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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3대 비극작가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페데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쓴 작품 가운데 현존하는 비극은 모두
33편.
-이 가운데 신화가 아닌 역사를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은,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
정답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이다.  


이 비극은 패배자의 시각에서 본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이며, 페르시아 군세의 파멸은 분수를 모르는 오만, 곧 히브리스(hybris)의 결과였다는 것이 그 주제이다.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 이 관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 고유의 전통적 종교관념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이 현존하는 비극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비극이 신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초기의 영향 탓인지 그 주제에서만은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의 오만도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5)는 생전에 90여 편의 비극을 썼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7편, 그 가운데 <페르시아인들>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출세작이다. 기원전 472년 그는 이 작품이 포함된 비극 3부작으로 그는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살라미스해전에서의 페르시아의 패배를 다룬 작품이 있었으니, 프뤼니코스의 <포이니키아의 여인들>(기원전 476년)이다. 두 작품은 모두 무대가 페르시아의 궁전이며 등장인물이나 주제도 비슷하여  아이스퀼로스가 프뤼니코스를 모방해서 극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포이니키아의 여인들>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극의 전개에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이랄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두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한 사람을 꼽으라면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4년경~459년경)일 것이다. 그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막강 함대를 살라미스의 좁은 수로로 유인해 수적 우세를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살라미스 해전을 빛나는 승리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이국을 떠돌다가 객사하는 등 파란이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테미스토클레스전>에서 가장 실감있게 그리고 알맞은 분량으로 살필 수 있다. 가령, 헤로도투스(<역사>)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인성을 폄하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그의 부정과 단점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공적인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삶 자체가 그리스인(아테네)들의 시각에서 공로와 과실이 혼재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저마다의 사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면면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소중한 것들이다.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와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살라미스해전과 그의 활약을 살피려면 배리 스트라우스가 지은 <<살라미스해전>>을 살펴볼 것을 권한다.  

 

 

 

 

 

 

 

 

어쨌거나 김진경 님(<<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에 따르면(아래) 테미스토클레스의 '영광과 몰락'은 앞서 거론한 두 비극작품과 상관성이 깊은 것 같아 흥미롭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몰락하는 시점을 기원전 471년으로 보는데, 마지막 기록을 보이는 것은 기원전 476년으로, 그해에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1)그가 올림픽 경기에 참관하게 되는데 경기장에 들어서자 관중들은 선수들을 제처 놓고 그에게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비록 아테네에서 그의 인기는 하락했지만 아테네 외의 그리스지역에서는 그의 위대한 업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은 이 일을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기쁨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 하나,  

2)그해에 그는 프뤼니코스의 비극 <포이니키아의 여인들>의 코레고스(합창단의 비용을 책임지는 사람)가 되었다.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이었던 그로서는 자기의 명성을 상기시키고 선전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아낌없이 그 비용을 후원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현판을 내걸기도 했으니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런데,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71년에 도편추방(또는 망명)을 당한다. 그가 도편추방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명성과 우월성, 그리고 자신의 공적 선전에 대한 민중의 반감과 질투를 든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선전을 하는 그가 그의 정적들에게 곱게 보였을리 없고, 기원전 472년에 상연된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의 흥행(성공)이 그의 도편추방을 결정차였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사실 <페르시아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을 다뤘을 뿐만 아니라-작가 아이스퀠로스 자신이 이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직접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형과 함께 참전하여(형은 전사하고) 여러 군데 부상을 입었으며 살라미스 해전에도 참가한 역전의 용사였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은 비극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는) 페르시아에 승리를 축하하는 송가라는 느낌이 강하며, 아이스퀼로스의 애국심을 극단적으로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사실 테미스토클레스는 대중과 친밀했다. 1)그가 시민의 이름을 일일이 즉석에서 부를 수 있었고 2)개인적인 거래관계에서 믿음직한 중재자 노릇을 했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득세하고 마침내 반대당을 이기고 라이벌인 아리스테이이데스를 도편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하거니와 아테네의 해군력을 증강하여 전쟁을 대비하는 혜안, 그리스연합군을 결집시키는 설득력, 실제 전쟁에서 정보전을 겸비한 전략가로서의 기질, 축재한 부를 적절하게 국내외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근래의 정치가들은 저리 가라할 그의 면모는 독보적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가 도편추방을 당하고, 또 사형선고를 받아 망명하며, 종국에는 적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에게 의탁하였다가 말년을 보내는, 그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 않았다고 해도 조국을 등지고 말년을 맞이한 점은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스스로 후원자가 되었거나 그가 도편추방 되는데 민중의 질시와 경계심을 자극하는 결정타가 되었던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그 스스로가 경계했어야 할 드라마이고, 그의 비극을 예견한 것이지 않았나싶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820-822행)
 

그리스 원전고전들의 번역에 독보적인 분이 천병희 선생이라면, 서양고대사 연구와 강의로 평생을 매진했던 작고하신 김진경 교수는 특히, 앞의 책에서 그리스의 고대사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다룸으로써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데, 김진경은 이 대목을 "인간은 오만한 마음을 품지 말지어다./오만은 꽃을 붙여 파멸의 열매를 맺게 하며/추수의 계절에는 그칠 길 없는 눈물을 얻게 하리라."라고 번역해서 인용하고 있다.   

1)한 인간의 세력이 강해진다. 2)그러면 자기의 분수를 잊고 '미망'(아테)된다. 3)그 미망의 결과로 능력 이상의 의욕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키려 한다. '오만'(히브리스)헤지는 것이다. 4)그러면 신들의 질시라는 신의 뜻에 따라 야욕은 좌절되고 그 자신은 파멸한다.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신의 심판! 그것은 3대 비극작가 중에서도 가장 선배인 아이스퀼로스 비극들, 특히 여기 <페르시아인들>의 핵심주제이다. 프뤼니코스의 <포이니키아의 여인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주제는 물론이고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유사하다고 했다. 어쨌거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공적이 두드러지는 살라미스해전을 다룬 비극이라는데에 우쭐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으며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정작 그 비극작품을 자신의 삶을 경계하는 지침으로 새기지 못했던 것일까,   

헤겔은 "역사상 살라미스 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역사철학>)라고 했다. 그렇다면 살라미스해전을 다룬 비극 <페르시아인들>이 전하고자 한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이었겠는가! 극이 상연될 즈음, 테미스토클레스는 분수를 지키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비극으로 각성된 시민들이 그 비극이 다룬 전쟁의 영웅이면서도 실제 삶은 오만하여 자중할 줄 모르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추방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게 한 것일까?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페르시아가 그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요인을 드러내는 비극 <페르시아인들>을 보는 그리스 시민들의 (집단적인) 자기반성의 결과, 테미스토클레스를 도편추방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페르시아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영광이면서 몰락을 자초한 작품이다. 이것이 이 작품을 읽는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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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든손예쁜손 2010-08-10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편추방은 몇년째인 우리의 주민소환제는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죠.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미나사랑 2010-08-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극과 역사에 그렇게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글!

motoko3 2010-08-17 13: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이 대목을 관심 있게 봤어요
 

아마 지금도 극장 한두 곳에 상영중일 <경계도시2>나 송두율 교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경계의 이편과 저편, 혹은 경계지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책과 영화 등에서 만나보는 시리즈물로 기획한 글이기에 그러하다.  

0.그때 거기, 지금 여기 

오래된 생각이지만, 흔히 쓰는 '여기와 저기'와 '거기'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듯하다. 전자와 후자는 시간의 차이라는 점에서, 전자 안의 ''여기'와 '저기'와는 공간적인 거리에 또 다른 차이 혹은 경계가 분명해진다. 그리고 늘 궁금한 것은 '여기'와 '저기'의 차이인데, 흔히 상대방을 부를 때, 호칭 혹은 이름을 모르거나 '아저씨' '아줌마'라고 부르기엔 좀 그래서-실제 그렇게 불리면 화가 날 혼기가 늦어지는 어른들이 의외로 많다- 예우(?)한다는 것이 '저기요!' 아니면 '여기요!'가 되는 것이다. 시선집중에서 손석희 교수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 인터뷰 대상에게 "안녕하세요!" 대신에 "여보세요!"하여 웃음을 자아내듯이 우리는 습관적으로 여기요와 저기요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여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저기'가 되는 것일까? 여기와 저기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경계가 있을 것이지만 음절의 차이 말고는 분명한 경계 지점을 짚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에 '거기'는 여기와 저기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시간차가 있는데, 그 차이는 아주 오래된 것일 수 있고 최소한 영화의 장면의 차이 이상은 있다. 다만, 그렇게 부를 때에는, 상대방과 당사자가 '거기'에 같이 있었거나 그런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기나 저기와는 구분이 된다.

 

 

"인생이란 드라마의 다른 막들을
훌륭하게 구상했던 자연이
서투른 작가처럼 마지막 막을
소홀히 했으리라고 믿기 어렵네."
-20면, <노년에 대하여> 5절 중에서
 

키케로지음, 천병희 옮김, <<노년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숲 펴냄)

언제부터인지 사용 빈도가 늘고, 지금은 어떤 개념어로 자리잡은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거기 어디쯤에선가 와서, 이승에서 살다가 저승으로 가야하는, 그것이 돌아가는 것인지 생소한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입창의 차이와 숱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지금 이 세상에서,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삶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경계가 무너짐으로써 행복과 불행이 뒤바뀌고, 그 경계의 장벽이 턱없이 높아짐으로써 또한 행복과 불행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지게 되는 일은 삶의 곳곳에서 잠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에서 만나는 경계랄까-사실은 이것도 숨쉴틈이 없이 말해도 부족할 만큼 벅차다- 그런 얘기를 해볼까 한다.

1.경계에는 '선(線)'이 있다.

벌써 데뷔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유일하게 단 한 권의 시집(<<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7,)을 내놓은 젊은 시인, 장만호의 시에서 발견하는 것은 절묘하게 포착된 선(線)의 아름다움이다.


개구리밥 가득한 수면
물뱀 지나간 궤적

늪은
가만히
푸른 실눈을 뜬다
--68면 <악어> 전문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이 오고
세계는 조금씩 녹슬어간다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거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48면 <시월> 처음 4행

너무 멀리 왔다, 생각했을 때 나는
벌써 이 길의 식도(食道)를 넘은 것이다
새벽 한시,
돌아갈 길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이 길을 가다 보면 태백은 있다는데
앞서가던 한 떼의 차량들이
저마다 밤의 기나긴 위장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시 빠져나온다
--84면 <태백행> 첫연.

물뱀과 새들과 차량은 수면, 허공 ,깊은 산의 적막을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놓는다.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기에 좀 그렇지만 경계는 경계이다.
문인수의 시집 <<배꼽>>의 표제시 <배꼽>에서도,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 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초반부 4연)

잡초만 무성한 빈집으로 통하는 길이 생겨 공간을 이편과 저편으로 나누어놓는데, 장만호의 그것이 식도와 창자('밤의 기나긴 위장')이라면 문인수는 경계인 길을 '탯줄'에 비유하고 있다. 창자와 배꼽은 우리 몸 안(내부)에 있어면서 밖(외부)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또 다른 경계가 된다.  

    

 

 

 

 

 

 

 

 

<<무서운 속도>> 장만호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7,), <<배꼽>>문인수 지음(창비, 2008년 4월), 창비시선49 <<깨끗한 희망>> 김규동 지음(창비, 1985. 3.) 

2. 시간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경계'
 

"번개같이 스치는 것은/깨끗한 한 개의 희망이다"(시 <희망>의 두 행)  

바로 이 대목에서 김규동 시인의 대표시집 <<깨끗한 희망>>이라는 책제목이 나왔다.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시인이 경험한 해체된 풍경에는 1)'일정 때/ 두만강변 회령 경찰서 취조실' 안에서 흘러나오던 그 사나이의 비명이 있다. 그것은 평생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다.  2)"6.25때/한강을 헤엄쳐 건너온/백골부대의 한 병사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던 일도 잊히지 않는다. 강(한강)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왔다는 것은 저편의 죽음에서 이편의 삶으로 건너왔음을 의미하며,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3)시인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38선을 넘으면서 안내꾼에게 회중시계를 그 대가로 건네주어야 했다. 남과 북의 경계, 휴전선의 경계를 사이에 둔 쓰라린 기억도 있다. 
 


3. 경계에 핀 꽃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김규동의 시집처럼, 표제시가 따로 없고 수록된 시행(<꽃>) 가운데 시집의 제목을 뽑았다는 점에서, 함민복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도 빼놓을 수 없는 시집이다.  

시인은 스스로가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놓인, 화분('흙의 공중섬'이라는 점에서 역시 경계가 명확한)에 핀 국화('전생과 내생 사이'-경계-에 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화분에 대해, 의미(추측)를 부여한다.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 인 담은 철책에 비유되고, 그 위에 놓인 화분'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에 해당한다. 화분은 나의 공간의 남의 공간(혹은 공유)과 구분짓는 깃발이 되는데, 압권은 그 다음이다. 담 위에 놓인 꽃의 향기마저 안과 밖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나 싶은데, 시인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고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필자의 느낌에는 사족 같다. 뭔가 마무리를 해야 하므로 하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지음, 창비(1996년 10월) 

받들어 꽃
곽재구 지음, 미래사(1992년 5월)   


4. 전쟁과 평화, '받들어 총!'과 <받들어 꽃!> 사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MBC와 KBS 양대 공중파방송에서 한국전쟁을 재조명한 <로드넘버원>과 <전우>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사건이 어쩌면 예기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만 그런 것일까?   
함민복이 궁극적으로 꽃에서 경계를 읽어냈다면, 발표시점이 198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곽재구 시인의 <받들어 꽃>은 '받들어 총!'의 전쟁을 상징하는 '총' 대신 한 음절의 '꽃'이라는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16~19행)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24~29행)

창작과 발표 시기에서  <받들어 꽃>이 함민복의 <꽃>보다 10여 년쯤 앞서지만, 우리나라 "해안가 철책에 초병"은 여전히 귀를 곧세우고 "받들어 총!"을 외치며, 김규동 시인에게 회한인 38선(휴전선)은 여전히 다만 휴전인 상태를 의미하는 경계로서 경계근무중인 상황이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08년 10월),  <<그리스 비극 걸작선>>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2010년 2월) 

 

5.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Anti-고뇌苦惱>
사람들은 보통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에서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고, 그 지은이가 소포클레스라는 것을 상식으로 떠올린다. 그러나, '경계'를 얘기할 때, 가장 비극적인 등장인물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아니겠는가! 오이디푸스 왕이 남성인물(남성성)이면서 부모(아버지)이자 아들로서의 고뇌를 대면한다면, 안티고네는 여성인물(여성성)이면서 자식(딸), 친족(오빠들과 여동생 사이에서)으로서의 고뇌를 대변하는 '경계'인이다. 반대를 의미하는 '안티-'나 '-고네'는 고뇌(苦惱)라는 한자어 우리말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삶 자체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다. 그저 말장난처럼 하는 얘기이지만, <Anti-고뇌苦惱>로 그녀의 캐릭터를 함축할 만큼 그녀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경계를 넘어섬에 있어 초연하고 당당하여, 그녀에 대한 해석들은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다행히 그리스어(희랍어)로 된 작품을 우리말로 직접 번역한, 천병희 선생의 노고에 힘입은 원전번역으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만날 수 있다. 영원한 고전 그리스비극 원전을 직거래 번역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 아이스퀼로스비극전집, 에우리피데스비극전집 1,2권과 함께 소포클레스비극전집까지 그리스비극 3대 대표작가의 현존하는 33편의 비극이 완간된 상태이나, 3대작가의 대표작 두 편씩을 다룬 <그리스 비극 걸작선>으로 그리스 비극 맛보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걸작선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가 실려 있는데, 그리스비극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옮긴이의 배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전번역된 작품을 읽고 한 발 더 나아가 살피는 것을 전제로, 나라 안과 밖에서 씌어진 주목할 책 한 권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한정숙 지음,  길(2008년 3월) 

안티고네의 주장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동문선(2005년 3월)

 

6.  나라 안팎 두 여성학자와 다시 만나는 안티고네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와 <안티고네의 주장>
한정숙은 '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이란 부제가 붙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안티고네-국가보다 존엄한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다>라는 장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속의 여성주체들1'로 안티고네의 삶을 현대 '한국인의' 정서와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그런데,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에 매장의 예를 베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안티고네의 선택을-여기까지가 한정숙의 시각이라면-, 주디스 버틀러는 근친상간의 표현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최근의 연구자이다. 그녀가 펴낸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라는 부제가 붙은  <<안티고네의 주장>>이 그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경우, 역자해설부터 읽는 편이 접근하기에 쉬운데, 주디스 버틀러에 이르면 안티고네는,   

"더 이상 순수하지도 영웅적이지도 못하며, 애도의 주체이기보다는 적절한 애도에 실패한 '우울증 환자'일"(145면)
 

뿐이다. 버틀러는 더 나아가 안티고네의 우울증과 죽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족구조의 우울증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한다. "이성애 제도의 규범 속에서 동성애 가족은 인식 불가능한 삶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우울증이 되었다"(146면)는 것이다.  
<안티고네-국가보다 존엄한 인간의 영혼을 위해 죽다>라는 소제목(한정숙)과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라는 부제(버틀러)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우리 정서에는 한정숙이 다룬 부분이 안티고네를 이해하는 개론서쯤에 해당한다. 반면 버틀러의 저작은 원론서쯤이라고 해야할런지. 
<안티고네>라는 비극 작품에서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경계에서부터 현재에도 계속되는 삶의 경계 혹은 그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저작들에서도 이어가기로 하고, 일단락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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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ko3 2010-07-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들에 대한 해석이 참 마음에 들어요. 오이디푸스왕하고 안티고네는 읽었는데, 전집 전 작품을 읽고 싶네여.

timeroad 2010-07-30 16:22   좋아요 0 | URL
마음 먹었을 때 전작을 읽어나가도록 해보세요.

새우 2010-07-2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오랜 만에 님의 글을 다시 읽게 되어 기분 좋고,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timeroad 2010-07-30 16:22   좋아요 0 | URL
늘 감사, 다른 일로 좀 바빴어요.

yess1985 2010-07-2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웃으로부터 새로운 글을 올렸다는 연락을 받고, 와서 읽었어요. 미처 못읽은 좋은 시들이 있다는 점, 안티고네 관련 글들을 꼭 읽어볼 생각이랍니다.

timeroad 2010-07-3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이웃을 두셨군요. 이 주제로 안 걸리는 시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많은 시집들 가운데 아끼는 시들을 골라봤어요

라라 2010-07-3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ti-고뇌 재밌는 말이네요. 고뇌 속을 가다라는 러시아 소설이 있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timeroad 2010-07-31 15:56   좋아요 0 | URL
알렉세이---톨스토이 소설인데, 나중에 고난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가 그래요, 감사
 

1.
최근에 본 영화 <이끼>(2010.07.14)와 연초에 본 영화 <용서는 없다>(2010.01.25),  두 영화의 공통점은 <18세 이상 관람가>라서 안타깝게도 딸아이와 함께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작품성도 좋지만 흥행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영상비지니스 관계자의 입장에서 15세와 18세 차이는 대단히 크지요. 그런데 <이끼>를 보고 나서 나는 가장 먼저, 굳이 18세이상으로 제한해야 했을까, 또한 그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를 따져봐야 했습니다. 반면에 <용서는 없다>의 경우는, 그리스 신화의 주역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사지가 잘린 조각상(비너스상으로 알려진, 책의 표지 아래)이 중요 모티브로 등장하고, 시신 부검하는 장면이 '리얼해야' 할 이유가 있었음을 영화가 끝날 즈음에 알게 되지만 보여주기에 충실한(?) 나머지 18세이상 관람가를 자초하지 않았나 싶네요.
강우석 감독은 애초에 15세를 기대했으며 "18세 수위를 염두에 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기에 수정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250만 관객을 넘겼고, 손익분기점도 넘었다 하니 인터넷 만화 원작의 힘도 그렇지만, 영화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끼>원작만화, 영화 <이끼>, <용서는없다>[원전으로읽는그리스신화] 

얘기를 꺼낸 김에 두 영화를 비교하는 하나의 기준이랄까, <이끼>가 30년간 은폐된 마을을 찾은 한 사람(박해일)과 낯선 얼굴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간의 숨막히는 대립을 그렸다면, <용서는 없다>의 경우 환경운동가-꼭 그런 설정이 필요했는지 아직도 의문이고 유감이지만-인 범인이 오히려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경계'의 벽을 무너뜨리고 수사망과 복수의 대상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역시 말이 나온 김에, 이끼(Moss)의 꽃말은 '모성애'입니다. 생일꽃(양력 1월 22일)이니 생일점이니 하는 해석을 필자 나름대로 다듬어보면,
"(1)주위를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때라야 온화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 (2)이 부드러움이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일부러 격렬한 사랑을 자아내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것이 당신만의 멋이니까요. "
인데,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영화에서 그 역할이 상당했던 이영지(유선)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만화 원작보다는 영화에서의 영지 캐릭터가 모성애가 짙다고 할까(유일한 모성을 가진 여자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른 남자배역들의 캐릭터 분석도 가능하겠지요. 영지는 영토(領土)의 유의어인  영지(領地)는 아니었을까요?)

2
그런데, 이런 영화나 정극인 연극, 그리고 드라마와 뮤지컬,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다른 장르로 갈래지워지고 나름대로 진화하였지만, 현대 '드라마'의 원형은 그리스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대에서 상연된 일종의 희곡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숱하게 변용되어 활용되는 이야기의 원형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살피면 그리스 비극들은 대단히 폭력적이며 피비린내가 나는 현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1)아가멤논이 '집 안'에서 살해된 뒤 문이 열리고 시신이 보여지게 되고(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2)아가멤논을 죽였던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토스도 '집 안'에서 살해된 뒤에 (관객에게는) 그 시신만이 보여지게 됩니다.(에우리피데스 비극 <엘렉트라> 등) (3)이오카스테가 자살하고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데서는, 사자가 나와 장황하게 설명하고, 오이디푸스가 피를 흘리며 문(집) '밖으로' 나오는(소포클레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식이지요. 
 

 

 

 

 

 

 

대개는 "퀼뤼타이메스트라, 집 안으로 퇴장"(1141행과 1142행 사이) "엘렉트라, 어머니를 따라 퇴장"(1146행과 1147행 사이)과 같은 지문을 통해 '아, 이제 죽이고 죽는 잔혹한 장면이 나오는구나'를 짐작하게 되고,

퀼뤼타이메스트라: (집 안에서)얘들아, 제발 이 어미를 죽이지 말아다오!(1165행~)
코로스장: 그대들은 집 안에서 나는 저 소리가 들리세요?
퀼뤼타이메스트라: 아, 슬프고 슬프도다!
코로스장: 제 자식들의 손에 쓰러지는 저 여인도 불쌍하구나!(~1168행)

와 같이 관객은 집 안에 호소하는 퀼뤼타이메스트라의 목소리와 집 밖에서 이 상황을 논평하는 코로스장의 대사를 연이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오레스테스, 퓔라데스, 엘렉트라 집에서 나온다. 시종들이 두 구의 시신을 집 앞에 내려놓는다'"와 같은 지문을 끝으로, 잔혹한 살해장면은 음성으로 처리되거나 최소한 관객에게 참혹한 장면이 직접적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을 읽다보면 지문에서의 '집 안'만이 아니고, 등장인물의 대사나 코러스에서도 '집안'과 '집 안'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쉽지 않은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왕가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여기서 '집'은 '궁궐'이고, '집안'이란 '왕족'을 의미하게 되며, 얽히고 섥힌 '집안'(가족들, 친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1)(당시의)기술적인 한계-얼굴마저도 드러내지 않았던 당시의 옷차림으로 실감나는 연기는 무리였으리라-라고 볼 수 있으나, 2) 비극 시인들이 폭력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3.
그런데 왜 근래의 영화에서 관객들은 폭력(그리고 노출)을 그 자체로 즐기게 되고, 영화감독은 폭력적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을 수요와 공급-닭이 먼저이냐 달걀이 먼저이냐-의 관계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되어버렸을까요? 김상봉은 "폭력적 상황을 일삼아 재현"하는 것이 관객들이 현실의 폭력적 상황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생하게 보여주기가 비극성을 배가하기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지요.  

아내와 정부가 남편을 살해하고, 또 그들을 그 아들과 딸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해하여 복수하고, 앞서 거론한 것처럼 자신의 눈알을 찌르는 충격적인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그 처연한 슬픔이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텍스트(글)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보다 근원적인 물음, 대체 우리가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과 기억의 기능이 기계적으로 확장된 것이 사진이라 할 것인데, 사진술의 등장 이전과 이후의 상황, 회화와 사진 등에 대해 도움을 받았던 책은 <본다는 것의 의미>(존 버거 저 | 동문선 | 2000년 4월)였습니다. 역설적으로 게오르그 루가치의 <소설의 이론> 서문에서 총체성을 잃어버린 현재를 안타까워하면서 북극성만을 바라보고 항해할 수 있었던 시대는 차라리 행복했다는 저 유명한 구절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고 하겠습니다.  
 

 

 

 

 

 

  

인물사진이 대표적이겠지만 좋은 사진은 대상을 과감하게 클로즈업하는 데서 시작된다, 좋은 사진을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지요. 집중할 수 있는 사물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촬영작가의 의도(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을 바꾸면 군더더기를 과감하게 제거하는(마음속에서 그리고 앵글에서 트리밍) 과정이기도 합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는 것을 도드라지게 하는 보여주기, 달리 표현하면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기와 유사한 효과가 아닐까요?
극단적이지만 그리스 비극 얘기를 꺼냈으므로, 그리스 비극=오이디푸스왕(=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오이디푸스의 왕은,

"눈을 잃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김상봉의 앞의 책)

합니다.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또 보려고 했을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보기를 포기함으로써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국내에는 지난 5월에 개봉된 이란 영화 <참새들의 합창(2008)>, 앞서 개봉되었던 <천국의 아이들(1997)>로 잘 알려진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윌로우 트리>에서 시각장애인을 내세워 던지는 질문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연관이 깊습니다.  
  

 

수십 년 동안 맹인으로 살다 시력을 되찾은 사람(시각장애인 대학교수 유세프-파비스 파라스투이 분)이 그 욕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 그동안 자기를 보살펴준 아내가 갑작스레 지겨워지고 그 자괴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것도 신이고 새로운 시련을 안겨준 것도 그 신이다. 눈을 뜸과 동시에 광기에 휩싸인다...

오이디푸스와는 반대로, 유세프는 실제 눈을 뜨면서 마음의 눈을 닫아버리고 행복 끝 불행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이 감독의 영화 중에서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는 <컬러 오브 파라다이스(1999; 천국의 색깔)가 있고, 근년에 흥행했던 다른 감독의 이란 영화 <블랙>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컬러 오브 파라다이스> 포스터
사건 하나하나를 살피면,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그들의 아들이 그 어머니를 살해하며(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르며, 남편에게 버림받아 그 복수로 친아들들을 살해하는 메데이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비극은 요즘 식으로 하면 그 <18세이상 관람가>인 폭력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극이 상연되었던 디오니소스 극장의 구조를 살피는 데서도 명확해지지만 영원한 이야기의 원천으로, 드라마라는 장르의 원조로 그리스 비극이 고전의 자리에서 빛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감아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윌로우 트리의 슬로건)을 위해 일부러 시각을 잃을 필요까지는 없겠지요? 다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찍는 ‘눈사진’이 더 아름답고 오래 간다는 사실을 드라마(영화)를 만드는 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이 잘 활용했으면 싶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집안'과 '집 안'이 대사와 지문에서 어찌 쓰이는지를 살피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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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0-07-2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거세게 내리는 어느 날, 눈을 감고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중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motoko3 2010-07-29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안'과 '집 안' 둘 차이에 이런 깊은 뜻이.. 새롭게 알았습니다.

timeroad 2010-07-30 16:24   좋아요 0 | URL
대사 속에서 새롭게 생각해볼 여기가 있는 부분은 아직 올리지 못했네요. 감사

새우 2010-07-2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끼를 봤는데, 님이 해석하는 새로운 리뷰가 기대됩니다. 따로 영화리뷰도 가능한지요?

timeroad 2010-07-30 16:2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적당히 못하는 성격이라 마음 먹으면 다른 리뷰들도 읽어야 하고, 쓰기 위해 쓰는 식은 바람직하지 못한 듯하여, 원작과 비교하여 새로움이 있다. 아니다로 엇갈리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죠. 이 영화에 대해서

yess1985 2010-07-2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다는 것, 집착함으로써 또 새로운 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좋은 영화들인데, 그 기억들을 잘 정리하는 계기가, 잘 읽고갑니다.

timeroad 2010-07-3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도 어린이였을 때는 보였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 아마도 위에 든 영화들 중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대개가 그런 것 같죠. 가령, 티비 쇼프로그램을 보면 편집자의 의도가 자막처리되어 나오는데, 너무 심하지요. 시청자를 바보로 만든다는 느낌.. 보고 있는데 또 보라고해요? 감사해요.

kangkang술래 2010-07-3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책 읽기에 탄복하며, 그 내공을 이렇게 풀어내주시니 귀동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timeroad 2010-07-31 15:5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에 감사, 요즘 시대가 그렇잖아요. 어느 장르만 고집하기에도 그렇고, 너무 보기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요,,

라라 2010-08-24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었군요, 축하드리고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흥미롭게..
 

 

 

 

 

 

 

 

꽃과 나무가 왜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가 사연을 알고 나면 재미가 있습니다. 양력 생일을 기준으로 하는 생일꽃, 탄생화라고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데, 식물 자체와 식물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기에 마음을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1월 16일 생일꽃은 히야신스_노랑입니다. 그런데, 히야신스(노랑)는 말할 것도 없고 상당수의 꽃과 나무들의 유래를 살피노라면 그리스(로마) 신화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는 경우가 많아서, 그리스 로마신화를 원전으로 읽어보자 작심한 저에게는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다보면 상당히 많은 자료를 보게 되고, 책을 읽을 때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내용들에도 '편집증' 증세를 보이며 이야기를 모으게 됩니다.  '히야신스'라는 꽃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위 네이버 카페 <식물과 사람들>에서 옮김>  

1월 16일의 생일꽃인 히야신스_노랑(Hyacinth), 꽃말은 '승부'입니다. 꽃말치고는 참 특이하지요? 여기에 무슨 사연이 깃든 것일까요?  먼저 이 꽃의 원산지는 지중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갑옷이 히야신스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갑옷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준 것으로 아킬레우스가 죽자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가 서로 이 갑옷을 차지하게 위해  경쟁합니다. 결국 아킬레우스의 친척이기도 한 아이아스를 밀치고 오뒷세우스가 차지가 되는데, 그 이유는 "'지혜'는 '용기'를 이긴다"는 것이 근거였지요. 아아이스는 실망한 나머지 자살하는데, 그 때 흘린 피에서 히야신스가 피어났다고 하는군요. 여기에서 꽃말이 '승부'가 되지 않았을까.  참고로 18세기에는 히야신스 광(狂)들이 득실득실했답니다. 그 결과 2천 종 이상의 변종이 생겼답니다. 사람의 기호에 맞춰 변종을 대량 생산하는 이런 노하우, 그것이 오늘날 유전자조작식물을 제조의 바탕이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씁쓸하기는 합니다. 이제 그리스신화에서부터 히야신스 관련된 이야기를 탐색해보기로 합니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를 참고.  제우스는 수많은 여인들 및 여신들과 살을 섞어 자식을 낳는데, '기억'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므네모쉬네로부터 무사 여신들을 낳았습니다. 먼저 칼리오페를, 다음에 클레이오, 멜포메네, 에우테르페, 에라토, 테릅시코레, 우라니아, 탈레이아 그리고 폴륌니아를 낳았지요. 위의 책 주석에 따르면, 칼리오페는 서사시를, 클레이오(라틴어 Clio)는 역사를, 에우테르페는 피리 및 피리가 반주하는 서정시를, 테릅시코레는 무도 및 무도가를, 에라토는 뤼라 및 뤼라가 반주하는 서정시를, 폴륌니아는 찬신가를, 나중에는 무언극을, 우라니아는 천문학을, 탈레이아는 희극 및 목가를 관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클레이오는 마그네스의 아들 피에로스에게 반했는데(이것은 그녀가 아도니스를 사랑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비난한 까닭에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서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함), 클레이오가 피에로스를 만나 아들 휘아킨토스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필람몬과 요정 아르기오페의 아들 타뮈리스가 휘아킨토스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타뮈리스는 남자를 사랑한 최초의 남자가 됩니다. 그러나 훗날 휘아킨토스는 그를 사랑하던 아폴론이 잘못 던진 원반에 맞아 죽습니다. 이 책의 주석에 따르면 미소년 휘아킨토스는 가인 타뮈리스와 아폴론의 사랑을 받았으나 신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해서 아폴론과 원반 던지기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아폴론이 원반을 잘못 던져(또는 서풍(西風)의 신 제퓌로스가 샘이 나서 원반이 빗나가게 하여) 휘아킨토스가 맞게 됩니다. 소년이 소생할 수 없게 되자 아폴론은 그가 흘린 피에서 히아신스 꽃이 피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한편, 미모와, 키타라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재주가 빼어났던 타뮈리스는 무사 여신들에게(휘아킨토스의 이모들) 노래시합을 자청했는데, 그 조건은 그가 이길 경우 그녀들 모두와 교합하고 그가 질 경우 그녀들이 원하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기는 것이었습니다. 시합에서 승리한 무사여신들은 그에게서 두 눈과 키타라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재주를 빼앗습니다. 이 대목을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 도리온은 무사여신들이 오이칼리아 왕 에우뤼토스의 곁을 떠나오던/ 트라게 사람 타뮈리스를 만나 그의 노래를 그치게 한 곳이니,/ 아이기스를 가진 제우스의 딸들인 무사 여신들이 몸소/ 노래하더라도 그가 이길 자신이 있노라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여신들은 화가 나서 그를 눈멀게 하고 신과 같은 노래를/ 빼앗고 키타리스 연주하는 재주를 잊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리아스>> 2권, 595행~600행,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어쨌거나 휘아킨토스의 어머니 클레이오가 피에로스를 만나게 되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습니다. 곧, 그녀아도니스를 사랑한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비난한 까닭에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서 일어난 일(클레이오가 피에로스를 만난 일)일 뿐이라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참고로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가 사랑하던 미소년으로 그가 사냥하다가 멧돼지에게 찢겨 죽자 그녀는 그가 흘린 피에서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게 했다고 하지요. 휘아킨토스를 사랑한 타뮈리스가 휘아킨토스의 이모들에게 시합을 자청한 것이, 휘아킨토스가 죽은 이후(인 것 같다)인지 이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휘아킨토스를 사랑한 남성의 신 아폴론이 자책半 시샘半으로 자신이 죽게 만든 휘아킨토스의 피에서 히야신스 꽃이 피어나게 하였다는 것.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비난한 것에 화가난 아프로디테의 저주가 실현된 것이 아닌까요. 그런 의미에서 미소년 아도니스와 휘아킨토스의 운명은 닮아 있고 앞선 아도니스의 죽음이 휘아킨토스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프로디테(라틴어 명 베쿠스, 우리가 흔히 '비너스'로 부르는)의 저주와 복수하는 방식은 참 처절하고 집요합니다. 아프로디테 이야기를 활용한 한국영화 <용서는 없다>에서, 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영화이름이 "용서는 없다"인 것도 연관이 깊습니다. 아프로디테와. 위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의 표지에 실린 사진이 아프로디테 조각상입니다.  

 <<-영화 <용서는 없다>의 포스터. <- <소포클레스비극전집>(천병희 옮김, 숲 펴냄) 표지 앞서 아이아스와 히야신스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무구재판을 다룬 그리스비극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그리스 3대 비극작가(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 중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는, 현존하는 그의 비극 7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작 연대가 기원전 450년대라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 드라마의 소재가 된 무구재판(武具裁判)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아킬레우스가 전사한 뒤,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가 손수 만들어준 고인의 무구를 서로 차지하려기 위해,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용력이 뛰어난 아이아스(Aias)와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가 치열한 경합을 벌인다. 그런데 그리스군 장수들이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오뒷세우스에게 그 소유권을 인정하자, 아이아스는 밤에 칼을 빼들고 그리스군 장수들을 습격한다. 그러나 이때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아이아스를 미치게 하고, 그는 그리스군 장수들인 줄 알고 가축 떼를 닥치는 대로 도륙한다. 아이아스가 막사로 돌아와 적을 무찌른 줄 알고 기뻐하고 있을 때 아테나가 그를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하자, 그는 죽음 외에는 달리 해결책이 없음을 알고 해변으로 나가 자살한다."(<<소포클레스비극전집>>(천병희 옮김, 숲 펴냄, 2008.10) 해설에서 인용했습니다.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이 비극이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극은 이후 검은색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위 해설 가운데 검은색 부분은 <아이아스> 내용 중에서도 앞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머지가 그의 시신이 발견된 상황에서 장례절차를 두고 벌어지는 얘기. 곧, 자신을 죽으려 했음에도 오딧세우스가 용서하며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자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와 같이 비극이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양분구성’(die Diptychonkomposition, the diptychform)이라 하고, 소포클레스 초기 드라마들의 공통점입니다. 1)소포클레스비극의 진수인 <오이디푸스 왕>이 그의 활동 전기와 후기의 중간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는 점. 2)그리스비극 3대작가 중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에 이어서 소포클레스가 활동하는데, 그의 초기작들이 아이스퀼로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사란 죄와 벌의 끊임없는 반복이고 인간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 지혜에 이른다"는 것이 아이스퀼로스다운 주제입니다.  이 책의 역자도, "죄와 벌의 모티브는 소포클레스 드라마의 중심 주제라기보다 아이스퀼로스에게 받은 영향의 잔재"라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아이아스>에서 현재의 독자들의 눈으로 봐도 신선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앞서도 거론했지만, 오뒷세우스의 태도입니다. 사실, 이 극은 아테나라는 신이 극의 초반부터 적극 개입하여 아이아스의 눈에 뭔가를 씌게 하여 동물들을 오딧세우스 등 사람인 줄 알고 척살하게 한다거나 아테나는 오뒷세우스의 편에 분명하게 서 있으며, 조언도 아끼지 않습니다(여기에서 아테나는 인간에게 친절한 원조자도 잔인한 파괴자도 될 수 있는 호메로스적 신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_역자). 여신은, 오뒷세우스에게 추락한 적대자의 참상을 보여주겠다며 “적들을 비웃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웃음이 아닐까?”(79행)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기는커녕 추락한 적대자에게 깊은 동정을 느끼며 그의 운명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는 것. 이 드라마의 후반부에서 아이아스의 장례를 둘러싸고 고인의 이복동생인 테우크로스(Teukros)와 아트레우스(Atreus)의 두 아들-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이 분쟁할 때 인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오뒷세우스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뒷세우스의 인간적인 면모, 그것은 자신을 죽으려했던 아이아스에 대한 용서일 수도 있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배려-운명의 뒤바뀜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인정-일 수 있습니다. 곧 오뒷세우스의 용서는 자신 곧 인간에 대한 용서 혹은 너그러움이기도 합니다.  무대가 해변의 후미진 곳으로 바뀌며 배경에 숲과 덤불이 보입니다. 아이아스가 혼자 등장하여 칼끝이 위로 향하도록 칼을 고정하는데 자살하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긴 대사를 합니다. 유언입니다. 그 중에 제우스에게 부탁하는 아래 대목은 무장이 명예롭게 죽기를 바라는 마음, 죽어서의 치욕만큼은 면하게 해달라는 기원인데, 이는 오뒷세우스의 '인간적인' 결정과 조응하는 대목입니다.  

제우스시여, 그대가 나를 도와주소서. 그래야 마땅해요.
어려운 부탁을 드리려는 것은 아니에요.
청컨대, 내가 피투성이가 될 이 칼 위에 쓰러지면
그대는 테우크로스에게 사자를 보내 흉보를 알리시어
그가 맨 먼저 나를 들어 올리게 해주소서.
내 적들 중에 누군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는
개 떼와 새 떼의 먹이로 던저주지 않도록.
제우스시여,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드리는 부탁이에요.(앞의 책, 824~831행)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갑옷이 뭐 그리 대단(하다)하기에, 이것을 갖기 위해 경쟁하고 그것을 갖지 못하여 그것을 받게 된 자(오뒷세우스)를 제거하고 빼앗으려다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요? 전리품으로 받은(?) 첩 테크멧사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동행하여 귀국하는 길에 말입니다. 아아이스가 자살하면서 흘린 피에서 히야신스 꽃이 피어났다고 합니다. 꽃잎을 자세히 보면 아이아스의 머릿글자인 A.J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꽃말이 '승부'라는 점을 비극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극에서 아이아스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한탄하는 대목이 자주 나오는데, 이 곡하는 아이고 아이고는 그리스어로 aiai aiai로 아이아스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활동기가 기원전 50여 년인 오비디우스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뤘을까요? 그리스의 신화와 비극에서도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로마의 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곧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천병희 옮김, 숲 펴냄)를 인용하여, 히야신스라는 꽃에 대한 풍부한 묘사와 그리스 비극 <아이아스>의 아이아스의 죽음 이후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폴론이 그가 사랑한 미소년 휘아킨투스(라틴어식 표기)를 죽게 하고서, 안타까워 하는 대목으로, 이 책의 10권 196행부터 220행이 절창에 해당합니다.  

'오이발루스의 자손이여, 그대는 한창때의 청춘을(196행)
사취당하고 쓰러져 있구려!' 하고 포이부스께서 말씀하셨소.
'내가 보고 있는 그대의 상처가 나를 고발하고 있구나.
그대는 내 슬픔과 자책의 원인이오. 그대의 죽음은 내 손 탓으로
돌려질 것이오. 내가 그대를 죽게 했으니까. 하지만 대체
내 죄는 무엇인가? 그대와 시합한 것을 죄라고 할 수 없고,
그대를 사랑한 것을 죄하고 할 수 없다면 말이오.
아아, 내가 그대를 위하여, 아니면 그대와 함께 목숨을 버릴 수
있었으면! 하나 운명의 법칙이 그러지 못하게 하니 그대는 늘
나와 함께할 것이며, 나는 그대를 기억하고 입에 올릴 것이오.
내 손으로 연주하는 뤼라도, 내 노래도 그대를 찬미할 것이오.
내 그대를 새 꽃으로 만들어 내 신음 소리를 그 꽃잎에
아로새길 것이오. 그리고 때가 되면 가장 용감한 영웅도 그 꽃으로/변신하여 똑같은 꽃잎에서 제 이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오.
아폴로께서 거짓을 모르는 입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동안,
보라. 바닥에 쏟아져 풀에 흔적을 남기던 피는 더 이상
피가 아니었으니, 그 대신 그곳에 튀로스 산 자줏빛 염료보다
더 빛나는 꽃이 피어났던 것이오. 그것은 백합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백합이 은빛인 데 반해 그것의 색깔은 자줏빛이었다
포이부스께서는 그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이런 명예를 수여하는 것은 그분이셨기 때문이오.)
당신의 신음 소리를 손수 꽃잎에 적어 넣으시니, 그 꽃에는
애도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이 '아이 아이'가 쓰여 있소.
스파르테는 휘아킨투스를 낳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그의 명예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해마다 휘아킨투스제(祭)가 돌아오면 아직도
그들은 선조들의 관습에 따라 엄숙하게 축제를 거행하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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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강조한 '가장 용감한 영웅'은 트로이야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군 장수 '아이아스'를 말합니다.  그런데 꽃으로 변한 것은 아이아스가 아니라 그가 흘린 피였다는 주석이 있습니다. 앞서 소포클레스의 희곡 <아이아스>에 대해서는 얘기한 바가 있습니다. 아이 아이(Ai Ai)를 아이아스가 죽음에 이르러 통곡하는 소리로 사용하는 센스가 돋보입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살피고자 한 것은, 히야신스(라틴어로는 히아킨투스)의 유래와 관련된 것이지만, 첫째는 서사시(일리아스)에서, 그리고 비극(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이후 신화자료집(그리스 비극)에서, 이후 원전번역으로 책 그대로의 원전을 중시하여 번역했지만 현대어 느낌으로도 참 흥미로운 변신이야기에서는 어떻게 다뤄지는지 그 연관성입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라는 싯구에서 느끼듯이 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꽃의 내력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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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 2010-02-1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이야기를 서사시, 비극, 신화 그리고 이야기집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그 글느낌을 읽을 수 있어 좋습니다.

yess1985 2010-02-1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느라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로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timeroad 2010-02-19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우님 감사합니다. yess1985님도 유익한 자료가 되었다면..

책든손예쁜손 2010-02-1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그리스 신화에 빠져 보려고 합니다. 원전으로 가장 최근에 번역된 내용이고, 천병희 선생님 번역이여서 정말 유익 할 것 같습니다.

유키유찬 2010-02-19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정말 재미 있습니다. 요즘 신화 관련 영화도 하고, 꼭 읽어 보세요

여치 2010-02-19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복잡한 그리스신화 전설 영웅담을 재미있게 읽어습니다.

kangkang술래 2010-02-19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신화나 비극 등이 상상력의 원천이고, 그래서 다양한 분야로 그 샘물이 흘러들어가지만, 이렇게 꽃을 좋아하고 꽃말의 기원에 관심있으신 분이 그 분야를 폭넓게 섭렵하시다니 놀랍습니다. timeroad님은 꽃이 먼저였나요? 신화가 먼저였나요? 히야신스 말고도 <변신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꽃이 나오던데, 이렇게 비교 설명해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timeroad 2010-02-20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든손예쁜손님, 아이디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영화 <하모니>에서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교위와 김윤진, 교위가 김윤진의 수갑을 풀어주면서 엄마손을 약손이라고 하잖아요, 하는 대목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그리스 신화 등등에 작심하고 공부하는 중이라.. 건투를 빕니다.

timeroad 2010-02-20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키유찬 님, 가령, 퍼시잭슨의 번개도둑을 보면서 사실 책이 더 재밌어서, 혹은 책에서의 이야기를 얼마나 영상으로 옮길까 하는 기대감으로 보면 실망스러운데, 그래도 아이들이 제대로된 이야기를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여 반가웠고, 그런 관점에서 영화를 잘 봤답니다.

timeroad 2010-02-20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치 님 감사합니다. 강강술래님,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야기들을 엮어보겠습니다. 사실 변신은 탄생이리고 하지요. 사실은 이랬단다, 라는 설정 자체가.. 흥미롭지요.

라라 2010-02-20 0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틀 전에 조문을 다녀왔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아이'가 떠올랐어요. 의례적으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상주들이 곡을 하잖아요. 아이아스, 아이아이, 어쩌면 우리말과도 어감이 비슷하나 놀랍습니다.

timeroad 2010-02-20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라님, 그러게요. 촬영한 식물사진들이 꽤 많은데, 한국의 야생화나 들꽃들을 찾는 동안, 히야신스를 촬영한 사진은 없어, 히야신스에서 A.J가 보이는지는 꽃시장에 가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들딸들은 엄마아빠가 보이는 행동 하는 말(씨)를 정말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무심결에 확인하고 노랄 때가 있다. 가령, TV를 보며 소파에 푹 기대앉은 내 아이들을 보며 자세가 흐트러질까봐 걱정하는데,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이기도 하다.   

모처럼 서점에 갔다. 대형백화점 안에 자리잡은 그것도 2층이라서 넉넉한 정원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서점 안 카페에서 머그잔에 담겨오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주섬주섬 골라온 책을 살펴보고 있다. 한두 번 찾은 공간이 아님에도, 그렇게 머무는 사람들의 속내는 모르지만 여유로움이 좋다.  

비지니스상 만나는 만남도 이런 곳이라면, 훨씬 원하는 바를 얻고 또 상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는 생산적인 대화가 아닐까? 매번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뭔가를 마셔야 하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저도 저 필요한 것을 읽고 나도 내 필요한 것을 탐색하는 시간, 그리고 분위기에 젖어서 나누는 대화는 서로 깊이 이해하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사실, 영상매체에 너무 의존하고 인터넷 정보탐색에다 인터넷 장보기까지 오프라인을 너무 무시하고 사는 동안, 책읽는 재미, 아니 그 감을 잃어버렸다고 판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이러면서 아이에게는 너무 타박하는 것은 아닌가. 책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아이의 책읽기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아니, 보여야 하기 때문에 보이는 일은 사실 더 나쁜 것.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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