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공식품 :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를 읽으면서 먹는 걸 살 때 원재료명을 꼭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침에 먹은 서울우유 플레인 요거트는 원재료가 우유랑 유산균으로 굉장히 단순했다. 그런데 냉장고에 굴러다니고 있던 또 다른 요거트 원재료에는 젤라틴, 유화제 같은 성분이 적혀있었다. 원재료가 단순하지 않아서 그런가 왠지 맛도 별로인 것 같고. 엄마도 나도 그 요거트에는 손이 안 가서 서울우유 요거트만 먹었다.


저녁에는 올리브영에 들렀다. 세일한다길래 뭐 살 거 있나 해서 들른건데 살 게 없었다. 립스틱도 파운데이션도 흥미를 잃은지 오래. 다만 바디로션 같은 거 세일하면 하나 사려고 했는데 검색해보니까 쿠팡에서 사는 게 훨씬 쌌다. 마실 거라도 사볼까 해서 냉장고쪽으로 향했다. 맥주랑 얼그레이 하이볼이 세일 중이길래 두 개를 들고서 원재료명을 확인했다. 얼그레이 하이볼에는 주정, 백설탕, 오크칩, 구연산, 향료 등이 들어있었다. 오크칩이 뭔지 몰라서 검색해봤더니 하이볼 향 낸다고 집어넣는 원재료인 듯 싶었다. 되게 건강한 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못먹을 화학약품은 없는 것 같아서 일단 하이볼은 겟. 맥주의 원재료명을 봤는데 얘는 훨씬 복잡했다. 일단 내가 잘 모르는 화학약품의 이름이 보였다. 


네이버 검색해보니 얼그레이 하이볼은 엄청 맛없다는 불호평이 많고 맥주는 맛있다는 평이 많았는데 나는 하이볼을 구매했다. <초가공식품>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원재료명 따지면서 음식을 구매하는 일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으나 일단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음식이 아닌 음식'을 구매하기가 매우 꺼려졌다. 하이볼이랑 같이 먹을 과자도 사지 않고 집에 와서 한라봉이랑 호두를 으적으적 씹어 먹는 중이다. 평소 같았으면 봉지과자를 까놓고 하이볼을 즐겼을텐데 말이다. 한라봉과 호두는 음식이고, 온갖 화학 약품을 버무려놓은 과자는 '음식이 아닌 음식'이라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과자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요지는 이렇다. 인간은 스스로 먹는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조절 기제를 타고 태어난다. 그래서 신체는 자신에게 맞는 적정한 몸무게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초가공식품의 등장 이후로 비만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초가공식품이 칼로리가 높다거나 지방 함량이 높다거나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초가공식품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즉 실험실에서 탄생한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초가공식품은 인간의 섭식 조절 능력 자체를 고장낸다. 그리하여 초가공식품에 중독된 인류는 '음식 아닌 음식'을 끝없이 갈망하게 된다는 것.


이런 식의 주장에 또다른 반론이 있을 수도 있으나, 내가 직관적으로 느끼기에는 이 책의 주장에 일견 타당성이 있다. 인류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실험실에서 탄생한 분자들을 먹는 게 몸에 뭐 그리 좋을 게 있을까. 가습기 살균제 사건 때도 느꼈고, 더 멀게는 방사선의 위험성을 모르고 방사능 음료를 판매한 사건에서도 느끼지만, 나는 일단 너무나 새로운 것에는 경계심을 갖는 편이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도 제로 열풍에 늘 의심을 품고 있었다. 콜라가 몸에 나쁘면 콜라를 끊어야지, 그걸 대체해서 제로 콜라를 먹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는 어쩌다가 탄산음료가 먹고 싶으면 차라리 오리지널을 마신다. 설탕은 그래도 자연에서 뽑아내기라도 하지, 단맛을 내지만 칼로리는 없는 저 성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선뜻 손이 안 간다. 평소에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이 책의 주장에 더욱더 감화가 되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제로 음료는 불신하면서 과자 중독자로 살았던 나, 정말 모순덩어리였다...ㅠㅠ)


요즘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도 그렇고 아주 친하게 지내는 지인도 그렇고 다들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먹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각자 주장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공통점은 딱 하나. 질 좋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들 왜 이렇게 먹는 걸 신경쓰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조금만 신경을 놓으면 안 좋은 음식들을 먹기가 너무 쉬운 환경에 놓였기 때문인 듯 하다. 나만 봐도 그렇다. 요리하기가 싫으니까 온갖 화학 약품이 들어있는 밀키트를 사먹고, 밥 대신 과자를 먹는 일도 다반사였으니까.


먹는 걸로도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말이 있다. 건강하게 살려면 약에 기댈 생각하지 말고 먹는 것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어차피 평생 살 수는 없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데 식생활이 망가지면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과자는 끊을 수 없겠지만 밀키트는 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 하기 싫으면 야채 삶고 고기 구워서 소금 뿌려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한해 목표는 가짜 음식 말고 진짜 음식으로 내 몸을 만드는 것. 초가공식품을 싹 끊을 수는 없지만(과자 없이 살 수는 없다ㅠㅠ) 서서히 멀어지고 싶다. 음식 아닌 음식들, 그동안 즐거웠고 앞으로는 적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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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를 빡세게 해보고 싶어서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를 주문했다. 경험상 이런 류의 책은 링제본을 해야 확실히 보기 편하다. 두께 때문에 두 권으로 나눠서 제본한다길래 얼마나 두껍나 했는데...진짜 두껍기는 하다. 제본 안 했으면 무거워서 들고다니지도 못할 뻔 했다.

어쩐지 너무 두껍고 어려워 보이는 책이라 한동안 거리두기를 하다가 어제 처음으로 책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도저히 집에서는 공부 못할 것 같아서 카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스타벅스 가서 톨 사이즈 따뜻한 아메리카노랑 잉글리시 스콘을 주문했다.


커피랑 빵을 때려넣었는데도 너무 집중이 안 되어서 챕터1을 간신히 끝마쳤다. 처음에는 간단(?)해보이는 단어 10개 정도로 시작하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단어로 가지치기 해나간다. 머언 옛날에 수능 영어 공부 열심히 했었는데ㅋㅋㅋ세상에 이렇게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이 튀어나오니까 새삼 충격 받았다. 세상은 넓고 외워야할 영어 단어는 무지하게 많다. 그래도 어원을 중심으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챕터1에서 그나마 익숙했던 단어는 A misogynist(여성 혐오자) 하나였다. 페미니즘 관련되어 아주 많이 등장하는 단어여서 나도 모르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추측할 수 있듯이, 'mis-'는 그리스어 misein(=미워하다)에서 파생되었고 gyne은 여성을 뜻하며 '-ist'는 보통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접미어이므로, A misogynist가 여성을 싫어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걸 쉽게(?) 유추해낼 수 있다.


A philanthropist도 보자. 'Phil-'은 뭔가를 좋아한다는 뜻, anthropos는 인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들, 박애주의자라는 뜻이 완성된다. 독지가, 자선가라는 뜻도 있다. 의미는 참 좋은데 이거 발음하기 무지 어렵다. F 발음이 L 발음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TH 발음으로 연결된 후 P 발음을 내뱉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다. 나는 영어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저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뿐이라서 굳이 발음까지 공부해야 하나...? 싶었지만 열심히 연습했다. 안 되는 발음도 연습 하다보면 은근히 쾌감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독지가'라는 단어의 정확한 한자어 뜻이 뭘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네이버 한자사전 들어가서 검색했다. '篤 도타울 독/志 뜻 지/家 집 가'를 써서 [1. 마음이 독실(篤實)한 사람, 2. 사업(事業)이나 공공(公共)의 일에 특(特)히 마음을 쓰고 협력(協力)ㆍ원조(援助)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1번보다는 2번 뜻을 주로 사용하는 듯 하다. 연말연시가 되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지가의 후원' 이런 류의 기사 제목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는데, 독지가의 '독'이 '도타울 독'이라는 걸 어제 처음 알았다. '도타울 독'은 또 언제 사용할까.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할 때 '독실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데 '독실'의 '독'이 바로 '도타울 독'이라고 한다.


언젠가 '나는 한자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심지어 신문이나 책에서 중요한 단어는 한자로 표기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가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했다가는 꼰대 소리 듣는다'는 답변을 들었다.(심각한 분위기가 아니라 둘 다 농담처럼 던진 소리였다) 어쨌든 나는 한자를 좀더 많이 알고 싶다. 책을 보다가, 뉴스를 보다가, 저거는 무슨 한자를 쓰는 단어지? 이런 생각이 들면 네이버 사전을 찾아본다. 영어 단어를 공부할 때 어원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한국어 실력을 늘리려면 어느 순간 한자가 필요해진다.


오늘은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 챕터2를 공부해야 하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좋은 책인 건 알겠는데 솔직히 나한테는 좀 어렵다ㅋㅋㅋㅋ. 이 책 앞에 보면 "매일 적어도 하나의 레슨을 공부하세요. 여건이 허락하는 한 하루라도 건너뛰면 안 됩니다."라고 쓰여 있는데...건너뛰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공부해야지. 책을 구매했고, 링제본을 했다는 것은 재판매가 안 된다는 뜻.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품에서 이 책을 끝장내야 한다. 당분간 커피와 달달한 빵의 힘을 많이 빌려야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발음기호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사전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발음기호는 아무리 봐도 제대로 못 읽겠는데(그래서 꼭 발음듣기를 눌러서 소리로 들어봐야 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발음기호를 보면 읽힌다! 이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발음기호를 눈으로만 봐도 어떻게 읽는지 대충 짐작이 가니까 좀더 자신감 있게 단어를 공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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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3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한자를 익히려면 옥편을 뒤적일 줄 알아야 했지만,
요새는 네이버사전만으로도 누구나 쉽게
한자를 살필 뿐 아니라, 한자 밑말(어원)까지
한눈에 찾아볼 수 있더군요.

한자는 굳이 따로 가르치기보다는
네이버사전으로 넉넉하다고 느껴요.

이보다는 우리말 말밑(어원)을
사람들이 제대로 살피고 익혀야
비로소 영어 말밑과 한자 말밑도
왜 그러한 결인지 알아차릴 만하지 싶습니다.
 

오늘도 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은 눈이 참 자주 내린다. 나는 추운 건 좋은데 눈 내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 팍팍팍 빠르게 걷고 싶은데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슬로우모션처럼 걸어야 하는 게 별로다. 그래서 올겨울에는 산책을 많이 못 했다. 그래서 살이 찌기 시작한 건가. 나가서 걷고 싶은데 길이 너무 질퍽거려서 걷기가 참 애매하다.


창밖을 보다가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하면 캐나다, 캐나다 하면 가마슈 경감 시리즈라는 단순한 발상이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여름이 배경일 때도 있고, 겨울이 배경일 때도 있는데 나는 이 시리즈와 찰떡궁합인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한다. 스리 파인스(사건이 주로 벌어지는 마을)에는 눈이 내려줘야 제맛이다.


눈 내리는 날, 스리 파인스의 비스트로에 모인 동네 사람들. 그들은 카페오레나 핫초코를 한 손에 들고 정답게 대화를 나눈다. 물론 살인 사건 이야기일 때가 많지만ㅋㅋㅋ. 


이번 사건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스리 파인스에서 늙어 죽는 사람은 없는 거야? 살인마저도 평범하지 않잖아. 그저 한 대 후려치거나 서로 찌르거나 총이나 몽둥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야? 아니다. 언제나 난해했다. 복잡하기까지 했다. 전혀 퀘베쿠아답지 않았다. 퀘베쿠아는 거침없고 명쾌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얼싸안았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면 머리를 후려치면 될 뿐이었다. 퍽. 끝. 유죄. 다음. ‘이건가?’, ‘이게 아닌가?’ 따윈 없다. 빌어먹을.


스리파인스를 묘사하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웃기고 좋다ㅋㅋ. 나야 소설이니까 읽는 거지만, 진짜로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매번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동네를 다 떠나고도 남지 싶다. 작고 아름답지만 너무나 무서운 마을...그곳이 스리 파인스다.


만약 살인 사건이 없다면 그런 마을에 살고 싶느냐 하면 그것도 글쎄. 생각은 좀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작은 마을, 작은 공동체가 갖는 폐쇄된 분위기를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리 파인스를 너무나 사랑한다.


매주 토요일마다 벌어지는 같은 주제의 대화였다. 해변으로의 여행 상품 비교, 캐리비안 크루즈 여행 상품 고르기, 산 미겔 데 아옌데와 카보 산 루카스, 또는 바하마 대 바베이도스에 대한 논쟁. 끝을 모르고 내리는 눈과는 거리가 먼 이국적인 장소들. 하지만 여행이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실제로 떠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가브리는 그 이유를 알았다. 머나, 클라라, 피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의 이론은 달랐다.

"다들 게을러터져서 그런 거야."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가브리는 카페오레를 홀짝이며 시선을 벽난로 속 타오르는 불길에 둔 채 익숙한 리듬을 타는 익숙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스트로 안을 둘러보았다. 대들보, 넓은 널로 깐 바닥, 중간문설주가 달린 창문, 통일성을 무시하고 배치된 편안하고 오래된 가구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스리 파인스보다 따뜻한 곳은 없으리라.


현실에서는 이런 마을에서 살아볼 일이 없어서 그런 건지, 루이즈 페니 소설에 등장하는 스리 파인즈의 분위기를 너무 사랑한다. 특히 겨울 배경 문장들이 좋다. 바깥이 너무나 춥기 때문에 실내가 대조적으로 더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고, 이따금 멈춰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입김을 불어 가며 대화하는 모습이 꼭 만화 속 등장인물들이 말풍선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몇몇은 카페라테를 마시러 올리비에의 비스트로로 향했고, 몇몇은 신선한 빵이나 과자를 사러 사라네 블랑제리 빵집으로 갔다.


피터와 클라라는 비스트로에 가는 동안 마주친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웠다. 두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물어뜯곤 했던 낡은 털모자 대신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들어있었던 새 모자를 쓰고 있어서 옛 모자에 익숙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들은 겨우내 모자에 달린 털실 방울을 가만히 놓아두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울 대신 양초처럼 머리 꼭대기에 심지만 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만약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마을에 가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면 나는 겨울의 스리 파인스를 택해야겠다. 눈발을 해치면서 올리비에의 비스트로로 들어가 카페오레를 주문하고 머나의 헌책방에 들러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추천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눈 오는 겨울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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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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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뒤따라온 의혹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사랑에...>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자녀를 둔 부모가 쓴 책이다.(진짜 좋고 의미있는 책이다!) 거기에 바로 이 책 <암 : 만병의 황제의 역사>가 여러 번 인용되었길래 도대체 암이라는 병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지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되었다.(부끄럽게도, 백혈병이 암의 일종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나는 암이라는 병에 대해 무지했다.)


이 책은 암과 관련된 방대한 분야를 다룬다. 암이라는 병 자체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암 치료법의 역사, 미국 정부로부터 암 관련 예산을 따냈을 당시의 일화들, 암의 원인과 예방, 암 환자들이 겪는 고통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책이 워낙 두꺼운 데다가 암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어떤 부분은 조금 스킵하면서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재밌고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인데 이 정도의 책을 써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 저자가 쓴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져서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항암제를 발견하고 그걸 환자들에게 적용해가는 여정이었다. 그걸 이해하려면 다시 백혈병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미성숙한 백혈구가 엄청나게 많이 증가해 문제를 일으키면 백혈병이다. 통제할 수 없는 비정상적 세포 증식이라는 암의 특성이 백혈구에 나타난 것이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ALL)은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데 과거에는 치료할 방법이 없어 대부분 사망했다고 한다.


백혈병을 치료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액체 형태의 암이기 때문이다. 1890-1900년대, 종양을 잘라내거나(=절제술) 종양을 태워버리는(=방사선 치료) 시술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백혈병처럼 혈액에 생기는 암은 잘라낼 수도 태워버릴 수도 없었다. '백혈병은 그것에 처방할 약물이 아예 없는 내과의사들과 혈액을 수술할 수는 없는 외과의사들이 포기한, 고아나 다름없는 질병'이었으며 '질병들의 국경선상에 사는, 분야와 분과 사이에서 숨어 지내는 추방자'였다. 형태가 없는 암은 수술이나 방사선으로 치료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약물로 치료할 수는 없을까?


1928년, 영국 의사 루시 윌스는 인도 방직 공장 노동자들 중 출산한 여성들이 심각한 빈혈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빵에 발라먹는 효모 식품인 '마마이트'를 먹이면 그러한 빈혈 증상이 완화되었다. 정확히 '마마이트' 속 어떤 성분이 그러한 효과를 가져오는지는 나중에 밝혀졌다. 혈액 생성에 필수적인 성분 중 하나인 엽산이었다. 1940년대, 어린이 병원에서 일하는 시드니 파버라는 이름의 의사는 바로 이 엽산에 주목했다. 피 생성, 혈액, 골수, 엽산...이런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에게도 엽산을 먹여보면 어떨까? 결과는 대실패였다. 엽산을 투여한 환자들 몸에서 백혈구 수가 두 배로 증가했다. 엽산은 백혈병 세포를 촉진시키는 것이 분명했다. 


요즘 같았으면 백혈병 환자들에게 엽산을 투여해서 백혈구 수가 두 배로 증가한 시점에서 시드니 파버는 병원에서 쫒겨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40년대였고, 백혈병은 어차피 치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위험한 실험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 당시에는 새로운 약물을 임상시험할 때 환자 측의 동의를 받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서 다행인, 무서운 시절이었다. 시드니 파버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엽산이 아이의 백혈병 세포 생산을 가속시켰다면 반대되는 다른 물질, 즉 항엽산제를 투여하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즈음 다른 과학자가 엽산의 길항제(=대항제)를 발견했다. 시드니 파버는 테로일아스파르트산(PAA)이라고 불리는 항엽산제를 받아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 투여했으나 기대할 만한 반응은 없었다. 그러던 중 '아미노프테린(=메토트렉세이트)'이라는 새로운 항엽산제가 파버에게 도착했다. 그걸 백혈병 환자에게 투여했는데 놀랍게도 백혈구 숫자가 거의 정상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사건은 화학물질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걸 밝혀낸 최초의 사례였다.


이러한 발견은 백혈병 환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소식이 아니었다. 다른 분야의 암을 치료하는 의사들 역시 새로운 치료법이 절실하던 때였다. 암에 대해서는 절제술도 방사선 치료도 모두 한계가 분명했다. 두 치료법은 국소 종양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이미 전이된 암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방사선 치료는 방사선 자체가 암을 유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더 공격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암은 전신 질병이고, '전신 질병에는 전신 치료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화학요법의 등장은 또 하나의 구세주였다.


항엽산제가 항암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 후로도 여러 가지 항암제들이 등장했다. 그 발견 과정이 다소 충격적이다. 전쟁 때 화학 무기로 쓰였던 머스타드 가스가 항암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머스타드 가스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심각한 피부 손상을 겪으며 사망했다. 이 사람들의 골수를 검사해보니 대개 혈액에서 백혈구가 사라지고 골수가 말라붙은 상태였다. 의사들은, 멀쩡한 사람의 골수를 말라붙게 하는 독약이 비정상적인 백혈구 증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치료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의사들은 머스타드 가스를 환자에게 실험했다. 다른 신체 기관의 손상을 막기 위해 반드시 정맥을 통해 조심스럽게 주사해야 했다. 림프종을 앓고 있던 남성에게 머스타드 가스를 투여했더니 증상이 완화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6-MP라고 불리는 독성 강한 물질이 백혈병 환자들의 증상을 완화해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또 다른 독극물이자 항암제인 빈크리스틴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항암제는 그야말로 약보다는 독에 좀더 가까운 화학 물질이다. 사람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만들지 않고서는 암 세포를 없애기가 어렵다. 암 세포는 그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이 정도 독한 약물로 치료를 했는데도 환자들의 암은 계속해서 재발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여태까지 항암제로 밝혀진 약물들을 섞는 것뿐이었다. 메토트렉세이트, 프레드니손, 6-MP, 빈크리스틴 등을 적절한 용량과 적절한 순서로 섞어서 환자들에게 투여했다. 투여 약물의 머릿글자를 따서 VAMP, MOPP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초기 칵테일 요법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치료된 듯 보였으나 곧 재발했다.


혹시 투여한 약물의 용량이 너무 적었던 건 아닐까? 투여 기간이 너무 짧았던 건 아닐까? 도널드 핑컬이라는 종양학자는 '전면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메토트렉세이트를 척추에 투여하면서 뇌에는 고선량의 엑스선을 쏘고, 그 후에도 고용량의 약물을 환자가 견딜 수 있는 최대치로 오랜 시간 투여해보면 어떨까. 그 결과는 뜻밖에도 좋았다. 이 과정을 모두 견뎌낸 환자들의 재발률이 낮아졌다. 


여러 가지 약물을 섞어서 투여하고, 암이 없어진 것 같아보여도 좀더 확실하게 치료하는 것이 항암의 표준으로 서서히 자리 잡은 듯 보인다. 이러한 치료법이 마련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과 희생이 있었다. 암을 정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굴복하지는 않으려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러한 과정들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현재 암이라는 병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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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다. 시간이 참 잘 간다. 시간이 흐르는 게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 그 시간들을 잘 견뎌냈다는 뜻이니까, 한편으로는 달력이 넘어가는 게 뿌듯하기도 하다. 예전에 투병하시는 분이 그린 인스타툰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나이 많은 어르신을 보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건 그 나이까지 죽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니 많은 게 달리 보였다. 나이 먹는 게 딱히 슬프지 않다. 아프지 않고 꺾이지 않고 2025년을 맞이한 나 자신, 대견하다.


어제는 시사인 전자책을 구독해볼까 싶어서 시사인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뉴인(NEW 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사인 전자책을 구독하면 월 12,000원인데 뉴인을 구독하면 월 9,900원에 시사인 최신 기사들을 전부 볼 수 있다는 것. 시사인 기사들을 굳이 책의 형태로 볼 필요가 없는 나에게는 상당히 합리적인 서비스였다. 바로 구독 결제! 주간지 기사의 긴 호흡을 좋아하는 편이라 예전부터 시사인을 좋아했는데 뉴인 서비스 괜찮으면 이걸로 정착해야겠다. 종이 잡지 쌓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딱인 것 같다.


어제는 또 당근 거래를 열심히 했다. 안방 침대를 무료나눔으로 올려놨는데 깨끗한 상태가 아니여서 그런지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실 이런 큰 가구는 운반 가격이 문제다. 용달차 부르면 못해도 20-30만원은 나올텐데 그 돈 주고 이렇게 낡은 침대 가져가느니 사는 게 낫겠다고들 생각하는 듯 하다.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어제 연락이 왔다. 외국인이었다. 이 외국인은 대뜸 영어로 매트리스만 가져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날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던가? 에라 모르겠다, 나도 영어로 대화했다. 매트리스만 가져가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사이즈가 크니 차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신은 혼자고 이걸 들고 버스를 타겠다는 거다ㅋㅋㅋㅋㅋ내가 말했다. 절대 안 된다고, 이거 혼자서는 들지도 못한다고, 버스에 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 외국인은 자신의 집에 아무 것도 없으며 오늘 당장 매트리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그 사정은 이해하는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싱글 매트리스를 구해보는 게 낫지 우리집 매트리스는 당신에게 적합한 물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느 정도 수긍했는지 다른 물건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휴...미리 말 안 했으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이 동네는 서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수도권인데 몇 년 전부터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요즘에는 외국인이 정말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당근 거래 하는 외국인들도 꽤 만났다. 예전에 냄비 나눔글 올렸었는데 그거 받아간 사람도 외국인이었다. 한국말 너무 잘해서 얼굴 보기 전까지는 외국인인지도 몰랐다. 오늘 침대 가져간다는 이 분은 한국에 처음 온 사람인건지 한국말을 못하고 냅다 영어로....;; 그나저나 이분이 문장 끝에 sir/ma'am 붙이는 건 별로였다. 내가 그 사람 상관도 아닌데, 당근에서 무료나눔을 하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갑자기 불편해졌다. 예전에 인도 여행할 때 그쪽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말할 때 꼭 sir 혹은 ma'am을 붙였던 기억이 떠올랐다.(부자들은 당연히 예외ㅋㅋ)이 외국인도 혹시나 그쪽 계통인 걸까. 뼛속 깊이 깔린 계급 의식을 느낄 때마다 나는 불편해진다. 그나저나 방에 매트리스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데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보내나 걱정이네.


밤에는 장농 정리를 했다. 모아서 아름다운가게에 보내려고 했는데 계획 취소. 아름다운가게는 당장 옷걸이에 걸어서 팔아도 되는 컨디션의 옷들만 받는다고 한다. 세탁이나 수선 과정이 없기 때문에 진짜 깨끗한 옷만 받는다고. 내가 선별한 옷은 그 정도의 컨디션이 아니어서 아무래도 헌옷 수거업체에 연락을 해야할 것 같다. 옷 기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기증을 하고 싶다면 깨끗하게 입고 낡아지기 전에 미리미리 기부할 것. 오늘의 교훈이다.


요즘 보고 있는 책은 <중앙아시아사>. 이 책, 재밌다. 밀리의 서재에서 보고 있는데, 전자책 적립금 쌓이면 구매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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