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3/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또한 자신의 대담 상대가 뤼시스에서 메넥세노스로 바뀌는 시점에 소크라테스는 자연스럽게 힙포탈레스가 나서게 하여 뤼시스와 눈인사를 하게 한다. 논점은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친구’ 인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의 ‘우정’으로 옮겨가고, 친구간의 사랑(우정)은 뭔가, 논의는 무르익는다. 누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의 친구인가,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인가? 아니면 아무 차이가 없는가? 서로 사랑하지(‘마중 사랑’) 않는 한 어느 쪽도 다른 쪽의 친구가 아닌 것인가?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幸福하나니라.“(1)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2)

 

(1)은 청마 유치환 시 「행복」의 한 대목이고, (2)는 가수 김세환의 히트곡 <사랑하는 마음>(송창식 작사·작곡)의 가사다. (1)은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2)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쎄시봉>(2015. 2.)의 삽입곡으로 쓰여 젊은 독자라도 알만한 노래(가사)다. 대체로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게 연애상담의 ‘모범’답안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혼자서 속 끓는 외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 역시 맞는 얘기다. 인용(2)처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을 받는 순간’ 훨씬 짜릿하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1)은 ‘외사랑’이라도 어쩔 수 없지만 (2)에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마중사랑이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미워하는 일은 왜 일어날까, 사랑하면 친구이고 미워하면 적인데, 소크라테스는 ‘우정(사랑)’이 개입하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은 서로의 유사성 때문에 사귀는 것인가? 그렇다면(유사함과 유사성을 우정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 악인과 악인이 서로가 가진 악행의 유사성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이 나누는 것은 우정이 아니고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친구>(곽경택, Ⅰ-2001, Ⅱ-2013)를 떠올려보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이 내세우는 ‘으~리’를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여보게, 유사한 것끼리 친구가 된다는 말의 숨은 뜻은 훌륭한 사람들만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고, 나쁜 사람과 훌륭한 사람 또는 나쁜 사람과 다른 나쁜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하네.”(214d)
□ 선생의 말에 뤼시스는 동의한다. “훌륭한 사람들이 친구라는 얘기지?” 역시 뤼시스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만이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 뤼시스는 용모가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方正)하다. 힙포탈레스는 글 솜씨가 뛰어난 준수한 청년인데다가 부잣집 아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깊어지기 전에 힙포탈레스와 뤼시스가 연인과 연동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일까?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우정은 ‘진정한’ 우정일 뿐이다. 우정은 실제로 얼마나 허약한가?
A가 B와 유사하기에 B의 친구라면, A는 B에게 유용한가? 유사한 것들이 서로 돕지 못한다면 서로를 존중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닮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을 욕구한다. 결국 가장 상반된 것들끼리 가장 친해야 한다. 급기야 소크라테스는 정리한다. “오히려 훌륭하지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216,c) 이해하기 어렵다. ‘(1)유사한 것은 (3)유사한 것의 (3)친구가 될 수 없다.’에 다음 “(1)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2)자기와 유사한(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3)친구가 될 수 없다.”를 대입한 결과다. 그러므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도 팽목항 하늘나라 우체통(타임로드)

□ 논점은 어떤 이익이나 필요 때문에 맺는 관계도 우정일까 하는 것. 뭔가가 필요한 사람이 그것을 찾는다. 결핍(못갖춘마디)이 큰 사람이야말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역으로 뭔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사람 혹은 자족하는 사람들에게 우정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단적인 예로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 친구는 필요하지 않다. 다시 병이 들었으므로 병이 들 수도 있음으로 의사 친구를 두면 ‘쓸모’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고 사랑일까? 이 물음에서 ‘진정한’이란 조건을 걷어내야 궁극의 답을 얻게 될 참이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나쁜 것의 있음’이 친구를 찾고 우정을 맺게 한다는 점이다. 해서 일단의 결론을 내린다.
“혼에서도 몸에서도 그 밖의 모든 영역에서도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의 함께함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수단들이 목적을 위해 강구되어야 하는, 그 자체가 목적인 가치가 있다. 그것이 우정이고 사랑이라야 하지 않을까? 물론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우리에게 친구인 것은 ‘친구’라는 말을 듣기에 부적절하며, 진정한 친구란 우정이라고 불리는 이 모든 것의 종착점”(220b)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이 아니라) 우정이란 무엇인가

□ 그렇다면 훌륭한 것은 왜 사랑받는가?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이렇듯 (나쁜) 공동의 적을 가진 사람끼리 필요에 의해서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쁜 것들이 ‘훌륭하면서 유사한 것들’이 친구가 되게 한다고 받아들여도 될까? 그렇다고 하면, 그런 (‘공동의’ 또한 ‘저마다의’) 적이 떠나고 나도 그런 우정이 지속될 수 있을까? 나쁜 것의 존재가 우정의 원인이었다면……. 또한 누군가를 필요로 한 나쁜 동기들이 소멸되어도, 우정(사랑)이 지속된다면 왜 그러한 것일까, 이것이 진짜 우정(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건 아닐까?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연정과 우정과 욕구의 대상은 우리와 친근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를 친구이게 하는 것은 “본성적인 친근감”이다. 그리고 “혼이나 성격이나 태도나 외모와 관련하여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욕구도 연정도 우정도 느끼지 않을 걸세.”라고 논의를 마무리 짓는다. 용두사미의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와 친근한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뤼시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 “가짜가 아닌 진짜 연인은 반드시 연동의 사랑을 받아야”한다고 덧붙인다. 이 말에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그 순간 “흽포탈레스는 좋아서 희색이 만면해졌”단다.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훌륭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것 못지않게 불의한 자들끼리도 나쁜 자들끼리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쉽지만 모두들 이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강 <뤼시스>의 내용은 이러하다.
 

□ 결국 대담은 힙포탈레스를 연동 뤼시스와 맺어주는 ‘이벤트 한마당’이었다는 말인가? 하여튼 소크라테스는 산파 역할 자체보다는 중매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훌륭한 두 젊은이가 연인과 연동이 될 수 있게 자리를 깔아줬다면, 그 자체로 좋은 일을 한 셈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임기응변 같고 ‘즉문즉답’인 듯한 <뤼시스>는 우리에게서 소멸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을 숙제인 ‘우정’과 ‘사랑’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우정과 사랑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에 참전(參戰)하게 한다. 이것들은 차차 ‘우애’ 혹은 ‘친애’라는 개념으로 진화해갈 참이다. 플라톤이 <뤼시스>에서 싹을 틔운 우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사진: 네이버블러그 '자국의 미' /거제 청마 유치환 생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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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4/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 ‘우정에 관하여’ 깊이 묻는 <뤼시스>가 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하 ‘윤리학’)은 상상할 수 없다. ‘우정’만이 아니라 ‘용기’(<라케스>)와 ‘절제’(<카르미데스>)에 대한 논의도 예외는 아니다. ‘윤리학’에서 ‘우정’은 ‘우애(혹은 친애)’라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우애’은 전체 10권인 ‘윤리학’의 8권과 9권의 주제로 전체분량의 30%쯤 이상이 할애된다, 익히 알려진 얘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이라는 전공필수과목을 이수 전의 개론서로 받아들여진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저마다의 구슬들(미덕들, 사람 자신,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은 많지만, 그런 구슬들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필자는 우정과 사랑, 우정과 우애를 혼용하여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차차 밝혀질 것이다.
□ <뤼시스>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대화편이기도 하다. 작년(2014)년 말로 기억하는데,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은 공약 가운데 하나이며 인권변호사로서 살아온 본인의 소신에도 맞는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를 앞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대권에 관심이 없다, 라고 역설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속내를 엿본 사건이었다. 완고한 유교윤리가 진보-보수의 프레임에 얽혀 있다고는 하나, 좀 멀리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뤼시스>에서 플라톤은 성소수자의 인권측면에서 동성의 사랑을 다루지 않았다. 그냥 사랑이고 그냥 우정이다. 그런데, 우리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플라톤이야말로 성소수자의 ‘있음’ 그대로에 유능한 변호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히다.

□ 사람과 사람은 왜 친하고 또 친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에서도 남자와 여자(에로스를 동반하는), 남자와 남자의 사랑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것일까? 왜 사랑하게 되고 왜 미워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라면 좋을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우정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도 ‘진정한’ 우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란, 우정이란 무엇인가 이름붙이는 올바른 정의(定意)와 정의(定義)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천병희는 <뤼시스>에서 'philia'(필리아)를 우애(友愛)로, 'philos'(필로스)를 ‘친구’ 옮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예민한 단어이면서 핵심단어가 된다. 'philos'의 우리말 채택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지만 'philia'의 경우는 고대 그리스의 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견들이 있다. 그리스어는 ‘필리아(philia)’는 ‘우정(友情)’ ‘우애(友愛)’ ‘친애(親愛)’ ‘사랑’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는 ‘philia’를 어떤 우리말로 옮겨야 할지 고민한다.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우애’를 선택했다. 강상진·김재홍·이창우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친애’를 채택했다.

A)“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친애’는 부부나 사제지간, 선후배 사이, 더 나아가 동포애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괄하며, 단순한 순간적 감정(pathos)의 수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의 사귐과 인격적 친밀성을 전제한다.”(앞의 책, ‘philia’ 주석, 60)

‘우정’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유교 문화권에 살고 있어, 부모 자식 사이, 선후배 사이, 사제지간, 군신지간과 같은 수직적 인간관계가 보통 친구와 동료로 함축되는 수평적 인간관계와 날카롭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곧 ‘philia’를 ‘우정’으로 번역하면 ‘수직적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리스어에서 ‘philia’와 같은 어원을 가진 필로스'(philos)‘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 B)“보통 ’친구‘로 번역되는 (필로스도) 선-후배나 부모-자식 관계와 같이 ‘친(親)한 사람’, '함께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이다.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다만, ‘친애/친구’라는 최종의 우리말 채택에서 공통분모는 ‘친(親)’이다. 대우(待遇: 어떤 대상에 대한 높임의 태도가 표시되는) 체계가 엄격한 우리말의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친(親)’도 순우리말은 아니다. 그리고 한자 ‘친(親)’의 의미, 그것을 우리말로 펼치는 뜻도 실로 다양하다. 결국 그리스어의 온전한 우리말 의미를 구분해내려다가 오히려 더 한자의 다양한 의미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가령, ⓵부자유친(父子有親)과 ②사고무친(四顧無親)에서 각각 쓰인, 친(親)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①은 ‘친애’에 가까운 듯 하다. 그러나 ⓶는 흔히 ‘고아 상태’임을 떠올리게 하는데, 부모 형제와 같은 혈육만이 아니라, 혈육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친한 누군가가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를 말한다. 위 역자들의 주석과 비교하자면, ①의 친(親)은 사자성어 해설에 ‘친애’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친함의 범위에서 ‘필리아’보다는 ‘필로스’에 가깝고 ⓶의 친(親)은 ‘필로스’보다 ‘필리아’에 더 가까운 듯하다.
□ 한편 ‘친한’ ‘편하다’와 같이 일상적인 말에서의 의미를 떠올릴 때, ⓶의 친(親)이 ①의 친(親)보다, 더 넒은 대상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필리아’에 가깝지만, ‘친애’(위 A)가 적용되는 엄격성을 고려할 때, ‘필로스’에 더 가까운 듯하다.(이것은 단적인 예를 제시한 것이고, 숱한 용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하여 ‘도로 ○○당’이라고, ‘philia’의 우리말로 ‘친애’를 선택하기도 그렇고, ‘우정’은 좀 그러고 결국 ‘우애’를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엄밀히 따지면 'philos‘를 우리말 ’친구‘로 옮기는 것도 고민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필리아'(philia)를 ‘우애’로 옮기건 ‘친애’로 옮기는 부분은 지금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지 싶다. 지금은 <라케스>에서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사랑)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는 ‘우정’(혹은 사랑, ‘사랑’을 포함한)이 ‘친근함’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 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친(親)이란 무엇일까? 유교윤리의 실천 덕목인 오륜(五倫)의 하나인, 부자유친(父子有親)은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라”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맨 먼저 맺는 인간관계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것들보다 ‘친한’ 관계이다. 해서 ‘천륜(天倫’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도 없는 절대성 때문에 오륜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하여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에서처럼 친부살해나 근친상간은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가 된다. □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다. 항상 서로 사귈 벗을 찾아 함께 어울리며 살아간다. 이런 벗[朋友]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믿음(信])이다, 해서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인륜의 실천덕목인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로 편입된다. 그런데, ‘신(信)’의 자리에 ‘친(親)’을 쓰면 어떻게 될까? 공자는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서 ‘無信不立(무신불립)’을 말한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지만 <안연 편>의 다음 부분이다.

자공(子貢)이 공자께 물었다. “정치(政治)란 무엇입니까.”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둘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 예부터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백성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하는 법이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신(信)을 친(親)으로 대치(代置)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믿음은 친한 사이에서 생기고, 그 친함은 ‘믿음’을 있을 때 유지된다. 또한 친할 때 믿음은 돈독해진다. 식량보다도 군대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백성들의 믿음(新)이라고? 경전 속에서 아직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삶 가까이서 만나는 친(親)은 참으로 천박(淺薄)할 뿐 아니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친이(친李)-친박(친朴)-친노(친盧), 反이-反박-反노, 누구와 친(親)한가 그렇지 않은가, 반대라면 어느 정도로 그 반대편에서 그 중심(권력)와 적대 관계에 있는가? 그런 이상한 패거리 권력의 메시지만 전파하는 영혼도 가슴도 없는 기자들은 ‘받아쓰기’에만 혈안이더니 급기야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되었다.


□ ‘윤리학’에서 만나는 ‘필리아(philia)’는커녕 ‘필로스(philos)‘도 기대하기 힘들다. ‘필리아(philia)’를 영어권에서는 'friendship(우정/우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필로스(philos)‘는 ‘friend‘가 될 것이다. 'friendship'의 확장된 단어로 ‘fellowship(동료의식/동료애)’을 들 수 있다. 또한 ‘friend‘와 대응하는 ’fellow‘가 있다.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은 물론이고 전국민의 의식 전반에 만연한 ’친(親)‘이라는 개념의 오용과 아전인수식 전용(轉用)은, 그런 그들을 그들 각자를 ’fellow‘의 한 쓰임으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fellow:.... 2.(1)(보통 fellows) 동아리, (나쁜 짓의) 패거리; 동료, 동지; 동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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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5/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의 역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아카데메이아를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플라톤의 직계제자이면서 오늘날 학문이라고 부르는 제반분야를 개척한 ‘청출어람 첨어람’이다. 그러나 그의 ‘윤리학’은 <라케스>를 비롯한 스승 소크라테스-플라톤이 대화편들에서 다룬 미덕들에 대한 종합이고 ‘리뷰’이면서 ‘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철학사의 맥락, 그 맨 앞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의 대상(사랑할만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모든 것이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것만이 사랑받으며, 바로 이것이 좋거나 즐겁거나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유익한 것은 어떤 좋음 또는 쾌락을 낳는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 같으므로, 목적으로 사랑할만한 것은 좋음과 쾌락일 것이다.”('윤리학‘ 1155b. 17~20)
<뤼시스>에서 우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과 친구들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뤼시스> 214c)는 대목을 읽었다. 여기의 ‘좋음’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고 숭고하기 그지없지만, 범박하게 이렇게 곱씹을 수 있다. 좋은 사람들이 친구들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구가 되는) 모든 친구들이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곧 좋은 사람들끼리만 친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또는 ‘훌륭한’, ‘바람직한’ 친구 관계를 누구나 바란다. 그러나 바로 ‘친(親)’은 선(善)들끼리만 아니라 악(惡)들끼리도 돈독한 사이가 되게 한다.

 

“유용성(有用性)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뭔가 덕을 볼까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 점은 쾌락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재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윤리학’1156a 10-15)
상대방을 “그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것이나 “유익하거나 즐거운 존재로서”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우애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런 사랑과 우애는 우연적인 것으로, 어떤 이익이나 쾌락을 ‘서로가’ ‘계속’ 공급하지 못하는 ‘고갈’ 상태에 이르면 소멸된다. 그리고 유용한 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사랑은 그런 거야, 우애란 것도 한낱 물거품이야, 그런 한숨을 토로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사랑, 참다운 우정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이르기가 그런 사랑이나 우정을 찾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 나쁜 친구도 친구다. 그것을 우정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어떤 개념을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닌 어떤 것과 그것이 그것인 어떤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경계’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peras'(페라스)다. 페라스에는 ’한계(limit, boundary)‘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페라스‘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다. 존재하는 것들을 다른 것들과 구분 시켜 주는 경계. '페라스'를 지닌다는 것은 곧 다른 것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사유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경계를 명확히 해야만 사유할 수 있다. 사유의 영역에서 한정성을 갖게 해주는 것이 정의(horismos, definition)이다. “경계를 명확히 해야만” 사유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 제대로 생각(사유)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없다’고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선언했다. 우리나라와 사회 곳곳에서 발견하는 ‘대안 없음’과 혼란의 난맥상은 ‘필리아(philia)(혹은 필로스(philos)’라는 말이 가진 의미, 제대로 정의를 하지 못하는 데서 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 ‘친노는 없다’면서, 제1야당은 왜 선거는 물론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프레임’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가! 왜 그것을 뛰어넘는 프레임을 설정하지 못하는가, 그러고도 정책정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친박’, ‘반박’, ‘비박’, 친박연대, ‘비박연대’ ‘친박 주류/비주류’ ‘친박게이트‘……. 여야를 막론하고 이러한 친소(親疎) 정도에 따라 형성된 저급한 정치지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로 인한 상처를 우리 국민은 입을 대로 입었고, ’회복불가‘라는 진단에 이어 ’파산선언‘을 하고 있다. ‘우정(사랑)’의 ‘boundary’ 안에는 숱한 의미들이 포함된다. 소크라테스가 하고자 한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유교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친(親)‘과 신(新)이라는 말과 개념이 살아 있다.
 

□ 『논어』의 한 대목은 플라톤의 세 대화편 『뤼시스/라케스/카르메디스』에서 배우는 ‘우정’과 ‘용기’와 ‘절제’의 미덕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有子曰 信近於義면 言可復(복)也며 恭近於禮면 遠恥辱也며 因不失其親이며 亦可宗也니라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이 의(義)에 가까우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으며, 공손함이 예(禮)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그 사람을 우두머리로 섬길 만하다.”(『논어』 <학이편學而篇> 13章)) [復: 실천할 복, 宗: 높을 종]

 

『논어집주』에서 성백효는 주자(朱子)를 따라 ‘인因’을 ‘주인 삼을 인’이라고 읽는다. 그 결과 ‘因不失其親 亦可宗也’를 “주인을 정할 때에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을 끝까지 종주(宗主)로 삼을 만하다.”고 해석한다.

 

□『좌파논어』의 저자 주대환은 이 대목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감히 공자님 말씀에 토를 다는’ 결례를 무릅쓰고, ‘因’을 흔히 쓰는 대로, “바로 그런 연유로, 그렇게 해서, 그리하여”로 해석한다. 그리고 ‘因不失其親 亦可宗也’을 “그렇게 해서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을 만하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不失其親(부실기친)’을 이 장(章)을 핵심구절로 강조한다.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사람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오래도록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무척 어렵다. 만약 그걸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두머리로 삼아도 좋다.”
어떤 이를 리더(우두머리)로 삼아야 하는가, 그 메시지 또한 담겨 있다. 그리고 ‘失其親’하지 않으려면 “서로 믿고 같이 가기로 약속할 때는 항상 옳은(또 가능한?) 일만을 의논하고 도모하여 (무엇보다-필자) 말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하고, 서로 존경이나 애정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예절에 벗어나지 않고, 지나치게 허물없이 막 대해서 결국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 정의로운 ‘약속(言)’이라야 한다. 그러나 그 공약(公約)이 한때(혹은 그때)의 다짐으로만 끝나면 공약(空約)일 뿐이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용기(勇氣)이다. 불의한 일에 앞장서서 나가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없다. 사랑에는 늘 증오가 뒤따른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앞뒷면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애증(愛憎)이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뜻을 모은 이들은 그들의 결사(結社)를 잘 유지야야 한다. 그때에 절제(節制)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 가까운(親) 이들과의 연대를 이어갈 가는 사람, 그가 리더이며 그를 리더로 섬길 수 있다는 얘기다.
□ 숫자로 먼저 다가오는 가까운 현대사들, 4월(19일)은 가고 5월(18일)이 왔으며 곧 6월(10일)이 올 것이다. 지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안타까움 죽음들이 있었고, 측정할 수 없는 피를 흘려야 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 한마디는 분명한 약속(言)이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의 아픔과 바람에 ‘참전’하겠다는 약속이다. 무엇보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고자 하는 우리들의 위한 약속이다. 그 연대의 든든한 힘은 ‘우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진정한 우정을 실현하는 데서 나오지 않겠는가! 지금 이 한마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끝>

 

 진도 팽목항 등대 아래에서 촬영(사진_타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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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메난드로스의 희극 <사모스의 여인>이 처한 상황을 약간 뒤틀어볼 차례이다. 

동거녀가 낳은 아이인 것으로 두 아버지를 속인 상태에서 아이가 자란다고 생각해보자(그리고 그 아이가 딸이라고 하자). 자신의 혈육이 태어난 상태이므로, 데메아스는 동거녀 크뤼시스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한다. 크뤼시스는 동거녀일 뿐인 불안정한 신분에서 정실 부인으로 신분 상승을 이뤄냈다. 아이의 어미를 자처한 목적을 이룬 것이다. 이제 아이는 친아빠 모스키온을 오빠로 알고 자란다. 또 친엄마를 오빠의 아내, 올캐로 알고 자란다. 시누이와 올캐 사이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보다 더 나쁘다는데, 당시 그리스의 상황은 알 길이 없으나, 그냥 우리나라라고 하자. 시누이를 엄마보다도 더 알뜰하게 보살피는 올캐의 친절함에 가끔은 의구심이 생기지만 하지만, 둘의 사이는 다정하다. 

대체로 아직 어린 딸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철없는 시절의 '불장난'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그 딸의 부모들은 딸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자신들 호적에 늦둥이쯤으로 올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딸)는 친엄마를 언니로 알고 자란다. 그 언니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결혼하여 집을 떠나고,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자랐던 소녀는 어느날 자신의 엄마가 사실은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원작소설의 개정판이 나오고, 후속편이 나온 최문정 장편소설 <바보엄마1_영주 이야기>다. 후속작 <바보엄마2_닻별 이야기>는 친엄마를 언니로 알고 자라지만,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그 언니이자 친엄마가 정상인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결혼하고, 언니이자 친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버린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야 했던 영주가 할머니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훗날 딸 하나 낳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딸의 입장에서 겪는 이야기가 후속편에서 이어진다, 어린 딸이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려는 데서 파생된 비극을 다룬 소설이다.

"'동생'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난 그녀의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진실도 아니었다. 난 출생에서부터 기존의 모든 가족 관계를 깨뜨리고 나온 아이였다. 외삼촌이 오빠가 되었고,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되었으며, 외할머니가 엄마가 되었다.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도……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도없는…….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영원히 '그녀'라는 3인칭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바보엄마1>, 초반부)

 

<Mr. 박을 찾아주세요>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박현숙 장편소설. 필리핀에 있던 작가의 딸에게 한 필리핀 여성이 ‘서울에 사는 미스터 박’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간 한국의 젊은이가 현지의 필리핀 아가씨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남자가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뒤에 아빠 없는 혼혈 아들이 태어난다. 과묵한 아이인 '코피노 ' 리바이다. 필리핀 엄마는 아들에게 한국인 아빠를 찾아주려는 일념으로 스무 살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 그리고 끝내 그녀는 목적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혼외자녀인 리바이와 같은 반 여자아이 강파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딸이 젊은 날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것을 알게된 파랑이의 할머니는 파랑이를 자신의 딸로 호적에 올린다. 그리고 파랑이가 손녀라는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살아간다. 파랑이의 친엄마이자 언니는 시집을 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잘 살고 있다. 가끔 동생(딸)이 찾아오면 남편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홀로 살아가던 파랑이의 늙은 엄마(사실은 할머니)는 노년을 기대고 싶은 결혼 상대(노신사)를 만나 결혼할 예정이다. 여기에서 파랑이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이제야 파랑이의 출생의 비밀을 넌지시 알려주는 할머니, 결국 파랑이는 편의점 아르바리트를 하며 겨우 살아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고, 친구 리바이와 다르지 않은 처지인 자신을 발견한다.

 

두 여성작가의 세 작품은 메난드로스의 희극 <사모스의 여인>이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속의 할머니가 할머니이면서 딸의 딸을 딸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013년 초반 SBS에서 방송된 24부작 월화드라마 <야왕>을 기억하시는지, 박인권 화백의 만화 《대물: 야왕전》이 원작인 이 드라마다. 여기에서 백학그룹의 백창학 회장(이덕화 분)의 장님 백도훈(유노윤호 분)이 사실은 누나 백도경(김성령 분)이 젊은 날의 실수로 낳은 아들이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이런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예는 비일비재하다. 그 자체가 중요 화소(話素)이기도 하고, 양념으로 곁들여지기도 한다. 한 예로 든 <야왕>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출생의 비밀을 애용하는 드라마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라 불리거나 그런 드라마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니, '막장 드라마'라면 이런 설정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첫번째 페이퍼에서 저승으로 찾아가 만나는, 고대 그리스의 구희극 대표시인 아리스토파네스와 신희극의 대표시인 메난드로스를 설정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의 창시자와 그 희극의 완성자로 부를 수 있는 두 시인은 훗날 끊임없이 변용되어 활용되거나 진화되는 소설이나 드라마들을 보며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인가? 우리의 1970~80년대에 활발한 순수-참여 논쟁과 같은 상황이 극적으로 벌어질 수 있으리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니라, 죽은 언론의 시대를 살아간다.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위대한 희극 시인을 진정한 선배로 모셔야 할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언론인들이다. 막장 드라마를 씹으면서도 매회 놓치지 않고 보는 시청자들이 있기에 막장 드라마는 계속된다. 소재로만 보면, 우리의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듯하지만, 비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메난드로스 희극에서 배울 점이 있다. 드라마 작가와 시청자 모두가 자극 받아야 할 작품들이 2400년 전에 이미 연극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때론 산다는 것은 거기서 거기,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우리 생(生)이 가진 보편성을 전제할 때 진정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여 우리 생이 간직한 또 하나의 이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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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신희극 4편이 담긴 희극집과 현존 고희극 11편이 2권의  전집 2권이 번역되어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 옛날 아테네에 테세우스라는 용맹하고 고독한 왕이 살았다. 그는 일찍이 비로 맞이했던 아마존 여왕 힙폴리테가 아들을 하나 남긴 채 죽자 크레타 왕의 딸 페드라(파이드라)와 결혼한다. 페드라는 젊은 날의 왕(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의 자매였다. 아테네에 당도한 페드라 공주는 전처 소생의 아들 힙폴뤼토스와 만난다. 그는 아버지의 덕목을 상속한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이야기(신화)는 구애를 거절당한 페드라가 '포세이돈 신에게 복수를 기원해' 바다 괴물이 힙폴뤼토스의 이륜차를 산산조각 내는 것으로 끝난다.  한편 라신의 운문비극 <페드르>에서는 왕의 저주가 아들을 죽이고 페드라도 자살한다.

<위, 알렉시스를 열연한 안소니 퍼킨스, 신화 속 힙폴뤼토스>

<아래, 비극 <힙폴뤼토스>를 수록하고 있는 천병희가 옮긴 <에우리피데스비극전집1>>

영화 <페드라>(미국, 프랑스, 그리스)는 1967년에 개봉되었고, 1996년에 재개봉되었다. 바하의 토카타가 파이프 오르간 연주와 함께 울려나오며, 과속하는 자동차의 거친 소음 그리고 앨렉시스(안소니 퍼킨스)의 격정에 찬 소리, "페드라~" 곧이어 차가 절벽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영화 음악이 특히 유명하다. 영화에서 페드라는 선박왕의 딸(멜리나 메르쿠리)이고, 알렉시스(안소니 퍼킨스-신화의 힙폴뤼토스)는 현재의 남편과 헤어진 영국 출신 아내와 낳은 아들이다. 영화에서 알렉시스는 새엄마와 동행한 파리  여행에서 그녀의 유혹에 한 순간 넘어간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집(그리스)으로 돌아온 아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눈길조자 주지 않는다. 애를 태우는 페드라의 선택은 극단적인 비극에 이르게 된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페드라 역의 그리스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는 훗날 그리스 문화부장관을 역임했다.

'시골의사' 박경철은 작년 이맘때 펴낸 그리스기행 1권 <문명의 배꼽 그리스>에서 대장정의 첫 여정으로, 영화 페드라의 마지막 장면 배경인 메가라를 지나 해안을 따라가는 옛길을 소개한다.

"이 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주제였던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신과 어깨를 겨루던 당대의 영웅조차도 결국에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나약한 인간의 실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긴 비디오 가이드인 셈이다.'(29면)

<한겨레>의 종교전문기자 조현은 <그리스 인생학교>에서 그리스 본토를 떠나 크레타 섬으로 여정을 이으며, 젊은 날 테세우스 신화 속 인물들의 비극을 소개한다.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아테네)가 미노스(크레타)에게 해마다 14명의 소년소녀를 조공으로 바치던 관행을 끊기 위해, 그들 중 한 명이 되어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션에 성공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아리나드네를 버리고, 아테나이를 떠나던 날, 아버지와의 약속을 깜빡 잊는 바람에 비극을 맞이한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성공했으면 흰 돛을 실패했으면 검은 돛을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흰 돛으로 바꿔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아이게우스 왕은 절망 끝에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 오늘날 '에게 해'라는 아이게우스에게서 유래한다. 파이드라는 크레타의 미노스 왕와 파시파에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리아드네와 자매간이다.

이제 파이드라(1)와 휩폴뤼토스(2), 테세우스(3)의 비극을 메난드로스의 희극 <사모스의 여인>과 비교할 차례다. 이들과 대응하는 희극 속 인물은 '사모스의 여인' 크뤼시스(1), 아들 모스키온(2)과 아버지 데메아스(3)다. 신화와 비극에 충실할 것인가, 영화(시나리오)에 충실할 것인가는 고민거리다. 다만, 희극 <사모스의 여인>이 고대 희극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접어두고, 신화(비극)를 비교 대상으로 삼기로 하자.

신화(비극)에서 파이드라(1)는 유모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휩폴뤼토스(2)가 자신을 겁탈한 것처럼 위장하여 테세우스(3)가 아들을 오해하게 만든다. 희극에서도 아버지 데메아스의 오해가 극을 절정으로 이끈다. 선의(善意)에서 꾸민 일인 줄 알지 못한 데메아스(3)는 아이 아버지가 아들 모스키온(2)이라는 말을 엿듣고, 자신의 동거녀 크뤼시스(1)가 자가 아들과 잠자리를 하여 아이까지 낳았다고 생각한다. 신화(비극)와 달리 희극에서는 '아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있다. 신화(비극) 속 파이드라가 연출한 겁탈의 정황 증거보다는 분명하다. 데메아스(3)의 여행 기간은 어느 정도였을까? 최소한 10개월 이상이라야 자신이 없는 동안 에 아이를 잉태한 것이 된다. 만약, 10개월 이내라면 자신이 여행을 떠나기 전 집에 있는 동안에 불의한 일이 생긴 셈이다. 자신이 집에 있는 동안이냐 집을 떠나 있는 동안이냐는 중요한 부분이다. 자신이 집에 있는 동안 저지른 불의라면 누구도 용서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없는 동안에 생긴 일이라면 성인이 된 아들과 젊은 여인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 또 하나 친아들은 아니므로, '근친상간'이기는 하나 심각성은 덜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를 떠올릴 때, 오이디푸스는 왕비가 자신의 친어머니인 줄 모른 상태였으며, 정식 부부였다. 그러나 혈연 관계였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희극'의 경우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아는 상태에서 아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점에서는 용서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아들과 동거녀는 혈연 관계는 아니다.   

신화(비극) 속 테세우스는 젊은 날을 총기을 잃은 상태로 정황을 분별하지 못해 오해한다. 아마도 '희극'의 아버지 데메아스의 경우도 앞서 '여행 기간'을 추정해본 것처럼 사실은 10개월 이내로, 자신과 동거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일 수 있다는 점을 깜빡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아이를 아버지의 아들인 것처럼 꾸미는 과정이 별다른 고민(갈등)이 없기 때문이다(일부 누락된 대목 때문에 생긴 작품에 대한 오해일 수도 있고, 작품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신화(비극)와 희극이 아버지가 자신의 여자와 아들 사이를 '오해'한 데서 갈등을 촉발된다는 점에서, 아버지들의 오해된 성급한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비극(신화)과 희극, 둘이 달라지는 지점은 사태를 파악한 아버지들의 반응과 후속 조치다. 테세우스나 데메아스나 아들 사랑은 극진했다. 일반적인 아버지들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각별한 것이었음을 강조되고 있다. 

테세우스는 기도를 올리는 정도로 대응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또 다른 아버지(헬레네가 제우스의 딸이기도 한 것처럼)인 포세이돈 신이다. 포세이돈이 자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사용한 것이니, 강력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포세이돈은 아들의 소원을 곧이곧대로 들어줌으로써, 오해에서 비롯된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아들의 아들을 죽인 셈이다. 또 다른 비극이다. 테세우스의 아들에 향한 증오는 애증(愛憎)이 발생한 것으로, 이런 감정의 복잡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희극의 아버지 데메아스는 지체하지 않고 아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대응한다. 아들에 대한 분노는 거의 없고 동거녀와 아이를 집에서 쫓아낸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지만, 친아들 이상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낳은 아이라면, 어쨌거나 자신의 손자가 아닌가. 아들은 보호하고 동거녀는 내치는 행동은 순간의 흐려진 판단력 때문에 또 하나의 아들인 손자까지 버린 셈이다. 의도와 달리 결과는 포세이돈과 데메아스가 닮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손자의 존재는 사는 동안 아들에 대한 분노를 끊이지 않게 할 것이므로,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아들이 친아들이 아닌 점도 혈육에 대한 정을 벗어난 선택을 하게 된 셈이다.('오해'로 곧 풀리는 상황이지만 선택하는 동안에는 '진실'이다)

또 하나,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인과의 결혼식이 코앞인데, 아버지를 떠나기 위해 해외용병으로 합류하려는 모스키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의 사랑이 극진했으므로, 실제는 아님에도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오해했다는 것을 견딜 수 없기에 떠난다는 것이다. 신화(비극) 속 휩폴뤼토스의 경우도 사실이 아니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거의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일까?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 그의 결벽성과 데메아스의 선택은 닮았다.

 

<사모스의 여인>은 왜 '사모스의 여인'일까? 희극에서 사모스의 여인, 크뤼시스의 비중은 제목에 배해서 높지 않다. 그녀의 선의에서 시작된 제안이 극의 주요한 갈등을 만든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이 아이 엄마인 것으로 하자는 제안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유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동거녀'일 뿐 데메아스의 정식 아내가 아니다. 둘 사이의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상태였다면, 곧이어 정식 아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도 감안해야겠지만, 자신의 지위 변화에 '속도 위반'으로 태어난 예비부부의 아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희극 속 크뤼시스는 신화 속 파이드라와 공통점은 1)외국에서 온 2)아버지의 첫번째 부인이라는 점만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희극을 다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그저 '착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실감'과 그것을 채우려는 불순한 '의도'를 고려할 때, 그저 '착한 여자'라고만 볼 수는 없을 듯하다. 파이드라 못지 않은 집요함이 엿보인다. 두 여자의 가장 큰 공통점이 새롭게 추가되는 셈이다. 

 

이상으로 유사 주제를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신화)과 메난드로스의 희극의 사건과 인물들을 비교해보았다. 영화 <페드라>가 파이드라를 중심으로 비극 <힙폴리토스>을 각색한 결과라면, 희극 <사모스의 여인>도 '문제의 여인'을 중심에 놓고 새롭게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신화(비극)은 아버지의 그 오해가 풀리지 않은 채 비극으로 치닿고, 희극은 곧이어 오해가 풀림과 동시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사모스의 여인'의 의도를 비롯, 그저 화기애애한 마무리가 되는 듯하지만, 메난드로스의 희극은 그 안에 그리스의 신화(비극)을 품고 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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