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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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뒤따라온 의혹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사랑에...>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자녀를 둔 부모가 쓴 책이다.(진짜 좋고 의미있는 책이다!) 거기에 바로 이 책 <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가 여러 번 인용되었길래 도대체 암이라는 병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지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되었다.(부끄럽게도, 백혈병이 암의 일종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나는 암이라는 병에 대해 무지했다.)


이 책은 암과 관련된 방대한 분야를 다룬다. 암이라는 병 자체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암 치료법의 역사, 미국 정부로부터 암 관련 예산을 따냈을 당시의 일화들, 암의 원인과 예방, 암 환자들이 겪는 고통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책이 워낙 두꺼운 데다가 암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어떤 부분은 조금 스킵하면서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재밌고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인데 이 정도의 책을 써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 저자가 쓴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져서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항암제를 발견하고 그걸 환자들에게 적용해가는 여정이었다. 그걸 이해하려면 다시 백혈병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미성숙한 백혈구가 엄청나게 많이 증가해 문제를 일으키면 백혈병이다. 통제할 수 없는 비정상적 세포 증식이라는 암의 특성이 백혈구에 나타난 것이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ALL)은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데 과거에는 치료할 방법이 없어 대부분 사망했다고 한다.


백혈병을 치료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액체 형태의 암이기 때문이다. 1890-1900년대, 종양을 잘라내거나(=절제술) 종양을 태워버리는(=방사선 치료) 시술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백혈병처럼 혈액에 생기는 암은 잘라낼 수도 태워버릴 수도 없었다. '백혈병은 그것에 처방할 약물이 아예 없는 내과의사들과 혈액을 수술할 수는 없는 외과의사들이 포기한, 고아나 다름없는 질병'이었으며 '질병들의 국경선상에 사는, 분야와 분과 사이에서 숨어 지내는 추방자'였다. 형태가 없는 암은 수술이나 방사선으로 치료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약물로 치료할 수는 없을까?


1928년, 영국 의사 루시 윌스는 인도 방직 공장 노동자들 중 출산한 여성들이 심각한 빈혈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빵에 발라먹는 효모 식품인 '마마이트'를 먹이면 그러한 빈혈 증상이 완화되었다. 정확히 '마마이트' 속 어떤 성분이 그러한 효과를 가져오는지는 나중에 밝혀졌다. 혈액 생성에 필수적인 성분 중 하나인 엽산이었다. 1940년대, 어린이 병원에서 일하는 시드니 파버라는 이름의 의사는 바로 이 엽산에 주목했다. 피 생성, 혈액, 골수, 엽산...이런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에게도 엽산을 먹여보면 어떨까? 결과는 대실패였다. 엽산을 투여한 환자들 몸에서 백혈구 수가 두 배로 증가했다. 엽산은 백혈병 세포를 촉진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요즘 같았으면 백혈병 환자들에게 엽산을 투여해서 백혈구 수가 두 배로 증가한 시점에서 시드니 파버는 병원에서 쫒겨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40년대였고, 백혈병은 어차피 치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위험한 실험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 당시에는 새로운 약물을 임상시험할 때 환자 측의 동의를 받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서 다행인, 무서운 시절이었다. 시드니 파버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엽산이 아이의 백혈병 세포 생산을 가속시켰다면 반대되는 다른 물질, 즉 항엽산제를 투여하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즈음 다른 과학자가 엽산의 길항제(=대항제)를 발견했다. 시드니 파버는 테로일아스파르트산(PAA)이라고 불리는 항엽산제를 받아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 투여했으나 기대할 만한 반응은 없었다. 그러던 중 '아미노프테린(=메토트렉세이트)'이라는 새로운 항엽산제가 파버에게 도착했다. 그걸 백혈병 환자에게 투여했는데 놀랍게도 백혈구 숫자가 거의 정상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사건은 화학물질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밝혀낸 최초의 사례였다.


이러한 발견은 백혈병 환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소식이 아니었다. 다른 분야의 암을 치료하는 의사들 역시 새로운 치료법이 절실하던 때였다. 암에 대해서는 절제술도 방사선 치료도 모두 한계가 분명했다. 두 치료법은 국소 종양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이미 전이된 암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방사선 치료는 방사선 자체가 암을 유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더 공격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암은 전신 질병이고, '전신 질병에는 전신 치료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화학요법의 등장은 또 하나의 구세주였다.


항엽산제가 항암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 후로도 여러 가지 항암제들이 등장했다. 그 발견 과정이 다소 충격적이다. 전쟁 때 화학 무기로 쓰였던 머스타드 가스가 항암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머스타드 가스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심각한 피부 손상을 겪으며 사망했다. 이 사람들의 골수를 검사해보니 대개 혈액에서 백혈구가 사라지고 골수가 말라붙은 상태였다. 의사들은, 멀쩡한 사람의 골수를 말라붙게 하는 독약이 비정상적인 백혈구 증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치료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의사들은 머스타드 가스를 환자에게 실험했다. 다른 신체 기관의 손상을 막기 위해 반드시 정맥을 통해 조심스럽게 주사해야 했다. 림프종을 앓고 있던 남성에게 머스타드 가스를 투여했더니 증상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6-MP라고 불리는 독성 강한 물질이 백혈병 환자들의 증상을 완화해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또 다른 독극물이자 항암제인 빈크리스틴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항암제는 그야말로 약보다는 독에 좀더 가까운 화학 물질이다. 사람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만들지 않고서는 암 세포를 없애기가 어렵다. 암 세포는 그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이 정도 독한 약물로 치료를 했는데도 환자들의 암은 계속해서 재발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여태까지 항암제로 밝혀진 약물들을 섞는 것뿐이었다. 메토트렉세이트, 프레드니손, 6-MP, 빈크리스틴 등을 적절한 용량과 적절한 순서로 섞어서 환자들에게 투여했다. 투여 약물의 머릿글자를 따서 VAMP, MOPP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초기 칵테일 요법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치료된 듯 보였으나 곧 재발했다.


혹시 투여한 약물의 용량이 너무 적었던 건 아닐까? 투여 기간이 너무 짧았던 건 아닐까? 도널드 핑컬이라는 종양학자는 '전면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메토트렉세이트를 척추에 투여하면서 뇌에는 고선량의 엑스선을 쏘고, 그 후에도 고용량의 약물을 환자가 견딜 수 있는 최대치로 오랜 시간 투여해보면 어떨까. 그 결과는 뜻밖에도 좋았다. 이 과정을 모두 견뎌낸 환자들의 재발률이 낮아졌다. 


여러 가지 약물을 섞어서 투여하고, 암이 없어진 것 같아보여도 좀더 확실하게 치료하는 것이 항암의 표준으로 서서히 자리 잡은 듯 보인다. 이러한 치료법이 마련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과 희생이 있었다. 암을 정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굴복하지는 않으려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러한 과정들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현재 암이라는 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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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다. 시간이 참 잘 간다. 시간이 흐르는 게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 그 시간들을 잘 견뎌냈다는 뜻이니까, 한편으로는 달력이 넘어가는 게 뿌듯하기도 하다. 예전에 투병하시는 분이 그린 인스타툰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을 보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건 그 나이까지 죽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니 많은 게 달리 보였다. 나이 먹는 게 딱히 슬프지 않다. 아프지 않고 꺾이지 않고 2025년을 맞이한 나 자신, 대견하다.


어제는 시사인 전자책을 구독해볼까 싶어서 시사인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뉴인(NEW 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사인 전자책을 구독하면 월 12,000원인데 뉴인을 구독하면 월 9,900원에 시사인 최신 기사들을 전부 볼 수 있다는 것. 시사인 기사들을 굳이 책의 형태로 볼 필요가 없는 나에게는 상당히 합리적인 서비스였다. 바로 구독 결제! 주간지 기사의 긴 호흡을 좋아하는 편이라 예전부터 시사인을 좋아했는데 뉴인 서비스 괜찮으면 이걸로 정착해야겠다. 종이 잡지 쌓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딱인 것 같다.


어제는 또 당근 거래를 열심히 했다. 안방 침대를 무료나눔으로 올려놨는데 깨끗한 상태가 아니여서 그런지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실 이런 큰 가구는 운반 가격이 문제다. 용달차 부르면 못해도 20-30만원은 나올텐데 그 돈 주고 이렇게 낡은 침대 가져가느니 사는 게 낫겠다고들 생각하는 듯 하다.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어제 연락이 왔다. 외국인이었다. 이 외국인은 대뜸 영어로 매트리스만 가져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날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던가? 에라 모르겠다, 나도 영어로 대화했다. 매트리스만 가져가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사이즈가 크니 차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신은 혼자고 이걸 들고 버스를 타겠다는 거다ㅋㅋㅋㅋㅋ내가 말했다. 절대 안 된다고, 이거 혼자서는 들지도 못한다고, 버스에 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 외국인은 자신의 집에 아무 것도 없으며 오늘 당장 매트리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그 사정은 이해하는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싱글 매트리스를 구해보는 게 낫지 우리집 매트리스는 당신에게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느 정도 수긍했는지 다른 물건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휴...미리 말 안 했으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이 동네는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수도권인데 몇 년 전부터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당근 거래 하는 외국인들도 꽤 만났다. 예전에 냄비 나눔글 올렸었는데 그거 받아간 사람도 외국인이었다. 한국말 너무 잘해서 얼굴 보기 전까지는 외국인인지도 몰랐다. 오늘 침대 가져간다는 이 분은 한국에 처음 온 사람인건지 한국말을 못하고 냅다 영어로....;; 그나저나 이분이 문장 끝에 sir/ma'am 붙이는 건 별로였다. 내가 그 사람 상관도 아닌데, 당근에서 무료나눔을 하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갑자기 불편해졌다. 예전에 인도 여행할 때 그쪽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말할 때 꼭 sir 혹은 ma'am을 붙였던 기억이 떠올랐다.(부자들은 당연히 예외ㅋㅋ)이 외국인도 혹시나 그쪽 계통인 걸까. 뼛속 깊이 깔린 계급 의식을 느낄 때마다 나는 불편해진다. 그나저나 방에 매트리스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데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보내나 걱정이네.


밤에는 장농 정리를 했다. 모아서 아름다운가게에 보내려고 했는데 계획 취소. 아름다운가게는 당장 옷걸이에 걸어서 팔아도 되는 컨디션의 옷들만 받는다고 한다. 세탁이나 수선 과정이 없기 때문에 진짜 깨끗한 옷만 받는다고. 내가 선별한 옷은 그 정도의 컨디션이 아니어서 아무래도 헌옷 수거업체에 연락을 해야할 것 같다. 옷 기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기증을 하고 싶다면 깨끗하게 입고 낡아지기 전에 미리미리 기부할 것. 오늘의 교훈이다.


요즘 보고 있는 책은 <중앙아시아사>. 이 책, 재밌다. 밀리의 서재에서 보고 있는데, 전자책 적립금 쌓이면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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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엄마가 수술하러 병원에 갔을 때 나 혼자 분리수거를 한 적이 있다. 부모님댁의 묵은 짐을 정리하는 중이라 분리수거 하는 날마다 버릴 게 산더미처럼 나온다. 그날도 엄청나게 많은 짐을 들고 나가야 했는데 우리집 강아지가 혼자 못 있겠다면서 잽싸게 나를 따라나왔다.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성향이기는 하지만 엄마가 있을 때는 분리수거하러 나갔다 오는 시간 정도는 혼자 있었다. 하지만 주보호자인 엄마가 없으니 분리불안 성향이 심해지면서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하는 강아지가 되어버린 것ㅠㅠ


그날따라 눈이 많이 와서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웠다. 유모차 안에 분리수거 바구니 하나 넣고, 그 위에 하나 쌓고, 손으로는 유모차 밀고 발로는 박스 하나 밀면서 분리수거장까지 다녀왔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ㅋㅋㅋ. 혼자서 짐정리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분리불안 성향 강아지 돌보면서 눈 오는 날 분리수거까지 하려니까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ㅠㅠㅠ그럼 뭐하나.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낑낑 대면서 분리수거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 다시 돌아온 분리수거 날. 오전 햇빛이 너무 좋아서 분리수거는 오후에 하기로 하고 엄마랑 나는 각각 산책을 나섰다. 엄마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갔고, 나는 혼자 나갔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다가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아보이는 어르신이 한 손에 분리수거용 바구니 두 개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종이가 가득 든 박스를 질질 끌고 가는 게 보였다. 얼른 달려가서 박스 하나를 들어드렸다. 혼자서 낑낑 거리면서 분리수거 하는 괴로움을 알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지난주에는 혼자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으니 이런 것도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헬로, 뷰티풀>에 나오는 문장인데 힘들 때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이 문장이 떠오른다.


설 연휴는 조용히 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짐 정리를 하면서. 엄마는 오늘 말씀하셨다. "그동안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 아직도 정리할 게 남아있어?" 예, 그러게나 말입니다. 수납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아주 많은 짐이라도 요리조리 잘 쌓아놓으면 좁은 공간에 배치해놓을 수 있다. 그래서 수납을 잘한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많은 짐을 효율적으로 보관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쓸모없는 짐을 잘 숨겨두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곤도 마리에가 설파한 정리의 기술 첫 번째는 정리할 물건을 모두 꺼내서 펼쳐놓으라는 거다. 안 쓰는 물건을 상자에 넣어두고 베란다에 차곡차곡 쌓아두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꺼내서 전부 펼쳐보면 어마어마한 양이 된다. 거기에 충격을 받아야 비로소 정리가 시작되는 거다. 그 작업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ㅠㅠ도대체 언제 끝나...


최근에는 그릭 요거트에 빠져 있다. 그릭 요거트를 사먹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반 플레인 요거트를 사서 그릭 요거트 메이커에 넣어서 만들어 먹고 있다. 1차 유청분리, 2차 유청분리를 거치면 크림치즈처럼 꾸덕한 그릭 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 나는 뭐든지 꾸덕하고 되직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꾸덕한 그릭 요거트 완전 내 취향이다. 엄마는 너무 되직한 걸 좋아하지 않아서 요거트에 두유를 첨가해서 드시고 있다. 무가당 플레인 요거트는 새콤한 맛이 너무 강해서 먹기가 힘들었는데 유청 빼고 꾸덕하게 만드니까 신기하게도 새콤한 맛이 싹 빠지고 딱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고 과일이랑 먹어도 맛있다.


오늘도 쿠팡프레시로 1.8리터 짜리 플레인 요거트 두 병을 주문했다. 그릭 요거트 만드는 데에 최소 30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미리미리 주문해서 만들어놔야 한다. 1.8리터로 만들어도 유청 다 빼고 나면 얼마 안 남는다. 둘이서 사나흘이면 싹 먹어치울 양이다. 매일 아침 먹으려면 쉬지 않고 공장처럼 그릭 요거트를 만들어내야 한다ㅋㅋㅋ. 요즘 그릭 요거트 만들어 먹는 게 나의 낙이다.


어제부터 중앙아시아 지도 그리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관련된 책들을 계속해서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 지도가 쫙 펼쳐지지 않으니까 읽다가도 턱턱 막힌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나라 위치랑 주요 도시 위치 정도는 머리 속에 입력해놓으려고 한다. 어제부터 일기장에 그려가면서 연습하는 중인데 은근히 쉽지 않다. 예쁘게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연습해야지. 그리고 언젠가는 우즈베키스탄에 꼭 가보고 싶다. 부하라, 사마르칸트가 전부 우즈베키스탄에 있다니...!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이제 진짜 음력으로도 찐 2025년이다. 작년 한 해는 삼재가 꼈나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는데(진짜 삼재일까봐 무서워서 알아보지 않았음) 올한해는 어떻게 지나갈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그래봤자 모든 일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힘들고 기분 나쁜 일은 흘려보내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기억들만 꽉 붙들어야겠다. 우울한 일들은 일부러 일기장에 적지 않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애써서 즐거운 일만 적는 중이다. 태어나길 워낙 시니컬하게 태어나서 즐거운 일만 골라내는 게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노력하는 중이다. 노력한다면 점점 더 나아지겠지. 되면 되고,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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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갑골문자 - 중국의 시간을 찾아서 걸작 논픽션 27
피터 헤슬러 지음, 조성환.조재희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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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고 쓸쓸하면서도, 불편한 연민은 느껴지지 않는 에세이였다. 저자의 특성일 수도 있고 중국인의 특성일 수도 있고, 하여튼 좋았다. 이 저자의 다른 책들도 전부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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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귀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다. 십몇 년 전에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왼쪽 고막이 터졌었는데 그후로도 계속해서 염증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더니 왼쪽 귀가 솜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아예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너무 오래 되었다며 일단 수술은 해보지만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며 일단 수술을 해보기로 했다. 오늘 입원해서 내일 수술하고 내일 모레 퇴원한다.


간호간병통합병동이라서 보호자가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집에 남아서 또 짐 정리를 했다. 요즘 내 일상은 정리가 뒤덮었다. 인스타만 켜면 온갖 정리용품&정리꿀팁 릴스가 뜬다. 오늘의 타깃은 현관.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신발장을 열면 카오스다. 모든 물건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사시는 이 집에 우산이 스무 개가 넘어간다. 아니, 서른 개? 그런데도 비가 와서 급하게 하나 집어서 나가면 안 펴지기 일쑤다. 거기다가 구두 신을 일이 아예 없는 상황인데도 구두약과 구두솔이 넘쳐난다. 여기 이사 와서 신발장 서랍에 던져놓고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구두약과 구두솔은 전부 빼서 박스에 담아두었다. 한두 개만 남기고 전부 버릴 예정이다. 우산도 하나씩 다 펴보고 고장난 것들은 버릴 거다. 부모님이 이 집에 안 계시는 동안 내 맘대로 정리할 예정이다. 어차피 아무도 내가 정리한 걸 모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공간에 손 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좋게 말해 개인적이고, 나쁘게 말해 남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서 남의 공간을 정리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이 상태 그대로 유지될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사부작 사부작 정리를 하고 있다. 오늘은 현관, 내일은 장농, 모레는 주방 차례.


부모님이 쌓아둔 짐을 정리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하루는 내 짐도 다 갖다 버리고 싶다가, 또 하루는 미친듯이 뭔가를 사고 싶다는 욕망에 허덕인다. 아무래도 미쳐가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에게 상담했다. 남편은 나보다 몇 년 전에 이 과정을 다 겪어본 사람이다. 남편은 나보고 자아를 버리라고 했다. '이건 왜 이러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런 의문 자체를 갖지 말라고 했다. 기계처럼 정리를 하라고 했다. 자아를 버린다는 것.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위한 즐거움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역시 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근처 도서관에 책배달 신청을 넣었고 어제 한 권, 오늘 세 권 찾아왔다. <나는 걷는다 1>은 예전에 읽었기 때문에 2, 3권만 빌려 왔다.

알라딘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리고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꺼냈다. <나는 걷는다2>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 부서지기 쉬운 순간은 나와 세상 사이에 화합이 자리 잡는 시간으로, 사람들은 그 시간을 연장할 수 없는 걸 아쉬워한다. 슬픔이 다시 찾아오는 때에 떠올리게 되는 기분 좋은 순간들은 찌르레기의 비행처럼 덧없고 강렬한 순간이며,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서 훔쳐낸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행복을 찾아서 나는 떠난 것이고, 2000년 이상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실크로드는 그러한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으로 보였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실크로드를 끝까지 횡단하거나, 적어도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고 싶다. 난 지금 예순둘인 데다 계속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에 여행을 마칠 때까지 건강이 허락할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이 왜 이런 생고생을 하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른채 험한 길을 걷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뭐라고 모든 일에 '왜, 어떻게' 같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걸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책에서 향기가 났다. 아까 도서관에 있는 책 소독기를 이용했더니 그 향기가 아직도 책에 짙게 배어있다.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꾸만 이렇게 독기를 뿜어내서는 곤란하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아까 엄마한테 살짝 짜증을 냈는데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상냥하고 착한 딸로 돌아왔다.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한 사람의 책을 읽으면 이런 효과가 있다.


부모님댁 아파트 단지는 매주 목요일에 분리수거를 한다. 신발장에서 꺼낸 더러운 신발상자들은 아직 버리지 못한 채로 현관에 쌓여있다.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 적어도 오늘만은 현실을 잊고 모래바람 날리는 중앙아시아 스텝을 걷고 싶다.


그래,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발견할 세계가 내가 떠나온 세계보다 못한 곳인가? 도시를 뒤흔드는 불안한 광기, 일상의 스트레스, 발동기와 같은 욕망, 모든 책략의 최종목표와 같은 권력, 미덕으로 격상된 공격성······ 이런 것들이 내가 방문하게 될 마을보다 안전한 것인가? 나는 인간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걸음으로써 시선을 올바른 차원으로 되돌리고 시간을 다스리는 법을 익힐 수 있다. 걷는 사람은 왕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는 고통을 당하지만, 좀더 잘 살기 위해서 조립식 소파보다 넓은 공간을 선택한 왕······. 나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던 제약과 두려움에서 내 머리와 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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