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연설이다. 2005년 6월, 이 대학 졸업생들에게 그는 자신이 사는 동안 깨달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는 인생의 전환점(connecting the dots),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love and loss), 세 번째는 죽음(death)에 대한 것. 이 연설을 하고 6년쯤 지나 그는 세상을 떠난다. 세 번째로 이야기한 그 병, 췌장암 때문이다.

* 필멸의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다 간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과 나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대체로 부모 두 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내 순서가 되었음을 비로소 인정하는 거다. 그는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다. 그의 경험담은, (스티브 잡스에게는 좀 모질지만) 그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한 사례로 남다른 경험이라 하겠다. (대체로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저승을 한번쯤은 다녀와야 그 영웅 반열에 오른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가 그랬으며, 오뒷세우스가 그랬다.) 해서 그 경험은 공유하는 이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된다. 그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삶의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그런 소회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병 때문에 결국 작고했다. 그래서 세 번째 이야기는 물론이고, 연설문 한 문장 한 문장을 숙연한 느낌으로 읽게 된다.

* 이 연설문은 그 자체로 그와 관련된 책이나 수많은 언론보도, 그를 언급하는 강연들과 각종 책에서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였으므로, 나는 이 연설에서 그가 언급하거나 인용한 대목들의 본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출처를 추정하고 ‘의견’을 덧붙이려 한다. 연설문의 우리말 번역은 웹서핑으로 무작위로 수집한 두 종인데, 이들 번역을 비교할 것이나, 결코 번역의 옳고그름, 나음과 그렇지 않음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히며 양해를 구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인용한 연설문 번역은 이 책의 텍스트와 무관함을 밝혀둡니다. 

 

* 그는 우선 자기 인생의 전환점(connecting the dots)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가 지금 세계적인 명문대 학생들의 졸업식장에 와서 연설을 하고 있네요. 그런데 저는 여러분과 달리 대학을 중퇴한 사람입니다. 진솔한 또는 낯선 고백으로 시작되는 연설은 곧이어 드넓은 삶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할 학생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든다. 사실 그는 유난히 등록금이 비싸다는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중퇴했다. 이후 18개월 동안 학적 없는 상태로 대학에 머물면서 듣고 싶은 강의를 청강한다. 정확히는 도강이다. 졸업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더 이상 학사 일정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에 끌리는 강의를 들었던 것이, 훗날 누구나 인정하는 성과를 거두는데 적시적절한 자양분이 되었다. 미혼모 대학원생인 생모에게 잉태된 순간부터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숱한 변곡점이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은 이렇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1)첫 번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첫 번째 이야기는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것입니다.

 

전자(1)는 직역에, 후자(2)는 의역에 가깝다. 이후의 인용문들도 이런 특징들이 유지된다.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혹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삶을 살기 마련이고, 그 순간들을 그는 점들(dots)이라고 한다. 그러나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란 번역은 모호하고, 다분히 또는 역설적이게도 철학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변곡점들이 내게는 있다. 그땐 몰랐지만, 10년쯤 흘러 그 지점들을 연결해보니, 뭔가를 깨달음이 있더라. 나는 오늘 그 이여기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그런 얘기다.

 

생모에게 잉태되는 순간부터 입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생모가 끝내 관철한 입양 조건이 대학 졸업이었음에도 아이는 끝내 대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의 고단했던 삶……. 하지만 호기심과 직관을 믿고 행동한 많은 일들이 결국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이 소중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한 가지 예는 이렇다. "(내가) 만일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결코 이러한 캘리그래피(calligraphy) 강좌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처럼 아름다운 타이포그래피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회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말할 수 있는 , 당시에는 그 지점들이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그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었다. 와 닿는 이야기다. 지금(현재) 지난 삶의 결정의 순간(點)들을 연결해보니 그 순간이,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런 얘기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1)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점들을 앞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2)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지금 청중들인 졸업생들은 갈 길이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청년실업이 10%대에 가까워지는 우리나라 대학의 졸업생들을 생각해보라. 진로가 분명하건 불분명하건 새로운 세상과 만나야 하는 청중들에게 졸업은 중요한 인생의 변곡점이다. 걱정 반 설렘 반일 수밖에 없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1)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뒤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명료해졌습니다.
(2)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 돌아보면 모든 것이 매우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1)다시 말하면, 앞을 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단지 뒤를 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들이 어떻게든 당신의 미래에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다시 말하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익숙한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 네 글자로 대치할 만 이야기 아닌가. 그리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런 것이 참 다행이었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이냐 하는 거다.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말이고, 지금에는 현재(상태)와 이전인 과거의 경험이 포함된다. 미래를 얘기할 수도 없으려니와 미리 이럴 것이다, 라고 예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인생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 시기로 나뉜다. 그러나 ‘과거-현재’와 ‘미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강(江 )이 놓여 있음에 대한 인정, 그 발견이 소중한 것이다.


세네카의 철학에세이 『인생이 왜 짧은가』(이하 '인생 짧음')에는 이와 맥락이 닿는 대목들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허둥지둥 살며 미래에 대한 기대에 젖어 현재에는 싫증을 내지요.(인생 짧음 8-8) 그렇지만 순간순간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쓰고, 하루하루를 마치 자신의 전 인생인 양 꾸려나가는 사람은 내일을 바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지요.(인생 짧음 8-9)“

 

내일(미래)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으려니와, 오늘 이 순간(현재)도 잠시 후면 어제(과거)가 되지 않느냐. 하루하루 알뜰하게 쓰면서 담담하게 살아가라. 그런 얘기다. 세네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가 필사책으로 나와 있다.

 

“세상에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또 있을까요? 그들은 더 잘 살려고 정신없이 분주하지요. 그들은 인생에 대비하기 위해 인생을 보내고 있지요. 그들은 먼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을 세우지만, 인생에서 가장 큰 손실은 뒤로 미루는 것이지요. 뒤로 미루는 것은 다가오는 족족 하루하루를 앗아가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약속하며 현재를 낚아채가지요. 기대(期待)야말로 내일에 매달리다가 오늘을 놓쳐버리게 하니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지요. 그대는 운명의 여신 수중에 있는 것을 탐내다가 그대 수중의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무엇을 원하며, 어디로 향하고 있지요? 미래는 모두 불확실한 법이오. 현재를 살도록 하시오!”('인생 짧음' 9-1 전문)

 

현재를 살라! 많이 슬프고 도저히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현재가 그런 것일지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시간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혹은 과도한 혹은 조급한) 기대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목표나 희망 없이 살라는 얘기? 그건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나를 그리며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들을 놓치지 말라는 얘기다. 또한 나의 과거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고정불변이고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나만의 자산이라는 다음 인용에서 세네카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지만 과거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이미 봉헌된 신성한 부분이며,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우연을 초월하여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어요. 과거는 궁핍에도, 두려움에도, 질병의 엄습에도 동요하지 않지요. 과거는 방해받을 수도 빼앗길 수도 없지요. 과거는 지속적이고 근심 걱정 없는 재산이지요. 현재의 날들은 하루씩 다가오며, 그 하루는 순간순간으로 다가오지요. 그러나 과거의 날들은 그대가 명령하기만 하면 모두 한꺼번에 다가와서는 마음대로 관찰하고 붙잡도록 내버려둘 것이오.“(인생 짧음 10-4)

 

과거는 흘~러갔다! 대중가요의 한 자락처럼 과거는 이미 마침표가 찍힌 문장이며, '불가역적인' 것이다.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든 쓰라린 아픔이든 과거는 내가 잊고자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아픈 기억일수록 당장 쉽게 잊히지 않고, 자신을 오래 괴롭힐 것이다. 그 오랜 앓이를 통해 우리는 단련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 순간의 점들을 반추할 수 있을 때, 연결지어 볼 때 보이는 뭔가가 있단다.

* 스티브 잡스에게 그 기간은 10년가량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무엇을 Y축의 기준으로 하건 X측을 흐르는 시간으로 할 때, 그때그때 찍히는 좌표(점)들이 있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동안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 성찰할 수 있으며,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자산(資産)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명령하기만 하면 모두 한꺼번에 다가와서는 마음대로 관찰하고 붙잡도록 내버려“두는 과거라는 경험 자산을 살피는 대신에 내일과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데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는 것이다.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1)그래서 그 점들이 어떻게든 당신의 미래에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당신(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니 귀에 솔깃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들에게 인생은 잔혹한 기억으로만 남을 뿐이라고. 이런 얘기에는 ‘내 상관할 바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세네카의 주장은 단호하다.  “인간의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수명을 짧게 만들었고, 수명이 넉넉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명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세네카(BC4년경~AD65년)는 1세기 중엽에 활동한 로마의 대표적 지성으로,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오늘날 그는 인류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는 철학에세이들을 상당수 집필한 저술가로 살아 있다. 예수의 탄생으로 기원전과 기원후가 나뉘는데. 생전의 세네카는 자신의 일생 또한 기원 전과 후로 나뉠 것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어쨌든 그는 인류의 연대기에서 가장 확연한 구분점을 포함한 그 시기를 살다 갔다. 그 종교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구약과 신약 『성경』은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일 뿐이다. 또한 스테디셀러,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필독서일 뿐이다. 오늘날의 성경으로 집필되고 출간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지만, 세네카는 예수가 지상에 머문 시간을 포함하는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삶을 성찰한 글들을 남겼다. 오늘날 『명상록』의 저자로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더불어 그는 숱한 명언이나 격언들, 곧 말들의 원 저작권자로 후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철학에세이라고 분류하기는 하나, 오늘날 우후죽순으로 태어나고 도처에서 난전을 형성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원조’라고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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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명연설 모음 고전 필사다이어리-북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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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있다. 아끼는 내 책이다. 절판이라 더욱 그렇다. 양주군 광릉내에 있는 봉선사 주지 스님을 지내고 지금은 당신 말씀대로 '뒷방 늙은이'로 지내신다는 월운 큰스님의 수상집. 달 월(月) 구름 운(雲)을 법호로 따라 수상집 이름은  <달처럼 구름처럼>(대원사 펴냄)이다. 한때 큰스님이 매월 한 꼭지씩 글을 쓰시게 하고, 담당기자임을 빌미로 한 번이라도 더 뵙기 위해 교통 불편을 감수하며 광릉내 봉선사를 찾곤 했다. 그리고도 오랜 세월을 흘렀다.

언급한 책에「<반야심경>은 왜 독송하는가」라는 글이 있다. 서당을 떠올리면 "하늘 천 따 지..." 하듯 불경 가운데 하나이면서 그것도 너무 짧은 경전을 예불을 드릴 때, 독송하곤 하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상당히 곤란한 주제의 글을 청탁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답을 찾는 글이다. 좀 길지만 부분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야심경은 왜 독송하는가」
위의 제목으로 글을 쓰라는 청을 받고 좀 겸연쩍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반야심경을 독송해야 할 긍정적인 이유를 표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여 붓을 들었다. 이 물음에 대해 똑떨어지게 대답할 수 있는 자료는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야부경전들이나 일반 경전에 있는 말씀들에 근거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단일 경전으로서 극히 짧다는 데 있을 것이다. <기신론>에 “혹 어떤 사람은 짧은 문장에 많은 뜻이 들어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것에 의해 깨달음을 얻으려한다” 하였으니 간결한 경전을 좋아하는 근기는 언제나 있기 마련인 것이다. 요즘도 모든 모임에서 다같이 심경 1편을 독송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된 데는 가장 짧은 단일경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심오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심경이 반야부에 속한 경전임은 이미 다 아는 바이지만 그 내용이 방대하여 분량이 600부에 이른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반야부의 주된 사상은 모든 사물에 집착된 상(相)을 여의고 반야 지혜를 터득하여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의 이치를 터득해야 되고, ‘공’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실상(實相)·관조(觀照)·문자(文字)의 세 가지 반야에 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심오하고 방대한 내용이 불과 260여자의 짧은 경 속에 수록되어 있으니, 어찌 압축된 경전이 아니겠는가. 당(唐)의 규기(窺基)는 그의 저서 <반야바라밀다심경유찬>에서 모든 사물을 ‘공’으로 보고 많은 문장에서 비유를 추려내니, 그래서 심경(心經)이라 한다고 했다. ..나아가서는 대승의 심오한 이론이 모두 들어있다니 이 한 권의 경을 읽을 때 그 많은 경을 읽은 공덕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즐겨 독송한다고 본다.
셋째, 공덕의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경전은 참된 말씀을 전달하는 면과 공덕을 이루어주는 면의 두 기능이 있다. 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강조되는가에 따라 골경(骨經)이니 육경(肉經)이니 하는 말이 있다. 사실 특수한 경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인원들은 그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데서 얻어질 공덕에 대하여 더 관심이 가는 것이다. 아니면 조건없이 믿는 데서 얻어지는 공덕에 대하여 더 관심이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뜻을 관하면서 독송하면 그 공덕은 성불에 이르거니와 그냥 독송만 해도 복덕이 헛되지 않다고 미륵송(彌勒頌)에서는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경을 수지하는 공덕은 죽은 이에게도 미친다고 풀이하였으니 누군가 말씀하시기를 “반의 ‘공’ 사상에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으니 집착을 비우고 업장을 소멸하고 원한을 풀고 복이 늘어나고 악도가 소멸한다‘고 하였다.

다음은 스님이 소개하는 <반야 심경>의 에피소드다.
-또 현장 법사가 17년 동안 인도의 138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는데 그간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반야심경을 독송했기 때문이 일이 가능했다고 한다. -또 <반야심경>은 아니지만 내용이 비슷한 <금강경<을 독송하고 지옥문을 연 이야기도 있다. 당의 청허 스님은 젊어서부터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후 어느날 ...(생략) ...이렇게 해서 경전을 독송한 공덕은 이승과 저승에까지도 두루 나타난다고 하셨으니, 왜 독송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명한 것이다.  ...(생략) ... 부처님이 떠나신 지 오래인 말법에는 오품법사(五品法師)가 그 신행을 떠맡고 나가게 되었으니 5품이란, 경전의 내용이나 공덕에 대하여 믿고(1) 받아지니고(2) 읽고(3) 쓰고(4) 설법하는(5) 등 다섯 가지 일을 말한다. 즉 이 다섯가지 방법으로써만이 부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이 독송해야 한다.

끝으로, 수행의 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하여 착실히 독성하는 그 행위 자체가 공덕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망상을 재우는 수행이 된다. 그러므로 삼업을 순화시키는 한 방법으로도 독송해야 한다. -<법륜> 1987. 2.


'절판'이란 언급도(알라딘의 경우도) 없는 책이라 좀 길지만 상당 부분을 인용하였다. '독서'의 한 방법으로 오래된 '필사'가 과연 어떤 의미? 어떤 효과가 있을까? '힐링'이니 '치유'니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으리라. '불경'을 필사하거나(이 부분은 따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 <성경>을 봉독하는 일은 주일마다 이뤄지고 있다. <성경>을 필사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인데, 어쨌거나 '필사'를 얘기할 때 필사는 '종교적인' 일종의 '수행' 차원과 연관이 깊은 듯하다. 그래서 긴 인용을 하였다, 번역 문장의 필사라~ 조금 말설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공을 들여 갈고 다듬은 문장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이 있어, 서양고전 번역을 필사함으로써 더 깊이 있는 독서를 하자는 제안을 책으로 펴낸 것 아니겠는가?

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가까운 어느 강의실. 언젠가 월운 큰스님이 법문하시는 가운데 농을 섞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정부 지원이 들쑥날쑥이라 역경 사업이 역경이다(<한글대장경> 번역사업=역경사업)이라고. "(말이 씨가 된다고) 역경(飜經)사업이라 그런지 늘 역경(逆境)이다". 그런데, 천병희-숲의 서양 고전 원번번역에는 정부 지원이란 일절 없다. 나라의 기간산업과도 같은 번역사업에 국가지원은 어느 정도일까? 오로지 독자들의 호응과 사랑이 역경을 딛고 한 발 한 한 발 내딛게 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남다른 의미다.

거두절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고 거론되는, 페리클레스의 추도사(연설문)를 포함한 명연설을 모은 텍스트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말을 잘하기 위한 하나의 훈련과정 중 하나로, 이 책을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자주 읽은 책이기에, 여기 선정한 연설문들이 어떤 배경에서 한 것인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연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그 보좌진들부터 쓰면서 읽기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국가가 이분들의 자녀를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부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이 이런 시련을 겪은 데 대한 보답으로 고인과 그 자녀들에게 국가가 바치는 상(賞)이자 영관(榮冠)입니다. 용기에 가장 큰 상을 주는 도시에는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 책 <펠리클레스의 추도사>(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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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는 창 안에서 볼 때 더 우울해 보인다."(J. K)

보통은 다른 컴퓨터로 지상파든 공중파든 뭐든 실시간TV나 라디오를 켜놓고 할 일 하지만, 유독 명절 즈음엔 그렇지 않게 된다. 명절 분위기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것. 1인 가구가 나라 전체 가구수의 25%, 1/4에 이르렀다니, 왜 그런지 더 이상 설명은 필요없을 듯. 물론 나머지 75%, 3/4에 속하는 가구의 구성원들, 부모와 자식들의 삶도 마음도 명절이라고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 것일까?

 

"독신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다.

독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B.S.)"

이라는. 그럼에도 추석 날 아침 창(WINDOW)를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명절은 누가 뭐래도 영화 한 편. 그렇게 찾은 영화가 <사도>. 결정적으로 한 편 봐줘야지, 라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잘 봤는데 추석에 보기엔 쫌..." "무거웠다" 등등의 멘트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창 밖으로 나가자. 그렇게 <사도>를 봤는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창 밖을 나가 다른 창을 만나 창 밖의 우울한 세계를 또 보았다는 거다. '창 밖의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책 이야기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67세쯤이던 어느 날, 한 귀족 청년을 만난다. 이름은 메논. 훗날 크세토폰의 『페르시아 원정기』('아나바시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에서 (페르시아 권력 쟁취에 용역으로 나선) 그리스 용병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메논의 노예인 소년 일명,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아뉘토스다. 그는 아테나이의 민주제 지지자로 이 즈음 메논이 머무르던 집주인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메논』의 대화자는 이들 네 사람이다. 그리고 이 대화편의 핵심 주제는 <'미덕'이란 무엇인가?>인데, 정작 미덕의 정의(定義)보다도 미덕의 실체를 규명하는 동안 파생된, 미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 없는 것인가, 하는 논의 중 나온 질문이 흥미로우며 자극적이다. 머잖아 소크라테스가 고소되어(세 명의 고소인 중 하나가 아뉘토스다) 법정에 서게되는 한 계기가 이 대화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래 속에서 알의 껍질을 깨고 갓 때어난 거북의 새끼는 어떻게 어미가 길을 안내하는 것도 아닌데, 곧바로 물을 찾아 이동하는가? 동물의 세계를 다룬 다큐에서 자주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은)는 오늘날 불교의 '윤회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미덕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지, 생후에 습득하는 것,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일관되게 피력한다. 이른바 상기(想起)론을 일관되게 주창한다.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표어가 지금도 시골 농협창고의 벽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필자에게 '상기(想起)'라는 단어는 이런 표어나 반공글짓기, 궐기대회에 '동원되어' 참여한 함성으로 기억되어 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전생의 흔적들(기억들)을 가지고 왔기에 그렇게 태어났고 사는 법도 안다는, 사는 데 필요한 정보도 어떤 계기를 만나 다시 기억해낸다는 얘기다.  그것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대화편 중간에 아뉘토스와 소크라테스는 일대일로 대화하는데, 마치 치킨게임처럼 한치도 물러섬이 없는 팽팽한 대결을 펼친다. 늘 그렇듯이 소크라테스의 완승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에게 자신들의 미덕을 남들에게 가르친 훌륭한 교사가 모두가 아는 인물 중에 있느냐고 근거를 댈 것을 요청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진 미덕을 자기 자식들에게 전수한 사람이 있느냐고.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미덕을 왜 숱한 재산과 여러 자질들은 자식에게 전수하거나 증여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가? 메논과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주를 이루지만 중간에 아뉘토스가 대화에 참여하여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부분, 『파이드로스/메논』의 188면에서 200면에 이르는 21면가량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쫌' 있다.

아뉘토스가 내세우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테미스토클레스다. 영화<300>의 속편. <제국의 부활>에서 '대중적으로' 부활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왜 자신의 삶은 화려했음에도(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뭔가 있었다) 자식에게는 그 '무엇'을 대물림하지(가르치지) 못하였을까를 제시한다. 이렇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우리는 테미스토클레스가 다른 분야는 아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면서 자신이 지혜로웠던 분야에서는 아들을 결코 이웃보다 더 나은 인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미덕이 배울 있는 것이라면 말일세." _『메논』93e

아리스테이데스, 투퀴디데스의 사례를 소크라테스는 또 다른 논거로 제시하고, 아뉘토스는 논박당한다. 결론은 '미덕은 배울 수 없는 것' 그러므로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우리 영화 <사도>를 떠올려본다.

 

"<사도>는 영조와 세자가 어떻게 해서 비극이 펼쳐졌는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인문학적인 메시지와 감동을 주려고 한다. 이준익 감독이 '사도세자'를 영화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인 것."

_<사도>, 폭넓은 감동으로 관객들을 이끌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슬픔', 2015. 09. 22. <헤럴드경제> 소준환 기자

 

기자는 '왜'가 아니고 '어떻게'에 방점을 찍어야 하며, 그것이 인문의 기본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어떻게'가 <뒤주에 가둬서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채 굶어 죽게 했다>는 처형 방식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어떻게' 안에 '왜'가 포함되어 있다. 마치 그동안 장희빈 못지 않은 사극 소재로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 이야기가 충분히 다뤄져 왔고, 이미 관객들은 '왜'에 대하여 나름의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첫째 날 영조의 대사,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  넷째 날의 다음 “이 일은 궁궐 담장을 넘을 수 없는 내 집안의 문제다”라는 대사도 '왜'와 '어떻게'의 경계지음 못지 않게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 사건을 한 집안의 일일 뿐이라고 한정할 수 있다면, 왕조 조선의 신하들은, 백성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라는 말인가.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자식이기에 시작된 비극이 아니었던가. 권력을 남용하여 자식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상속세를 최소한으로 내려고 갖은 편법을 자행하는 재벌가의 편법상속을 우리는 비판할 수 있을까? 역사는 가정할 수 없다는 말처럼, 무의미한 또한 무자비한 '주문'으로 들린다.

부모가 자식에게 부와 권력을 물려주려는 것은 본능이다. '세습을 통해 완성되는 인간 고유의 욕망'에 의해 부모와 자식은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가지는 것. 인간의 본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그리고 물려줄 수 있는 것과 물려줄 수 없는 것을 분간하지 못한 데서 영조와 사도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알게 되면 인간은 곧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어 있다.  특히 아이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던 어른들, 그렇지만 모든 어른들이 후세대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또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플라톤의 『메논』의 사례에서 거론하였듯이, 특히 부모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집안 일일 뿐이라면,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를 그렇게 사랑하고 기대하기에 실망하고 증오하는 일이 벌어졌을리가 없다. 세 개의 명언을 골라보았다.

 

(1)어른은 누구나 가르칠 아이가 필요하다. 그래야 어른도 배우게 된다.(F. C.)

(2)꾸지람 뒤의 격려는 소나기 뒤에 나오는 태양 같은 것.(요한 볼프강 폰 괴테)

(3)조숙한 아이보다 더 지겨운 존재는 그 아이의 어머니.(J. W. M.)

명언들 각각의 함의는 해설하지는 않으련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왜'를 품은) '어떻게' 영조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잘 알 것이므로. 다만, 위 (3)과 관련하여 '애어른'을 등장시키는 TV쇼프로그램(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들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도한 기대는 골깊은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애어른 캐릭터를 소비한다는 것인데, 좀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대화편 얘기로 돌아와, 앞서의 논변에서 밀린 아뉘토스가 남긴 말이 예사롭지 않다.

 

"아뉘토스: ...선생님께서는 남을 헐뜯는 것을 쉬운 일로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는 나는 선생님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이 나라에서는 확실히 남을 이롭게 하기보다는 해롭게 하기가 쉬워요. .."

결국, 아뉘토스는 앞서 대화 참여자들 설명에서 언급하였듯이 3년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3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소크라테스의 변론』참고]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유죄판결을 받게 될 것인데,

 

"내가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밀레토스 때문에 아니고 아뉘토스 때문도 아니며,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시샘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게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나와 함께 끝날 염려는 없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론』28a~b

라고 소크라테스는 변론하지만,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메논』에서의 대화는 당시 아테나이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할 때 '불온한' 의견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재판정에 나와서도 소크라테스는 몇몇 고소인들만이 아니라 (배심원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플라톤은 스승의 행적과 사상을 보전하기 위해 대화편들을 쓴다. 일종의 가늘고 긴 '명예회복' 과정이며 일종의 '복수'다.  한 자연인이 인간들의 결정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잘 스케치하고 있다면, 『메논』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에 해당하는 그 밑그림에 색을 입힌 채색화로 비유할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 등 아테나이 시민들의 자부심을 소크라테스는 가차없이 무너뜨린 것이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숱한 신하들이 곁에 있었지만, 누가 감히 나서서 이를테면 '미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울 수도 없지요. 더구나 자식을 아비가 가르치는 일은 불가합니다, 라는 충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지만, 영조는 너무 오래 살았기에(왕위에 머물렀기에) 비극의 한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닐겠는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부모에게 부모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부모에게 자신의 부모 역할을 계속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세계가 계속 상징적 부모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성숙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차이(어떤 것의 대체물과 그것을 상징해아 하는 것의 차이)에 통달하고, 아무리 아쉬워도 성인에게 어울리는 대체물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로버트 노직,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2장 '부모와 자식'에서)

좀 어렵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지만, 영화 <사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비극이 수습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은, 대리청정 즈음이 아니었을까? 사도세자 스스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왕의 길을 실습할 수는 없었을까? 왜 그 거리 유지에 영조는 실패한 것일까? 정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한 인턴 과정이 아니었던 것일까? 영조의 출신 컴플렉스, 왕권 강화를 위해 탕평책을 쓰면서 신권과의 갈등과 타협의 살얼음판을 걸어온 사람, 늘 신중하고 또 신중하였던 영조로서는 자식이 자신과 같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갈 것에 대해 우려하고 또 우려했을 것이다. 천상 아비다. 어느때보다도 한 자녀 가정이 많은 우리나라, 정책적으로 인구억제책을 쓴 중국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 역할의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자식보다 한 살만 더 살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완성되는 것일까?   

 

"궂은 날씨는 창 안에서 볼 때 더 우울해 보인다." 설마 이런 심각한 영화였어! 영화 <사도>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영화 한 편을 더 보자고 상의하는 장면을 곳곳에서 목격했다. "아버님, 한 편 더 봐도 괜찮으시겠어요"(자식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소리다) 아마도 <사도>에 앞서 개봉한 <베테랑Veteran>이 천몇백만의 흥행성적을 거둔 데에는 '결정적'은 아니라도 <사도>의 우울모드가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 <베테랑>은 과연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였을까?

 

     "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

=곽재구의 시 <사랑이 없는 날> 일부(『와온바다』에 수록). 인용한 시를 참고하여,  제목을 <사이에 슬픔은 없는지>로 미리 정하고 쓰기 시작한 페이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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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이라도 너무 많이 읽거나 자주 듣노라면 잔소리로 다가와 싫어질 때가 있다. 해서 『문장대백과사전』(이어령 편저)을 읽되, 내키는 대로 페이지를 펴서 서너 페이지를 읽다 잠의 나라로 가곤 한다. 그러다가 다음 일화를 발견했다. 괄호 숫자는 필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다. 

 

"(1)옛날 인도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이 공주는 무척 새를 사랑해서 세계에서 예쁘다는 새들은 모두 사들여서 궁전 속이 온통 새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모든 대신도 서로 다투어 공주의 눈에 들려고 다른 일은 않고 새 기르기에만 열심이었다. 그 때문에 나라의 정사는 엉망이 되어 백성들의 불평은 자꾸만 높아졌다. 

(2)그런데도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공주는 지금까지 이 새장보다 아름다운 새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비워두고 한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새장 속에 넣을 만큼 아름다운 새를 구해 오면 많은 상과 여기 있는 새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했다. 

(3)그런데 어느 날 한 늙은이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새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공주가 새를 보니 과연 기막히게 아름다운 새였다. 공주는 많은 상금을 그 늙은이에게 주고 자기의 모든 새는 날려 보냈다. 모든 새가 미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새의 깃털은 매일 낡아 가고 울음소리도 흐려져 갔다. 

(4)그러던 어느 날 이 새가 목욕하고 온 것을 보니, 그것은 제일 미운 까마귀였다. 까마귀에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목에는 은방울을 달아서 좋은 울음소리를 내게 한 것이었다. 공주는 너무도 기가 막혀 그만 울화병으로 죽어 버렸다. (5)개나리는 그 무덤에서 돋아난 나무였다. 까마귀에게 빼앗긴 새장이 너무 아까워 가지를 쭉쭉 뻗어 금빛의 꽃으로 장식할 새장 같은 꽃나무로 변한 것이다."

 

('개나리'50P-5)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본문 내용으로 보아 인도의 전설 가운데 하나인가 보다.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에 수록된 여러 글들, '현재의 생명체 B는 사실 이런저런 사연에 얽힌 A의 다른 모습이다'라는 변신 공식에 충실한 얘기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를 조금 살펴보자. 왕국인 듯한데, 살아있는 새들을 수집하는 공주의 취미 때문에, 나라의 정사가 엉망이 되었다. 왕도 아니고 왕비나 여왕도 아니고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도 있나보다. 왕이 무남독녀 외딸인 공주 하나를 남겨놓고 급히 세상을 떠났나 보다. 그리 이해하자. 그리고 공주는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거나 독신주의자인갑다. 공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는 어떡하지, 선거로 왕을 뽑는 것 아닌 것 같은데.. 둘째, 최고로 가치 있는 하나가 아니면 나름 우수한 다른 새들은 의미가 없다. 이 부분에서 공주는 대(代)를 이를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새는 어쩌면 공주의 배필이 될 남자이고, 최고의 사랑(연인)을 찾는 과정의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공주는 사기꾼이 기획-연출한 제비족을 만났고, 그 충격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공주가 죽어 '개나리'라는 꽃나무로 변신했다는 전설인데,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새가 아니라 '새장'에 있으므로, 나무 개나리의 줄기가 곧은 듯 하면서도 교차하는 그래서 새장처럼 보이는 바로 그 줄기의 생김에 있지, 황금색 개나리꽃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미운 까마귀'와 아주 닮은 사례를 찾아보자. 이솝우화의 '갈까미귀'다.

 

162. 갈까마귀와 새들

제우스는 새들의 왕을 정하려고 새들에게 전원 출석할 날짜를 정해주었다. 제우스는 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새들의 왕으로 정할 참이었다. 새들은 모두 강가에 가서 목욕을 했다. 갈까마귀는 제가 못생긴 것을 알고는 강가로 가서 새들에게서 떨어진 깃털들을 모아 제 몸에 붙이고 입혔다. 그리하여 갈까마귀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새가 되었다. 정해진 날이 되자 새들은 모두 제우스에게 갔다. 갈까마귀도 알록달록하게 치장하고 제우스에게 갔다. 그의 아름다운 외양을 본 제우스는 갈까마귀를 새들의 왕으로 뽑으려 했다. 그러자 새들이 화가 나서 갈까마귀에게서 저마다 제 깃털을 뽑았다. 그래서 그는 깃털을 벗고 도로 갈까마귀가 되었다.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정본)이솝 우화』(숲 펴냄) 162번째 이야기다. 훗날 어느 편집자가 덧붙인 이 우화의 교훈은 *이와 같이 사람도 빚쟁이는 남의 돈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대단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남의 돈을 돌려주고 나면 자신이 도로 옛날의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버린 것을 주웠을 뿐인데(일종의 재활용) '빚'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다른 경쟁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거나 민의를 반영한 절실한 공약을 자신의 깃털인 양 몸에 붙여  화려하게 '연출'해낸 갈까마귀... 첫 이야기나 둘째 이야기나 모두 까마귀의 일종들이다. 그리고 앞 얘기의 상징을 언급하였듯이(20년 동안 왕 오뒷세우스를 기다리는 『오뒷세이아』의 페넬로페와 그 구혼자들을 떠올려보라) 인도의 공주는 어쩌면 아버지 왕의 유지를 받들어 왕권을 잇기 위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으리라.

 

언제 다시 오려나, 바야흐로 내년 총선 이듬해 대선이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왔다. 시끄럽다. 까마귀와 갈까마귀들의 치장이 한창이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유력 대선주자도 아니지만, 할 말을 하는 정치인, 어느 지방도시의 시장이 얼마전 자신의 책 발행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한 말을 우연히(동영상으로) 보다가, 와 닿는 대목이 있어 옮긴다. 

 

“대한민국 정치를 보면요. 정치인들의 수준, 의식수준이 국민의 정치의식을 결코 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국민의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해야)하는 정치인이 훨씬 수준이 낮은 거죠. 대중을 안 믿어요. 오히려 훨씬 수준이 낮아요. 그러다보니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정치를 하되 이것을 농사처럼 해야 되는데,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김 메고 그리고 그 성과를 가을에 거둬야 되는데, 이런 농사를 짓는 게 아니고, 정치를 하는데 남 농사지은 것을 훔치려고 다니거나 가을 되면 여름 내내 팽팽 놀다가 대중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뭔가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아. 그러다가 딱 때만 되면 그것을 훔치려고 해, 아니면 농사 안 짓고 있다가 가을 되면 어디 혹시 열매 맺힌 거 없나, 약탈경제 이런 거 하고 있는 수준인 것 같아요, 평소에 투자해야 해요. 저는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2015년 9월 5일. 성남시청 어느 공간에서 진행된, 『꼬리를 잡아 몸통을 흔들다』발간에 따른 행사, “카페트(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친구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이 한 말('팩트TV' 동영상을 보며 해당 부분을 옮김)이다. 까마귀와 갈까마귀의 차이는 '검색'해보기로 하고, 암튼 인도에는 한때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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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방 2개월이 된 드라마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한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아서이다. 드라마 초반의 한 장면 덕분에 나는 이 드라마 전편을 어떤 식으로건 보았다. SBS수목드라마 <가면>(2015.05.27.~2015.07.30) 얘기다. 확인해보니 드라마 2회의 초반부(19분쯤),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시달리는 서은하(수애 분)의 가족들이 사채업자들의 방문으로 곤혹스러워 하는 장면이다. 업자 심사장(김병옥 분)이 하는 말이다.

 

"심사장: 소크라테스 성님께서 약 먹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십니까? 어이 친구 내가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는데, 대신 갚아줄 수 있겠나. 아 감동 아닙니까. 감동! 죽어가면서도 빚을 갚겠다는 이~ 아름다운 마인드. (부하 둘까지 셋이 박수) (이)얘기 듣고 느끼는 것 없습니까?"

 

이미 주연을 꿰찬 빛나는 조연급 배우들이 더러 있지만,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빛나는 조연으로 주로 거친 역할을 맡아온 배우 김병옥. 그가 누구인지, 얼굴을 연결해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대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오지 않을까 싶다.

이 에피소드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즉각 처형이 진행되었지만, 축제가 진행중일 때는 처형을 연기한다는 관례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한 달 가까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날은 마침내 처형이 진행되는 날, 여러 대화편에서 보았듯이 친구와 제자들, 말하자면 측근 중의 측근들이 감옥을 찾아와 그들과 더불어,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 마지막 토론을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숨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 크리톤에게 부탁하는 말을 하는데, 바로 그 상황을 드라마는 인용한 것이다. 이 대목을 원전번역으로 읽어보자.

 

냉기가 어느새 허리 있는 데까지 올라오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을 벗기고-그분께서는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까요-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실상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네"하고 크리톤이 말했소.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파이돈」118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의신이다. 어쨌거나 성인으로 추앙받는 SO선생께서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봐준 의사에게 보답하는 마음의 빚을 거론한 것이다. 성인이 최후에 남긴 말치고는 아이러니랄까, 위트가 있다. 처형을 대기하는 동안, 감옥을 찾은 크리톤은 친구 소크라테스에게 국외로 탈출(당시에는 망명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을 권하지만, 그 유명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요지의 논변을 펼친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크리톤」이 그 대화편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날의 대화 「파이돈」은 위에서 보았듯이 극적인 장면으로 마감되지만 필멸의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리톤」과 비교할 때) 상당히 무겁다. 그리고 심오하다. 몸은 필멸이지만 혼은 불멸이라는 혼불멸론,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특정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이데아론이 그것이다.

 

도서출판 숲에서 번역가 천병희의 원전번역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는데, 천 선생이 플라톤의 대화편 번역에 몰입하게 만든 첫번째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에 「파이돈」이 수록되어 있다. 소송에 계류되어 재판에 앞서 법정에 출두하는 날 진행된 대화를 담은  「에우튀프론」(경건에 대하여)이 있지만,  한 권으로 묶인 4편의 대화편 가운데 「향연」을 제외한 세 편은 대철학자의 생애 마지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고,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사랑(우정과 우애 혹은 친애를 포괄하는 개념)에 대해 논하는 「향연」도, 왜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지,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화편이다.

앞서 악역 조연으로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배우 김병옥(만54세)에 대해 언급한 바 있거니와 채무자의 입장에서는 또한 시청자 중에서도 그런 채무와 관련된 쓰린 기억을 갖고 있거나 현재진행형일 경우를 감안하면, 결코 예사롭지 않는 장면에서 필이 꽂힌 것은 다분히 「파이돈」이란 텍스트를 읽은 사람으로서 역시 해당 텍스르를 읽고 작품에 반영한 독자(드라마 작가와 여러 시청자들)를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혹은 동질감이 아니겠는가,

 

"같은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맺은 우정처럼 빠르게 뭉치는 우정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것." 

미국 작가 어빙 스턴(1903~1989)이 남긴 말이다. 고전을 읽는 독서모임을 통해 쌓은 친교가 얼마나 강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지를 예단해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한다. 어빙 스턴은 전기문학의 신경지를 개척한 작가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교수하기도 했으나, 고흐에 심취하여 그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20세기 전기문학의 획을 그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소설처럼 윤색해 실감을 준 전기 『삶에 대한 열망 Lust for Life』(1934)이 그 작품이다.

결국 사채를 쓸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기구한 사연들이 많다. 그 슬픔과 분노가 너무 크고 깊다. 치솟은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사회 생활을 채 시작해보기도 전에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인 나라, 청년실업의 근본 문제는 해결할 의지가 없고, 그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무슨 기금을 만든다고 힘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채무를 탕감해서 신불(신용불량자)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국민행복기금 어쩌고 하는데, 그것을 빌미로 보이스피싱이란 독버섯이 무섭게 자라고 있는 나라, 그 상태를 감안하면 기가 막힌 상황에서 드라마의 한 대목을 보고 쓴웃음을 짓는다.(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67편(2부) 2015년 추노(推奴) 이야기(1시간 15분. http://www.podbbang.com/ch/7657) 참고.

 

드라마 <가면> 극본을 쓴 방송작가 최호철은 사채업자 심사장의 캐릭터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놓았다.

 

심사장(남, 40대)  사채업자:

어릴 적 어머니가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결국 받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고, 그 뒤로 고아로 힘들게 자랐다는 비극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연을 채무자의 배를 갈라서라도 돈을 받아내야 하는 대의명분으로 삼는다. 굉장한 다혈질 성격으로 자기 분에 못이겨 폭발할 때도 있지만 평상시엔 꽤 젠틀하고 진지하다. 

가방끈이 짧은 콤플렉스를 명언집을 읽으며 극복했다. 

때론 사람들에게 꽤 그럴싸한 명대사를 날리기도 한다. 그게 다 돈과 연관 돼서 문제지만.

 

어쨌거나 그렇고 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슬쩍 보다가 만난 한 대목에서, 시작된 글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가방끈이 짧은 콤플렉스를 명언집을 읽으며 극복했다."고 하였으나, 사채를 빌미로 괴롭히는 쪽이나 사채에 시달리는 쪽이나 고명하신 소크라테스 선생의 최후를 다룬 「파이돈」의 전체 텍스트를 읽는다면, 좀더 현명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 한 자락을 깔아본다. 실제로 명언집(문장백과사전)에 닭 한 마리 어쩌고 하는 부분은 많이 뒤틀린 채로 소개되어 있다.  「파이돈」전체를 읽지 않고서는 칠 수 없는 대사다.


흔치 않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는 생명체는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생명체로 불린다는 거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석가모니도 모두 인간으로 살았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책,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가 세 성인의 최후를 비롯하여 그들의 닮은점에서 배울 것을 잘 짚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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