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팟캐스트에서 전해 듣고 굉장히 관심 가던 책이다. 

돈 걱정이 없고 시간이 많다면 당장 읽었을 거 같다. 그러나 제목과 표지 이미지를 기억하는 걸로 끝. 

80대 후반에서 90대로 넘어가는 주인공. 그녀는 이제 무엇도 참지 않는다. 분노를 조용히 감추며 살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이제 분노를 표현한다. 담배도 원없이 자유롭게 피운다. 내가 왜 금연을 해? 담배 피우면서, 그녀의 길었던 삶에서 어떤 배신이 있었고 어떤 실패들을 보았나 회고한다. 


노년. 죽음. 점점 더 관심이 가는 주제이기도 한데, 이 대목 들어봐라, 하고 읽어준 대목, 아주 좋았다. 마가렛 로렌스는 미국에서도 아직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는데 캐나다에서는 거의 "국민" 작가라고. 읽어준 대목에서 로렌스의 문장이, 바로 저 90대 노인의 정신, 심리의 정확한 반영 같은 문장이었다. 노인이 이럴 줄 몰랐지? 이것이 노인이 아는 분노이고 자유다. 분노의 자유다. 




모두가 "직업" 작가가 될 것 아니고 유명, 국민 작가가 될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글을 써야 함.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글은 정신, 삶과 밀접하게 만나는 거라서 글의 활용법을 알면 그게 바로 인생 사용법이 되는 것. 저 책에서 전해 들은 로렌스의 문장은 '당신의 삶은 이렇게 쓰기 위한 삶이었겠습니다...' 하게 되던 문장이었다. 무엇이든 기록될 수 있고 무엇이든 지극히 아름답게 ㅎㅎㅎㅎㅎ 기록될 수 있고 바로 독자의 정신에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는 것. 너무 노인이라 담배를 꺼릴 이유가 없음, 그 홀가분함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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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디아노를 격찬하던 에피도 있었다. 

그래서 이 역시 실현 가능성 별로 없지만 모디아노를 읽을 시간을 나도 내야 한다 생각했다. 


프랑스 역사가들 책들을 보면 놀라운 게 

아니 정말 뭐랄까 후대만을 생각하며 쓴 거 같은 면모들 있다. 

야 너, 이 시대의 너는 니가 내 책을 읽든 말든. 

나는 100년 후에 올, 100년을 가로질러 만날 사람인 그 너를 위해 쓴다. 


후대의 평가, 후대의 시선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후대의 시선. 이걸 자각한다는 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 감각인가, 하는 생각도. 



당대를 아주 격렬히 비판할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 같다. 

나는 그 격한 비판이 너무 좋아서, (이미 충분히 좋지만) 더 해! 더 해! 계속 해! 영원히......... 더 해! 같은 심정 되기도 했었다. 격한 비판의 기록이 전해질 때, 후대의 역사 기술은 언제나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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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루스벨트 전기가 새로 (또?) 나왔다. 

이것도 관심 간다. 


저자에게 인터뷰에서 마지막 질문은 이런 거였다. "오늘 청년 세대에게 그녀가 주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가?" 

저자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우리의 인간성은 타인들의 인간성을 통해 (through the humanity of others) 실현된다는 것."


적고 보니 뭐 그냥 대단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을 땐 완전히 와닿음. 얼마 전에 어떻게 이런 박사가 (90년생인데 ㅎㅎㅎㅎㅎ) 나오냐고 감탄했던 Pietro Terzi. 그를 보면서 생각했던 걸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이런 박사가 나오려면 이런 박사가 이미 백명은 나왔어야 한다. 이 사람을 보면, 그의 주변 사람들을 알 수 있다. 누가 그를 키웠으며 누가 그를 이해했고 누가 그와 논쟁했는가...... 인간은 그가 속한 사회. 


그리고 저 말을 뒤집으면, "우리가 비인간이 되는 건 타인들의 비인간성을 통해...."가 되기도 하지 않나. Yuji 논문과 그 여사. 국민대의 입장.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 반말이 체질인 그 여사 남편.



아이고 폭풍 포스팅을 하려면 질보다 양. 길게 잘 쓰기보다는 잘게 계속 쓰기. ㅎㅎㅎㅎㅎ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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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서평 팟캐스트에서 듣고 

장바구니 넣어둔 책이다. 구입 우선 순위에서 1,2 등을 다투는 중. 

<미국의 반지성주의> 쓴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지적 평전. 팟캐스트 출연한 이 평전 저자는 

미국에서 나온 사유하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자기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거의 언제나 애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식으로 말했다. 내가 그런 인간인데, 호프스태터를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호프스태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식으로 말했다. 


이 팟캐스트 들으면서, 그들이 전하는 입장을 완전히 똑같이 내 입장으로 갖게 되는 때 있다. 얼마 전에는 "표절"에 관한 얘기가 그랬다. 청취자가 이메일로 이들에게 질문했다. "나는 원고는 여럿 있지만 아직 출판하지는 않은 작가다. 출판 에이전트를 찾고 있는데 걱정되는 게 있다. 내 원고가 마음에 들었는데도 에이전트가 원고를 돌려 보내는 경우도 있는가? 그런 경우도 있다면, 혹시 내 원고의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싶은 동기에서 그러는 때는 없는가? 에이전트가 다른 작가에게, 내가 받은 원고에서 읽은 것인데.... 하면서 아이디어를 주는 경우는 없는가? 작가 지망생이 출판 에이전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대화가 꽤 오래 진행되었는데, 결국 이들의 답은 "신뢰할 수 있어. 이 업계가 그렇게 돌아가. 예외가 있겠지만 극히 드뭅니다. 그러니 신뢰해!" 였다. 

 



많이 와 닿고 밑줄 긋고 생각하게 되던 건 저 구절이었다. "a poor form." 

"투고 원고를 읽고 아 이것 참 기발하다 감탄할 수도 있다. 아 내가 이 아이디어를 먼저 생각했다면! 할 수도 있다. 사실 그러는 일도 현실에서 실제로 별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거 같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원고 파일을 닫으면서 이걸로 내가 은밀히 뭘 해봐야지.. 생각하고 실행한다는 것? It really is a poor form." 


form, 이 단어를 역량, 실력, 관행 같은 의미로 쓰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참 신선했었다. 

"return to form" 이 구절, 엄청 신선했었다. (폼 회복했네...... 이 말을 쓸 일이 많아야 한다...) 

"poor form", form을 이렇게도 쓰는 건 저기서 처음 들었는데, 이 역시 매우 신선했고 많이 생각하게 했다. 


그게 "poor form"이라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갖는 거의 절대적인 억제력! 

그것이 어떤 부끄러움, 수치인지 알기 때문에! (.................) 이러면서 감탄했다. 얼마나 긴 주석을 여기 달 수 있는 것이냐. 한국의 상에 이걸 적용해 보라. 



*이렇게 또 개뜬금 포스팅 합니다. 

정신이 입고 있는 피해들을 우리는 기록합시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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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들으면서 아주 강력히 끌렸던 책이다. 

저자의 말이 책에 대해 자극하는 관심의 척도 1-10으로 한다면, 10. 10. 10. 10000000. 10의 10배의 10배의. 

저자의 말 듣고 책에 대해 이 정도로 관심이 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거 같다. 궁금하다, 언제 확인해 봐야지. 마음에 든다고 해야 대개는 저 정도 느낌. 이 책은, 


혹시 책이 나를 실망시킨다 해도 

당신이 이 책을 썼고 

그리고 책에 대해 지금 당신이 한 것 같은 그 말들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거 같. 

내 안의 무엇이 영원히 바뀐 거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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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홀브룩은 나는 처음 들은 이름. 

미국 정치, 외교에 조금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대단히 국제적 유명인은 아니었던 인물. 

41년생이고 2010년 타계. 미국의 외교관. 카터 시절 국무부 차관으로 시작하여 클린턴 시절에도 국무부 차관,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국무부 차관이었던 인물. 


그의 "job ambition"은 국무부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밑까지는 가도 거길 가지 못함. 

그리고 그건 그의 인간적 결함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그를 진심으로 염오하게 만들었다. 오바마와 처음 만나는 건 오바마가 초선 당선이 확정된 직후였는데, 그는 그에게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 자신이 썼던 책을 주고 (그렇게 자기 선전을 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미국 역사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당선했다는 것에 감격하기 위하여 내가 흑인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그는 오바마와 만나고 30분 안에, 오바마가 자기를 영원히 혐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job ambition"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무엇이 될 것인가 (to be), 만큼 무엇을 할 것인가(to do)가 그에게 중요했고 이 점에서 그에게 비상한 에너지와 통찰이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이것을 이해했던 인물이다. 힐러리는 그의 인간적 결함을 감수하면서 그의 최선을 끌어내고 그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워싱턴에서 그를 사랑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힐러리가 그 중 하나다. 


리처드 홀브룩이 죽었을 때, 미국이 자신의 "이상"과 함께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시절도 끝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면서, 적들에 에워싸여 살았던 그임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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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해준 얘기는 대강 정리하면 저런 거였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얘기에 그렇게 강하게 반응하게 되던 건, 공적인 삶에서 중요했던 인물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저자 자신의 에너지. 그 인물의 결함도, 그 인물의 강점과 성취도 깊이 보고 정확하게 평가한다는 것. 


한국 현대사에서 그렇게 이해하고 평가할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 이해와 평가가 얼마나 없었는지 (한 번도 없었던 거 아닙니까......... 최소 6백 페이지 평전이 나와야 할 인물들이 여럿인데 그 평전이 없다, 기준으로 하면). 그 이해와 평가가 뿌리 내리면 얼마나 삶이 달라질 것인지. 


(*서재 회람(?)은 못하면서 뜬금포 포스팅 하고 갑니드.... 벽돌책 전기를 생산하는 우리가 됩.......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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