제대로된 백서 한 권을 낼 의향은 없는 것인가?

 

 4.29 재보선에서 제1야당은 왜 실패하였는가? 끝장토론하고, 백서 한 권을 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유산으로 남겼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이 말과 글로 제기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갖춰야할 미덕들을 하나하나 총정리 한 책이다. 그런데 이런 미덕들이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작동하려면 우애(친애)란 덕목이 필요하다. <윤리학> 8권과 9권 그리고 책의 앞부분에서 우애(친애/우정)를 강조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애의 개념을 국가경영에 대입한 책이 그의 『정치학』이다. 정치적인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제발 공부 좀 하시라. 

어원적으로 보면, <공감 sympathie>이란 말은 <함께 고통을 겪다>는 뜻의 그리스어. soun pathein)에서 유래한다. 마찬가지로 동정compassion)이란 말 또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라틴어<cum patior>에서 나온 것이다.”(앞의 베르베르의 책 <연대 의식>)

그레이트 킹 세종은 백성들의 문맹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서로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당면한 어려움을 공감하여 <연대 의식>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베르베르의 또 다른 글에서 확인하는 시사점도 가슴 저리게 한다. '분봉(分蜂)'이라는 글이다. 분봉(分封: 중국 천자가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하던 일)이 아님에 유의하시라. 늙은 여왕벌은 그동안 쌓은 보물들(비축식량, 잘 건설된 시가, 화려한 궁궐, 곳곳에 저장된 밀랍과 꽃가루와 로열 젤리 등)을 오롯이 남긴 채 일벌들만을 데리고 벌집을 떠난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면 어린 벌들이 버려진 왕국에서 부화하기 시작한다. 그들 가운데 떠난 여왕벌을 대신할 새로운 여왕이 있다. 그런데 차기 여왕벌이 결정되는 과정은 처절하다. 가장 먼저 깨어나 걷기 시작한 암벌이 살의에 찬 행동을 보인다. 다른 암벌들의 요람으로 달려들어 작은 위턱으로 눌러버린다. 밑에 깔린 암벌들을 일벌들이 빼내지 못하게 막고는 독침으로 자매들을 찔러 버린다. (다른) 어린 왕녀(王女)를 보호하려는 일벌이 있으면 제일 먼저 깨어난 암벌은 날개짓으로 호통을 치는데, 보통의 날개 짓 소리와 사뭇 달라,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여왕벌 후보인 암벌의 살생을 방치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다. 


 

이따금 스스로 방어하는 암벌이 있으면, 두 암벌 사이에 전투가 결투가 벌어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서로 대결할 암벌이 두 마리만 남게 되면, 둘 다 상대를 독침으로 찌르는 자세를 취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베르베르, <분봉> 같은 책 316-317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마리 암벌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통치자가 되려는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둘이 동시에 죽음으로써 여왕 없는 벌집을 만들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는 것이다. 마침내 한 마리의 여왕벌은 늙은 여왕벌이 떠난 왕국을 새롭게 통치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얘기다. 사람들의 정치가 다만 곤충일 뿐인 벌들보다 못해서야 쓰겠는가!

 

사람들의 정치가 다만 곤충일 뿐인 벌들보다 못해서야 쓰것는가!

야당에는 다음 대선의 후보가 될 ‘잠룡’들이 많단다. 자랑거리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본선 경쟁력이 가장 높은 한 후보를 선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당 대표가 비록 지난 대통령선 총선에서 석패했다고 하여, 오는 대선의 후보가 되라는 법은 없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이 가진 정치적 선택에서 보여준 역동성이 이를 입증한다. 통 큰 정치를 보여주는 이가 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내일 모레가 5.18광주민주항쟁 25주기다. ‘광주정신’이 무엇인가를 되새기는 추모에 야당 정치인들이 함께 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망월동 구 묘역을 가시거나 국립묘지에 가시거나 무등산을 꼭 한 번 바라보시기를…….

무등산(無等山)이다. 등(等)은 ‘무리’ ‘같음’ ‘등급’ ‘기다림’의 뜻을 가지고 있다. 등급(等級)이 없는(無) 산(山)이다. 등급을 정할 수 없는 산, 등급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산이 무등산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무등(無等)을 보며 ‘평등’의 가치를 떠올리며 죽음을 무릅썼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 지위가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어려움 앞에서 연대하였고,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켰다. 또한 이 좋은 봄날 5월에 광주에 오시려거든, 어느 방향에서도 바라보아도 그 모습이 그 모습인 무등산의 또 다른 얼굴도 확인하시길. 동쪽(영남 쪽에)서 바라보아도 북쪽(수도권)에서 바라보아도 서쪽과 남쪽(호남)에서 바라보아도 무등산은 그 모습이 그 모습 같다. 고(故)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노풍’의 진원지가 왜 광주였을까? 그대들은 잘 알고 있다. 지역감정을 깊은 골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우리나라가 되기를 열망하는 시민정신, 그것이 광주정신이고, 어느 쪽에서 보아도 항상 그 모습인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터득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주인이지만 투표지 한 장으로 '주인임을 확인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는 유권자들은 보다 훌륭한 지도자를 보호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이 나면 의사(병원)의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이, 지배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도리다.”(플라톤 『국가』  6권 489c)

 

통치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국민의 부름을 받아 그 소임을 맡아야 한다. 그렇게 통치자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 자기 관리는 물론이고, 현재 선 자리에서 주어진 소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지도자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통치할 사람들이 통치하는 일에 가장 열의가 적은 나라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조용하게 통치하게 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치차들을 둔 나라는 그와 반대로 통치하게 될 것이오.“(플라톤 『국가』 7권 520d)

그럴 수 있다면 그리 항 수 있게 된다면, 국가는 있는 것이고 그 국가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까?
-다시 맞이한 5월, 먼발치에서 무등(無等)을 바라보며,

 

無等에 올라

 

무등에 올라
그리운 분지 광주가 눈시울에 가득할 때
행복했던 어느 봄 남쪽바다 제주에서 보았던
분화구 산굼부리를 생각했다.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 땅과 하늘을 태우던 용암과
뜨거운 불 토하기를 잊은 채
깊고 깊은 가슴의 끝까지
푸르른 숲과 바람과 안개를 가두고 키우던
적막의 웅덩이
그때 나는 여행중이었고
햇빛과 나의 신부가 따뜻했으므로
둥글게 가라앉은 억 년의 고요가
차라리 평화로와 좋았다.
절망과 희망으로 혼을 놓고 다시 깨어나는
그 후의 몇 년이 지나면서
단단하여 결코 죽지 않는
세상에 흔한 한 풀씨가 되어
어느 날 무등에 올랐을 때
의롭고 귀한 것을 위하여 눈물겹게 아프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침묵 속에 아름다웠으므로 오래 생각했다.
무엇이든 없애고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용솟음의 불덩이를 갈무리한 채로도
다만 소리없이 숲과 바람, 벌레를 키우며
참고 견디며 끝끝내 기다리던 분화구
그리고 우리들 무등.
깊은 소용돌이 희망의 화염을 다독이는
넉넉한 사랑과
끝까지 기다림에 드는 아름다움.

 

-<나해철 시집 『무등에 올라』(창작과비평사 1984)에서

 

그리고 한 장의 사진.

올해도 어김없이 망월동 구 묘역과 인근의 국립묘지 두 곳에서 각각의 추모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더구나 구 묘역의 기념식에는 5.18 유가족들과 4.16 세월호 유가족들이 함께 한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과 함께 올해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齊唱)할 것이다. 지난 2월 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출발하여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 순례를 하던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광주 금남로 5.18광장(옛 도청 앞)을 찾았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옛 도청 앞 광장에는 마침 시계탑이 돌아와 있었고, 참가자들은 행사 끝 무렵에 분수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군무를 펼칠 예정이었다. 광장 건너편 커피전문점 3층 창가에서 전경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무대 앞에 나와(작은 사진이지만 '호'와 '를' 사이에 선 분이다) 긴 말씀을 하시는데, 실내에 앉아 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광주를 대표하여 이귀님 할머니(오월어머니회)가 5.18의 역사와 상처, 그 극복을 위한 투쟁을 세월호 가족들 앞에서 증언하신 것이다. 먼발치에서 하시는 말씀은 듣지 못하였지만 떠올린 네 글자면 충분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여러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사진과 글_타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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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1/5]
-천병희의『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木蓮: 꽃들 모두 보내고야 알았네, 그대

또한 연꽃이었음을. 사진과 글: 타임로드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까지, 플라톤 대화편 셋이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천병희 원전번역으로 만나는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얘기다. 낯설기만 한 이 제목들은 고대 그리스의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이름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의 제목이 인명에서 따온 것들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이 사람들 대부분은 각 대화편에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자신의 사상을 주창하기도 하고, 해당 대화편의 주제와 연관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의 대화마당에는 어김없이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는 초기·중기·후기로 나뉘는 플라톤 대화편들의 ‘초기’에 해당한다. 인간(사물)이 갖춰야 할 탁월하고 유능한 성질, 곧 미덕(arete)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뤼시스>는 우정이, <라케스>는 용기가, <카르미데스>는 절제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이들 셋 외에도 미덕에 속하는 덕목들은 여럿 있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조직)이 셋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갖춰도 “그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란 칭찬을 받을 만하다. 한 가지를 제대로 갖추기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생각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내로라하는 인물들과의 대화에 참여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 된다.” 무슨 소리냐,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독자들에게 ‘플라톤은 어렵다’. ‘플라톤은 (여전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 그것이 ’선입관‘이라고 강변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플라톤은 쉽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은 ’진행중‘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말로 와 닿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없었기에, ‘플라톤은 어렵다’는 부담감은 현실이 되었다.

 

□ 그러므로 이들 세 편의 대화편은 중기에서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난해해지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독서에) 참여하기가 수월하다고 말해야겠다. 생각해보면 2500년 전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시대나 지금이나 태어나 살고, 살다가 죽어가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 삶의 면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후대에 이를수록 선배들이 물려준 앎과 깨달음의 유산들 덕분에 살면서 만나는 문제들에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날마다 그날의 괴로움을 맞아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문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들이지 싶다.


 

←<뤼시스>를 읽은 다음에 세네카의

<우정에 관하여>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 <뤼시스>에서 만나는 ‘우정’도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다. 이 사람들이 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싶지만 그렇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부제가 ‘우정에 관하여’이지만 ‘우정’을 ‘사랑’으로 대치(代置)해도 상관없다. 다만 여기에서의 사랑은 흔히 떠올리는 남녀의 사랑과는 좀 다르다.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의 사랑 때문에 시작된, 그리고 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되는 대화가 <뤼시스>인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다룬다고? 사실이다. 한 청년(남자)이 한 소년(남자)를 사랑하는데, 나 홀로 사랑을 불태울 뿐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이즈음 우리나라처럼 세인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다.

□ 당시 그리스에서 동성(남자)끼리의 사랑은 사회 문제가 되지가 되지 않았다. 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대를 갖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고 뭇 사내들은 그런 사랑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여성차별’의 현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동성애는 지금의 여자를 향한 남자의,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아가 여기에서 다루는 ‘사랑’은 그것이 남녀 사이의 것이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것이든 ‘우정’에 포함된 혹은 우정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사랑 혹은 그 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로는 어디까지가 우정이고 어디서부터 사랑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표면상으로 <뤼시스>는 동성애에 따른 이야기를 다루는 대화편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8,9권 '우애'를 다룬 부분을 이어 읽으면 좋지 않을까?

 

 

□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일관되게 남자끼리의 연애에서 남자 구실을 하는 쪽을 '연인'(戀人; erastes)으로, 여자 역할을 하는 쪽을 '연동'(戀童: ta paidika)으로 옮기고 있다. 대체로 연인은 연동보다는 연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나 인품, (경제적으로) 가진 것에서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랑하는 쪽’이다. 역으로 연동은 사랑을 받는, 곧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상대이다. 소크라테스의 연동은 알키비아데스(15살차, 대화편 <향연> 참조)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만물은 하나다’)의 연동은 자신의 이론을 충실하게 계승한 제자이기도 한 25살 연하의 제논이었다.

 (이어서, 4조각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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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 그리고 친(親)하다는 것[2/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힙포탈레스는 뤼시스라는 당시 13세쯤의 소년을 열렬히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부잣집 도련님이다. 한데 그는 소심한지라 고백하지 못하고, 소년을 연모하는 마음을 시로 짓고 산문으로 쓰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그런 힙포탈레스에게는 크테십포스라는 또래 친구가 있다. 그리고 크테십포스의 사촌(동생)인 메넥세노스가 있는데(두 형제는 훗날 소크라테스를 임종한다), 메넥세노스는 뤼시스와 또래로 ‘절친’이다. 때문에 크테십포스는 사촌을 통해 뤼시스와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힙포탈레스와 달리) 뤼시스는 힙포탈레스를 직접 알지 못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사촌간인 메넥세노스-크테십포스 형제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이 두 사람이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크테십포스는 뤼시스를 연모하는 친구(힙포탈레스)를 못마땅해 한다. “외모가 출중하여 단지 아름답다는 말뿐 아니라 아름답고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뤼시스를 크테십포스도 연모하기에, 시샘하는 것은 아닐까?
□ 소크라테스까지 다섯 명이 참여하는 <뤼시스>의 대담은 기원전 424년~399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것으로 본다(옮긴이).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가 45세~70세이던 어느 날이다. 가령, 기원전 416년 어느 날로 대화 시점을 확정하는 <향연>(비극작가 아가톤이 레나이아 제 비극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해)과 달리, <뤼시스>의 정확한 대담 시점을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정에 관하여’ 언제 대화를 나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당시의 ‘우정’과 ‘사랑’을 혼용하여 사용하려는 필자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알다시피 <향연>은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느 날 벼르고 벼른 끝에 자신의 아름다운 몸으로 소크라테스를 유혹했다.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소크라테스에 실망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알키비아데스, <향연> 후반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고백한다.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연동인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연동인지 모르겠다며,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랑고백을 하고 있다. <뤼시스>의 대담이 진행되는 동안 연동의 눈에 띄지 않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힙포탈레스를 바라본다. 그 모습에서 지난날 레슬링 경기장 한 구석에서 연동인 알키비아데스를 훔쳐보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 이처럼 연동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기까지 두 사람의 메신저가 있음에도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힙포탈레스의 속은 갑갑하고 타들어간다. 시와 산문으로 사랑을 승화시키며, ‘뤼시스 바라기’를 하고 있다. 바로 이런 때에, 소크라테스가 크테십포스의 연애상담자로 등장한다. 근래의 토크콘서트나 인기 팟캐스트의 소재가 연애(심리)상담인 경우가 많은데, 소크라테스도 그런 연애상담자 역할을 맡게 된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연동들을 사랑한 생생한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향연>에서의 알키비아데스의 고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연모한 연동은 한둘이 아니었다.)


□ 또한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데 자신은 남들이 ‘지혜’를 낳게 돕는 점만이 다를 뿐이라고 <테아이테토스>에서 거드름을 피운다. 그런데 산파는 출산을 돕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맺어주는 중매자 역할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역할이란다.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결합해야 하는지에 관해 알 것은 다 안다는 점에서 산파들이야말로 가장 영리한 결혼중매인”(테아이테토스 159d)이라고. 그러므로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애상담은, 상담에만 머물지 않고, 힙포탈레스와 뤼시스의 연인이 되도록 실질적으로 돕는 중매인 역할까지 하는데, 흥미로운 관점 포인트다.

□ 상담은 시작되었다. 뤼시스와 메넥소노스가 대화에 참여하기 전에 나누는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연동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사냥과 낚시에 비유하는 등, 연애에서의 ‘밀당’(밀고 당기기)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좋아하면 데시를 해야지 시나 산문 따위로 위안을 삼고 있어서야 되겠느냐고(크테십포스가 친구 헵포탈레스를 못마땅해하는 것도 그의 우유부단 때문일 수도 있다.)

 

"여보게, 그래서 연애 전문가는 연동을 손아귀에 넣기 전에는

연동을 찬양하지 않는다네.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염려되니까.

또한 잘생긴 소년들은 누가 칭찬하고 추어주면 자만심에 차서

점점 도도해진다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206a) "

 

나쁜 남자! 사냥을 할 때, 그 무기가 화살이건 총이건 한 방 날리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려야 한다. 낚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대물(大物) 낚시라면 밤을 꼬박 새우고도 붕어의 입질 한번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긴 침묵~ 인내심 잃지 않고 기다릴 것, 그래야 ‘선수’다. 그러하거늘 승리의 송가라도 되는 양 시네 산문입네 하면서 요란을 떠는 크테십포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일침을 놓아 기선을 잡는다.

 

□ 마침내 자신이 하수(下手)를 인정하고, 연동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고 행동해야 하나요, 조언을 구하는 크테십포스, 그렇게 본 상담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상담 조건은 자신이 당사자(뤼시스)와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마침 가까이에 있던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일행들에게 다가오고, 메넥세노스는 사촌형인 크테십포스 옆에 앉고, 뤼시스는 친구를 따라 그 옆에 앉게 되어 소크라테스와 만나게 되는데, 덫을 설치하고 유인하여 사냥감을 포획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우정과 사랑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대목에서, 자신의 충고에 따라 그 현장에 배석하고도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힙포탈레스를 짓궂게 묘사한다.(이 대화편은 훗날 소크라테스가 회고하는 형식이다)
“(뤼시스가 메넥소노스를 보고 따라와서 함께 우리 곁에 앉자. …) 흽포탈레스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뤼시스가 언짢아할까봐 두려워서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섰네.“(107c)
또한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소크라테스는 그 자리에 힙포탈레스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는(자신의 ‘구라’에 취해) 좌중의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뻔 했다고 회고한다. “힙포탈레스, 연동과 대화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하네, 이처럼 기를 죽이고 위축을 시켜야지, 자네처럼 우쭐하게 만들고 기를 살려서는 안 된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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