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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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리아스]<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이란 특별한 이름의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일리아스』(이하 <일리아스>)에는 특별한, 세 번의  '아흐레'와 세 번의 '열두 번째 되는 날(아침)'이 등장한다. <일리아스>라는 작품 속 시간 이야기다. 무슨 얘기이신가, 하실 분들이 있을 것인데, 여러 번 읽다보니 문득 보이는 ‘발견’이랄까, 그런 규칙이 있는 듯하다. '아흐레(9)는 정수 기본 수 가운데 극수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듯하고, 열두 번째(12) 되는 날은 문제가 해결되는 날이다. 다시 말해 아흐레 되는 날은 ‘슬픔’이든 ‘역병’이든 ‘시신훼손’이든 갈등이 극에 치닿는, 서사장르 구성의 '절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발견한 것들을 정리해본다. 

 

No01."열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테티스가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아가멤논의 교만(한 말과 행동) 때문에 촉발된 아들의 분노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그동안 너는 빨리 달리는 함선들 옆에 앉아 아카이오이족을

원망하며 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마라."(『일리아스』 1권: 421-422행)
회의장에도 전장에도 나가지 말고 함선들 옆에 꼭 붙어 있으라, 신신당부를 하는 것.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극에 이르렀을 때, 여신 아테네가 올룀포스에서 내려와 제지하지 않았다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이란 대체 며칠을 얘기하는 것일까?

 

"제우스께서는 어제 나무랄 데 없는 아이티오페스족의 잔치에

참석코자 오케아노스로 가셨고, 다른 신들도 모두 따라갔다.

열 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1권: 423-425행)

비로소 ‘그동안’을 가늠해볼 단서와 숫자가 등장한다. '어제' 제우스가 신들을 거느리고 올룀포스를 떠나, 12일 동안의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은 제외하고, 내일부터 10일째 되는 날, 테티스는 제우스를 찾아가 청원하겠다고 한다. <일리아스>에서 처음 등장하는 '열 이틀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소집한 회의가 열렸는데, 역병에서 벗어날 길을 찾은 날이다. 역병이 발생한 지 아흐레는 이미 흘렀고, 오늘이 10일째 되는 날이다. 역병에서 벗어날 방법은 찾았지만, 회의를 주도하는 아킬레우스가 미운 아가멤논은 그에게서 브리세이스를 빼앗고, 분노가 촉발되는 바로 '그날'이다. 아폴론이 보낸 역병에서 더 이상 헤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9일은 임계점으로 해석한다. 9는 기본수 가운데, 극수로 '무한', ‘영원’ 등을 상징한다. 역병이 그리스 군을 전멸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무시무시한 숫자인 것, 그런데 제우스는 하필 이날을 잡아 약속이라도 한 듯, 출장을 떠난 것이다. 오늘로부터 11일째 되는 날 아침 제우스는 돌아오고 테티스는 지체 없이 올룀포스에 올라,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청탁을 한다. 아킬레우스에게 '그동안'은 11일쯤이 된다. 또한 역병 발생시점부터 20일째 되는 날, 아킬레우스-테티스의 청원은 접수된다. 

 

No02."열두 번째 아침이 밝았건만 그의 살은 조금도 썩지 않았으며"
이제 <일리아스> 24권(몸값을 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다)으로 가보자, 24권은 그 이야기 전개가 1권과 대칭 혹은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열두 번째 되는 날'이 24권에서도 등장한다. 앞서 22권에서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절친의 복수를 하고, 23권에서 아킬레우스의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그는 절친을 추모하는 장례경기를 제안하고 주관한다. 그동안에도 헥토르 시신은 아킬레우스의 막사 부근에 방치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분노는 여진처럼 남아 헥토르의 시신을 욕보인다. 그것은 분노이고, 그리움 때문이다.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아킬레우스는, 새벽녘이 되면 갑자기 일어나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고 그의  무덤 주위를 세 바퀴씩 돌며 분을 삭인다.

 

"그러면 그는 날랜 말들에게 전차 밑에서 멍에를 얹고는/ 끌고 다니기 위해 헥토르를 전차 뒤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헥토르를 끌고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세 번/ 돌고 나서 다시 막사로 돌아와 쉬었고, 헥토르는 먼지 속에/ 엎드러져 길게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었다."(24권: 14-18행)

'세 번'도 <일리아스>에서는 유의해서 살펴야 할 숫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이와 같은 일을, 장례식 이튿날 새벽부터 열두 번째 날의 새벽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킬레우스가 하고 있다(12일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좀 더 살펴야).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발칵 뒤집힌 곳은 올룀포스다. 신들 대부분은 헤르메스를 보내 그의 시신을 빼내자는 주장하나 헤라와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완강하게 반대한다(이들은 그리스 군을 지원하는 대표 신들이다).

 

"그들에게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죄 때문에 여전히 처음처럼 미웠으니,/ 그는 이들 여신들이 그의 농장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찬양했던 것"(24권, 27-30행)

두 여신의 뒤끝도 상당하다. '파리스(=알렉산드로스)의 선택'(사과)에 대한 앙금이 여전하다. 헥토르는 파리스의 형인 것이다. 이제 트로이아를 지원하는 아폴론이 나서서 반대 의견을 개진한다.

 

"아킬레우스는 동정심도 수치심도 없는 자요. 수치심은/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기도 하지만 큰 이익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건대,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이를테면 동복형제라든가 또는 아들을 잃었소./ 하지만 그들의 눈물과 슬픔에도 한계가 있었소."(24권: 44-48행)

갑론을박 중이지만 신들의 중론은 아킬레우스가 신들도 용납할 수 없는 어떤 선(線)을 넘었다는 것. 그런데 신들은, (테티스가 왔을 때 제우스가 하는 말) "헥토르의 시신과 도시의 파괴자 아킬레우스를 둘러싸고/ 아흐레 동안 불사신들 사이에 시비"(24권 107-108행) 중이다. 여기서도 '아흐레'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임계점'으로 작동한다. 1권에서 역병에 휩쓸린 날들처럼. 아킬레우스가 짐승처럼 행동하는 시간들, '미친 날들'이기도 하다. 아킬레우스가 제 맘대로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날들이 '아흐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헤라의 끈질긴 반대에도 제우스가 조율하는데, "아킬레우스 몰래 헥토르의 시신을 빼내는 일은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해결책을 낸다. 마침내 (1권에서와는 역순으로, 강대진,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을 참조하시라.) 제우스는 전령을 보내 테티스를 부르고, 이 여신을 통해 아들(아킬레우스)을 설득한다. 프리아모스가 장남(헥토로)의 시신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는데, 신들이 그리 진행되도록 손을 써놓은 것, 어쨌든 이 글에서는 12일이 중요하므로, 전령 헤르메스가 프리아모스를 안심시키는 다음을 보자.

 

"노인장! 그는 아직 개들이나 새들의 밥이 되지 않고/ 여전히 아킬레우스의 함선 옆 막사들 사이에/ 처음 쓰러진 그대로 누워 있소. 그가 누운 지 벌써/ 열두 번째 아침이 밝았건만 그의 살은 조금도 썩지 않았으며/ 전사자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꾀지 않았소./ 신성한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면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전우의 무덤을 그를 끌고 사정없이 돌았지만 그를/ 손상시키지 못했소. 직접 가서 보시게 되면 놀라실 것이오."(24권: 411-418행)

어쨌든 이 시신훼손을 포함, 시신반환으로 사태가 일단락까지 소요된 시간은 열두 날이다. 열두 번째의 아침.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일리아스> 작품 속 시간은 또 한 번 12일을 만난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No03."열 이틀째 되는 날에는 양군이 전투를 개시해도 될 것"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면서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에게 묻는다.

 

"고귀한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자면 며칠이나 걸리겠소?

그동안은 나 자신도 쉴 것이며 백성들도 붙들어두겠소"(24권:  657-658행)

뜻밖의 제안이다. 트로이아 군은 도성에 갇힌 상태라, 화장할 땔감을 구하려면 도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 프리아모스는 가능하다면 12일을 요청한다. 그들은 '아흐레' 동안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 하루째 되는 날 무덤을 만들어 줄 예정이다. 그리고 열 이틀째 되는 날에는 양군이 전투를 개시해도 될 것이라고.

 

"아흐레 동안 우리는 집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땅에 묻고 백성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열하루째 되는 날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줄 것인즉,
열이틀째 되는 날 꼭 필요하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이오.”(
24권:664-667)

아킬레우스는 기꺼이 헥토르의 장례절차를 밟도록 12일 동안의 휴전을 약속한다. 여기서도 아흐레 동안 죽음을 슬퍼하겠단다. 대단한 애도, 헥토르를 영원히 추모하겠다는 뜻이 된다. <일리아스>에서 만나는 세 번째의 특별한 열 이틀째 되는 날이다.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24권 804행)

이 한 행은 <일리아스> 1~24권, 대단원의 막은 내린다. 특히, 세 번째의 열두 날은 제우스의 뜻이 아니다, 인간 아킬레우스가 연민과 배려가 12일의 장례 기간 허용이다. <일리아스>를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아킬레우스에 초점을 맞춰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하는 데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이제 <일리아스>의 날들을 정리하자. 본격적인 전투의 날들은 4일이다. 그 앞에 전투 이전, 그 뒤에 전후이후로 <일리아스>는 3분되는데, 흘렀거나 흐른 것으로 여기는 세 번의 12일은 36일, 4일간의 전투를 포함하면 40일. 앞서, 역병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린 작품 이전의 아흐레(9일)를 포함하면 대략 50여 일이 <일리아스>라는 작품 속 시간이다. 10년 전쟁에 비하면 참 짧다. 왜 그런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사례들을 좀 더 제시한 다음에 정리하기로 하자. <일리아스>에는 세 번씩의 특별한 '아흐레'와 열두 번째 되는 날 아침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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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3-24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숫자로 살펴보는 일리아스도 재미있군요.

아흐레, 열두 번째, 말고도 ‘아홉 해‘도 몇 차례 등장하는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아홉 해 동안 교착 상태였던 데 대해서는 2권에서만 하더라도 두 차례나 언급되어 있더군요.

어느덧 위대한 제우스의 아홉 해가 흘러
선재는 썩고 밧줄은 풀어지고 말았소이다.
(제2권 134-135)

뱀이 참새 새끼 여덟 마리와 그 새끼들을 낳은
어미를 합쳐 모두 아홉 마리를 집어삼켰듯이,
우리도 아홉 해 동안 그곳에서 전역을 치를 것이나
열 번째 되는 해에는 길 넓은 도시를 함락하게 될 것이오.
(제2권 326-329)

timeroad 2019-03-25 08:3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숫자에 대해 동서양의 관념은 좀 다른 듯 하지만 닮은 점도 있는 듯하고요. 영국이 청나라에 홍콩의 조차기간을 99년으로 요구한 것은 긍정이면서 부정적인 두 의미를 다 가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취재는 되어 있으니 시간이 닿는대로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oren 2019-03-25 2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리아스』를 뒤적이다가 또 하나의 ‘아흐레‘를 발견했네요.
글라우코스와 디오메데스 사이의 무구 교환이 나오는 대목에서,
글라우코스가 자신의 출신 내력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윽고 뤼키아와 크산토스의 흐름에 이르렀을 때
광대한 뤼키아의 왕이 그분을 진심으로 존중해주었소.
왕은 그분을 위하여 아흐레 동안 잔치를 벌이며 황소 아홉 마리를 잡았소.
그러나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열 번째 나타났을 때
왕은 자기 사위인 프로이토스로부터 무슨 표지를 가져왔느냐고
그분에게 묻고 그것을 보여달라고 했소.
(6권 172-177)

timeroad 2019-03-26 18:4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뭔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ransky 2019-05-11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옥균을 상해에서 살해한 자가 프랑스 유학자 홍종우였음은
명성왕후의 끈질긴 복수심의 끝판이었고
자객고영근 또한 면성왕후의 심복이었으니!

timeroad 2019-05-13 19:5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인류 최고의 최초의 고전이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지요? 꼭 막장드라마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최근의 흥행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골조도 그렇지요.
 

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좌-신Gods, 영웅Heroes, 신화Myth의 머리글자를 따서 GHM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였는데, 콜먼의 태도가 직설적이고 솔직한데다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설득력이 컸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스테인』(1,2권)의 주인공 실크 콜먼는 고전학자이다. 콜먼은 매사추세스 서부 버크셔에 있는 가상의 대학인 아테나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강의실로 복귀한 콜먼은 출석을 부르다 수업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학생들(나중에 흑인으로 밝혀진다)을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spooks로 지칭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 문제를 해명하고자 맞서다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자 않고 사직해버린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아내 아이리스까지 급사한다.

 

이런 거짓된 비난의 전말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겠다며 주커먼을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커먼은 이 소설의 사회자 격인 일인칭 화자다. 주커먼은 이 작품 말고도 그의 『미국의 목가』(1997)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도 화자로 등장하는데, 때문에 이 세 작품은 일종의 삼부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네이선 주커먼은 필립 로스의 분신처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또 하나, 그는 ‘결연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작품에 자전적인 요소를 섞어 넣기를 즐긴 작가이다. 이 점에서 그의 프로필을 살피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가 시카고대학과의 인연이다. 그는 이 대학의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잠시 이 대학의 강사 생활을 했다. 시카고대학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부터 시작하는 서양의 고전 읽기를 교양교육의 기본으로 시스템에 편입시킨 특별한 대학이다. 시카고대학을 변화시킨 ‘위대한 고전 읽기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뤄볼 예정인데, 어쨌든 1929년 시카고대학의 5대 총장으로 부임한 로버트 허친스(당시 30세)의 실험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라, 85년 동안 8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2014년 기준) 대학교의 초석을 놓은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필립 로스가 소설  『휴먼스테인』에 설립한 가상의 아테나대학은 그의 프로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콜먼이라는 인물, 그리고 고전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수업 장면을 녹취하듯 펼쳐놓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살피는 데서 찾아보자.

 

“여러분은 유럽 문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콜먼은 강의 첫 시간에 출석을 부르고 나서 이렇게 묻곤 했다. “바로 불화에서입니다. 유럽 문학 전체가 싸움에서 기원했죠.” 그리고는 준비해온 『일리아스』를 집어들고 처음 몇 줄을 읽어나갔다. “‘시의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저주를 부르는 분노를 노래하라……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위대한 용사 아킬레우스가 맨 처음 불화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난폭하고도 힘센 두 인물은 무엇을 놓고 불화하는 걸까요? 기본적으로 술집에서 사내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 여자를 놓고 다투는 것이니까요. 처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그녀의 아버지한테서 강탈해온 처녀, 전쟁 와중에 유괴된 처녀지요. ‘마아 코우리Mia kouri'. 이게 이 서사시에서 그 처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미아‘라는 낱말은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가튼 의미를 지니는데 영어의 부정관사 ’a‘에 해당합니다. ’코우리‘ 곧 ’처녀‘라는 낱말은 서서히 변화해 현대 그리스어에서 딸이라는 뜻인 ’코리kori'가 되었습니다. 자, 아가멤논은 이 처녀를 본처 클리타임네스트라보다 더 좋아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이 처녀를 따라올 수 없다.’ 아가멤논이 말합니다. ‘이목구비나 몸매 어느 쪽을 봐도.’ 이만하면 왜 아가멤논이 이 처녀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나요? 이 처녀의 유괴를 둘러싼 정황에 분노해 흉포해진 아폴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만 아가멤논은 거부합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다시 폭발할밖에요. 쉽게 격분하는 인물은 아킬레우스는 어느 작가라고 기꺼이 그려보고 싶어 할 법한, 그야말로 폭약 같이 쉽게 격발되는 거친 인물입니다. 특히 자신의 위신이나 욕구와 관련된 경우, 전쟁사에서 가장 과민한 살인기계로 변하는 인물이죠. 모두에게 칭송받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에 가해진 모욕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됩니다.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모욕, 처녀를 빼앗긴 모욕에 대한 분노의 위력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한때는 그가 영광스러운 보호자였고,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던 집단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다툼은 그러니까 젊은 처녀, 그리고 처녀의 싱싱한 몸과 성적 강탈에서 얻을 쾌락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좋든 나쁘든 정력가인 용사 군주가 수컷으로서의 권리와 위엄을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는 것에서 위대한 상상력이 넘쳐흐르는 유럽 문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류로, 삼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가 불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는 것이며……”(이 책 1권 16~17면)

 

 

우리의 단군신화의 주제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임을 떠올리면 참 다르지요. 그들이 그들의 문학의 기원을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가보다 하면 될 것을, 긴 인용까지 해가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크 콜먼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강의 스타일을 엿보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우리말 원전번역  『일리아스』(천병희)을 읽으면, 콜먼이 언급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배경은 좀 차이가 있다. “아킬레우스가 포상으로 받은 처녀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라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조건부가 아니었다. 아가멤논의 속마음이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브뤼세이스를 취하였다.’이지 조건부는 아닌 것이다. 희랍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번역된 고대 그리스 문학작품을 다루는 그의 훌륭한 개론 강의)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도 아니다. 인용은 실크 콜먼의 강의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한 ‘녹취록’ 수준의 옮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크 콜먼이 직면한, 출석을 부르다가 우연히 던진 한마디가 그의 ‘아름다운 노년’을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곧 명예의 실추와 그에 따른 분노는, 그 스스로가 아킬레우스적임을 이 작품은 초반에서 일종의 배경으로 까는 것이다. 그가 평온을 되찾는 한 여자와의 만남(71세인 그가 만난 34살의 여인, 포니아 팔리), 그 만남은 한 여자가 중간에 낀 ‘삼각 관계’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일리아스』를 어떻게 해석하건, 『일리아스』는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으로, 그리고 필립 로스의 자전전인 기록과 무관하지 않게, 이 작품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급반전’까지는 아니라도, 실크 콜먼의 인생이 간직한 아이러니는 작품 후반에 드러나는데, 그리스 비극으로 치면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면모를 또한 그는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한 고전 몇 편을 읽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써본 글이다. 사실 『일리아스』의 표면 주제인 트로이아 전쟁 원인 중 주요한 하나는, 헬레네를 되찾아 명예를 회복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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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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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읽었어요. ‘이솝 우화’를 읽고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십대가 될 때까지도 쭉 이어져 영화 쪽으로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지요."
『이야기의 힘-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황금물고기, 2011년 9월)에 실린 전설적인 시나리오 닥터 '로버트 맥기'와의 특별 인터뷰(스토리텔링 공식)의 일부다. 실제로 EBS에서 진행한 인터뷰의 녹취록이다. 어떻게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특히 어떻게 스토리닥터로 활동하게 되었나,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의 초반부다. 그의 대표작으로 시나리오 작법의 교과서인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전2권)의 책 소개는, 난데없는 퀴즈로 시작된다. "<반지의 제왕>, <디어 헌터>, <X파일>, <슈렉>, <프렌즈>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정답은 이들 작품을 쓴 사람들 모두가 '로버트 맥기'의 제자라는 것. 그는 아홉 살 때 처음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고, 극단원으로 10대 시절을 보냈다. 프로필이 예사롭지 않다. '이야기 의사'라는 그의 직함을 살피노라면, 어린 시절부터 (관객 반응을 직접 확인하는) '현장'을 경험했기에 살아 있는 이야기의 힘을 실감했으리라, 여기게 된다. 

 

10대 시절을 극단원으로 보낸 '이야기 의사', 로버트 맥기

그런데, 작가로서 명성을 쌓은 이들이 인터뷰에서 으레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할 때,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처럼,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읽은 『이솝 우화』를 꺼낸다.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의 이야기(STORY)의 최소 단위를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이솝 우화』이고,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에도 또 하나의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대화, 번역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한 편 한 편의 우화를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아버지에게 질문하였을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을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과정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책을 읽으면서 받은 '자극'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이런 변화를 객관적하여 관찰할 수 있다면,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생산)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들이 던진 질문은 '해석적 질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기다린 질문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텍스트를 공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질문, 그 질문에 딱 들어맞는 정답은 없다. 그런  질문이, '해석적 질문'이며, 이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독서토론이나 독서지도(‘지도’라는 말이 좀 그렇지만)의 방법을 다루는 '교육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지만, 가령, 자녀와 함께 같은 책을 읽는 부모들을 위한(해석적 질문을 유도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깊이 있는 그리고 친절한 안내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핵심 포인트는『이솝 우화』를 읽고,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

어쨌든, 『이솝 우화』>는 가장 짧은 시간에 읽고(미리 읽어올 필요도 없다), 해석적 질문을 할 수 있는 그런 텍스트다. 그 질문에 참가자들이 나름대로 의견이 발표하고, 그것이 또 다른 질문을 낳고, 다른 의견을 낳는 등 각종 독서토론의 '오프닝'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필자 또한 실제로 실행해보고서 하는 말이다). ‘청소년과 성인들을 위한 정본’ 『이솝 우화』(천병희 옮김, 숲)에는 현존하는 이솝 우화 전편(258편)이 (그리스어→우리말) 원전번역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편을 이솝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은 사실이라, 논란이 이어진다. 그러나 수록된 우화들이 가진 일관성은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또한 (앞서 강조한 해석적 질문 활용과 관련) 몇 편을 제외하고 우화마다 덧붙여진 '교훈'이 걸림돌이 된다. 가령, 아래 인용한 <살인자>의 경우 교훈은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죄지은 사람에게는 뭍에도 공중에도 물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교훈'은 헬레니즘 시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더러 추상적이고 고지식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우화의 요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많다. 필요한 경우에 참조하되 굳이 '교훈'에 얽매이지 않고 읽기를 바란다."
옮긴이 서문‘(재미와 교훈을 갖춘 명작’)에서 번역가는 '교훈'을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장한다. 아마도  『이솝 우화』란 제품에 관한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맨 위에서 고딕체 등으로 강조하여 언급해야 할 사항이지 않을까?

 

교훈을 어떻게? 『이솝 우화』란 제품에 관한 사용설명서

다시 로버트 맥기의 인터뷰다. 이야기의 힘, 그 생명력은 '플롯, 플롯,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갈등 구조'에 대해 묻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다. 『시학』을 말하고 있는 것. "극장이든 책이든 이야기 작업의 규모와 크기에 따른 필수적인 반전의 개수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출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고 우리말로 옮기는데, 특히 비극과 관련하여 플롯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들을 요약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극장이든'이라고 할 때 비극경연(연극이란 공연예술)의 ‘대본’으로서의 비극을, '책이든'이라고 할 때는 읽는 것(곧 책으로)만으로도 ‘비극(작품)’이 소비됨을 포함하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 이 점을 짚고 있거니와 오늘날에도 비극은 공연으로, 책(작품)으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추고 ‘소비’되고 있다.
그리고 로버트 맥기는 '한마디로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며 이야기의 핵심을 강조한다. 이야기의 1번 법칙을 지켜야 하는데, '반전'이며, 이야기가 필요로 하는 반전의 개수(個數)가 있다는 것. "극장이나 공연, TV, 영화에서 2시간 정도(120분) 분량이면 최소 3회의 역전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서 역전이란 ‘반전’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작품의 플롯에는 (반전은 기본이고) 반드시 '급반전'이 있음을 역설한다. 로버트 맥기가 말하는 ‘역전’은 (보통 '막'이라고 부르는데) 인물의 인생에서 중차대한 변화를 말하는데, "최소 3회, 많게는 4회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공연으로 책(작품)으로, 저마다의 완결성을 갖추고 ‘소비’되는 비극

전설적인 시나리오 닥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누구일까, 훌륭한 이야기를 창작(생산)하고자 하는 이들일 것이다. 가령, 소설가나 시인이 되는 데 대학과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말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를 알아야 한다. 때문에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를 거치는 것이 유리하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필요하니까. 다만, 국어국문학과라고 할 때, '국어학'과 '국문학'이란 두 갈래의 학문이 결합된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는 것 같다. 국어학은 언어학의 영역으로 (지금은 다른 대학에도 개설되어 있겠지만), 서울대의 경우 ‘언어학과’로 (국어국문학과와) 독립되어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기 때문에 ‘언어학과’는 ‘국어학’을 위주로 다루지만, 세상의 모든 언어 자체가 본위의 연구대상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한국 문학은 한국어를 재료로 한다는 것 말고는(거칠게 말하자면), 두 분야는 연관성은 깊지만 한데 묶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창작을 위해서, '국어국문학과'에 가는 것이 나은가, '문예창작학과'를 가는 것이 나은가도 해묵은 고민이다. '문예창작학과'를 얼른 떠올릴 것이나,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정답'은 아니다. '문예창작'이 글을 쓰는 기술(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작시술作詩術‘)을 우선하여 가르치고 배운다는 데서 그러한데, 가령, 시(詩)를 쓰는 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에서부터 시원스럽게 답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대답이 『시학』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품이 좋은(훌륭한) 작품인가(what)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how) 하면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구분하지 않고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창작을 준비하는 이에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시학』만큼 좋은 가이드북이 없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how) 무엇(what)이 좋은 작품인지 알아야.. 

자주 인용하거니와, 『시학』을 읽으며 새롭게 발견한 개념 하나가 바로 '전체'이다. 작품에서 이 '전체'란 방대한 서사시 『일리아스』 한 권일 수 있고, 『이솝 우화』의 수록된 <여우와 덜 익은 포도송이>(아직도 '여우와 신 포도'로 옮기는 번역이 존재한다), 세 문장으로 이뤄진 우화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전체'란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 참으로 간명한 정의다. 그런데, 중언부언처럼, 이 '처음'과 '중간'과 '끝'을 설명한다. 처음과 끝을 먼저 정의하고, 끝으로 '중간'을 정의하는 데 주목하자.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쟈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_『수사학/시학』 중 '시학' 제7장(''는 필자)

 

이야기가 하나로서 생명을 부여받으려면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야기의 최소(기본) 조건이다. '처음'과 '중간', '중간'과 '끝' 사이에 끼어드는 이야기 단위가 에피소드다. 그런데 어떤 에피소드도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의 최소 단위를 『이솝 우화』는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기본을 살피는 데 필독서가 된다. 언제든 어디서든 사전 준비(텍스트 읽기) 없이도 즉석에서 독서토론을 나눌 수 있는 텍스트인 것이다. 다음 우화는 단 두 문장으로 이뤄졌지만, 처음과 중간과 끝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다.

 

"새끼를 한 마리밖에 낳지 못한다고 여우가 암사자를 헐뜯자 암사자가 말했다.“한 마리이지만 사자야.”"
-『이솝 우화』, <194.암사자와 여우>

 

로버트 맥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서 강조한 역전(반전)을 포함하고 있는 우화도 적지 않다. 이 짧은 우화에 '있어야 할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인 뒤 피살자의 친척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살인자가 나일 강가에 이르렀을 때 늑대가 다가오자 겁이 난 그는 강가의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큰 뱀이 자기를 향해 기어오는 것을 보고 살인자는 강물로 뛰어내렸고, 그러자 강물 속에 있던 악어가 그를 먹어치웠다."
-『이솝 우화』, <045.살인자>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솝 우화』, 처음과 중간과 끝을 지닌 이야기의 최소 단위

늑대와 큰 뱀과 악어.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피할 곳이 없다(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뭍에도 공중에도 물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 하늘과 땅과 물(바다와 강), '어디에도' 마땅한 피난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제우스가, 땅(지하)은 하데스가, 바다는 포세이돈이 분할 통치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온 지구, 온 우주라고 해야 할까?
새 학년 새 학기다. 특히, 신입생 가운데 어떤 장르이건 글쓰기를 직업으로 희망하는 이들이라면, 이 글에서 소개한 몇몇 책들을 평생의 교과서로 삼기를. 특히,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다른 저서 『수사학』과 한 권으로 묶여 있는데, 번역가 천병희가 ‘시학’을 처음 번역한 해가 1975년이다. '시학'을 개론으로 읽고 ‘수사학’을 읽든, '시학'을 원론으로 읽고 ‘수사학’을 부록으로 읽든 『수사학/시학』(천병희, 숲, 2017)은 문학을 창작하거나 연구하려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을 주는 교과서 중의 교과서이며,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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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 엄비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이 아니었을까? "

 

『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서울 도심 중학동 골목 수문동 바그다드카페에서')의 한 대목이다. 저자는 동십자각 부근 한 카페에 앉아 역사기행을 하고 있다. 조선의 왕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다. 세계 만방에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언이었는가, 불과 한두 해 전에 겪은 일만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그 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종로통 시전으로 식료품을 사러 가는 나인들의 가마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지금 경복궁 정동(正東) 문(門)인 건춘문을 통과해야 했다. 한 나라 왕이 자신이 주인인 궁궐을 눈속임까지 하며 탈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조선 후기 경복궁 건춘문 밖에서 신식군대(별기군)가 훈련하고 있다. 문 앞 삼청동천 위로 종친부로 건너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개천이 있었는지조차 잊혔지만 고종은 마차에 올라 이 건춘문을 통해 경복궁을 탈출하였다(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895년 10월 8일 새벽, 당시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의 왕비(민자영, 1851~1895)는 궁궐을 습격한 일본 낭인들의 칼에 무참하게 시해되었다.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 저지른 만행이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 일제가 가세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기에 앞서 지아비로서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할 틈도 없었다. 고종은 고정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고종 자신이 신변의 위험을 느꼈고, 그해 11월 궁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실패하고(춘생문 사건), 기회를 엿보던 차에 이듬해 이른 봄 재차 탈출을 시도한다.

 

이런 역사 배경을 고려하여 인용문을 천천히 읽으면, 그것이 임기응변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한 각본에 따라 엄비가 가마행렬을 이끌고 같은 시각 궁과 시전을 오가기를 되풀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엄비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비로 책봉된다. 왕비는  승하한 상태이고, 그렇기에 더욱 그 역할이 커진 귀하신 몸이 손수 시장을 보러다녔다는 것을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거사를 준비하는 사전 행동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규모의 전쟁의 원인을 그것을 주도한 세력들의 입장에서 살피곤 한다. 때문에 거대한 양대 세력들 사이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투퀴디데스의 함정'을 소개하는 『예정된 전쟁』에서 조선은 청의 속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정도로 잠시 기술될 뿐이다. 또한 외침보다 더 무서운 전쟁은 한 나라 내부의 세력간 펼쳐지는 권력쟁취를 위한 전쟁이다. 기원전 431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발견한 한 에피소드와 비교해보려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은 왜 일어났는가? 보수적인 스파르테는 과두정체를 신봉하며 강력한 중무장보병에 힘입어 그리스 본토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지배했다. 진취적인 아테나이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강력한 해군력으로 에게 해의 해양제국을 건설했다. 둘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주도세력으로,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이끈 주역이었다. 두 차례, 페르시아 군의 잔류 병력(육군)을 퇴각시키기까지 세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3년가량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들 두 나라만 치른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제국 가까이 해안가에 위치한 크고 작은 그리스 국가들부터 본토의 군소 국가들이 참여한 전쟁이기도 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재침이 두려워 보다 안전한 방어책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육상 세력 스파르테보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제해권을 장악하던, 아테나이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델로스(해상)동맹을 이끌면서 특히, 크고 작은 해상국가들의 보호국 역할을 하게 된다. 공짜는 없다. 아테나이의 해군력에 보호를 받는 나라들은 함선이나 병력을 그 댓가로 지불했고, 나중에는 군자금(현금) 형식으로 동맹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해마다 지불했다. 이를 기반으로 아테나이의 해군력은 급속히 신장되었고 동맹국들의 안보(지킴이)만이 아니라 에게 해의 해상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한 동맹이지만 안전한 해상무역을 위해 함선(해군력)들이 필요했던 것, 이것이 황금기의 아테나이('페리클레스의 시대'라 부른다)를 일군 배경이다.

이처럼 페르시아제국과의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결성된 델로스동맹(기원전 478년)을 발판으로 아테나이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한다. 이처럼 200여 개의 도시국가 중 절반이 아테네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스파르타와 주요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번영과 과도한 팽창정책을 견제할 목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기원전 6세기 스파르타의 주도로 결성)의 결속을 강화하게 된다. 이 동맹은 기원전 500년을 기준으로 아르고스를 제외한 전 펠로폰네소스를 통합하는 도시동맹이었다. 어쨌든 그리스의 양대 진영이 맞붙은 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전쟁사'에서 투퀴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사 1권 23장(6)

'공포감'을 '두려움'으로 옮기기도 하고 '질투'(아테네의 번성과 스파르타의 질투가 부른 비극)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최근 들어 뜨거운 이슈로 등장한 '투퀴디데스의 함정'(혹은 '덫')이란 용어의 출처다. 불과 한 세대만에 경제력에서 군사력에서 주변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에서 중국의 급부상은 미-소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세계1위 국가의 지위와 특권을 누리던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 두 세력의 긴장과 갈등을 사전에 해소하지 않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세계 3차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제 전 인류의 노심초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이들 두 세력이 맞붙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어, 자칫 예상되는 전쟁의 도화선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강대국들의 세력 대결에서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전장(戰場)이 되었다. 그때그때 그들의 세력 개결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고 안전한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27년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촉발한 '불꽃' 역할을 했던 사건(쟁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대한 양대 세력의 틈에 낀 군소국가의 운명은 '눈에 보이는' 전쟁의 원인에 좌우되기에 하는 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한국인의 관점은 이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에 직결되어 있지 않겠는가?

◀코린토스만과 사로니코스만 사이 코린토스지협을 중심으로, 오른편의 메가라, 아테나이 등과 왼편 아래 스파르테의 위치 등을 살펴보면, 메가라가 거대 세력 사이에 낀 국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펼쳐진 그리스와 에게 해 일대의 지도를 살핀다. 육상세력으로 육군이 우위인 스파르테가 아테나이(가 위치한 아티카)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야 한다. 해군력이 우위인 아테나이로서는 여차 하면 수많은 함선들을 국토로 삼을 작정으로 스파르테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테나이가 대책없이 스파르테의 육군을 견제하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다. 영화 <300>1에서 보았던 유명한 전투, 300인 스파르테 전사들이 페르시아 대군들을 막아낸 고개 테르모뮐라이를 기억할 것이다. 아테나이 입장에서 스파르테의 육군을 1차로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지형이 바로, 코린토스지협이다. 보유한 함선도 변변치 않거니와 육로로 침공해야 하는 스파르테는 코린토스 지협을 거쳐야만 아티케를 공략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은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인 코린토스가 영토이며, 코린토스지협과 아테네 사이에 있는 도시국가가 메가라인데, 이 나라 또한 스파르테의 오랜 동맹국이다. 부상하는 아테네에 기존 주도세력인 스파르테가 느낀 '두려움' 때문에 이 전쟁이 발생했다고 보는데, 그것은 아테나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설 준비를 차근차근 해야 한다, 아테나이의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는 그렇게 준비한다. 그것이 이 전쟁의 도화선 중 하나인 페리클레스가 공표한 '메가라 법령'이다. 또 하나 두 세력 사이에서 전쟁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나라가 코린토스(식민시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 코린토스-케르퀴라 전쟁)다.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바다를 낀 국가들이라 해상무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고, 아테네의 해상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에서 지도를 한 번 살피면, 해안선 부근에 위치한 메가라시와 아테나이의  페이라이에우스 항 사이에 그 유명한 살라미스 섬이 있다. 영화 <300>2의 배경이다. 코린토스지협을 경계로 서쪽 바다는 코린토스 만(灣)이고, 동쪽은 사로니코스 만이다. 사로니코스 만을 사이에 두고 아테나이 건너편이 아르고스인데, 이 나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테나이에 우호적인 세력이다. 아테나이와 아르고스 사이의 바다 사로니코스 만이야말로, 에게 해 일대의 해상(해안) 국가들과 아테나이의 무역에서 가장 활성화된 시장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432년(이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이), 아테나이(의 페리클레스는)는 메가라 법령을 발표한다. 메가라인들이 아테나이의 사원에서 불경한 언행을 저지르고, 아테네에서 도망친 노예를 숨겨준 데 대한 벌로 메가라에 가한 일종의 경제제재다. 메가라 속한 동맹과는 별도로  메가라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해상무역권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2018년의 기사 하나를 살핀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는 실패했다. 왜 2421년 전 아테네가 메가라에 부여한 무역금수 조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아테네는 메가라 법령을 '사소한 조치'라고 여겼지만, 메가라는 '적대의 의도'로 읽었다. 압력은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생산했다. 위협이 공포를 부르자, 제재가 전쟁으로 이어졌다. 현대 외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제재도 마찬가지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재라는 수단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김연철 칼럼(통일연구원 원장, 한겨레, 2018-09-02)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0301.html#csidxda67d0013b76af5ac4652ac09950c7f

 

투퀴디데스는 27년 전쟁의 불꽃 역할을 한 '눈에 보이는' 두 세력의 갈등을 세 가지로 보고 있다. 1)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해전(소극적이지만 아테나이가 케르퀴라를 지원한 점), 2)메가라 법령 공포, 그리고 3)'학살'로 표현되는 아테나이의 멜로스섬 침공이다. 이것들은 두 세력이 30년 평화조약을 깬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평화가 얼마나 불안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데, 특히, 메가라에 대한 경제 제재는 스파르테의 역린을 건드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실제 전쟁 발발을 대비한 아테나이의 포석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인류 최초의 경제 제재라는 점에 유의하자. 공성전에서 성을 포위하는 것도 식량을 비롯한 생활재 유통을 막는 경제 제재이기는 하지만, 한 나라의 경제권을 제약하는 현재에도 유용한 그런 조치이기 때문이다. 장사로 먹고사는 메가라 사람에게 아테네와 인근 항구 출입을 못 하게 했으니 '벌'의 효과는 전쟁만큼이나 쏠쏠하다. 메가라의 동맹국인 스파르타는 아테나이에 법령 철회 요구하지만 아테나이가 거부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파르테의 정치 체제는 정확히 과두정과 왕정을 혼합한 형태였다. 그러나 아테나이는 민주정으로 가령, 페리클레스가 유능하고 인정받는 정치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회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자의적으로 내릴 수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쟁과 같은 중대사의 결정에서 스파르테의 왕도 중지를 모아야 하는 설득전을 펼쳐야만 했다.

『예정된 전쟁』의 저자는, '전쟁사'에서 전쟁을 결정하기까지 두 세력 내부에서의 갑론을박을 소개한 것에 근거해, 두 지도자(페리클레스와 스파르테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친분이 두처운 관계였다)의 혜안에 따른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진단한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중대사는 양국 정부 내 각 분파들의 대립과 협상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는 얘기다. 페리클레스의 경우 민회의 실력자였지만 정치인 중 한 명이었고, 설득(정치연설) 여부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었으며, 당시 아테네의 법률시스템은 독재를 막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살아 있었다. 스파르테의 경우,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동맹국들(각 1표를 가진), 특히 코린토스·메가라 등이 동맹회의에서 결사적으로 개전(開戰)하기를 압박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메가라만이 아니라, 두 동맹에 속한 나라들은, 그들이 속한 동맹의 맹주국이 전세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따라 정체(스파르테의 과두정과 아테나이의 민주정)를 둘러싼 내전에 휘말린다. 스파르테는 자신들의 강점(육군력)을 이용해 수시로 아티카에 침공하여 아테나이를 압박하고, 아테나이의 경우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을 때는 특히, 코린토스지협의 스파르테 동맹국을 침공하여 괴롭힌다. 특히 아테나이는 코린토스지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메가라를 수시로 침공한다. 함선을 동원해서 가볍게 침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아테나이로서는 힘든 전투가 아닌 것이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에피소드를 살필 차례다. 전쟁 7년차 아테나이는 스파르테 인근의 퓔로스에 거점을 마련하고 이를 회복하려는 스파르테와 싸워 승리한다. 스파르테인들은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맺자고 제의하지만 거절당하다고, 스파르테 군사들은 끝내 항복하고 아테나이로 끌려가서 구금된다. 전쟁 8년차 아테나이는 시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함으로써, 중요한 현안을 해결한다. 바로 이즈음, 메가라에 내전이 발생한다. 이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주도권을 잡자, 메가라 내부의 친아테나이파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테나이 군을 불러들이는 것. 잠시 전쟁 8년차 여름의 '전쟁사'를 인용한다.

"같은 해 여름 메가라 시내의 메가라인들은 양면으로 압박을 받았으니, 전쟁에서는 전군을 동원해 매년 두 번씩 영토를 침범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시달리는가 하면, 내전 중에 민중파에게 쫓겨난 뒤 페가이를 거점 삼아 약탈 행위를 일삼는 자신들의 망명파에게도 시달렸다. 그래서 메가라인들은 망명파를 다시 받아들이고 협공으로 도시가 망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을 자기들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6(1)

급기야 민중파 지도자들은 1)민중들의 지지기반이 굳건하지 않고 2) 망명파의 위협이라는 '상수'를 해결할 수 없다, 고 판단,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기로 결정하고, 아테나이 장군들과 접촉하여 아테나이군이 그들의 성을 제압하도록 협조한다. 메가라인들은 민주정(민중파, 친아테나이)과 과두정(친 스파르테)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여기에 두 세력의 원군이 파견되어, 두 세력은 그들의 교두보를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전쟁사'를 참조하시고) 이 내란 초기의 에피소드 하나를 인용한다.

 

"(3)날이 새려 했을 때, 이 메가라인 반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성문을 열어두기 위해 얼마 전부터 밤에 수비대장의 허가를 받고 약탈하러 간다는 핑계로 조정 경기용 보트 한 척을 사륜거에 싣고 해자를 건너 바닷가로 나가 출항했다가, 날이 새기 전에 보트를 사륜거에 싣고 성문을 지나 성벽 안으로 들여오곤 했는데, 새벽에 항구에는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을 테니 미노아 섬을 봉쇄한 아테나이인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이라고 했다. (4)그래서 이번에도 사륜거는 어느새 성문에 도착했고, 성문은 여느 때처럼 보트가 들어가도록 열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아테나이인들이 각본대로 매복처에서 뛰쳐나와 문이 도로 닫히기 전 사륜거가 문틈에 끼여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방해하는 사이 문에 도달하려고 재빠르게 달려갔다. 동시에 메가라인 반역자들이 문간에서 보초들을 죽이기 시작했다."-'전쟁사' 4권, 67(3~4)

 

'메가라인 반역자'란 아테나이에 나라를 넘기려는 민중파 일부(친아테나이파)를 말한다. 정황상 민중파가 득세한 상황이라도 나라를 넘길 정도(민중파 대부분이 친아테나이파는 아니라는)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메가라인들로서는 당파를 떠나 아테나이도 스파르테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전투는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나고 메가라의 과두정은 오래 지속된다. 이제 타임머신에 올라, 1896년 2월 11일 우리나라, 일명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그날로 가보자.

 

아관파천은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왼편에서 시작되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옛 러시아공사관에 이른다. 이곳까지 당시 조선의 왕이 궁궐(경복궁)을 장악한 칭일파의 위협에서 피란한 사건이다. 고종은 경복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을 통해 궁을 벗어났다. 그곳이 어디든  왕이 머무는 곳(행재소)이 수도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으로써, 러시아공사관은 요즘의 청와대 대톨령 집무실이 된 셈이다.『인문으로 만나는 도시골목여행』(김란기 지음, 발언미디어, 2017년 12월)에서 필자는 고종을 태운 가마의 이동경로를 추적한다. 고종은 왜 떠나야만 했으며(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의 살해, 일명 '을미사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얘기를 읽는 동안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아관파천 두 달 전에도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일명 '춘생문 사건'이다.

"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 한성부에서 발생한 친러파-친미파-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한 고종을 친미파 및 친러파, 개화파가 계파를 초월하여 협력, 왕궁 밖으로 탈출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위키백과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반 서울 사진으로 추정. 1926년 경복궁의 정면을 가로막고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궁궐 벽을 끼고 서 있는 건물이 건춘문이다. 사진 오른쪽 중앙쯤이 종로통일 것이다.

 

춘생문은 경복궁의 동북쪽에 있는 문(門)이다. 건춘문은 경복궁의 정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지금 동십자각에서 북쪽으로, 북촌한옥마을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있는 경복궁의 동쪽 정문이다. 그런데, 이 건춘문은 궁궐의 나인들이 군주의 식탁을 차리기 위해 시장을 보러 오가던(최단거리), 곧 종로 시전을 오가는 관문이었다. 아관파천 때에 고종이 건춘문을 통과했다는 기록은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고종이 건춘문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교의 『대한계년사』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아관파천 때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종과 세자를 태운 가마는 건춘문을 나온 후 어떤 경로로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했을까?" -앞의 책

그런데,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은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로 보인다. 필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데, D-day를 정한 이후에 엄비가 몸소 종로의 시전으로 쇼핑을 핑계로 오가지 않았을까, 추정하는데, 필자는 거기에 공감하면서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엄비(영친왕과 덕혜옹주의 생모)가 군주의 음식물을 준비한다며 날마다 새벽이면 가마를 타고 시전(市廛)으로 나갔을 길은 시전이 있는 종로 방향인 중학동 길은 아니었을까?  -앞의 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엄비가 손수 장을 보러 종로의 시전을 오가는 퍼포먼스를 했고, 고종을 모신 가마가 그런 일상적인 행차로 가장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친일파의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메가라시의 관문과 경복궁의 건춘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 벌인 두 사건을 비교하자니, 마음이 씁쓸하다. 이 간단한 비교를 하려고 얘기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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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3-1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지도를 봤어요.˝라는 영화 <접속>의 명대사를 조금 바꾸어, 제목을 정했다. 지도의 지도 없이 ‘전쟁사‘ 읽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필자
 

『메넥세노스』, 플라톤의 저작 중 위작 논란이 있는 대표적인 대화편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의 우리말 원전번역은 크게 세 흐름― 박종현 교수(서광사), 정암학당 연구원들(이제이북스), 천병희 선생(숲)―으로 진행되고 있다. 천병희 선생의 경우 어떻게 번역가 한 사람이 플라톤의 주요한 대화편들을 연이어 번역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속도감 있게 작업했다. 그 배경이 되는 당대의 전후한 주요 고전들을 번역했기게 가능했으니라. 다른 두 그룹은 철학 전공인 까닭에 해설과 역주에 노고를 보내야 하는 것과도 상관이 있으리라. 어쨌든 천 선생은 거의 대부분의 플라톤 대화편들을 번역하면서도 <메넥세노스>는 번역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은 위작 논란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궁금증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다른 두 '그룹'은 최근에(2018년 12월) 박종현의 역주 <메넥세노스>가 추가됨으로써 (이제이북스 이정호의 번역은 2008년 출간) <메넥세노스>가 위작논란에서 벗어나 있음을 느끼게 한다. (물론 위작 논란 중인 작품이라도 번역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메넥세노스>는 소크라테스의 연설문(추도사)을 다룬 대화편이다. 연설문을 메인으로 전후에 대화편들이 으레 그렇듯이 대담자(참가자)와의 농담 섞인 편안한 대화가 펼쳐지지만, 연설은 무한정 길어질 수도 없고, 정해진 시간에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그 분량이 짧다. 때문에 번역은 하되 한 권의 책(단행본이라고 하면 흔히 요구되는 볼륨)으로 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정호의 번역은 정암학당 플라톤전집 시리즈가 그렇듯이 연구논문이라고 할 적잖은 분량의 작품해설을 앞세우고, 디테일한 후주가 대미를 장식하며, 그 중간에 본문(텍스트)을 배치하는 형식이다. 해서 <메넥세노스>만으로 한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다. 물론 부록에는 이 대화편과 연관되어 있는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유명한 연설, '페리클레스가 전몰자를 위한 장례식에서 한 추도연설' 전문과 해설이 실려 있다. 아직 박종현의 역주(『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서광사, 2018년 12월)는 읽지 못한 상태이고, 좀 늦었지만 이정호의 번역은 읽은 상태이다. 두 버전의 번역을 읽어보아야 <메넥세노스>의 본문(텍스트)에 대한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박종현의 신간은 앞서 간행된 천병희의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숲), 『이온.크라튈』(숲)와 더불어, 독자들의 선택 폭을 넓히며 풍요로운 독서가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메넥세노스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한 연설이 (이하 '소크라테스의 추도연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전몰자들를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과 어떤 식이건 비교되면서 '대립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크라테스-플라톤(플라톤이 대화편들에 소크라테스를 내세움으로써, 실제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구분할 수 없기에 그 자체가 '문제'로 끊임없는 논쟁거리이다. 이런 복합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한다)이 이 대화편의 필자가 분명한가 하는, 곧 위작논란과 관련해서 진위를 가리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결정적인 근거(진품임을 확신하는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넥세노스>는 후학들의 흥미로운 논제(論題)이자 관련된 논문(論文)과 토론의 논재(論材_조합이다)로 텍스트 자체와 집필 배경들이 사용되었고,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 숟가락 하나 더 얹고 싶은 마음도 그럴 ‘내공’도 없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소재들을 중심으로 관련 근거들을 대강이나마 살피는 일이 숙제처럼 다가온다. 문제를 해결이 아니라, 스스로 숙제를 내는 일에 머물게 될지라도.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은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 대화편은 존재 자체에서부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분리해서 살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곧 플라톤이 비극시인이라면 그의 비극 무대에는 소크라테스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대화편 제목에 이 주연급 배우가 등장하는 것은 단 한 편, <소크라테스의 변론>뿐이다. 그것도 다른 대화편들처럼 그냥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그러므로 여느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이 있듯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도 그러한가, 난데없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세히 살피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상당수 ‘변론’을 거론하는 글들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다만, 대놓고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뿐(그런 논문이 왜 없겠는가).  실제로 플라톤은 상당수의 대화편(구성 형식)에서 '인간적인' 소크라테스를 내세우기 위해 애를 쓴 흔적들이 보인다. 그런데 어딘지 어색하고 '작위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의 도입부처럼, "그렇게 오래오래 잘 살았단다."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처럼. 그렇고 그런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줄 알고 본론에서 발언하는 소크라테스의 '입'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며, 그러라고 하는 듯하다. 

 

무엇이 A인가, A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때에, 무엇이 A가 아닌가, A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더 쉽다면, 그렇게 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A가 '인간'이라면,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통해 그들이 창안한 특유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대화를 통해 숱한 발견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인용할 때 쓰는 통례적인 방식을 따른 것이다. 오늘날 의미에서 A를 '철학자'로 대입하자. '철학자(A)'를 정의하기 위해, 무엇(어떤 것)이 철학자가 아닌가(~A) 그 사례를 자주 드는데, 동네북처럼 소환되는 ~A가 수사학자이다. 그리고 수사학을 기술의 일종인 '수사술'로 취급하는 등 이 분야에 대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태도는 늘 시종일관 근엄하다. 어떤 대화편은 '수사술'의 한계를 입증하는데 거의 전부를 할애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대화편에서는 '수사학'을 조금은 유연하게 '인정'하기도 한다. 전자가 <고르기아스>라면 후자는 <파이드로스>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이것은 철학자(라고 하자) 혹은 철학(이라고 하자)이라고 그 범주(範疇: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를 획정(劃定: 어떤 범위나 경계 따위를 명확히 구별하여 정함)하는데 수사학과 수사학자의 존재가 늘 걸림돌이 되어서였을까? 철학자와 수사학자, 철학과 수사학의 경계가 모호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는 때로는 목숨, 나아가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우려되고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희생양'이 소크라테스인 것이다. 

'수사술'에 능할 뿐만 아니라(오늘날의 성공한 연설가≒말도 잘하는 정치가라고 하자), 그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들, 그것을 배우려는 젊은 수강생들이 많아 나름의 교육시장(사교육)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이끄는 선생님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 가운데 대표주자일 뿐더러, 제일 ‘잘나가는’ 소피스트였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중 하나인) '소피스트 혐의'로 기소된다. 때문에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변론’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입증한다. 그렇게 나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소피스트가 아님을 변호한다. ‘변론’을 읽어보면 그런 대목들이 적지 않아 일일이 인용하기가 벅찰 정도다. 어쩌면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신탁을 끌어들이는데, 그러다가 문득 또 하나의 기소 이유(아테나이인들의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까지도 변론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양수겸장 (兩手兼將)의 변론을 펼친 셈이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소피스트 협의야 말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진짜 이유로 보인다.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나는 결코 그들로부터 (금전 혹은 물적인) 대가를 받지 않았어, 강조할수록 배심원들은 ‘그렇다면 왜, 무엇으로’ 촉망받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느냐, 더욱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테나이 시민들의 고정관념은 그렇게 견고했고, 플라톤-소크라테스는 절망하였지만, 바로 그런 상태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며 살았으므로 그런 이유로 기소되는, 딜레마에 (적어도 그의 육신은) 사로잡힌 것이다.

 

플라톤은 그 법정에서 스승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전언(傳言)에 의존했다는 ‘설정’가 필요 없는, ‘필요해서도 안 되는’ 유일한 대화편이다. 대화가 아닌 형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종일관 소크라테스의 말씀으로 일관한다. ‘배심원 여러분 좀 조용히..’, 변론 중 한마디를 통해, 배심원들의 반응을 엿볼 뿐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여느 ‘수사술’에 능한 그들처럼(소피스트) 변론하지 않았기에, 배심원들은 낯설고 우리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본 것 같다. 다름은 때론 무서운 결과를 부른다. ‘다름’이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는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다르지 않음’을 역설하는 동안 ‘다름’을 변론한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변론’),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행한 변론이라는데, 어느덧 엄혹한 세월은 갔고, 변론은 '작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인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한 방법으로 크세노폰을 잠시 소환한다. 그가 스승을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소크라테스 회상록>에는 (한 반에 명예와 권력과 부를 획득하는) 현실정치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전공필수’과목으로 수사학을 꼽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친형(글라우콘)이 그런 정치 현장에 투신하려는 것을 말리고(3권 6장), 플라톤의 외삼촌(카르메데스)는 정치가로 나서라고 떠밀기도 한다(3권 7장). 크세노폰의 저작은 요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노량진 학원가를 찾아야 하듯(신림동 고시촌의 요즘 풍경은 잘 모르겠다), 그런 아테나이 젊은이들의 취업현장을 스케치한다. 당시 법정에 있지 않았고 사형수에게는 오래 수감돠었지만 면회할 수도, 스승의 최후를 지켜볼 수도 없었다. 때문에 전언(傳言)에 따라, 당시의 스승을, 그가 아는 당신을 '회상하였을 뿐인데, 거기에 문득 소크라테스의 초상화 한 점이 걸려 있다. 무엇 때문일까?
『메넥세노스』와 『수사학』,  『메넥세노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관련하여, 시작한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는 박종현의 <메넥세노스>까지 살펴야할 것 같다. <메넥세노스>는 작품 안팎의 배경들, 작품 안에도 수수께끼가 산재하여 신중함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투퀴디데스, 로마의 키케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저작뿐만 아니라, 전기들도 감안해야 한다. 플라톤에게 수사학(수사술)은 스승을 죽음으로 이끈 것으로 평생 동안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크세노폰은 정치에 입문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플라톤의 친척들 얘기까지 거침없이 다룬다. 플라톤 자신이 정치지망생이었다는 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수사학』을 저술 가운데 하나로 추가하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은 깊었으리라(물론 그 자신의 생전에 출간되지는 않았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들은 필사본만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1세기 뤼케이온 학원의 원장이던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로마에서 출간되었다.) 잠시 숨고르기를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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