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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잉글리시 페이션트 ㅣ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6월
평점 :
이 책은 예전에 ‘이동진의 빨간 책방’ 시절에 사두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빨책 선정작들을 열심히 따라가면서 읽었는데 이 책은 도저히 못 읽겠어서 포기했다. 맨부커상 50주년 기념으로 뽑은 ‘골든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지만, 생각보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마이클 온다치의 『워 라이트』에 대한 서평을 보다가 그 책에 흥미가 생겼고 같은 작가의 책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게 떠올라서 『워 라이트』 전에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먼저 펼쳐 들었다. 다행히도 그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게 헛짓은 아니었다보다. 몇 년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예를 들어 이런 서술 때문이다.
【그는 개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 쭈그리고 앉으려다, 균형을 너무 늦게 잡는 바람에 비틀거리다 탁자를 붙잡아서 와인 병을 뒤엎었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맞지?
그들은 그를 참나무 탁자의 굵은 다리에 수갑으로 붙들어 맸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 카라바지오, 맞지?” 이 말은 현재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의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탁자를 붙잡고 와인 병을 쏟는 순간 그것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들어온 것이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이 부분이 과거 회상이라는 걸 놓치게 되고, 이탈리아 수도원에 있는 ‘그’가 왜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에 의해 수갑으로 묶였는지 의아해하게 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에 대해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세계는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으며 문장은 과거와 현재를 아무런 연결 없이 뚝뚝 넘나든다. 한 가지 사건도 여러 다른 시점에서 접근된다. (…) 온다치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구상할 때 플롯의 뼈대 자체가 없었으며 전쟁 이야기와 추락한 비행기에 대해서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플롯의 뼈대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요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혹은 말을 하더라도 주요한 부분들 빼고서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야기들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걸 맞추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데 어느 순간 이 퍼즐을 꼭 맞춰야 하나, 그냥 이 상태로 감상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건들을 인과관계에 따라 완벽하게 이해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보여주는대로 읽었다.
중심이 되는 인물은 네 명이다. 영국인 환자와 간호사 해나, 도둑 카라바지오, 그리고 지뢰 찾는 임무를 맡은 영국군 공병 킵(본명은 키르팔 싱). 이 넷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우연한 계기로 모이게 된다. 이들의 행동은 때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나는 영국인 환자를 왜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가. 물론 소설 안에서 이에 대한 이유가 나오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도둑인 카라바지오가 겪은 일들, 지뢰를 찾는 킵의 일들도,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소설의 말미에 다다라서, 내가 이들의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몇 년이 훌쩍 지나버린 시점이다. 그 사이에 각 인물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고, 소중했던 사람이 죽거나 감옥에 갇혔고, 또는 자신의 신체에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평상시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때로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국도 아닌 곳에서 매일 매일 죽음과 맞이하는 상황에 몇 년째 놓여있다. 그런 이들에게 이성적인 인과관계, 논리적인 사고구조를 기대해도 되는 것일까. 파편적으로 툭툭 내뱉어지는 말들 사이에서, 똑같은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거나 감추려는 태도에서 나는 오히려 ‘설명할 수 없음’을 느꼈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을 포기하고 좋았던 장면 몇 개를 뽑아봤다. 영국인 환자에 관한 장면이라 먼저 영국인 환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야겠다. 이 영국인 환자는 사막에 떨어진 불 탄 비행기에서 걸어나온 사람으로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아프리카 북부에서 이탈리아로 이송되었다. 자신에 대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영국인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밖의 것 - 사막의 지리, 사막의 풍습 등 - 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탈리아 수도원에 누워있는 처지가 되어서도 머릿 속으로는 모든 사막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다.
【"길프 케비르라."
"그래요."
"그게 어디요?"
"키플링 책 좀 줘봐요..... 여기."
『킴』 의 앞장은 소년과 성인(聖人)이 지나간 경로를 점선으로 표시한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인도의 일부만 나와 있을 뿐이었다. 사교 평행선이 나누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산골짜기에 위치한 카시미르.
그는 검은 손으로 누미 강을 따라 훑다가 마침내 위도 23도 30분에 위치한 바다에 이른다. 그는 손가락으로 서쪽 18센티미터 지점까지 더 훑다가 페이지에서 손을 떼고 가슴에 얹는다. 그는 자신의 갈비뼈를 만진다.
"여기요. 길프 케비르. 북회귀선 바로 북쪽, 이집트와 리비아 국경 위에."】
카라바지오가 영국인 환자에게 ‘길프 케비르(이집트의 남서쪽에 있는 고원)’의 위치를 묻자 그는 키플링의 책 『킴』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인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는 책을 가슴에 얹고는 자신의 갈비뼈를 가리켜 바로 이 곳이 길프 케비르라고 말한다. 이 영국인 환자는 땅이나 지도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이렇게 보여주다니. 너무 좋아하는 장면이다. 또 이런 말도 한다.
【내가 그들 사이에서 지금 어딘지 모르고 길을 잃었을 때, 필요한 건 오로지 작은 산등성이의 이름, 지역의 관습, 이 역사적 동물의 세포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전 세계의 지도가 제자리로 맞춰지지요.】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산등성이의 이름만 알면 전 세계의 지도가 촤라락 맞춰진다니, 진정으로 광기 어린 지리학자다.
영국인 환자가 가진 유일한 소지품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인데 이에 관한 묘사도 꽤나 인상적이다.
【그녀는 그의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공책을 집어 든다. 그가 화염 속에서도 가지고 나왔던 책,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이다. 그 위에 그는 다른 책의 페이지를 잘라 붙이기도 했고 자신의 관찰을 적어놓기도 했다.】
【그의 비망록, 헤로도토스의 『역사』 1890년 판에는 지도와 일기, 여러 언어로 쓰인 산문과 다른 책에서 오려낸 문단들이 들어 있었다. 빠져 있는 것은 그의 이름뿐이었다. 그가 실제로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고, 익명에 계급도 소속 대대도 분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언급들은 모두 전쟁 전이나 1930년대의 이집트와 리비아의 사막에 대한 이야기였고 동굴 예술이나 화랑 미술, 그의 작은 필체로 쓴 일기 항목에 대한 얘기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영국인 환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자신의 일기장처럼 썼다. 그래서 원래 두께보다 부풀어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나름 손글씨 다이어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갑자기 전율이 느껴졌다. 사막을 탐험하면서 자신의 인생 책 단 한 권을 가지고 가서 거기에 계속해서 뭔가를 기록해나가는 일,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이 소설 안에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지어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재미있었다.
책에 대한 리뷰인데 영화 이야기도 살짝 써볼까 한다. 이 책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도 상당히 좋다. 책에서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가 영화에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서 나온다. 영화에서 킵의 비중이 상당히 줄어든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어떤 영화 감독이 보더라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영국인 환자의 과거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장대한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강렬하다. 나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본 이후로 눈밭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의 끝판왕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이고 사막 위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의 끝판왕은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아닐까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고보니 이 소설은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읽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텍스트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에 집중해도 충분히 재미있고, 사막에 대한 텍스트로 읽어도 가치가 있으며, 폭탄에 대한 설명서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킵의 폭탄 제거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런 다면적인 독서 경험을 준다는 점 때문에 골든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일까.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사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면서 읽다가 마지막에는 이것은 역시 전쟁에 관한 소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킵이 주요한 인물로 떠오르면서 소설에 굉장한 긴장감을 준다. 그가 폭탄 제거반이라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설정이다.
한 번 읽자마자 다신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느껴지는 책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언젠가는 꼭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바로 재독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몇 년 정도 뜸을 들였다가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수월하게 이 책을 이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마이클 온다치의 책들도 좀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다는 거야.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에서 무엇 하는 거지? 대체 킵은 과수원에서 폭탄을 해체하면서 무엇 하는 거지? 어째서 영국인들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지? 서부 전선의 농부는 나뭇가지를 자를 때마다 톱날이 망가진다는군, 왜인 줄 알아? 지난 전쟁 동안 박힌 총알 파편이 너무 많아서야. 우리가 몰고온 질병 때문에 나무들도 굵어졌고. 군대는 너희들 머릿속에 생각을 주입해 놓고서도 여기 남겨놓고 떠나서 다른 데 가서 문제를 일으키지. 우리는 모두 여기서 함께 나가야 해.”】
【해나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킵과 나는 둘 다 국제적인 사생아야. 한 곳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곳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이지. 평생 우리 고향에 돌아가려고 하거나 거기서 멀어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어. 킵은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거지."】
【사람은 낙타와 같은 속도로 걷죠. 시속 4킬로미터. 운이 좋으면 타조 알을 발견할 수도 있었지요. 불운하다면, 모래폭풍이 모든 걸 지워버릴 수도 있었고.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속 걸었습니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죠. (...)주님이 안전을 길동무로 보내주시기를. 매독스는 이렇게 말했었죠. 작별 인사. 손짓. 오직 사막에만 신이 있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인정하고 싶었습니다. 이 사막 밖에서는 오직 무역과 권력, 돈과 전쟁만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