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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읽는가 - 서울대 교양강의 ‘동서양 명작 읽기’
서영채 지음 / 나무나무 / 2021년 11월
평점 :
도서관에 갈 때마다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꼭 구경하는데 거기서 이 책을 발견했다. 예쁜 초록색 표지가 눈길을 끄는 새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새 책을 읽는 경험은 흔치 않기에 냉큼 빌려왔다.
이 책은 서울대 교양강의 '동서양 고전 읽기'를 정리한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 마담 보바리, 호밀 밭의 파수꾼 등등 유명한 고전을 다루고 있다. 학생들이 해당 주차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면 이 책의 저자인 교수가 그 독후감을 읽고 의견을 나누면서 강의가 시작된다. 교양 강의라고 해서 간단한 내용일 줄 알았는데 상징계, 상상계 이런 얘기도 나오고 아난케, 에로스 이런 단어도 등장한다. 문학 분석에 이미 익숙한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이 필요없겠으나 문학 읽기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나한테는 딱 필요한 책이었다.
나는 그동안 비문학 위주의 독서를 해왔다. 소설을 읽더라도 스토리 라인이 단순한 책들만 읽었고 소위 말하는 고전이나 조금 난해한 소설들은 잘 읽지 못 했다. 문학 작품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작가가 말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상상하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토니오 크뢰거』에 관한 부분이다.
「여러분의 글을 읽으며 의아했던 게 있어요.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토니오 크뢰거가 한스와 잉에를 만나잖아요? 두 사람이 커플이 되어 나와요. 그런데 그 둘은 주인공 토니오를 알아보지 못해요. 토니오는 두 사람을 바로 알아보는데, 그 둘은 토니오를 보고도 누군지 '모른다고? 이상하지 않았어요? 이 대목에 대해 이상하다고 쓴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이상했어요. 헤어진 지 너무 오래돼서 못 알아보나요? 토니오가 한스를 만난 것은 만 열네 살 때, 잉에를 만난 것은 만 열여섯 살 때, 그러니까 중· 고등학교 시절이에요. 현재 토니오의 나이는 서른 근처로 되어 있어요. 토니오가 고향을 떠난 지 불과 13년 만이에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못 알아봐요? 이상하지 않아요?」
네? 소설가가 두 사람이 토니오를 못 알아본다고 썼으면 못 알아본 거 아닌가요?
그렇지만 저자는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소설가가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전부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소설 속에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이다. 숨겨진 것을 상상하라! 이렇게 간단한 진리를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그 이후로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쓰여지지 않는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소설에서 남편이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과거 연인이었던 여성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 부인이 응접실로 들어오고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난다. 여기서 멈칫. 부인은 분명히 응접실 밖에 서서 남편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거기에 대해 쓰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소설에서는 어떤 여성이 다른 남성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남매 같은 사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남매 같은 사이라면서 그 남성이 집을 떠났을 때 그렇게 운다고? 하지만 그 여성은 독자들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소설의 끝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예전 같았으면 '깜놀, 대박' 이랬을 텐데 작가가 숨겨놓은 부분을 어느 정도 추측한 나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왜 읽는가>를 읽고 나서 문학 작품을 보는 눈이 크게 달라져서 요즘에는 책을 볼 때도, 영화를 볼 때도 '말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고는 한다. 그런데 나한테 변화를 준 이 내용은 이 책의 내용 중 아주 지엽적인 부분에 속하고 실은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인상 깊었던 부분 위주로 정리를 해 본다.
▶ 존재론적 간극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도 허무함은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이름을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솔로몬 왕조차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할 정도였으니, 솔로몬 왕보다 더 대단할 수 없는 인간들이 느끼는 허무함은 오죽 하겠는가.
하지만 솔로몬 왕에게는 그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 있었다. 바로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다. 근대 이전의 세계라는 것은 그런 시대를 뜻한다. 신이 인간을 위해 이 세계를 창조했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완벽한 원리에 따라 이 세계가 돌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1609년,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한다. 망원경으로 본 우주는 완벽하지 않았고, 달 표면은 울퉁불퉁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짜 세계'가 갑자기 눈 앞에 당도한 것이다. 완벽하다고 믿어왔던 세계는 완벽하지 않았고,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별일 뿐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뭐지? 나는 왜 존재하는 거지?
이렇게 근대성에 눈을 뜬 인간들은, '그동안 세계라고 믿었던 것'과 '진짜 세계', '나라고 생각했던 자아'와 '진짜 자아'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간극이다. 그것은 '진짜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말한다. 거기서부터 모든 불안이 생겨난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간극이 낳은 깊은 회의주의와 공허함을 다룬다. 흔히들 소설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신이 없어진 자리에 뭘 채워넣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사람들이 찾은 해답은 행복이다. 우리는 뭘 위해서 살아가는가?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아쉽게도 행복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여기에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이고 이긴 자가 주인, 진 자가 노예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상태는 영원할 수 없다. 주인 마음 속에서는 저 노예가 언젠가는 다시 싸움을 걸어올텐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두려운 마음은 노예의 정신이다. 즉, 현실에서는 주인이지만 마음은 노예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노예의 마음 속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왜 저 인간은 주인이고 나는 노예여야 하지? 한 판 더 붙으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들이받아, 말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노예라는 신분 제약에 묶여있다. 즉, 강인한 정신을 가졌지만 현실은 노예다.
저 위에 언급한 존재론적 간극은 '불안함'을 야기하고, 주인과 노예로 나누어진 자아는 '불행함'을 야기한다. 어째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내 마음 속에도 노예와 주인이 동시에 존재하고 그래서 때때로 불행함을 느낀다.
▶ 타자의 시선
소설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향해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다. 이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시선'이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과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을 내제화해서 그 렌즈를 통해 나를 본다. 내 안에 들어와있는 타자의 시선, 그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날 문득 가슴 한구석이 시린 순간이 찾아온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맞나? 내 안에 있는 타자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인간은 흔들린다.
「사람은 누구나 배우라는 거죠. 사회적 배역을 수행하는 배우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거예요. 진짜 관객은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는 타자의 시선이죠. 자기가 배우라는 사실을 보통 때는 잊고 살다가 어느 순간 문득 깨닫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건 연기가 잘못됐기 때문이에요. 몰입에 문제가 생긴 거죠.」
이런 이야기들을 펼치다가 마지막에 '왜 읽는가, 무엇을 읽을까, 어떻게 읽을까'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책이 두꺼운 이유가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의여서 반복하는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 형식이라는 특성 때문에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거기에 나오는 걸 한 권도 안 읽는 나 같은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이건 빌려 읽을 책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바로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앞으로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