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라도 너무 많이 읽거나 자주 듣노라면 잔소리로 다가와 싫어질 때가 있다. 해서 『문장대백과사전』(이어령 편저)을 읽되, 내키는 대로 페이지를 펴서 서너 페이지를 읽다 잠의 나라로 가곤 한다. 그러다가 다음 일화를 발견했다. 괄호 숫자는 필자가 임의로 부여한 것이다. 

 

"(1)옛날 인도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이 공주는 무척 새를 사랑해서 세계에서 예쁘다는 새들은 모두 사들여서 궁전 속이 온통 새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모든 대신도 서로 다투어 공주의 눈에 들려고 다른 일은 않고 새 기르기에만 열심이었다. 그 때문에 나라의 정사는 엉망이 되어 백성들의 불평은 자꾸만 높아졌다. 

(2)그런데도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공주는 지금까지 이 새장보다 아름다운 새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비워두고 한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새장 속에 넣을 만큼 아름다운 새를 구해 오면 많은 상과 여기 있는 새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했다. 

(3)그런데 어느 날 한 늙은이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새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공주가 새를 보니 과연 기막히게 아름다운 새였다. 공주는 많은 상금을 그 늙은이에게 주고 자기의 모든 새는 날려 보냈다. 모든 새가 미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새의 깃털은 매일 낡아 가고 울음소리도 흐려져 갔다. 

(4)그러던 어느 날 이 새가 목욕하고 온 것을 보니, 그것은 제일 미운 까마귀였다. 까마귀에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목에는 은방울을 달아서 좋은 울음소리를 내게 한 것이었다. 공주는 너무도 기가 막혀 그만 울화병으로 죽어 버렸다. (5)개나리는 그 무덤에서 돋아난 나무였다. 까마귀에게 빼앗긴 새장이 너무 아까워 가지를 쭉쭉 뻗어 금빛의 꽃으로 장식할 새장 같은 꽃나무로 변한 것이다."

 

('개나리'50P-5)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본문 내용으로 보아 인도의 전설 가운데 하나인가 보다.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에 수록된 여러 글들, '현재의 생명체 B는 사실 이런저런 사연에 얽힌 A의 다른 모습이다'라는 변신 공식에 충실한 얘기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를 조금 살펴보자. 왕국인 듯한데, 살아있는 새들을 수집하는 공주의 취미 때문에, 나라의 정사가 엉망이 되었다. 왕도 아니고 왕비나 여왕도 아니고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도 있나보다. 왕이 무남독녀 외딸인 공주 하나를 남겨놓고 급히 세상을 떠났나 보다. 그리 이해하자. 그리고 공주는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거나 독신주의자인갑다. 공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는 어떡하지, 선거로 왕을 뽑는 것 아닌 것 같은데.. 둘째, 최고로 가치 있는 하나가 아니면 나름 우수한 다른 새들은 의미가 없다. 이 부분에서 공주는 대(代)를 이를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새는 어쩌면 공주의 배필이 될 남자이고, 최고의 사랑(연인)을 찾는 과정의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공주는 사기꾼이 기획-연출한 제비족을 만났고, 그 충격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공주가 죽어 '개나리'라는 꽃나무로 변신했다는 전설인데,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새가 아니라 '새장'에 있으므로, 나무 개나리의 줄기가 곧은 듯 하면서도 교차하는 그래서 새장처럼 보이는 바로 그 줄기의 생김에 있지, 황금색 개나리꽃은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미운 까마귀'와 아주 닮은 사례를 찾아보자. 이솝우화의 '갈까미귀'다.

 

162. 갈까마귀와 새들

제우스는 새들의 왕을 정하려고 새들에게 전원 출석할 날짜를 정해주었다. 제우스는 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새들의 왕으로 정할 참이었다. 새들은 모두 강가에 가서 목욕을 했다. 갈까마귀는 제가 못생긴 것을 알고는 강가로 가서 새들에게서 떨어진 깃털들을 모아 제 몸에 붙이고 입혔다. 그리하여 갈까마귀는 모든 새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새가 되었다. 정해진 날이 되자 새들은 모두 제우스에게 갔다. 갈까마귀도 알록달록하게 치장하고 제우스에게 갔다. 그의 아름다운 외양을 본 제우스는 갈까마귀를 새들의 왕으로 뽑으려 했다. 그러자 새들이 화가 나서 갈까마귀에게서 저마다 제 깃털을 뽑았다. 그래서 그는 깃털을 벗고 도로 갈까마귀가 되었다.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정본)이솝 우화』(숲 펴냄) 162번째 이야기다. 훗날 어느 편집자가 덧붙인 이 우화의 교훈은 *이와 같이 사람도 빚쟁이는 남의 돈을 쥐고 있는 동안에는 대단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남의 돈을 돌려주고 나면 자신이 도로 옛날의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버린 것을 주웠을 뿐인데(일종의 재활용) '빚'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다른 경쟁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거나 민의를 반영한 절실한 공약을 자신의 깃털인 양 몸에 붙여  화려하게 '연출'해낸 갈까마귀... 첫 이야기나 둘째 이야기나 모두 까마귀의 일종들이다. 그리고 앞 얘기의 상징을 언급하였듯이(20년 동안 왕 오뒷세우스를 기다리는 『오뒷세이아』의 페넬로페와 그 구혼자들을 떠올려보라) 인도의 공주는 어쩌면 아버지 왕의 유지를 받들어 왕권을 잇기 위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으리라.

 

언제 다시 오려나, 바야흐로 내년 총선 이듬해 대선이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이 왔다. 시끄럽다. 까마귀와 갈까마귀들의 치장이 한창이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유력 대선주자도 아니지만, 할 말을 하는 정치인, 어느 지방도시의 시장이 얼마전 자신의 책 발행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한 말을 우연히(동영상으로) 보다가, 와 닿는 대목이 있어 옮긴다. 

 

“대한민국 정치를 보면요. 정치인들의 수준, 의식수준이 국민의 정치의식을 결코 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국민의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해야)하는 정치인이 훨씬 수준이 낮은 거죠. 대중을 안 믿어요. 오히려 훨씬 수준이 낮아요. 그러다보니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정치를 하되 이것을 농사처럼 해야 되는데,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김 메고 그리고 그 성과를 가을에 거둬야 되는데, 이런 농사를 짓는 게 아니고, 정치를 하는데 남 농사지은 것을 훔치려고 다니거나 가을 되면 여름 내내 팽팽 놀다가 대중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뭔가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아. 그러다가 딱 때만 되면 그것을 훔치려고 해, 아니면 농사 안 짓고 있다가 가을 되면 어디 혹시 열매 맺힌 거 없나, 약탈경제 이런 거 하고 있는 수준인 것 같아요, 평소에 투자해야 해요. 저는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2015년 9월 5일. 성남시청 어느 공간에서 진행된, 『꼬리를 잡아 몸통을 흔들다』발간에 따른 행사, “카페트(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친구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이 한 말('팩트TV' 동영상을 보며 해당 부분을 옮김)이다. 까마귀와 갈까마귀의 차이는 '검색'해보기로 하고, 암튼 인도에는 한때 공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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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방 2개월이 된 드라마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한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아서이다. 드라마 초반의 한 장면 덕분에 나는 이 드라마 전편을 어떤 식으로건 보았다. SBS수목드라마 <가면>(2015.05.27.~2015.07.30) 얘기다. 확인해보니 드라마 2회의 초반부(19분쯤),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시달리는 서은하(수애 분)의 가족들이 사채업자들의 방문으로 곤혹스러워 하는 장면이다. 업자 심사장(김병옥 분)이 하는 말이다.

 

"심사장: 소크라테스 성님께서 약 먹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십니까? 어이 친구 내가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는데, 대신 갚아줄 수 있겠나. 아 감동 아닙니까. 감동! 죽어가면서도 빚을 갚겠다는 이~ 아름다운 마인드. (부하 둘까지 셋이 박수) (이)얘기 듣고 느끼는 것 없습니까?"

 

이미 주연을 꿰찬 빛나는 조연급 배우들이 더러 있지만,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빛나는 조연으로 주로 거친 역할을 맡아온 배우 김병옥. 그가 누구인지, 얼굴을 연결해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대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오지 않을까 싶다.

이 에피소드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즉각 처형이 진행되었지만, 축제가 진행중일 때는 처형을 연기한다는 관례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한 달 가까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날은 마침내 처형이 진행되는 날, 여러 대화편에서 보았듯이 친구와 제자들, 말하자면 측근 중의 측근들이 감옥을 찾아와 그들과 더불어,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 마지막 토론을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숨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 크리톤에게 부탁하는 말을 하는데, 바로 그 상황을 드라마는 인용한 것이다. 이 대목을 원전번역으로 읽어보자.

 

냉기가 어느새 허리 있는 데까지 올라오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을 벗기고-그분께서는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까요-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실상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네"하고 크리톤이 말했소.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파이돈」118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의신이다. 어쨌거나 성인으로 추앙받는 SO선생께서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봐준 의사에게 보답하는 마음의 빚을 거론한 것이다. 성인이 최후에 남긴 말치고는 아이러니랄까, 위트가 있다. 처형을 대기하는 동안, 감옥을 찾은 크리톤은 친구 소크라테스에게 국외로 탈출(당시에는 망명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을 권하지만, 그 유명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요지의 논변을 펼친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크리톤」이 그 대화편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날의 대화 「파이돈」은 위에서 보았듯이 극적인 장면으로 마감되지만 필멸의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리톤」과 비교할 때) 상당히 무겁다. 그리고 심오하다. 몸은 필멸이지만 혼은 불멸이라는 혼불멸론,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특정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이데아론이 그것이다.

 

도서출판 숲에서 번역가 천병희의 원전번역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는데, 천 선생이 플라톤의 대화편 번역에 몰입하게 만든 첫번째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에 「파이돈」이 수록되어 있다. 소송에 계류되어 재판에 앞서 법정에 출두하는 날 진행된 대화를 담은  「에우튀프론」(경건에 대하여)이 있지만,  한 권으로 묶인 4편의 대화편 가운데 「향연」을 제외한 세 편은 대철학자의 생애 마지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고,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사랑(우정과 우애 혹은 친애를 포괄하는 개념)에 대해 논하는 「향연」도, 왜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지,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화편이다.

앞서 악역 조연으로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배우 김병옥(만54세)에 대해 언급한 바 있거니와 채무자의 입장에서는 또한 시청자 중에서도 그런 채무와 관련된 쓰린 기억을 갖고 있거나 현재진행형일 경우를 감안하면, 결코 예사롭지 않는 장면에서 필이 꽂힌 것은 다분히 「파이돈」이란 텍스트를 읽은 사람으로서 역시 해당 텍스르를 읽고 작품에 반영한 독자(드라마 작가와 여러 시청자들)를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혹은 동질감이 아니겠는가,

 

"같은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맺은 우정처럼 빠르게 뭉치는 우정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것." 

미국 작가 어빙 스턴(1903~1989)이 남긴 말이다. 고전을 읽는 독서모임을 통해 쌓은 친교가 얼마나 강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지를 예단해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한다. 어빙 스턴은 전기문학의 신경지를 개척한 작가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교수하기도 했으나, 고흐에 심취하여 그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20세기 전기문학의 획을 그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소설처럼 윤색해 실감을 준 전기 『삶에 대한 열망 Lust for Life』(1934)이 그 작품이다.

결국 사채를 쓸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기구한 사연들이 많다. 그 슬픔과 분노가 너무 크고 깊다. 치솟은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사회 생활을 채 시작해보기도 전에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인 나라, 청년실업의 근본 문제는 해결할 의지가 없고, 그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무슨 기금을 만든다고 힘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채무를 탕감해서 신불(신용불량자)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국민행복기금 어쩌고 하는데, 그것을 빌미로 보이스피싱이란 독버섯이 무섭게 자라고 있는 나라, 그 상태를 감안하면 기가 막힌 상황에서 드라마의 한 대목을 보고 쓴웃음을 짓는다.(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67편(2부) 2015년 추노(推奴) 이야기(1시간 15분. http://www.podbbang.com/ch/7657) 참고.

 

드라마 <가면> 극본을 쓴 방송작가 최호철은 사채업자 심사장의 캐릭터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놓았다.

 

심사장(남, 40대)  사채업자:

어릴 적 어머니가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결국 받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고, 그 뒤로 고아로 힘들게 자랐다는 비극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연을 채무자의 배를 갈라서라도 돈을 받아내야 하는 대의명분으로 삼는다. 굉장한 다혈질 성격으로 자기 분에 못이겨 폭발할 때도 있지만 평상시엔 꽤 젠틀하고 진지하다. 

가방끈이 짧은 콤플렉스를 명언집을 읽으며 극복했다. 

때론 사람들에게 꽤 그럴싸한 명대사를 날리기도 한다. 그게 다 돈과 연관 돼서 문제지만.

 

어쨌거나 그렇고 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슬쩍 보다가 만난 한 대목에서, 시작된 글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가방끈이 짧은 콤플렉스를 명언집을 읽으며 극복했다."고 하였으나, 사채를 빌미로 괴롭히는 쪽이나 사채에 시달리는 쪽이나 고명하신 소크라테스 선생의 최후를 다룬 「파이돈」의 전체 텍스트를 읽는다면, 좀더 현명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 한 자락을 깔아본다. 실제로 명언집(문장백과사전)에 닭 한 마리 어쩌고 하는 부분은 많이 뒤틀린 채로 소개되어 있다.  「파이돈」전체를 읽지 않고서는 칠 수 없는 대사다.


흔치 않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는 생명체는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생명체로 불린다는 거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석가모니도 모두 인간으로 살았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책,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가 세 성인의 최후를 비롯하여 그들의 닮은점에서 배울 것을 잘 짚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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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의식은 기쁨이 아닌 고통에서 생긴다. 누구나 즐거운 일을 함께 한 사람보다 고통의 순간을 함께 나눈 사람에게 더 친근감을 느낀다. 불행한 시기에 사람들은 연대의식을 느끼며 단결하지만, 행복한 시기엔 분열한다. 왜 그럴까? 힘을 합해 승리하는 순간, 각자 자기 공적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318면, <연대의식> 중)


당연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지. 아무렴, 그럴 거야. 우리 마음도 항아리와 같아서 밑바닥이란 것이 있다면, 그 마음의 밑바닥을 채운 뭔가가, 힘겨운 시절을 함께 보내며 쌓은 연대 의식이란 것이 조금은 남아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그들은 왜 이럴까? 여기서 ‘그들’은 우리나라의 제1야당 새정지민주연합의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이해관계자들 혹은 이해당사자들이다. 그리고 지금은 2015년 5월 16일이다. 몇 분이나 지금 이 글을 읽을지, 읽는다 해도 그 때가 언제쯤일지 알 수 없다. 4.29 국회의원 보궐선거 패배의 책임론을 앞세우며  당 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는 같은 당의 국회의원들, 그리고 원로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실망스럽다. 누군가 이 글을 읽는 때가 이러한 현 상황, 사태가 분명한 현 국면이 수습된 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꼭 이번 사태에만 맞춤한 제언이 아닐 것이 확실하므로 쓴다.


어쨌거나 지금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선거에서 이겨 공(功)을 다투는 것도 아니고, 왜 졌는가? 실패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다가오는 본선(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되풀이되는 패배의 사슬을 끊기 위해 고육책을 내야 하는 때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반성의 과정은 이하생략하고 당 대표 사퇴만이 그 해결책이란 결론을 서둘러 내렸다. 그리고 뽕나무에 올라 든든한 가지를 밟고서 오디 열매를 털듯 당 대표를 흔들고 있다. 이러이러하므로 당 대표가 사퇴해야 한다, 귀납법의 논증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나. 당 대표 사퇴 말고는 길이 없다! 결론을 앞세운 연역의 논증을 하고 있는 듯한데, 내세우는 그 논거라는 것이 빈약하기가 거지 같다. 설득력이란 거의 없다. 이현령비현령이다. 돌아보면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 등 시급하고 절실한 국정 현안들을 미루고 전국 주요도시를 도는 ‘흥행’ 효과까지 거두며 뽑은 당대표가 아니었던가? 그 과정이 그렇고 그런 퍼포먼스일 뿐이었던가? 또한 이른바 당심(당원 투표)과 국민여론을 반영한 후보 경선을 통해 해당 지역구 선거에 나설 네 명의 국회의원 후보자를 뽑지 않았던가. 전략 공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년의 본선(총선)에도 적용될 경선 원칙에 따라 후보를 선출했다. 호재도 있고 예상치 못한 악재도 있었다. 결국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렇다면 먼저 그러한 성적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원인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규명해보시라, 그런 말씀이다. 원칙만 앞세워 유연하지 못하였던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인 듯싶다. 그러나 예외를 인정하는 원칙이란 없다. 다가올 총선에서도 국민 여론도 반영하는 경선을 후보자를 결정할 것인데, 그때에도 원칙을 고수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다. 현역 국회의원들이 훨씬 유리할 것인데, 의정활동은 물론이고 지역구 살림을 잘 챙기고 민심을 제대로 다독거렸다면 경선 걱정은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경선 과정이 총선 승리 가도에서 차질을 줄 것으로 예견되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가졌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토론을 통해 중지(衆智)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지만, 깃발만 꼽으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인 지역구들의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깃발만 꼽으면 '따 놓은 당상'인 지역구들의 공천권을 행사하고 싶다고요?

'호남민심'이 어떻고 '광주정신'이 어떻고 하는 정치인들의 말을 듣노라면 저마다 아전인수 해석이라 씁쓸함을 느낀다. 언제까지 잡은 물고기 타령을 할 것인가? 내일모레면 5.18 광주민중항쟁 35주기다. 국가보훈처는 올해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할 수 없다느니, 합창 정도가 알맞다느니 깨알 <보도자료>까지 내며 주장을 일삼는데 그런 억지가 따로 없다. 현행 헌법에는 5월 광주와 6월 항쟁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5월에서 6월로 가는 길 위에서 목청껏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비록 제창할 노래까지는 아니라도, 그 의미를 폄하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 여야 국회의원 대다수가 이 노래의 기념곡 지정에 찬성표를 던진 이유이지 않겠나! 내일 모레 5.18추모일에 제1야당의 깃발 아래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격동의 현장들을 떠올리시기를. 베르베르의 말처럼 힘든 시기에 힘없는 우리를 묶어주는 노래가 아니었던가! 제1야당의 강령에도 5월 광주와 6월 항쟁의 연대정신이 깃들어있지 않겠는가? ‘제창(齊唱)’도 여러 사람이 부르는 노래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제창(諸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모두 제(諸)가 아니라 가지런할 제(齊)의 제창이다. 합창(合唱)과 달리 동일한 선율을 두 사람 이상이 동시에 같은 음으로 노래하니까 ‘가지런하게 부른다’는 의미의 제창이다(권승호 선생의 <한자어휘사전>을 참고했다).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곡이라면 모를까 제창곡은 될 수 없다고 한 진의가 무엇인지는 따지고 싶지 않다. 최소한 호남정신 운운하는 제1야당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 깃든 본래의 의미를 되새기는 제창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나마 잘 맞지도 않은 화음으로 합창(合唱)하면서, 그것이 제창((齊唱)인 듯 호도하는 야당의 불협화음을 보고 싶지 않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는 제창(齊唱)을 하세요!

지금이 ‘자기 공적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면서 당과 당의 대표를 흔들어야 하는 때인가?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는데, 보다 큰 그림을 그리면서 연대할 때가 아니겠는가? 2500년도 더 된 오래된 고전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지만, 지금 소개하는 고전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들 모습을 비춰보는 말 그대로의 자숙(自肅)을 하시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에게 국가는 없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는 있다. 이 대화편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지금 이 나라가 입헌군주국인 줄 아시는 분이 계시는데, 혹여라도 난독으로 철학자가 통치하는 왕도정치일 뿐이라고, 먼 나라의 옛날 옛적의 이야기라고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으면 싶다. 철인(哲人)이란 철학자다. 통치 철학을 갖춘 국가의 지도자쯤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야당만이 아니라 여야를 통틀어 다음 대선 국면이 되면, 우리나라를 제대로 이끌 통치철학을 갖춘 후보자가 나타나 이 나라를 좋은 나라로 이끄는 말 그대로 행복의 나라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가 누구인지는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국가는 없다. 하지만 플라톤의 『국가』는 살아 있다.
『국가』 6권 초반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철인 또는 철학자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에 더하여 실무 경험을 쌓는다면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용기, 정의 같은 미덕(arete)을 구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고 이해가 빠르고 기억력이 좋고 성실하고 절제 있고 도량이 넓고 우아하고 세련되어야 한다.[6권 485a] 이런 자질을 갖춘 대통령 후보를 우리는 맞이할 수 있을까? (필자는 결코 그가 누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꼬박 꼬박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어느 정당에도 가입해있지 않으며, 가입해본 일조차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고,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자격을 갖춘 철학자(=통치자)가 있다고 치자.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얘기한다. “그러나 이런 자질을 갖춘 철학자를 국민들은 알아보지 못한다.”고. 뿐만 아니라, 우수한 자질을 갖춘 철학자들은 국가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여러 척의 배나 한 척의 배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비유하여, 국가의 지도자를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저마다 리더가 되겠다고 나서는 어지러운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배는 한 나라(국가), 조타술을 가진 진정한 키잡이는 자격을 갖춘 국가 지도자(혹은 한 조직의 리더), 그리고 배의 주인인 선주(船主)는 국민 혹은 한 조직의 구성원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국회의원은 선출직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이란다. 이때에 해당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선주’가 될 것이다.

 

”(여러 척의 배나 한 척의 배 위에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게.) 선주는 배를 타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키가 크고 힘이 세지만, 귀가 조금 멀고 시력도 약한 편이며 항해술에 관한 지식도 비슷한 형편이네. 또한 선원들은 키 잡는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기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의 이름을 댈 수도 없으며, 언제 배웠는지 배운 시기조차 밝힐 수 없으면서도 저마다 자기가 키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키 잡는 일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있네. 게다가 그들은 이 기술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누구든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하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선주를 둘러싸고는 키를 자기들에게 맡겨달라고 별의별 짓을 다 하며 간청하고 있네. 선주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면 이들은 죽여 없애버리든가 배 밖으로 내동댕이쳐버리고, 마음씨 좋은 선주를 약을 먹이거나 술에 취하게 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묶은 다음 배를 장악하고는 배 안의 물건들을 제 마음대로 써버리네. 그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그런 자들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항해를 계속하네. 게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선주를 설득하거나 강제하여 지배권을 장악할 때 능수능란하게 도와준 사람을 항해에 능한 사람이니, 키를 잡을 만한 사람이니, 배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니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쓸모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네. 그들은 진정한 키잡이가 진실로 배 한 척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자면, 해[年], 계절, 하늘, 별, 바람은 물론이요 그 밖에도 이 기술에 속하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네. 그가 키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은 그가 키를 잡는 것을 사람들이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그들은 이런 기술과 수련, 즉 조타술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 일이 배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자네는 이런 상태에 놓인 배의 선원들은 진정한 키잡이를 실제로 점성가라든가, 수다꾼이라든가, 무용지물이라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천병희 옮김, 『국가』 6권 448b~489a)

 

이상의 인용이면 충분하다. 베르베르는 앞의 글(<연대 의식>)에서 친한 사람들을 갈라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공동의 성공을 안겨주는 것이라며 묻는다.(괄호 안은...)
(1)얼마나 많은 가족이 상속을 둘러싸고 사이가 벌어지는가?(명절 때의 가족모임을 생각해 보라, 모든 가족들의 만남이 화기애애한 것은 아니다.) (2)성공을 한 다음에 로큰롤 그룹이 함께 남아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얼마 전에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내한공연을 마치고 갔다) (3)얼마나 많은 정치단체들이 권력을 잡은 후 분열하는가?(참여정부 시절의 당신들의 모습은 이해할 수 있다) 베르베르는 “벗들과의 우정을 간직하려면, 자기들이 성공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실망한 일, 실패한 일을 자꾸 들먹이는 편이 낫다”고 한다. 지금 아베의 일본을 보면 어느 때보다도 속이 뒤틀리지만,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그들의 책을 읽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간담이 서늘하다. 4.29 재보선에서 제1야당은 왜 실패하였는가? 비공개라도 좋으니 끝장토론을 하고, 제대로된 백서 한 권을 낼 의향은 없는 것인가?

 

 4.29 재보선에서 제1야당은 왜 실패하였는가? 끝장토론하고, 백서 한 권을 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유산으로 남겼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이 말과 글로 제기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갖춰야할 미덕들을 하나하나 총정리 한 책이다. 그런데 이런 미덕들이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작동하려면 우애(친애)란 덕목이 필요하다. <윤리학> 8권과 9권 그리고 책의 앞부분에서 우애(친애/우정)를 강조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애의 개념을 국가경영에 대입한 책이 그의 『정치학』이다. 정치적인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제발 공부 좀 하시라. 

어원적으로 보면, <공감 sympathie>이란 말은 <함께 고통을 겪다>는 뜻의 그리스어. soun pathein)에서 유래한다. 마찬가지로 동정compassion)이란 말 또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라틴어<cum patior>에서 나온 것이다.”(앞의 베르베르의 책 <연대 의식>)

그레이트 킹 세종은 백성들의 문맹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서로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당면한 어려움을 공감하여 <연대 의식>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베르베르의 또 다른 글에서 확인하는 시사점도 가슴 저리게 한다. '분봉(分蜂)'이라는 글이다. 분봉(分封: 중국 천자가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하던 일)이 아님에 유의하시라. 늙은 여왕벌은 그동안 쌓은 보물들(비축식량, 잘 건설된 시가, 화려한 궁궐, 곳곳에 저장된 밀랍과 꽃가루와 로열 젤리 등)을 오롯이 남긴 채 일벌들만을 데리고 벌집을 떠난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면 어린 벌들이 버려진 왕국에서 부화하기 시작한다. 그들 가운데 떠난 여왕벌을 대신할 새로운 여왕이 있다. 그런데 차기 여왕벌이 결정되는 과정은 처절하다. 가장 먼저 깨어나 걷기 시작한 암벌이 살의에 찬 행동을 보인다. 다른 암벌들의 요람으로 달려들어 작은 위턱으로 눌러버린다. 밑에 깔린 암벌들을 일벌들이 빼내지 못하게 막고는 독침으로 자매들을 찔러 버린다. (다른) 어린 왕녀(王女)를 보호하려는 일벌이 있으면 제일 먼저 깨어난 암벌은 날개짓으로 호통을 치는데, 보통의 날개 짓 소리와 사뭇 달라,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여왕벌 후보인 암벌의 살생을 방치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다. 


 

이따금 스스로 방어하는 암벌이 있으면, 두 암벌 사이에 전투가 결투가 벌어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서로 대결할 암벌이 두 마리만 남게 되면, 둘 다 상대를 독침으로 찌르는 자세를 취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베르베르, <분봉> 같은 책 316-317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마리 암벌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통치자가 되려는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둘이 동시에 죽음으로써 여왕 없는 벌집을 만들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는 것이다. 마침내 한 마리의 여왕벌은 늙은 여왕벌이 떠난 왕국을 새롭게 통치하기 시작한다는, 그런 얘기다. 사람들의 정치가 다만 곤충일 뿐인 벌들보다 못해서야 쓰겠는가!

 

사람들의 정치가 다만 곤충일 뿐인 벌들보다 못해서야 쓰것는가!

야당에는 다음 대선의 후보가 될 ‘잠룡’들이 많단다. 자랑거리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본선 경쟁력이 가장 높은 한 후보를 선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당 대표가 비록 지난 대통령선 총선에서 석패했다고 하여, 오는 대선의 후보가 되라는 법은 없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이 가진 정치적 선택에서 보여준 역동성이 이를 입증한다. 통 큰 정치를 보여주는 이가 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내일 모레가 5.18광주민주항쟁 25주기다. ‘광주정신’이 무엇인가를 되새기는 추모에 야당 정치인들이 함께 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망월동 구 묘역을 가시거나 국립묘지에 가시거나 무등산을 꼭 한 번 바라보시기를…….

무등산(無等山)이다. 등(等)은 ‘무리’ ‘같음’ ‘등급’ ‘기다림’의 뜻을 가지고 있다. 등급(等級)이 없는(無) 산(山)이다. 등급을 정할 수 없는 산, 등급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산이 무등산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무등(無等)을 보며 ‘평등’의 가치를 떠올리며 죽음을 무릅썼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 지위가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어려움 앞에서 연대하였고,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켰다. 또한 이 좋은 봄날 5월에 광주에 오시려거든, 어느 방향에서도 바라보아도 그 모습이 그 모습인 무등산의 또 다른 얼굴도 확인하시길. 동쪽(영남 쪽에)서 바라보아도 북쪽(수도권)에서 바라보아도 서쪽과 남쪽(호남)에서 바라보아도 무등산은 그 모습이 그 모습 같다. 고(故)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노풍’의 진원지가 왜 광주였을까? 그대들은 잘 알고 있다. 지역감정을 깊은 골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우리나라가 되기를 열망하는 시민정신, 그것이 광주정신이고, 어느 쪽에서 보아도 항상 그 모습인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터득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주인이지만 투표지 한 장으로 '주인임을 확인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는 유권자들은 보다 훌륭한 지도자를 보호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이 나면 의사(병원)의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이, 지배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도리다.”(플라톤 『국가』  6권 489c)

 

통치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국민의 부름을 받아 그 소임을 맡아야 한다. 그렇게 통치자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 자기 관리는 물론이고, 현재 선 자리에서 주어진 소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지도자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통치할 사람들이 통치하는 일에 가장 열의가 적은 나라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조용하게 통치하게 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치차들을 둔 나라는 그와 반대로 통치하게 될 것이오.“(플라톤 『국가』 7권 520d)

그럴 수 있다면 그리 항 수 있게 된다면, 국가는 있는 것이고 그 국가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까?
-다시 맞이한 5월, 먼발치에서 무등(無等)을 바라보며,

 

無等에 올라

 

무등에 올라
그리운 분지 광주가 눈시울에 가득할 때
행복했던 어느 봄 남쪽바다 제주에서 보았던
분화구 산굼부리를 생각했다.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 땅과 하늘을 태우던 용암과
뜨거운 불 토하기를 잊은 채
깊고 깊은 가슴의 끝까지
푸르른 숲과 바람과 안개를 가두고 키우던
적막의 웅덩이
그때 나는 여행중이었고
햇빛과 나의 신부가 따뜻했으므로
둥글게 가라앉은 억 년의 고요가
차라리 평화로와 좋았다.
절망과 희망으로 혼을 놓고 다시 깨어나는
그 후의 몇 년이 지나면서
단단하여 결코 죽지 않는
세상에 흔한 한 풀씨가 되어
어느 날 무등에 올랐을 때
의롭고 귀한 것을 위하여 눈물겹게 아프게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침묵 속에 아름다웠으므로 오래 생각했다.
무엇이든 없애고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용솟음의 불덩이를 갈무리한 채로도
다만 소리없이 숲과 바람, 벌레를 키우며
참고 견디며 끝끝내 기다리던 분화구
그리고 우리들 무등.
깊은 소용돌이 희망의 화염을 다독이는
넉넉한 사랑과
끝까지 기다림에 드는 아름다움.

 

-<나해철 시집 『무등에 올라』(창작과비평사 1984)에서

 

그리고 한 장의 사진.

올해도 어김없이 망월동 구 묘역과 인근의 국립묘지 두 곳에서 각각의 추모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더구나 구 묘역의 기념식에는 5.18 유가족들과 4.16 세월호 유가족들이 함께 한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과 함께 올해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齊唱)할 것이다. 지난 2월 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출발하여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 순례를 하던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광주 금남로 5.18광장(옛 도청 앞)을 찾았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 옛 도청 앞 광장에는 마침 시계탑이 돌아와 있었고, 참가자들은 행사 끝 무렵에 분수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군무를 펼칠 예정이었다. 광장 건너편 커피전문점 3층 창가에서 전경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무대 앞에 나와(작은 사진이지만 '호'와 '를' 사이에 선 분이다) 긴 말씀을 하시는데, 실내에 앉아 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광주를 대표하여 이귀님 할머니(오월어머니회)가 5.18의 역사와 상처, 그 극복을 위한 투쟁을 세월호 가족들 앞에서 증언하신 것이다. 먼발치에서 하시는 말씀은 듣지 못하였지만 떠올린 네 글자면 충분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여러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사진과 글_타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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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1/5]
-천병희의『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木蓮: 꽃들 모두 보내고야 알았네, 그대

또한 연꽃이었음을. 사진과 글: 타임로드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까지, 플라톤 대화편 셋이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천병희 원전번역으로 만나는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얘기다. 낯설기만 한 이 제목들은 고대 그리스의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이름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의 제목이 인명에서 따온 것들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이 사람들 대부분은 각 대화편에 중심인물로 등장하여 자신의 사상을 주창하기도 하고, 해당 대화편의 주제와 연관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의 대화마당에는 어김없이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 <뤼시스>와 <라케스>와 <카르미데스>는 초기·중기·후기로 나뉘는 플라톤 대화편들의 ‘초기’에 해당한다. 인간(사물)이 갖춰야 할 탁월하고 유능한 성질, 곧 미덕(arete)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뤼시스>는 우정이, <라케스>는 용기가, <카르미데스>는 절제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이들 셋 외에도 미덕에 속하는 덕목들은 여럿 있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조직)이 셋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갖춰도 “그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란 칭찬을 받을 만하다. 한 가지를 제대로 갖추기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생각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내로라하는 인물들과의 대화에 참여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 된다.” 무슨 소리냐,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독자들에게 ‘플라톤은 어렵다’. ‘플라톤은 (여전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 그것이 ’선입관‘이라고 강변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플라톤은 쉽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은 ’진행중‘이었고 무엇보다 우리말로 와 닿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없었기에, ‘플라톤은 어렵다’는 부담감은 현실이 되었다.

 

□ 그러므로 이들 세 편의 대화편은 중기에서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난해해지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독서에) 참여하기가 수월하다고 말해야겠다. 생각해보면 2500년 전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시대나 지금이나 태어나 살고, 살다가 죽어가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 삶의 면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후대에 이를수록 선배들이 물려준 앎과 깨달음의 유산들 덕분에 살면서 만나는 문제들에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날마다 그날의 괴로움을 맞아 하루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문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들이지 싶다.


 

←<뤼시스>를 읽은 다음에 세네카의

<우정에 관하여>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 <뤼시스>에서 만나는 ‘우정’도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다. 이 사람들이 대체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싶지만 그렇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부제가 ‘우정에 관하여’이지만 ‘우정’을 ‘사랑’으로 대치(代置)해도 상관없다. 다만 여기에서의 사랑은 흔히 떠올리는 남녀의 사랑과는 좀 다르다.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의 사랑 때문에 시작된, 그리고 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되는 대화가 <뤼시스>인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다룬다고? 사실이다. 한 청년(남자)이 한 소년(남자)를 사랑하는데, 나 홀로 사랑을 불태울 뿐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이즈음 우리나라처럼 세인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다.

□ 당시 그리스에서 동성(남자)끼리의 사랑은 사회 문제가 되지가 되지 않았다. 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대를 갖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고 뭇 사내들은 그런 사랑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여성차별’의 현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동성애는 지금의 여자를 향한 남자의,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아가 여기에서 다루는 ‘사랑’은 그것이 남녀 사이의 것이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것이든 ‘우정’에 포함된 혹은 우정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사랑 혹은 그 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때로는 어디까지가 우정이고 어디서부터 사랑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표면상으로 <뤼시스>는 동성애에 따른 이야기를 다루는 대화편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8,9권 '우애'를 다룬 부분을 이어 읽으면 좋지 않을까?

 

 

□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일관되게 남자끼리의 연애에서 남자 구실을 하는 쪽을 '연인'(戀人; erastes)으로, 여자 역할을 하는 쪽을 '연동'(戀童: ta paidika)으로 옮기고 있다. 대체로 연인은 연동보다는 연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나 인품, (경제적으로) 가진 것에서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랑하는 쪽’이다. 역으로 연동은 사랑을 받는, 곧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받는 상대이다. 소크라테스의 연동은 알키비아데스(15살차, 대화편 <향연> 참조)였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만물은 하나다’)의 연동은 자신의 이론을 충실하게 계승한 제자이기도 한 25살 연하의 제논이었다.

 (이어서, 4조각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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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 그리고 친(親)하다는 것[2/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힙포탈레스는 뤼시스라는 당시 13세쯤의 소년을 열렬히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부잣집 도련님이다. 한데 그는 소심한지라 고백하지 못하고, 소년을 연모하는 마음을 시로 짓고 산문으로 쓰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그런 힙포탈레스에게는 크테십포스라는 또래 친구가 있다. 그리고 크테십포스의 사촌(동생)인 메넥세노스가 있는데(두 형제는 훗날 소크라테스를 임종한다), 메넥세노스는 뤼시스와 또래로 ‘절친’이다. 때문에 크테십포스는 사촌을 통해 뤼시스와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힙포탈레스와 달리) 뤼시스는 힙포탈레스를 직접 알지 못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사촌간인 메넥세노스-크테십포스 형제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이 두 사람이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크테십포스는 뤼시스를 연모하는 친구(힙포탈레스)를 못마땅해 한다. “외모가 출중하여 단지 아름답다는 말뿐 아니라 아름답고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뤼시스를 크테십포스도 연모하기에, 시샘하는 것은 아닐까?
□ 소크라테스까지 다섯 명이 참여하는 <뤼시스>의 대담은 기원전 424년~399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것으로 본다(옮긴이).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가 45세~70세이던 어느 날이다. 가령, 기원전 416년 어느 날로 대화 시점을 확정하는 <향연>(비극작가 아가톤이 레나이아 제 비극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해)과 달리, <뤼시스>의 정확한 대담 시점을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정에 관하여’ 언제 대화를 나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당시의 ‘우정’과 ‘사랑’을 혼용하여 사용하려는 필자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알다시피 <향연>은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느 날 벼르고 벼른 끝에 자신의 아름다운 몸으로 소크라테스를 유혹했다.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소크라테스에 실망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알키비아데스, <향연> 후반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고백한다.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연동인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연동인지 모르겠다며,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랑고백을 하고 있다. <뤼시스>의 대담이 진행되는 동안 연동의 눈에 띄지 않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힙포탈레스를 바라본다. 그 모습에서 지난날 레슬링 경기장 한 구석에서 연동인 알키비아데스를 훔쳐보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 이처럼 연동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기까지 두 사람의 메신저가 있음에도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힙포탈레스의 속은 갑갑하고 타들어간다. 시와 산문으로 사랑을 승화시키며, ‘뤼시스 바라기’를 하고 있다. 바로 이런 때에, 소크라테스가 크테십포스의 연애상담자로 등장한다. 근래의 토크콘서트나 인기 팟캐스트의 소재가 연애(심리)상담인 경우가 많은데, 소크라테스도 그런 연애상담자 역할을 맡게 된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연동들을 사랑한 생생한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향연>에서의 알키비아데스의 고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연모한 연동은 한둘이 아니었다.)


□ 또한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데 자신은 남들이 ‘지혜’를 낳게 돕는 점만이 다를 뿐이라고 <테아이테토스>에서 거드름을 피운다. 그런데 산파는 출산을 돕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맺어주는 중매자 역할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역할이란다.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결합해야 하는지에 관해 알 것은 다 안다는 점에서 산파들이야말로 가장 영리한 결혼중매인”(테아이테토스 159d)이라고. 그러므로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애상담은, 상담에만 머물지 않고, 힙포탈레스와 뤼시스의 연인이 되도록 실질적으로 돕는 중매인 역할까지 하는데, 흥미로운 관점 포인트다.

□ 상담은 시작되었다. 뤼시스와 메넥소노스가 대화에 참여하기 전에 나누는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연동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사냥과 낚시에 비유하는 등, 연애에서의 ‘밀당’(밀고 당기기)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좋아하면 데시를 해야지 시나 산문 따위로 위안을 삼고 있어서야 되겠느냐고(크테십포스가 친구 헵포탈레스를 못마땅해하는 것도 그의 우유부단 때문일 수도 있다.)

 

"여보게, 그래서 연애 전문가는 연동을 손아귀에 넣기 전에는

연동을 찬양하지 않는다네.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염려되니까.

또한 잘생긴 소년들은 누가 칭찬하고 추어주면 자만심에 차서

점점 도도해진다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206a) "

 

나쁜 남자! 사냥을 할 때, 그 무기가 화살이건 총이건 한 방 날리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려야 한다. 낚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대물(大物) 낚시라면 밤을 꼬박 새우고도 붕어의 입질 한번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긴 침묵~ 인내심 잃지 않고 기다릴 것, 그래야 ‘선수’다. 그러하거늘 승리의 송가라도 되는 양 시네 산문입네 하면서 요란을 떠는 크테십포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일침을 놓아 기선을 잡는다.

 

□ 마침내 자신이 하수(下手)를 인정하고, 연동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고 행동해야 하나요, 조언을 구하는 크테십포스, 그렇게 본 상담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상담 조건은 자신이 당사자(뤼시스)와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마침 가까이에 있던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일행들에게 다가오고, 메넥세노스는 사촌형인 크테십포스 옆에 앉고, 뤼시스는 친구를 따라 그 옆에 앉게 되어 소크라테스와 만나게 되는데, 덫을 설치하고 유인하여 사냥감을 포획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우정과 사랑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대목에서, 자신의 충고에 따라 그 현장에 배석하고도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힙포탈레스를 짓궂게 묘사한다.(이 대화편은 훗날 소크라테스가 회고하는 형식이다)
“(뤼시스가 메넥소노스를 보고 따라와서 함께 우리 곁에 앉자. …) 흽포탈레스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뤼시스가 언짢아할까봐 두려워서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섰네.“(107c)
또한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소크라테스는 그 자리에 힙포탈레스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는(자신의 ‘구라’에 취해) 좌중의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뻔 했다고 회고한다. “힙포탈레스, 연동과 대화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하네, 이처럼 기를 죽이고 위축을 시켜야지, 자네처럼 우쭐하게 만들고 기를 살려서는 안 된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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