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행된 <메나드로스 희극>에는 고대 그리스 '신희극'을 대표하는 메난드로스의 현존 작품 4편이 실려 있다. 그가 생전에 100여 편의 작품을 썼다는데, 상당수를 제목만 파악할 수 있는 정도이고, 유실된 상태다. 다만 작품의 파편이랄 수 있는 대사 단편들이 명언들로 남겨져 여러 글들에서 인용되고 있다. 20세기에 이집트에서 다량의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덕분에 4편의 그의 희극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 수록된 4편의 글 가운데, 필자는 <사모스의 여인>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볼까 한다. 개연성이 있는 사건 혹은 에피소드는 훗날의 작품들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뤄지기 마련이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것을 일종의 진화라고 볼 수 있을지, 반드시 선행 작품을 참고한 끝에 새로운 작품에서의 유사한 설정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1)2003년 출간된 천병희의 최초 원전번역 (2)최근 펴낸 개정증보판 메난드로스 희극 (3)은 아리스토파네스 일부 작품과 메난드로스의 <사모스의 여인>을 수록한 책. 이상 세 권의 책에는 <사모스의 여인>이 수록되어 있다. <사모스의 여인>은 메난드로스 희극들이 왜 '풍속연극'으로도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친숙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다.]

 

‘결혼 계약’으로도 불리는 신희극 「사모스의 여인」은 약혼 상태인 예비 신랑(모스키온)과 예비 신부(플랑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상태에서 시작한다. 두 집안은 이웃사촌이고, 곧 사돈이 될 두 아버지, 데메아스(신랑의)와 니케라토스(신부의)가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둘의 해외 출장(혹은 여행) 기간은 꽤 길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데메아스에게는 젊은 동거녀가 있는데(크뤼시스는 사모스 출신으로, '사모스의 여인'이다.) 예비 부부의 아이가 태어날 즈음 자신의 아이를 유산을 한 상태이다. 크뤼시스는 두 젊은이에게 제안한다. 행복한 출발을 위해 '속도위반'으로 낳은 아이를 자기가 낳은, 데메아스의 아이라고 하겠다고. 그렇게 일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두 아버지들은 결혼식을 서두르고, 결혼식을 준비하던 데메아스는 집안의 유모가, 그 아이는 아들 모스키온의 아이라고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됨으로써 충격을 받는다. 그는 곧바로 크뤼시스와 아이를 집에서 내좇고, 둘은 니케라토스의 집으로 가는데, 그녀는 니케라토스의 아내와 돈독한 사이다. 그 집에는 아이의 생모인 플랑곤이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니케라토스는 딸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당황한다.

신랑 모스키온은 어린 시절에 데메아스에게 입양된 아이로, 물심 양면으로 친아들도 받지 못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아직 청년임에도 아버지 덕분에 연극 경연의 코로스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을 들었음에도 아들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아버지. 자신의 동거녀와 잠자리를 가져, 아이를 낳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동겨녀의 유혹 때문에 실수한 것이라고 아들을 옹호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신부 측에 알리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없는 모스키온의 고민은 깊어지고 신부 아버지에게 자기 아이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오해가 시작된다. 자신과 신부 플랑곤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말이 빠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의 패륜아를 사위로 맞이할 뻔 했다! 니케라토스는 극노한다. 결국 두 아버지들의 오해가 풀리지만, 절망한 모스키온은 해외용병으로 나감으로써 집을 떠나려 한다. 친자식보다도 자기를 사랑하고 보살펴준 아버지가 자신을 오해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오해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결국 이야기는 헤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작품은 기원전 317년과 307년 사이에 무대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지만, 플롯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복원된 상태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른바 '속도위반'이 예나 지금이나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에게서 문제가 되고 있다. 당연한 사실이 왜 새롭게 다가온 것일까? 피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집트 파피루스의 발견으로, 인류의 피임의 역사는 기원전 187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약이며 기구에 이르기까지 현대에도 예기치 않은 임신이 생기는 상태이니, 옛날에는 속도위반이나 예기치 않은 임신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둘째, 당시에도 '속도위반'을 수치로 여겼다는 점이다. 하여 부담 없이 출발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사모스의 여인 플랑곤의 배려가 돋보인다. 그러나 과도한 친절은 금물이다. 그 배려로 인해 플랑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사심은 없는 것일까?

셋째, 근친상간의 일종으로 파악한 니케라토스의 반응이다. 그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로 오해하는 것은 당연한데, 빗대는 예가 흥미롭다. 

"테레우스와 오이디푸스와 티에스테스와 그밖의 다른 자들이 저질렀다고 하는 근친상간을, 자네(모스키온)가 무색하게 만들어버렸구먼."

물론 크뤼시스는 말 그대로 데메아스의 동거녀일 뿐이다. 본부인도 아니며, 재혼을 약속한 상태도 아니다. 그녀는 젊어서 아들과 나이차가 크지 않는 듯하다. 그녀의 젊음은 보통의 아버지라면 더욱 분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늙은 남자(아버지)가 젊은 남자(아들)에게 젊은 동거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모스키온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점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일까? 물론 오해하는 상황이지만, 관계로는 근친상간이지만 친자식일 때보다는 심각성은 덜한 상태다. 다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둥, 큰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 아테나이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테세우스 관련 신화와 비극을 떠올리게 된다.  

 

 

 


 

 

 

 

 

 

 

 

 

(1)천병희와 (2)강대진이 각각 번역한 일명 '도서관'으로 불리는 아폴로도로스의 저작을 통해, 테세우스의 신화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책의 후반부 부록과도 같은 '요약집'이라고 실려 있는데, 책의 본문에 해당하는 '도서관' 후반부에서 '요약집' 전반부에 걸쳐 테세우스와 관련된 신화가 소개되어 있다. 

테세우스는 아마존 여인에게서 휩폴뤼토스라는 아들을 얻은 상태에서 아내가 죽자 크레테의 미노스의 딸인 파이드라 공주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에게 아카마스와 데모폰을 낳아주는데, 테세우스의 아들인 휩폴뤼토스를 사랑하게 되고, 자기와 동침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 휩폴뤼토스(남자 아르테미스 여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그녀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칠까 두려워진 파이드라는 정황을 만들어 그가 자신을 겁탈했다고 모함한다.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에게 아들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마차를 몰고 해변길을 달리던 휩폴뤼토스는 파도에 휩쓸려 비참하게 죽고, 파이드라도 자신의 사랑이 알려지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계모 파이드라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휩폴뤼토스>라는 비극으로 만들어지는데, 천병희의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1>에 수록되어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테세우스 전'도 참고할 만한 고전이다. 전체를 번역한 동서문화사의 번역에서 테세우스 일대기를 확인할 수 있다. 천병희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원전번역이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주요 영웅 5인씩, 10명만을 다루고 있고, '테세우스 전'은 없다. 동서문화사 번역에는 주석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다희 번역의 영웅전이 여러 권으로 나오고 있는데, 1권에서 테세우스를 만날 수 있다. 

 

 

 

 

 

 

 

 

 

 

 

 

 

 <가운데가 아버지(이윤기 기획) 선생의 유지를 받든 딸 이다희가 우리말로 번역한 영웅전의 1권에 테세우스 편이 수록되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흘러간 가요의 한 대목처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전처의 아들)을 '사랑하는 죄'를 짓게 되는 파이드라의 슬픈 사랑을 다룬다. <사모스의 여인>에서 아버지 데메아스는 오해하는 상황이기는 하나, 테세우스처럼 신에게 아들을 죽여달라는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 

 

에우리피데스는 '고희극'의 대표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 아이스퀼로스와 함께 실명으로 등장하는 비극 시인이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2>에는 <개구리>라는 희극이 실려 있다. 기원전 405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40세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집필하고 연출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등장인물인 디오뉘소스(신)는 헤라클레스로 분장해 저승으로 내려가는데, 위기에 처한 아테네 시민들을 일깨울 (비극)시인 한 사람을 데러오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3대 비극시인은 이미 고인이 되어 저승에 가 있는 상태.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중 누가 최고인지 겨루고 디오뉘소스가 심판을 본다. 디오뉘소스는 대결에서 승리한 아이스퀼로스를 지상으로 데려가고, 에우리피데스가 승복하지 않는 가운데, 빈 옥좌는 소포클레스가 차지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끝나는데, 기원전 405년은 승전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아테네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상태다. 

이 작품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의 공로를, 비극에서 필요없이 산만한 표현을 줄이고 우리에게 유용한 일상사를 무대에 올려 새로운 비극을 개척한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아이스퀼로스가 공격한다. 자신은 시민들이 본받을 수 있는 점잖은 영웅들을 묘사했다. 한데 에우리피데스는 뚜쟁이들(<힙폴뤼토스>, 파이드라의 유모), 신전에서 아이를 낳는 여인들(<아우게>의 여사제), 오라비와 살을 섞는 여인(<아이올리스>의 카나케), 자식을 죽이는 여인(<메데이아>) 등 건전한 시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악한 내용만을 다뤘다고 비난한다.

'고희극'을 대표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는 일종의 문학평론 혹은 공연리뷰인 셈이다. 이 작품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아이스퀼로스의 입을 빌려, 에우리피데스를 비판하는 근거가, 훗날 아리스토파네스 자신과 달리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리는 메난드로스의 출현을 예고하는 듯하다. 소재와 기교에서 메난드로스 희극은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과 유사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은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역할보다는, 희극이라는 도구를 써서 당면한 국가/사회의 굵직한 문제들에 처방을 제시하는 여론에 가까웠다. 관객들 중 누구일 수도 있는 보통 인물을 무대에 올리고, 그들이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소재에서 웃음을 찾아낸 메난드로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음과 같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개구리>를 패러디한다면?

메난드로스가 작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이 사라진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고자, 다시 디오뉘소소 신을 불러, 저승을 찾게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와 메난드로스가 자신이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디오뉘소스가 심판을 본다. 희극이란 중차대한 국가의 문제를 다뤄야 하며, 비판 기능을 해야 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주장한다. 희극이란 웃음을 선사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요, 메난드로스는 대선배에게 감히 맞선다. 극과 극이 대립하는 극이 되지 않을까

결국 <비극의 창시자-아이스퀼로스: 인간 중심의 비극 에우피피데스=아리스토파네스:메난드로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메난난드로스는 시민 관객들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휩폴리토스>를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한 상태에서 <사모스의 여인>을 무대에 올린 것은 아닐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혹은 작품 속 상황을 자기 희극의 또 다른 배경으로 활용(전제)한 건 아닐까? 훗날 <페드라>('파이드라'의 영어)라는 영화가 파이드라 공주를 중심으로 극화되듯, 메난드로스는 '사모스의 여인'을 갈등의 중심에 놓는 <사모스의 여인>으로, 비극 <휩폴뤼토스>의 희극 버전을 새롭게 만들었단 생각이 든다. <사모스의 여인>에서 딸의 아버지가 예비사위를 근친상간을 한 인간 말종이라고(오해하여), 거침없이 쏟아내는 부정한 사례들에는 없지만, 테세우스-파이드라-휩폴뤼토스의 신화(비극)는 이 희극과 씽크로율이 가장 높은 비극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작가이다. 그에 비하면 몰리에르는 무뎌 보이고, 셰익스피어는 어릿광대 티가 난다."

랑프리에의 <고전사전>에 실린 평가이다. 그렇다면, 당대의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실감나는 소재를 무대에 올려, 오늘날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는 세련미와 웃음을 창조한 메난드로스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다음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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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육필시집
나해철 지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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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시(詩)'는 말(言)의 절(寺)이라는데, 말로 지은 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시는 다른 장르의 글들과 함께 '짓는' 행위를 '쓴다'고 표현하는데, 순전히 글씨를 '쓴다'로만 시를 짓는 행위를 묘사한다면, 언젠가 시를 '친다'고 이르게 될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필 시집 시리즈는 시대 흐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기획 자체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나해철. 시인 나해철, 의학박사 나해철, 오래된 조형물을 사랑하는 나해철, 무엇보다 사람 나해철. 그에 관해서라면, 아주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여러 면에서 별도의 글을 쓸 수 있지 않나 싶다. 전부 다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손으로 쓴 시로 먹고 살아가는 시인은 아니다. 이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정도로 시만 쓰고도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는 낮에는 성형외과 의사다. 그것도 강남 압구정 전철역 부근에 있는 성형외과 의원에서 아름다워지려는 이들의 '니드'를 충족시켜주는 일로 살아간다. 그러니까 그는 손이 하는 일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가 이번에 자신의 시편들 가운데 46편을 골라 직접 '쓰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느꼈을 소회가 궁금했다.

원고지에 직접 쓴 시인의 시를 받아서 타이핑을 하고 그렇게 입력했던 원고를 사식집에 맡기고, 프린트 된 인화지를 디자이너가 칼로 직접 오려서 조판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먹지에 새긴 글씨를 등사판으로 밀어낸 용지로 시험을 보던 시절도 앞서 있기는 했다. 어쨌거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손글씨로 시를 쓰는 일도, 그런 시를 읽는 느낌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방학이 끝나서 아쉽다는 몇몇 교사 지인들과 정남진 장흥엘 다녀왔다. 천관산의 봉우리 하나를 오르고, 내려와 일행들이 찾은 곳은 천관산 남쪽 자락에 있는 천관산 문학기념관. 2월 2일에 끝난 것으로 현수막이 붙어 있는 주요 문인들의 시화전이 아직 철거하지 않은 상태로 전시 중이었다, 그런 '방치' 덕분에 참으로 오랜 만에 시화전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액자가 고급스럽게 바뀌었을 뿐, 필자가 직접 쓴 글씨의 느낌으로 보고 또 읽는 느낌은 여전히 설레임을 준다고 생각했다.

감히, 위에 소개한 나해철 시인이 직접 쓴 글씨의 느낌을 평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시들은 내용을 떠나 잘 읽힌다. <그리운 이에게>는 정평이 난 시로, 대학의 연극영화과 입시나 연기자 오디션에서 독백 과제로 제시되는 작품이다. 나해철 시의 이러한 특징을 간단히 얘기하는 쉽지 않다. 마치 흰 여백에 오로지 검은 글씨 뿐인 일반 단행본의 타이포그라피에 대해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느낌은 있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듯이, 나해철의 시가 매끄럽게 읽히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러한지를 말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어미처리 등 반복 효과, 그러면서도 변용되는 우리말의 절묘한 쓰임이 내는 효과라고 할까, 물론 내용을 떠나서, 라고는 했지만 어찌 내용을 떠나서 매끄러운 읽기가 가능하겠는가. 이번 시집에서 만나는 시인이 직접 쓴 글씨에 대한 느낌도 어쩌면 잘 읽히는 그의 시 특징과 잘 어울르는지 놀랄 뿐이다

 

외로운 사람들의 밤에 드는
햇볕처럼 따사로운 손
병 깊어 쓸쓸한 이들에게
다가가 쓸어주는 손
아름다운 손

새해에는
나의 오른손 왼손 중
하나라도 그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불의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용기 있는 손
더러운 것을 맑게 씻어주는
깨끗한 손
어여쁜 손

새해에는
아아 나의 손 중 하나라도
그처럼 예쁠 수 있다면

 

시집 <<아름다운 손>>(1993.03.01,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시 <손> 전문. 여기에서 시집 제호 아름다운 손이 나왔다. 그의 손이 이번에는 진짜로 손글씨로 쓴 시를 썼다. 이번 시집에도 수록된 작품이다.

해서, 시인은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다시 쓰면서의 생각한 바를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시를 손으로 흰 종이 위에 쓰면서, 제 스스로 제 글씨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제 살아온 시간들, 제 마음속 깊은 곳, 특히 제 성격이 거기 있었습니다. "

 

위로를 외래어로 번역하자면 근래에 유행하는 '힐링'쯤이 될 것이다. 외모에 대한 고민은 어느덧 마음의 병이 되어버린다. 그런 사람들이 그에게는 고객들이다. 외모에 대한 고민이 정작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 바 있는데, 성형외과 의사이면서 시인인 나해철만이 알 수 있는,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눈을 아름다운 코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이다. 누구처럼 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만의 모습과 절묘하게 어울릴 때에 아름다운 눈이 되고 아름다운 코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이 되기 위해 그를 찾는 고객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낮엔 의사이고 밤엔 시인이 하는 일인데, 그가 직접 쓴 손글씨로 감상하는 이번 시편들에서 받은 느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의 절제를 시의 내용과도 절묘하게 어울리며 새로운 느낌을 선물하고 있다. 끝으로 그의 시, <그리운 이에게>를 소개한다. 오디션에 나가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낭송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보시기를!

 

그리운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맺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내 잊지 못한다는 한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려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고운 사람에게
그리운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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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탄생 - 대한민국 제1호 예술경영 CEO의 자전적 에세이
이종덕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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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홍길동 탄생 **주년 기념' 공연이나 출판물들의 부제는 적지 않지만 '  ~의 탄생'이란 말을 쉽게 쓸 수 있는 책이 많지 않다. ('홍길동'이라 한 것은 아무 이름이나 인명을 특정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다. 가령 '*철수'이름도 철수와 영희를 교과서에서 보았듯 막 사용해도 될 것 같은데, 실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법적으로 '걸면 걸리는' 것이 현재의 법현실이란다) 

1872년 출간된 독일의 사상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첫 저작 이름은 <비극의 탄생>이다. 한국미술사학계의 원로로서 생의 막바지에 중요한 결실을 이뤄내고 있는 강우방 선생의 역작 이름은 <한국미술의 탄생>(2007년)이다. 선언적이며 과격한 언사로도 주모를 받았던 니체의 책 이름답다. 그런데, 후자 강우방 선생의 책 제목은, 반어법적인 해석의 여지를 안고 있어, 그가 개척한 '조형해석학(일명 靈氣論)'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오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제호다. 기존의 틀이 잘못되었음을 전제로 가능한 제호이기 때문이다.

 

이종덕의 자전적 에세이 <공연의 탄생>의 경우, 제호가 가진 의미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책을 쓴 필자의 인생, 필자의 삶이 대한민국 공연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2014년 기준으로 나이 80세. 이종덕 선생은 지금도 현역 예술공연장 CEO다. 하도 이름이 많이 바뀌어 좀 그렇지만-문광부이다가 문체부이다가 정권마다 오락가락하는 부처의 이름이라- 문공부의 주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훗날에 준 공무원 신분으로도 의 우리나라 주요 공연장의 CEO로, 예술공연계의 개혁의 전도사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 그의 공연예술인생 50년을 담은 책이 <공연의 탄생>이다.

(그리스비극전집, 희극전집, 최근의 <메난드로스 희극> 등 연극의 역사를 한눈에 살피는 원전번역서를 낸 출판사, 뮤지컬 관련 전문서들을 펴낸 숲 출판사에서 나올만한 책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공연의 탄생>은 '대한민국 공연의 탄생'이 실제 내용상의 제호라고 할 것이고, 이런 정리를 이해하면 이 책의 가치를 간파할 수 있다. 공연예술 CEO라고 하지만, 우리나의 공연예술의 역사, 그 시작이 얼마나 미미했고, 오늘날 얼마나 '창대'해졌는지,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른거렸다. 그렇고 그런 자서전 류의 형식을 벗어났다. 80세에도 현직 공연장 CEO(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사장)을 맡고 있는 기획력이 돋보인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아이템을 제시하고, 실현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작년 12월에는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의 '문화 아이콘'으로 살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팔순잔치를 겸한 출판기념회(<생명이 자본이다>)가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듬해인 2014년 1월 21일에는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의 <공연의 탄생>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팔순 잔치를 겸한 행사로 자신이 한때 CEO였던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이었다. 연극, 뮤지컬, 무용, 클래식, 영화계 '별'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수 있는 사람의 출판기념회였다. 한 달 사이 진행된 두 원로들의 출판기념회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0세 시대를 얘기하는 지금, 청춘은 60부터라는 말이 나온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것은 '바람'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 공연예술계의 무대 위에 서거나 그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전공 분야의 노장으로부터 노하우를 얻기 위해, 노년의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잡기 위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인생은 무대고, 무대는 그에게는 인생이다. '인생이 나그네 길'인 것도 맞고,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무대와도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 공연의 탄생과 오늘 대한민국 공연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관련 분야의 길 위에서 선 이들은 그가 자신의 또렷한 이정표임확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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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불법사찰 폭로 뒤 생활고 '장진수 돕기' 모임 꾸린다>(한겨례, 2014.02.26)는 기사를 읽었다.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을 돕기 위한 모임이다. 우리 사회의 내부고발자들이 폭로 이후의 삶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우리 사회 이런 세태가 슬프게 한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적지 않다. 이문옥 감사관, 윤석양 이병, 김용철 변호사, 표창원 교수.. 

나는 이런 소식을 듣을 때마다, 북해의 청어잡이 어부 이야기을 떠올리곤 한다. 생산지의 청어를 살려서 최종 소비지역까지 옮길 때, 청어가 가득한 어항에 메기 한 마리씩을 넣어서 옮기니 거의 대부분이 살아있더라는. 이 아이디어는 동료 어부들도 공유하게 된다. 작년 이맘 때, 안철수 의원 귀국을 두고, 서울대 조국 교수는 SNS에 '한국 정치판의 살찌고 게으른 청어를 긴장하게 하는 메기의 귀환'이라고 올려 화제가 되었다. 과연 그의 새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결실을 낼 것인지?


천병희 선생의 플라톤 대화편 신간이 나왔다. 대표 소피스트들과의 문답을 담은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다. 두 대화편 원전번역으로 나와 있는 상태고, 둘 다 읽었음에도, 새로운 느낌으로 읽었다. 플라톤과의 새로운 그리고 생생한 만남이다. 작년 이맘때 출간된 플라톤국가원전번역이 호평을 받은 바 있거니와 두 대화편을 묶은 파이드로스/메논과 더불어, 플라톤 철학의 정점인 국가를 이해하는 '징검다리'다. 현재 우리말로 잘 풀어놓아, 새로운 모습의 소크라테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말 그대로, 대화를 담은 것들이다. 때론 연극 대본처럼 대화자의 이름이 있고 대화만을 고스란히 담는가 하면, 그래서 내가 말했네. "~~~"와 같이 대화 내용을 정리하는 형식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대화편은 대담의 기록이기에,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 '말맛'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이 맞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천병희 선생이 단독으로 번역출간한 첫 책일 것이다. 이처럼 시학의 번역가답게, 그 시학이 다루고 있는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 작품 전편을 번역했는데,  그리스 비극 전집(전4권), 아리스토파네스희극전집(전2권), 메난드로스희극(1권, 2014년 2월)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제 연극 무대에 올랐던 작품이기도 하고, 새롭게 각색되어 국내외 무대에 오르는 희곡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이들 희곡들은 '레제드라마(상연보다는 읽힐 목적으로 쓴)로서 손색없이 독자들을 찾아간다. 극적인 효과가 반감되지 않고 읽히게끔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드라마들을 우리말로 고스란히 옮긴 번역가의 노하우가 플라톤 대화편 번역에서도 빛나고 있다.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인 폴로스와 칼리클레스까지 세 사람과 1대 3의 토론대결을 벌인다. 거기에다 고르기아스의 추종자들이 대화마당 곳곳에 앉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고르기아스가 청중들을 의식하는 멘트를 날리다가 자신의 발목이 잡는 경우가 있는데, 달리 말하면 대화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스트레스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나는 '소크라테스와 폴로스'의 논쟁을 재밌게 읽었다. 앞서 제시한 내부고발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부패를 추방하고, 투명한 사회를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수사학'은 의술로 분장한 '요리술', 체력단련으로 분장한 '치장술'과 같은 '아첨'일 뿐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단언한다. 이런 수사학이 제대로 사용되는 때는 어느 때인가, 불의에 관한 논의에서 구체화된다.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1)불의를 당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행복하다),

2)불의를 당하는 사람,

3)불의를 행하고 처벌을 받은 사람,

4)불의를 행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


들이 각각 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더욱 불행한 사람이다. 폴로스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불의를 당하는 자가 있다. 그런데 불의를 행하는 것은[위 3)과 4)] 불의를 당하는 것[2)]보다 나쁘다. 그런데 불의를 행하고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4)]은 본성상 가장 나쁜 것이자 나쁨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보다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사는 동안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불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런 불의를 행했더라도 마땅한 대가를 치름으으써 가장 큰 악에서 벗어날 길은 열려 있다. 다만 그 길을 걷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불의를 행했다면, 그 자신이든 자신이 돌보는 사람이든, 최대한 빨리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곳으로 ‘자진해서’ 가야 한다. 아프면 의사를 찾아 병원에 가듯. 그는 재판관에게(우선 경찰서에 가서 자수해야) 가야하며, 불의라는 질병이 고질이 되어 그의 혼(魂)을 치유할 수 없을 만큼 곪게 하는 일이 없도록 서둘러야 한다. 바로 이 순간이, 불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첨쯤으로 여겼던 수사학(연설술)이 제 역할을 할 때다. 수사학이 제대로 쓰일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수사학의 쓰임은 통설을 벗어난다.

 

“자신이나 부모나 동료나 자식이나 조국이 불의를 행할 때 그 불의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수사학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네. 폴로스. 우리는 그와 정반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네. 누구보다도 자신을 맨 먼저 고발하고 두 번째로 가족이든 다른 친구든 수시로 불의를 행하는 자를 고발하되 그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건강해지도록 우리는 그들이 행한 불의를 은폐하지 말고 공개해야 한단 말일세.”(480b 94면)

 

충격을 받은 폴로스~ 그를 통해 당시 아테네인들에게도 소크라테스의 이런 주장이 실상과는 달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환부를 도려내는 시술이 두려워 병을 키울 것인가? 병은 조기에 발견하여 마땅한 시술을 받을수록 빨리 그리고 오롯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잠시 동안의 고통이 따르는 수술이 두려워 병을 키우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질병에 비유하여 폴로스가 받은 충격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방은 아직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 적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재판관에게 가지 않도록 말과 행동으로 온갖 대책을 강구해야 하네. 그리고 그 적이 법정에 나타나면, 우리는 그가 방면되고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네."(481a~b, 95-96면)

 

역설이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밉거든 그가 저지른 불의에 마땅한 처벌을 결코 받는 일이 없이 살아가도록, 오히려 말솜씨를 발휘해서 결코 용서받지 못하도록 수사학을 사용하라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우리 사회의 내부고발자들의 행위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면 결코 해당 조직과 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것일 수 없다. 불의를 행하고 그 불의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치르라고 말하는 이들은 <고르기아스> 소크라테스가 폴로스에게 제시한 역설에 따른다면, 상(賞)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일 수 없다.


2400년 전 플라톤을 읽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다. 2012년 대선과정에 공무원들의 선거개입 등으로 야기된 문제가 해소되고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손들이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사실은 더욱 힘들 것이다. 해방(독립)은 되었지만 그 독립운동이 실패한 운동이기 때문이기에 그들의 삶이 힘든 것이다. 내부고발자의 이후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사회가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는 잘 읽힌다. 그래서 당면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보이고, 그래서 슬프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필독하기를 바란다.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듯이 어려운 세상일수록 고전의 가치는 더욱 빛나며 상대적으로 그 힘은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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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3-29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천병희 선생의 역작 중 하나 플라톤의 대화편 전권을 완역한 플라톤전집 3권에 수록되어 있다.

timeroad 2022-03-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문장만 좀 매끄럽게 다듬는 수즌으로, 당시의 정황을 그대로 전달한다. 카테고리만 변경하였다.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플라톤 대화편의 정점은 <국가>, 작년에 펴낸 <국가>에 이어 국가를 해하는데 필독 대화편인 두 대화편 묶음 출간은 술술 읽히는 우리말 번역만큼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배려라고 할 수 있을 듯.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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